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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대원목사 설교

크리스천의 윤리 (5) 성적 순결의 중요성

by 마이코 2024. 12. 15.

 

고린도전서 6:15-20 | 문대원 목사


크리스천의 윤리에 대해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기독교 윤리의 기초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인생에서 올바른 선택을 내리기 위해서는 바른 동기와 바른 기준, 바른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동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우리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고 또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규범과 상황과 실전을 모두 살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불완전한 인간은 자꾸 한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규범으로 치우치면 딱딱한 율법주의자가 되기 쉽습니다.
그 반대인 상황이나 실존으로 치우치면 궁극적인 의미를 말하지 못하고 우울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규범과 상황, 실존 모두를 바라보는 삼중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기독교 윤리에 대한 기초를 다졌으니까 이제는 구체적인 이슈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윤리에 여러 가지 영역이 있는데 제가 이미 다루었던 내용들도 있습니다.

올 봄에 생명 주관 특별 예배를 드릴 때에 제가 생명 존중과 낙태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작년 말에 창조세계 돌봄에 대해서 말씀드릴 때 예수님의 재림과 나무 심기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한 적도 있습니다.
이미 다루었던 내용을 제외하고 몇 가지 중요한 주제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은 성적 순결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다음 주일에는 동성애와 젠더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이후에는 경제 윤리와 사형 제도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제가 이 모든 영역의 전문가는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성도님들 중에 의사도 계시고 판사도 계십니다.
그래서 제가 함부로 전문가 행세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할 마음도 없습니다.
다만 이 주제에 대해서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지 성경적인 관점을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경험했던 것 중에 한 가지 좋은 점이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도 신학 공부를 하고 한국에서도 신학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윤리에 대해서 미국에서도 배우고 한국에서도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규범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상황과 한국의 상황이 조금 다릅니다.
그러다 보니까 동일한 규범이 다른 상황에서 어떻게 이해되고 적용되는지 제가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특정한 상황에 너무 집중하기보다 세계 전반적인 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은 성적 순결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문제는 사실 아주 현실적인 문제이고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좀처럼 말하기 힘든 주제입니다.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국 사회에서 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에게 성에 대해서 가르쳤던 적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의 자녀는 성적인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누구에게 배웠습니까?
많은 경우 우리 자녀들이 성적인 문제를 친구들에게 배웁니다.
아니면 인터넷에서 배웁니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입니다.
인터넷에서 나와 있는 내용들이 성경적인 관점과 다르기 때문이죠.
세상이 말하는 성의 의미와 성경이 말하는 성의 의미는 완전히 다릅니다.
타락한 이 세상은 성욕과 식욕을 똑같은 육체의 욕구로 바라봅니다.
우리가 배고프면 음식을 먹는 것처럼 성욕을 느끼면 해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적 결합을 단순히 육체적으로만 보는 관점입니다.
세속주의자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기 때문에 성적인 문제를 순전히 육체적인 문제로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성적 결합이 단순히 육체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의 영혼과 육체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나눌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성적 결합은 육체적인 문제인 동시에 영적인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결혼 관계 안에서 성적 결합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은 선하기 때문에 부부 사이의 성적 결합은 선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성관계를 더럽게 여기거나 죄악시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혼 관계 안에서 그것을 누리게 하셨고 그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게 하셨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 28절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아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은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첫 번째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결혼해서 자녀를 낳고 자녀를 키우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임신과 육아는 단순한 고생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고귀한 일이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부부 간의 성적 결합을 통해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질서와 순서가 있습니다. 

결혼이 제일 우선이고 그다음이 성적인 결합, 그리고 그다음이 생명의 탄생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창조 질서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이 질서를 무시하거나 부정합니다.
부부 사이가 아닌 데에도 성적 결합을 합니다. 

그리고 아이를 임신하게 됩니다.
이 경우에는 큰 혼란과 고통이 뒤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최근에 한 유명한 연예인이 혼외자를 낳았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관계를 해서 아이를 낳은 것입니다.
워낙 유명한 사람이라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한 공개 석상에서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로서 책임을 다하겠다고 말을 했습니다.
참고로 저는 그 사람에 대해서 아무런 감정이 없습니다.
그분을 좋아하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가 했던 말, 아버지로서 책임을 다하겠다는 말에 대해서 질문이 있습니다.
주민등록상 아들로 명시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아버지로서 책임을 다할 수 있습니까?
한 달에 양육비 천만 원을 주면 아버지로서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까?
아버지가 누구인지 온 국민이 알고 있는데, 그 아이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아이가 평생 동안 겪게 될 아픔과 상실은 누가 책임질 수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경제적인 이유든 가정적인 이유든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사람을 만나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몇 번 있습니다. 

대학 친구 중에서도 보았고, 먼 친척 중에서도 보았습니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사람은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될까요?
나를 가장 사랑하고 나를 가장 보호해 주어야 하는 그 존재로부터 버림받으면 그 마음이 어떨까요?
큰 아픔과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아버지에 대해서 분노하기도 하고 이 세상에 대해서 원망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죠.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는데 그 마음이 정상일 수가 없습니다.
더 안타까운 일이 있습니다. 

그가 가진 상처와 아픔이 자신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 세대까지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아버지로서 자녀를 사랑할 수가 있을까요?
어려운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어긴 죄의 심각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말할 때 동성애를 많이 말합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동성애는 하나님께서 디자인하신 성의 모습을 완전히 왜곡한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다음 주일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비단 동성애만이 아닙니다. 

부부 사이가 아닌데 성적 결합을 하는 것도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어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어겼을 때에는 거기에 따르는 아픔과 상처가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로 인한 가장 큰 피해자는 당사자가 아니라 아무 잘못 없는 그 아이들입니다.

하나님은 성적 결합에 대한 분명한 규범을 세우셨습니다.
한 남성과 한 여성이 결혼을 합니다. 

오직 부부만이 성적 결합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게 됩니다. 

이것이 인간의 행복을 위한 하나님의 창조 질서입니다.
이 질서를 지키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그 축복과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질서를 무시하거나 부정하면 큰 아픔과 상처를 경험하게 됩니다.
제가 결혼식에서 주례를 하게 되면 항상 하는 말이 있습니다.
결혼은 계약이 아니라 언약이다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결혼을 계약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동산 계약 맺고 근로계약 맺듯이 신랑 신부가 상호 간에 합의해서 결혼하는 것, 그것이 계약하는 것이 결혼이라고 생각합니다.
상호 간에 합의해서 결혼했으니까 얼마든지 상호 간에 합의해서 헤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결혼을 계약이 아니라 언약이라고 말씀합니다.

언약은 두 사람이 맺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약속의 증인이 되십니다.
하나님을 증인으로 해서 맺는 그 영원한 약속이 바로 언약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과 언약을 맺고 그것을 기념하는 예식을 제정하셨습니다.
구약에 보면 출애굽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서 유월절 절기를 지켜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약에 보면 십자가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서 성찬식을 지켜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결혼을 언약으로 본다면 그 언약을 기념하는 예식이 있습니다.
구약에서 유월절을 지키고 신약에서 성찬식을 지키는 것처럼 부부 사이에도 그 결혼 언약을 기념하는 예식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적 결합입니다. 

성적 결합은 단지 성욕을 위한 육체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이것은 남편과 아내가 한 몸이 되었다는 것을 기념하는 언약적인 행위입니다.
테크니컬한 텀도 있습니다. 

커버넌트 리뉴얼 세레머니라고 부릅니다.
나의 육체를 나눈 그 상대방은 나의 모든 것을 다 나누었다는 뜻이고, 이것은 평생의 헌신과 사랑을 주었다.
그 사람에게만 주었다라는 의미입니다. 

창세기 2장 2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멘.

남편과 아내가 결혼해서 성적 결합을 하면 한 몸이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육체적인 결합이 아닙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관계적인 의미에서 나의 모든 것을 나누는 한 유기체, 헬라어로 소마라고 하는데 한 유기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창조 질서입니다.
여러분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나눌 수 없습니다. 

여기까지가 육체고 여기부터는 영혼이다라고 나눌 수가 없죠.
밥 먹는 것은 육체이고, 예배드리는 것은 영혼이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밥 먹는 것도 우리의 전 인격이고, 예배드리는 것도 우리의 전 인격입니다.
마찬가지로 성적 결합은 육체적인 의미와 영적인 의미 모두를 가지고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적용하면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몸이 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강조하는 진리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이 된다고 하면서 언급했던 구절이 바로 창세기 2장 24절 말씀입니다.
동일한 헬라어 소마가 사용되었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모든 것을 나누는 한 유기체가 되는 것처럼, 창녀와 합하면 그와 모든 것을 나누는 한 유기체가 됩니다.
왜냐하면 성적 결합은 단지 육체적인 결합이 아니라 영적인 결합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성관계는 더러운 것도 아니고 죄악도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자 선물입니다. 

다만 하나님은 결혼 관계 안에서 그것을 누리게 하셨고, 그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게 하셨습니다.

신학적으로 볼 때 성적 결합은 부부가 맺은 그 결혼 언약을 기념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담이 하와를 향해서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에 살리라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면 이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신비로운 것인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성적 결합을 가볍게 여기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이 육체를 바라보는 관점과 세상 사람들이 육체를 바라보는 관점은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죽음과 함께 육체가 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사라질 몸을 아껴서 뭐 하겠습니까? 

즐길 수 있을 때 실컷 즐겨야 한다고 생각하며 몸을 함부로 사용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육체의 부활을 믿습니다. 

죽음과 함께 육체가 다 사라진다고 믿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과 영원한 삶이 이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육체는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 앞에서 순결하게 살고자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4절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아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마지막 날에 다시 부활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부활할 때 어떤 모습일까요? 

지금과 완전히 다른 모습일까요? 아니면 지금과 비슷한 모습일까요? 

우리 중에 부활한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우리가 확실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생각해 보면 몇 가지 단서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사람들이 알아봤나요?
못 알아봤나요? 어떤 사람은 알아봤고 어떤 사람은 못 알아봤습니다.
부활하신 모습이 너무나 영광스러워서 막달라 마리아는 못 알아봤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랑받는 제자 요한은 단번에 주님을 알아봤습니다.

만약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면 요한이 알아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근데 요한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봤습니다. 

이 말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그 이전의 모습이 상당히 비슷하다는 뜻입니다.
조금 더 쉬운 질문을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못자국과 창자국이 있었나요? 없었나요? 

있었습니다. 

의심 많은 도마가 못자국과 창자국을 보고 나서 그분이 예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 못자국과 창자국이 있었습니다.
이 말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과 살아계셨을 때의 모습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활은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변신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을 때의 모습이 이어지면서 영광스럽게 변화된다는 거죠.

 

여러분 이것이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교훈을 한 가지 줍니다.
우리의 육체는 썩어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물론 일시적으로 부패해서 사라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때에 다시 부활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부활한 모습은 살아있을 때의 모습과 연속성을 가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육체를 순결하게 사용하는 것은 영원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영혼은 선하고 육체는 악하다라는 생각은 성경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이 생각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에게서 온 것입니다.
기독교는 육체를 선하게 여기는 유일한 고등 종교입니다.
여러분 세계 모든 종교는 육체를 악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불교는 육체의 욕망 때문에 모든 문제가 생겼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욕망의 불꽃을 꺼뜨려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다 선하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4절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함에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 육체, 우리의 몸 다 선한 것입니다.
육체로 죄를 짓는 것이 문제이지 육체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육체는 영원할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모든 사람의 육체는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인의 육체도 부활하고 악인의 육체도 부활합니다.
그리고 부활한 그 육체의 모습은 지금의 모습과 연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가 영원하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가 성적 순결의 의미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음행은 심각한 죄악입니다. 

다른 모든 죄는 몸 바깥에 짓는 죄이지만, 음행은 자기 몸 안에 짓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8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아멘.

음행은 배우자뿐 아니라 나에게 피해를 주고 나에게 상처를 줍니다.
음행을 저질러서 상하게 되는 것은 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음행을 저지르는 상대가 배우자가 아니죠. 배우자가 아닌 그 상대가 거룩한 사람일 리가 없습니다.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몸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음행을 저지르면 내 몸이 더러운 몸이 되어서 나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입니다.

 

여러분 리스트 컷(wrist cut) 증후군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리스트는 손목을 뜻하고 컷은 자르다는 뜻 의미입니다.
스스로 자기 손목을 자르는 행위를 가리켜서 리스트 컷 증후군이라고 부릅니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스스로를 자해하는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기 몸을 스스로 상하게 하다니 얼마나 어리석고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런데 음행이 바로 이러한 자해 행위와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모든 죄는 몸 바깥에 짓는 죄악이지만, 음행은 자기 몸을 상하게 하는 죄악입니다.
우리 몸이 사라지지 않고 영원하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육체를 자기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내 몸을 내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냐고 질문할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 몸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잠시 맡기신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본문 19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아멘.

우리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정 기간 동안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몸을 일정 기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그 권한을 위임받았을 뿐입니다.
사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주님께서 일정 기간 동안 맡기신 것입니다.
우리의 건강, 재능, 시간, 돈 모두 다 여기에 해당됩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의 재능이 영원하지 않습니다. 

젊었을 때 그렇게 머리가 좋던 사람도 나이가 들면 깜빡깜빡합니다.
기억력도 예전 같지 않고 판단력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의 돈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물질의 축복이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물질을 맡기셨을 때 그분의 뜻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나중에 다 지나서 그때 돈 있을 때 좀 잘할 걸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육체 역시 일정 기간 동안 맡기신 것입니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의 육체를 소중하게 다루게 됩니다.
혹시 여러분은 여러분의 물건을 누군가에게 빌려주었던 적이 있으십니까?
그런데 그것을 빌려간 사람이 함부로 그것을 사용한다면 기분이 어떨까요?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제 차를 친구에게 빌려주었던 적이 있습니다.
친구 부모님이 뉴욕으로 오시는데 모시러 가야 한다고 차를 좀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제가 했던 보스턴에서 뉴욕까지가 차로 4시간 거리입니다.
왕복 8시간 거리를 사용하겠다고 제 차를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제가 차를 세차를 할부로 산 지 1년이 안 됐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1년이 안 된 차를 왕복 8시간 운전하겠다는데 빌려주겠습니까?
쉽지 않은 이야기였지만 저와 친한 친구라서 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차를 받았는데 트렁크 쪽에 스크래치가 생겼습니다.
새 차를 산 지 얼마 안 됐는데 차에 스크래치가 생기면 여러분 기분이 어떨까요?
혹시 이런 말 들어보셨습니까? 

'새 차에 기스가 나면 내 영혼의 기스가 난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들은 말입니다. 

큰 마음으로 큰 마음먹고 빌려줬는데 그것을 조심히 사용하지 않으면 기분이 안 좋습니다.
아마 다시는 앞으로 빌려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이런 마음을 가지셨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건강과 재능과 시간과 돈을 맡기셨습니다.
일정 기간 동안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해야 합니다.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끼는 마음으로 조심히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은 우리의 소유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시고 우리를 사셨습니다.

본문 20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 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아멘.

이 개념을 신학적인 용어로 '속량'이라고 부릅니다.
고대 사회에서 노예를 해방하기 위해서는 값을 치르고 그의 소유권을 사 왔습니다.
나의 소유로 만든 이후에 자유를 선포해 주었습니다.
값을 치르고 소유권을 사 와서 자유를 주는 그 개념이 바로 속량,
영어로 하면 리뎀션입니다. 

 

우리의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값을 치르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유권을 사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기 원하십니다. 

죄의 노예 사탄의 노예로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선한 뜻에 동참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몸이 우리의 것이 아닌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를 속량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하게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단순히 성적 순결만은 아닙니다.
성적 순결을 통해서 강조하고자 했던 핵심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진정한 자유입니다. 

여러분에게 자유는 무엇입니까?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자유입니까? 

마음대로 술 마시고 마음대로 성관계하는 것이 자유입니까?
진정한 자유란 무엇일까요?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아멘.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않겠다고 선포합니다.
진정한 자유는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 중독의 문제에서 벗어나서 진짜로 선하고 진짜로 유익한 것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현대 사회의 큰 문제가 중독입니다.
알코올 중독, 약물 중독, 게임 중독, 스마트폰 중독, 수많은 중독의 문제가 우리의 삶과 가정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서 오랫동안 중독을 연구했던 애나 램키라는 교수님이 계십니다.
정신의학과 교수인 그녀는 중독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즐거운 자극에 오랫동안 반복해서 노출되면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은 감소하고, 쾌락을 경험하는 우리의 기준점은 높아진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지 않고 언제나 더 많은 것을 바라면서 끝없이 갈등할 것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쾌락에 오랫동안 반복해서 노출되면 우리는 자유를 박탈당하게 됩니다.
도파민의 노예가 되고 호르몬의 노예가 되어서 무기력하게 그 행동을 반복하게 됩니다.

중독에 가장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같은 자극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극에 대한 내성이 생겨서 점점점점 더 큰 자극을 찾게 됩니다.
술, 도박, 담배, 마약 다 똑같습니다. 

여러분 점점 약화되는 중독은 없습니다.
점점 강화되는 중독만 있습니다. 

이것을 경제적으로 설명하면 인플레이션과 같습니다.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화폐 가치가 낮아져서 동일한 물건을 사기 위해서 더 많은 돈을 주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일에 중독이 되면 동일한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더 큰 자극을 느껴야 합니다.
화폐 가치가 떨어지는 것처럼 기쁨의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중독된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게 됩니다.
더 큰 자극, 더 큰 쾌락을 바라면서 끝없는 갈망에 빠지게 됩니다.
육체의 욕망을 따라가는 사람은 그 중독에 빠져서 자기 자신을 망가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송냥하셨습니다.
죄의 노예, 사탄의 노예였던 우리를 값을 치르고 사셨습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는데, 우리가 여러 가지 중독에 빠져서 다시 자유를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상황, 안타까운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기껏 사탄의 속박에서 구출해 줬더니 다시 자기 발로 사탄의 수하 밑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육체의 욕망을 따라가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중독에 빠진 사람은 절제를 배우지 못한 사람입니다.
내 육체가 시키는 대로 그냥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미 충분히 배부르게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먹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 질서를 어겨가며 배우자가 아닌 다른 이성에게 다가갑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살아가라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은 죄로부터 해방되어서 진정으로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아멘.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사람은 종의 멍에, 죄의 멍예를 다시는 매지 않습니다.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사람은 절제를 배운 사람입니다.
절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서 나오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창세기에 보면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성적인 유혹을 받습니다.
만약에 그때 요셉이 실수를 했다면 그의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한 번의 실수로 보디발의 아내와 동침했었다면 그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아마 평생 그 사건으로 인해 발목 잡혔을 것입니다.
요셉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할 때의 큰 걸림돌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고, 절제를 배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유혹의 자리를 피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 또한 진정으로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 유혹의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 결과 그는 모든 사람 앞에서 떳떳하게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갈 수 있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애나 램키 교수는 다음과 같이 또 한 이야기했습니다.
모든 쾌락에는 대가가 따르고, 거기에 따르는 고통은 쾌락보다 훨씬 더 오래 간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육체의 쾌락을 추구하면 중독에 빠지게 되고, 그 결과 자유를 빼앗기게 됩니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은 절제를 배운 사람입니다.
절제의 시작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따라서 거룩하게 살아갈 때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성적으로 순결한 삶을 살아가서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선한 뜻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여주는 선한 증거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5xCCt38xMQ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