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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대원목사 설교

241006 폭풍을 지나는 믿음

by 마이코 2024. 10. 7.



모든 사람은 안정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직장과 사업이 안정되기를 원하고 또 우리 가정이 안정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은퇴 준비를 하기도 하고요. 노후 보장을 확실하게 하기도 합니다.
뜻하지 않는 질병과 사고를 대비해서 여러 가지 보험을 들기도 합니다.
인생의 불확실성을 없애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노력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생에는 불확실한 상황이 많이 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과 사고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내 힘으로는 컨트롤 할 수 없는 그런 어려움을 만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인생의 불확실성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인생이 내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여러분은 어떻게 대응하십니까?
미국의 엔지니어 찰스 캐터링은 세계 최초로 전기식 점화 장치를 개발했습니다.


우리가 자동차 시동을 걸 때 사용하는 것이 바로 이 점화 장치이지요.
지금은 아주 당연한 것이지만 1912년 이것이 최초로 개발되었을 때 정말로 혁신적이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사람이 직접 자동차 바깥으로 나가서 크레이크 핸들을 잡고 돌려야지 자동차 시동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운전석 옆에는 조수석이 있고 그 조수석의 사람이 타고 있다가 시동을 걸기 위해서 크랭크 핸드를 돌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전기식 점화 장치의 개발로 아주 손쉽게 자동차 시동을 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그 일에 끊임없이 도전했던 이 찰스 캐터릭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 말은 인생의 목적과 그것을 이루기 위한 용기에 대해서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발가락을 찧지 않는 것입니까?
아니면 어딘가 목표로 한 곳에 도달하는 것입니까?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은 아마 선뜻 새로운 곳으로 나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나에게 익숙한 곳, 나에게 편안한 곳에 머물기를 원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그러한 안전지대가 필요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평생 동안 그 안전지대 안에만 머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변화와 성장은 그 안전지대 끝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안정적인 상황에서 어떤 진정한 변화와 성장은 거의 없습니다.
분야를 막론하고 혁신적인 변화와 그 성장은 위기 상황 가운데서 안전지대의 끝에서 발생합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도전하지 않으면 실패할 일도 없겠지요.
하지만 우리 인생의 목표가 실패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진정한 목표는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과정 가운데 시련도 있을 것이고 실패도 있겠지만 우리가 용기를 내는 만큼 주님께서 주신 그 비전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인생의 불확실성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그 비전를 향해서 그는 기꺼이 고난과 시련을 마주했습니다.
로마로 가는 항해 가운데 거대한 광풍이 만났지만 바울은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을 붙잡았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모습은 그와 함께하던 사람들에게 아주 큰 도전과 격려를 주었습니다.
폭풍 한가운데에서도 주님을 신뢰하며 나아갈 때 바울은 주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위기 가운데 빛나는 그 믿음이 어떤 모습인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은 로마를 향해서 항해를 떠나는 바울의 모습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바울은 다섯 번 재판을 받았고, 그 모든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만약에 그가 풀려나기를 원했다면 바울은 얼마든지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로마의 황제에게 상소를 했습니다.
그렇게 해야지 로마에 가서 황제를 만나고 그에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목적은 빨리 풀려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목적은 로마에 가서 예수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바울은 로마로 압송되어 갔습니다. 

바울을 태운 배는 이집트에서 곡물을 운송하는 화물선이었습니다.
로마 시대에는 여러 식민지에서 로마로 곡물을 운송하는 화물선이 많았습니다.
순적하게 운행하던 배는 지중해 한가운데에서 큰 광풍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7장 13절 14절 함께 읽겠습니다.

 

  • 13.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
  • 14. 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바울을 태운 배가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유라굴로에서 유로는 헬라어로 동풍이라는 뜻이고요.
아큐러스트라는 말은 라틴어로 북풍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유라굴로 하면 문자적으로 북동풍을 의미합니다.
그레데 섬에 있는 산에서 바람이 내려오는데 그 강풍과 바다의 소용돌이가 만나서 광풍이 되었습니다.
영어 성경에 보니까 허리케인과 같이 강력한 바람이었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강력한 바람 앞에서 선원들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15절 보니깐 바람을 맞추어서 갈 수가 없더라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문자적으로 바람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라는 의미입니다.
바람이 얼마나 강력하게 부는지 그 바람을 볼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저 바람이 부는 대로 떠내려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서 인간이 무력하게 보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비단 과거의 일만이 아닙니다. 

불과 두 달 전에도 동일한 사건이 지중해에서 있었습니다.
영국의 억만장자를 태웠던 호화 요트가 이탈리아에서 침범했습니다.
시칠리아 섬 앞바다에서 토네이도를 만났는데 갑자기 불어닥친 그 광풍을 이겨내지 못하고 요트가 침몰하고 말았습니다.이 사고로 영국의 빌게이츠라고 불리는 마이클 린치와 그의 딸이 사망했습니다.


시칠리아 항구에서 불과 700m밖에 떨어지지 않았는데 지중해에서 갑자기 불어닥친 그 광풍을 이겨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21세기에도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하물며 2천년 전에는 이보다 훨씬 더 상황이 심각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이런 순간이 찾아옵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컨트롤 할 수 없는 위기가 닥칠 때가 있습니다.
거대한 광풍 앞에서 선원들이 무기력했던 것처럼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큰 어려움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고대인들에게는 바다가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바다는 어둠의 세력과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이 보았던 환상에 보면 무시무시한 내 짐승이 바다에서 올라왔다라고 말씀합니다.
요한계시록을 보아도 무시무시한 짐승이 바다에서 올라왔다고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유대인들에게 바다는 두려움의 대상, 어둠의 세력과도 같았습니다.
그런 바다를 항해하다가 폭풍이라도 만난다면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의 사람인 사도 바울이 바다에서 폭풍을 만났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절망에 빠진 선원들이 배 안에 있는 물건들을 바다로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장면을 읽고 있는 성경의 독자에게는 생각나는 사건이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 어디에서 배가 폭풍을 만나서 물건을 바다에 버리는 장면이 어디에 나오나요?
요나서에 나옵니다. 요나서 1장 4절 5절에 나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   4.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   5.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요나가 탔던 배가 폭풍을 만나서 선원들이 배에 있는 물건을 바다에 던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울의 모습과 상당히 비슷한 장면이죠.
두 경우 모두 폭풍을 만났습니다.

두 경우 모두 배에 있는 물건을 바다에 버렸습니다.
그런데 요나의 항해와 바울의 항해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은 니네웨아로 가라고 하셨는데, 요나는 정반대인 다시스로 가다가 거기에서 폭풍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은 로마로 가서 복음을 증거하라고 하셨고, 바울은 그 말씀에 순종해서 로마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했고, 다른 사람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다 폭풍을 만났습니다. 

불순종한 사람이 폭풍 만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데, 어떻게 순종한 사람도 폭풍을 만나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인생이 잘 풀려야지 왜 폭풍을 만났을까요?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더라도 인생에서 폭풍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만사형통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믿으면 모든 일이 다 잘될 거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정한 믿음의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없이는 영광도 없기 때문입니다.
영어 속담에


요나도 폭풍을 만나고, 바울도 폭풍을 만났습니다.
요나는 불순종에서 폭풍을 만나고, 바울은 순종했음에도 불구하고 폭풍을 만났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이 폭풍을 만난 것 같습니다.
하지만 폭풍 가운데 두 사람이 깨달은 바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요나는 폭풍을 통해서 자신의 죄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갔던 것을 회개하였습니다.
반면에 바울은 폭풍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신실한지 깨달았습니다.
거대한 폭풍으로 모든 소망이 다 사라진 것 같지만 그때에도 하나님은 그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요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아무런 영향력을 주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바울은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했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유라굴로 광풍을 지나가며 선장과 선원들, 로마의 백부장은 점점점점 더 바울을 신뢰하게 됩니다.
바울을 통해서 위기 가운데 빛나는 그 믿음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고난은 우리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해서 찾아옵니다.
요나가 경험했던 폭풍과 같이 우리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할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고난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왜 이런 문제가 생겼는지 잘 알 수 없지만 그 시간을 지나가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위기 가운데 빛나는 그 믿음을 통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여러분이 지금 경험하고 계신 고난은 어떤 종교의 고난입니까?

망망대해에 혼자 있는 것 같지만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망이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좌절하고 절망해도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을 받은 우리는 안전한 줄로 믿습니다.
폭풍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 믿음으로 나아가서 주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은 폭풍 가운데 낙담하거나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움에 빠진 선원들은 살 수방을 다 잃어버렸지만 바울은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상황은 너무나도 불확실했지만 바울은 두려워하지 않고 가장 확실한 것을 붙잡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본문 22절부터 25절까지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 22.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 23.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 24.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 25.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아멘.

두려워 떠는 선원들에게 바울은 두 번이나 안심하라라고 선포합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keep up your courage' 라고 되어 있습니다.

계속 용기를 내라는 의미이죠.
거대한 폭풍에 갇힌 사람에게 어떻게 계속 용기를 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 말이 무조건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그런 의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분명한 근거를 가지고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가 전날 밤 그에게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로마의 황제 앞에 반드시 서야 하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반드시 어떻게 해야 하겠다라는 구절은 신적 필연성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이 일은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가시면 죽임을 당하실 것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그 구속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바울이 로마의 황제를 반드시 만나게 될 것이라고 작정하셨습니다.
이 일이 꼭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신적 필연성을 사용해서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의미를 깨달은 바울은 자신이 폭풍 가운데에서도 안전할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의 사명을 마치는 그날까지 하나님께서 지키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선원들에게 안심하라 계속 용기를 내라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위기의 상황 가운데서 리더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은 무엇일까요?
절체절벽의 위기에 처했을 때 리더에게 필요한 가장 중요한 자질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리더는 안정감을 주어야 합니다.

리더가 당황하면 안 됩니다. 

리더가 불안해하면 모두가 다 불안해하기 때문이죠.
어떤 상황에서도 리더는 침착하고 안정감을 지켜야 합니다.
거대한 폭풍이 몰려와도 리라도 용기를 잃지 않고 그 폭풍을 마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리더는 사람이 아닐까요? 

폭풍 앞에서 리더는 무섭지 않을까요?
모두가 두려워하고 절망 가운데 빠져 있는데 어떻게 안정감을 줄 수가 있을까요?
폭풍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함께 폭풍을 지나갔던 경험이 필요합니다.

 

리더십은 책에서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리더십은 어디 학교에 가서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폭풍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주님과 함께 폭풍을 지나갔던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바울에게 그러한 경험이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유라굴로 광풍과 같은 그런 고난을 경험한 적이 있었을까요?
물론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5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바울이 고백합니다.
세 번 파손한 적이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배가 부서져서 일주일 동안 바다에서 지낸 적도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산전수전을 다 겪었던 사람입니다. 

극심한 고난과 시련 가운데 그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로 살아계신지, 정말로 그분의 약속을 지키시는지 바울은 경험했습니다.
폭풍 속에서도 지키시고 구원하시는 그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동일한 역사를 행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말로만 하는 믿음 책에서 읽은 믿음이 아닌 것이죠.
지금도 살아계시고 지금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만이 이러한 믿음을 가지는 줄로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위기 가운데에서도 안정감을 줄 수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 때문에 절망하지 않고 믿음 가운데 그 불확실성을 직면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한 목사님께서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기도 가운데 담임 목회를 내려놓고 선교사로 가시겠다고 결단하셨다고 합니다.
아무것도 보장된 것이 없는 그 길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쉬운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저에게 오셔서 그 모든 과정을 나누시고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때 제가 그분에게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그래도 목사인데 하나님께서 정말로 살아계신 것을 경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목사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지 못하고 성경 연구만 해서 설교하며 그 설교에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라고 제가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무것도 보장된 것이 없지만 믿음으로 나아갈 때에 선한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보다 앞서 행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해야지 우리가 인생의 폭풍 가운데 절망하지 않고 용기를 주고 안정감을 주는 리더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리더십의 대가 존 맥스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평화로운 바다, 잔잔한 바다에서 항해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진짜 리더십은 거대한 폭풍을 만났을 때 드러나게 됩니다.
그 리더 안에 있는 최선과 최악은 위기의 상황 가운데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위기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나의 리더십을 테스트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나의 신앙과 나의 비전을 테스트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위대한 믿음의 사람은 그런 위기를 다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비전이 성숙하기 위해서 반드시 그런 고난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요셉은 타국에서 오랫동안 노예 생활을 했습니다.
다윗은 오랫동안 광야에서 쫓기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그 비전을 붙잡고 이 위기를 통과할 수 있는지 테스트하는 시간이 모두에게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라굴로 광풍에서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타고난 용기가 있어서, 타고난 담력이 있어서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이전에도 동일한 위기를 극복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비가 내릴 때 너무너무 힘들지만 그 시간을 잘 견디면 훨씬 더 단단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으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확실한 주님의 약속을 붙잡는 믿음의 사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바울은 위기 가운데 연합과 협력을 이끌어냈습니다.
폭풍 가운데 해와 별이 보이지 않게 되자 배가 이제 방향을 잃게 되었습니다.
지금이야 GPS가 있지만 고대 사회에는 GPS가 없기 때문에 해와 별을 보면서 선원들이 방향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광풍 가운데 해와 별이 보이지 않자 선원들은 방향 감각을 다 잃게 되었습니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 뭔가 육지에 가까운 것 같이 느껴지자 선원들이 구명 보트를 타고 도망가려고 했습니다.
본문 30 31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 30.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내리는 체하고 거룻배를 바다에 내려 놓거늘
  • 31. 바울이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선원들이 무서워서 배를 버리고 구명보트를 타고 도망가려고 했습니다.
이것을 본 바울이 백부장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절체절벽의 위기 상황 가운데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하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항상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봤을 때 그들을 설득하고 잘 설명해서 공동체 전체를 위한 연합과 협력을 이끌어내는 것이 바로 리더의 역할입니다.

이런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아주 좋은 성품도 필요하지만 탁월한 지혜도 필요합니다.
어떤 종류의 지혜가 필요할까요?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장기적인 관점, 거시적인 관점을 보여주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모든 사람이 이기적으로 행동한다면 그 사회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서 사거리에서 내가 먼저 가겠다고 신호를 지키지 않으면 차가 뒤엉켜서 길이 막히게 됩니다.
장기적인 관점, 거시적인 관점을 가지고 모두가 신호를 다 지키면 더 모두가 빨리 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리더는 연합과 협력을 모두에게 유익하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설득해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공동체를 위해서 희생하라는 말이 통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말이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아마 요즘 세대는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왜 내가 희생해야 하는데요? 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무조건 희생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더 큰 유익이 되는 길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설득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공동의 비전, 공동의 목표를 확인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당신에게 유익한 것이 나에게도 유익하다는 인식을 세워가야 합니다.
우리가 경쟁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협력적인 관계에 있다는 그 인식을 세워가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는 위원회도 많고 부서도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어떤 공간 사용에 있어서 부서 간에 갈등이 생길 수 있겠죠.

위원회 간의 경쟁, 부서 간의 경쟁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더 중요한 위원회, 덜 중요한 위원회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위원회는 동등하게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 모든 위원회는 동등하게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생명 사역 5대 분야가 다 필수적입니다.
전도와 선교가 구제보다 교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5대 사역 전체가 균형 있게 발전할 때에 그때 건강한 부흥과 성장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제가 외국에 오랫동안 15년 동안 있다가 한국에 왔을 때에 크게 느낀 점이 있습니다.
한국 사회는 초갈등사회라는 점입니다. 

우리나라가 지역과 이념으로 세대와 성별로 얼마나 분열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하고 우리가 감정을 상하지 않고 토론하는 것이 정말로 힘든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리더가 있는데 바로 갈라치기 하는 리더입니다.
특정 그룹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지역을 나누고 이념을 나누는 리더는 정말로 최악의 리더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국가 전체를 이끌고 갈 만한 장기적인 비전, 거시적인 비전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주한 위기는 유라굴로 광풍만큼이나 큽니다.
이렇게 거대한 광풍, 거대한 위기를 만났는데 나만 살겠다고 배를 내려서 도망가는 것 그것은 비겁한 일입니다.

우리 가족만 잘 되면 된다는 그런 생각도 비겁한 일입니다.
이 거대한 위기 앞에서 우리 모두가 하나 될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하는 것입니다.
연합과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공동의 비전, 공동의 목표를 분명하게 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나의 유익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까지 고려할 때 우리 모두가 함께 유익하게 되는 그 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애플의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업가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여러분 사업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사업의 목표는 이윤을 창출하는 것입니다.
이윤을 창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단가를 낮추든지 아니면 가격을 높여야 합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사업가의 생각입니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는 정반대로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제품을 많이 판매할까 고민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고객에게 유익을 끼칠 수 있을까 고민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접근하면 고객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 고객에게 정말로 유익한 것을 만들게 됩니다.
그렇게 만든 제품으로 고객은 더 행복해지고 기업도 유익을 누리게 됩니다.
기업과 고객 모두가 윈윈하는 것입니다. 

연합과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이러한 지혜가 필요합니다.
당신에게 유익한 것이 나에게도 유익하다라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경쟁적인 관계가 아니라 협력적인 관계에 있습니다라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전인적인 돌봄과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유라굴로 광풍으로 인해 14일 동안 음식을 먹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그 약속으로 사람들에게 용기와 소망을 주었을 뿐 아니라 지치고 상한 그들의 육체가 힘을 얻을 수 있도록 떡과 음식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본문 말씀 33절부터 36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 33. 날이 새어 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에게 음식 먹기를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나흘인즉
  • 34. 음식 먹기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 하고
  • 35.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 36. 그들도 다 안심하고 받아 먹으니

아멘.

모든 사람에게는 육체와 영혼이 있습니다.

우리가 영혼을 돌보는 것이 중요한 것만큼이나 육체를 돌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영적인 사역에 매진하기 위해서 육체를 소홀하게 여기는 것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시편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 광야 가운데 식탁을 준비하셨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매일 만나를 내려주시고 메추라기를 내려서 고기를 허락하셨습니다.

다윗도 시편 23편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아멘, 

선한 목자 되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식탁을 차려주십니다.
원수의 목전 앞에서 고난을 받을 때에 우리의 몸이 지치지 않도록 음식을 준비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전인적인 사랑과 돌봄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시고 또한 떡을 떼어서 나누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갈릴리 호수로 돌아간 제자들을 찾아가서 물고기를 구워주셨습니다.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은 굳이 음식을 드시지 않아도 됐습니다.
하지만 살아가는 제자들이 힘을 낼 수 있도록 떡과 물고기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전인적인 돌봄과 사랑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러한 사랑과 돌봄을 실천해야 합니다.

인생의 폭풍 가운데 있는 자들, 지친 자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런데 기도만 해주고 그냥 보내는 것은 각박한 일입니다.
힘들고 지친 사람들을 위해서 식사도 대접하고 커피도 대접해야 합니다.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육체와 영혼, 그 모두를 돌봐야 합니다.


제가 아프리카 선교사로 있을 때에 한국을 방문하면 주로 선교사 게스트룸에 머물렀습니다.
본국을 방문한 선교사를 위해서 게스트룸을 제공해 주는 것 너무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어떤 곳에서는 선교사를 위해서 게스트룸 냉장고를 가득 채워놓은 경우가 있습니다.
과일과 야채, 고기와 쌀, 선교사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을 가득 준비해 주셨습니다.
그런 사랑과 환대를 받으면 마음속에 얼마나 큰 감동을 받는지 모릅니다.
저 멀리 타국에서 복음을 위해서 고생하고 힘들었던 마음이 큰 위로를 받게 됩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선교사님들을 잘 위로하고 섬겨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전인적인 돌봄과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 아름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도 광야에서 식탁을 차려주시고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차려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물질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을 도구로 여기고 사람을 부품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력한 시대입니다.
누군가 회사에서 퇴사하면 얼마든지 대체자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비인격적인 시대에 인격적인 사랑과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아마 요즘 MD 세대는 이런 질문을 자주 한다고 합니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좀 유치한 질문일 수 있습니다.
그냥 해야 할 일, 열심히 잘하면 되지 뭐 이런 질문까지 하냐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질문은 아주 솔직하고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맹목적인 충성은 없습니다. 

이유를 따지지 않고 헌신하는 것 사실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소중한가요? 저를 아끼시나요? 라고 질문해도 됩니다.
책임감 있는 리더는 이 질문에 답해주어야 합니다.
사람을 도구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이용 가치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한 인격으로 우리를 바라보시고 우리의 인격적인 전인적인 필요를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2주일 후에 행복 나눔 잔치가 있습니다.

우리가 작정한 태신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고 실질적인 사랑을 나누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서 교회에서 전도용 선물도 준비하고, 감동 음악회도 준비했습니다.
왜 교회에서 태신자를 위한 선물을 준비해야 할까요?
전인적인 돌봄과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태신자의 영혼을 돌보는 것처럼 그의 육체 또한 돌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영혼도 구원하시고 또한 우리의 육체도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위기는 우리의 믿음이 빛을 바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이를 위해서 먼저 불확실성을 직면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또한 공동의 목표를 제시하는 지혜를 가지고 연합과 협력을 이끌어내야 합니다.
또 마지막으로 전인적인 돌봄과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1장 1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 12.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아멘.

복음을 위한 고난은 절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 폭풍 가운데에서도 우리를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그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로서 인생의 여러 가지 위기를 믿음으로 이겨내시기를 축원합니다.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더욱더 성숙한 믿음을 갖추어서 절망에 빠진 자들을 위로하고 권면하는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cxL3fYHUrn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