
우리 교회의 비전인 생명 사역에 대해서 시리즈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생명 사역자의 태도와 5대 사역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지난주에는 상담 사역, 회복 사역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복음으로 사람을 살리고 키우고 고치는 사역에서 이제 고치는에 해당하는 사역입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상처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치유를 받아야 합니다.
지금까지도 노력해 왔지만 앞으로 상담사에게 더욱더 힘을 쓰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좋은 사역자 분을 연결해 주셔서 이 체계적으로 준비를 하고자 합니다.
지난주 당회의 리트릿에서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늘은 또 다른 사역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것은 국내 선교입니다.
우리가 흔히 선교하면 해외 선교를 생각하지 비행기 타고 다른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선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선교를 정의할 때 지리적으로 다른 나라에 가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복음을 들고 사회적 장벽, 문화적 장벽을 넘어가는 모든 사역이 선교입니다.
그러므로 한국 안에서도 얼마든지 선교 사역을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위치한 이 수성구를 넘어서 다른 지역, 다른 계층, 다른 문화의 이들에게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도 선교입니다.
농촌 지역과 같은 특수한 상황, 보육원, 미혼모와 같은 특수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섬기는 것도 선교입니다.
이것을 해외 선교와 구분하기 위해서 편의상 국내 선교라고 부를 수도 있겠습니다.
코로나 이후에 사회가 양극화되고 있습니다.
잘 사는 사람은 더 잘 살게 되고 힘든 사람은 더 힘들게 되었습니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이지 대형 교회는 더 커지고 소형 교회는 더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우리 교회는 코로나 이전보다 더 많은 분들이 모이고 계십니다.
교회의 재정도 코로나 이전보다 20% 이상 늘었습니다.
이것은 절대로 당연한 일이 아니고 저절로 이루어진 일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이고 많은 분들의 기도와 헌신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대형 교회가 그냥 가만히 있으면 성장하는 줄 압니다.
큰 착각이지요.
우리 교회 교육자들과 성도님들이 얼마나 헌신적인지 모르는 말입니다.
동신교회 성도 하는 것도 힘든데 동신교회 중직하는 것, 순장으로 섬기는 것은 정말로 큰 헌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성도들이 성령 충만함 가운데 기쁨으로 헌신하기 때문에 우리 교회가 생명 사역을 감당하는 줄로 믿습니다.
더 이상 부흥을 말하지 않는 시대에 하나님의 부흥을 경험하는 것은 너무나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우리의 마음 가운데 무거운 책임감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많은 교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 교회는 부응하고 있는데 지역의 많은 교회들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재정적인 어려움, 사역적인 어려움, 구조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다른 교회들은 다 힘들어 하는데 우리만 평안하다고 마냥 기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공의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2장 48절 함께 읽겠습니다.
무릇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오,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아멘.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많이 받은 것은 좋은 일입니다.
나 혼자서 이렇게 많이 누릴 수 있으니까 좋은 일이죠.
하지만 하나님의 공의를 기억한다면 많이 받은 것이 꼭 좋은 일만은 아닙니다.
그만큼 감당해야 하는 책임도 막중하기 때문입니다.
많이 받은 자에게 많이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기억해야 합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기억해야 하고 또한 교회적인 차원에서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신 것은 우리만 특별히 더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만큼 다른 사람도 사랑하시고 다른 교회도 사랑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이렇게 큰 은혜를 주신 것은 우리 교회를 통해서 행하기 원하시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이것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성숙한 신앙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은 우리 교회가 어떻게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고 국내 선교 사역을 감당할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선교적 교회의 아름다운 모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스테반의 순교로 예루살렘 교회가 이제 큰 박해를 받았습니다.
로마 정부와 유대인들의 박해를 받은 제자들이 소아시아 전역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중에서 안디옥에 이른 제자들은 언어와 문화를 넘어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행전 11장 20절, 21절에 나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아멘.
당시 안디옥은 아주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전략적인 지역이었고, 시리아 지역의 수도 역할을 했습니다.
로마 제국이 엄청나게 컸거든요.
로마 제국 전체에서 안디옥은 세 번째로 큰 도시였습니다.
로마 알렉산드리아 그다음에 안디옥이었습니다.
다 인종 다 문화가 모인 대도시 영어로 하면 매트로폴리스였습니다.
박해를 피해서 그곳에 이른 제자들이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이방인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안디옥 교회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안디옥 교회의 리더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교회를 설립했던 바나바 사울을 비롯해서 총 5명의 리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1절 함께 읽겠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아멘.
첫 번째 리더는 바나바였습니다.
그는 구브로에서 온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냥 유대인이 아니라 레위 지파에 속한 레위인이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명문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성경은 바나바를 가리켜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다라고 말씀합니다.
믿음도 좋고 성품도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회개한 사울을 변호할 수 있는 영적인 권위가 있었습니다.
바나바가 없었으면 아마 사울도 없었을 것입니다.
앞장서서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 회개했다고 했을 때 그 말을 믿어줄 사람은 없었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변호해 주고 세워주었기 때문에 그가 이방인의 사도로서 놀라운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다윗이 요나단을 보호해 주고 다윗을 보호하고 세워주었던 요나단의 모습과도 마찬가지겠죠.
다윗이 골리앗을 무찌르고 이스라엘의 영웅이 되었을 때에 요나단이 그를 사랑했습니다.
성경에 보면은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의 생명과 같이 사랑했다고 말씀합니다.
너무나 사랑해서 자기의 겉옷과 칼을 주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옷은 신분과 정체성을 의미합니다.
요나단이 자기의 겉옷을 주었다 하는 것은 왕자의 신분을 다윗에게 준 것입니다.
또한 당시 이스라엘은 청동기 사회였기 때문에 칼이 귀했습니다.
이스라엘 전체에서 칼을 가진 사람은 사울과 요나단밖에 없었습니다.
나라 전체에 칼이 두 자루밖에 없었는데, 그중에 하나를 다윗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언약을 맺었습니다.
이 모습은 정말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사용하시는 사람을 보고 희귀한 것이 아니라 사랑했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만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중심적인 사람, 이기적인 사람은 절대로 이러한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자 요나단은 자기가 왕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았습니다.
그의 관심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에 있었습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의 최대 라이벌은 다윗이었겠죠.
요나단이 왕이 되는데 가장 큰 장애물은 다윗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이스라엘 전체에서 다윗을 가장 사랑했던 사람은 요나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를 증명하기 위해서 살지 않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위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런 사람과 같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교회가 이러한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교회를 자랑하고 우리 교회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구약에서 요나단은 사람을 세우는 너무나도 귀한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신약에서 바나바도 동일한 마음으로 그러한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자기를 증명하고 자기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서 헌신했습니다.
바나바와 같은 리더가 있었기 때문에 사울이 이방 선교를 위해서 귀하게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등장하는 안디옥 교회 리더는 니게르라 하는 시의원이었습니다.
여기서 니게르는 라틴어로 피부색이 검다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이었을 것입니다.
다윗 왕 시대 이후에 이스라엘이 북아프리카의 식민지를 개척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 때에 보면 스바 여왕이 예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장면이 나오죠.
그 스바 여왕이 에티오피아 출신입니다.
그 이후로 예수님 시대까지 북아프리카의 식민지가 존재했습니다.
북아프리카에서 온 심의원이라는 사람이 안디옥 교회의 리더가 되었습니다.
피부색도 다르고 인종도 달랐지만 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일원이 될 뿐만 아니라 리더로 세워졌습니다.
세 번째로 등장하는 구레네 사람 루기오도 외국인이었습니다.
루기오라는 그 이름이 로마식 이름이기 때문에 아마도 학자들은 로마인일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로마 사람이 안디옥 교회의 리더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마치 일제시대 때 일본 사람이 한국 교회의 리더가 된 것과 마찬가지이죠.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복음의 능력은 이렇게 놀라워서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한 교회의 리더가 될 수 있었습니다.
네 번째로 등장하는 마나엔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이라고 소개가 됩니다.
여기에서 분봉왕 헤롯은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그는 세례 요한을 처형했던 왕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처형하기 위해서 빌라도에게 주님을 넘겼던 사람입니다.
교회 입장에서 보면 그야말로 철천지원수였습니다.
세례 요한을 죽이고 예수님을 죽인 인물입니다.
그런 인물과 함께 왕궁에서 자란 사람이 마나엔인데, 그 또한 안디옥 교회의 리더가 되었습니다.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죠.
예수님을 박해하고 처형했던 사람과 가까운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안디옥 교회의 핵심 리더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등장한 사람은 사울입니다.
누구보다 앞장서서 교회를 박해했던 사람이 다메석 도상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박해했던 그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헌신했습니다.
안디옥 교회를 이끄는 이 5명의 리더는 이렇게 다양했습니다.
인종적으로도 다양하고 문화적으로도 다양했습니다.
유대인도 있고 로마인도 있고 아프리카인도 있었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도 있고, 예수님을 처형했던 그 왕과 아주 가까운 인물도 있었습니다.
서로 다른 배경에서 온 사람들이었지만 이들은 복음을 위해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한 교회를 이루기 위해서, 그리고 또한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아름답게 하나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교회의 놀라운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교회에는 누구나 다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인종적, 문화적, 정치적 차별이 없습니다.
사회 어떤 계층에서도 교회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모든 사람은 교회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위한 아름다운 연합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서로 사랑할 것을 하나 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 35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아멘.
여러분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이 정도로 중요한 일입니다.
언어, 문화, 인종의 벽을 넘어서 서로 사랑할 때 세상은 우리가 주님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될 줄로 믿습니다.
성령 안에서 강력한 한 해 됨을 이룰 때에 그때 우리는 주님께서 명령하신 선교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하나가 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죠.
우리 안에는 다 다양한 의견, 다양한 생각, 다양한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하나 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는 겸손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강력한 하나 됨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를 비우는 일이 필요합니다.
나를 주장하고 나를 내세우면 하나 됨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하나 됨을 이룰 수가 없다면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그야말로 오합지절입니다.
여러분 병사가 아무리 많아도 오합지졸로 있으면 하나도 무섭지 않습니다.
진짜 강력한 부대는 대장의 명령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부대입니다.
우리의 대장은 남들 위에 군림하는 그러한 리더가 아닙니다.
우리의 대장은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의 겸손을 닮아갈 때 우리는 주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줄로 믿습니다.
자신을 내세우고 자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신 그 예수님을 닮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의 은혜 가운데 안디옥 교회는 놀라운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헌신된 리더, 성숙한 리더인 바나바와 사울이 교회의 영적인 기초를 닦았습니다.
그곳에 1년 동안 머물면서 큰 무리를 가르쳤다고 말씀합니다.
사도행전 11장 26절 함께 읽겠습니다.
만남에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아멘.
안디옥에서 예수님을 믿은 자들에게 별명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 하면 크리스천이겠죠.
기독교 역사에서 성도들이 스스로를 크리스천이라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성도의 모습을 보고 크리스천이라는 호칭을 붙여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세상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에서는 성공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착취하고 다른 민족을 배타적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언어, 문화, 인종과 상관없이 서로를 사랑하고 품어주었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고 서로 사랑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다른 민족을 착취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난한 자와 고아들을 돌봐주었습니다.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세상과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그래서 다른 호칭이 필요했습니다.
세상과 구별되는 호칭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믿고 따르는 그 그리스도를 따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너무나도 자랑스러운 호칭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을 처음으로 들었던 그곳이 바로 안디옥 교회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안디옥 교회는 아주 건강한 교회였습니다.
예배 가운데 놀라운 은혜를 경험한 교회였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따라 전도와 구제에 힘썼습니다.
글라디오 황제 때 큰 흉년이 있었는데 그때 안디옥 교회에서 예루살렘 교회로 구제 헌금을 보냈습니다.
세워진 지 얼마 안 된 이런 새로운 교회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예루살렘 교회를 도와준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영적으로 살아있는 교회였고 헌신된 교회였습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저는 우리 교회가 안디옥 교회와 비슷한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배 가운데 은혜가 넘치고 교육과 훈련에 적극적으로 동참합니다.
그리고 전도와 선교에 헌신하는 아름다운 전통이 있습니다.
그 안디옥 교회에서 성령께서 특별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아멘.
여기서 주를 섬겨라고 하는데, 영어로 보면 주님을 예배했다(worship the lord)라고 되어 있습니다.
금식하면서 특별하게 주님을 예배하는 시간에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따로 세우라라는 헬라어가 아포리저인데요.

그 의미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 택하다 구별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성령께서 바나바와 사울을 특별하게 택하고 구별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사도 바울의 사역에서 아주 중요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바울이 자신의 사명을 설명할 때 이와 동일한 헬라어를 사용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5절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께서 어머니의 태로부터 바울을 택정하셨습니다.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그를 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그 특별한 목적은 바로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복음을 전하는 것은 새로운 종교를 전파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예배의 장소를 전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전에는 로마 신전에서 예배했지만 이제는 교회에 와서 예배해라라고 초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새로운 관계로 초청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는 분,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의 정체성을 말씀해 주시는 분,
우리가 될 수 있는 그 최고의 모습을 미리 보시고 선포해 주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로 초청하는 것입니다.
그 놀라운 사랑의 관계 안에서 우리는 진정한 변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지식이 아니고 종교가 아니고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국제적으로 호평을 받은 영화 중에서 Three Seasons 라는 베트남 영화가 있습니다.

1999년에 개봉한 이 영화에는 일리거를 끄는 하이(Hai)라는 인물과 매춘부 랜(Lan)이라는 여성이 등장합니다.
아리따운 여성 그 랜은 지독하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매춘부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매일 밤 화려한 호텔에서 밤을 보내지만 그녀는 노예 같은 취급을 당할 뿐입니다.
이 가난한 하인은 랜을 사랑했지만 그녀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서 하이는 인력거 경주 대회에 나가서 우승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받은 상금으로 하이는 랜과 함께하기 위해서 화대를 치르고 호텔로 데려갑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랜이 편안하게 하룻밤을 쉴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하이가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그냥 그녀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평안한 밤을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간을 통해서 랜은 자신을 정욕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으로 바라보는 그 경험을 처음으로 하게 됩니다.
그렇게 진정한 사랑을 경험했을 때 랜은 과거의 삶, 매춘부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나를 존귀히 여기는 그 인격을 만날 때 그때 우리는 인생의 가치를 깨닫기 때문입니다.
함부로 죄를 짓는 사람, 내 정욕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자기 인생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그 인격을 만날 때 우리는 인생을 함부로 살 수 없게 됩니다.
23:09
나 같은 죄인 어메이징 그레이스 찬송가를 쓴 존 뉴튼 목사님은 이러한 찬송가를 썼습니다.

'우리의 쾌락과 의무가 전에는 정반대였으나 아름다운 주를 본 뒤로 서로 하나가 되었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거 너무너무 아름답고 놀라운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우리 안에는 두 마음이 싸우고 있었습니다.
육체의 쾌락을 따르고 싶은 마음과 도덕적 의무를 다해야 하는 그 마음이 서로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한 이후에 이 두 마음은 하나가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기쁨은 육체의 쾌락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둘로 나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새로운 종교를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사명인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은 바나바와 사울을 택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복음의 사명을 위해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택하시고 구별하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택하신 이들을 이 세상 가운데로 보내십니다.
죄로 타락한 이 세상,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이 세상에 보내셔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만들기 원하십니다.
이렇게 보냄 받은 사람을 가리켜서 선교사라고 부릅니다.
선교적 교회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세상으로 보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 바로 선교적 교회입니다.
미국의 팀 켈러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흩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으로 들어가 사는 것이다.
말씀과 행동으로 섬기며 복음을 전파하며 정의를 시행하는 것이다.
선교적 교회는 사람들을 정의의 집행자로서 세상에 파송하는 교회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주일에 교회에 모여서 예배하고 기도하는 것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도 귀한 일입니다.
이렇게 모여서 은혜를 경험하고 성령을 경험했다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으로 흩어지는 것입니다.
복음을 들고 복음이 필요한 이 세상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보면 흩어짐 모임, 흩어짐 모임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로 박해가 시작되어서 예루살렘 교회가 소아시아 지역 전역으로 흩어졌습니다.
지리적 경계, 문화적 경계를 넘어서 다양한 지역에 흩어졌습니다.
그렇게 흩어진 중에 안디옥 교회가 세워져서 다시 모이게 되었습니다.
큰 무리가 모여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요충지에 아주 중요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또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바나바와 사울을 보내십니다.
한 곳에 모여 있지 말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세상을 향해서 흩어지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이고 흩어지고 모이고 흩어지는 것은 선교적 패턴인데 사도행전이 증거하고 있는 패턴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했습니다.
다시 금식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바나바와 사울을 파송했습니다.
본문 3절에 나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에 금식하고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아멘.
안디옥 교회는 그들의 가장 중요한 리더 2명을 파송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해서 교회의 기초를 세운 바나바와 사울을 파송했습니다.
이 두 사람을 파송하며 안디옥 교회 성도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기쁘고 행복했을까요? 아니면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있었을까요?
아마 둘 다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기쁨도 있었을 것이고, 또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리더를 파송하는 아쉬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주저하지 않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기쁨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안디옥 교회는 이방 선교의 전진기지로서 아름다운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흩어지는 아름다운 모델을 세워간 것입니다.
여러분 예루살렘 교회는 박해를 받아서 비자발적으로 흩어졌습니다.
하지만 안디옥 교회는 자발적으로 순종해서 흩어지는 귀한 모델을 세워 갔습니다.
모든 사람은 안정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예측 가능한 상황을 원하고 미래를 통제하기 원합니다.
개인의 삶에서도 안정을 원하고, 교회적으로도 안정을 추구합니다.
안정을 추구하는 것이 꼭 나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안정을 추구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가 되면 역동성이 사라집니다.
다이나믹이 사라지죠.
특별히 교회가 지나치게 안정을 추구하면 교회는 제도화됩니다.
이전에도 몇 차례 말씀드린 것처럼 제도와 운동의 차이가 있습니다.

제도(institution)은 규칙과 절차를 강조하고 안정성을 추구합니다.
반면에 운동(movement)는 자발성과 창의성을 강조하고 역동성을 추구합니다.
그러면 제도가 좋은 걸까요? 운동이 좋은 걸까요?
둘 다 좋고 둘 다 필요합니다.
운동으로서의 역동성도 필요하고 제도로서의 안정성도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교회 청년부가 전국적으로 유명한 것은 운동으로서의 역동성을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오래전부터 우리 청년부는 독립 재산제를 운영했습니다.
청년들이 헌금한 돈은 전액 청년들이 알아서 사용할 수 있게 했습니다.
청년들이 필요로 하는 사역을 위해서 스스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당회에서 일일이 간섭하지 않습니다.
물론 재정 감사를 통해서 투명하게 지출되었는지 확인은 합니다.
하지만 최대한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사역을 펼칠 수 있도록 재량권을 줍니다.
청년들이 스스로 헌금해서 스스로 사용할 수 있으니까 헌금액이 상당히 많습니다.
제가 금액을 밝히지는 않겠지만 웬만한 교회 예산 전체에 해당하는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사역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을 때 운동으로서의 역동성이 생깁니다.
그와 동시에 교회에는 제도가 필요합니다.
우리 교회에도 당회가 있고 위원회가 있고 제직회가 있습니다.
다만 주의해야 하는 것은 교회가 제도화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제도화되면 규칙과 절차에 없는 사역은 할 수 없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그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어렵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는 해왔던 사역만 하게 되고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에게 익숙하고 편안한 안전지대 컴퍼 존 안에만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교회는 영적으로 가라앉게 되어 있고 젊은 세대가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안전지대(comfort zone)를 벗어나라고 도전하십니다.
우리끼리 모여서 우리끼리만 좋은 그런 분위기를 탈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까 그들을 향해서 믿음으로 나아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1907년도에 평양에서 대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부흥을 경험한 나라와 부흥을 경험하지 못한 나라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미국과 영국은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 어디를 가도 미국 선교사, 영국 선교사가 많이 있습니다.
반면에 프랑스는 부흥을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프랑스는 선교사도 적고 사회도 매우 세속화되었습니다.
평양 대부흥은 초기 한국 교회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형성하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평양 장대현 교회가 있었습니다.
길선주 목사님의 리더십 아래 성령의 놀라운 그런 역사를 체험한 장대현 교회는 교회 개척 운동을 펼쳐 나갔습니다.

남쪽으로는 남문외교회, 북쪽으로는 창동교회, 동쪽으로는 산정현교회, 그리고 서쪽으로는 서문외 교회를 세웠습니다.
장대현교회를 통해서 평양 지역에 세워진 교회가 50개에 달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역사 부흥을 체험한 교회는 편안하게 있지 않습니다.
내가 경험한 이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바깥으로 나아가고 흩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안전지대 밖으로 나아갈 때 교회는 운동으로서의 역동성을 가지게 됩니다.
정체되고 가라앉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더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지난주 서울에서 GMF 이사회가 있었습니다.
GMF는 복음주의 4인방 목사님들께서 세우신 선교 단체의 연합체입니다.
방송 단체, 훈련 단체, 연구 단체 등 총 11개 단체의 천 명의 선교사님들께서 전 세계에서 사역하고 계십니다.
우리 교회 선교사님들이 많이 사역하는 GMP 단체도 여기에 속해 있습니다.
매년 이사회를 할 때마다 우리 동신교회가 얼마나 귀한 사역을 섬기고 있는지 칭찬을 많이 듣습니다.
최근에는 환율이 폭등해서 선교사님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선교비를 달러로 책정해서 환율 변동이 생기면 환차손을 지원해 줍니다.
이러한 정책이 얼마나 시급한지 한 선교단체 대표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또 다른 대표님은 8년 만에 열리는 GMP 선교 총회 때 우리 교회 청년들이 mk 사역을 섬겨주어서 너무나도 고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교회 청년들이 올 7월에 강원도에 가서 선교 총회 기간에 mk 사역을 섬기기로 했습니다.
여러분 이런 사역이 복음을 위해서 흩어지는 사역입니다.
올여름에는 꿈너머 꿈 프로젝트에 선정된 농촌 교회를 섬기러 나가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역사회를 섬기는 플리마켓도 준비하고 있고요.
또 보육원을 돕는 사역을 더욱더 활발하게 하고자 준비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건강한 교회를 개척하는 사역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난주 당회 리트릿에서 1차적인 논의를 했는데 모든 장로님들께서 기쁜 마음으로 동의하셨습니다.
이렇게 국내에도 우리가 해야 할 사역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대구 경북에 있는 연약한 교회들을 섬기는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연합 전도 사역도 해야 하고, 연합으로 훈련 사역도 해야 하고, 생명 사역 컨퍼런스에도 초청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만 평안하고 우리 교회만 잘 지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많이 받은 자에게 많이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기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은 교회로서 하나님의 뜻에 기쁨으로 순종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모이고 흩어지고 모이고 흩어지는 것은 성경이 증거하는 선교적인 패턴입니다.
모이기에 힘써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다면 또한 복음을 위해 흩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국내 선교 사회 선교 교회 개척 사역을 믿음으로 행하는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교회를 변화시키고 부흥케 했던 놀라운 생명 사역이 한국교회 많은 교회로 전파되어서 놀라운 부흥과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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