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행 1:6~8
오늘 귀한 말씀을 전해주실 목사님은 아프리카 부룬디에서 오랫동안 선교사로 사역하셨고
현재는 대구 동신교회 담임 목사님으로 섬기고 계시는 문대원 목사님이십니다.
귀한 은혜의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할렐루야 이렇게 주 안에서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저는 대구 동신교회를 섬기는 문대원 목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대구 동부교회 선교 헌신 예배에서 이렇게 말씀을 나눌 수 있게 되어서 큰 기쁨이고 영광입니다.
동부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제가 대구에 오기 전부터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한국선교연구원'이라는 기관에서 제가 선교연구를 연구원으로 할 때가 있었는데 동부교회 출신 분 간사님이 한 분 계셨거든요.
동부교회가 얼마나 헌신된 교회이고 선교적인 교회인지 저에게 많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대구에 내려오기 전부터 동부교회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대구 수성노회에 속해 있는데, 수성노회 목사님들 중에서 동부교회 출신의 목사님들께서 많이 계십니다.
또 그분들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동부교회 성도님들께서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시고 또 교회에 헌신되시고 복음을 위해서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시는지 많이 들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은 베레아 사람들을 이렇게 말할 때 너그럽다 신사적이다 인격적이다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아마 동부교회 성도님들께서 그렇게 신사적이고 인격적이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저희 교회 장로님들도 동부교회 장로님들하고 아주 친분이 많으십니다.
동부교회, 우리 장로님들께서 특별히 원로 장로님들, 오랜 중직들께서 얼마나 교회를 위해서 헌신적으로 사역을 섬기셨는지 말씀을 많이 해 주셨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교회를 향한 여러분의 헌신과 그 모든 기도 다 기억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고 헌신하신 그 마음 기억하시고 하늘의 상급과 이 땅에서의 풍성한 복으로 갚아주실 줄로 믿습니다.
처음 뵙고 인사드리기 때문에 간략하게 제 소개를 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서울에서 태어나서 자랐습니다.
저희 아버지께서 부산 출신이시고 대학교 때 서울로 오셔서 어머니를 만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부산분이니까 저도 절반은 경상도에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경상도분들께서 얼마나 속이 깊으시고 충성되시고 헌신적이신지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신학 공부를 했고 아프리카 선교사로 사역을 섬겼습니다.
미국 보스턴에서 7년 동안 신학 공부를 했고요.
아프리카 브룬디라는 나라에서 6년 동안 선교사로 사역을 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한 전공은 세계 기독교 역사, 선교 역사였습니다.
그러니까 선교 학자였고 선교사였기 때문에 오늘처럼 선교 헌신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 제 마음이 가장 흥분되고 기쁜 시간입니다.
미국에서 유학할 때에 제가 동신교회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동신교회에서 해외 박사과정 장학금을 주셨거든요.
그때 이제 제가 지원해서 그 장학금을 받게 되면서 처음으로 대구 농신교회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사역하던 중에 미국에서 파송을 했는데 그 교회가 작은 교회라서 더 이상 후원이 힘들어졌을 때
그때 이제 몇몇 교회들의 연락을 드렸는데 대구동신교회에서 저를 파송 선교사로 허입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와 동역하게 되었고, 코로나가 일어났던 2020년도에 저희가 안식년을 맞아서 한국에 있었는데
그때 이제 동신교회 후임 담임목사 청빙과정이 시작되었고
감사하게 저도 후보 중에 한 명으로 추천이 되어서, 청빙과정을 거쳐서 후임 담임 목사로 사역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저를 만나는 사람들마다 이렇게 걱정을 하시면서 물어볼 때가 있어요.
대구에서 목회하는 거 괜찮냐고 질문하십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이렇게 답을 합니다.
저는 대구분들 사랑한다고, 대구랑 잘 맞는 것 같다고 항상 그렇게 답을 합니다.
대구 분들, 제가 만나본 바로는 제가 대구에 온 지 4년 반이 됐는데, 정말로 나라를 사랑하시고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분들입니다.
서울 사람들은 나라 걱정 안 합니다.
서울 사람들은 자기 걱정하고 자기 가족 걱정하지 나라 걱정 잘 안 합니다.
근데 나라를 생각하시고, 다음 세대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그 모습을 볼 때 제가 큰 도전을 봤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구교회 성도님들은 교회에 대해서 엄청 헌신적이십니다.
정말 교회의 일이라면 모든 것을 다 제쳐놓고 와서 기도하고 헌신하십니다.
저희 교회 장로님들도 거의 매일 교회에 오십니다.
장로가 본업이고, 본업이 알바인 것처럼 정말 열심히 헌신적으로 사역을 섬기십니다.
정말 전국 어디에서도 이렇게 헌신적인 성도님들을 만나볼 수가 없습니다.
아마 동부교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교회를 위해서 그동안 많은 성도님들께서 헌신하신 줄로 믿습니다.
그 기도와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오늘날의 동부교회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헌신 잊지 않으시고 동부교회를 더욱더 아름답고 귀한 모습으로 부흥 발전시키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은 선교 헌신 예배를 맞이해서 사도행전 1장 말씀을 본문으로 하나님의 선교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은 아주 유명한 말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기 이전에 마지막으로 주신 유언의 말씀이지요.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에게 아주 큰 기쁨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 부활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것보다 더 확실한 기적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가 맞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습니다.
사도행전 1장 3절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 한목소리로 읽겠습니다.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아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탈락한 인류를 위해 구원의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의 길에 들어올 수 있게 하셨습니다.
부활 후 40일 동안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이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동안에는 희미하게 이해되었던 것들이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아주 선명하게 이해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사도행전 1장 6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에 대해서 질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나라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계신데, 제자들은 눈에 보이는 현세적인 나라에 대해서 질문하고 있습니다.
이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그 현실적인 관점,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관점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을 바라보실 때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셨을까요?
그들은 예수님과 무려 3년 동안이나 동고동락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모든 기적을 직접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놀라운 역사를 두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그 하나님 나라를, 이스라엘 나라로 축소시켰습니다.
한마디로 제자들은 경계 안에 갇힌 사람들이었습니다.
나의 가족, 나의 민족, 나의 나라가 잘 되길 원하는 그 마음을 가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가족에 복 주시고 우리 나라를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그 믿음 안에 갇혔습니다.
여러분, 누구나 경계를 세워서 나를 지키고 나를 보호하기 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익숙하고 안전한 곳에 머물기를 원합니다.
낯선 사람 만나면 조심해야 되고요, 경계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가 편안하게 느끼는 그 공간을 안전지대, 영어로 하면 'Comfort Zone' 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자신만의 안전지대가 있습니다.
그 안전지대 안에 있을 때에 우리는 편안함을 느끼고 안정감을 느끼고 쉼을 느낍니다.
안전지대를 떠나서 낯선 지역으로 가는 것은요. 모두에게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한 달 동안 저기 유럽에 있는 시골 마을로 여행을 간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유럽에 있는 그 시골 마을, 한국 사람 한 명도 없는 시골 마을에 가면요.
며칠 동안 너무나 좋습니다.
유럽의 이국적인 풍경도 좋고 그 바게트 빵도 너무나 맛있습니다.
그런데 한 일주일쯤 지나면 어떻게 될까요?
이국적인 풍경도 식상하게 느껴집니다.
딱딱한 유럽식 빵이 아니라 김치찌개가 먹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한적한 곳으로 와서 주변에 한국 식당이 있나 찾아봤더니 한국 식당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이럴 때는 중국 식당을 찾으면 됩니다.
외국에 나가서 한국 식당 없으면 중국 식당 찾으면 되고, 중국 식당 없으면 태국 식당을 찾으면 됩니다.
그중에 하나라도 있으면요.
웬만한 도시에 중국 식당이나 태국 식당 하나쯤 있는데 '꿩대신 닭'이라고 그런 곳에 가면 우리의 정서를 어느 정도 풀 수 있습니다.
조금 우스운 이야기지만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내가 자란 문화, 내가 자란 그 지역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가면 처음에는 좋을지 몰라도 금방 피로감을 느낍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안전지대가 있고 그 안에 있을 때에 안정감을 느끼고 평안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평생 동안 그 안전지대 안에만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바깥에 위험한 데 가지 말고, 새로운 곳 가지 말고, 평생 동안 내가 태어나서 자란 그 안전지대 안에만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처음에는 편할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게으름과 낙태에 빠질 것입니다.
여러분, 나에게 익숙한 일 하기 위해서 우리가 막 최선을 다할 필요 없습니다.
편안한 것, 안전한 것을 추구하면 최선을 다하지 않게 되고 그렇게 되면 발전과 성장이 멈추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안전지대 안에만 거할 때 나타날 수 있는 폐해입니다.
지난 코로나 시간이 우리에게 알려준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안전지대'는 없다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익숙한 것을 좋아하고요. 새로운 것 하기 싫습니다.
그냥 나한테 살아왔던 내가 살아왔던 방식대로 그대로 살아가기를 원하는데 코로나가 우리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일깨워 주었습니다.
외부 환경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데, 우리가 그 변화를 무시한다고 해서 우리 삶이 안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그것을 즉시하고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에도 해당되고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해당됩니다.
그냥 가만히 평안히 우리가 하던 대로 하면 좋을 것 같지만 현상 유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점점 더 가라앉게 됩니다.
온라인 예배가 얼마나 편합니까?
온라인 예배 편안하게 드리면 우리가 그 자리, 우리의 신앙이 현상 유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점점 더 가라앉게 됩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에게 익숙한 안전지대를 넘어서 한 단계 더 발전하고 성숙할 수 있는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새로운 것이 처음에는 불편할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익숙했던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한마디로 안전지대를 떠나는 연습이 필요한 것입니다.
저 넓은 세상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선교의 그 다양한 영역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나아가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면, 내일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 더 성장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우리 앞에 있는 그 위기를 기회로 삼아 도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오해하고 있는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크고 광대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지 못하는 제자들, 다분히 현세적인 현실적인 꿈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아멘.
이 말씀은 사실 제자들의 질문과는 동떨어져 보입니다.
제자들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에 대해서 질문했는데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동문서답처럼 보이는 질문 같지만, 사실 이것은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정확한 예수님의 답변이었습니다.
제자들의 질문을 살펴보면, 그들이 가졌던 기대와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라는 표현에는 회복은 '정치적인 독립'을 뜻합니다.
강력한 군사력과 정치력을 가지고 이제 확고한 영토를 가진 나라가 주권 국가가 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나라라는 표현에는 민족주의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유대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그 구원의 역사를 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들, 헬라인들, 로마인들 자기네가 알아서 살 것이고,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위한 유대인의 왕국을 세워주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라는 표현에는 다분히 정치적인 나라, 민족주의적인 염원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능력을 말씀하시고, 또한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리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성령의 능력은 하나님의 나라가 갖는 그 주권을 의미합니다.
모든 나라가 주권을 가지고 있듯이 하나님의 나라도 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군대의 힘으로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확장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칼과 전쟁으로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충만한 자들의 증거를 통해서 확장됩니다.
이것이 제자들이 생각했던 그 나라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나라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민족주의적인 나라가 아닙니다.
유대인들만을 위한 유대인들이 어떤 특권을 누리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민족을 위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라고 언급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소외되는 민족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21세기 관점에서 이 말은 당연한 말이죠.
어떻게 우리가 타고난 인종으로 사람을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2천 년 전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지배 민족은 우월하고 피지배 민족은 열등하다는 생각에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2천년까지 갈 필요도 없고요, 200년 전만 해도 합법적인 인종 차별이 있었습니다.
유럽인들이 ' Scientific racism' 이라고 하죠.
과학적인 인종 차별을 통해서 흑인들은 완벽한 인간이 아니라 인간과 동물의 중간이기 때문에 흑인들을 노예로 부르면서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중국인들은 동서남북에 살고 있는 이민족을 다 오랑캐라고 불렀습니다.
세계 모든 나라와 문화에서 이 민족은 다 열등하게 여겼습니다.
우리 민족이 우선이고 우리 민족이 최고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예수님만이 민족적인 문화적인 경계를 넘어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개념이 얼마나 혁명적이었는지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에 대해서 그것을 갈망하고 있던 제자들은 도저히 스스로의 능력으로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이 오실 때까지 기다려라 기도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주실 때까지는 이것을 인간의 힘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인간의 힘으로 경계를 넘어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성령께서 임하실 때 그때 능력과 지혜와 용기를 받아서 너희가 증인이 될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가 권능을 받아서 온 세계에 나아가서 예수님의 증인이 될 것'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제가 이 말씀을 다르게 표현해 보겠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일에 아무 관심이 없게 됩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지 않으면, 우리는 세계 순교에 아무 관심이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 성령의 능력이 있는가? 없는가? 확인하는 것은 사실 아주 간단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일에 관심이 있는가? 나는 세계 선교에 관심이 있는가? 스스로에게 자문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없다면,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돼요.
내가 매주 교회에 오지만 내가 성령의 능력을 체험한 적이 있는가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할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다 자기중심적입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누구나 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다른 사람에게 진정 어린 관심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 전할 생각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전도하자고 우리 태신자 작정하다고 말하면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선교 헌신 예배 나오라고 하면 부담스러워합니다.
선교 헌금하라고 하면 부담스러워 합니다.
하지만 성령의 능력이 임하면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인생의 관점이 변화됩니다.
세상의 중심에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시고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내 인생의 목표가 내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그 일에 내 인생이 사용되어져야 하는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성령이 임하시면 순간적인 욕구, 욕망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볼 수 있는 영적인 안목이 생깁니다.
여러분, 동물과 인간은 비슷해 보이지만 절대로 비슷하지 않습니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 어마어마한 차이점이 많이 있는데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미래에 대한 꿈을 꾸는 것입니다.
동물은 꿈을 꾸지 못합니다.
동물은 본능대로 살아갑니다.
동물의 본능은 매우 현실적입니다.
야생동물은 배가 고프면 먹고 졸리고 잡니다.
순간적인 욕망을 따라 살아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만이 아직 다가오지 않은 그 미래를 현실로 인식할 수 있고, 미래에 대한 꿈을 꾸고 계획을 세울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집에 고양이나 강아지 키우는 분들 많이 계시죠?
여러분, 고양이나 강아지가 새해가 되었다고 새해 결심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까?
내가 올해에는 좀 운동을 많이 해야겠다 다짐하는 경우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미래를 현실로 인식할 수 있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어떤 약속을 해서 데이트 약속을 하면요 그 시간이 다가오지 않았지만 마음이 흥분되고 기대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가오지 않은 그 미래를 현실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만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실 때 우리는 아직 완벽하게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이 나라 가운데로 임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지금은 거짓과 불의로 가득찬 세상이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이 땅 가운데 사랑과 공의가 완성될 것을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곧 다가올 그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깨닫게 되면 우리가 날마다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서 세계 선교를 위해서 기도하게 되고 헌신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바라기는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그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소망 가운데 기쁨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을 보면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받아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라고 말씀합니다.
원문을 보면 헬라어 원문을 보면 '증인이 되어야 한다'라고 명령법으로 되어 있지 않고요.
'증인이 될 것이다' 미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명령에 대한 복종으로 아 내가 정말 하기 싫은데 억지로 선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격 전체가 변화되어서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증인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증인을 뜻하는 헬라어가 '마르투스(μάρτυς) ' 인데 이것은 법정 용어입니다.
법정에 서서 내가 목격한 일을 용기 있게 말하는 사람을 가리켜 증인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전체에서 '마르투스'라는 단어가 총 13번 사용되었는데 대부분의 경우에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증인을 지칭합니다.
사도행전 2장 32절에도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아멘.
초대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부활을 목도했던 제자들은 자기 목숨을 걸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500명이 넘은 증인들이 목격했던 역사적인 사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목격한 수많은 제자들의 삶을 변화시킨 실존적인 체험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이전에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부인했지만 부활의 능력으로 복음을 담대하게 선포했습니다.
도마는 의심이 많아서 부활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지만 부활의 능력을 체험한 이후에 인도에 가서 목숨을 바쳐 선교를 감당했습니다.
부활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부활의 능력을 체험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내가 체험하지 않는 그 부활을 증거하는 것은 마치 법정에서 위증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저희 동신교회에서 강조하는 생명 사역이 있는데 그 핵심이 이것입니다.
생명의 근원 되신 예수님과 접속해서 그 흘러넘치는 생명력을 경험한 사람은 부활의 능력을 가지고 증인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 증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 날마다 끊임없이 임하는 성령의 능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의 능력을 상실할 때 교회는 친목회가 되든지 아니면 구호 단체가 될 수 있습니다.
19세기 말에 영국과 미국에서 놀라운 대학생 선교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 대학생 선교운동이 일어날 때 그 초기 리더들이 모두 다 YMCA 출신이었습니다.
YMCA는 그 당시 세계 선교운동을 이끌었던 리더들을 배출했던 선교 사관학교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20세기 중반부터 YMCA가 성령의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복음의 생명력을 강조하기 강조하는 대신에 사회운동, 소비자 운동, 인권운동 이런 것을 강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여러분 지금 YMCA가 어떻게 된 줄 아십니까?
미국인들 만나서 미국인들에게 YMCA가 뭐 하는 곳이냐?고 물어본다면,
거기는 운동하러 가는 곳이다, 수영하러 가는 곳이다라고 답을 할 겁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미국의 타운에 보면 YMCA에서 운영하는 제일 좋은 수영장과 운동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럽 사람들을 만나서 YMCA가 뭐 하는 곳이냐고 물어보면 거기는 '유스호스텔' 운영하는 곳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럽에 가면 가장 저렴하고 안전한 유스호스텔이 YMCA에 의해서 운영되기 때문입니다.
19세기 말에 세계 선교운동을 이끌었던 단체가 성령의 능력을 상실했을 때, 그냥 우리 동네 실내 운동장, 수영장, 아니면 안전한 유스호스텔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성령의 능력을 상실했을 때, 얼마든지 '사교 모임'이 될 수 있고 '구호 단체'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교회가 성령의 능력을 잃어버리면 교회 본연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물론 교회 안에서 교제도 나눠야죠.
교회가 구제도 해야죠.
교회의 본질 여러 가지 일을 합니다.
하지만 교회의 가장 핵심적인 본질은 성령의 능력을 경험해서 뜨거운 마음으로 선교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바라기는 성령의 능력을 날마다, 매 주일마다 체험해서 우리 안에 흘러넘치는 그 예수님의 생명을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부흥 운동'과 '선교 운'동은 매우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국 에딘버러 대학교에 거기서 기독교 선교 역사를 가르쳤던 앤드류 월스 교수님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부흥 운동이 일어나서 사람들이 뜨거워지고 각성하고 헌신할 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바로 선교 운동입니다.
부흥과 선교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미국과 영국의 선교 역사를 봐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신학자 중에 조나단 에드워드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아주 탁월한 지성을 가진 신학자인 동시에 뜨거운 영성을 가진 부흥사였습니다.
1734년 미국 동부에서 놀라운 대각성 운동이 시작됐는데 그것을 주도했던 사람이 조나단 에드워즈였습니다.
이 대각성 운동에 아주 중요한 결과 열매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아메리칸 인디언들을 위한 선교운동이었습니다.
에드워즈 본인도 그의 인생에서 최고의 전성기 7년 동안을 인디안 선교를 위해서 헌신했습니다.
에드워즈는 정말로 수많은 아주 훌륭한 신학서들을 많이 썼는데, 그가 쓴 제일 유명한 책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던 선교사 데이빗 브레이너드의 일기라는 책입니다.
그 책은 200년 동안이나 수많은 청년들에게 선교를 향한 비전과 열정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에드워즈와 비슷한 시기에 영국에서는 존 웨슬리이라는 사람이 복음주의 부흥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감리교회의 창시자로 알려진 웨슬리는, '성령의 역사로 뜨거운 마음을 갖게 되면은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안타까움이 생긴다'고 말했습니다.
웨슬리의 부흥 운동이 윌리암 케리의 선교 운동으로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초기 영국 선교를 주도했던 모든 사람들이 이 복음주의 부흥 운동을 통해서 성령을 경험했습니다.
100년 이후에는 D.L. 무디 ' Dwight Lyman Moody '라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 교육밖에 안 받았지만 미국과 영국을 오가며
특별히 영국에서 옥스퍼드 대학과 캠브리지 대학에서 최고의 지성인들에게 부흥회를 인도하며 수많은 대학생들이 선교에 헌신하기에 기여했습니다.
그렇게 영국에서 시작된 선교운동이 미국으로 전해졌고, 미국에서는 '학생 자원 운동'이라고 ' The Student Volunteer Movement', SVM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운동을 통해서 10만 명의 미국 대학생들이 선교사로 헌신했고, 그중에 2만 명이 실제로 선교사로 갔습니다.
그중에 2명이 조선에 왔던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였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존 웨슬리, 드와이트 무디 이 모두가 다 한 시대를 감당했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는데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이 강조했던 성령 운동, 즉 부흥 운동은 필연적으로 선교 운동으로 이어졌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국에서도 그대로 일어났습니다.
1907년도에 부흥운동이 선교운동으로 일어났고, 1970년도에 놀라운 전도 집회가 선교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브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브라질도 1970년대에 큰 부흥 운동을 경험했습니다.
그 브라질의 부흥 운동이 얼마나 놀라웠는지 미국의 뉴욕타임즈에 그에 대한 기사가 나왔을 정도입니다.
1972년 기준으로 200만 명의 브라질의 성도들이 성령의 역사를 체험했는데,
그들이 열정적으로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국립보건원에서 2014년에 보고서가 나왔는데요.
브라질에서 있었던 부흥 운동이 어떻게 그 사회를 변화시켰는지에 대한 보고서였습니다.
'성령을 체험한 사람이 술을 끊고 마약을 끊고, 가정에 충실하고 열심히 일해서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서 사회가 변화되었다는 것'을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했습니다.
그런데 이 연구를 미국 선교연구원에서 한 것이 아니라 미국 국립보건원에서 했습니다.
부흥 운동을 놀랍게 경험했던 한국과 브라질 역시 수많은 나라로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이와 같이 부흥 운동과 선교 운동은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러면 부흥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부흥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조나단 에드워즈는 부흥에 대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 영어로 하면 'Surprising Work of God' 이라고 했습니다.
부흥을 인간이 주도할 수 없고 인간이 만들어낼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라고 인정했습니다.
반면에 역사학자들은 부흥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부흥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평범한 성도가 헌신된 성도로 변화되는 사건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뜨뜻미지근하게 신앙생활하던 사람이 성령의 뜨거운 역사를 통해서 헌신된 성도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부흥하면 교회가 성장하는 게 부흥이지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부흥의 결과이지 그것이 부흥 자체는 아닙니다.
부흥의 본질은 성령의 능력이 나타났을 때 우리 마음이 뜨거워져서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헌신된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헌신은 무엇일까요?
헌신, 열심히 하는 게 헌신일까요?
무조건 충성하면 헌신일까요?
땀 흘려 일하면 헌신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헌신은 내 야망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헌신의 가장 완벽한 모델은 예수님이신데, 그분은 철저하게 자신의 의지를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38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아멘.
예수님은 자기를 비워서 종의 형체를 가지고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헌신의 모습입니다.
언제 이런 헌신이 가능할까요?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실 때, 평범한 성도는 헌신된 성도로 변화됩니다.
얼마나 믿음이 좋은가?
그 믿음의 깊이, 영성의 깊이는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그 열망의 깊이와 그대로 이어집니다.
여러분 아무리 기도 많이 하고 아무리 성경을 잘 알아도 하나님께 순종하기보다 내 뜻을 이루기 원한다면 엄밀히 말해서 그 사람은 믿음이 성숙한 사람이 아닙니다.
순종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으로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오직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임하실 때 그때 우리가 하나님께 기쁨으로 순종할 수 있게 됩니다.
바라기는 이 자리에 모이신 모든 성도님들 성령의 능력을 날마다 체험해서 온전한 순종의 삶, 헌신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은 한 문장이지만 사도행전 전체를 잘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전체의 목차와도 같은 구절이지요.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가 권능을 받아서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나라는 '경계가 없는 나라'입니다.
인종적인 경계, 문화적인 경계, 사회적인 경계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다 들어올 수 있습니다.
여전히 인종적인 편견과 문화적인 편견, 이것이 강력한 시대에 주님은 우리가 타고난 그 모든 정체성을 초월한 하나님 나라의 정체성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한마디로 '경계가 없는 나라'입니다.
반면에 인간이 만든 나라는 '수많은 경계가 있는 나'라입니다.
제가 외국에 오랫동안 있다가 15년 동안 있다가 한국에 돌아왔을 때 제일 처음 느꼈던 것이,
한국은 '초갈등 사회'이구나.
지역과 이념에 따라서, 세대와 성별에 따라서 어떻게 나라가 이렇게 나뉘어져 있을까?
국민의 개개인 능력은 너무나 탁월한데 나라가 나뉘어져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 여러분 한국 역사에서 온 국민이 단결했던 적이 딱 두 번 있다고 합니다.
한 번은 3.1운동 때였고, 한 번은 2002년 월드컵 때였다고 합니다.
나라가 얼마나 나뉘어지면 우리가 이런 말을 하겠습니까?
이 나뉘어진 나라를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지도자가 나오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나라가 복음 안에서 하나 될 때에 주님께서 뜻하신 그 놀라운 계획들을 이루어 갈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 하나 됨을 위한 확고한 비전이 없습니다.
무엇을 위해 하나 되어야 하는지? 어떤 기준으로 하나 되어야 되는지? 말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만 그 명확한 비전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알고 구원받는 그 선교적 사명을 위해서 우리가 하나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 인생에서 그 하나님의 나라의 실제를 경험했던 적이 두 번 있었습니다.
한 번은 2010년도 남아공 KF타운에서 열렸던 제3차 로잔 대회였고, 또 한 번은 지난달에 한국에서 열렸던 제4차 로잔 대회였습니다.
로잔대회는 한마디로 전 세계에서 복음주의 정신으로 선교를 하는 그 사람들의 자발적인 운동입니다.
지난달에 있었던 그 로잔 대회에 전 세계 200개국에서 5300명이 모였습니다.
그 다양한 민족, 다양한 문화, 다양한 언어가 함께 모여서 우리가 예수님을 경배했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 되시고,
예수님만이 우리의 주님 되시고,
그분께서 남기신 선교적 사명만이 우리 인생의 목표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우리가 성찬식을 했습니다.
아무런 공통점이 없어요.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색깔도 모습도 다르고, 교회도 다르고, 교단도 다르고
하지만 예수님을 향한 그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서로를 향해서 형제 자매라고 부를 수 있었습니다.
200개국에서 온 형제 자매들과 함께 예수님을 찬양할 때
저는 천국이 바로 이런 모습이겠구나라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국교회에 안타까운 현실이 한 가지 있죠.
바로 '개교회주의'입니다.
다른 교회가 어떻게 되든 말든 우리 교회가 일단 잘 되고 우리 교회가 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거죠.
우리 교회가 평안하고 우리 교회 부응하면 일단 괜찮다.
우리 교회에 대한 소속감이 너무나 큰 나머지 다른 교회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교회보다 훨씬 더 큽니다'.
여러분, 우리의 목표는 우리 교회가 무한대로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그 일에 우리 교회도 필요하지만 그리스도의 몸된 다른 교회도 다 필요합니다.
영국의 기독교 사상가 C.S. 루이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옥의 철학은 철저하게 경쟁적인 관계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경쟁할까요?
자원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경쟁합니다.
파이는 제한되어 있으니까 다른 사람이 더 가져가면 내 걸 뺏기는 거죠.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제로섬 게임 (zero-sum)' 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여러분 여러분의 교회 동부교회와 이 근처에 있는 다른 교회가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있습니까?
한 교회가 부흥하면 다른 교회는 쇠퇴하게 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두 교회가 함께 부응할 수 있습니까?
당연히 두 교회가 함께 부응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나라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정해진 파이를 가지고 우리가 나누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점점 커지고 확장되는 나라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천국 비유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겨자씨 비유, 누룩 비유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점점점점 커지고 확장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교회는 서로 서로 경쟁적인 관계를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한 교회가 부흥한다고 해서 다른 교회가 쇠퇴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잘될 수 있습니다.
함께 부흥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계속해서 확장되고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대구 지역의 모든 교회가 성령 안에서 부흥하기를, 성장하기를 축원합니다.
대구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서로 경쟁적인 관계가 아니라, 협력적인 관계를 맺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정해진 파이가 아니라 점점점점 커지고 확장되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동부교회 설교 초청을 받았다고 저희 교회 장로님들께 여쭤봤더니,
너무너무 기쁜 마음으로 동부교회에 가셔서 귀한 말씀으로 성도님들 격려해 주시기를 부탁하셨습니다.
저는 동부교회에도 부흥하고 동신교회도 부흥하고 범어교회도 부흥하고 모든 주님의 교회들이 아름답게 성령 안에서 부응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교회보다 더 크고 우리 교단보다 더 크고 우리 나라보다 더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 교회가 커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동부교회를 귀하게 사용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놀라운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셔서 동부교회가 이전보다 더욱더 놀라운 새로운 부흥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교회만 잘 되고 우리 교회만 부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전체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선교 전체를 바라보며,
기쁨으로 세계 선교에 헌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세계 모든 민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주님 사랑하시는 동부교회 지금까지 지키시고 부흥케 하시고 성장케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열정, 복음을 향한 헌신으로 지금까지 땀 흘려 기도하고 헌신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주님께서 가지신 놀라운 꿈과 계획이 더욱더 놀랍게 이 교회 가운데 펼쳐지게 해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기쁨으로 헌신하며 나아갈 때 이 교회 오는 모든 성도님들 마음 가운데 성령으로 충만하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와 증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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