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에게 생명 사역의 비전을 주셨습니다.
복음으로 사람을 살리고 키우고 고치는 생명 사역은 전인격적인 사역입니다.
생각의 틀을 바꾸고 성령의 불을 체험하는 사역입니다.
지난주까지 우리 교회 5대 사역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전도와 선교, 예배, 교재, 교육과 훈련, 그 봉사와 사역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힘쓰고 있는 그 사역들의 의미와 본질에 대해서 새로운 각도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번 주와 다음 주에는 5대 사역을 넘어서 추가적으로 힘쓰고자 하는 부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지금 당장 시작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당회와 위원회에서 계속 논의하고 기도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오늘은 회복 사역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상담 사역으로 이해하셔도 되고 내적 치유 사역으로 이해를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상처를 다루고 회복하는 사역은 너무나도 절실한 사역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에게는 마음 안에 상처가 있습니다.
뭐 이렇게 보면 겉보기에는 멀쩡하지만 각자의 마음 가운데 알고 보면 상처들이 다 있습니다.
부모, 형제, 친구, 선생님 등 다양한 사람들에게 받았던 상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은 아주 무섭고 권위적인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가 있습니다.
또 어떤 경우는 술, 도박, 폭력 등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는 가족으로부터 받은 상처도 있습니다.
이미 수십 년도 지난 일이지만 그때 받은 상처가 사라지지 않고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그와 비슷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을 만나면 심한 거부 반응으로 나타납니다.
무언가 권위적이고 거칠고 폭력적인 사람을 보면 심하게 거부하는 거죠.
정말 그냥 싫은 정도가 아니라 꼴 보기도 싫을 정도로 거부감이 일어납니다.
내가 왜 이러는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 수 없지만 사실은 부모님께 받은 상처가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2009년 우리나라 의과대학 학생 7천 명으로 한 한 연구 조사가 있었습니다.

자살 충동과 관련된 조사를 했는데 아무래도 의대생이다 보니까 학업과 관련된 스트레스가 제일 클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실제 연구 결과 자살 충동과 연관이 가장 깊었던 것은 어린 시절 부모님과의 관계였습니다.
그중에서도 정서적으로 학대를 받은 경우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10대 시절 부모님으로부터 방임, 차별과 같은 정서적 고통을 당한 학생들은 다른 사람보다 자살 충동이 더 높았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렸때부터 엄마 아빠 사이가 안 좋았어요.
부모님의 관심은 오직 제 성적뿐이었어요.
한 번이라도 시험을 못 보면 심하게 야단을 맞았어요라고 답을 했습니다.
아무리 사회적으로 성공을 해도 우리 마음속에 있는 상처는 자동적으로 치료되지 않습니다.
평소에는 멀쩡하다가 어떤 상황이 딱 되면 그 상처가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발작 버튼을 누르면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화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화를 낼 때 정말 그 정도로 화내는 것이 합당한 일입니까?
또 다른 예로 어떤 사람은 자신을 향한 그 비판을 견디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나를 무시하는 듯한 행동을 보이면 견딜 수가 없는 거죠.
누군가가 나를 욕하면 반드시 그 사람을 색출해서 징계해야 합니다.
사실 이런 경우도 내면이 건강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비판을 받으셨는데 우리가 뭐라고 비판받으면 안 되겠습니까?
비판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가 옳다는 확신이 너무 큰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생의 목표가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것 역시 마음 안에 상처 때문에 발생한 일입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있는 모습 그대로 나를 사랑하고 나를 용납하는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우리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은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예수님의 이야기이죠.
이야기에 등장하는 둘째 아들은 아버지께 유산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유산의 분배는 아버지의 사후에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계신데 유산을 달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가 죽기를 원하는 것과 똑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버지는 그 요구를 들어주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2절 함께 읽겠습니다.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유산을 요구하는 그 아들에게 아버지는 그 살림을 나누어 주었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살림이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비오스인데요.
문자적으로는 생명을 뜻합니다.
아버지가 단지 유산을 나눠준 것이 아니라 그분의 생명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아버지가 죽기를 바라는 아들을 보면서 정말 찢어지는 그 마음으로 유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유산을 받아간 아들은 타국에 가서 방탕하게 살았습니다.
한글 성경에 보면 재산을 낭비했다라고 되어 있는데 원어로 보면 돈을 뿌렸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방탕하게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금방 돈이 떨어진 아들은 타국에서 돼지 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유대 사회에서 돼지는 부정한 동물이었습니다.
부정한 동물이니까 당연히 먹지도 않았고 기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은 돼지 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본문 15절 16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둘러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주염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아멘.
혹시 여러분 중에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우는 분이 계시지요?
요즘은 반려동물을 거의 가족처럼 생각합니다.
그럼 여러분 중에서 혹시 강아지 사료를 먹는 분이 계십니까?
우리가 아무리 강아지를 사랑해도 강아지가 먹는 음식을 먹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은 지금 돼지가 먹는 음식을 함께 먹고 있습니다.
부정한 동물을 치는 것을 넘어서 그 동물이 먹는 음식을 함께 먹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마저도 부족해서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인생에서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간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에서 더 내려간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결과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떠나서 육체의 정욕을 따라 방탕하게 살아간 결과입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죄의 결과를 마주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너무나도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순간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은 돈을 많이 벌고자 편법을 저질렀는데 그것이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그로 인해서 수십 배의 벌금을 내게 되었습니다.
벌금 낼 돈이 없으니까 뭐 압류를 당하고 신용불량자가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것이 바로 죄의 결과입니다.
또 다른 예로 어떤 사람은 반복적으로 아내에게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참다 참다 못한 아내가 이혼을 했습니다.
아이들도 다 엄마 편을 들어서 가족들과 관계가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병이 들었는데 아무도 간호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너무나 비참한 순간이지만 이것 역시 죄의 결과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은 죄에는 결과가 있습니다.
근데 그 결과는 다른 사람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 결과는 너무나 비참하고 고통스럽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우리의 마음 가운데 찾아오는 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깊은 슬픔과 실패와 좌절 가운데 있을 때 우리 마음 가운데 오는 이가 있습니다.
바로 사탄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0절에 보면 사탄이 이렇게 등장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나
성경은 사탄을 가리켜 참소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영어로 accuse 라고 하는데 고발하는 사람, 비난자를 뜻합니다.
사탄이 하는 일은 우리를 고발하고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죄를 짓도록 유혹합니다.
온갖 방법으로 유혹해서 우리가 죄를 짓게 만듭니다.
그리고 우리가 죄를 지으면 그 순간 우리를 정죄합니다.
너는 죄인이다. 그러므로 너는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라고 우리를 정죄합니다.
우리를 정죄하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행동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질, 우리의 정체성을 공격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정체성을 공격당할 때 그때 우리는 마음에 상처를 입게 됩니다.
제가 미국에서 사역할 때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떤 교회가 있었는데 목사님과 장로님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교회 건축과 관련된 갈등으로 크게 싸웠다고 합니다.
교회 일을 하다 보면 갈등이 있을 수도 있고 뭐 싸울 수도 있습니다.
근데 아무리 싸움을 해도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방의 정체성을 공격하는 말입니다.
그 정체성을 공격하는 말을 할 때에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게 됩니다.
그 교회에서는 목사님이 한 장로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그러고도 장로야, 당신은 장로 아니야라고 얘기했다고 합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두 사람의 관계는 끝났습니다.
절대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장로님의 정체성을 공격했기 때문에 그때 받은 상처는 씻을 수 없습니다.
시간이 아무리 오래 지나도 그분은 여전히 마음 가운데 상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던 말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습니까?
그것은 모두 다 여러분의 정체성을 공격하는 말이었습니다.
너는 실패자야.
너는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어
너는 사랑받을 가치가 없어라는 말들이었을 것입니다.
이 모든 말은 사탄이 주는 정죄입니다.
사탄은 어떤 영적인 음성으로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의 입술을 통해서 우리를 정죄합니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사탄이 했던 모든 일은 정죄와 비난뿐입니다.
사탄은 참수하는 자, accuser 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들도 사탄의 정죄를 받았습니다.
그는 죄의 비참한 결과를 보았고, 그를 정죄하는 사탄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했죠.
누가복음 15장 19절 함께 읽겠습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다라고 고백합니다.
영어로 보니까 no longer worthy 라고 되어 있습니다.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돼지 우리에 있는 내 모습을 보니까 너무 한심해서 스스로를 무가치하게 여겼습니다.
나는 사랑받을 이유도 없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가치도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정죄를 받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집을 떠나 타국에서 온갖 고생을 하던 이 아들은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정말로 염치없는 일이지만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차라리 아버지 집에 가서 품꾼이 될지언정 이것이 훨씬 더 낫겠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본문 20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여러분, 이 구절을 자세히 보십시오.
아들이 어디로 돌아갔습니까?
집으로 돌아갔습니까?
고향으로 돌아갔습니까?
아닙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
아들은 어떤 장소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께 돌아갔습니다.
아들이 돌아간 곳은 고향, 집 장소가 아니라 바로 인격이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믿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나를 거절해도 아버지는 나를 받아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차마 아들로 받아달라고 할 자신은 없었습니다.
너무 염치가 없으니까 품꾼으로 받아달라고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아직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 아들을 알아봤습니다.
퍼벅파벅 걸어오는 그 아들을 알아봤습니다.
더럽고 추한 모습이지만 그 아들을 보고 치근히 여겨서 아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족장은 절대로 달리지 않았습니다.
품위와 체통을 지키기 위해서 천천히 우아하게 걸어갔지 절대 달리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비슷하죠.
뭐 대통령이나 고위 공직자들은 달리지 않습니다.
정자세로 천천히 걸어갑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아들을 보고 측은히 여겨서 그를 향해서 뛰어갔습니다.
측은히 여기다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다라는 단어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스플랑크니조마이라는 단어이죠.
헬라어로 스플랑크나 하면 내장을 가리킵니다.
당시 헬라 사람들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 그리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내장에서 나온다고 믿었습니다.
오늘날 서양 사람들이 사랑이 심장에서 나온다고 표현하는 것과 비슷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목자 없는 양같이 고생하는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그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버지가 터벅터벅 걸어오는 그 아들을 보고 측은히 여겼습니다.
단지 불쌍한 정도가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긍휼과 사랑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를 향해서 달려가서 목을 안아주었습니다.
히브리 문화에서 목을 안아주는 것은 온전한 용서와 용납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33장에 보면 에서가 야곱을 맞이해서 안을 때 목을 안아주었습니다.
이 장면은 에서가 야곱을 용서해 주는 장면이거든요.
장자의 축복권을 빼앗아 갔던 그 동생을 용서하는 모습인데 목을 안아주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버지가 아들의 목을 안아주었습니다.
이것은 완전한 용서와 용납을 의미합니다.
아버지의 품에서 그 아들은 자기 잘못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준비한 멘트를 하는 거죠.
21절 말씀 보면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앞에서 본 것과 똑같은 표현, no longer worthy
저는 이제 가치가 없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 될 가치가 없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정죄 받은 모습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무가치한 사람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습니다.
나는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그 아들의 말을 아버지가 가로막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본문 22절 함께 읽겠습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질을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아멘.
아버지가 말하죠. 제일 좋은 옷을 가져와서 입혀줘라.
손에 반지를 끼워주고 발에 신발을 신기라라고 이야기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옷, 반지, 신발은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임명받을 때 왕에게 반지를 받았습니다.
왕의 권세와 신분을 받은 것이지요.
고대 사회에서 노예들은 신발을 신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신발을 신는 것은 노예가 아니라 고귀한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버지가 명한 그 모든 것은 아들의 정체성, 아들의 신분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은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나는 아들이 될 자격이 없어 나는 사랑받을 가치가 없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너는 지금도 내 아들이다.
너는 지금도 사랑받고 있고 지금도 용납받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이 공격받을 때 그때 이제 우리 마음에 상처를 입게 됩니다.
나는 실패자야, 나는 사랑받을 가치가 없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정죄입니다.
사탄이 우리에게 직접 말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입술을 통해서 정죄합니다.
부모, 형제, 친구, 선생님 등 여러 사람의 입술을 통해서 우리를 비난합니다.
우리가 그 거짓말을 믿게 되면 그때 마음 가운데 상처를 받게 됩니다.
마음의 상처를 받는다고 해서 우리가 막 갑자기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는다고 해서 당장 우리 몸에 무슨 큰 병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어떤 특정한 상황이 되면 큰 문제를 일으키게 되는 거죠.
이것은 마치 우리 몸 안에 있는 바이러스와 비슷합니다.
바이러스가 평소에는 잠잠히 있죠.
그러다 우리 면역력이 떨어지게 되면 창궐해서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의 상처 역시 평소에는 잠잠히 있습니다.
그러다가 특정한 상황이 되면 우리의 마음이 힘들어질 때 그때 창궐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깊은 수렁으로 끌고 갑니다.
하버드 의대 교수인 스티븐 버글라스는 마음의 힘이 떨어질 때 나타나는 심리적인 문제를 연구했습니다.

특별히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빠지는 함정을 네 가지로 요약했습니다.
첫째는 거만, 둘째는 외로움, 셋째는 파괴적인 모험, 넷째는 간음입니다.
이러한 함정에 빠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서 우리는 왜 거만하게 행동할까요?
아니 누가 봐도 잘 되고 누가 봐도 성공했으면 그냥 겸손하게 가만히 있으면 되지 왜 꼭 거만해질까요?
왜 돈 자랑을 하고, 꼭 학벌 자랑을 하게 될까요?
충분한 사랑과 인정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어머니는 의사가 된 아들이 너무나도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누구를 만나든지 내 아들이 의사라는 사실을 자랑했습니다.
심지어 백화점에 가서 아들 셔츠를 살 때에도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 아들 사주려고 하는데 그 의사들 많이 입는 셔츠 하나 주세요라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의사들이 많이 입는 셔츠가 있나요?
혹시 알려주시면 저도 하나 사겠습니다.
여러분, 왜 우리는 자식 자랑을 할까요?
정말 아무도 안 궁금한데 아무도 물어본 적이 없는데 왜 자랑을 할까요?
나 자신이 충분한 인정과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받지 못한 인정을 자식을 통해서 받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받아야 하는 그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실 그거는 그 사람 잘못이 아니거든요.
그것은 그 사람의 부모의 잘못입니다.
사랑과 인정을 주어야 하는 그 공간은 가정이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해서 내가 받지 못한 인정을 다른 것을 통해서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돈을 통해서 학벌을 통해서 자식을 통해서 인정받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인정은 영원하지도 않고 그렇게 인정받으려고 하는 모습은 그렇게 아름답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인정 욕구, 성공 욕구에 빠진 사람을 보면 여러분 어떤 기분이 드시나요?
안쓰러운 기분이 듭니다.
그냥 우쭈쭈 해주고 말지.
그런 사람하고 깊이 관계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21:53
만날 때마다 돈 자랑하고 자식 자랑하고 함께 있으면 아마 마음이 지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결코 지혜롭지 않습니다.
진정한 인정과 사랑은 사람에게서 오지 않습니다.
우리의 참된 아버지 대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고 가장 존귀하게 여기는 그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필요한 진정한 인정과 사랑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옷, 반지, 신발을 주셨습니다.
사탄에 의해서 세상에 의해서 망가진 우리의 정체성을 회복하셨습니다.
우리의 정체성과 신분을 회복하시고 우리에게 날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사랑받는 아들이다,
너는 나의 사랑받는 딸이다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의 정체성이 회복될 때 그때 우리의 마음 가운데 치유가 임하게 됩니다.
여러분 정체성과 자아상은 조금 다른 개념입니다.

정체성(identity)는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는 관점이고,
자아상(self image) 는 내가 나를 보는 관점입니다.
그러면 정체성이 중요할까요? 자아상이 중요할까요?
당연히 정체성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정체성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세상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은 온통 자아상, 셀프 이미지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합니다.
이렇게 말하죠. '너 자신을 믿어라. 너의 마음을 따라가라. 자신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라고 이야기합니다.
근데 아무리 자신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어도 그렇게 안 될 때가 있잖아요.
오직 하나님을 믿는 사람만이 참된 정체성을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인정하시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는 그 관점으로 나도 나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진정한 의미에서 자아상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제가 부룬디 대학에서 가르칠 때 현지 학생들에게 뭐 제가 어떤 연구를 하고 있는지 말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쓰고 있는 그 논문의 깊이와 수준을 그들이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
그래서 제가 현지 학생들에게 그런 거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제 논문의 가치는 현지 학생들이 정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제 논문의 가치는 미국에 계신 제 지도 교수님께서 정해주셨습니다.
지도 교수님은 세계 기독교 역사 분야에서 탑 쓰리안에 드는 대학자이셨습니다.
그러니까 지도 교수님께서 인정해 주시면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든 말든 아무 상관없습니다.
최고 전문가이신 교수님의 관점이 중요하지, 수많은 비전문가들의 관점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최고의 지혜를 가지신 하나님의 관점이 제일 중요한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면 다른 사람이 인정하든 말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는지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둘째 아들은 그 사랑과 인정을 경험했습니다.
너무나도 부끄럽고 너무나도 수치스러운 모습이었지만 그를 사랑해 주시고 용납해 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단지 받아주신 것만이 아니라 아들의 정체성과 신분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좋은 옷과 반지와 신발을 주셨습니다.
너는 종이 아니라 나의 아들이다.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정체성이 회복될 때 진정한 치유가 임하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 안에서 상한 마음이 치유되는 것을 경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사탄의 관계가 가득합니다.
공중 권세 잡은 사탄은 사람들을 유혹하기 위해서 온갖 거짓말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보는 인터넷과 TV에서 수많은 거짓말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남자는 돈이 있어야지 결혼할 수 있다.
여자는 예뻐야지 사랑받을 수 있다.
한 번 흑수저로 태어났으면 죽을 때까지 흙수저이다라는 식의 거짓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식의 메시지를 우리가 매일 듣죠.
처음에는 동의하지 않아도 매일같이 이런 메시지를 듣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 동의하게 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우리의 가치를 결정한다고 믿게 됩니다.
가진 것이 별로 없으면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고 믿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한다면 누구나 다 우울증과 무기력증에 빠질 것입니다.
거짓의 아비인 사탄은 날마다 우리를 시험하고 유혹합니다.
마찬가지로 2천년 전에 사탄은 예수님을 시험하고 유혹했습니다.
마태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받으셨죠.
흥미롭게도 사탄이 예수님께 했던 반복적인 말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 3절에 보면 내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로 떡이 되게 하여라.
6절에 보니까 내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려라.
공통적으로 반복되는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걸 해봐라.
니가 하나님의 아들이 맞거든 이걸 해봐라.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예수님의 정체성을 공격했습니다.
사탄의 시험은 한마디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명해 봐라였습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공격이었죠.
동일한 방식으로 사탄은 우리의 정체성을 공격합니다.
사탄이 우리에게 가장 많이 하는 공격은 이것입니다.
당신이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 봐라.
돈이든 외모든 학벌이든 뭐든 좋으니까 너의 가치를 증명하라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는 내가 얼마나 똑똑하고 유능한지 증명하고자 노력합니다.
내가 무슨 대학 나왔고 연봉이 얼마고 무슨 차를 타는지 자랑합니다.
나이가 들어서는 내가 얼마나 성공했는지 증명하고자 합니다.
내가 이런 업적을 이루었고, 내가 여기까지 올라가 봤고, 내 자녀들이 얼마나 잘 됐는지 자랑합니다.
그러니까 내 인생은 가치 있고 나는 성공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내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증명하려고 하는 순간, 내가 내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정이 나의 정체성을 결정하게 됩니다.
외부의 누군가에 의해서 내 인생의 의미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나는 내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는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인정을 구하면서 나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노력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방식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방식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말하죠. 너의 가치를 증명하라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너의 가치는 증명되었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가치가 언제 증명되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증명된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실 만큼 우리를 가치 있게 여기셨습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아멘.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확증하셨습니다.
증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우리 인생의 가치를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존재 가치, 우리 인생의 가치는 십자가에서 증명되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내가 얼마나 사랑받을 만한 존재인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선포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위해 죽을 테니까, 너는 살아라. 내가 너를 위해 죽을 만큼 너는 존귀한 존재이다.
모든 저주는 내가 받을 테니까, 너는 내가 주는 생명을 받아라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사랑받는 자입니다. 우리는 존귀히 여김을 받는 자입니다.
우리 인생의 가치를 우리가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삶의 가치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증명되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 리처드 러블레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변에 보면 교만한 사람들이 있죠.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자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들 얕잡아보고 무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양상은 다르지만 그 뿌리는 똑같습니다.
그들 모두에게는 사랑과 용납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연약한 모습 그대로, 내가 사랑받고 용납받는다는 확신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인정을 갈구하는 모습이 얼마나 애처롭고 비참한지 모릅니다.
끊임없이 사랑과 용납을 갈구하는 그 모습이 얼마나 공허한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집 나간 아들을 오랫동안 기다리는 아버지와 같이 그분은 우리의 마음을 회복하기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좋은 옷과 반지와 신발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정체성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는 온전한 사랑과 용납을 경험하는 줄로 믿습니다.
스바냐 3장 17절에 보면 하나님의 깊은 사랑의 마음이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너의 아버지 여호와가 너희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아멘.
우리로 인해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는 그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을 경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앞으로 준비될 우리 교회의 회복 사역과 상담 사역을 통해서 상한 마음이 치유되고 회복되는 역사가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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