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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대원목사 설교

크리스천의 윤리 (3)_상황이 나쁘다는 변명 24.11.10

by 마이코 2024. 11. 28.

 

크리스천의 윤리라는 주제로 시리즈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올바른 선택을 내리기 위해서는 규범 상황, 실존이라는 3중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지난주에는 규범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 가지 종류의 규범을 주셨습니다.
첫째는 우리 마음 가운데 기록된 규범 일반 계시이고요.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규범 특별계시입니다.
규범을 주신 하나님께서 인격적이시기 때문에 기독교의 규범은 인격적이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상황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상황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을 뜻합니다.
규범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상황은 계속해서 변화되고 있습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그 규범을 변화하는 상황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이것이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대부분의 윤리적인 문제가 여기에서 발생합니다.
어떤 사람은 규범을 강조하고 또 어떤 사람은 상황을 강조합니다.

특별히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는 규범보다 상황을 더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상황은 계속해서 변했는데 오래전에 그 규범을 가지고 적용하면 고리타분 사람이라고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천만 관객을 돌파했던 한 한국 영화에서는 이런 대사가 나왔습니다.
나쁜 인간은 없다. 나쁜 상황이 있는 것이지라는 대사가 나왔습니다.
저는 이 대사를 듣는 순간 즉각적으로 알아차렸습니다.
이 대사를 쓴 사람은 절대적인 규범을 인정하지 않고 주어진 상황을 강조하는 인본주의자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나쁜 사람은 없다. 나쁜 상황이 있는 것이지'

여러분 이 말이 어떤 의미일까요?
인간은 원래 나쁘지 않은데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쁘게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모든 이것을 상황의 탓으로 돌리는 상황 윤리의 전형적인 입장입니다.
오늘 설교는 이 주장에 대한 반박입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나쁘게 행동했다는 그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겠습니다.

성경에 근거해서 증명하고, 윤리에 근거해서 증명하고 또한 우리 현실에 비추어서 증명해 보겠습니다.
사실 이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현실에 비추어서 증명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여러분 모든 것이 다 좋은 상황인데 어리석은 선택을 한 사람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가정적으로 다 좋고 평안한데 옳지 않은 선택을 하는 사람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물론입니다. 

얼마든지 있죠. 

제가 아는 사람은 미국 주재원으로 대기업 소속인데 미국 주재원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미국 주재원이 되기 위해서 경쟁이 아주 치열합니다.
일단 주제원이 되면 집 렌트비가 나오고 자동차가 나오고 자녀 학비가 나옵니다.
플러스 월급이 나옵니다. 

자녀들이 미국에서 공짜로 공부할 수 있으니깐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그렇게 온 가족이 미국 주재원으로 갔는데 그만 이 사람이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미국에 있는 회사 사람들하고 같이 미국 성인 클럽에 갔다가 아내에게 들킨 것입니다.
이 사람이 아내하고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내와 사이도 좋고 엄청 가정적인 사람인데 이런 잘못을 했습니다.

제가 이것을 보면서 깨달았습니다. 

모든 상황이 다 좋아도 인간은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가정적으로 다 좋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죄를 짓고 잘못을 합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모든 상황이 다 나쁜데 그럼에도 올바른 선택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아는 또 어떤 사람은 어렸을 때 부모님께서 이혼하셨습니다.
가정폭력을 일삼는 그 아버지를 견딜 수가 없어서 어머니께서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 나오셨습니다.
어머니 혼자서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식당에서 일하시면서 온갖 고생을 다 하셨는데, 이 어머니께서는 끝까지 올바른 선택을 하셨습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신앙을 잃지 않으셨고 기도로 자녀들을 키우셨습니다.
그 결과 자녀들이 다 대학 나와서 착실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어진 상황은 너무나 나빴지만 악한 길에 빠지지 않고 올바른 선택을 하셨습니다.

 

이 두 가지 경우를 비교해 보면 모든 것을 상황 탓으로 돌리는 이 상황 윤리는 옳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래 인간은 착한데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쁘게 행동했다는 것이 구차한 변명입니다.
세상에는 좋은 상황에서도 악하게 사는 사람이 있고 나쁜 상황에서도 선하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렇게 실제 현실은 복잡하기 때문에 규범이 딱 책에서 나오는 것처럼 교과서처럼 딱딱 맞아떨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두 가지 규범이 서로 충돌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은 규범이 실제 상황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열리고 전쟁을 앞두고 여호수아가 정탐꾼을 보내는 장면입니다.
여리고성이 어떤 모습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그들은 여리고에 있는 기생 랍의 집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사실 기생의 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기 때문에 타지 출신인 정탐꾼이 들어가서 숨기에 아마 좋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정체가 그만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정탐꾼을 발견하고 왕에게 보고했습니다.
그래서 열리고 왕이 군사를 보내서 정탐꾼을 붙잡아 오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여호수아 2장 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여리고 왕이 라합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그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은 이 온 땅을 정탐하러 왔느니라

 

여기에서 이제 라합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정탐꾼이 끌려가면 그들은 목숨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군사들에게 사실대로 말할 것인가 아니면 이 정탐꾼들의 목숨을 살려야 하는가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라합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정탐꾼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거짓말은 나쁜 것이니까 사실대로 말해서 그들이 잡혀가게 하시겠습니까?

 

아마 많은 현대인들은 크게 고민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연히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거짓말을 해야지요라고 답할 것입니다.
그만큼 현대인들은 이 거짓말에 대한 죄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17세기에 아주 클래식한 질문이었습니다.
두 가지 규범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것과 진실을 말하는 것이 충돌할 때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클래식한 질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라합은 거짓말을 했습니다. 

왕이 보낸 군사들에게 사실과 다르게 말했습니다.
여호수아 2장 4절부터 5절까지 보니까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나가게 되었으니 어디로 갔는지 내가 알지 못한다고 답을 했습니다.

사실은 정탐꾼을 자기 집 지붕에 숨겨주고 군사들에게는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그들이 성문 닫을 때쯤 나갔다고 말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거짓말이 큰 죄가 아닌 것 같습니다.
정치인들도 거짓말을 하고, 연예인들도 거짓말을 하니까 누구든지 불리하면 거짓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미국 사회에서는 거짓말이 아주 큰 죄입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거짓말한 것이 드러난다면 그 정치인의 생명은 끝납니다.
예전에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 인턴 직원과 불륜에 빠졌습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22살의 인턴 직원과 불륜에 빠진 것 이것도 큰 충격이었지만, 그보다 더 큰 충격은 이것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대통령이 거짓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클린턴 대통령은 위증과 사법 방해를 했다는 이유로 미국 연방 하원에서 탄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상원 재판에서 그것이 기각되어서 무사히 임기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미국 사회에서 거짓말이 얼마나 큰 죄인지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대통령이라고 해도 공개적으로 거짓말을 했다면 탄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미국 사람들이 보기에 이 라합의 케이스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라합이 한 거짓말은 죄인가 죄가 아닌가 죄가 아니라면 어떤 근거로 그것이 죄가 아닌가 분명한 이유와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라합의 이 행동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요?
라합은 구약 사람이지만 신약 성경에서 그녀의 행동에 대한 평가가 나옵니다.
믿음의 명예의 전당이라고 불리는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라합에 대한 평가가 나옵니다.
31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히브리서는 라의 행동을 믿음이라고 평가합니다.
라합이 자기 마음대로 자기 감정대로 행동한 것이 아니라 믿음에 따라서 행동했습니다.
야고보서에서도 이와 동일한 평가가 나옵니다. 

야고보서 2장 2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야고보서는 라합의 행동을 의로운 행동이라고 했습니다.
정탐꾼들을 영접하고 그들이 도망갈 수 있도록 도운 행동으로 인해서 그녀가 의롭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약 성경은 라의 행동을 믿음의 행동, 의로운 행동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정탐꾼의 목숨을 살려준 것은 귀한 일인데 분명히 하지만 그녀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 행동을 믿음의 행동, 의로운 행동이라고 할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가 여기서 2장 말씀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라합이 정탐꾼들을 숨겨주었던 이유는 단지 그들이 불쌍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인간적인 연민으로 그들을 도와주었던 것이 아닙니다.
라합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어떻게 요단강을 건너왔는지, 광야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듣고 그녀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이 하나님이야말로 참된 신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라합은 다음과 같이 그녀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2장 11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여리고 땅에 살고 있는 이방 여인 라합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하나님과 같은 분이 없음을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라합은 여호수아가 보낸 그 정탐꾼을 숨겨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어떤 연민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고백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와 비슷한 장면이 또 나옵니다. 

과거에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 있을 때에 애굽 왕 바로가 히브리 남자 아기를 다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빠르게 성장하는 것을 두려워해서 바로 왕이 명령하기를 여자아이면 살려주고 남자아이면 다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 산파들이 그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히브리 남자 아기를 살려주고 왕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출애굽기 1장 19절에 나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매

 

산파들이 말하기를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달라서 아이를 빨리 출산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거짓말이었습니다. 

산파들이 바로 왕에게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들은 왕에게 거짓말을 했을까요? 

아무 죄가 없는 이 아기를 죽이면 안 되니까 그렇게 했을까요?
물론 맞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23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히브리인들은 믿음으로 남자 아기를 살렸습니다.
이 행동은 인간적인 감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바로 왕보다 더 높으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렇게 행동했습니다.
두 가지 규범이 충돌할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절대자 되시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모든 규범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진공 상태에서 규범을 주신 것이 아니라 어떤 철학적인 개념으로 규범을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과 우리의 상황에 맞는 규범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그 규범이 실제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되었는가 성경 말씀에 다 나와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있는 수많은 그런 역사서 이야기들은 기독교의 규범이 철학적인 규범이 아니라 인격적인 규범인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무엇을 해라, 무엇을 하지 말라고 말하는 법 조문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그 규범이 이 현실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다 보여주고 있는 아주 구체적인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고리타분한 책이 아니라 실제 우리의 삶에 적용될 수 있고 실제 우리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의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규범과 상황에 충돌이 있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절대자 되시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우리의 이 복잡한 현실을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시고, 이 복잡한 상황 가운데 어떤 길로 행해야 할지 가장 선한 길을 보여주신다는 그 믿음이 중요한 줄로 믿습니다.
라합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정탐꾼들을 도왔습니다.
히브리 산파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그 남자 아기들을 살렸습니다.
이들의 행동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었고, 성경은 그 행동을 칭찬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절대적인 규범이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 마음대로 살아갈 뿐입니다. 

실정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 내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니요. 실령 설령 실정법에 저촉되더라도 걸리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음주운전을 해도 걸리지만 않으면 됩니다. 

사기를 쳐도 걸리지만 않으면 됩니다.
배우자 몰래 바람을 피워도 걸리지만 않으면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규범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하는 규범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내가 처한 현실, 나의 상황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절대적인 진리, 절대적인 규범을 거부하는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규범이 아니라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윤리가 있습니다. 

바로 '상황 윤리'라는 것입니다.
원론적인 규범 그것은 딱딱한 교과서 같은 이야기이고, 각 사람이 처한 상황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주장입니다.
미국의 윤리학자 조셉 플레처가 1966년도에 '상황 윤리'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사람은 사실 성경을 믿는 신학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복음주의 신학자가 아니라 자유주의 신학자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모두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만을 강조합니다.
조셉 플레처가 상황 윤리에서 주장했던 6가지 명제가 있습니다.
언뜻 읽어보면 다 좋은 말 같고 다 은혜로운 말 같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어느 지점에서부터인가 성경 전체의 진리에서 떨어져서 특정한 부분만을 강조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6가지 명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6가지 명제 중에서 여러분이 동의할 수 있는 것은 몇 가지가 있습니까?
조금 이상하게 보이는 것이 있다면 몇 번부터 이상하게 보입니까?
여러분 이 6가지 명제는 자유주의 신학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자유주의 신학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는데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모든 이야기가 참 듣기 좋고 은혜롭고 편안합니다.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에게 이 6가지를 말해도 아마 그들이 동의할 수 있는 것, 이것이 교회가 말하는 사랑이라면 나도 동의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만 모아놨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인본주의 사상에 기반했기 때문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이기 때문에 인간이 보았을 때 불편하지 않습니다.
성경 전체에서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부분을 쏙 빼낸 것이 바로 자유주의 신학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카톨릭 교회를 좋아하죠. 왜 그런지 아십니까?
카톨릭 교회는 자유주의 신학을 따라가기 때문에 사람들 마음 불편하게 하는 이야기를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자유주의 신학은 라면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라면이 보기에도 좋고 먹기에도 좋지만 건강에는 좋지 않습니다.
신앙이 있든지 없든지 누구나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모아놓은 것이 자유주의 신학입니다.
그런데 그 신학을 따라가면 우리의 영원히 병들게 됩니다.
조셉 플레처는 사랑과 정의는 동일한 것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여러분 이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랑과 정의가 동일한 것일까요?

사실 저는 어떻게 크리스천이 되어서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만약에 사랑과 정의가 동일한 것이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냥 다 용서해 주면 되지 왜 굳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 했을까요?
사랑의 하나님이니까 그냥 인간의 죄를 그냥 다 없는 걸로 하면 되지 왜 굳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서 십자가에서 고통받고 돌아가시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공의를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의인과 죄인을 똑같이 대하는 것은 공의가 아닙니다.
여러분 시편 1편에 나온 것처럼 죄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기 위해서였습니다.
로마서 3장 25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그런데 원어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화목 제물로 세우신 것은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본인이 치르든지 타인이 치르든지 누군가가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정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정의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랑과 정의는 절대로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과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우리 현실에서 정의가 깨어지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전쟁입니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공격하는 것은 정의가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나라가 침략을 당했는데 우리나라를 침략한 그 나라를 사랑하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무고한 시민이 테러 단체에 납치되고 살해되었는데 그 단체를 사랑하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정의가 깨어졌을 때에는 그 정의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정의를 바로잡는 과정은 힘든 일이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기도 하지, 그냥 싸우지 말고 그냥 서로 사랑하면서 지내면 안 되나요라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이 말은 현실이 얼마나 냉혹한지 모르는 아주 순진한 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죄로 타락했고 죄의 결과는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그렇다면 크리스천은 전쟁에 참여해도 되는 것일까요?

십계명에 보면 살인하지 말라라고 되어 있는데, 크리스천이 전쟁에 참여해서 적군을 살해해도 되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비폭력주의를 말씀하고 있는데, 크리스천이 군대에 가도 될까요?
아니면 우리도 여호와의 증인처럼 양심적 병역 거부를 해야 하는 것일까요?
기독교 역사를 보면 전쟁에 대한 다양한 입장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로 평화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교회를 박해하는 로마 제국의 군대에 징집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다가 313년 기독교가 로마에서 공인되었습니다.
392년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410년에 게르만족이 로마를 공격해서 로마를 포위하고 약탈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 왕국이 공격을 당한 거죠. 

당시에 교회에서 가장 권위 있던 교부가 어거스틴이었습니다.
그때 어거스틴이 정의로운 전쟁 저스트 워라는 개념을 주장했습니다.

타락한 이 세상에서 악한 자들이 공격해 올 때에 그것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무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정의로운 전쟁을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가 필요했습니다.


첫째로 공격을 위한 전쟁이 아니라 방어를 위한 전쟁이어야 합니다.
선량한 시민을 보호하고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전쟁이어야 합니다.
둘째로 공격한 세력이 사용했던 것보다 더 과도한 무력을 사용하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서 상대방이 총으로 공격을 했는데 우리는 막 미사일로 공격하면 안 된다는 거죠.
세 번째로 정당한 권위를 가진 대표자가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언해야 합니다.
선전포고 없이 기습을 한다든지 게릴라전으로 시민을 공격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성경에 정의로운 전쟁이 나올까요? 

물론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가나 왕에게 공격을 당해서 잡혀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족이 공격을 당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으니까 그 사람을 사랑해 주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산상수훈의 원리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소망하고 바라고 기도하는 그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은 죄로 타락한 사회입니다.
현실 사회에서 우리 가족이 공격을 당했을 때 그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공격당하는 그 가족을 보호해야 하는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원칙적으로는 경찰에 신고해서 공권력으로 그 악한 자를 처벌해야 합니다.
그런데 경찰에 신고할 수 없는 아주 급박한 상황에서는 우리가 정당하게 우리 가족을 방어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브라함 역시 조카 롯을 구출하기 위해서 훈련된 군사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창세기 14장 14절, 15절에 나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조카가 서로 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318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그와 그의 가신들이 나뉘어 밤에 그들을 쳐부수고, 다메의 왼편 호박까지 쫓아가 

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그와 그의 가신들이 나뉘어 밤에 그들을 쳐부수고 다메섹 왼편 호바까지 쫓아가

 

 

 

아브라함이 조카를 구하기 위해서 전투를 벌인 것입니다.
그들을 쳐부수다라고 했으니까 사상자가 발생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살인하지 말라고 했지만, 악한 자들이 공격했을 때 정당한 방어를 위해서 우리가 싸울 수 있습니다.
성경에 이러한 예는 많이 있습니다. 

기드온은 미디안 족속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해서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삼손는 블레셋 족속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해서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이들이 전쟁에서 살인을 했으니깐 하나님께 징계를 받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모두 히브리서 11장에서 칭찬을 받았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2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아멘, 예수님께서 평화의 왕으로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함부로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타락한 사회이기 때문에 악한 자들의 공격이 있습니다.
그 악한 자들의 공격으로부터 선량한 시민을 보호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은 정의로운 전쟁에 참여할 수 있고, 국가와 시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상황 윤리가 가진 근본적인 문제가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없다는 것입니다.

 

조셉 플레처는 사랑은 사려 깊은 것이다. 

사랑은 이웃의 행복을 구하는 것이다.
같이 추상적인 개념으로 사랑을 설명합니다. 

만약에 사랑이 사려 깊은 것이라면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들면 안 되겠죠.
예를 들어서 알코올 중독에 빠진 사람에게 사려 깊은 것은 어떤 모습일까요?
그가 원하는 술을 사다 주는 것이 사려 깊은 것입니까?
아니면 그가 그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사려 깊은 것입니까?
여러분 알코올 중독자에게 술을 끊으라고 하면 좋아할까요? 싫어할까요? 

당연히 싫어합니다. 

나는 술 없이 살 수 없는데 왜 그렇게 하냐고 화를 낼 것입니다.
상대방이 기분 나빠하니깐 중독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닌 것일까요?


상황윤리는 사랑만이 유일한 규범이라고 주장합니다.
언뜻 들으면 성경 말씀과 비슷한 것 같죠.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사랑과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일치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하게 상황 윤리는 사랑과 율법이 배치된다고 주장합니다.
조세 플래처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만일 율법의 조항이 사랑을 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율법을 지킬 것이다.
그러나 사랑과 율법 사이에는 가끔 갈등이 있을 수 있다.
사랑과 율법은 동료가 될 수 없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상황윤리는 사랑과 율법이 동료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사랑과 율법이 서로 갈등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심각한 모독입니다.
여러분 율법을 누가 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가장 대표적인 성품은 무엇입니까?
요한일서 4장 8절에 나오기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에는 그분의 사랑이 담겨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율법은 서로 배치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 딸이 어렸을 때 거미베어 젤리를 너무너무 좋아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 젤리를 좋아하는데 저희가 얼마든지 그 젤리를 찾을 수 있었죠.
하지만 아이가 밥도 먹지 않고 젤리만 먹는다면 건강에 좋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가 규칙을 정했습니다. 

아침밥을 다 먹으면 그다음에 젤리 3개를 먹을 수 있다고 규칙을 정했습니다.
그 당시에 저희 딸이 3살이었기 때문이죠. 

4살이 되면 4개, 5살이 되면 5개까지 먹을 수 있다고 규칙을 정했습니다.
왜 이런 규칙을 정했을까요? 

저희 딸을 괴롭게 하기 위해서 이 규칙을 정했을까요?
아니면 저희 딸의 유익과 행복을 위해서 이 규칙을 정했을까요?
당연히 딸의 행복을 위해서 이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부모가 정한 규칙에는 딸을 향한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정상적인 부모라면 절대로 자녀를 괴롭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율법은 서로 배치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상황 윤리는 사랑과 율법이 서로 배치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사랑만이 최고의 규범이라고 주장합니다.
저는 질문하고 싶습니다. 

그럼 도대체 당신이 말하는 그 사랑의 정의는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하고 싶은데 그럼 아마 그대로 말하겠죠.
'사랑은 사려 깊은 것입니다'
'사랑은 이웃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와 같이 추상적인 말,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사랑과 율법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셨을까요?
만약에 조셉 플래처가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저는 이 구절에 대한 그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1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오,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아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계명을 지키는 자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사랑과 율법은 배치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주님의 율법을 지키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율법을 지키면 그 안에 담긴 주님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계명을 지키는 사랑입니다.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그 계명을 주신 분을 사랑하는 것이죠.
계명을 주신 분이 나의 주인이 되시고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부 간의 사랑이 무엇입니까? 

부부 간의 사랑은 혼인 서약을 지키는 것입니다.
저는 결혼식에서 가장 중요한 순서가 혼인 서약이라고 믿습니다.
1분도 되지 않는 아주 짧은 순서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서약하는 그 시간이 결혼식의 핵심입니다.
사랑은 낭만적인 개념,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사랑은 아주 구체적인 행동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온 그 사랑에 대한 모든 단어는 형용사가 아니라 명사가 아니라 동사로 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행동입니다. 

그 관계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헌신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약속을 지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 안에서 주어진 약속, 그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사랑과 율법은 배치되지 않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주님의 율법을 지키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처한 그 상황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상황 가운데서 주님을 가장 사랑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주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임을 기억하면서 우리 일상의 삶 가운데 주님의 말씀을 지켜서 놀라운 복과 은혜를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7FqLN_aaKS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