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주일 예배를 드리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새해에도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을 붙잡고 믿음으로 담대하게 나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은 새해를 시작하면서 어떤 결심을 하셨습니까?
느슨했던 부분들을 돌아보시면서 새롭게 다짐한 것들이 있으십니까?
우리 자신을 솔직하게 돌아보면 게으른 부분도 있고 부족한 부분도 있습니다.
내가 부족한 것을 알고 있는데 계속 그렇게 살아간다면 그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부족한 것을 인정하고 변화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한 번 해서 안 되면 두 번 노력하고 두 번 해서 안 되면 계속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꾸준하게 노력할 때 언젠가 변화의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백도시가 이르러서 물이 끓는 것과 비슷한 이치입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90도까지 왔고 조금만 더 하면 되는데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변화에 대해서 제가 좋아하는 격언이 하나 있습니다.
'당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오직 어제의 당신하고만 비교하라'는 말입니다.
조던 피터슨이 한 이야기입니다.
내 인생을 다른 사람하고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시작이 다르고 강점이 다르고 목표가 다른데 다른 사람하고 단순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비교해야 할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과거의 나입니다.
1년 전에 비해서 내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1년 전에 비해서 나의 믿음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나의 성품이 얼마나 성숙했는지, 또 나의 실력은 얼마나 성장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지난 송구영신 예배 때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의 믿음은 변화합니다.
믿음의 성장이 있을 수도 있고 믿음의 퇴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더 나은 모습으로 변화될 수도 있고 더 나쁜 모습으로 변화될 수도 있습니다.
가끔 보면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인생을 아주 단편적으로 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 성령의 역사도 있고 또한 사탄의 역사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예수님을 믿지 않던 사람이 뜨거운 신앙을 가지게 되는 것을 본 경우가 있으십니까?
저는 그런 경우 많이 봤습니다.
왜 그런 일이 나타날까요?
성령의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믿음이 좋았던 사람이 갑자기 추락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탄의 역사도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사와 사탄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변화됩니다.
더 나은 모습으로 변화될 수도 있고 더 나쁜 모습으로 변화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 우리가 올해 더 나은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을지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아무한 시대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했던 기원전 740년부터 700년까지는 앗수르 제국이 강력하게 부상하던 시기였습니다.
고대 역사가들이 평가하는 앗수르 제국은 매우 포악한 나라였습니다.
앗수르가 남긴 역사 기록물 양각 부조가 있는데요.
전쟁 포로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그 이미지를 보고 있으면 너무너무 잔인해서 제가 보여드릴 수가 없습니다.
동물을 잡아다가 끌고 가는 것보다 훨씬 더 잔인하게 사람들을 잡아서 끌고 갔습니다.
살아있는 채로 사람의 가죽을 벗기기도 하고 산 채로 기름에 뜨거운 기름에 넣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포악한 나라가 앗수르였습니다.
그런 앗수르가 강성해져서 북 이스라엘을 공격해 왔습니다.
북이스라엘은 혼자 힘으로 감당할 수 없으니까 아람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남 유다는 북이스라엘과 아람의 동맹에 함께할 것인지 아니면 애굽으로 내려가서 도움을 요청할 것인지 갈팡질팡하고 있었습니다.
한 치를 알 수 없는 그 위기의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여러 가지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죄를 경고하며 심판이 임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죄악을 떠나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악한 도구인 앗수르와 바벨론에 대한 심판의 말씀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61장에 이르러서는 회복과 구원의 말씀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방 땅에 포로로 잡혀갈 것이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회개한다면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회의 회복의 은혜를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은 절망적이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61장 1절 말씀 우리 함께 읽겠습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노임을 선포하며,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메시아가 오시면 치유가 임하고 회복이 임할 것입니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가 선포되고 해방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 메시아가 선포할 메시지는 아름다운 소식, 기쁜 소식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아름다운 소식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는 소식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공의와 정의로 열방을 다스리십니다.
또 하나님은 그분의 신실한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언약에 따라서 이스라엘을 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그 약속을 잊었을지언정, 하나님은 절대로 그 약속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회복은 어떤 정치적인 술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와 그분의 신실한 언약에 있습니다.
이사야서에 보면 그 후반부에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에 대한 약속이 많이 선포되어 있습니다.
그 중심에는 종의 노래라는 총 4번에 걸쳐 나오는 노래가 있습니다.
장차 오실 메시아가 어떤 모습인지 선포하는 것인데 고난받는 종의 모습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첫 번째 종의 노래는 42장에 나와 있고,
두 번째 노래는 49장,
세 번째 노래는 50장,
네 번째 노래는 53장에 나와 있습니다.
시간 관계상 다 읽을 시간 없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씀들입니다.
예를 들어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오,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같은 이런 말씀들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고난받는 종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고난당하시고 우리를 의롭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참된 구원과 회복을 주신 그 예수님은 열방을 비추는 빛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나사렛 회당으로 가셨습니다.
안식일에 회당에 가셔서 성경을 읽으실 때 오늘 본문 이사야 61장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어쩌다가 우연히 성경을 피니까 거기가 나온 것이 아니라 이 예언의 말씀이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되었음을 선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누가복음 4장 18절부터 21절까지 우리 함께 읽겠습니다.
-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이사야 61장 말씀을 읽으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기원전 700년에 이 말씀을 예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가 오시면 치유와 회복과 구원이 임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은 너무나 절망적이지만 영원한 소망과 구원을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700년 후에 이 약속의 말씀을 읽으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고난받는 종의 사명을 받아들이셨다는 의미입니다.
이사야가 예언했던 메시아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영광스러운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고 영광을 받는 그런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과 같이 우리 죄와 허물을 지고 고난당하는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고난받는 종의 사명을 받아들이셨다고 선포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치유와 회복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기꺼이 고난받는 종의 사명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눈앞에 보이는 현실에 갇히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배경, 조건, 능력이 인생을 결정한다고 믿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다 좋은 기회가 있었다.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은 다 출신 배경이 나빴다.
모든 것은 타고난 재능과 능력으로 다 결정된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미국의 경영학자 데이빗 슈워츠는 크게 생각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둔 수많은 사람들을 연구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키나 체중, 학력이나 집안 배경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그들은 생각의 크기에 따라 평가된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생각의 크기라는 이 표현이 조금 뻔하게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서서 미래의 가능성과 희망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이 능력은 아무에게나 있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기업 투자자는 미래 가치가 있는 기업을 찾아서 그 기업에 투자를 합니다.
여러분, 그러면 어떤 기업에 미래 가치가 있을까요?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일반인들은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의 가치를 보는 안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업의 재무 구조, 인적 자원, 기술 이렇게 개발을 분석해서 아 이 기업이라면 지금은 미약하지만 5년 후에는 이 정도 성과를 낼 것이다라고 예측합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성과를 미리 예측하고 과감하게 투자합니다.
생각의 크기가 큰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 안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조건, 배경 능력이 인생을 결정한다고 함부로 말하지 않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상황에 절망하지 않고 미래의 가능성과 소망을 볼 수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 하나님께 약속을 받은 우리야말로 미래에 대한 소망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구원과 회복의 때가 이르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은혜의 때에 나타날 일들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우리에게 새로운 이름이 주어진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슬픔을 기쁨으로 변화시키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십니다.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이사야 61장 3절 함께 읽겠습니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죄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하나님께서 구원의 날에 주시는 이름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심으신 의의 나무'라는 이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의 나무'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셨습니다.
새로운 이름은 새로운 정체성, 새로운 관계를 의미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언약을 맺을 때 새로운 이름을 주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을 때 그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17장 4절 5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아멘.
아브라함의 원래 이름은 아브람이었습니다.
그 의미는 높임을 받은 아버지 exalted father 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와 언약을 맺으면서 새로운 이름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지었는데 그 의미는 많은 나라의 아버지 the father of many nations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많은 민족을 이루시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고대 사회에서는 언약을 맺을 때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정체성, 새로운 관계 안에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는 최초의 장면이 나옵니다.
창세기에서 아담이 하와에게 이름을 붙여주는 장면입니다.
창세기 3장 20절 함께 읽겠습니다.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아멘. 아담이 결혼할 때 아내에게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결혼이 언약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결혼은 계약이 아니라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을 때 새 이름을 주셨던 것처럼, 아담이 아내와 언약을 맺을 때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서양에서는 결혼을 하면 아내가 성을 바꾸지요.
남편의 성을 따라서 아내의 성을 바꿉니다.
이것은 부부 관계가 '언약적인 관계'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한몸이 되었고 그 관계는 영원하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새로운 이름은 새로운 정체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신 것은 그들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주신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거룩하고 택한 사람들이라는 정체성입니다.
영국의 기독교 사상가 스에스 루이스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구원은 단지 더 착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구원은 말에게 더 잘 뛰는 법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말을 날개 달린 동물로 변화시키는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매우 심오한 말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단지 더 착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닙니다.
전에는 이기적이었던 사람이 조금 덜 이기적인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말과 같이 달려가던 자가 날개를 받아서 이제는 날아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달려가는 게 빠를까요? 날아가는 게 빠를까요?
당연히 날아가는 게 훨씬 더 빠르겠죠.
하나님은 우리가 하늘을 날아갈 수 있도록 새로운 존재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그런데 날개가 생긴 이 말이 날아가지 않고 여전히 달려가는 것입니다.
날개로 나는 것이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우니까 그냥 전보다 더 열심히 뛰어가려고 노력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새로운 정체성에 맞게 행동해야 합니다.
과거의 방식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에 얼마나 강력한 힘이 있는지 강조를 많이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자기 정체성에 맞게 행동합니다.
축구로 예를 들자면 조기 축구 선수는 조기 축구 선수처럼 행동합니다.
프리미어리그 선수는 프리미어리그 선수처럼 행동합니다.
조기 축구 선수는 술, 담배를 편하게 할 것입니다.
자기가 먹고 싶은 대로 먹고 그냥 운동도 적당히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프로페셔널이 아니라 취미로 그 운동을 하기 때문이지 하지만 프리미어 리그 선수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프리미어리그 선수는 절대로 먹고 싶은 대로 먹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식단 관리를 하고 정해진 스케줄대로 훈련을 합니다.
예를 들어서 포르투갈의 호날두 선수는 평생 동안 콜라를 안 마신다고 합니다.
야 콜라가 얼마나 마시는데 왜 콜라를 안 마실까요?
세계 최고의 운동 선수에게 탄산 음료가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저는 정체성의 힘을 또한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나는 세계 최고의 운동 선수이다라는 정체성이 있으면 거기에 맞게 행동합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다 먹는 음식이라 하더라도 건강에 좋지 않으면 얼마든지 먹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거룩한 백성이다라는 정체성이 있으면 그 정체성에 맞게 행동하게 됩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다 하는 행동이더라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옳지 않으면 얼마든지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심으신 의의 나무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드러내는 나무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새로운 이름은 우리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주었습니다.
새로운 정체성을 가졌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새로운 사명을 감당할 줄로 믿습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황폐되었던 그 성을 다시 세우는 일입니다.
본문 4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것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옛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오래 황폐되었던 성을 다시 세우시기 원하십니다.
여러분 황폐한 성은 사람들의 조롱거리입니다. 과거의 영광을 잃어버린 성은 사람들에게 놀림을 받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일 수도 있겠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황폐한 성과 같이 사람들의 조롱을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나가서 교회 다닌다고 하면 요즘 같은 때에도 교회를 다니냐고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손가락질을 받고 멸시를 당하는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시대의 모습도 이와 동일했습니다.
오랫동안 버려진 황폐한 성을 보면서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조롱했습니다.
야 너희를 애굽에서 구원하신 그 하나님은 어디에 있느냐라고 조롱했습니다.
이사야는 그렇게 답답한 시간을 견뎌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행하실 구원의 역사를 기다리며 오랫동안 인내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160년이 흘러서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를 통해서 하나님은 그분의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여러분 고레스 왕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었는데 그 약속을 이룬 그 과정이 너무나도 놀랍습니다.
여러분 고레스가 왜 예루살렘의 재건을 도와주었을까요?
갑자기 그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이런 일을 했을까요?
페르시아 제국의 입장에서 예루살렘이 재건되면 좋은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페르시아의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애굽을 견제할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대인들이 모여 살면 애굽의 세력이 확장되는 것을 견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고레스 왕은 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 일을 했을까요?
아니면 신앙적인 목적으로 이 일을 했을까요? 우리가 알 수가 없죠.
우리가 고레스의 마음에 들어가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고레스 왕을 통해서 그분의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고레스가 정치적인 목적으로 했는지 신앙적으로 목적으로 했는지 우리는 나를 다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주님의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사회와 교회를 바라볼 때 황폐한 모습이 우리 마음을 안타깝게 합니다.
과연 언제 이 모습이 회복될 수 있을지, 언제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지 도무지 소망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여전히 역사를 주관하시고 열방을 통치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고레스 왕을 통해서 하나님은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하나님은 이 나라와 이 민족, 한국 교회를 회복시키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이름, 새로운 정체성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받았으니 우리는 주님께 순종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기도와 순종을 통해서 놀라운 회복의 역사를 행하실 줄로 믿습니다.
역사를 주관하시고 열방을 통치하시는 그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주님께서 맡기신 생명 사역의 기쁨으로 헌신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길이 있고, 그런가 하면 더 나쁜 사람이 되는 길이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오늘과 내일이 다릅니다.
여러분 우리는 더 나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더 나쁜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길을 선택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은 어렵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신체적으로 더 건강한 사람이 되는 길은 어렵습니다.
식단 관리를 하고 정기적으로 운동하는 것은 쉽지 않고 어렵습니다.
반대로 더 나쁜 사람이 되는 길은 비교적 쉽습니다.
중독, 쾌락, 게으름에 빠지기 위해서 여러분 우리가 특별한 결단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집에서 유튜브를 보기 위해서 우리가 특별한 결심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은 반드시 유튜브 1시간 보고야 말 거야 이렇게 결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그 일을 하게 됩니다.
지난 금요일 신년 기폭을 마치고 이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따라 너무너무 라면이 먹고 싶었습니다.
여러분 밤에 라면을 먹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어려운 일입니까?
쉬운 일이죠 여러분 정말 라면 먹기 싫은데 억지로 결단해서 라면 먹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밤에 라면을 먹는 것이 쉬운 일인데 건강에 좋은 일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건강이 나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기 쉬운 대부분의 일은 몸에 나쁩니다.
반대로 하기 어려운 일은 대부분 다 좋은 일입니다.
여러분은 쉬운 일을 하겠습니까? 아니면 어려운 일을 하겠습니까?
질문을 바꿔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쉬운 일을 해서 더 나쁜 사람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어려운 일을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겠습니까?
참고로 저는 지난 금요일 밤에 라면을 먹지 않았습니다.
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신체적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렇게 결단했습니다.
그 순간에는 힘들었지만 다음 날 아침이 되니까 안 먹기를 잘했다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정체성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래 황폐되었던 그 성을 다시 세우게 하셨습니다.
그 이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직분이 있습니다.
본문 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이방 나라들의 세금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니라.
아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사장의 직분을 주셨습니다.
예루살렘이 회복된 이후에 우리에게 주어진 직분은 왕이 아니라 제사장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사람들의 섬김을 받는 왕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입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19장 말씀의 성취이기도 합니다.
19장 6절에 보면 '너희는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될 것이다'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제사장 나라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제사장의 역할은 중재하는 것, 중보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로 타락한 이 세상 사이에서 중보하는 것이 제사장의 역할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역할을 예루살렘 이스라엘에게 주셨고 또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여호와의 제사장으로서 살아가는 것은 큰 영광과 특권입니다.
이 세대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또한 죄로 타락한 세상을 위해서 중보하는 것은 큰 특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귀한 제사장의 직분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제사장은 무엇보다도 거룩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거룩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연약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혼자 힘으로 거룩하기가 힘듭니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 격려하고 서로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가 함께 거룩함을 지켜 나갈 수 있습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처럼 우리가 서로가 서로의 거룩함을 지키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세상에 많은 교회가 있지만 저는 대구 동신교회가 정말 좋은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가 왜 좋은 교회인지 수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교회는 뜨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세계 선교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는 헌신적인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들의 헌신도는 이루 말할 수가 없죠.
1년에 해외로 단기 선교팀을 30팀 이상 보내는 교회입니다.
LMPC 선교 훈련 모집을 하면 10분 안에 마감되는 교회입니다.
한국 퍼스펙티브 훈련을 총괄하시는 분이 보기에도 대구 동신교회 너무너무 신기한 교회라고 감탄할 정도입니다.
여러분 동신교회는 좋은 교회가 맞는데 동신교회 성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동신교회 성도 하는 거 아무나 못하죠.
기본적으로 받아야 하는 교육과 훈련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신년 기폭에도 와야 하고 특새도 와야 합니다.
동신교회는 좋은 교회인데 동신교회의 성도가 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하물며 동신교회에서 목회자로 사역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 교회 사역 강도가 세기 때문에 우리 교회 사역자가 되는 것 아주 어려운 일이죠.
그런데 우리 교회 교육자가 되면 좋은 점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교역자들이 성장하고 발전하기를 기대하고 격려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와 달란트가 모두 다 나타나는 그런 최고의 모습을 서로서로 격려합니다.
교역자들 사이에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습니다.
누가 설교를 잘했다고 해서, 누가 사역을 잘했다고 해서 질투하지 않습니다.
사역을 잘한 사람이 있으면 진심으로 기뻐하고 축하해 줍니다.
이것은 제 말이 아니라 교육자들의 고백입니다.
최근에 제가 전체 교역자들에게 그동안 우리 교회에서 사역하면서 느꼈던 점과 변화된 점을 좀 적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중에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중에 공통적인 부분이 하나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는 서로의 성장과 발전을 격려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서로서로 질투하거나 시기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간에 배울 점을 나누고 서로의 성장을 격려하는 문화가 있습니다.
누가 사역을 잘하면 나도 그렇게 성장하고 발전해야지 자극을 받고 도전을 받는다고 합니다.
캐나다의 심리학자 조던 피터스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너무너무 멋진 말입니다.
선하고 건강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것 좋은 일이죠.
하지만 결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도 그렇게 선해야 하고, 나도 그렇게 내면이 건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꾸준히 성장하고 발전하도록 노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건강한 교회, 역동적인 교회에서 사역하는 것 어려운 일입니다.
마음을 다해 헌신하시는 성도님들 사이에서 신앙생활하는 것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에게 최고의 모습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여러분이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고 응원합니다.
우리 교회는 여러분의 최고의 모습이 모습을 보여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러한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고 있고, 그러한 변화를 위해서 함께 격려하고 함께 기도하는 공동체입니다.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은 우리가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될 수 있는 최고의 모습을 먼저 보시고 그 모습을 향해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어제와 오늘, 오늘과 내일 우리의 모습은 달라집니다.
우리는 더 나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더 나쁜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냥 가만히 있는다고 우리가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에서 최선을 다할 때 그때 긍정적인 변화가 시작되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은 2025년 새해를 어떻게 시작하시겠습니까?
어떤 변화를 기대하시겠습니까?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이름, 새로운 정체성을 붙잡고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변화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최고의 모습을 기대하시는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어렵지만 올바른 길을 택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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