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02 (주일)ㅣ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ㅣ 영원한 목적을 가진 기쁨
빌립보서 3:12-16 | 문대원 목사
할렐루야, 이렇게 주 안에서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저는 대구 동신교회를 섬기는 문대원 목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분당 우리 교회에서 함께 예배드리고 말씀을 전할 수 있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귀한 기회를 허락하여 주신 하나님과 존경하는 이찬수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작년에 있었던 꿈너머 꿈 프로젝트 경상 지역 멘토로 섬겼습니다.
경상 지역의 미래 자립 교회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또 후원해 주신 분당 우리 교회 성도님들께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꿈너머 꿈 프로젝트는 단회적인 이벤트가 아니라 지속적인 협력과 네트워크입니다.
이번에 선정된 17개 교회 목사님들을 위해서 세미나가 저희 교회에서 열렸습니다.
이찬수 목사님께서 멀리 대구까지 직접 오셔서 귀한 강의와 멘토링을 주셨습니다.
대구 지역에서 선정된 분들은 총 8명인데 저희가 정기적으로 만나서 함께 교제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재정만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전도와 훈련, 교회 학교를 위해서 함께 협력하는 사역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한 교회는 경북 의성에 있는 농촌 교회인데, 저희 교회 청년들이 올 여름에 방문해서 여름 성경학교 사역을 섬기고 어르신들을 섬기고자 준비하고 있습니다.
분당 우리 교회의 후원과 사랑을 통해서 이렇게 귀한 일이 시작되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눈에 보이는 내 교회를 넘어서서 한국교회 전체, 하나님 나라 전체를 바라보시는 여러분들의 사랑과 섬김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저는 대구에서 목회를 하기 이전에 아프리카에서 선교사로 사역을 섬겼습니다.
아프리카 부룬디이라는 나라에서 6년 동안 선교 사역을 섬겼습니다.
그 이전에는 미국 보스턴에서 7년 동안 신학 공부를 했습니다.
세계 기독교 역사를 전공한 선교학자이기도 하고 또 아프리카 선교사 출신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선교에 헌신된 대구 동신교회에서 아주 행복한 마음으로 목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는 여러분과 같은 합동 교단에 속한 교회로서 교단 최초로 법인화된 세계 선교회를 통해서 사역을 섬기고 있습니다.
파송 선교사 75명, 협력 선교사 99명과 함께 세계 많은 나라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신학자 윌리엄 템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기 멤버가 아닌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는 공동체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공동체는 자기 멤버의 유익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정부, 기업, 학교 모두 다 자기 멤버의 유익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서 분당구청은 분당구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지, 다른 구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이러한 세상의 단체들과는 다릅니다.
교회는 자기 멤버가 아닌 사람들, 즉 불신자들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들이 생명을 얻게 하는 일을 위해서 교회는 존재합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전도와 선교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하지 않는 교회,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자신의 존재 목적을 상실한 교회입니다.
존재 목적을 상실한 교회는 아무리 크고 화려해도 금방 쇠퇴하고 가라앉을 것입니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있는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연히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분명한 목적과 사명을 위해서 하나님께 보냄 받은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단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그 영원한 목적을 깨달은 사람에게는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 기쁨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빌립보서는 기쁨의 편지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빌립보서 전체에 사도 바울의 기쁜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짧은 편지에 기뻐하다라는 단어가 총 16번 나왔습니다.
빌립보서의 가장 대표적인 구절이 있죠. 4장 4절 말씀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너무나도 기뻐하고 있으니까 무슨 좋은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돈을 많이 벌었던지 자식들이 잘 된 것 같습니다.
아니면 교회가 놀랍게 부흥하고 있던지 로마 황제가 예수님을 영접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사람이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진 당시 최고의 엘리트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의 마음 안에는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이해할 수 있으십니까?
세상에서 잘 되고 성공하는 것이 목표인 사람은 바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왜 기뻐하고 있는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1장 18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아멘. 바울이 고백합니다.
내가 갇혀 있든지 뭐 어떻게 되든지 아무 상관없습니다.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 기뻐합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의 인생의 목적을 아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의 인생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목적을 이루었기 때문에 바울은 기뻐하고 또 기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 감옥에서 바울이 느꼈던 그 기쁨은 인생의 목적을 이룬 기쁨이었습니다.
프로야구 한국 시리즈를 보면 팀의 승리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그 선수들을 보게 됩니다.
한 점이라도 더 내기 위해서 희생 번트를 하고 희생 플라이를 치는 선수들이 있지요.
한국 시리즈에서는 절대로 개인 플레이 하지 않습니다.
팀의 승리를 위해서 개인을 희생합니다.
그래서 가끔 보면 희생 플라이를 치고 너무너무 기뻐하는 선수를 보게 됩니다.
희생 플라이를 쳤으면 나는 아웃된 거잖아요.
개인적인 입장에서 보면 기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플레이로 인해서 3루에 있는 주자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우리 팀이 한 점을 얻었습니다.
희생 플라이를 쳐서 나는 아웃되었지만 우리 팀이 한 점을 얻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팀이 이길 수만 있다면 그 선수는 희생 플라이를 치고 너무너무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그 선수의 목적은 개인이 잘하는 것이 아니라 팀이 승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비록 아웃되었지만 팀의 승리를 위해서 기여했기 때문에 너무나도 기뻐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기뻐했던 것은 그의 목적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목적은 편안하고 안락하게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그는 감옥에 갇혀 있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고 있기 때문에 바울은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빌립보서에 가득한 바울의 기쁨은 인생의 목적을 이룬 기쁨이었습니다.
나의 모든 것을 걸 만한 가치를 발견하고 그 일을 이루었기 때문에 느끼는 기쁨이었습니다.
인생에서 분명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 특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첫 번째로 분명한 목적은 인생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바울은 분명한 목표를 향해서 분명한 표대를 향해서 달려간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 1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아멘.
바울은 지금 고대 올림픽 선수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결승점을 향해서 전력 질주하는 선수처럼 자신도 푯대를 향해서 열심히 달려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 푰대는 하나님께서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입니다.
전국에서 하나님께서 주실 상을 바라보며 힘차게 달려가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힘들지 몰라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그 면류관을 바라보며 인내하며 달려가고 있습니다.
목표가 분명한 사람은 방향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내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확신이 있으면 지금 당장 힘들어도 견딜 수 있습니다.
혹시 넘어지거나 실패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다 실패를 경험합니다.
아무리 좋은 대학 나오고 좋은 회사에 들어가도 누구나 다 실패를 경험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실패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했을 때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회복 탄력성 Resilient 라고 부르지요.
인생의 역경에 마음이 꺾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딛고 도약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뛰어난 업적을 이루었던 사람들은 역경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역경을 극복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지 우리가 실패했을 때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요?
내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디에서 그 확신이 올까요?
영원히 변하지 않는 목표에서 옵니다.
그러므로 목표가 분명한 사람은 방향에 대한 확신이 있고, 방향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실패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목표가 분명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과 나를 자꾸 비교하는 것입니다.
내 친구는 이번에 어떤 회사에 들어갔는데, 난 아직도 취업을 못했네.
내 친구는 연봉이 얼만데, 나는 이것밖에 못 버네.
여러분 왜 우리는 다른 사람과 우리를 비교하며 살아갈까요?
인생의 방향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그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방향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게 됩니다.
새해가 시작될 때마다 제가 저희 교회 성도님들께 드리는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크리스천 심리학자 조던 피트러슨이 했던 이야기입니다.
'당신을 다른 사람하고 비교하지 말고 오직 어제의 당신하고만 비교하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내 인생을 다른 사람하고 비교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시작이 다르고, 강점이 다르고, 목표가 다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나를 단순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비교해야 될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과거의 나입니다.
1년 전에 비해서 나는 얼마나 성장하였는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1년 전에 비해서 나는 얼마나 목표를 향해 나아갔는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나를 돌아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교회와 우리 교회를 비교하는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비교해야 할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1년 전에 우리 교회입니다.
우리가 1년 전에 비해서 더욱더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1년 전에 비해서 더욱더 열심히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목표가 분명해야지 가능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목표 없이 달려가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2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열심히 가고 있는데 분명한 목표가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열심히 가고 있는데 목표와 반대로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것처럼 무의미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열심히 달려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죠.
최선을 다해서 열정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올바른 방향은 어디에서 올까요?
올바른 방향은 올바른 목표에서 옵니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올바른 목표를 가지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인생의 목표가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훌륭한 의사가 되는 것이 목표일 수 있겠고 또 어떤 사람은 아름다운 가정을 일구는 것이 목표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서울에 좋은 아파트 사는 것이 목표일 수도 있겠습니다.
인생에서 목표를 논할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상위 수준의 목표가 있고 하위 수준의 목표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목표가 같은 수준이 아닙니다.
더 높은 수준의 목표가 있고 더 낮은 수준의 목표가 있습니다.
다음에 도표를 보시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하위 수준의 목표는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일 아침에 7시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 7시에 일어나야 합니까?
정시에 출근하는 중간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왜 정시에 출근해야 합니까?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왜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그렇게 해야지 승진해서 더 큰 영향력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왜라고 질문할 때마다 우리는 점점 더 높은 수준, 상위 수준의 목표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왜? 라고 질문하지 않으면 하위 수준의 목표에 머무르게 됩니다.
가장 흔한 하위 수준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바로 먹고 살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이 말은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습니다.
왜, 아침 7시에 일어나야 합니까?
먹고 살기 위해서, 왜 정시에 출근해야 합니까?
먹고 살기 위해서, 왜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먹고 살기 위해서, 먹고 살기 위해서는 가장 흔한 목표인데 이것은 상위 수준의 목표가 아닙니다.
상위 수준의 목표가 아니다 보니까 우리에게 충분한 동기부여를 주지 못합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어제보다 오늘 더 열심히 일할 동기부여가 없습니다.
그냥 적당히 일해서 월급만 받아가면 됩니다.
우리 인생에서 왜라고 질문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왜? 라고 질문할 때 우리는 더 높은 수준에 있는 목표에 대해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왜? 라고 질문할 때 우리는 인생의 최상위 목표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최상위 목표란 그 자체가 목적이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목적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아주 명확한 최상위 목표가 있습니다.
웨스터민스터 소요리 문답 1번에 나와 있어 있습니다.
제가 질문을 읽으면 여러분께서 답변을 읽으시면 되겠습니다.
아멘.
우리의 최상위 목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중간 수준의 목표를 정하고 또 하위 수준의 목표를 정하게 됩니다.
왜, 정시에 출근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왜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먹고 살기 위해서 정시에 출근하는 사람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정시에 출근하는 사람이 똑같은 태도로 일을 할까요?
같은 부서에서 똑같은 업무를 하고 있는데 과연 같은 마음으로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최상위 목표를 가진 사람은 누구보다도 더 강력한 동기부여를 가지게 됩니다.
실패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푯대를 향해서 달려가는 인생입니다.
사도 바울은 영원한 푯대를 향해서 흔들림 없이 달려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위에서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향해서 계속해서 달려갔습니다.
올바른 목표는 올바른 방향을 결정합니다.
올바른 방향이 있으면 확신을 가지고 우리가 달려갈 수 있습니다.
확신을 가진 사람은 인생에서 어떤 역경을 만나도 극복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을 가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로 올바른 목적은 인생의 우선순위를 결정합니다.
인생에서 올바른 우선순위를 갖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일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무엇이 중요한지 분별해서 그 중요한 일에 집중하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무엇이 중요한지 분별하지 못해서 여러 가지 일로 분주한 사람입니다.
마음이 나뉘고 마음이 분주하니까 정작 중요한 일을 놓치게 됩니다.
시험 공부를 하는 학생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어느 부분이 중요한지 잘 알기 때문에 그 부분을 열심히 공부합니다.
반면에 공부를 잘 못하는 학생은 어느 부분이 중요한지 모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공부 하려고 하니까 마음만 분주하게 되고 정작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게 됩니다.
우선순위가 분명하지 않으면 무언가는 열심히 하고 있는데 정작 중요한 일을 놓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 1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헬라어로 이 구절을 보면 강조된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오직 한 일이라는 단어입니다. 영어로 보면 But one thing 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여러 가지를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한 가지를 바라보며 그것을 위해서 정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분명한 목표, 분명한 상을 바라보며 한마음으로 나아갔습니다.
성경은 한 마음을 품은 사람과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을 대비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이 어떤 모습인지 야고보서 1장 8절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우리 함께 읽겠습니다.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영어로 보면 He is a double-minded man, unstable in all his ways 라고 되어 있습니다.
두 마음을 품으면 불안정한 삶을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가 하는 모든 일에서 마음이 불안정합니다.
한 곳에 딱 마음을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쪽 저쪽 왔다 갔다 하는 것이죠.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은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계산하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나에게 이득일까 저렇게 하는 것이 나에게 이득일까?
여러분 너무나 계산적인 사람을 옆에서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안타깝습니다.
저희 교회에는 청년들이 많이 있어서 제가 청년들에게 결혼에 대해서 설교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청년들에게 결혼에 대해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결혼은 비즈니스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너무 계산적으로, 너무 현실적으로 결혼을 생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평생 함께할 사람을 정할 때 누구와 결혼하는 것이 나에게 이득일까 너무 계산하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결혼은 인격적인 결합이기 때문에 비즈니스 방식으로 접근할 수 없습니다.
결혼을 통해서 최대한의 이윤을 남기려고 한다면 그것은 행복한 결혼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두 마음을 품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은 신실하지 못한 사람이고 불안정한 사람입니다.
한 마음으로 싱글 포커스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 줄로 믿습니다.
오직 한마음으로 나아갔던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나아간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변에 보면 현재보다 과거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예전에 이런 일을 했는데 말이야, 우리 교회가 예전에 이랬는데 말이야, 하면서 과거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일을 했는지 다 기억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행한 대로 갚아주시되, 이 땅에서도 갚아주시고, 천국에서도 갚아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가 했던 일 뒤에 있는 것은 다 잊어버린다고 이야기합니다.
오직 앞에 있는 것 표대를 향해서 내가 믿음으로 전심으로 나아간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인생에서 무엇이 정말로 중요한지 정확하게 알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과거를 자랑하는 것보다 푯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표대를 향해서 달려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었던 한 사건이 있습니다.
1954년 캐나다 벤쿠버에서 세계 육상 대회가 열렸습니다.
당시만 해도 1600미터를 4분 안에 달린 선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1600미터가 마일로 하면 1 마일인데 1마일을 4분 안에 달리면 인간의 심장이 견디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1954년에 2명의 선수가 그 4분의 기록을 깨고자 노력했습니다.
한 명은 영국의 로저 베니스터였고, 또 한 명은 호주의 존 랜디였습니다.
두 선수 모두 다 기록이 좋아서 둘 중에 한 명이 이 4분대의 기록을 깰 것만 같았습니다.
그렇게 1600m 결승이 시작되었고 초반부터 존 랜디가 치고 나갔습니다.
중반을 지나며 마지막까지 레이스를 이끌고 갔습니다.
그런데 결승점을 바로 앞에 두고 그 랜디는 라이벌인 베니스터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앞에 있는 결승점을 본 것이 아니라 고개를 돌려서 왼쪽을 바라보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베니스터가 앞으로 치고 나갔습니다.
앞선 선수가 뒤돌아보는 사이에 뒤에 있던 선수가 치고 나간 것이죠.
바로 그 순간에 찍혔던 유명한 사진이 있습니다. 바로 이 사진입니다
.
결국 베니스터가 1위로 돌아왔고, 그는 세계 최초로 1마일를 3분 대에 달린 선수가 되었습니다.
이 역사적인 경주를 가리켜 '미라클 마일'이라고 부릅니다.
대기록을 세운 것도 놀랍지만, 경기 중에 고개를 돌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이후로 육상 선수들은 절대로 고개를 돌리지 말고 마지막까지 결승전만 보고 달리도록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인생에 분명한 목표가 있으면 분명한 우선순위가 생깁니다.
분명한 우선순위가 있으면 구체적인 행동 지침, 액션 플랜이 생기게 됩니다.
그 우선순위에 따라서 이번 주에는 어떤 일을 하고 오늘은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알게 됩니다.
물론 오늘 그 일을 한다고 해서 갑자기 우리 인생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오늘 하루 열심히 운동한다고 해서 우리 몸에 근육이 생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 일을 함으로써 내가 바라보는 목표를 향해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20세기 최고의 음악 비평가인 어니스트 뉴먼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위대한 작곡가는 영감을 받아서 작곡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동일한 시간에 작곡을 시작하고 나서 영감을 받는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베토벤, 바흐 같은 대가들은 영감을 기다리기 위해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마음을 잡고 동일한 시간에 곡을 썼고, 그런 노력이 쌓여서 위대한 작품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위대한 작곡가는 매일 동일한 시간에 작곡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부분에서 매일 동일한 시간에 노력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매일 기도하십니까?
매일 운동하십니까?
어떤 날에는 열심히 하고 어떤 날에는 스킵 하십니까?
오늘은 비가 오니까 스킵.
오늘은 너무 추우니까 스킵.
오늘은 컨디션이 안 좋으니까 스킵.
이렇게 불규칙적으로 살아가면 우리 삶에서 어떤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분명한 목표와 우선순위를 가지고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올바른 목적은 올바른 윤리를 결정합니다.
윤리는 옳고 그름의 기준입니다.
인생에서 올바른 선택을 내리기 위해선 기준이 필요합니다.
그 기준은 일관되어야 하고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나라 속담 중에서 성경적이지 않은 것이 몇 개 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라는 말입니다.
어느 길로 가든 상관없이 목적지에만 가면 된다는 거죠.
수단과 방법은 상관없고 목표만 이루면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 말이 성경적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목표를 이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올바른 수단을 사용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잘못된 수단을 통해서 이룬 목표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는 말은 왜 생겼을까요?
그 목표가 비인격적인 목표라서 그렇습니다.
돈을 많이 버는 것, 출세하는 것, 성공하는 것 이러한 비인격적인 목표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수단과 방법도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빨리 성공하기 위해서 편법을 사용했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어?
아 돈 좀 많이 벌려고 불법 했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어?
다른 사람에게만 걸리지 않는다면 어떤 수단과 방법도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목표가 만약에 인격적인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서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편법과 유행을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좋은 아버지가 되라. 여러분 이런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는 올바른 방법으로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자녀의 마음을 헤아려야 하고, 사랑과 존중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렇게 인격적인 관계가 쌓여야지 인격적인 목표를 이룰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의 목표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면 아무 방법이나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기준에 올바른 방법을 택해야 하고, 그 방법으로 한 것만 우리의 목표를 이룰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선교 헌금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야 합니다.
편법과 요행으로 큰 돈을 벌어서 선교 헌금 많이 한다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우리가 공의로운 길로 행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인생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7절부터 8절 함께 읽겠습니다.
아멘.
바울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믿었고 그분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비인격적인 목표가 아니라 인격적인 목표를 향해서 달려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 길로나 가지 않았고, 믿음의 길, 선한 길로 행했습니다.
우리 또한 동일한 마음으로 행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기 위해서는 인격적인 목표를 붙잡아야 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로 행해야 합니다.
담임 목사는 성도님들을 위해서 항상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찬수 목사님께서도 여러분을 위해서 항상 기도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형통하고 성공하기를 위해서 기도하실 것입니다.
성경은 금욕주의를 말하지 않습니다.
돈을 악한 것으로 여기거나 성공을 악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적인 방법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성공하는 것만이 진정한 축복인 줄로 믿습니다.
인생의 목표를 이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 기준에 옳은 길로 가는 것 은 더욱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모든 동기를 보시고 그 과정을 보시고 판단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의 인생을 마쳤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것입니다.
인생의 결승점에서 우리를 맞으실 그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방법을 택하는 것이 바로 크리스천의 윤리입니다.
세상의 끝을 어떻게 보느냐가 인생의 목표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인생의 의미와 윤리도 결정합니다.
미국의 신학자 스탠리 하우워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의 끝을 어떻게 보는지가 인생의 의미와 윤리를 결정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에는 영원한 천국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왕 되신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맞아주실 것입니다.
인생의 끝은 죽음이 아니라 천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에서 만날 그 하나님을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비인격적인 목표가 아니라 인격적인 목표입니다.
인생의 결승점에서 기다리고 계신 그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목표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변하시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목표 또한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그 영원한 목표를 가진 사람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고,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을 가지는 줄로 믿습니다.
올바른 목적은 올바른 방향을 결정합니다.
올바른 목적은 올바른 우선순위를 결정합니다.
올바른 목적은 올바른 윤리를 결정합니다.
올바른 목적, 영원한 목적을 가진 사람은 오늘 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권면입니다.
빌립보서 3장 1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아멘.
영원한 목적을 마음에 품고 하나님과 함께 기쁨으로 나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생의 결승점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도, 이번 한 주간도 주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eqlqbNZQ1lw?list=PLn3gC0zxOsmwrme5FuzqiY1FMpw6pGt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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