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대원목사 설교

2025년 1월 19일 대구동신교회

마이코 2025. 1. 26. 16:32

2025-01-19 (주일)ㅣ대구동신교회 주일설교ㅣ다시 생명사역 (2) 성령을 힘입은 사람들ㅣ요한복음 14:12-17ㅣ문대원 목사

 

여러분은 평생에 잊지 못할 설교가 있으십니까? 

요즘 청년들 표현으로 인생 설교가 있으십니까?
저희 딸이 작년에 청소년부 예배를 드리고 와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번 주 설교에 너무나도 큰 은혜를 받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14년 인생에서 가장 감명 깊은 설교를 들었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 설교는 무엇입니까? 

인생 설교를 딱 하나만 꼽는 것은 어려운 일일 수 있겠습니다.
저도 여러 편의 그런 인상 깊은 설교가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두 편의 설교가 기억납니다.
첫째는 2010년도 제3차 로잔 대회에서 들었던 존 파이퍼 목사님의 설교였습니다.
에베소서 3장 말씀을 본문으로 이렇게 말씀을 전하셨는데 이 복음이 열방으로 전해지기 위해서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첫째는 고난이고 

둘째는 기도라고 하셨습니다. 

그 메시지를 통해서 받았던 그 은혜와 감동이 지금까지 생생합니다.

사실 이제 선교사들 사이에서 선교 학자들 사이에서 오랜 토론 주제가 있었습니다.
'복음 전도가 중요한지, 사회 참여가 중요한지' 를 가지고 많이 논쟁했습니다.
로잔 운동은 이 두 가지를 통합한 총체적 선교를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존 파이퍼 목사님에 따르면 세계 선교를 어떤 전략으로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전파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성도들의 고난과 또한 성도들의 기도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선교에 대한 저의 이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저희 두 번째 인생 설교는 2019년 생명 사역 컨퍼런스에서 들었던 권성수 목사님의 설교였습니다.
권 목사님께서 이제 둘째 날 저녁에 성령 사역과 성령 설교에 대해서 강의를 하셨습니다.
종신대학원 교수셨던 목사님께서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성령의 역사를 설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동신교회에서 어떻게 성령 사역을 감당하고 계신지 말씀하셨습니다.
권 목사님께서 쓰신 설교학 교과서가 있는데 제목이 성령 설교입니다.
성경을 깊이 주회해서 설교하되 성령의 능력으로 선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고 계신 베스트 사역 Bible Exposition Spirit Transformation이 바로 여기에서 왔습니다.


이 강의를 듣고 저와 아내가 너무나 큰 감동과 도전을 받았습니다.
끝나고 집에 숙소로 와서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너무나도 흥분되어서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저희가 오랫동안 찾고 있었던 성령 사역에 대한 신학적인 목회적인 답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권석수 목사님께서 가장 존경하는 신학자가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즈입니다.
제가 제일 존경하는 신학자도 조나단 에드워즈입니다.
이분은 말씀 중심의 보수적인 신앙을 가짐과 동시에 성령의 불을 체험한 부흥사였습니다.
우리가 흔히 이제 영성과 지성을 모두 갖추었다라는 말을 하는데, 현실적으로 그런 분은 거의 없습니다.
영성과 지성 둘 중에 하나만 갖추어도 사실은 아주 대단한 인물입니다.

이 두 가지를 모두 갖춘 사람이 바로 조나단 에드워즈였습니다.
그분의 사역으로 인해서 근대 복음주의 운동이 시작되었고 또 근대 선교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생명 사역 컨퍼런스를 통해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사역을 이어가는 생명 사역의 진수를 발견했습니다.
말씀 중심의 신앙을 지켜가면서도 동시에 뜨거운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는 교회를 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목회의 길을 열어주신다면 생명 사역을 위해 헌신하겠습니다라고 그때 기도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동신교회를 섬기게 된 것은 그때 그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믿습니다.
여러분 생명 사역은 말씀 중심의 신앙과 성령의 역동적인 사역이 결합된 너무나도 귀한 사역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렇게 밝고 역동적인 것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랜 생명 사역의 결과입니다. 

생명 사역은 성령을 힘입은 사람들이 감당하는 그런 귀한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속한 요한복음 14장부터 17장까지를 예수님의 고별 담화 페어웰 디스코스라고 부릅니다.
이 땅에서 공생애 사역을 마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 당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군가의 인생에서 마지막 당부는 너무나도 중요한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마지막 당부는 제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메시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분이 감당하셨던 생명 사역을 계속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2절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오,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아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모든 마을에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시고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약한 자들을 고치셨습니다.
복음으로 사람을 살리고 키우고 고치는 생명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하셨던 그 생명 사역을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약속이기도 하고 동시에 명령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사역을 계속 감당할 수 있다는 약속의 말씀인 동시에 또한 그렇게 해야 한다는 명령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놀라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다라는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은 어떤 의미일까요?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보다 더 놀라운 기적을 우리가 행할 것이라는 뜻일까요?
우리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고 죽은 자를 살릴 것이라는 의미일까요?
이 구절을 이해하는 데 핵심은 마지막 그 부분에 있습니다.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가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주님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타락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다 완성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비로소 제자들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대속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은 마지막 날의 모든 믿는 자들의 부활을 미리 보여준 사건임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흐릿하게만 보였던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통해서 너무나도 완벽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제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감당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이전에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 아주 큰 칭찬을 받은 사람이 나옵니다.
바로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예수님을 보고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이 말은 세례 요한이 똑똑해서 지식이 많아서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장차 어떤 일을 하게 될 것을 예언적으로 선포한 것입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하셨기 때문에 세례 요한이 이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 11절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아멘.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 중에서 세례 요한은 구원에 대한 가장 정확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이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천국에 가면 지극히 작은 자도 그보다 더 크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말은 칭찬일까요? 칭찬이 아닐까요? 헷갈립니다.
칭찬인 것 같기도 하고 칭찬이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크고 작음은 어떤 서열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친밀감, 하나님의 뜻을 잘 아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크고 작음의 의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세례 요한이 가장 큰 자였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뜻과 구원에 있어서 세례 요한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보지 못하고 먼저 죽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 성취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모두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자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구원에 있어서 더 온전한 이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더 큰 일을 할 것이다라고 말하신 것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예수님보다 더 놀라운 기적을 행할 것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하지 못했던 더 놀라운 일을 행할 것이라는 의미도 아니고, 주님의 부활과 승천으로 완성된 하나님의 그 구원을 더 확실하게 선포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이전에는 모든 것이 희미했습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고 말씀하시는데 그게 어떻게 임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승천과 성령의 강림으로 인해서 제자들은 하나님의 뜻과 구원을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 힘 있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유대와 갈릴리 지역에서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팔레스타인 지방 바깥으로 가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전 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에 가서 구원자 되신 예수님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욱 힘 있게 증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다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이 생명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연약한 우리의 힘으로는 이 일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보혜사 성령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아멘.

예수님께서 또 다른 보혜사를 우리에게 보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보혜사를 뜻하는 헬라어가 파라클레터스인데 이 의미는 그리스 법정에서 법적 자문을 해주는 대변인을 뜻합니다.


여러분 법정에서는 말 한마디 단어 하나도 조심해야 됩니다.
내가 하는 모든 말이 나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옆에서 법적인 자문을 해주는 사람이 있는데 대변인 혹은 변호사라고 부르겠죠.
헬라어 파라클레이토스가 바로 그런 의미이고 한글 성경은 보혜사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예수님께서 보혜사 앞에 또 다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또 다른 보혜사라고 하셨는데 이 말은 우리에게 이미 보혜사가 있었다는 것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원래 보혜사가 있는데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겠다라는 뜻이지요.
그렇다면 우리에게 원래 있던 그 보혜사는 누구일까요?
요한일서 2장 1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아멘.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고 대언해 주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가 앞에 나온 것과 똑같은 파라클레토스입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에 나오는 보혜사와 요한일서에 나오는 대언자가 동일한 헬라어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를 대변하시는 성령님의 역할과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예수님의 역할이 동일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성령을 가리켜 '예수의 영'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성령님과 예수님은 동일한 분이십니다. 

동일한 본성을 가지셨고 동일한 능력과 영광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말씀이셨고 성령님은 진리의 영 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변호하는 대원자이시고 성령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보혜사이십니다.
혹시 여러분은 예수님의 12 제자가 부럽지 않으셨습니까?
예수님을 직접 만나서 직접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기적을 직접 봤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부럽지 않으십니까? 

저는 청년 시절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엄청 부러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따르면 예수님도 파라클레토스이고, 성령님도 파라클레토스입니다.
예수님도 보혜사이시고 성령님도 보혜사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셨던 것처럼 성령님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동일한 본성을 가진 그 인격적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동일한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이것을 깨달은 이후에는 제가 제자들을 더 이상 부러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동행했던 것처럼 우리 또한 성령님과 동행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대언자가 되셨던 것처럼 성령께서 우리의 보혜사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생명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 능력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보혜사 성령님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생명 사역의 핵심은 생각의 틀과 성령의 불입니다.
진정한 변화는 인격적인 변화이기 때문에 머리의 변화도 필요하고 마음의 변화도 필요합니다.
우리 교회는 체계적인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 생각의 틀을 변화시키고자 노력합니다.
세속적인 사회에서 성경적인 세계관으로 무장되기 위해선 의식적인 노력, 체계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5대 사역 중 하나인 교육과 훈련을 다룰 때 자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생각의 틀을 바꾸는 동시에 우리 마음 가운데 성령의 불을 체험해야 합니다.
머리에 지식이 많다고 성경 잘 안다고 영적으로 성숙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성숙한 사람은 지성적으로도 탁월한 동시에 영적으로도 뜨겁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은 뜨겁습니까? 

여러분은 성령의 불을 경험하셨습니까?
이렇게 질문하면 내가 성령의 불을 경험했는지 아닌지 확실치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는 알고 있습니다. 

내가 그 뜨거운 성령님을 체험했는지 안 했는지 내가 알 수 있습니다.
내 마음 뜨겁게 하는 그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던 시간, 눈물 콧물 다 쏟으면서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진심으로 회개했던 시간 하나님께서 실제로 살아계시고 나를 사랑하시고 계심을 분명하게 느꼈던 시간 여러분에게는 그런 시간이 있으셨습니까?
성령의 불을 경험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다릅니다.

제가 아무리 말씀을 전해도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분들에게는 피상적으로 들릴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실제로 경험한 분들은 제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분명하게 아실 것입니다.
비유를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예를 들어서 수성못에 새로 생긴 유명한 맛집에 다녀와서 누가 이야기하는 겁니다.
야 거기 음식 정말 맛있지 않냐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거기에 가봤던 사람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알 것입니다.
그래 나도 가봤는데 거기 음식 어떤지 정확하게 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식당에 가보지 않은 사람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모를 것입니다.
설명을 들으면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정확하게 공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직접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제가 아무리 성령의 불에 대해서 설교를 해도 여러분이 직접 경험해 보셔야 합니다.

성령의 불을 받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여러분이 직접 경험해야지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아무리 실감나게 설명해도 직접 경험하기 전까지는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20세기 중반 영국에서 놀라운 부흥을 이끌었던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리했습니다.


영적인 세계를 실감하게 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체험하게 된다.
자신의 죄와 무능을 깨닫게 된다. 

구원으로 인해 넘치는 기쁨과 평강을 얻게 된다.
다른 사람의 구원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여서 모이기에 힘쓰게 됩니다.
여러분은 이 6가지 중에서 몇 개를 경험해 보셨습니까?
어떤 분은 한두 가지 경험해 보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불을 체험한 사람은 이 6가지 모두를 경험하게 됩니다.
성령을 체험하면 영적인 세계가 허상이 아니라 실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실제로 계시고 그분이 내 마음과 영혼을 만지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바라볼 때 내가 얼마나 더럽고 추한 죄인인지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나의 죄가 얼마나 더럽고 악한지 알기 때문에 성령을 경험한 사람은 그 죄를 미워하게 됩니다.
그 죄가 나를 얼마나 망치는지 볼 수 있기 때문이죠.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인 동시에 사랑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나 같이 더러운 죄인을 용서해 주시고 용납해 주십니다.
그 구원의 기쁨과 감격은 정말 말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내가 용납받고 내가 사랑받은 그 기쁨은 도저히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그런 기쁨을 경험한 사람의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반응은 다른 사람의 구원에도 관심을 갖게 됩니다.
야 어떻게 나 혼자만 이 기쁨을 누릴 수가 있냐 그래서 전도와 선교에 힘쓰게 됩니다.
성령을 경험한 사람 중에서 전도와 선교에 관심이 없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기 때문에 모이기에 힘씁니다.
주일에도 모이고, 금요일에도 모이고 새벽에도 모입니다.
교회에서 특별 집회가 있다고 하면 너 왜 그런 거 해가지고 사람 귀찮게 하냐라고 하지 않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참여합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성령의 불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교회에 오신 지 얼마 안 되신 분들, 예수님 믿으신 지 얼마 안 되신 분들은 이 6가지 중에서 아직 하나도 경험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한 지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났는데도 위에서 말씀드린 것을 하나도 경험해 보지 못한 분이 계시다면 제가 안타까운 심정으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꼭 성령의 불을 체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지금까지 교회 다니면서 한 번도 눈물로 기도해 본 적이 없다 하시면 꼭 성령의 불을 경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의 불을 경험하면 신앙생활의 차원이 달라집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지금도 역사하셔서 말씀하신 하나님을 경험하면 믿음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지금까지 내 신앙이 얼마나 피상적이었는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보호를 경험하면 여러분 신앙생활이 뜨거워집니다.
성경책 읽을 때에도 피상적으로 그렇게 읽지 않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 그 하나님의 역사가 너무나도 현실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나도 이거랑 똑같은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감옥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셨다 말씀합니다.
다윗이 광야에서 쫓길 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셨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 사람은 이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고난 가운데 있을 때, 내가 광야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에 대해서 신기한 점이 하나가 있습니다. 

내가 성령의 불을 받으면 나만 아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압니다.
내 안에 성령의 불이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도 아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요셉이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요셉이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에 성령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그 꿈을 해석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바로 왕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창세기 41장 38절 함께 읽겠습니다.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오 하고 

 

바로 왕이 요셉을 보고 말합니다.
야 이 사람은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다. 

여러분 바로 왕이 하나님을 믿었을까요?
안 믿었을까요? 당연히 안 믿었습니다. 

그는 이방 왕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이방 왕이 보기에도 이 요셉은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의 말과 행동을 보면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야 이 사람이 성령 충만하구나라고 알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성령의 벌이 있으면 다른 사람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든 사람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상대방이 진정으로 말하는지 아니면 건성으로 말하는지 아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부부 간에 말 실수했을 때 미안해 할 때가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미안하지 않은데 그냥 상대가 기분 나빠하니까 미안해 하는 거죠.
그럼 상대방이 알까요? 모를까요? 

알죠!

뭐가 미안한데라고 질문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제가 설교 시간에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간증하면 이게 진짜 있었던 이야기인지 아니면 가짜로 꾸며낸 이야기인지 여러분이 알까요? 모를까요?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불을 체험하면 나도 알고 다른 사람도 압니다.
내 안에 성령의 불이 있는지 없는지 나도 알고 다른 사람도 압니다.


제가 대학교 1학년 때 성령의 불을 체험했습니다.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고, 방언의 은사도 받았습니다.
하루하루 신앙생활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기뻤는지 모릅니다.
정말 매일 기도하고 매일 큐티하고 매일 찬양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교회 청년부 선배가 저에게 별명을 하나 붙여줬습니다.
그 별명이 '은혜돌이'였습니다. 

입만 열면은 이 말씀에서 은혜 받았다 저 말씀에서 은혜 받았다 하도 은혜 얘기 많이 은혜돌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성령의 불을 경험하면 나도 알지만 다른 사람도 압니다.
우리 마음 안에 가득한 그 기쁨과 평안을 숨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성령의 불을 체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을 만지시고 회복시키시는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성령은 신비한 능력 에너지가 아니라 인격이라는 사실입니다.
성령은 요술, 방망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 나름대로 성령에 대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성령 충만 받은 거야 이렇게 하면 성령이 역사한 거야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무언가 뜨겁고 목소리가 크고 흥분되면 이것이 성령 충만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안에 열정이 넘치고 열심이 가득하면 그것이 성령 충만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내 안에 뜨거운 마음이 있고 열심히 넘치는데 그것이 성령 충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베드로의 경우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기본적으로 마음이 뜨거운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목소리도 컸을 거예요. 그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많은 것을 버렸습니다.
배도 버리고, 그물도 버리고, 심지어 아내와 가족까지 버렸습니다.
그렇게 뜨거운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정말로 기뻐하시는 믿음의 고백도 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께서 너무나 기뻐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또 이렇게 기뻐하신 적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기뻐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직후에 베드로가 또 엉뚱한 말을 했죠.
예수님께서 내가 고난 받아야 한다라고 하니까는 결코 이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한글 성경에는 항변했다라고 나오는데, 영어 성경에는 리뷰크라고 나와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꾸짖은 겁니다. 내가 예수님 너무너무 사랑하니까 이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해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꾸짖었습니다.
그 정도로 베드로 안에 열정이 가득했고 뜨거운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3절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아멘,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말을 들으시고 사탄아 물러가라 하셨습니다.
이 말은 베드로가 사탄이라는 뜻이 아니라 베드로가 한 그 말이 사탄의 생각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뜨거운 마음으로 뜨거운 열정으로 예수님 사랑하니까 예수님 위에서 그 말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말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사탄의 생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있는 어떤 열정이나 열심히 뜨거운 마음이 곧 성령 충만이라고 우리가 또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령은 신비한 능력이나 에너지가 아닙니다. 성령은 인격이십니다.
또한 성령은 하나님이십니다. 

초대교회가 고백한 니케아 신경은 성령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성령님을 믿는다. 그분은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발출하신다. 

또한 그분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신다라고 고백합니다.


예전에 보면 우리 어르신들 부흥사 목사님 중에서요.
성령 받으라, 성령 받으라 이런 분들 계셨죠? 

마이크로 막 이상한 소리 내면서 바람 소리 하면서 막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시는 분들 계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성령을 영적인 능력, 불과 바람과 같은 현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은 능력이 아니라 인격이십니다. 성령은 신비로운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성부 하나님 경외하고 성자 예수님 경외하는 것처럼 성령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미국의 부흥사 A.W. 토저 목사님은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한 구체적인 조언을 하셨습니다.



첫째로 나의 몸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나의 몸과 마음, 나의 인격과 나의 모든 소유가 하나님께 속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채우셔야 한다고 겸손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둘째로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구하지 않아도 그냥 성령을 부어주겠다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간절한 마음, 사모하는 마음으로 구할 때 성령을 부어주시겠다 약속하셨습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순종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 성령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네 번째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종교 의식을 행함으로써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성령을 받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처럼 믿음으로 성령을 받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성령 충만을 받으려면 우리의 그릇이 깨끗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이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던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렇게 가난한 마음으로, 절박한 마음으로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이번 주 금요일에는 이제 마지막 신년 기폭이 있습니다.
매년 신장 기폭에서 우리가 성령 충만을 위해서 기도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이번 주 금요일에 성령 충만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아직까지 성령의 불을 경험하지 못한 분이 계시다면 사모하는 마음으로 오셔서 함께 기도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성령의 불은 신비로운 현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과 의지와 감정이 성령의 역사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A.W. 토저  목사님은 성령의 불을 5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첫째로 도덕적인 불입니다. 거룩을 사모하고 건강한 도덕성을 회복하게 됩니다.
둘째로 영적인 불입니다.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가능하게 하는 불입니다.
셋째로 지적인 불입니다. 은혜로 회복된 최고 수준의 지성적인 사고를 가능하게 합니다.
넷째로 의지의 불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순종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다섯 번째로 감정해 불입니다. 죄로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감정의 회복을 가져다줍니다.


성령의 불은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 이르기까지 전인적인 변화를 가져옵니다.
죄로 타락한 우리의 인격이 성령의 역사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5가지 모두 말씀드리고 싶지만 시간 관계상 마지막 감정의 영역만 살펴보겠습니다.
성령의 불이 임하면 우리의 감정이 회복됩니다. 

 

A.W. 토저 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가 인류에게 가져다준 가장 큰 해악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정상적인 감정을 타락시켰다는 것이다.
우리는 웃기지도 않은 것을 보고 웃고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시키는 것을 즐기며 사랑해서는 안 될 것에 애착을 느낀다라고 말했습니다.
죄로 인해서 우리의 감정까지도 타락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진정한 즐거움을 느낄 수 없게 되었고, 상대방의 아픔에 공감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불이 임하면 우리의 감정이 회복됩니다.
기쁜 일에 함께 기뻐할 수 있게 되고요. 

슬퍼서 힘들어하는 사람들, 함께 울 수 있는 건강한 감정의 회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감정적으로 안정됩니다. 여러분 주변에 보면 감정적으로 불안한 경우가 있지요.
좋을 땐 한없이 좋았다가 작은 일에 갑자기 다운되는 경우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은 평강의 영이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세상에 줄 수 없는 견고한 평광을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감정적으로 안정된 사람으로 변화시켜 나가십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안정된 사람입니다. 

어떨 땐 뜨겁고 또 어떨 땐 차가운 사람 이런 사람은 안정된 사람이 아닙니다.
Up and Dwon 이 없고 꾸준한 사람, 한결같은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 거할 때 그렇게 안정된 사람으로 변화될 줄로 믿습니다.
성령은 인격이시고 하나님이십니다. 

인격이시기 때문에 함께 보내는 시간에 비례해서 관계가 깊어집니다.
성령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새해에는 더 많은 시간 주님을 의식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을 힘입은 사람이 되어서 주님께서 명하신 생명 사역을 능력 있게 감당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fiCgyFyHM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