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을 시작하면서 우리 교회의 비전인 생명 사역에 대해서 돌아보고자 합니다.
생명 사역에 헌신된 교회에는 어떤 특징이 있는지, 5대 사역이 균형 있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 주일과 다음 주일은 생명 사역 총론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그 이후에 5대 사역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교회가 있습니다.
비전이 이끄는 교회가 있고, 취향이 이끄는 교회가 있습니다.
명확한 비전이 있는 교회는 그 비전을 향해서 달려갑니다.
지금 우리가 잘하고 있는지 그것을 평가하는 기준도 비전입니다.
반면에 명확한 비전이 없는 교회는 아마 눈에 보이는 취향을 기준으로 사역할 것입니다.
예배 스타일은 어떤지, 프로그램은 어떤지, 오늘 사람들이 많이 맞는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명확한 비전이 없기 때문에 현재 상황을 평가하는 기준도 사람마다 다 다를 것입니다.
여러분은 비전이 이끄는 교회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취향이 이끄는 교회를 원하십니까?
대구동신교회는 생명 사역이라는 사명 미션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명 사역은 복음으로 사람을 살리고 키우고 고치는 사역입니다.
마태복음 9장 35절에 기록된 것처럼 예수님께서 이 땅 가운데 계실 때 생명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 사역을 명하셨습니다.
권성수 원로 목사님께서 자주 말씀하셨던 것이 있습니다.
생명 사역은 권 목사님의 사역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그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생명 사역이 권 목사님의 사역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이라는 말의 뜻은 무엇일까요?
만약에 생명 사역이 권 목사님의 사역이었다면 목사님의 은퇴와 함께 생명 사역이 끝났을 것입니다.
목사님 은퇴하시고 새로운 목사가 부임했으니까 이제 새로운 사역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좋든지 싫든지 교회는 큰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목사는 자신의 비전을 제시할 것이고 또 새로운 사역을 시작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전임자를 그리워하는 성도들과 또 후임자를 따르는 성도들 사이에 갈등이 생길 수 있습니다.
교회가 나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럼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권 목사님의 은퇴와 함께 생명 사역이 끝났습니까?
새로운 목사가 부임했으니까 이제 새로운 사역을 시작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는 여전히 생명 사역에 힘쓰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생명 사역은 권 목사님의 사역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권 목사님도 예수님을 섬기고, 저도 예수님을 섬깁니다.
권 목사님도 예수님의 사역을 감당하기 원하고, 저도 예수님의 사역을 감당하기 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담임 목사가 바뀌어도 여전히 예수님께서 맡기신 생명 사역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 모든 사역은 생명 사역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분명한 목표는 교회 전체의 일관성과 안정성을 가져다줍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교회의 리더십 전환이 안정적이고 은혜로웠던 이유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어제 말한 것과 오늘 말한 것이 다르면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을 우리가 리더로 세울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어제 말한 목표와 오늘 말한 목표가 달라지면 안 되죠.
일관성이 없으면 교회 전체는 흔들리게 되고 혼란스럽게 될 것입니다.
5년 전에 당회에서 청빙 인터뷰를 할 때 제가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생명 사역을 하기 위해 대구 동신교회에 지원했습니다.
생명 사역이 아니라면 저는 목회를 할 이유가 없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선교지에 있다가 나중에 미국으로 가서 신학교 교수를 하면 될 것입니다.
저는 생명 사역을 위해서 동신교회에 왔고 그 마음으로 지금도 사역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모든 사역자들, 중직들, 성도들 모두 동일한 마음으로 헌신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에게는 확고한 목표와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으로 사람을 살리고 키우고 고치는 생명 사역입니다.
오늘 본문은 생명 사역의 핵심 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포도나무 대신 예수님 안에 거할 때에 영적인 생명, 풍성한 생명을 경험한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아멘'
예수님은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생명이 철저하게 예수님께 의존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나뭇가지가 나무를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나무에서 떨어지면 그 가지는 생명력을 잃고 말라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떠나서는 이라는 헬러어 구문을 영어로 직역하면 without me, 내가 없이는 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 없이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놀랍게도 요한복음 1장에 이와 동일한 헬라어 구문이 사용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 3절 함께 읽겠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아멘.
여기서 그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세상에 어떤 것도 예수님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3절은 예수님 없이 그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다고 말씀하고,
요한복음 15장 5절은 예수님 없이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생명과 존재가 철저하게 예수님께 의존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나뭇가지 자체에는 생명이 없고 원줄기에 붙어 있을 때 생명을 얻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 자신에게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원조기 대신 예수님께 연결되어 있을 때 영적인 생명을 얻는 줄로 믿습니다.
영적인 생명은 우리 속사람을 지탱하는 마음의 힘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신체적으로 아무리 건강해도 마음에 힘이 없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주변에 보면 우울증과 무기력증으로 고통받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분들에게 어떤 신체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육신의 병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마음에 힘이 없기 때문에 일상생활을 하는 것이 어려울 지경입니다.
우리 속사람을 지탱하는 마음의 힘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인생에서 큰 고난과 절망을 겪으면 이런 말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정말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너무나도 서글픈 말입니다.
분명히 육체적으로 살아 있는데 내 마음에 소망이 없고 기쁨이 없다는 뜻입니다.
내가 분명히 숨 쉬고 있고 음식을 먹고 있지만 내 영혼은 완전히 다운되어서 활력이 하나도 없는 상태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을 제가 본 적이 있는데 정말로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의 힘으로 일어설 수 없을 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안에 거하면 너희 영원히 살아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생명의 근원 대신 예수님께 붙어 있으면 그분의 생명력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우리가 다시 살아나는 줄로 믿습니다.
근심이 가득한 마음 가운데 주님의 평안이 찾아옵니다.
절망이 가득한 마음 가운데 미래를 향한 소망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내 인생이 이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게 됩니다.
세상이 다 끝난 것 같지만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고 여전히 나를 붙들어 주시는 그 예수님을 바라보면 우리 마음 가운데 다시 힘을 얻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힘을 회복하게 하는 그 생명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들에게는 특징이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소망을 품게 되고요.
또 변화에 대한 열망을 갖게 됩니다.
나도 변할 수 있고 우리 가족도 변할 수 있다는 그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가 될 수 있는 그 최고의 모습을 말씀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는 처음으로 변화에 대한 소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가 될 수 있는 최고의 모습을 선포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9장 9절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아멘.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표현은 유대 사회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특별한 언약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이 아브라함의 후손인 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죄인 중에 죄인이라고 여기는 그 세리장을 향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는 비록 삭개오가 오직 돈을 위해서만 살았지만 앞으로는 변화된 모습으로 하나님의 언약 백성답게 살아갈 것을 주님께서 미리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미리 선포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이와 같이 내가 될 수 있는 그 최고의 모습을 보게 되는 은혜가 임합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변화가 불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이 있고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속하십니까?
변화가 불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은 고정형 사고 방식을 가졌습니다.
이러한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은 인생의 역경을 비관적으로 생각합니다.
내 능력은 정해져 있는데 내 능력보다 더 큰 역경을 만나면 내가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최대한 그 역경을 피하려고 하거나 아니면 자포자기할 것입니다.
반면에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은 성장형 사고 방식을 가졌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역경을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이 역경을 뛰어넘을 수 있는지 없는지 테스트할 수 있는 기회로 삼기 때문입니다.
물론 때로는 그 역경을 이기지 못하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성장형 마인드를 가진 사람은 좌절하지 않습니다.
실패의 순간에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좋아 내가 이번에는 실패했지만 내가 여기서 배운 교훈이 무엇이지라고 자신을 돌아봅니다.
성장형 마인드를 가진 사람은 내 능력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능력은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고 변화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번에는 실패했지만 다음에 더 노력해서 성장하면 이겨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면 생명 사역에 헌신된 우리 교회는 고정형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을까요?
아니면 성장형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을까요?
당연히 성장형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우리 교회 부임해서 지난 70년 동안의 역사를 많은 분들께 들었습니다.
우리 교회 역사를 돌아보면 정말 많은 어려움과 난관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앉아 계신 이 본관 건물 건축할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은퇴 장로님들, 권사님들께서 잘 아실 것입니다.
45년 전에 우리 교회의 규모를 생각할 때 지금의 성전 부지를 매입한다는 것은 사실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동신교회는 세계를 바라보며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선교적 교회였기 때문에 그 현실에 매몰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능력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크심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건너편에 있는 비전관을 건축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당시에 건축 조례 때문에 종교 기관은 600평 이상의 건물을 지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기억나시죠?
여러분 그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법이 그러니까 어쩔 수 없네 하고 포기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건축 조례가 개정되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고정형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지금의 동신교회는 없었을 것입니다.
수많은 어려움과 난관 앞에서 포기했다면 지금의 동신교회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큰 믿음을 가졌습니다.
적당한 믿음, 현실적인 믿음이 아니라 아주 큰 믿음을 가졌습니다.
제가 지난 송구영신 예배 때 말씀드렸던 것처럼 믿음이라고 다 똑같은 믿음이 아닙니다.
여러분 큰 믿음이 있고 작은 믿음도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큰 믿음을 가지셨습니다.
지금도 살아계신 그 하나님을 체험하고자 그 역사를 바라보며 기도했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라면 기쁨으로 헌신하는 믿음을 가지고 나아갔습니다.
그 결과를 그 열매를 지금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미래에 대한 소망을 품게 됩니다.
눈앞에 보이는 현실 안에 매몰되지 않고 변화에 대한 열망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 사역의 헌신된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을 이어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열매에 대해서 언급하십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면 영적인 생명을 얻게 되고 그 결과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열매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요한복음 15장 8절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오,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아멘, 포도나무는 관상용 나무가 아닙니다.
정원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서 포도나무를 심는 사람은 없습니다.
포도나무는 화려하지도 않고 아름다운 나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포도나무를 목재로 쓸 수도 없습니다.
사진에 보시는 것처럼 중동의 포도나무는 크지도 않고 올곧지도 않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포도나무로 가구를 만드는 사람은 없습니다.
포도나무는 과실수입니다.
열매를 얻기 위해서 심는 나무입니다.
그러므로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자신의 존재 목적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관상용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보기에 좋고 아름답고 멋진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겉모습에 너무 신경을 많이 쓸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지 어떻게 생각할지 거기에 신경을 너무 많이 씁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아주 오래 지나면 그때야 깨닫게 되죠.
사실 다른 사람은 우리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됩니다.
여러분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 삶에 열매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의 겉모습, 나의 외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삶에 열매가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물론 그 열매에는 눈에 보이는 것도 있고 보이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은사와 달란트, 전도와 같이 눈에 잘 보이는 열매도 있고, 성품과 인격 같이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열매도 있습니다.
어떤 종류이든 상관없이 우리는 열매를 맺어가야 합니다.
우리를 향한 그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기 위해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갑니다.
포도나무가 관상용이 아닌 것처럼 여러분 우리의 삶도 관상용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기 좋은 나무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열매 맺는 나무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열매에 대해서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 열매는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다라는 사실입니다.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어서 자기가 먹지 않습니다.
그 열매는 다른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맺는 열매는 나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를 받아서 열매를 맺어서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할 때, 그때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과 성품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나타난다는 의미입니다.
가끔 보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뭔가를 잘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해, 내가 이번 시험에 1등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식의 영광이 필요하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증명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완전하고 완벽한 분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에 나타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인데 그 뜻이 무엇이죠?
출애굽기 3장 14절에 나왔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라는 그 이름의 뜻은 스스로 있는 자, I AM WHO I AM 입니다.
우리가 인정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스스로 완전하고 완벽한 분이십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우리가 무언가를 드려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나타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성품이 나타날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주님께 순종할 때 그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여러 가지 모습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데 그중에 가장 놀라운 것은 사람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적을 행하는 것이 어려울까요?
사람이 변화되는 것이 어려울까요?
아픈 사람을 낫게 하고 줄인 사람을 먹게 하는 것이 어려울까요?
아니면 사람의 내면이 변화되는 것이 어려울까요?
예수님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경험했던 사람 중에서 변화되지 않았던 사람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그 음식을 먹은 사람 중에 변화되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에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그 생명의 떡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다음과 같습니다.
요한복음 6장 66절 함께 읽겠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답답한 마음이겠죠.
음식 나눠줄 때는 많은 사람이 모였다가 어려운 말씀 전하니까 많은 사람이 떠나갔습니다.
기적을 경험한다고 해서 사람이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언제 사람이 변화될까요?
생명의 근원 대신 예수님 안에 거할 때 변화되는 줄로 믿습니다.
기적을 경험한다고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거할 때 주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눌 때 그때 변화됩니다.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주님과 개인적인 친밀한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생각과 감정을 알고 계신 그 예수님을 인정하고 그분이 나와 인격적인 관계를 원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사실은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인격적인 관계란 그 관계 자체가 목적인 거예요.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거나 부탁할 일이 있어 다가가는 것.
여러분 그런 것은 인격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인격적인 관계란 그냥 함께 있는 게 좋고 그냥 사랑하는 겁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은 주님과의 관계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주님과 동행할 때에 우리 삶 가운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변화된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지금도 살아계시고 지금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납니다.
여러분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변화가 가능하다는 믿음과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자 하는 그 열망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가장 큰 영광을 올려드리는 방법은 다른 게 아니라 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도저히 변화되지 않을 것 같은 내가 주님의 은혜로 변화된다면 그것만큼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신학자 워렌 위어스비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기독교는 신조나 조직이나 종교적 체계가 아니다. 기독교는 우리로 하여금 점점 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는 사람들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생명이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지식도 아니고요. 조직도 아니고 무슨 건물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는 생명입니다.
지금도 살아있는 생명이기 때문에 지금도 우리를 변화시켜 가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살아있다는 것은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무게가 항상 똑같습니까?
아니죠. 먹는 음식의 양에 따라서 계속해서 변합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한 우리 몸은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변화한다는 것이고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변화하지 않고 성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변화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나는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나무에서 분리된 나뭇가지와 같습니다.
여러분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점점 더 메말라 갈 뿐입니다.
그렇게 된 가지는 땔감으로만 쓰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 6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아멘.
포도나무 대신 그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않으면 그 가지는 말라서 죽게 됩니다.
말라버린 가지는 아무 쓸모가 없으니까 사람들이 모아서 땔감으로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두 가지 옵션밖에 없습니다.
열매를 맺든지 아니면 땔감이 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조금 무섭죠?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열매를 맺겠습니까?
아니면 땔감이 되겠습니까?
당연히 열매를 맺어야죠.
우리 인생에서 열매를 맺는 것이 이 정도로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새해를 맞이해서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우고 결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그동안 내 인생에 어떤 열매가 있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되어서 열매를 맺으면 여러분 그 결과는 숨길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지난달에 한 크리스천 유튜버가 우리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우리 교회 주일 예배와 생명 사역을 그분의 채널에 소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분은 사실 전국에 있는 유명한 교회를 다 방문하는 분이었어요.
사랑의 교회, 온누리 교회, 여의도 순복음 교회 수많은 교회들을 방문했습니다.
이분이 대구동신교회 역사를 보고 지방의 오래된 장로교회구나라고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역사가 75년 되었으니까, 아주 전통적인 분위기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우리 교회 와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장로 교회가 이렇게 밝고 환하고 역동적인 예배를 드려서 놀랐다고 합니다.
새 가족실이 꽉 차 정도로 새 가족이 많고 체계적인 교육과 훈련을 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습니다.
또 오후에 청년부 예배에 가서 이렇게 크고 역동적인 청년부가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길 사실 자기도 청년인데 동신교회 청년부 다니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전국 교회를 다 가본 사람이 이런 말을 해서 너무나도 감사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는 밝은 분위기의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들 열정이 가득하고 마음이 뜨겁습니다.
뭐 하나를 해도 대충 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기쁜 마음으로 합니다.
제가 오늘 생명 사역에 관한 설교를 준비하면서 스스로에게 질문했습니다.
우리 교회의 밝은 분위기는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성도님들 안에 있는 이 기쁨과 열정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우리 교회 조명이 밝아서 그런가, 제가 그런 생각도 했습니다.
아니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 그분의 생명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속사람을 변화시키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부흥의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밝고 환한 분위기는 어디에서 올까요?
뜨거운 마음, 긍정적인 태도 이런 건 어디서 올까요?
바로 변화가 가능하다는 믿음에서 옵니다.
내 인생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나의 태도에 따라서 그 결과가 달라지는 것을 경험할 때 그때 우리는 뜨거운 마음을 갖게 되고 긍정적인 태도를 갖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태도가 고도를 결정한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생명 사역에서 이 문장은 너무나도 중요한 문장이죠.
태도가 고도를 결정한다는 말은 우리 인생의 고도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변화가 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기 때문에 적극적인 태도, 긍정적인 태도로 살아가면 그 변화의 결과를 경험할 줄로 믿습니다.
제가 우리 교회 부임해서 성도님들의 많은 간증을 들었습니다.
동신교회 다니면서 개인이 어떻게 변하고 집안이 변하고 우리 자녀들이 어떻게 변했는지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로 감격스럽습니다.
20년 전에는 그냥 평범한 인생이었는데 전 세계를 바라보며 믿음으로 나아갈 때 우리 자녀들이 글로벌 리더가 되었다는 간증을 많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생명 사역의 대전제가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는 가능합니다.
우리 인생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태도에 따라서 그 결과가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둘째 태도가 고도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사랑과 순종을 연결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할 때 놀라운 기쁨을 경험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본문 10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아멘,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은 아무 어떤 신비롭고 영적인 체험을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자발적인 순종, 기쁨으로 드리는 순종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사랑을 배울 수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 역사를 보면 깊은 영성을 추구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북아프리카 사막으로 가서 혼자서 영성 훈련을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사막 교부, Desert Fathers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사막에 홀로 은둔 생활하면서 아주 금욕적인 고행을 했습니다.
오랫동안 금식 기도하고 혼자 묵상하고 기도하고 말씀에 전념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혼자서 훈련할 때 할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무엇일까요?
사랑과 순종을 실천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혼자서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혼자서 어떻게 순종할 수 있습니까?
사랑하기 위해선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필요합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건 진정한 사랑이 아니죠.
내가 나에게 순종하는 것도 진정한 순종은 아닙니다.
그래서 사막 교부들이 수도원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혼자서 훈련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생활을 통해서 영성 훈련을 했습니다.
그렇게 할 때 서로 간에 사랑하게 되고 순종하게 되는 훈련을 할 수 있었고, 더 깊은 영성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셨을까요?
우리가 그 마음을 볼 수 있을까요?
눈으로는 그 마음을 볼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얼마나 순종하셨는지는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서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그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가끔 보면 부모님께 말로만 효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나중에 돈 벌면 이것도 해드리고 저것도 해드릴게요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죠.
제가 나중에 서울 특급 호텔에 모시고 가서 몇십만 원짜리 오마카세가 있는데 거기 모시고 갈게요라는 말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 말을 믿지 않습니다.
말로만 하는 효도 효도가 아니죠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말로만 하는 것은 효도가 아닙니다.
지금 힘들더라도 돼지갈비라도 대접하는 게 효도죠.
효도는 말로 하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말로 하는 게 아닙니다.
온갖 미사어구로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진짜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는 것입니다.
제가 대구에 와서 대구 분들을 보면서 가장 도전받는 부분이 이것입니다.
대구분들은 말로 하지 않고 행동을 합니다.
행동 진짜 헌신은 말로 하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것 그것이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놀라운 기쁨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한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하는 기쁨입니다.
여러분 어느 교회에 가도 헌신된 그룹이 있습니다.
교회의 규모와 상관없이 반드시 헌신된 그룹이 있습니다.
그런 그룹이 없으면 교회가 제대로 기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 전체의 규모도 중요하지만 헌신된 그룹의 규모는 아마 더 중요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교회는 아주 큰 교회인데 대부분 주일 예배만 출석하는 성도라면 사실 그 교회는 기초가 아주 약한 교회입니다.
마치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을 것입니다.
기초가 튼튼하지 않기 때문에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휘청거릴 것입니다.
주님께서 명하신 생명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선 견고한 헌신된 그룹이 필요합니다.
교육과 훈련을 잘 받으신 분들, 봉사와 사역에 적극적으로 임하시는 그 헌신된 그룹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주일 예배 출석도 중요하지만, 이 생명 사역에 뛰어드는 헌신된 그룹도 정말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새해에는 더욱더 많은 분들이 생명 사역에 뛰어들고 헌신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헌신된 그룹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생명 사역을 위해서라면, 세계 선교를 위해서라면 내가 무엇이든지 하겠다 하는 마음가짐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 그것을 경험하면 정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큰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그 기쁨은 내 뜻이 이루어지는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을 보는 기쁨입니다.
내 방식대로 되어서 기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대로 이루어져서 느끼는 기쁨입니다.
2025년 새해를 시작하면서 여러분의 인생에 이 기쁨이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얼마나 선하고 아름다운지 경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생명 사역에 헌신된 교회는 마음이 뜨겁습니다.
지금도 살아계신 그 예수님을 통해서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마음이 뜨거워진 사람들은 적극적인 태도, 긍정적인 태도로 살아가게 됩니다.
고정형 사고 방식이 아니라 성장형 사고 방식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인생의 고도는 정해진 것이 아니라 나의 태도에 달려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그 예수님의 생명을 체험하여서 올 한 해에도 아름답게 변화되고 성장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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