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누군가의 인생 스토리에 감동을 받은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 마음을 울리는 어떤 감동적인 스토리는 어떤 스토리일까요?
시작과 끝이 뻔한 이야기에는 사실 감동이 별로 없습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서 좋은 학교 가고, 좋은 직장 들어가서 아무 문제없이 편안하게 산 인생에는 큰 감동이 없겠죠.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나오는 반응이 있습니다.
영어로 하면 'Good for you' 고요 한국말로 하면 '좋겠다' 라는 말이죠.
하지만 감동적인 이야기에는 서사가 있습니다.
어떤 확실한 신념과 비전을 가진 사람이 있는데 그 비전을 따라가는 과정에서 수많은 어려움과 고난을 경험하게 되죠.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해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 열매는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서사가 있는 이야기가 감동적인 스토리입니다.
제4차 로잔대회가 어제 어제 마쳤습니다.
전 세계 202개국에서 5,300명의 복음주의 선교 리더들이 모인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짧게는 2년, 길게는 5년 동안 준비했던 아주 큰 행사였죠.
기독교 역사상 가장 많은 나라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인 집회였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모였을까요?
세계 선교를 위해서 모였습니다.
로잔대회는 일회적인 이벤트가 아닙니다.
행사를 잘 치르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로잔대회의 목적은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선교의 비전과 전략을 깨닫고 거기에 맞는 새로운 선교운동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동성애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깨달았기 때문에 특별히 서구 교회에서 더욱더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새로운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다음 세대와 MZ세대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새로운 선교운동이 시작됩니다.
도시 선교 일터 사역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새로운 운동이 시작됩니다.
이것이 바로 로잔대회의 목적입니다.
로잔는 그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전 세계 선교를 위한 플랫폼으로서 존재합니다.
이 모든 과정을 준비하는 것이 결코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어려움과 난관이 많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어려움이 많았는지 제가 며칠 동안 말씀드릴 수도 있겠습니다.
한국 로잔과 국제 로잔이 함께 일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주신 비전을 붙잡고 믿음으로 나아갈 때 아름다운 열매가 있었습니다.
그 열매는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의 선교를 위한 열매였습니다.
이렇게 서사가 있는 이야기가 감동적인 스토리이지 주님께서 주신 확고한 비전을 붙잡고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합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그 일의 의미와 목적을 알기 때문에 기쁨으로 헌신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세상에 이해할 수 없는 믿음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재판을 받는 바울의 모습입니다.
사도행전 22장부터 26장까지 바울은 총 5번의 재판을 받게 됩니다.
천부장 앞에서 공회 앞에서, 총독 벨릭스 앞에서, 총독 베스터 앞에서, 그리고 유대 왕 아그립바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됩니다.
오늘이 그 마지막 재판 장면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 아그립바 왕은 정확하게 말하면 아그립바 2세입니다.
아그리바 2세니까 아그리바 1세가 있겠죠?
아그리파 1세는 누구일까요?
사도행전 12장에 나온 사람인데 야고보를 처형하고 초대교회를 핍박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다 헤롯 왕가였습니다.
헤롯 왕가는 헤롯 대왕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헤롯 대왕이 누구냐면 아기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유아 살해를 명령했던 왕이었습니다.
동방박사가 만났던 헤롯 왕이 바로 헤롯 대왕이었습니다.
그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는 세례 요한을 처형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집안 대대로 얼마나 사악하고 난폭한 사람들이었는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그립바 2세는 헤롯 왕가의 마지막 왕이었습니다.
잔혹하고 악명 높은 그 일가 앞에 바울이 섰습니다.
집안 대대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처형했던 일가였습니다.
오늘날로 따지자면 김일성 일가라고 할 수 있겠죠.
집안 대대로 잔인하고 난폭한 그 일가에게 재판을 받아야 한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여러분 우리가 그런 사람들에게 정의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바울은 그러한 상황에 있어서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증거였습니다.
사도행전 26장 2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고발하는 모든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
여기서 변명하다라는 말이 변증하다라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의 고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제가 설명하고 변증하겠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에 바울은 이제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다메섹의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는지 증거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구약의 율법과 선지서를 어떻게 완성했는지, 성취했는지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그립바 왕이 구약 성경을 잘 알고 있는 것을 염두에 두고 전략적으로 논리적으로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바울의 모습을 보면서 큰 도전과 감동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사람을 봐가면서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씨 착한 사람에게만 복음을 듣고 좀 반응할 사람에게만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해서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아무리 잔인하고 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듣고 나서 받아들일지 거부할지는 그 사람의 선택입니다.
다만 바울의 책임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전도자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최고의 프로페셔널이 누구입니까?
최고의 운동 선수, 최고의 아티스트는 어떤 사람입니까?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서 손흥민 선수는 그가 뛰는 모든 경기에서 최선을 다합니다.
영국 프리미어리그에서 뛸 때만 열심히 하고 국가대표에서는 대충 하는 것이 아니라 오만, 팔레스타인같이 약한 팀을 상대할 때에도 최선을 다해서 뜁니다.
이것이 바로 최고의 운동 선수의 모습이지 최고의 아티스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피아니스트 조성진 씨가 한국에 와서 공연할 때가 있죠.
베를린 필하모닉하고 연주하는 그 정도 레벨의 사람이 한국에서 혼자 연주할 때에도 대충 하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합니다.
김해, 강릉 같은 소도시에서 작은 도시에서 연주할 때에도 최선을 다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최고의 연주자의 모습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최고의 전도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합니다.
사람이 많을 때 중요한 사람하고만 있을 때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서 누구를 만나든지 간에 최선을 다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모습이었습니다.
최고의 율법사들이 있는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만 열심히 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악한 극악무도한 헤롯 왕과 앞에서도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증거였습니다.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지 상관없이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바울은 누구를 만나든지 최선을 다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했을까요?
이것이 바로 다메섹 도상에서 만났던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7절 18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아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보낸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어로 하면 I am sending you 이고요.
헬라어로 하면 애고, 아포스테로 세입니다.
여기서 헬라어 아포스테로가 영어로 하면 apostle 인데 그 의미가 '사도'입니다.
문자적으로 사도는 예수님께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정체성이었습니다.
나는 예수님께 보냄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를 보내신 그 예수님의 뜻을 행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주신 사명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해서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탄의 권세에서 신음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사탄은 작은 그 쾌락을 믿기로 해서 사람들을 억압하고 통치합니다.
그 죄를 지으면 작은 쾌락을 느끼지만, 그 죄가 우리의 육체를 파괴하고 우리의 영혼을 파괴합니다.
사탄이 우리를 억압할 때 무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주는 그 작은 쾌락을 믿기로 해서 우리를 억압합니다.
사실 지금은 과거보다 훨씬 더 풍족한 사회입니다.
하지만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관계적으로 피폐하게 살아갑니다.
이제는 청소년들 사이에서도 마약을 하는 것이 흔하다고 합니다.
작년에 보도된 기사를 보니까 7억 원 규모의 마약 총책을 잡았는데 고3 학생이었다고 합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우리가 말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스마트폰 중독, 학교에서 따돌림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요즘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만 봐도 사실 건강에 나쁜 것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과거에 비하면 훨씬 더 풍요로운 것 같지만 삶의 질은 더 안 좋아진 것 같습니다.
사탄의 권세 아래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과연 무엇이 그들에게 소망을 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구원의 복음만이 소망인 줄로 믿습니다.
C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내 마음대로 술 마시는 것 자유인 것 같지만 여러분 알코올 중독자가 되면 술 안 마실 자유를 박탈당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즐기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사실은 그것이 죄 아래에서 종 노릇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옳은 길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죄의 노예가 되면 옳은 길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박탈당하게 됩니다.
그 결과 사탄의 권세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악인지 모르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이 무엇이 빛이고 무엇이 어둠인지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빛 가운데로 나와야지 무엇이 빛이고 무엇이 어둠인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바울에게 주어진 사명은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해서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인 줄로 믿습니다.
어둠 가운데 있는 자들, 사탄의 권세에 있는 자들, 그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은 아그립바 2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대충 건성으로 한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메시아에 대한 성경의 예언을 예수님께서 어떻게 성취하셨는지 증거했습니다.
바울이 열심히 설교를 하고 있을 때 총독 베스도가 갑자기 외쳤습니다.
본문 24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여러분, 이 구절은 유명한 구절이죠.
로마의 총독이 사도 바울에게 외쳤습니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여기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 너는 무언가 심오한 것을 지금 말하고 있다는 의미가 있고요.
둘째로 그런데 나는 너가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네 많은 학문'이라는 표현에는 바울이 상당히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몇 문장 외워서 그 외운 문장을 되풀이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학식이 있었고 말씀의 깊이와 철학의 깊이를 가지고 지성적으로 복음을 변증했습니다.
가끔 보면 이제 마트에 가면 새로운 제품이 나올 때 그 홍보를 하시는 분들이 계시잖아요.
그 제품의 특징을 몇 가지 외워서 말씀하시죠.
그러다가 손님이 와서 그 제품에 대한 구체적인 질문을 하면 그분들이 답을 잘 못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딱 내가 암기한 것 외에는 이제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런 경우에 우리가 그분을 향해서 학식이 있다, 지식이 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 이런 식으로 몇 문장 외워서 전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신자가 복음에 대한 말씀에 대한 구체적인 질문을 했을 때 우리가 당황하면 안 됩니다.
바울이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복음을 전했던 것처럼 우리도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아주 확실하게 정리된 체계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 교회에서는 다양한 교육과 훈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매 학기마다 베스트 성경대학 강좌가 15개나 열립니다.
제자 훈련, 사역 훈련, 성조 훈련, LMTC 훈련도 있습니다.
마더 와이즈, MIP, CIP 같은 기도 훈련도 있습니다.
혹시 동신교회 다니시면서 어떤 교육과 훈련도 받은 적이 없다는 분이 계시다면 비유를 하려고 하거든요.
그것은 마치 이탈리아에 가서 피자를 안 먹고 오는 것과 비슷합니다.
제가 작년에 gms 유럽 선교사 대회 강사로 이탈리아에 갔는데요.
일정이 너무 빠듯해서 피자 먹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오랜만에 이탈리아 왔는데 피자도 안 먹고 어떻게 돌아갈 수 있나라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돌아오는 공항에서 이제 피자를 먹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공항에서 파는 음식이 맛있을까요? 맛이 없을까요?
별로 맛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너무너무 맛있었습니다.
동신교회 다니면서 교육과 훈련을 안 받는 것은 마치 이탈리아에 가서 피자를 안 먹고 오는 것과 마찬가지이죠.
우리 교회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유익과 혜택이 바로 교육과 훈련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그 깊이와 체계가 얼마나 놀라운지 배워야지 우리가 제대로 복음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총독 베스도의 말은 '나는 도무지 너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당신이 뭔가 심오한 말을 하는 것은 알겠지만 도저히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거죠.
바울이 말하는 구원도 이해할 수 없지만, 왜 그것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고난을 받는지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말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세상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이 어리석게 보일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즐길 수 있는 쾌락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 쾌락이 이렇게 많은데 왜 십자가를 말하는지 정신 나간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아멘.
영적인 세계, 영혼의 문제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미련한 거죠.
여러분 요즘에도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있냐라는 조롱을 듣고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조롱은 21세기에 나온 것이 아니라 2천년 전에 1세기에 나온 조롱이기 때문입니다.
죄 아래에서 멸망을 향해 가는 사람들에는 십자가의 도가 조롱거리입니다.
그것이 어리석고 미련한 일이라고 조롱했습니다.
하지만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십자가의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인 줄로 믿습니다.
사탄의 권세에서 억압받던 우리를 해방하고 구원한 것이 십자가의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행복과 자유를 누리는 우리는 기쁨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날마다 감사와 찬양이 가득한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생명이 없던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고, 소망이 없던 우리에게 소망을 주신 그 하나님을 진심으로 높이게 됩니다.
이번 로전대회 개회식에서 한국교회 연합찬양대의 찬양이 있었습니다.
전국 각 교회에서 선발된 최고의 전문가들이 모이니까 얼마나 아름답고 웅장한 찬양을 했는지 모릅니다.
우리나라가 음악적으로 예술적으로도 얼마나 앞서가는지 모르죠.
압도적으로 정말로 웅장한 그 찬양을 현장에서 들으면서 저는 천국에서 듣게 될 천사의 찬양이 이렇게 아름다울까라고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 목청을 다해서 마음을 다해서 노래하고 싶은 대상이 누가 있습니까?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서 그렇게 하고 싶으십니까?
우리 회사를 위해서, 우리 나라를 위해서 그렇게 마음을 다해 노래하고 싶습니까?
내 마음을 다해서 내 모든 것을 다해서 노래하고 싶은 대상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밖에 없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한다는 그 고백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찬양인 줄로 믿습니다.
또한 이번 로잔 대회에서는 전 세계에서 박해받는 사람들의 증언이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이란에서, 파키스탄에서 박해를 당하는 신실한 크리스천들의 증언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한 이란 목사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010년에 있었던 제3차 로잔대회에 참석한 이후에 기독교 운동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5년 동안 감옥에 갇혔다는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일년은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 독방에 갇혀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1년 동안 햇빛을 보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런데 그 목사님께서 이렇게 고백하셨습니다.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독방에서 주님께서 나의 빛이 되셨습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말하시고 환하게 웃으셨어요.
환하게.
제가 그 웃음을 보면서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런 죄가 없이 5년 동안 감옥에 갇혔는데 어떻게 그렇게 환하게 웃을 수가 있을까요?
세상 사람들은 그 웃음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목사님의 마음 가운데 있는 기쁨을 절대로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베스도가 바울에게 말한 것처럼 '나는 도무지 너를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복음의 능력인 줄로 믿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 세상이 알 수 없는 평안을 느끼게 됩니다.
사방이 둘러싸여도 답답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예수님 안에서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고린도 후서 4장 8절부터 10절까지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아멘.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가득한 줄로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어떤 상황에 의해서 우리 마음이 좌우되지 않습니다.
모든 상황을 통치하시는 그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평안과 기쁨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이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에 알 수도 없고 줄 수도 없는 진정한 기쁨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말이 바로 아그리파 이세 앞에서 바울이 선포했던 복음의 메시지였습니다.
사도행전 26장 29절 함께 읽겠습니다.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아멘,
재판을 받는 죄수가 자기를 재판하고 있는 왕과 총독에게 말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저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얼마나 웃긴 상황입니까?
바울은 무슨 생각으로, 과연 어떤 마음으로 이 말을 했을까요?
이 말에 담긴 의미는 이것입니다.
제가 느끼는 기쁨, 제가 느끼는 이 행복을 여러분도 느끼기를 원합니다.
제가 발견한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여러분도 알기를 원합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세상에 줄 수 없는 기쁨을 주님께서 주십니다.
세상에 알 수 없는 평안을 주님께서만 주십니다.
여러분 모두 날마다 예수님 안에 거함으로 참된 기쁨과 소망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재판을 마치고 왕과 총독이 궁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바울에 대한 고소가 타당한지 서로의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그들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본문 31절 함께 읽겠습니다.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위가 없다 하더라.
왕과 총독은 바울에게 이제 죄가 없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울에 대한 다섯 번째 무죄 판결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2장부터 26장까지 바울은 총 5번의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 모든 재판에서 바울은 무죄를 선언 받았습니다.
바울에게 죄가 없으니까 이제 풀려나야 되잖아요.
하지만 이에 대해서 아그립바 왕이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3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바울에게는 죄가 없으니까 석방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로마 황제 시저에게 상소했기 때문에 그냥 풀려날 수가 없었습니다.
로마 황제에게 상소한 사람은 풀어줄 수 있는 권한이 유대 왕에게는 없었겠죠.
이제 바울은 로마 황제에게 재판을 받기 위해서 로마로 압송되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바울의 목적이 빨리 풀려나는 것이었다면 굳이 황제에게 상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목적은 빨리 풀려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목적은 로마에 가서 황제 앞에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예수님께서 주신 비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3장 11절에 보니까 내가 예루살렘에서 나를 증언한 것과 같이 로마에서도 나를 증언하여야 하리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바울은 주님께 받은 분명한 비전이 있습니다.
그 비전은 이 땅에서 편안하게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 마음대로 사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받은 비전은 로마로 가서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황제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는 황제에게 상소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로마로 압송되어 갈 것입니다.
여러분 당시 로마의 황제가 누구였는지 아십니까?
로마 최고의 폭군이었던 네로였습니다.
네로 황제는 그냥 나쁜 사람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역사학자들이 평가하는 네로 황제는 미치광이었습니다.
자기 어머니를 죽이고, 자기 아내를 죽이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로마의 대화재 사건을 일으키고 분노한 시민들에게 쫓겨가다가 결국에는 자살했습니다.
제정신이 아닌 그 네로 황제에게 바울은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려면 그를 만나야 하는데, 그를 만나기 위해서 황제에게 상소를 한 것입니다.
여러분 당시 로마 사회에서 아무나 황제에게 상소할 수 없었습니다.
로마 시민권자만이 상소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 시민권자였던 바울은 자신의 신분을 사용해서 황제를 만나고자 상소를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로마의 시민권을 활용해서 자신의 유익을 추구했습니다.
세금 면제 혜택을 누리고 고등교육의 혜택을 누렸습니다.
만약에 저 멀리 속국에 가서 어려운 일을 당하면 로마 군대로부터 보호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복음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신의 시민권을 사용했습니다.
로마 황제를 만나서 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자신의 권리를 사용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믿음입니다.
아시아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란시스 사비에르는 스페인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16세기 유럽 최고의 지성인들이 모이는 프랑스의 파리 대학에서 공부했습니다.
출신 배경도 좋고 학식도 좋으니까 그의 미래는 창창하게 밝았습니다.
그런데 대학에서 만났던 이그네시우스 로열라라는 사람을 통해서 세계 선교의 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비에르는 아시아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아시아 선교사가 되고자 헌신했습니다.
당시에 포르투갈 항해사인 바스코 다마가가 발견한 그 신항로를 따라서 그는 인도로 가게 되었습니다.
인도에 도착한 그는 어린아이들이 쉽게 부르는 그 노래 안에 기독교 교리를 담아서 선교 활동을 했습니다.
정말 무더운, 살인적인 더위와 질병 당시 식인종의 위협을 무릅쓰고
사비에르는 인도와 필리핀을 거쳐서 1549년 일본에 도착했습니다.
16세기 당시에 일본은 포르투갈 상인들과 활발하게 교역을 했습니다.
새로운 사상에 열려 있던 일본에서 사비에르는 열심히 선교 활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 도착한 지 3년 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의 나이는 46세였습니다.
현실적으로 볼 때 사비에르의 선교사역에는 큰 열매가 없었습니다.
일본이 복음화된 것도 아니고 장기적인 선교 센터가 세워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믿음이 수많은 청년들에게 도전이 되어서 많은 청년들이 아시아 선교사로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그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이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리치입니다.
마테오 리치는 사비에르가 죽은 해에 태어났습니다.
사비에르의 믿음의 도전을 받은 그는 중국 선교사가 되고자 헌신했습니다.
리치는 중국으로 와서 완벽하게 중국어와 유교 문화를 익혔습니다.
그리고 중국 문화의 관점에서 기독교 사상을 설명한 책을 썼습니다.
그것이 천주실의라는 책이고, 이 책이 당시 조선에 전해져서 등장한 것이 있는데 바로 실학자들입니다.
조선시대 실학자들은 사실 기독교 사상을 믿고 따랐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정약용 같은 실학자들은 농학 과학에 있어서 또 서양 기술만 가져온 것이 아닙니다.
국가의 제도와 신분에 대한 성경적인 세계관을 그들이 믿게 되었습니다.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보면 감독과 장로의 자세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는 기독교가 종교로 들어오기 이전에 세계관으로 먼저 들어온 나라가 된 것입니다.
되돌아보면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이 출세와 성공을 포기하고 아시아 선교사로 헌신했던 프란시스 사비에르 덕분이었습니다.
비록 그는 당대의 열매를 보지 못했지만 그의 믿음의 도전을 받은 수많은 청년들이 그의 비전을 이어갔고, 마침내 중국과 한국에도 복음이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복음을 위한 자발적인 고난입니다.
내가 원하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지만 복음을 위해서 내가 자발적으로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성경은 선을 행하기 위해서 받는 고난이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19절, 20절 함께 읽겠습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아멘. 여러분 우리가 잘못해서 매를 맞는 것은 전혀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죄를 지어서 받는 고난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하지만 선을 행하기 위해서 받는 고난은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받는 자발적인 고난은 하나님께서 너무나도 귀하게 여기시는 줄로 믿습니다.
어제 대구 시내에서 퀴어 반대 집회가 있었죠.
대구 지역 수많은 교회에서 5천 명이 넘는 성도들이 참여했습니다.
주최 측에서 준비한 좌석이 모자랄 정도로 많은 분들이 참여하셨습니다.
어제 행사의 영상을 짧게 보시면 좋겠습니다.
퀴어 집회에 온 사람보다 10배는 넘는 사람들이 퀴어 반대 집회에 왔습니다.
너무나도 많은 분들이 참여하셨죠?
여러분 이분들이 토요일 오후에 심심해서 왔을까요?
주말에 할 일도 없는데 그냥 휴어 반대 집회나 가야겠다 했을까요?
아닙니다.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지만 그것을 포기하고 왔습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시내에 가서 햇빛이 있는데 몇 시간이나 고생하셨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까?
성경적인 성 정체성을 외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대구 지역 교회가 하나 되어서 한 목소리로 성경적인 가치관을 외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위한 자발적인 고난입니다.
나의 시간을 드리는 고난입니다.
나의 재정을 드리는 고난입니다.
불편을 감수하고 조롱을 감내하는 고난입니다.
이와 같이 선을 행하기 위해서 받는 고난은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줄로 믿습니다.
어제 퀴어 반대 집회에 참여하신 모든 분들의 희생과 헌신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의 목표는 편안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혹시 편안하게 신앙생활하기 원하십니까?
혹시 그런 분이 계시다면 교회를 잘못 오셨습니다.
대구동신교회 다니는 거 절대로 편안하지 않습니다.
주일에 주차하고 교회에 들어오는 것 자체부터가 편안하지가 않죠.
우리 교회에서 받아야 하는 교육과 훈련 과정도 절대 편안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는 편안하게 자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는 의미 있는 인생을 사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한 번뿐인 인생, 연습이 없는 인생, 주님 앞에서 후회 없이 아름답게 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인생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서 귀하게 쓰임 받는 인생입니다.
내 인생 아주 짧지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쓰임 받는다면 그것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믿음으로 복음을 위해서 자발적인 고난을 받았습니다.
만약에 본인이 원했다면 얼마든지 풀려날 수 있었지만, 로마 황제에게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스스로 쇠사슬에 묶였습니다.
이것은 절대로 세상에 이해할 수 없는 믿음의 모습입니다.
넘치는 감사와 가운데 바울이 외쳤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제가 느끼는 기쁨, 이 행복을 여러분도 느끼기를 원합니다.
제가 발견한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여러분도 발견하기를 원합니다라고 외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가득한 성숙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사탄의 권세에서 신음하는 자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그런 생명 사역자가 되어서 귀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으로 충만하여져서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기쁨으로 헌신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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