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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대원목사 설교

크리스천의 윤리 (1) 행복을 위한 계명_24.10.27

by 마이코 2024. 10. 28.

 

크리스천의 윤리라는 제목으로 새로운 시리즈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우리가 내린 선택에는 일상적인 것도 있고 또 중요한 것들도 있습니다.
가령 오늘 저녁으로 무엇을 먹을까? 

같은 선택도 있지만, 누구와 결혼을 할 것인가? 같은 중요한 선택도 있습니다.
성숙한 사람은 올바른 선택, 유익한 선택을 내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올바른 선택을 내리기 위해서는 일관된 분명한 기준이 필요합니다.
제비 뽑기 하듯이 랜덤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확고하고 분명한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올바른 선택을 내리기 위한 체계적인 기준을 가리켜 '윤리'라고 부릅니다.
흔히 윤리하면 조금 고리타분한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사실 이것은 우리의 일상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요즘 젊은 사람들이 결혼하기 전에 동거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결혼 전에 동거를 해도 될까요? 안 될까요?
이것을 논하기 위해선 기준이 필요합니다. 

남녀 간의 사랑이 무엇인지, 결혼의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한 기준이 있어야지 우리가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에 대한 올바른 기준이 있어야지, 우리가 올바른 선택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분명한 기준이 없으면 다른 사람들이 가는 대로 따라갈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간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옳은 길은 아닙니다.
타락한 인간은 즉각적인 어떤 쾌락을 위해서 잘못된 선택을 내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미국 보건부 산하의 질병관리센터 예방센터에서 만 15세에서 45세 여성 만 천 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습니다.
결혼 전에 동거를 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비교해서 각각 이혼율이 어떻게 되는지 조사를 했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결과입니다.
동거를 한 경우가 이혼율이 훨씬 더 높았습니다.
제가 동거하는 사람들을 정죄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왜 옳고 그른지 우리의 기준을 점검해야 합니다.
그 기준을 가리켜 윤리라고 부릅니다. 

시대마다 윤리가 다를 수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윤리의 기준이 다를 수 있습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동거가 잘못이라고 하면 세상에서는 꼰대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자녀가 아니면 여러분의 손주가 동거를 한다고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그래 니 인생이니깐 니 마음대로 해라라고 말씀하겠습니까?
아니면 사랑하는 자녀가 손주가 정말로 행복하게 사는 길로 인도해 주시겠습니까?
부모에게는 책임이 있습니다. 

무슨 길이 올바른 길인지,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 삶인지? 지도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책임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으로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행하지 않은 것을 가르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축구에 관한 완벽한 이론을 알고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슈팅을 어떻게 하는 것이고, 패스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 완벽한 이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국가대표팀 코치가 될 수 있겠습니까?
완벽한 이론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제가 누구를 지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실제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윤리는 실생활에서 벌어지는 그 상황을 다루고 있습니다.
실제 삶에서 어떻게 해야지? 올바른 선택, 유익한 선택을 할 것인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윤리는 이론적이지 않고 실천적입니다. 

우리가 대학교에서 윤리를 배운다면 윤리에 대한 강의를 듣는다면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입니다. 

한국에서도 그렇고 미국에서도 그렇습니다.
제가 처음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그리스 철학을 배울까요?

현대 사회가 얼마나 복잡하고 다양한데 우리가 왜 2400년 전 이야기를 듣고 있을까요?
그런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윤리에 대해서 배울 때 그리스 철학부터 시작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사람들처럼 옳고 그름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을 한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현대사회가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지만 정신적으로는 빈곤해졌습니다.
여러분은 휴대폰을 확인하지 않고 얼마 동안 책을 읽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 1시간 동안 휴대폰을 확인하지 않고 책을 읽는 것이 쉬울까요? 어려울까요? 

집에 가서 한번 해보십시오. 

1시간 동안 휴대폰 확인하지 않고 책을 읽는 것 성경책을 읽는 것 쉬운 일 아닙니다.
절대로 쉬운 일 아닙니다. 

여러분 책을 읽는 것이 어렵다면 사색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렵습니다.
그 결과 현대인들은 과거보다 깊이 있게 사색하는 법을 잘 모릅니다.

그리스 철학자들이 말했던 것 이상으로 더 깊이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현대에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대에도 윤리를 논할 때 그리스 철학자들부터 시작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 학당에서 행복에 대한 강의를 많이 했습니다.
최고의 선은 무엇인가? 행복은 무엇인가? 같은 주제로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그 강의를 모은 책이 있습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라는 책입니다. 

여러분 이 책은 서양 철학과 윤리학의 가장 중요한 기초가 되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반복하는 습관이 인격을 형성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많이 들어본 얘기죠. 

생각은 행동을 낳고, 행동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인격이 된다라는 말 우리가 많이 들어봤습니다.
이 말을 제일 처음 했던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였습니다.
그는 선을 행함으로써 인간이 선한 존재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미덕, 성품 같은 것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모습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한 네 가지 미덕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혜, 정의, 용기, 절제였습니다. 

지혜는 선한 원리를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하는 능력입니다.
정의는 각 사람들이 행한 대로 대접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고요.
용기는 사람들을 위험과 불리로부터 보호해 주는 것입니다.
절제는 이성을 사용해서 육체의 욕망을 통제하는 능력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이성과 도덕성을 신뢰했습니다.
인간은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이성대로만 잘 행동하면 선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인간이 합리적이고 도덕적일까요?
여러분은 고속도로에서 과속 단속 카메라가 없어도 규정 속도를 잘 지키십니까?
인간은 합리적이지 않고 도덕적이지 않습니다. 

인간은 타락했고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윤리는 인간의 이성을 기초로 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윤리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에게 무엇이 올바르고 유익한 길인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신명기 6장 3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네가 크게 번성하리라

아멘.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주 복잡한 인생에서 올바른 선택, 유익한 선택을 하기 위한 분명한 기준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길로 행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면 너가 복을 받고 크게 번성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기독교 윤리에는 세 가지 기초가 있습니다. 

바른 동기, 바른 기준, 바른 목표가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 본문 신명기를 보면 이 세 가지 기초가 아주 잘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로 기독교 윤리의 동기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삶을 살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죄와 사망 가운데 있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자녀로 삼으신 그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딱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10장 1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아멘.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을 경외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음과 뜻을 다해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계명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도 일치합니다. 

 

어느 날 율법사가 예수님께 와서 질문했죠.
성경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했습니다.
율법사가 몰라서 질문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질문했습니다.
그에 대해 주님은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 38절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아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것을 명심하고 지켜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은 그의 책 팡세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17세기 최고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파스칼이 말합니다.
'세상 어떤 종교도 신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직 기독교만이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가르쳤습니다.
왜 그럴까요? 

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는데 왜 신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지 않았을까요?
다른 모든 종교는 인간이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종교를 왜 만들까요?
나에게 필요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먹을 것이 필요하고, 건강이 필요하고, 안전이 필요하니까 신의 도움을 구합니다.
그렇게 신의 도움을 구하는 과정이 체계화되면 그것이 곧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종교의 시작은 인간의 필요를 채우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신은 그 필요, 그 목적을 이루는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이거는 인격적인 관계가 아니라 비인격적인 관계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인간이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성경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먹을 것을 위해서, 건강과 안전을 위해서 성경을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그 증거가 무엇일까요? 

오직 기독교에서만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인격적인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사랑입니다.
오직 기독교에서만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교부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라'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듣기 좋은 말 같지만 결코 이것은 쉬운 명령이 아닙니다.
어쩌면 최고 수준의 명령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면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계명을 다 지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을 비방하고 욕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다른 사람을 비방할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예로 이기적이고 인색한 사람이 있습니다.
힘든 사람을 보아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절대 도와주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실 물이 없는 아프리카 아이들을 돕자고 해도 그런 일을 왜 하냐고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나만 알고 다른 사람에게 인색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 하셨기 때문에 그 사랑을 받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없는 것을 달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사랑을 주셨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10장 18절 19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아멘.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예전 기억이 납니다.
예전에 제가 이제 미국에서 전도사 생활하던 때가 기억납니다.
타국에서 아주 힘들게 힘들게 전도사 생활할 때 저를 섬겨주셨던 성도님들이 계셨습니다.
그때 그분들의 사랑과 섬김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제가 미국 교회에서 사역을 했는데 미국 교회 목사님께서 휴가를 가시면 당시 전도사였던 제가 주일 예배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면 설교했다고 저에게 사례를 챙겨주셨습니다.
100달러, 200달러 정도였지만 당시 저에게는 너무나도 큰 도움과 격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담임 목사로서 저는 우리 교회 부교역자들을 챙겨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가 받은 선물이 있으면 함께 나누고 맛있는 식사도 많이 대접하고 있습니다.
제가 없을 때 설교를 하면요, 수고한 것에 대해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사실 저는 성도님들이 저를 챙겨주실 때보다 우리 부교역자들 챙겨주실 때 훨씬 더 고맙습니다.
저에게 식사 대접해 주는 것보다 우리 부교역자들 식사 대접해 주시면 저는 훨씬 더 고맙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이분들처럼 과거에 부교역자로서 힘들게 사역했던 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그네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입니다.

 

과거에 너네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을 때에 주님의 사랑을 받았던 것처럼 이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면 그곳에 있는 나그네들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사랑을 주십니다. 

아무것도 아닌 우리를 위해서 놀랍고 풍성한 사랑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기억하며 그 사랑을 나누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여러분 이것이 기독교 윤리의 가장 중요한 동기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삶, 윤리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은 그 놀라운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성경에는 수많은 계명들이 있습니다. 

유대 랍비들은 모세 오경을 가지고 613개의 계명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 미츠보트라고 부릅니다. 

이 계명을 다 지키면 613개의 계명을 지키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이 613개의 계명을 딱 하나로 압축했습니다.
로마서 13장 10절에 나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아멘. 여러분, 율법의 완성은 사랑인 줄로 믿습니다.
613개의 계명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계명을 주신 이유, 그 계명을 지키는 동기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은 자로서 마음과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기독교 윤리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기준이 있습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판단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시편 119편 160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이오니 주의 의로운 모든 규례들은 영원하리이다

 

주님의 말씀은 진리이고 주의 의로운 계명은 영원하다고 선포합니다.
시대와 상관없이, 지역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진리인 줄로 믿습니다.
인간이 정한 규범과 관습 중에는 과거에는 유효했지만 지금은 유효하지 않은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조선시대에는 처첩제가 있었습니다.
아내 이외에도 여러 명의 첩을 합법적으로 들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첫첩 죄를 누가 없앴을까요? 

이것이 잘못된 관습이라고 누가 주장했을까요?
우리나라에 오셨던 선교사님들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1896년 북감리교 선교회, 1897년 북장로회 선교회는 처첩제를 금지했습니다.
아내 이외에 첩을 가진 사람은 교회에서 세례를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교회의 정식 멤버가 되기 위해선 딱 한 명의 아내만을 가져야만 했습니다.
이런 변화가 생겼을 때 누가 좋아했을까요? 

남편들이 좋아했을까요?  아내들이 좋아했을까요?

당연히 아내들이 좋아했겠죠.
여러분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왔을 때 그때 비로소 제대로 된 가정이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수백 년 동안 이어져오던 잘못된 관습을 고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시대와 상관없이, 지역과 상관없이 영원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겐 분명한 기준이 있습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옳고 그름의 기준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런 기준이 있어야지 일관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녀를 키울 때 아주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일관된 원칙, 일관된 기준을 가지고 자녀를 양육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내 기분에 따라서 막 기준이 왔다 갔다 하잖아요.
그럼 자녀가 혼란스러워합니다. 

언제는 안 된다고 했다가 또 나중에는 된다고 하면요.
아이가 혼란스러워합니다. 

아이가 혼란스러워지면 어떻게 하는 줄 아십니까?
눈치를 보게 됩니다. 

사실 제가 아이들 볼 때 제 마음이 짠할 때가 있는데 아이가 어른들 눈치 볼 때입니다.
이걸 해도 되나? 안 되나? 눈치를 보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것을 보고 있으면 제 마음이 안타깝습니다. 

아이들이 눈치를 보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부모의 일관된 원칙이 없기 때문입니다. 

일관된 원칙이 있으면 여러분 아이들도 그것을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이 행동을 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 아이들 다 이해합니다.
그러면 분명하고 자신 있는 확신 있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일관된 원칙을 가지고 자녀를 양육해야지 그 아이들의 정서가 안정됩니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에게 있어서 일관된 원칙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일관된 원칙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이를 양육하면 아이들의 정서가 안정됩니다.
그 말씀이 너를 귀찮게 하는 게 아니라 널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너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을 하잖아요.
그럼 아이들도 그것을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신명기 10장 1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아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명령을 주신 이유는 아주 분명합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명령과 규례를 주신 줄로 믿습니다.
미국의 신학자 케빈 멜러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나의 리듬보다 더 우월한 리듬에 순종할 때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언뜻 생각하면 이것은 자유가 아닌 것 같습니다. 

내 마음대로 해야지 그게 자유이지 나보다 우월한 리듬에 순종하는 것이 무슨 자유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의 리듬이 타락했다는 것을 깨달으면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자유가 아니고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 내가 먹고 싶은 대로 먹고 내가 자고 싶은 대로 자면 어떨까요?
그러면 정말 자유로워지고 정말 행복해질까요?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이냐라고 질문하면 대부분 라면 아니면 떡볶이를 말합니다.
물론 맛있는 음식이지만 탄수화물만 많아서 영양적으로 좋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삼시 세끼 라면을 먹겠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진짜 엄마라면 허락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맛있어도 그렇게 먹으면 건강에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수면 패턴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대로 자는 것이 절대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밤늦게까지 드라마를 보고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그 패턴이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자고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는 것이 훨씬 더 건강에 좋습니다.
불규칙적인 식사, 불규칙적인 수면은 건강에 해롭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먹고 정해진 시간에 자야지 우리가 더 건강해집니다.
규칙적인 패턴을 세워갈 때 우리의 몸과 우리의 마음은 더 건강해집니다.
내가 하고 싶은 나의 리듬보다 더 우월한 리듬에 순종할 때 우리의 몸과 영혼이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특별새벽기도회가 있었습니다. 

아마 세상 사람들이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특세일 것입니다.
여러분 새벽 4시 50분까지 교회에 오려면요. 집에서 새벽 4시에는 나와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이 주차하기가 어려워서 일찍 와서 주차하고 올라와야지 생명홀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만약에 생명홀에 정시에 도착하면 자리가 없어서 다른 부속실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특세에 어린아이부터 나이 많으신 어르신까지 수많은 성도들이 참여했습니다.
초등학생은 물론이거니와 아주 나이가 어린 2살, 3살 된 아이들까지 새벽을 깨워서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특세의 의미와 가치는 무엇일까요? 

왜 이렇게 극성스럽게 새벽에 교회에 와서 기도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제가 출석 체크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자발적으로 오신 이유는 내 몸을 쳐서 복종하는 훈련을 한 것입니다.
내 육체가 시키는 대로 육체의 욕망에 따르지 않는 훈련, 기도의 훈련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솔직히 밤에 놀고 싶잖아요. 

드라마도 보고 싶고, 친구도 만나고 싶고 또 술 마시고 싶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육체의 욕망을 따르지 않는 훈련을 한 것입니다.
내 몸을 복종시키지 못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내 마음과 영혼을 복종시킬 수 있을까요?
내 몸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는데, 어떻게 내 영혼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을까요?
그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육체의 욕망을 통제할 수 있어야지 우리가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나의 리듬보다 더 우월한 리듬에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지 우리가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내 정욕대로 살아가는 것은요, 절대로 건강하지도 않고 자유롭지도 않습니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는 일본인 선수 오타니 선수가 있습니다.
그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처음으로 50홈런 50도루를 달성한 대단한 선수입니다.
오타니 선수는 엄청난 재능으로도 유명하지만 엄청난 자기 관리로도 유명합니다.
그는 술을 한 잔도 마시지 않는다고 합니다. 

몸에 해로운 음식은 어떤 것도 먹지 않습니다.
그리고 시즌 중에는 충분한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경기 끝나면 무조건 호텔로 가서 잔다고 합니다.
젊은 나이에 얼마나 인기가 많은데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유혹도 많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타니는 최고의 선수가 되기 위해서 헌신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미국으로 간 지 메이저리그로 간 지 6년이 지났는데 아직까지 한 번도 미국을 여행해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정한 그 기준을 따라서 더 높은 꿈을 향해서 헌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최고의 프로페셔널은 절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지 않습니다.
나의 리듬보다 더 우월한 리듬에 맞춰서 살아갑니다.
규칙적으로 정해진 시간에 먹고, 정해진 시간에 자고, 정해진 시간에 훈련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한 기준을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행복과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육체의 욕망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기준이 되는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놀라운 변화와 성장을 경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기독교 윤리의 목표는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성화라고 부릅니다. 

성숙하고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신명기 10장 1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면서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고 하십니다.
성경에서 할례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임을 알리는 표징 사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하시면서 이것이 너의 자손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보여주는 상징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원래 할례는 육체에 행하는 것입니다. 

태어난 지 8일이 되면 남성의 포피를 베는 것이 할례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마음의 할례를 행하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예레미야 4장 4절에 나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아멘.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 하는 것은 마음의 가죽을 베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굳어진 부분을 잘라내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마음에 완고하고 굳어져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데 방해가 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잘라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는 굳어진 부분이 혹시 있으십니까?
마음이 무감각하고 무대어져서 아무런 반응이 없을 때가 있으십니까?
말씀을 들어도 반응이 없고 찬양을 불러도 감흥이 없는 그런 굳어진 마음이 있으십니까?
만일 우리 마음에 그런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잘라내야 합니다.
무감각한 마음, 무반응의 마음을 잘라내는 것이 마음의 할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하다 보면 이제 마음이 무뎌질 때가 있죠.
주님을 생각해도 아무런 느낌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물론 내가 해야 할 일은 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예배도 열심히 오고 봉사도 열심히 하고 헌금도 합니다.
그런데 아무 느낌도 없고 마음이 무덤덤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신앙생활에 위기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종교 행위가 아닙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 무뎌지고 무감각해졌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위기입니다.
우리 교회는 그런 분들은 안 계시겠지만 주일 학교 교사나 다른 부서 교사로 봉사하다가 정작 주일 예배를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봉사하는 것이 너무 바쁘다 보니까 정작 자기 예배를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생각하기를 주일 학교 예배 드렸으니까 괜찮겠지라고 생각합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주일 학교 예배는 아이들을 위한 예배입니다.

교사들은 주일 학교 예배가 아니라 본 예배 성인들을 위한 예배에 참석해야 합니다.
주일 예배를 통해서 내가 먼저 은혜를 받고 내가 먼저 하나님을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다음에 내가 받은 은혜와 사랑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섬겨야 합니다.
내가 받은 은혜가 없는데 내가 받은 감동이 없는데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없습니다.
지난주에 다 은혜 받았어요. 예전에 은혜 다 받았어요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매일 매주 받는 은혜가 있어야지 그 힘으로 사역을 감당할 줄로 믿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매일 매주 받는 은혜가 있어야지 맡겨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지난달에 받은 은혜 가지고 오늘 사역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오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오늘 부어지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모든 예배 가운데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절대로 저에게 맡기신 그 사역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설교 때마다 저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합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이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아서 굳어진 부분을 잘라내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부드러운 마음, 유순한 마음이 있어야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받아야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불량에까지 이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윤리의 목표는 율법을 잘 지키고 계명을 잘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윤리의 최종 목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불량에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1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아멘. 신앙생활의 목표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강조한 것처럼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서 굳어진 부분을 잘라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정체성과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멈춰야 합니다.
우리가 빛의 자녀로 부르심 받았기 때문에 어둠의 일을 멈춰야 하는 것입니다.


탕자가 돌아왔을 때, 그 아버지는 좋은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겨주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의 정체성을 회복시켜준 것입니다.
'너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니다, 너는 사랑받는 내 아들이다'라고 선포해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정체성에 맞게 행동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원하십니다.
여러분 예배가 왜 중요할까요?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 앞에 서게 될 때에 우리의 정체성이 온전히 회복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살면 좋은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인 줄로 믿습니다.
기독교 윤리는 바른 동기, 바른 기준, 바른 목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바른 동기는 마음과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른 기준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품는 것입니다.
바른 목표는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형상으로 우리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그 기준,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그 말씀대로 살아가서 진정한 변화와 행복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SLGAvkOAJr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