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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대원목사 설교

[선한목자교회] 금요성령집회 2024년 12월 13일 | 사랑 받은 자, 보냄 받은 자

by 마이코 2024. 12. 17.



할렐루야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저는 대구 동신교회를 섬기는 문대원 목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선한 목자 교회에 아둘람 기도회에 초청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과 함께 예배드리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나눌 수 있는 귀한 기회를 허락하신 우리 김다위 목사님과 장로님들께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김다위 목사님께서 올해 초에 저희 교회에 오셔서 신년 집회에서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너무나도 뜨겁고 도전이 되는 간증과 말씀을 통해서 저희 교회 성도님들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사모님께서도 함께 오셔서 저희 부부가 함께 식사하고 교제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저희 마음이 되게 잘 맞았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도 통했고, 또 한국 교회를 생각하는 시대적인 책임감도 함께 나눌 수 있었습니다.

 

사실 김다위 목사님과 제가 이제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일단 저희 나이가 똑같습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 와서 담임 목사로 청빙을 받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저희가 섬기시는 저희가 이제 후임으로 섬기는 원로 목사님들께서 너무나도 훌륭하기 때문에 저희가 큰 부담을 갖고 사역을 섬기고 있습니다.
유기성 목사님은 설명이 필요 없는 한국교회를 대표하시는 귀한 목사님이시고, 

저희 대구동신교회의 원로 목사님이신 권성수 목사님께서도 아주 뜨거운 영성과 탁월한 지성을 가지신 훌륭한 목사님이십니다.
종신대학에서 14년 동안 교수로 사역을 섬기시고 동신교회에 부임하셔서 22년 동안 사역을 섬기셨습니다.
근데 22년 동안 교회가 10배 부흥했습니다. 

서울도 아니고 대구에서 10배에 부응하는 것은 사실은 전무후무한 일이거든요.
이런 목사님의 후임이 되는 것은 너무너무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그런 면에서 김다위 목사님과 제가 서로 이제 마음을 잘 이해하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좋은 친구입니다.
또 로잔 대회 우리 한국 교회의 밤 있었잖아요. 

네 한국교회 밤 시간에 저희가 김다위 목사님과 제가 마지막에 나와서 한국 교회를 위해서 함께 기도를 했습니다.
그 모습이 이제 보기 좋았다는 이야기도 제가 여러분께 들었습니다.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를 섬기는 두 젊은 목사가 함께 기도하면서 한 마음으로 한국 교회를 섬기고자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선한목자교회 사실 처음 방문했거든요. 

당연히 너무너무 잘 알고 있는 교회이지만 처음 방문해서 예배를 드렸지만 제 마음에는 아주 친근한 느낌입니다.
왜냐하면 지난 2년 동안 유기성 목사님과 함께 로잔대회 준비위원회에서 섬기면서 목사님을 아주 자주 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난 주간에도 유기성 목사님 부부와 함께 로잔 대회 준비위원회 해단식이 있었습니다.
지난 2년 동안 정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그 리더십들은 함께 모여서 이제 디베이트 하고 보고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한결같이 고백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유기성 목사님과 함께 사역할 수 있어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저희가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국제 로잔 운동의 정신이 있습니다.


영어로는 HIS라고 하는데 H는 Humility 겸손을 뜻하고, I는 Integrity 정직을 뜻하고, S는 Simplicity 단순성을 뜻합니다.
로잔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어떤 세계 복음화라는 목표 지향적이지 않습니다.
목표를 이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목표를 어떤 방식으로 이루는지는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세계 복음화를 이루되 예수님의 방식으로 예수님의 성품으로 그것을 이루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것이 바로 겸손과 정직과 단순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계 선교를 위해서 헌신하고 연합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로잔 운동의 정신입니다. 

그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한 분이 계신데 바로 유기성 목사님이십니다.
목사님과 함께 2년 동안 로잔 대회를 준비할 수 있어서 저희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저는 2010년도에 열렸던 남아공에서 열렸던 제3차 로잔 대회에 참석했었습니다.
당시에 저는 이제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던 신학생이었는데 저희 학교에 국제 로잔 당시 총재셨던 덕 버스 박사님께서 계셨습니다.
학생 대표 7명을 뽑아서 3차 로잔 대회에 보냈는데 감사하게도 제가 그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다양한 국제 로잔의 컨퍼런스에 참여했고 또 선교에 대한 영문 아티클도 썼습니다.
2016년도에 인도네시아에서 로잔 청년 지도자 대회 YLG의 대회가 열렸는데 거기에서는 유지영 자매님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현재 저는 국제 로잔 이사와 한국 로잔 이사로 섬기고 있습니다.
국제 이사회에서도 이번 대회를 섬겨주신 한국 교회에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로잔 대회 역사상 주최국에서 이렇게까지 기도해 주시고 헌신하신 적이 지난 50년간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로잔대회를 위해서 선한 목자 교회에서 많이 기도해 주시고 헌신해 주신 것에 대해서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아둘람 기도의 이제 마지막 날이지요.

선교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선교는 사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주제이고 가장 큰 열정을 느끼는 주제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세계 기독교 역사를 전공한 선교 학자이고 또한 아프리카 부룬디에서 6년 동안 선교사로 섬겼던 목사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프리카 부룬디 선교사로 사역할 때 자주 받았던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왜 선교사로 헌신했나요? 였습니다.

중요한 질문이지요.
선교사로 헌신할 때에는 인간적인 계산과 이해관계를 다 내려놓는데 왜 그러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는가 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제가 대학교 1학년 때 선교사로 헌신하게 되었는데요.
그 이유는 아주 단순했습니다.

하나뿐인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저는 그분께 저의 모든 것을 드리고 싶은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선교의 가장 중요한 동기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이것은 저만의 고백이 아니라 모든 선교사들의 고백이고, 또한 사도 바울의 고백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4절 말씀 우리 함께 읽으면 좋겠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4절 함께 읽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한데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아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신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위해서 그의 모든 것을 바쳤을 때에 아마 이 주변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고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으로 존경받던 그가 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그 앞절에 보면 흥미로운 고백이 나옵니다. 

13절에 보면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오,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아마 주변에서 이런 말을 했을 것입니다.
너 혹시 정신 이상한 거 아니냐? 

너 왜 그렇게 살아가니? 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에 대한 답으로 바울이 고백합니다.

내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인간적인 계산을 하며 사는 사람들은 바울의 마음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너무나 크고 놀라워서 내가 이렇게 살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복음을 위해 살았는데 그 이유는 단 한 가지였습니다.
바로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 단순한 마음으로 바울은 선교사로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선교사들이 사실은 그런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선교사들이 복음을 위해서 안락한 것을 포기하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위한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이 아니고서는 그분들이 겪는 고난과 어려움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선교지 환경은 대부분 열악합니다.

여러분 단기 선교 가보신 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날씨도 좋지 않고요. 

수도와 전기 시설도 열악합니다.
제가 있었던 부룬디에는 계절이 두 개밖에 없습니다.
여름이 있고 더운 여름이 있습니다. 

지금처럼 추운 겨울을 제가 얼마나 부룬디에 있으면서 그리워했는지 몰라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이 겨울이었거든요. 

뭐 그런 거 그런 것까진 괜찮지만 의료 시설이 안 좋은 것은 큰 문제입니다.
선교지에서 선교사들끼리 서로 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우리 절대 아프면 안 돼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선교지에는 이제 제대로 된 병원이 많지 않아서 아프면 안 됩니다.
제가 일단 부룬디라는 나라만 해도 제대로 된 치과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하루는 양치질을 하다가 어금니에 씌운 그 금니 크라운이 빠졌습니다.
정말 난감한 상황이죠. 

부룬디에는 그것을 다시 붙여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것을 그냥 방치하면은 어금니가 썩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제가 수소문을 해보니까 부룬디에서 비행기 한 번 타고 갈 수 있는 나라 중에 에티오피아라고 있는데

에티오피아에 가면은 서울에 있는 교회에서 세운 의료 센터가 있었습니다.
그 센터에 한국인 치과 선교사님이 계셔서 거기에 가면 금니크라운을 붙여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치과 진료를 위해서 비행기를 타고 그 나라에 다녀왔습니다.


선교지에 사는 것은 이렇게 불편하고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삶을 살기로 선택했을까요? 

선교사가 되면 돈을 많이 받아서 그랬을까요?
선교사가 되면 존경을 많이 받아서 그런 선택을 내렸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그러한 삶을 살아간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모든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선교 역사를 살펴보면 위대한 선교사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을 향한 깊은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어떤 위험함과 어려움이 있더라도 예수님을 향한 사랑으로 다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18세기 이제 미국에서 사역했던 젊은 선교사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사실 생전에는 그렇게 유명한 선교사님이 아니셨는데 사후에 그분의 일기가 출판되면서 미국과 영국에서 제일 유명한 선교사님이 됐습니다.
그의 이름은 데이빗 브레이너드였습니다. 

브레이너드 선교사는 24살의 나이에 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내가 아메리칸 인디언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헌신했는데 5년 뒤인 29살의 젊은 나이로 병에 걸려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의 인생은 너무나도 짧았지만 예수님을 향한 그의 사랑은 그 이후 300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큰 도전을 주었습니다.
데이빗 브레이너드의 일기를 출판한 사람이 그 유명한 조나단 에드워즈입니다.
미국에서 대각성 운동을 이끌었던 최고의 부흥사이자 신학자였던 조나단 에드워즈가 '데이비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일기'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혹시 선교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이 책을 읽어보시면 큰 도전과 감동을 받을 것입니다.
에드워즈와 비슷한 시기에 영국에서 부흥 운동을 또 이끌었던 분이 한 분 계십니다.
바로 존 웨슬리 목사님입니다. 

감리교회 창시자이시지요.근대 복음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선 딱 이 두 사람을 이해하면 됩니다.
미국에서는 조나단 에드워즈, 영국에서는 존 웨슬리.

이 두 분께서 부흥 운동을 이끄셨는데 그 핵심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회심의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기쁨을 증거하는 전도와 선교를 강조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주의 운동의 시작이었습니다. 

근데 그 존 웨슬리 목사님께서 가장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이 바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일기'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근대 선교의 아버지 윌리엄 캐리, 미국에서 정말로 유명한 선교사 짐 엘리어트.

수많은 사람들이 이 일기를 읽고 선교적 사명을 받았습니다.
브레이너드는 아주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그가 남긴 영적인 유산은 이후 300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도전해 주었습니다.
그 일기 중에 한 구절을 읽어드리고자 합니다.

1742년 4월 27일에 그가 적은 일기입니다.


기도 중에 하나님은 내 영혼에 말할 수 없는 위로를 부어주셔서 한동안 그저 계속해서 

'오 나의 주님.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나이까?

땅에서도 주 밖에 사모할 자가 없나이다라고 되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게 목숨이 천 개라도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내 영혼이 그 모든 것을 다 내어놓았으리라라고 적었습니다.
여러분 이 일기에 담긴 브레이나드의 마음이 느껴지십니까?
나에게 목숨이 천개가 있더라도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서 기꺼이 드리겠다는 그 간절한 마음이 느껴지십니까?
여러분은 이렇게 뜨거운 마음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계십니까?

 

여러분,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누구일까요?
힘센 사람 그런 사람 아니고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제 생각에 돈으로 매수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세속화된 시기에 이 물질주의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돈을 위해 살아갑니다.
더 큰 돈을 벌 수 있다면 내가 기꺼이 무슨 일이든지 하겠다라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런데 돈으로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사실 그 사람이야말로 무서운 사람입니다.
데이비 브레이너드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나에게 목숨이 천 개 있다면 내가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서 모두 다 드리겠다는 사람을 어떻게 돈으로 매수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이 사랑이야말로 선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동기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제3차 로잔 대회 공식 문서인 케이프타운 서약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흘러나온다.
하나님의 백성의 선교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하나님이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 대한 사랑에서 흘러나온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선교가 시작된 거죠.
또 그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이 사랑으로 반응하는 것이 선교입니다.
그러니까 선교회에 헌신하는 가장 중요한 동기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아주 중요한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직접 선포해 주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3장 1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오,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아멘.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께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음성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기뻐하는지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오, 내 기뻐하는 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신다고 선포하신 이 시점은 아직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사역하기 이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위해서 어떤 일도 하기 이전에,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희생하거나 헌신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선포하셨습니다.
그것도 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는 음성으로 하늘에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기초는, 가장 중요한 기초는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선택해 주셨습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아멘. 우리가 착하게 살아서 우리가 사랑받을 만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 봉사하고 헌신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복음 중에 복음이요.

가장 중요한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여러분은 이 진리를 믿으십니까? 

네, 그런데 이것을 진심으로 믿고 내 삶 가운데 적용하는 것은 사실 쉽지 않습니다.
제가 한국에 오기 전에 15년 동안 세계 여러 나라에서 살았습니다.
유럽에서 선교 훈련을 받고 이제 미국에서 신학 공부를 했습니다.
다양한 계층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봤습니다.
보스턴에서 공부할 때는 정말 세계 최고의 엘리트들을 만나봤습니다.
아프리카 부룬디에서 사역할 때에는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도 만나봤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이 진리를 진심으로 믿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너무나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그 메시지가 너무 강력해서 우리가 그것을 떨쳐내는 것이 어렵습니다.
여러분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바로 이것입니다. 

당신이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 봐라.
그것이 돈이든 학벌이든 명예든 외모든 뭐든 좋으니까 당신이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 봐라고 세상은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TV에서 인터넷에서 주변에서 매일 우리가 듣는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노력하는 것 대부분은요, 내가 왜 가치 있는지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살아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서 살아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살아가셨습니다.

 

회사나 기업에는 사명 선언문, 미션 스테이먼트가 있습니다.
모든 그 회사가 지향하는 가치를 표현한 것이죠. 

예를 들어서 스타벅스의 사명 선언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모두의 커피 함께하는 이야기, 모든 커뮤니티와 더불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무한한 가능성을 만들어 갑니다라고 합니다.
저는 스타벅스의 커피 마시러 가는데 스타벅스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무한한 가능성을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그 회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표이고 그것을 사명 선언문에 담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사명 선언문은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 이 땅 가운데서 살아가셨던 공생애 사역을 감당하셨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예수님 인생의 사명 선언문을 요한복음 말씀에서 발견했습니다.
6장 38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아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자신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그 모든 예언과 약속을 성취하는 것이 예수님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 하러 온 게 아니었죠.
그분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그분은 이 땅을 살아가셨습니다.
이 모습이야말로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 가장 성숙한 믿음의 모습인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증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없었거든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오, 내 기뻐하는 자라는 그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 이것이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었습니다.

저희 교회에는 청년들이 많이 있습니다.

정말 이 어두운 시대에 신실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청년들 보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 달에 한 번은 꼭 청년부 예배에 가서 설교를 합니다.
제가 청년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부분이 바로 이 정체성입니다.
인생에서 올바른 정체성을 세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정체성을 세워야지 인생에서 고난을 만나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청년들은 정체성보다는 성취에 더 많은 관심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더 많은 것을 성취하면 내가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남들보다 더 빨리 남들보다 더 많이 성취하려고 노력하며 살아갑니다.
친구보다 더 빨리 성취하고 빨리 취업하고 더 빨리 결혼하고 더 빨리 집 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비교하면서 살아가는 인생은 결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아무리 똑똑해도 나보다 더 똑똑한 사람은 얼마든지 있거든요.
내가 아무리 돈이 많아도 나보다 돈이 더 많은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더 나은 것으로 행복을 느끼려고 한다면 절대 그 사람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나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올바른 정체성에서 옵니다. 

성경이 말하는 올바른 정체성,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옵니다.
우리는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온 우주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 하나님의 사랑받는 딸,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정체성인 줄로 믿습니다.
이 정체성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때 여러분 우리는 자유롭게 됩니다.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울까요? 

내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 인생의 가치를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인생의 가치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증명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확고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선교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선교 사역을 통해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죠.

 

제가 선교지에서 그런 분들 만날 때가 있었습니다.
선교 사역을 통해서 어떤 열매를 통해서 나의 가치를 증명하려고 하는 거예요.

나 이런 사역한 사람이야, 나 이런 열매를 맺었어라고 자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주님께서 원하시는 선교사의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선교의 열매가 우리의 정체성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교적인 삶의 핵심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신 사랑을 받은 사람만이 제대로 선교할 수 있습니다.
내가 경험한 사랑을 나누는 것이 바로 선교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사랑에 있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사랑은 낭만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점입니다.

여러분, 모든 사랑은 낭만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결혼은 낭만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여러분, 결혼에 대한 환상, 낭만을 가진 사람은 어떤 현실적인 문제 앞에서 좌절할 수도 있습니다.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수많은 현실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식장 정하는 것, 신혼집 구하는 거, 양과 부모님들과의 관계, 수많은 문제들이 있죠.
이런 현실적인 문제 앞에서 힘들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는데 사랑은 낭만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로맨틱한 감정은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평균적으로 18개월 정도 지속된다고 합니다.
아무리 강렬한 사랑이라고 해도 그 불타오르는 감정은 18개월이 지나면 자연히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불타오르는 감정이 없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닐까요?
우리는 18개월마다 새로운 사랑을 찾아 나서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불타오르는 감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사랑 중에서 가장 강력한 사랑이 저는 자녀를 향한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부모님들께 질문하겠습니다. 

여러분 자녀를 사랑할 때 불타오르는 감정이 있으십니까?
막 자녀 얼굴만 봐도 너무너무 기분이 좋아지고 막 흥분되십니까?
물론 그런 경우가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요즘은 초등학생만 돼도 아이들이 부모님 말씀 잘 안 듣잖아요.
특히 사춘기가 되면 틱틱거리고 대화를 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자녀를 향해서 불타오르는 감정이 생기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자녀의 최선을 구합니다.
자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자녀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내가 대신 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모의 사랑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헌신입니다.

미국의 신학자 싱클레어 퍼거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랑은 최대한의 감정이 아니다. 사랑은 최대한의 헌신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maximum emotion 이 사랑이 아니라 maximum commitment 가 바로 사랑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짜릿한 감정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때 짜릿한 감정으로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죠.
끝까지 변하지 않는 사랑 헌신적인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의 크기는 헌신의 크기, 그 희생의 크기로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철학적인 개념, 신학적인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말 그대로 헌신적인 사랑, 행동하는 사랑이었습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제일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아멘.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행동하는 사랑 액셔니 러브였습니다.
우리 죄를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낭만이 아니라 헌신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해야 하는 사랑도요. 낭만이 아니라 헌신입니다.
선교는 낭만이 아니라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선교에 대해서 낭만주의적인 생각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영화 미션 보셨나요? 

그런 영화처럼 원주민 마을 들어가서 원주민과 똑같이 사는 것이 선교라고 생각합니다.
선교사는 좋은 옷도 입으면 안 되고 선교사는 좋은 음식도 먹으면 안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생각입니다.
여러분 선교사님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태어나면서부터 선교사인 사람 없습니다.
선교사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선교에 대한 낭만주의적인 관점, 영웅주의적인 관점을 가지면 우리가 선교에 대해서 오해하게 됩니다.

선교는 너무 힘든 일이니까 아주 특별한 사람만 선교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선교사님들이 어떤 선교 보고를 할 때 선교지에서 있었던 힘들었던 일을 보고하는 경우가 있죠.
힘든 얘기를 들으면 성도님들 듣고 감동을 받고 도전을 받습니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선교지에서 있었던 힘든 이야기를 들으면 감동을 받긴 받는데 동시에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 같은 사람은 절대 선교사 못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게 문제죠. 

특별한 사람만 선교를 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선교지에서 있었던 힘든 일들이 우리로 하여금 선교에 대해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선교사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선교사인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은 선교사가 될 수 있습니다.

 

제가 부룬디 선교사로 파송 받을 때 고민이 하나 있었습니다.
제가 이제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미국에서 부룬디로 갈 때 당시 4살이었던 저희 딸의 장난감을 가져갈 것인가?

말 것인가? 가 고민이었습니다.
저희 딸이 미국에서 태어나서 가지고 놀던 인형 장난감 책이 있었거든요.
이걸 가져가야 될 것인가? 놓고 가야 될 것인가? 가 현실적인 고민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선교사 출신의 한 미국 교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분께 제 고민을 말씀드렸더니 그분이 아주 명쾌한 답을 주셨습니다.
'그 장난감을 가지고 가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보다 그냥 선교지 다 가지고 가는 게 훨씬 더 낫다.
그리고 선교지 가서 그 장난감 가지고 다른 아이들하고 같이 놀면 된다'라고 명쾌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이 저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장난감을 가져야 가는지 말아야 되는지 고민하지 말고 그냥 가지고 가라는 거예요.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딸의 장난감을 가지고 가서 현지에 도착해서 윗집에 살고 있는 콩고 언니들하고 같이 잘 가지고 놀았습니다.

여러분, 결혼은 낭만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마찬가지로 선교도 낭만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선교지에서의 삶이나 한국에서의 삶이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조금 불편하고 느릴 뿐입니다. 

그런 현실적인 문제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지키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땅 가운데서 우리 마음을 지키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선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기도에 모일 때는 은혜를 많이 받지만 세상으로 나가면 수많은 문제들이 우리 앞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 문제들을 현실적으로 외면하지 말고 직면하되 그 모든 문제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봐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붙잡아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현실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얻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알기 전에는 나 자신을 위해서 살아갔습니다.
나의 유익과 나의 성공만을 위해서 살아갔습니다.
하지만 그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은 이후에는 인생을 바라보는 방식이 달라지게 됩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죽으신 그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5장 15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아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이후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죄의 저주 가운데 있는 우리를 해방에서 구원에서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더 이상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 예수님을 위해서 살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두 가지 목적을 둘 다 기억해야 합니다.

근데 많은 사람들이 첫 번째만 기억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돌아가셔서 내가 구원받았다고 기뻐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지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은 우리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지 않고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가 인생을 바라보고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랑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 self-seeking love 가 있습니다.
둘째로는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 self-giving love 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 둘 중에 무엇이 진정한 사랑일까요? 

당연히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 셀프 기빙 러브가 진정한 사랑입니다.

 

저희 교회 청년들이 많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러다 보니까 결혼도 참 많이 합니다.
제가 올해에만 주례를 스무 번 했습니다. 

지난 토요일에는 똑같은 예식장에서 두 번 제가 주례를 하기도 했습니다.
아침에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요즘 청년들이 이제 결혼을 안 해서 사회적인 문제인데 이렇게 결혼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너무 기쁜 일이죠.
그런데 제가 주례할 때 신랑 신부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우리가 배우자를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최고의 배우자, 최고로 좋은 그 배우자를 만나기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믿음도 좋고 성품도 좋고 학벌도 좋고 실력도 있고 외모도 좋은 사람을 원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를 행복하게 해줄 사람, 나에게 유익이 될 사람을 배우자로 찾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질문은 잘 하지 않습니다. 

나는 상대방을 행복하게 해주는 배우자인가?

나는 상대방에게 유익을 주는 배우자인가? 이런 질문은 잘 하지 않습니다.
결혼을 생각할 때도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모습입니다.
내가 더 행복해지려고 결혼하는 것이죠. 

상대방을 위한 최고의 배우자가 될 생각은 하지 않고 나를 위한 최고의 배우자를 찾기에 급급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이기적인지, 얼마나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자신의 이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입니다.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서 나를 내어주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여러분 근데 이거 어려운 일이거든요. 

너무너무 어려운 일인데 어떻게 우리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제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딱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딱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진정한 사랑을 받아봐야 합니다.
그럼 누가 진정한 사랑을 받아봤을까요? 요한일서 4장 19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아멘.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진정한 사랑을 경험한 줄로 믿습니다.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사랑을 경험한 줄로 믿습니다.

 

진정한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특징이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자기 중심성에서 탈피할 수 있다는 거예요.
나를 사랑하고 나만 생각하고 나만 내세우는 이 자기 중심성에서 탈피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꿋꿋하게 나 자신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엎드려 순종하고자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예배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예배는 멋진 음악이나 화려한 조명이 아니죠.
진정한 예배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대한 우리의 반응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아무것도 하나님을 위해서 선한 일을 한 적이 없는데,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그 하나님의 완벽하신 사랑에 대한 반응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그 진정한 선교는 진정한 예배에서 시작됩니다. 

예배 가운데 그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경험할 때 자동적으로 나오는 한 고백이 있습니다.

이사야의 고백과 똑같죠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저를 보내십시오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선교는 다른 게 아니죠.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것 가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선교입니다.
진리가 없는 곳에 가서 진리를 선포하고 사랑이 없는 곳으로 가서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 선교입니다.
제가 대학생 때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정말로 제 모든 것을 드려도 하나도 아깝지 않을 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단 한 번뿐인 제 인생, 그중에서도 단 한 번뿐인 제 청년의 시절을 가장 가치 있는 일을 위해서 사용하기를 기도했습니다.
제가 발견한 가장 가치 있는 일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주 단순한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살아가고자 사랑을 전하고자 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같은 학교에서 만난 아내를 만나서 일찍 결혼하고 저희는 스위스에 가서 선교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미국 가서 신학 공부를 했습니다.

보스톤에서 7년 동안 있으면서 석사 과정과 박사 과정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아프리카 부룬디 선교사로 갔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신학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에는 이제 아는 교회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 있는 아주 작은 한인 교회에서 선교사 파송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부룬디에 이제 도착해서 사역을 시작한 지 1년이 안 되었을 때에 현지에서 내전이 일어났습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부군과 반군이 서로 이제 무력 충돌을 했습니다.
밤마다 이제 기관청 소리와 로켓포 소리가 났는데 당시에 저희 딸이 5살이었기 때문에 아내와 딸은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저 혼자 한국과 부룬디를 왔다 갔다 하면서 선교 사역을 섬겼습니다.
선교사가 한국에 오면 지낼 곳이 없습니다.

온 가족이 고생을 하면서도 어떻게든 선교를 계속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바로 그때 미국에 있는 그 파송 교회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작은 교회였는데 재정이 어려워서 더 이상 후원하기 어렵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저희 인생에서 정말로 가장 어두운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아프리카로 갔는데 현지에서는 내전이 일어났고 파송 교회는 더 이상 후원을 할 수 없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제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아내와 함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근데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부른 뒤를 향한 마음을 주셔서 우리가 파송 교회가 없어도 선교지로 돌아가고자 결단했습니다.
당장 돈이 없으니깐요. 

은행에 가서 천만 원 대출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돈 다 쓸 때까지 파송 교회를 만나면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선교를 계속하고 이 돈 다 쓸 때까지 파송 교회를 만나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제 인생의 목표는 부룬디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는 것이 제 인생의 목표였습니다.
천만 원 다 쓰기 전에 파송 교회를 만났을까요? 못 만났을까요?
만났습니다. 

그 교회가 바로 대구 동신교회였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대구에 가본 적도 없고요. 

권성수 목사님을 만나본 적도 없었습니다.
제가 대구동신교회를 처음 알게 된 것이 해외 박사 과정 장학금 줄 때 알게 됐습니다.
인터넷에 올라온 공고를 친구가 보내줘서 제가 신청했고 장학생으로 선정되어서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파송 교회가 없어졌을 때 저는 조금이라도 저와 연관이 있었던 모든 교회에 이메일을 드렸습니다.
혹시 제가 파송 선교사로 지원할 수 있는지 연락을 드렸죠.
어떤 교회도 답장을 주지 않았습니다. 

유일하게 대구동신교회에서 답장이 왔습니다.
권성수 목사님께서 이메일을 보내셔서 그럼 대구에 와서 설교를 한번 해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대구 동신교회와의 첫 번째 만남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동신교회 파송 선교사로 허입되어서 부룬디 사역을 계속 섬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안식년 중에 한국으로 나오게 되었고 후임 담임 목사로 청빙 받게 되었습니다.
1년 반 동사 목회를 하면서 권 목사님께 생명 사역을 전수받았고, 온 교회가 평안한 가운데 역동적으로 지금 사역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로잔 대회를 준비하는 일도 함께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죠? 

이번 로잔 대회 준비하는 과정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유기성 목사님께서도 수많은 오해와 비난을 받으셨습니다.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모르겠죠. 

세계 선교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한 것밖에 없는데 그 모든 비난을 묵묵히 참으시는 모습에서 우리 준비위원회 리더들이 얼마나 큰 도전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제가 속한 교단은 더군다나 보수적인 교단이라서 로잔 대회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제가 담임 목사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런 일을 겪으니까 교회가 어려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저희 교회는 하나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외부에서는 걱정하고 염려했는데 저희 교회 장로님들 중직들은 하나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저희 교회 중직이 되려면 LMTC 훈련, 퍼스펙티브 훈련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퍼스펙티브 훈련이라고 선교 훈련이 있는데 거기서 사용하는 두꺼운 교재가 있거든요.
근데 그 교재에 실린 모든 아티클이 이전 로잔 대회에서 발표된 내용들이었습니다.
미전도종족, 템프로리 윈도우, 타문화 사역, 이주민 사역, 비즈니스 애즈 미션, 이 모든 내용들이 이전 로잔 대회에서 발표된 내용들이었습니다.
그 훈련을 받은 사람이라면 로잔 대회가 얼마나 선교적으로 중요한지 알고 있습니다.
저희 모든 장로님들은 그 훈련을 받으셨기 때문에 로잔 대회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주변에서 가짜 뉴스가 나오고 거짓 선동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부룬디 선교사로 사역했던 것, 대구동신교회를 만났던 것, 동신교회 담임 목사로 청빙된 것, 로잔 대회를 준비하게 된 것 돌아보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섭리인 줄로 믿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도저히 계획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행하셨습니다.
저희 교회 성도님들은 이 모든 과정을 다 보셨기 때문에 하나님 너무너무 놀라우신 분이시다.
고백하며 감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에 우리의 뜻보다 훨씬 더 높으신 하나님의 뜻을 체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요한복음 8장 2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함으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아멘, 우리 삶의 이유와 목적은 딱 한 가지입니다.
우리를 이 땅 가운데 보내신 그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떤 타이틀을 가졌는지, 어떤 직분을 가졌는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어 존재하는 한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해서 헌신할 뿐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이 땅 가운데 보내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기뻐하실까요? 잃

어버린 영혼이 주님께로 돌아올 때 하나님 너무너무 기뻐하십니다.
주님을 알지 못했던 그 영혼, 지난주에 두 명의 영혼이 여러분의 전도를 통해서 주님을 알고 구원받았을 때 주님이 너무너무 기뻐하십니다.
마음이 상한 자가 주님의 진리와 은혜로 위로받고 회복될 때 주님께서 너무나 기뻐하십니다.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모르던 사람이 주님의 사랑으로 회복될 때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또 하나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그 과부와 고아들을 섬길 때 기뻐하십니다.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그 사람들을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섬길 때 주님 너무너무 기뻐하십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자랑할 때 기뻐하십니다.
세상 지식, 명예, 돈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원한 소망 대신 하나님만 자랑할 때 하나님께서 너무나 기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면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혼자 두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나타내십니다.
제가 장담할 수 있습니다. 

제가 지난 20년 동안 수없이 수없이 이것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완벽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고자 노력할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하나님께서 복 주시는 것을 반드시 나타내 보이십니다.
나 혼자만 아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다 모두 다 알아볼 수 있도록 놀라운 역사를 행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은 성령의 첫 번째 열매입니다.
사랑은 거듭남의 표지이고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증거입니다.
무엇보다도 사랑은 선교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선교에 동참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선한 목자 교회가 선교적 사명을 위해서 귀하게 헌신해 오신 것,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앞으로도 더욱더 놀라운 선교의 역사를 위해서 주님께 믿음으로 순종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선교에 헌신하고자 힘쓰기 이전에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더욱더 사랑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선교의 시작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곳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살아있게 하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헌신하게 하는 줄로 믿습니다.

https://youtu.be/bdXi0xGTen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