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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대원목사 설교

크리스천의 윤리 (4)_실존주의자가 바라본 세상_24.11.24

by 마이코 2024. 11. 28.


크리스천의 윤리라는 주제로 시리즈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올바른 선택, 유익한 선택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올바른 선택을 내리기 위한 체계적인 기준을 우리가 윤리라고 부릅니다.
올바른 선택을 내리기 위해서는 규범과 상황과 실존 모두를 살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이것을 삼중 시각이라고 부릅니다.

 규범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상황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리 인생의 현장입니다.
실존은 규범과 상황을 인식하면서 실제로 그 선택을 내리는 주체를 의미합니다.


이 세 가지 모두를 고려해야지 우리가 올바른 선택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규범만 지나치게 강조하면 바싹 마른 율법주의자가 될 수 있습니다.
상황만 강조하는 사람은 상황이 나빠서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만 늘어놓을 것입니다.
지난번에 살펴보았던 대로 상황 윤리의 가장 큰 문제는 사랑과 율법이 서로 배치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이것은 옳지 않은 관점이지요. 

율법을 주신 그 하나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에 율법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계명을 지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실존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실존은 규범과 상황을 인식하고 실제로 그 결정을 내리는 주,체 에이전트를 뜻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누가 결정을 내립니까? 

누구와 결혼할지, 어떤 직업을 가질지 누가 결정합니까?
내가 결정합니다. 

그러니까 실존은 나 자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있습니다.

 실존은 나 자신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상당히 주관적입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실존의 문제는 주관주의와 깊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주관주의는 나의 생각, 나의 경험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교회의 예배 분위기가 어떤지 은혜로운지 질문한다면 다양한 의견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대체적으로 일치하는 부분이 있겠죠. 

대다수 성도들이 동의하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다르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내가 말하는 것이 대다수의 의견인지 아니면 소수의 의견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우리는 주관주의에 빠져서 내가 생각하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느끼는지 중요하지 않고 내 의견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실존의 문제입니다. 

실존주의자는 내가 보고 들은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내가 직접 경험하지 않는 것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의 경험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계 모든 곳을 다 가볼 수도 없고요.
모든 사람들을 다 만나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뢰할 수 있는 권위를 통해서 수많은 사실들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영국 런던에 가면 타워 브리치라고 있습니다.
1894년에 세워진 이 다리는 가운데가 쭉 올라가서 그 사이로 배가 지나갈 수 있죠.
하루에 서너 번씩이나 다리가 올라가고 1년에 800번 정도 다리 중간에 올라간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다리 중간 위에 올라가는 그 타워 브리치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그것을 안다면 어떻게 아십니까? 

직접 런던에 가서 직접 보셨습니까?
아닙니다. 

사진으로 보고 인터넷에서 봤습니다.
그런데 혹시 그 사진과 인터넷이 조작된 것은 아닐까요?
누군가가 우리를 속이기 위해서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든 것은 아닐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매체에서 그러한 권위에서 말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내가 경험한 것, 내가 본 것만 믿겠다라는 주관주의로는 우리가 이 현실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직접 보지 못했지만 수많은 정보를 우리는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둘째로 우리의 경험이 항상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왜냐면 내가 느끼는 것이 항상 그 본질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은 지구의 중력을 느끼십니까?
일상생활하면서 '지구가 지금 나를 끌어당기고 있구나'라고 느끼십니까?
아닙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가 중력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5층 높이에 올라가서 뛰어내릴 수 있겠습니까?
나는 중력을 느끼지 못하니까 높은 데서 뛰어내려도 안전할 거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느끼든지 느끼지 못하든지 상관없이 우리 모두는 중력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실존주의자는 내가 직접 보고 경험한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우리가 실제 현실을 다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경험에는 한계가 있고 또 우리 경험이 항상 본질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전도서는 실존주의자의 시각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전도서를 본문으로 설교를 할 때에 실존주의에 대해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잠언 말씀은 규범적인 세상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착하게 살면 형통하고 악하게 살면 벌을 받는 그런 세상입니다.
반면에 전도서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실존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의인이 고통을 받고 악인이 형통하는 세상입니다.
미련하나 지혜자나 거의 큰 차이가 없는 그런 세상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전도서 7장 1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 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전도서의 저자 솔로몬이 말합니다.

내가 세상을 잘 살펴보았더니 의인이 멸망하는 경우도 있고 악인이 장수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뭐 요즘에만 그런 줄 알았더니 3천 년 전에도 똑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착한 사람인데 고통받는 경우가 있고 나쁜 사람인데 형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나봇의 포도원 사건이 있겠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왕 아합 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고 싶어서 그것이 너무 탐나서 전전긍긍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왕비 이세벨이 말하기를 뭘 그렇게 고민하냐고 그냥 나보이 왕을 저주하는 거짓말을 했다고 거짓말을 하면 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거짓 증인을 내세워서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는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신성 모독죄로 나봇을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그리고 태어나게 아합 왕은 그의 포도원을 빼앗아 갔습니다.

 

제3자가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전도서 말씀이 딱 맞습니다.
의인은 자기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고, 악기는 자기 악에도 불구하고 장수하고 있습니다.
자원이 약속하고 있는 규범적인 세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 실존적인 세상을 전도서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실존주의자가 바라본 세상입니다. 

실존주의자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보이는 것만 믿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영적인 진리, 규범, 이런 거 믿지 않습니다.
인생의 의미, 목적, 이런 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내 눈에 보이고 내가 경험하는 것만 믿습니다.
현대인들의 사상에 가장 부합한 철학이 실존주의 철학입니다.
그러면 이 타락한 세상을 여러분 있는 그대로 보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의인이 고통을 받고 악인이 형통한 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우울하고 공허합니다. 

무언가 잘못된 것 같다.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은 불확실한 것의 연속이기 때문에 깊은 불안감에 빠지게 됩니다.

여러분 공포와 불안은 조금 다른 개념입니다. 

공포는 구체적인 대상이 있는 두려움입니다.
예를 들어서 호랑이를 보면 누구나 다 공포심을 느끼죠.
그런데 그 공포의 대상이 사라지면 그 공포감도 사라집니다.
반면에 불안은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상황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공포는 구체적인 대상이 있지만, 불안은 구체적인 대상이 없습니다.
모호한 상황,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바로 불안입니다.

 

최근 들어서 불안장애를 겪는 청년들이 많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실존주의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인생의 목적과 방향이 없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방향이 없다는 것은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는 뜻입니다.
그 불확실성의 늪에 빠질 때에 우리는 불안감을 느끼게 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소망하지만 우리 안에는 불확실함 뿐이다. 우리는 행복을 찾지만 불행과 죽음만을 발견한다.

우리는 진리와 행복을 갈망하지 않을 수 없으나 확실함이나 행복을 얻는 데 무력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은 이렇게 우울합니다. 

왜 우울할까요?
인생의 의미를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을 대표하는 하이레코와 사르트르가 주창한 개념이 있습니다.
'인간은 세상에 내 던져진 존재이다'라는 주장입니다.
철학적인 용어로 이것을 '피투성 던져진 존재이다'라고 하고, 독일어로 '게브로펜하이트'라고 합니다.
내가 스스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난 세상에 던져졌다는 의미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나신 분 계십니까?
태어나 보니깐 이 세상이었죠. 

실존주의적인 면에서 우리는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세상에 던져졌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어떤 태어난 목적 의미 같은 거 없다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은 다 우연의 연속입니다.

태어난 것도 우연이고, 살아가는 것도 우연이고, 죽는 것도 우연입니다.
모든 것이 우연이니까 굳이 열심히 착하게 살 필요 없습니다.
적당히 즐기다가 적당히 가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실존주의 철학입니다.
우울하고 공허하고 무기력한 철학 이 철학이 꽃피운 곳이 있는데 바로 프랑스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프랑스를 향한 동경이 있는 분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파리 하면 뭔가 문화와 예술의 도시, 낭만의 도시라고 생각하십니까?
실제로 거기 가보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매우 우울하게 공허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 후배 중에서 프랑스를 동경한 친구가 있었는데 파리에서 한 10년 정도 살고 나서 우울증이 아주 심해졌습니다.
프랑스 현대 문학도 아주 우울하고 난해합니다. 

여러분 프랑스 소설을 읽어보면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이것은 제 의견이 아니라 대학에서 프랑스 문학을 전공한 제 아내의 의견입니다.

프랑스 문학 중에서 가장 감동적인 것이 레미제라블인데, 그 이유는 빅토르 위고에게 그나마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존주의 프랑스 문학이 우울한 것처럼 실존주의 관점에서 쓴 전도서 말씀도 우울합니다.
잠시 하나님의 개입을 보류하고 이 세상을 있는 모습 그대로 보면요.
우리 마음이 우울해집니다. 

전도서 2장 22절, 23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려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 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아멘. 60대, 70대 어르신 분들은 이 말씀에 공감될 것입니다.
지난 세월 동안 수고하고 애썼던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문득문득 이런 생각이 찾아올 때가 있거든요.
우리가 신앙인이지만 또 우리 역시 현실을 살아가고 있고 있기 때문에 실존적인 측면에서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내가 나름대로 열심히 산 것 같은데 내 인생에 내 수고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실존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공허함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공허함이야말로 인간의 독특성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독특성이 무엇일까요? 

여러분 인간은 의미를 찾는 존재입니다.
의미가 붕괴되면 그 사람의 인생 전체가 다 붕괴됩니다.
동물은 맛있는 음식만 주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반려동물 키우는 즐거움이 무엇인가요?
맛있는 것 주면은 나에게 충성을 다합니다. 

동물은 아주 단순해서 맛있는 거 주는 사람에게 충성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맛있는 음식 준다고 충성하나요?
정서적으로 나를 학대했는데 돈 많이 준다고 그 사람을 사랑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에게는 의미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파스칼이 이런 말도 했죠.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빈 공간이 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 창조주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인생의 의미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왜 태어났는지, 내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말해줄 수 있는 분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밖에 없는 줄로 믿습니다.
다른 모든 것들은 잠시 동안 우리에게 기쁨을 줄지언정 인생의 의미를 말해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 창조주 하나님은 눈에 안 보인다는 것입니다.
실존주의자들은 눈에 보이고 경험할 수 있는 것만 믿기 때문에 하나님을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했을 때 나타나는 결과는 의미의 붕괴입니다.
여러분 의미가 사라지면 목적도 사라집니다. 

그때 나타나는 결과가 우울과 공허입니다.
이것이 바로 실존주의자들이 공허하고 우울한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실존은 다 나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실존은 우리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에 반드시 필요한 부분입니다.

여러분 우리 중에서 의식주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인생의 의미도 필요하지만 먹을 음식과 입을 옷도 필요합니다.
엄연히 말해서 현실을 무시하는 것 가능하지도 않고요,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절대로 현실을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 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오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오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사람에게 떡도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서 먹을 음식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떡으로만 살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동물이 아니라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영혼의 양식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그 영혼의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육체의 양식과 영혼의 양식 모두를 다 공급해 주십니다.

우리도 현실적인 관점과 이상적인 관점, 그 모두를 다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배치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먹고 사는 현실만 강조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반대로 현실을 다 무시하고 이상만 강조하는 것 또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육체를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현실적인 필요, 실존적인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균형 잡힌 시각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조금 이상하게 보일 수 있는 구절 또한 있습니다.
본문 16절 1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귀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 

 

아멘,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고,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말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어떤 의미일까요? 

너무 깨끗하게 살 필요도 없고, 너무 더러워도 안 되니까 그냥 적당히 살아가라는 뜻일까요?
물이 너무 맑으면 고개가 없다는 공자의 말과 똑같은 의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1차적으로 이 말씀은 자기 의를 조심해야 한다는 권면입니다.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무시하고 비판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술 한 잔도 안 왔는데, 어떻게 교회 다니면서 술을 마실 수가 있어라고 비판합니다.
나는 매일 새벽 기도 나왔는데, 어떻게 중직이 돼가지고 새벽 기도도 안 나와라고 비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자기 의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살아가는데 그렇게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을 보고 무시하고 비난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전도서는 지나치게 의인이 되어서 자기 의에 빠지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전도서 7장 20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

 

아멘,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않는 그런 의인은 세상에 없습니다.
로마서에 기록된 것처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는 그 말씀이 정말 맞는 말씀이지 우리 누구도 완벽하게 의로울 수 없고, 우리 누구나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도 잘못할 수 있고 나도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라는 말은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내가 완벽할 수 없고 나도 틀릴 수 있다는 그 사실을 인정하라는 뜻입니다.
자기 의에 빠져서 다른 사람 무시하고 비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현실과 이상 사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기억하면서 꿈과 비전을 위해서 살아가죠.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에게는 현실적인 문제, 실존적인 문제 또한 있습니다.
교회든지 세상이든지 사람들이 모이면 현실주의자도 있고 이상주의자도 있습니다.
현실주의자는 눈에 보이는 그 현실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이상주의자는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목적과 비전을 강조합니다.

현실주의자는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고 말하고, 이상주의자는 최선의 상황을 향해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러분 그러면 현실주의자가 더 필요할까요? 

이상주의자가 더 필요할까요라고 질문하면 둘 다 필요하다고 답하시면 되겠습니다.
우리에게는 현실주의자도 필요하고요, 이상주의자도 필요합니다.
만약에 우리 교회에 현실주의자만 있다면 전도와 구제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전도와 구제는 우리 교인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 교회의 재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아니 왜 우리가 힘들게 헌금해서 우리 교인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 돈을 써야 합니까?
이것이 바로 교회의 본질이자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손해인 것 같지만 복음을 증거하는 교회의 본질을 감당할 때에 교회가 더욱더 힘 있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우리 교회에 이상주의자들만 있다면 교회 내부 시설 확충 이런 거 하지 않을 겁니다.

선교지에 가면 할 일 얼마나 많고 불쌍한 사람들 얼마나 많은데 왜 우리 교회 led 스크린 바꾸고 카메라를 바꾸겠습니까?
더 효과적인 예배 환경을 위해서 현실적인 노력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다음 세대와 청년들을 위해서 미디어 사역은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시설의 확충을 위해서도 노력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는 살아있는 유기체이기 때문에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고 변화될 수 있습니다.
만약에 교회가 딱딱한 조직체라면 변화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유기체이기 때문에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현실주의자도 필요하고 이상주의자도 필요합니다.
우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현실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비전을 위해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이상주의자도 필요합니다.

여러분께서 탁월한 리더가 되길 원하신다면, 현실적인 관점도 갖추어야 하고 또한 이상적인 관점도 갖추어야 합니다.
한쪽으로 치우친 사람은 많은 사람을 포용하는 포용력이 적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도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18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내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유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이이니라 

 

아멘, 한글 성경으로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이다라고 하는데, 영어로 보면 o 익스트임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모든 극단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너무 현실적으로 치우쳐도 안 되고, 너무 이상적으로 치우쳐도 안 된다라는 말입니다.
현실과 이상 모두를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한 명씩 한 명씩 발을 씻기는데 베드로가 극구 사양하죠.
어떻게 선생님이 제자의 발을 씻을 수가 있습니까?라고 사양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씻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 상관이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이제 베드로가 또 오버하죠. 

발뿐만 아니라 온몸을 씻어달라고 말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0절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미 온몸이 다 깨끗하니깐 발만 씻으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를 향한 그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를 느낍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로 깨끗하게 된 줄로 믿습니다.
목욕한 사람과 같이 이미 온몸이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탈락했기 때문에 이 세상을 걸어가다 보면 우리의 발이 더러워질 수 있습니다.

죄의 때가 우리에게 묻을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께 나아가서 우리의 발을 씻어달라고 겸손하게 부탁해야 합니다.
염치없고 부끄러운 일이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실존적인 문제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비로운 주님께서 우리의 발을 씻어주십니다.
우리 죄의 문제, 실존적인 문제를 다루어 주시면서 우리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매 주일마다 참회의 기도를 드리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이상을 꿈꾸고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며 살아가지만 여전히 현실적인 문제, 죄의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할 때도 있고요. 또 너무나도 많이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한 가지 기쁜 소식은 주님께서 이 모든 것을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현실의 무게가 어떤지, 우리가 실제로 겪는 실존적인 문제가 어떤 것인지 주님께서 다 아십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던 그 예수님은 우리와 동일한 현실을 살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매주일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의 발을 씻어주십니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와 나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연약한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고 용납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복음 중에 복음이요,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을 주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현실에 매몰되어서 인생의 목적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변하지 않는 주님의 그 사랑 안에서 확고한 인생의 의미를 붙잡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인생의 현실은 아주 복잡합니다. 

도덕적인 원칙대로 규범대로 모든 것이 딱딱 맞아떨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의인이 고통을 당하고 악인이 형통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절대적인 규범을 부정하면 실존주의자처럼 우울하게 공허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 삶에서 의미와 목적이 사라지면 우리는 우울과 공오에 빠지기 때문이죠.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역설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여러분 모순과 역설은 서로 다른 개념입니다. 

모순은 두 가지가 서로 상충되는 관계입니다.
한 가지가 사실이면 한 가지는 거짓입니다. 

둘 다 사실이 될 수 없는 관계가 모순입니다.
하지만 역설은 겉으로 보기에는 상충되는 것 같지만 더 깊은 차원에서는 동시에 사실이 될 수 있는 관계입니다.

 

우리가 고등학교 문학 시간에 배웠던 시 중에 이런 게 있죠.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않았습니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논리적인 과학자가 이 말을 들으면 그래서 님이 갔다는 거야, 안 갔다는 거야라고 질문할 것입니다.
하지만 문학적인 사람은 이 말을 들으면 그래 님은 떠나갔지만 그와 함께했던 시간, 그를 향한 사랑은 내 마음 가운데 여전히 남아있다라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이것이 바로 역설이죠.

우리가 현실과 이상,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역설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규범과 내가 실제로 느끼는 실존이 충돌하는 것 같을 때 우리가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내 삶 가운데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지라고 의심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전도서 7장 23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하며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 하였으나 지혜가 나를 멀리하였도다.

 

아멘. 여러분 역사상 가장 지혜로웠던 솔로몬이 말했습니다.
내가 스스로 지혜자가 되리라 하였으나 지혜가 나를 멀리하였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스스로의 힘으로 우리가 완벽한 지혜자가 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나 자신과 세상에 대한 완벽한 지식을 갖기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하고 또 모든 것을 다 알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꼭 알아야 하는 부분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지만 모든 지식을 다 우리에게 주지는 않으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역설과 더불어 사는 삶의 시작입니다.
나는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하고 모든 것을 다 알 수도 없다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인생에 단 한 가지 성공의 공식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자기 힘으로 성공한 사람들, 자수성가한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자기 방식에 대한 확신이 큽니다. 야 내가 한 대로만 하면 너도 성공할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근데 이 말은 절반만 맞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처한 상황과 이 사람의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고, 나의 실존과 이 사람의 실존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전 세계 인구가 80억 명인데 80억 명 모두에게 적용되는 성공의 원칙 같은 것은 없습니다.
육아가 힘든 이유가 바로 이것이지, 여러분 시중에 수많은 육아 책이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아가 힘든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이마다 성격이 다르고 개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아이의 성격을 잘 카테고리화해도 내 아이가 정확하게 그 카테고리 안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육아의 왕도가 없는 이유는 아이마다 특징과 개성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에서 성공하는 단 한 가지 비법은 없습니다.
여러분 교회를 부흥시키는 세 가지 비결, 이런 것도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신 성경적인 원리는 있습니다.
근데 그 원리가 실제 현실에 적용되는 방법에는 수십 가지, 수백 가지 다른 길이 있기 때문에 단 하나의 비법이나 비결은 없습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면 우리가 인생의 역사를 이해하고 함께 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성숙한 사람은 역설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운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특징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아는 척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내가 모르는 부분이 많이 있다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신 부분에 있어서는 마음을 다해 순종하고, 그 너머에 있는 부분에 있어서까지는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실 때까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
또한 역설과 더불어 살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 모습은 실존주의자와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실존주의자는 눈에 보이는 것만 믿습니다. 

하지만 본질주의자 이상주의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영원한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습니다.
2차 대전 나치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그 유대인들은 극심한 고난을 겪었습니다.
강제, 노동, 굶주림, 질병으로 큰 고통을 당하면서 삶에 대한 의지와 소망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증언에 따르면 생존을 포기한 사람은 자기 배설물 위에 누운 채로 있었으며 아무것도 더 이상 그를 괴롭히지 못했다라고 말을 합니다.
삶에 대한 의지와 소망을 다 포기한 사람은 그렇게 죽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극심한 고통과 절망 가운데 있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들은 포로수용소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나는 태양이 비추지 않는다 해도 태양을 믿습니다.
나는 사랑이 주변에 없는 듯 느껴져도 사랑을 믿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분이 침묵하신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믿습니다. 라고 기도했습니다.

 

깜깜한 수용소 안에 갇혀 있으면 태양을 볼 수가 없죠.
그런데 내 눈에 태양이 보이지 않는다 해도 태양은 존재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 실존주의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태양을 믿을 수 없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그 상황에 절망에서 모든 소망을 잃고 무기력하게 죽어갈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은 그렇게 무기력하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는 태양을 믿는 것처럼 침묵하시는 것 같지만 여전히 함께 계시는 그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삶에 대한 소망을 포기하지 않았고, 독일이 패망한 이후에 구출되었습니다.
우리 앞에 있는 상황이 절망스러워도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역설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은 광야 길과 같죠 여러분 광야에는 길이 없습니다.
그렇죠. 광야에 길이 없으니까 지도가 있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광야에서는 지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안내자가 필요합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안내자가 되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잠언 3장 5절 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내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내 길을 지도하시리라.

 

아멘. 현실과 이상 사회를 살아갈 때 우리의 안내자가 되시는 하나님만 의지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말씀해 주시는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날마다 동행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xglFoVKFV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