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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대원목사 설교

24_09_08 전략적 선택

by 마이코 2024. 9. 9.

 

인생에는 원칙이 필요합니다. 

개인의 삶에도 원칙이 필요하고, 공동체에도 원칙이 필요합니다.
안정적인 조직 운영을 위해서는 일관적인 원칙이 필요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칙이 있어야죠.
누구에게는 해당되고 누구에게는 예외가 되는 그런 것은 일반적인 일관적인 원칙이 아닙니다.
일관된 원칙이 없으면 공동체 안에 불화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떠한 상황에서도 반드시 원칙을 고수해야 한다는 원칙주의는 조금 조심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외부 환경은 끊임없이 변화되고 있는데 모든 상황에 다 적용될 수 있는 영원 불변의 원칙은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꽉 막힌 리더와 함께 일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요. 

2차 세계대전의 영웅 '조지 페튼 장군'은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이 아주 뛰어났습니다.


독일군에게 포위된 101 공수사단을 구출하는 작전을 지휘하면서 그는 예정된 날짜보다 하루 더 일찍 공격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이 작전에 대해서 변경된 계획에 대해서 아이젠하워 장군의 승인을 받았고, 

그 결과 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 중의 하나인 벌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패튼 장군이 했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위대한 리더는 상황에 맞게 계획을 세우지, 계획에 맞게 상황을 만들지 않는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어떻게 들으면 너무 당연한 말 같지만 동시에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여러분 상황과 계획이 다를 때 무엇을 바꿔야 할까요?
상황을 바꿔야 할까요? 아니면 계획을 바꿔야 할까요?
당연히 계획을 바꾸어야 합니다. 

내 마음대로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지요.
변화되는 그 상황에 맞는 새로운 계획이 필요합니다.
내가 세운 원칙도 중요하지만 새로운 상황에 맞게 결정할 수 있는 그 지혜도 필요합니다.

 

제가 아프리카 선교사로 사역할 때 세웠던 한 가지 원칙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기도 편지에 후원 계좌를 적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저에게 이렇게 하라고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순전히 제가 세운 저의 개인적인 원칙이었습니다.
근대 기독교 역사에 보면 페이스 미션이라는 원리가 있습니다.


영국의 조지 밀러와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가 사용했던 원리였습니다.
페이스 미션이란 하나님께서 정말로 원하시는 사역이라면 하나님께서 모든 재정을 그분의 방법으로 공급하신다는 그런 믿음입니다.
그래서 조지 뮬러와 허드슨 테일러는 누구에게도 후원 요청을 한 적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로 원하시는 사역이라면 굳이 사람에게 알리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모든 필요를 채우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조지 뮬러가 얼마나 놀라운 기도 응답을 경험했습니까?
일평생 동안 5만 번도 넘는 기도 응답을 경험했습니다.
60년 동안 고아원을 운영하면서 그 누구에게도 찾아가서 후원 요청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적인 방법으로 모든 사역의 필요를 채우셨습니다.

중국 선교사였던 허드슨 테일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들의 신앙에 감명을 받은 저도 선교사로 사역하면서 이 페이스 미션을 실천하고자 했습니다.
누구를 찾아가서 후원을 부탁한다든지 기도 편지에 후원 계좌를 적지 않았습니다.
저는 페이스 미션을 실천하지만 모든 선교사가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때에 따라서 선교지의 필요로 나눌 수도 있고, 후원 계좌를 적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제가 담임 목사로 사역하면서 여러분들에게 목적 헌금을 부탁드릴 때가 있습니다.
경북대 글로벌 기독센터를 위해서 4차 로잔대회를 위해서 목적 헌금을 하시면 교회에서 그것을 전달하겠다고 말씀드립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페이스 미션이 아니지만 저는 이러한 방법으로도 사역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적인 후원 방법이 딱 한 가지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은 상황에 맞는 전략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증언하는 재판받는 장면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보았던 것처럼 로마의 천부장은 바울에 대한 이 진실을 알고자 원했고, 그를 공회 앞에 세웠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이스라엘 최고의 사법기관이었습니다.
대제사장과 70명의 공회원들이 모여서 모세의 율법을 기준으로 판결을 내렸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공회에서 재판을 받으셨고, 지금 바울도 공회에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공회 앞에 선 바울이 이렇게 외쳤습니다. 

사도행전 23장 1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여러분 이 모습은 재판을 받는 죄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당당하게 공회를 주목하며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나는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겨왔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음이 순전한 사람의 당당한 모습입니다.
동기가 순전하고 욕심이 없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당당할 수 있습니다.
나는 양심을 따라서 하나님을 섬겼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말이 나에게 아무 죄가 없다는 뜻은 아니겠죠.
우리 모두는 연약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잘못할 수도 있고 죄를 지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 마음의 중심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당당할 수 있습니다.
불순한 동기를 가지고 자기 이익권을 추구하는 사람은 당당하지 못합니다.
숨겨진 어떤 의도를 가지고 사는 사람은 혹시나 그것이 드러나지 않을까 전전긍긍할 것입니다.
부정부패를 저지른 사람은 당당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너무 세상이 악해서 자기 이권을 추구하면서도 당당할 때가 있습니다.
부정부패를 행하다 걸리면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되는데, 요즘은 명백하게 걸려도 당당하게 이야기할 때가 있습니다.
너무 당당하니까 헷갈리죠. 누가 잘하고 누가 잘못한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럴 때에는 그 사람의 말을 듣지 마시고 행동을 보십시오.
순전한 동기를 가지고 교회를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헌신했는지 보십시오.
아니면 자기 이익을 위해서 권력을 사용하고 자리를 이용했는지 살펴보십시오.
그 사람의 행동에 비추어서 말을 평가하면 그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 1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아멘, 주님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악한 것을 아셨습니다.
복음에 적대적이고 주님께 적대적이고 우리를 이용하려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우리를 선동해서 자기 이권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악한 의도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악한 자들이 우리를 공격할 때 그 공격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는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주님 앞에서 순전한 마음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악한 자들의 계획을 간파할 수 있는 지혜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가 이 타락한 세상에서 주님의 뜻을 행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바울은 순전한 마음과 함께 이러한 지혜와 분별력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사실 이 말 안에는 함축된 의미가 있습니다. 

나는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라는 말 안에는 나를 재판하는 너희는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고 있느냐라는 질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도발적인 질문이지 당연히 대제사장이 그 의미를 알아차렸습니다.
매우 불쾌하게 여기고 그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다른 데도 아니고 입을 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말은 이제 바울이 한 말이 신성 모독이라는 뜻입니다.
이 명령을 내린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매우 탐욕적이고 폭력적인 인물이었습니다.
1세기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이 사람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 폭력과 암살까지 서슴지 않았다고 합니다.
얼마나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는지 성전에서 봉사하는 제사장들을 위한 십일조를 자기가 가로챘다고 합니다.
대제사장이 제사장을 잘 돌보고 챙겨주기는커녕 그들의 사례를 가로챈 것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담임 목사가 전도사님 사례를 가로챈 것과 마찬가지죠.
얼마나 악하고 이기적인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불의한 사람에게 재판받는 것을 바울은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회칠한 담, 회칠한 무덤은 예수님께서 사용하셨던 표현이었습니다.
'겉모습만 번지르르하고 마음속은 완전히 부패했다'는 뜻입니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가리켜 주님은 '위선자'라고 부르셨습니다.
위선자가 영어로 hypocrite인데요. 헬라어 휘퍼크리테스라는 단어에서 봤습니다.
이 헬라어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연기자, 배우를 뜻합니다.
당시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전문 연기자 같았습니다.
마음속은 완전히 부패했는데 겉으로만 거룩한 척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습을 너무나도 싫어하셨습니다. 

바울 역시 그렇게 회칠한 무덤과 같은 너희를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이 말은 선지자적인 선포가 되었습니다.
몇 년이 지나서 AD 66년이 되었을 때에 로마에 대항한 유대인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분노한 유대인들이 친 로마 정책을 펼쳤던 이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찾아서 살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악한 그를 심판하실 것이라는 바울의 말이 성취된 것입니다.
바울은 공회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목숨을 취할 수 있는 사람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때에 예상하지 못했던 장소에 서 있었지만 바울은 담대함과 용기를 가졌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하셨던 그 약속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0장 18절부터 20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아멘. 사람들이 너를 끌고 갈 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성령께서 알려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이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주님을 의지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눈에 보이는 상황, 눈에 보이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그 예수님의 약속을 붙잡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당시 산헤드린 공회는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종교 권력을 장악했던 사두개인이 다수파, 모세의 율법에 충실했던 바리새인이 소수파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소수파였지만 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두개인들은 현실과 타협해서 로마에 협조했습니다.
반대로 바리새인은 모세의 율법에 충실했고, 우리가 이렇게 살아갈 때 언젠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사도바울 역시 바리새파 출신이었습니다.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고, 율법의 열심으로는 누구보다 뜨거웠습니다.
당시 최고의 율법사 가말리알에게 직접 배웠던 제자였습니다.
바울은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의 신학적인 차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8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사두개인은 아주 현세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고 믿었습니다.
부활과 영생을 믿지 않으니까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게 제일 중요했겠죠.
그러니까 그들은 로마의 통치에 협조해서 당시 종교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반면에 바리새인은 부활도 믿고, 천사도 믿고 영도 믿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아주 중요한 포인트였습니다.
그리스도인도 부활을 믿고, 바리새인도 부활을 믿었기 때문이지요.
물론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고, 바리새인들은 최후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어쨌든 부활은 그리스도인과 바리새인을 연결하는 연결점 공통점과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공회에 있는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본문 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아멘. 바울이 이제 바리새인을 향해서 외쳤습니다.
내가 지금 재판을 받는 이유는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전략적인 발언이었습니다. 

이 한마디로 인해서 산헤드린 공회 전체가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은 바울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에 부활을 믿는 바리새인은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크게 떠들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하여

 

바리새인이 말하기를 이 사람 보니까 악한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부활을 믿는다는 그 말 한마디로 엄청난 지원군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이 말을 왜 했을까요? 

이 재판에서 자기 편, 아군을 얻기 위해서 전략적으로 이 말을 했을까요?
적은 아군이 될 수 있으니까 이 공회를 둘로 갈라치기 위해서 이 발언을 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기 편을 얻기 위해서 이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목적은 이 재판에서 최소한의 형량을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목적은 오직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상황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바울의 유일한 목적이었습니다.
공회의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바울은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한 것입니다.
자신과 바리새인들 사이에 공통점, common ground를 포착했습니다.
그 공통점을 매개로 해서 예수님을 증거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 공통점은 바로 부활이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부활이었습니다.

이후에 벨렉스 총독 앞에서 재판받을 때에도 바울이 자신이 믿고 있는 그 부활을 선포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 그의 일생을 다 바칠 수 있었던 그 진리는 바로 부활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4장 15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바울은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소망이었습니다.
이에 있어서는 바리새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리새인 역시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마지막 날에 모든 사람이 부활하게 될 것을 믿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공통점이었습니다. 

여러분 복음을 전할 때 중요한 것은 공통점, common ground를 찾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관심사, 그 사람의 문제 중에서 내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공통점을 중심으로 해서 그 사람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관계 중심의 전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관계 중심의 전도를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가가실 때 어떻게 하셨나요?
내가 보니까 너는 남편도 많고 죄도 참 많다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물이 있으면 물을 좀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에게 물을 연결점으로 사용해서 말씀을 시작하셨습니다.
전혀 어색하지 않게, 전혀 부담스럽지 않게, 그녀의 입장에서 다가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인격적인 분이신지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다가가실 때도 그랬습니다.
베드로에게 다가가시면서 율법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으셨습니다.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베드로를 당황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물고기를 잡았느냐라고 질문하셨습니다.
여러분 어부에게 물고기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너무 자연스러운 일이지요.
예수님은 자기 입장에서 말씀하지 않으셨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다가가셨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얼마나 인격적인 분이신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을 증거할 때 내 입장에서만 다가가면 안 됩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 내가 은혜받았던 말을 막 따발총처럼 부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상대방에게는 어떤 관심이 있는지 어떤 문제가 있는지 어떤 고민이 있는지 들어야 합니다.
충분히 들은 다음에 내가 공감할 수 있는 공통점, common ground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공통점을 연결로 해서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관계 중심의 전도입니다. 

관계 중심의 전도는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만 쏟아내지 않습니다. 

관계 중심의 전도는 쌍방향적입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그 상황에 맞는 말씀을 선포하는 거죠.
그렇게 하면 정말 딱 한마디, 딱 성경 한 구절만 전해도 능력이 나타납니다.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군인 중에 스나이퍼가 있습니다.
여러분 아무렇게나 총 쏘는 군인은 별로 무섭지 않죠?
딱 한 발을 쏘더라도 정조준해서 맞추는 스나이퍼가 무섭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그냥 마구잡이로 전하는 것보다 스나이퍼와 같이 명중시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요즘 현대인들은 참 외롭게 살아갑니다. 

가족 사이에도 부부 사이에도 대화가 없어서 어디 가서 자기 이야기를 할 데가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 마음을 이해해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상대방과의 공통점, common ground를 찾아서 복음을 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지난 금요기도회에서 제가 '제도와 운동의 차이점'을 말씀드렸습니다.


제도는 수직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고 규칙과 절차, 전통을 강조합니다.
반면에 운동은 수평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고, 비전 가운데 자발성과 역동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가 제도로 시작했을까요? 

운동으로 시작했을까요?
초대교회는 운동으로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비전, 세계 복음화라는 그 비전에 자발적으로 동의한 사람들이 참여한 것이 교회였습니다.
교회 안에 제도가 있고 교회의 제도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제도가 어떤 자발성과 역동성을 제한하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미국의 팀 켈러 목사님은 이 제도와 운동의 차이점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전에 의해서 움직이는 운동은 같은 비전을 가진 사람들과 협력할 수 있는 유연성이 있습니다.
그 비전이 세계 선교일 수도 있고, 캠퍼스 복음화일 수도 있고, 아니면 동성애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협력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교회가 동성애 반대 운동을 펼칠 때에 우리 교단하고만 같이 하지 않습니다.
다른 교단의 교회들과도 얼마든지 협력할 수 있습니다.
공통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협력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운동이 가진 강력한 힘입니다. 

물론 타협할 수 없는 신학적인 원칙도 분명히 있습니다.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를 타협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절대로 타협할 수 없습니다.
자유주의 신앙을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고,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인정하는 사람들과 함께 협력하는 것입니다.

확고한 보수주의 신학을 따르되 공동의 목표를 위해서, 비전을 위해서 연합할 수 있는 지혜와 전략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모든 사람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이고, 공동체의 사역에서도 우리는 긍정적인 변화를 원하지만 그 변화가 쉽게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은 변화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원하지 않으십니까?
솔직하게 생각해 보면 변화를 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원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나에게 어떤 좋은 변화가 있으면 좋겠는데, 또 그것을 위해서 무언가 어려운 일을 하는 것은 힘든 일이죠.
노력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예를 들어서 운동하지 않았던 사람이 운동을 시작하는 것이 어려운 일입니다.
건강을 위해서 긍정적인 변화를 꿈꾸지만 이전에 하지 않았던 운동을 시작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또 다른 예로 전도를 하지 않았던 사람이 이번에 전도를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번 행복 나눔 잔치에 반드시 태신자를 데려오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위해서 긍정적인 변화를 꿈꾸지만 실제로 전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꿈꾸는 이상과 지금의 현실 사이에는 괴리감이 있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대부분의 실망감, 좌절감은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서 나옵니다.
그러한 괴리감, 그러한 실망감을 느낄 때에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계적인 리더십의 대가 존 맥스웰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전략적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우리는 전략적 사고를 해야 하는 것이지, 현실적으로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판단해야 합니다.
그를 위해서는 지금의 내 위치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먼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바꿀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 너무 고민할 필요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태어난 국가, 내가 태어난 가정은 바꿀 수 없습니다.
나의 신체적인 특징, 타고난 어떤 강점과 달란트도 좀처럼 바뀌지 않습니다.
바꿀 수 없는 것을 가지고 고민하고 원망하는 것 지혜롭지 않습니다.
바꿀 수 없는 것은 빨리 받아들이고 바꿀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해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인생에 대한 해석입니다. 

인생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해석입니다.
내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공회 앞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 과정을 다 지켜본 로마의 천부장은 바울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울에게 무죄를 선고하지는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 역시 바울을 옹호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예수님을 바로 믿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현실적으로 말해서 바울에게는 바뀐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바울은 여전히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안갯 속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헤매고 있었는데,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건의 의미였습니다.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게 맞는지, 주님의 뜻을 행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 확인이 필요했습니다.
바로 그날 밤에 주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1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아멘. 주님께서 바울을 격려하시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래 예루살렘 공회 앞에서 나를 잘 증거했다. 

예루살렘에서 한 것처럼 앞으로 로마에 가서도 나를 증거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울에게 확신을 주었습니다. 무슨 확신입니까?
방향에 대한 확신입니다. 

그래 내가 지금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구나.
바울이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우리가 방향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현실적인 문제가 너무 크게 다가오니까 이상을 잃어버리는 거죠.
여러분 그때가 문제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그 현실적인 문제 안에 매몰될 때가 가장 큰 문제입니다.
교회는 여러분이 현실적인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곳은 아닙니다.
미국의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교회는 그러니까 여러분의 현실적인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곳이 아니란 말이죠.
여러분이 건강하고 행복하고 돈 잘 벌 수 있게 해주는 것이 교회의 첫 번째 사명은 아닙니다.
교회의 첫 번째 사명은 여러분의 이상을 일깨워서 눈에 보이는 현실에 매몰되지 말고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게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인간에게만 꿈꿀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다른 동물들은 꿈을 꿀 수가 없습니다. 

동물들은 본능을 따라 살아가는데 당장 먹을 것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오직 인간만이 꿈을 꿀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꿈꾸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만 주신 그 능력을, 특별한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미국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연설이 있습니다. 

잘 아시는 마틴 루터킹 목사님의 I have a dream 이라는 연설입니다.
이 연설에는 너무나도 생생한 비전과 꿈이 담겨 있습니다.
루터킹 목사님이 꿈꾸는 그 미국의 모습이 너무나도 잘 담겨져 있습니다.


루터 킹 목사님은 아주 생생한 비전을 선포했습니다.
타고난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받는 그 나라에 대한 꿈을 제시했습니다.
여러분이 이 연설을 한 때가 1963년도였습니다.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을 선언했던 것이 정확히 100년 전이었습니다.
1863년 노예 해방이 선언되었지만 100년 동안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법적으로는 노예 해방이 되었지만 사람들의 인식은 바뀌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마틴 루터킹 목사님의 연설로 인해서 미국인들의 인식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미국이 나아가야 하는 방향이 이거구나.

우리가 꿈꾸는 이상과 비전이 이것이구나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9년도에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루터킹 목사님의 꿈이 실현되는 데에도 사실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무려 46년이나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여러분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이렇게 큰 갭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씩 하나씩 전략적인 선택을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나아갈 때 마침내 미국은 서방 국가 중에서 최초로 흑인 대통령이 탄생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유럽 어느 나라에서도 흑인 대통령이 탄생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악한 자들이 우리를 공격할 때에 그 공격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는 판단력이 필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전략적인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의 내 자리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그 비전을 따라서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구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앞에 수많은 현실적인 문제가 있지만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비전을 바라보면서 믿음으로 한 걸음씩 전진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Y_PFyjT9gj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