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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대원목사 설교

(성탄축하예배) 평화의 회복_2024.12.25

by 마이코 2024. 12. 30.

 

성탄절을 맞이해서 온 교회가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어서 참 기쁩니다.
특별히 온 가족 온 세대가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너무나 특별한 시간입니다.
그래도 우리 교회에서는 1년에 대여섯 번 정도 온 가족이 모여서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뭐 절기로는 성탄절과 송구영신 예배가 있겠고 특별 예배로는 뭐 신년 기폭이나 봄 특색, 가을 특색 뭐 온 가족 축복 기도회 등이 있겠습니다.
요즘은 뭐 세대 차이가 너무 심해서 세대별로 좋아하는 음악이 완전히 다르다고 합니다.
어르신들이 좋아하는 음악과 3~40대가 좋아하는 음악과 또 10대들이 좋아하는 음악이 완전히 다릅니다.
뭐 언제부턴가 저도 뭐 10대들이 부르는 노래 하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10대부터 70대 이상까지 다 같이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애국가 하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런 현실을 생각한다면 아 이렇게 10대부터 70대 이상 어르신까지 다 같이 모여서 성탄 찬송을 함께 부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함께 찬양할 수 있고 또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은 성탄절 하면 어떤 기억이 있으십니까? 

저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성탄절이 기억납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제가 정말로 받고 싶었던 선물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동네 문구점에 가니까 장난감 기차 세트가 있고 철로로 만든 그 기차 장난감 세트가 있었습니다.
근데 기차가 저절로 움직이는 거였습니다. 

배터리로 움직이는 조그마한 기차였는데 당시에 제가 보기에 너무너무 신기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께 크리스마스 선물로 그 기차 세트를 사달라고 며칠 동안 졸랐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성탄절 이브,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었습니다.
제 방에 가보니까 커다란 이 선물 상자가 있었습니다.
너무너무 기대하는 마음으로 제가 그 상자를 열어봤죠.
그 안에 제가 원했던 장난감 기차가 있었을까요? 안타깝게도 다른 선물이 있었습니다.
뭐 과학 상자 같이 뭐 조립하는 그런 선물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때 제 반응이 어땠을까요? 

엄청 울었습니다.
제가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데 엄청 울었어요. 

제가 원하던 선물을 받지 못해서 엉엉 울면서 잠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저의 초등학교 1학년 때 성탄절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부끄럽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 부끄럽고 또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해 주신 어머니께도 부끄러운 기억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저는 그렇게 어리석고 미성숙한 아이였습니다.
내 생일도 아닌데 내가 원하는 선물을 받기 원하는 그런 미성숙한 이기적인 아이였습니다.

 

성탄절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 이 땅 가운데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갖고 싶은 선물을 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망의 그늘에 앉아서 고통 가운데 있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야 하는 그 이유를 말씀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주셨습니다.
구약에 보면 메시아가 오실 장차 오실 메시아가 어떤 분이신지 예언하는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보내실 그 메시아의 타이틀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사야 9장 6절 함께 읽겠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낳았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니라.


다음에 메시아의 타이틀이 한글로는 다섯 개이지만 영어로는 네 가지입니다.


첫 번째 Wonderful Counselor, 놀라운 지혜자라는 뜻이고요.
두 번째로 Mighty God, 전능하신 하나님,

세 번째 Everlasting Father, 영원하신 아버지,

마지막으로 Prince of Peace 평화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놀라운 지혜, 초월적인 지혜를 가지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인류가 잃어버린 그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 가운데 오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국가적인 위기 상황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경제가 어렵고 국제 정세가 어려운데 정치적으로 큰 혼란과 대립에 빠져 있습니다.
국가의 미래를 생각해야 하는 정치인들은 자신의 이권을 위해서 이런 상황을 이용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누가 이 나라를 회복시킬 수 있을지 생각나지 않습니다.
도대체 우리나라를 제대로 이끌 수 있는 지도자가 누구인지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습니다.

2024년 12월 현재 대한민국은 평화와 안정을 잃어버렸습니다.
나라를 위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하다가 제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언제 우리나라가 평화롭고 안정적이었는가라고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안보, 외교 모든 영역이 평안하고 행복했던 때가 과연 있었는가라고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때가 잘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에는 항상 문제가 있었고 위기가 있었지 모든 것이 다 좋고 평안하던 시절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너무 옛날로 가면 더 가난하고 힘드니까 지난 20년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21세기 이후에 우리나라가 언제 행복하고 평안했습니까?
2천년대 초반에는 IMF 때문에 힘들었습니다.
정말 간신히 간신히 IMF 위기를 넘겼더니 2008년에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쳤습니다.
그 이후로도 국가적인 재난 사고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지난 20년 사이에 대통령 탄핵만 세 번을 했습니다.

OECD 국가 중에서 이렇게 대통령 탄핵을 많이 한 나라가 또 있을까요?
우리나라가 얼마나 불안정하고 분열되었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평화와 안정을 이룬 것이 어느 특정한 사람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들 안에 가득한 탐욕과 이기심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가득한 그 죄악 때문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 교만이 가장 큰 문제인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에 죄가 가득한 사람에게는 평화가 없습니다.
이사야 57장 21절 함께 읽겠습니다.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여러분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습니다.
죄를 짓고 잘못을 했는데 마음이 평안한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우리 어린이들 혹시 학원 빼먹고 놀러 가본 적 있나요?
학원에 가야 되는데, 아 친구들하고 노느라 정신이 없어서 학원에 안 간 적이 있나요?
아~ 다 모범생이라서 그런 경우가 없나 봅니다.

여러분 그렇게 신나게 학원 빼먹고 놀다가 집에 오면 기분이 어떨까요?
마음이 평안할까요? 아니면 엄마에게 들킬까 봐 염려가 될까요?
당연히 불안하죠. 

엄마가 지금 알고 계시나 모르고 계시니까 엄청 불안합니다.
잘못을 하면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죄를 지으면 우리 마음 가운데 평화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언에 보면 악인은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간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뭔가 잘못하고 하면 마음이 불안해져서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가는 것이 우리의 심리입니다.
여러분 죄는 분리를 가져옵니다.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분리되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이 함께 있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큰 벽이 생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죄로 인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분리가 생겼습니다.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착취합니다.

우리가 서로 미워하고 서로 공격하는 이유는 우리 안에 있는 이기심과 교만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만 봐도 지역과 이념으로 또한 세대와 성별로 나라가 나뉘어졌습니다.
흔히 우리나라 역사가 5천년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5천년 우리나라 역사 중에서 우리나라 온 국민이 단결되었을 때 딱 하나가 되었을 때는 저는 두 번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3.1운동 때였고, 두 번째는 2002년 월드컵 때였습니다.
우리 안에 얼마나 많은 죄와 이기심이 있는지 나라는 끊임없이 나뉘고 분리되었습니다.
우리가 평안하지 않는 이유는 죄악 때문입니다. 

관계가 깨어진 것도 죄악 때문입니다.
여러분 죄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특징이 있는데 가장 큰 특징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신경 쓰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지내는지,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아무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이렇게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나라가 후진국입니다.
여러분 선진국과 후진국을 결정할 때 단순히 경제 수준만 가지고 결정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석유가 나오는 중동 국가들은 경제 수준이 높지요.
하지만 우리가 중동 국가들을 선진국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선진국, 후진국을 결정하는 것은 시민들의 의식입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그런 나라가 선진국입니다.
반면에 후진국은 자기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습니다.

 

제가 아프리카 부룬디 선교사로 있을 때 놀랐던 점이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도 부자들이 많다는 겁니다.
여러분 부룬디 부자들 또 놀랍습니다. 

그 부자들이 사는 집에는 특징이 있는데 엄청난 높이의 담장이 있고요.
사설 경호원들이 있습니다. 

부룬디 부자들은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만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 집 담장을 높이 쌓고 사설 경호원을 이용해서 고용해서 자기만 안전하게 살아가고자 합니다.

 

이렇게 죄는 관계를 깨어뜨립니다. 

관계가 깨어질 때 무질서와 갈등이 일어나게 됩니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만 생각하며 살아갈 때 이기적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여러분 이것이 인류 역사의 불행한 반복이었습니다.
이런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 가운데 오셨습니다.
우리 스스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 땅 가운데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에 그 기쁜 소식을 전했던 자들이 있었습니다.

저 하늘에서 천군 천사가 나타나서 베들레의 목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누가복음 2장 13절, 14절 함께 읽겠습니다.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오,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아멘. 여기서 천군은 천사들의 군대를 뜻합니다.
천국을 지키는 천사들의 군대가 나타났습니다. 

여러분 일반적으로 군대가 나타나면 뭐 하지요?
무엇을 선포할까요? 

군대가 나타나면 전쟁을 선포합니다.
외부의 적이 침입하였다.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 군대의 역할입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나타난 천사들의 군대는 전쟁을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선포했습니까? 

빨간색으로 된 구절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오,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하늘에 나타난 그 천사들의 군대가 전쟁을 선포한 것이 아니라 평화를 선포했습니다.

하늘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고, 이 땅 가운데는 평화가 임하였다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일 아닙니까? 

원래 군대가 나타나면 전쟁을 선포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나타난 그 하늘의 군대는 평화를 선포했습니다.
이사야 9장에 예언되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평화의 왕으로 오셨다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평화를 뜻하는 단어가 3개가 있습니다. 

이번 성탄절에는 평화를 뜻하는 단어 이 세 개의 단어를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먼저 히브리어로 평화를 샬롬이라고 합니다. 

함께 해볼까요? 샬롬.

샬롬은 하나님과의 언약적인 관계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번영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좋으니까 내 영혼이 평안하겠죠.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도 풍요롭습니다.
이 평화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두 번째로 헬라어로 평화를 에이레네라고 합니다.
함께 해볼까요? 에이레네 

이것은 상호 간의 조약에 의한 평화입니다.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들 사이에서는 서로 조약을 맺어서 서로 서로 공격하지 않기로 약속했습니다.
이렇게 질서와 연합이 잘 유지된 모습을 에이레네라고 합니다.

 

세 번째로 라틴어로 평화를 팍스라고 합니다. 

함께 해볼까요? 팍스.

이것은 절대적인 힘에 의해서 유지되는 평화입니다.
뭐 팍스, 로마나 팍스, 아메리카나라는 말 들어보셨죠?
절대적인 강자가 있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싸울 상대가 없습니다.
이렇게 절대적인 힘에 의해서 유지되는 평화가 바로 팍스입니다.
그럼 이 세 가지 중에서 무엇이 진정한 평화일까요?
상호 조약에 의해서 유지되는 '에이레네'일까요?

아니면 절대적인 힘에 의해서 유지되는 '팍스'일까요?
아니면 하나님과의 언약적인 관계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샬롬'일까요?
당연히 샬롬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적인 관계 안에서 누리는 이 샬럼이 진정한 평화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 가운데 오신 이유는 바로 이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힘에 의한 평화, 정치적 협상에 의한 평화를 위해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가 회복되는 샬롬의 평화를 위해서 이 땅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 이 샬롬이 회복될 수 있을까요?
이사야 32장 17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오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아멘. 진정한 평화 샬롬이 회복되기 위해선 공의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평화는 공의의 열매, 공의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평화는 단순히 전쟁을 멈춘 상태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나라와 북한이 전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휴전 협정을 한 지 71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면 우리나라가 현재 완전한 평화 가운데 있습니까?
아닙니다. 

여전히 전쟁의 위험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공의가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전쟁을 일으켰던 북한이 잘못을 시인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공의가 세워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진정한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관계가 회복되려면 공의가 세워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했던 그 인간이 잘못을 시인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렇게 공의가 회복되어야지 그때 진정한 평화가 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평화의 왕으로 이 땅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아이들이 막 싸우고 있을 때 어른들이 와서 중재하는 것처럼 막 인간들이 서로 싸우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 싸움을 말렸다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정도의 일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평화의 왕으로 오셨다는 것은 공의를 회복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공의가 회복될 때 진정한 평화가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공의를 회복하셨을까요?
에베소서 2장 14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shalom) 이신지라 둘로를 만드사 원수 된 곳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예수님은 우리의 평화, 우리의 샬롬이 되셨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인간과 인간 사이에 원수 된 것을 그분의 육체로 허무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심으로써 공의를 회복하셨습니다.
죄를 미워하시고 반드시 죄를 심판하시는 그 하나님의 공의를 회복하심으로써 예수님은 진정한 평화를 회복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평화가 회복되기 위해선 공의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공의가 회복되기 위해서 누군가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죄에 대한 대가,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이 땅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천군 천사들이 외쳤습니다.
하늘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 나타났고, 이 땅에서는 그에 기뻐하시는 사람들 가운데 평화가 임하였다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공의가 회복되고 평화가 회복될 것을 천군 천사가 선포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제일 존경하는 대통령은 누구이십니까?
정치적으로 홀라올 때 혼란스러울 때 이런 질문하면 또 막 여러 가지 분란이 생길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 마음속으로만 대답하십시오. 

역대 대통령 중에서 여러분이 제일 존경하는 대통령은 누구입니까?
사람마다 다르겠죠. 

어떤 사람은 강력한 카리스마가 있는 그런 대통령을 좋아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따뜻하고 인간적인 대통령을 존경할 수 있습니다.
누구를 존경하든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이런 것 가지고 싸울 필요 없겠죠.
그러면 여러분이 존경하는 그 대통령은 완벽한 사람입니까?
그에게 허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당연히 있죠.
아무리 훌륭한 대통령이라고 해도 허물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역시 타락한 인간 중에 한 명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죄의 특징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훌륭한 리더라고 해도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큰 권력을 가진 사람은 더 큰 유혹을 받을 것입니다.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권력이 클수록 자기 사랑과 자기 교만의 죄에 빠질 유혹이 더 큽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땠을까요? 

여러분 예수님에게는 허물이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헷갈리시나요? 

 

예수님께는 허물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도 엄청난 인기를 누리셨는데, 왜 예수님은 권력의 유혹이 없었을까요?
사람들이 그분을 왕으로 삼고자 했는데, 예수님은 왜 유혹을 안 받았을까요?
예수님께서 완벽한 리더십을 보일 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7절 8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아멘.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리더십을 우리가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비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 하기 위해서 이 땅 가운데 오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그분을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기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목표는 자신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보내신 이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성숙한 사람은 자신을 비운 사람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 내가 가지고 싶은 그것을 내려놓은 사람입니다.
나를 드러내고 나를 내세우고 싶은 사람은 아직 성숙한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야말로 자신을 비우고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청년들이 많이 있고 또 감사하게도 청년들이 결혼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열심히 섬기는 우리 청년부 리더들에게 제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사실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청년부 리더들이 결혼식 주례를 부탁하면 가급적이면 그 주례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보통 결혼식 일주일 전에 신랑, 신부가 기도를 받으러 옵니다.
그때 제가 이런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너무나 이기적이기 때문에 결혼을 준비하면서도 자신의 유익을 먼저 생각합니다.
누구와 결혼하는 것이 나에게 유익할까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나를 먼저 생각하면 결혼 생활이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집에 가서 내가 섬김을 받고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결혼을 한다면 그 결혼 생활은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의 시작은 상대방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에 있습니다.
그 상대방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루 종일 힘들었을 텐데, 상대방을 위로하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향해서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결혼 생활은 너무너무 행복한 결혼 생활이 될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더 행복할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평화가 없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다 자신의 유익만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나만 생각하며 이기적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유익만 생각하면서 살면 나라가 얼마나 혼란스러울 수 있을지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습니다.
죄로 인해서 평화를 잃어버린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공의를 바로 세우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셨습니다.

자기를 비우는 진정한 사랑을 통해서 예수님은 진정한 평화를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화평케 하는 직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깨어진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주님께서 회복하신 이 평화를 선포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주님의 본을 받아야 합니다.
자신을 비우는 것이지요. 

내 유익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을 내려놓고 평화의 왕으로 살아가신 그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본을 따르는 그분의 제자들로 인하여서 죄로 깨어진 이 땅의 평화가 회복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공의와 평화가 서로 입맞추는 진정한 회복의 역사가 이 나라 가운데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IqDlvDV6j0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