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25 (주일설교)
성경: 사도행전 20:17-28
17.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18.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19.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20.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22.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5.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26.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27.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여러분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어떤 말을 남기기 원하십니까?
아직 살아갈 날이 많은데 왜 굳이 그런 생각을 하냐고 반문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유언을 남길지 지금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유언의 무게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혹시 여러분의 부모님 혹은 조부모님의 유언을 기억하십니까?
꼭 부모님이 아니더라도 여러분에게 너무나 감동이 되었던 유언이 있습니까?
어떤 사람의 마지막 말이 큰 도전이 되어서 그것을 마음에 깊이 간직하는 경우가 있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그런 경우가 흔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의 마지막 말이 아주 감동적이고 도전이 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사람의 유언과 그 사람의 삶이 일치하는 경우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평생에 거짓말을 많이 했습니다.
가족에게도 거짓말을 하고 친구들에게도 불리하면 거짓말을 했습니다.
여러 가지로 제적인 피해도 끼쳐서 아무도 그를 믿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자녀에게 유언을 남기는 것입니다.
'너는 나처럼 살지 말고 정직하게 살아라'라는 유언을 남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에 힘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정작 본인은 그렇게 살지 못했으면서 정직하게 살아라라고 유언을 남기면 그 말에 권위가 없습니다.
후회가 섞인 마지막 말에는 감동도 없고 힘도 없습니다.
그런 말을 오랫동안 기억하는 경우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유언을 남길지 지금부터 고민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남기기 원하는 그 유언을 위해서 평생 그것을 실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야지 그 말에 힘이 있고 권위가 있습니다.
나의 삶과 일치하지 않는 유언에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영국에서 존경받는 위인 중에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있습니다.
역대 영국 국왕 중에서 가장 학식 있고 유능한 왕으로 평가를 받고 있고, 영국이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데 아주 중요한 공헌을 했습니다.
카톨릭과 개신교로 분열되어 있던 나라를 하나로 통합시킨 훌륭한 인물이었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여왕이었지만 인생을 마감하면서 이러한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아주 짧은 한순간을 위한 것이었어'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아주 훌륭한 삶을 살았지만 그녀의 마지막 말은 그녀의 삶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녀가 죽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항상 현실적인 일에만 몰두했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 살아가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죽음 앞에 서게 되면 아마 깊은 허무함을 느낄 것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결국 짧은 한순간을 위한 것이었구나라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인생을 지혜롭게 마감하는 방식이 아닙니다.성경은 우리에게 인생의 마지막을 기억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오 그 이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바울의 고별 설교를 통해서 인생의 마지막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의 마지막 고별 설교입니다.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청해서 그들에게 마지막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바울은 에베소에 2년 3개월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의 사역에서 가장 오랜 기간 동안 머물렀던 교회가 에베소 교회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교회를 향한 특별한 애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에베소의 장로들을 청해서 당부를 했습니다.
바울의 고별 설교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과거를 회상하면서 어떤 마음으로 에베소에서 사역을 했는지 고백하고 있습니다.
겸손과 눈물로 섬기고 시험을 참고 견디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바울은 미래를 바라보며 다가올 고난과 시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어떤 고난이 닥칠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나의 모든 것을 다 바칠 각오가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하나님께서 맡기신 그 양떼들을 부탁한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본을 따라서 더러운 이익을 위해 살지 말고 오직 양떼들의 유익을 구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설교는 사도행전 전체에서 사도바울이 믿는 성도들에게 했던 유일한 설교였습니다.
다른 모든 설교는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한 복음 전도였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도 그랬고, 아테네에서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오늘 이 본문 말씀은 바울이 믿는 자들 성도들에게 했던 설교였습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그와 함께 동역했던 이들에게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아멘.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과 송별하면서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다시는 이 땅에서 그들을 만나지 못할 것을 알았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면 큰 고난을 당할 것이고 목숨을 잃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죽음을 앞둔 심정으로 마지막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죽음을 염두에 두며 살고 계십니까?
아니면 죽음은 먼 훗날의 일이라고 생각하시면서 나와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지금 당장 먹고 살 걱정도 많은데 죽음에 대해서 생각할 겨를이 없는 것이지요.
아주 먼 훗날의 이야기처럼 생각하며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큰 사고가 나거나 아니면 어떤 질병에 걸릴 때가 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에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면 우리는 당혹하게 되고 또한 절망하게 됩니다.
아니 그동안 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살았나라는 그 질문을 그제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토록 추구했던 것들, 내가 그토록 원했던 것들이 이 죽음 앞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요즘 청년들이 자주 하는 표현 중에 인생 2회차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린이가 어린이답지 않게 행동할 때 사용하는 말이죠.
마치 인생을 다 살아본 사람이 다시 아이로 돌아간 것처럼 살아간다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그 말 안에는 일종의 후회스러운 감정이 섞여 있습니다.
내가 젊었을 때 학생 때 열심히 살았던 것을 살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면서 나에게도 인생 2회 차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그런 감정이 섞여 있습니다.
여러분 어떠십니까?
여러분에게도 인생 2회차가 있으면 좋겠습니까?
만약에 다시 한 번 인생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지금보다 확실히 더 잘 살 것이라는 자신이 있으십니까?
솔직히 말하면 어려운 질문입니다.
딱 한 번뿐인 인생, 어떻게 해야지 우리가 잘 살아갈 수 있을까요?
바울은 그의 고별 설교에서 힌트를 주고 있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을 항상 염두에 두며 인생을 살아갔습니다.
자신의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죽음 이후에도 가치 있는 일을 위해서 살아갔습니다.
사실 인생의 마지막을 앞둔 바울의 심정을 가장 잘 표현한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7절 8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아멘. 바울이 마지막까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원동력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공의로우신 재판장 하나님을 기억하는 믿음이었습니다.
바울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사모하는 믿음으로 그에게 주어진 경주를 완주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의 신학자 스테니 하워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마지막을 어떻게 보는지가 옳고 그름의 기준 윤리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끝이라고 믿으면 그냥 이 세상을 즐기다가 가면 됩니다.
하지만 영원한 세상에 있고 마지막 순간에 재판장 되신 하나님을 만난다고 믿으면 눈에 보이는 것을 위해서 살아가지 않게 됩니다.
여러분 성경의 윤리 기준과 세상의 윤리 기준은 완전히 다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생각하는 종말과 세상이 바라보는 종말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언제나 종말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모습인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지금 우리에게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됩니다.
예수님 말씀 중에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심지어 불신자들도 좋아하는 구절이 있는데 마태복음 25장 40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라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입니까?
우리 주변에 작고 소외된 자들에게 한 것이 곧 예수님에게 한 것이라니 얼마나 감동이 됩니까?
여러분 이 말씀 한 구절만으로도 우리가 구제에 힘써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그런데 이 구절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 구절이 어떠한 문맥에서 주어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구절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문맥에서 주어졌습니다.
이 구절이 포함된 그 단락이 시작되는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태복음 25장 31절 32절 함께 읽겠습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예수님께 한 것이라는 그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을 믿을 때에만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유주의 신학을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육체적 재림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작고 소외된 자들을 향한 이 실천 이 긍휼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취사 선택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재림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자꾸 소외된 자를 돌보라는 이 말씀만 내가 선택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작은 자들을 섬기면서도 낙담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재림을 믿기 때문입니다.
공의로운 재판장께서 오셔서 우리의 모든 수고와 섬김을 다 기억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마지막을 어떻게 보는지가 지금 우리에게 옳고 그름의 기준, 윤리의 기준을 제공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의 마지막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공의로우신 재판장 앞에 설 날을 기억하며 살고 계십니까?
아니하면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그 이익을 추구하며 오늘만을 위해서 살아가고 계십니까?
바울은 고별 설교에서 자신의 마지막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을 기억하며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바울과 같이 인생의 마지막 날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은 고별 설교를 하면서 에베소교회 장로들에게 특별한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그 양떼들을 사랑으로 돌보고 지키라는 당부입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이 구절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내려진 그 명령은 '삼가라'라는 단어입니다.
'삼가라'라는 말이 사실 한글로 잘 마음에 와닿지 않는데 영어로 보니까
keep watch, be on guard 라고 되어 있습니다.
keep watch는 밤새 지켜보는 것이고,
be on guard는 경계 근무를 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간병인이 환자를 밤새 지켜보는 것처럼 군인이 경계 근무를 서는 것처럼 양들을 지키고 돌보라는 당부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 중직들과 리더들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교회 리더들이 감당해야 하는 아주 중요한 일은 우리 가운데 있는 연약한 자들을 돌보고 지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진리 가운데 거할 수 있도록 돌보는 것이 바로 리더들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여러분 이 일은 담임 목사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물론 제가 최선을 다해서 주일 설교를 준비하지만 주일 설교 한편으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의 복잡한 문제를 만날 때 먼저 된 자들이 특별히 중직들이 교회를 돌보고 지켜야 합니다.
교회 일은 목사님이 다 알아서 할 거야라는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한두 사람에 의해서 교회가 좌지우지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성숙한 리더들, 헌신된 리더들이 한 팀이 되어서 교회를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학기 우리 교회 LMTC 선교 훈련을 받았던 제 아내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 교회 LMTC 훈련에서 소그룹 토론을 했다고 합니다.
강사로 오신 분께서 토론 주제를 주셨는데 그 주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두 가지는 무엇인가?라는 주제였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각 그룹별로 돌아가면서 발표를 했다고 합니다.
그중에 청년부 소그룹에서 이렇게 발표를 했습니다.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장로님이 필요하고 둘째로 국수가 필요합니다'라고 답을 했다고 합니다.
약간 웃기기도 하지만 얼마나 귀한 고백입니까?
다른 그룹도 아니고 청년부 그룹에서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 장로님이 꼭 필요하다는 그 말이 저에게 너무나 인상적이었습니다.
여러분 전통적인 교회를 생각하면 청년들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하고 싶어 하고 장로님들은 그것을 잘 허락하지 않는 모습이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 청년들이 말하기를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선 장로님이 꼭 필요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발표를 들은 강사분이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내가 수십 년 선교 강의를 했는데 이런 답은 처음 들어봤다고 합니다.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 장로님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교회 본 적이 없다고 하는데, 저는 이 모습이야말로 우리 교회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는 한 사람의 카리스마, 한 사람의 리더십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비전을 제시하면 나머지가 따라가는 그런 수직적인 구조가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담임 목사와 장로님들이 한 팀을 이루어서 사역을 섬기고 있습니다.
장로님들께서 당회에서 발언하실 때 개인 자격으로 개인의 의견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장로님들은 성도들을 대표해서 성도들의 유익과 성장을 위해서 말씀하시고 헌신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팀 리더십입니다.
이것이 바로 장로 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이 장로교회를 세우면서 가졌던 성경적인 원리가 있습니다.
말씀을 증거하는 목사와 목양을 맡은 장로 집사가 한 팀을 이루는 것입니다.
다양한 은사와 강점을 가진 사람들이 한 팀을 이루어서 사역할 때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아름다운 협력이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비단 장로님들께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를 섬기는 모든 직분자들에게 동일하게 해당됩니다.
각 위원회에서 각 부서에서 섬기는 모든 분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께서 각자에게 주어진 그 직분과 사명에 충성하기 때문에 우리 교회 전체가 아름답게 성장하는 줄로 믿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서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구 지역을 변화시키고 한국교회를 섬기는 그 일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안식월로 출타 중일 때 분당 우리 교회 이찬수 목사님께서 우리 교회에 오셔서 설교를 해 주셨습니다.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목사님께서 주일날 본인 교회를 비우시고 우리 교회에 와서 설교를 해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목사님께서 우리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시고 난 이후에 저에게 따로 연락을 주셨습니다.
대구동신교회에 와서 여러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니까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얼마나 귀하게 사용하시는지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앞으로 한국교회를 위해서 더욱더 긴밀하게 협력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시대가 변했습니다.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한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것을 일깨워준 것이 바로 코로나였습니다.
코로나라는 큰 위기는 어느 한 교회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한 교단이 감당할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연합해야 한다는 것을 코로나가 우리에게 일깨워 주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는 자들은 복음을 위해서 하나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어떤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서 모이면 그런 연합은 금방 깨집니다.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마음으로 모일 때 그때 강력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작년 7월달에 로잔 대회를 1년 앞두고 우리가 송도 컨벤시아에 모여서 714 기도대성회를 열었습니다.
아마 그 자리에 오셨던 분들은 다 느끼셨을 것입니다.
순전한 마음으로 오직 기도하고 오직 말씀을 나누는 그 시간이 얼마나 특별한 시간이었는지 느끼셨을 것입니다.
정치인들이 와서 인사하고 축사하고 정치인들이 박수치는 그런 일 없었습니다.
오직 복음을 위해서, 오직 선교를 위해서 연합하는 운동이 바로 로잔대회입니다.
그런 로잔대회를 섬기기 위해서 또한 이찬수 목사님께서 제안하신 꿈너머 꿈 프로젝트를 섬기기 위해서는 우리가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 되어야 합니다.
또한 이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우리 교회가 먼저 든든히 서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휘청거리면서 우리가 대구 지역을 논하고 한국교회를 논하는 것 말도 되지 않습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 교회가 든든히 세워질 때 대구 지역과 한국교회를 위해서 기쁨으로 헌신할 줄 믿습니다.
이를 위해서 모든 우리 교회 중직자들, 또 모든 직분자들의 헌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교회는 목사 한 사람이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모든 직분자들이 함께 지켜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그 양떼들을 섬기기 위해서, 그들을 말씀 가운데 잘 양육하기 위해서 모든 직분자들이 함께 헌신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에베소 장로들을 향한 사도바울의 마지막 권면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지키라는 그 사명을 주었습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교회를 지킬 수 있을까요?
본문 32절에 나와 있습니다.함께 읽겠습니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아멘. 여러분 우리가 물리적인 힘으로 교회를 지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돈의 힘으로 교회를 지키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회를 지킵니다.
그 말씀이 우리를 든든하게 세우고 또한 우리를 거룩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이 경고하는 사나운 일리가 나오는데 그것은 거짓 교사를 뜻합니다.
초대교회에 보면 여러 종류의 거짓 교사들이 나타나서 교회를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말, 자기 철학을 앞세웠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유혹했습니다.
여러분 지금도 거짓 교사가 있고 참된 교사가 있습니다.
이 둘을 잘 분별하셔야 됩니다.
유튜브에 가면 온갖 설교들이 많이 있는데 그중에는 신학적으로 위험한 설교도 있습니다.
신사도 운동과 같이 마지막 때를 강조하면서 마치 자기가 특별한 은사를 받은 선지자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 정말로 조심해야 합니다.
거짓 교사와 참된 교사를 구별하는 그 기준은 사실 아주 간단합니다.
예수님을 증거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증거하는 사람은 참된 교사입니다.
반대로 자신을 내세우고 자기의 철학을 증거하는 사람은 거짓 교사입니다.
이렇게 기준이 분명한데도 우리가 헷갈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뭔가 화려한 언변술, 뭔가 확신 있게 말하는 그런 스타일에 이끌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확신, 화려한 언변술에 여러분 넘어가지 마십시오.
차라리 눈을 감고 그 말을 잘 들어보십시오.
지금 이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예수님을 따르자고 말하고 있는지 아니면 자기 말을 증거하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하고 있는지 분별하면 되는 것입니다.
진짜 교사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말씀의 종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모든 직분자들이 말씀의 종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자기 생각, 자기 철학대로 사역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역을 섬깁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에서 절대로 공존할 수 없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좋은 것과 고집이 센 것입니다.
여러분 이 두 가지는 공존할 수 없습니다.
가끔 보면 교회에서 아주 믿음이 좋으신데 고집이 센 경우가 있죠.
근데 그런 경우가 있다면 그 사람의 믿음이 정말로 좋은 믿음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정말로 믿음이 좋은 사람은 열심히 맞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께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이 그 사람이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절대로 고집이 세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좋은 것과 고집이 센 것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실제로 행동은 하지 않으면서 말만 번지르르게 하는 것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2절 3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아멘.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들을 섬기기 위해서 우리는 주장하는 자세를 내려놓고 양 무리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우리의 말만 듣는 것이 아니라 실제 우리의 삶을 지켜보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국가대표 축구 선수 중에 '우스만 덴벨레라는 선수가 있습니다.
그 선수의 부모는 서아프리카 말리와 모리타니아 출신입니다.
유럽에 이민을 온 거죠. 유럽에 살고 있는 아프리카 이주자들이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 모릅니다.
의사나 교수 같은 전문직이 아닌 이상 유럽에서 생활하는 것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그 선수가 어렸을 때 부모님께서 얼마나 고생하시며 사는지 다 지켜보았다고 합니다.
아프리카 사람이니까 유럽이 얼마나 춥겠어요?
그 추운 겨울에도 밖에 나가서 열심히 일하시면서 가족을 부양하시는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부모님의 근면 성실함이 그 자녀에게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덴벨레는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최선을 다하기로 했습니다.
그에게는 축구가 그런 일이었습니다. 파리에서 100km 떨어진 에브레라는 소도시에서 자란 그는 죽기 살기로 운동을 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만 19세의 나이로 프랑스 국가대표팀에 뽑히게 되었습니다.
한 인터뷰에서 말하기를 그에게 가장 큰 동기부여는 부모님의 성실함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가르침은 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장하는 자세를 내려놓고 양무리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행동은 하지 않으면서 말로만 가르치는 것에는 아무런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믿은 여러분들에게 중요한 책임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지키는 일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진리 안에 거할 수 있도록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지키는 일에 힘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아주 유명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전도에 대한 훈련을 받아보신 분이라면 다 알고 있는 아주 유명한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아멘,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위해서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아끼지 않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실 누구든지 이런 말 할 수 있습니다.
저도 이런 고백할 수 있고 여러분도 이런 고백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러한 고백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가장 가까이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다 알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이런 말하는 건 쉬운 일 아닙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경주를 끝까지 완주한 사람입니다.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쳤던 사람만이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 벤자민 프랭클리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진정한 리더는 무책임한 말을 난발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걸 하겠다.
이것도 하겠다라는 말로 현혹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리더는 자기 약속을 이행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말에 책임을 지며 주어진 경주를 끝까지 완주하는 사람이 진정한 리더라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진정한 리더였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그 경주를 끝까지 완주했습니다.
인생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용기와 자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빌립보서 4장 9절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아멘, 여러분 누군가에게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동안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다 봤지 그대로 하면 된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정말로 아름다운 인생을 산 사람입니다.
얼마 전에 제가 아주 감동적인 영화 문구 하나를 보았습니다.
직역하면 유산을 살고 유산을 남겨라라는 뜻입니다.
legacy 하면 정신적인 유산을 뜻합니다.
사랑, 정직, 겸손, 희생, 인생을 살아가는 중요한 태도를 우리가 영어로 legacy 라고 하는데,
legacy 를 남기기 원한다면 그러한 legacy 를 먼저 살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기도라는 유산을 남기길 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 자녀가 기도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부모가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도라는 유산을 남기기 위해서는 우리가 기도하는 삶을 먼저 살아가야 합니다.
일평생 신실하게 기도하는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자녀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새벽에도 기도하고 저녁에도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유언을 남기면 됩니다.
엄마가 어떻게 기도하는지 잘 봤지 너도 기도하는 삶을 살아라.
여러분 부모님께서 어떻게 기도하는지 본 자녀는 이 마지막 유언을 평생 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부모님의 삶과 부모님의 유언이 일치할 때 그 말에는 능력이 있고 권위가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 시작할 때 드렸던 질문을 다시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어떤 유언을 남기기 원하십니까?
이 질문을 다르게 표현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그 유언을 남기기 위해서 지금부터 어떻게 살아가시겠습니까?
자녀는 부모의 등을 보고 자라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는지 자녀가 다 보고 있다는 거죠.
부모의 좋은 면도 보고 배우지만 부모의 나쁜 면도 보고 배울 수 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평생 잊을 수 없는 한마디를 남기셨던 분이 계십니다.
바로 우리 교회 원로 목사님이신 권성수 목사님이십니다.
권 목사님께서 총신대 교수로 14년, 동신교회 담임 목사로 22년을 사역하셨습니다.
한국에서 존경받는 신학자이자 목회자로 은퇴하시면서 저에게 후임인 저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목사님
'목회하다 보면 여러 가지 위기가 찾아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기보다 훨씬 더 큽니다. 그러니까 위기 앞에서 낙담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라는 말을 남기셨습니다.
권성수 목사님의 이 한마디가 제 마음 깊은 곳에 박혔습니다.
여러분 제가 리더십에 대한 책 수십 권을 읽었지만 그 어떤 책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감동과 도전을 받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신 분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셨던 분, 실제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셨던 분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말에는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그 한마디가 제 마음 깊은 곳에 지금까지 박혀 있습니다.
어떤 위기가 다가와도 그 위기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웬만한 위기 앞에서 낙담하지 않고 하나님을 더욱더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제 마음 가운데 한 가지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도 나중에 은퇴할 때 내 후임자에게 이런 말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이 세상에 남기고 싶은 그 한마디 말을 위해서 지금부터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우리가 언제 태어날지 선택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태어날지 선택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갈지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어떠한 유언을 남길 것인지, 어떠한 legacy 를 남길 것인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을 떠날 때 어떤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기 원하십니까?
그 마지막 말이 자녀들의 마음 깊은 곳에 새겨지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지금부터 그것을 실천하며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인생에 마지막 날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그 앞에서 후회스럽지 않은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까지 신실하게 우리에게 주어진 경주를 완주하여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후손들에게 큰 도전을 주는 존귀한 인생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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