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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대원목사 설교

알고 있다는 착각

by 마이코 2024. 8. 20.

사도행전 19:1-10 | 문대원 목사

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3.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4.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5.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8.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9.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10.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국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크안이 했던 말입니다.
어떤 현상의 원인을 알게 되면 그 결과를 바르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원인과 결과를 파악하게 되면 자연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주장입니다.
자연과학의 발달과 함께 과학혁명이 일어났던 17세기에 아주 중요한 사상이었습니다.
비단 17세기뿐만 아니라 지금 21세기에도 이 주장은 타당한 주장입니다.
정보화 사회에서 고급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엄청난 힘이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그런 고급 정보를 가지고 있으면 다양한 방법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정치적으로 활용할 수도 있고 아니면 경제적으로 활용해서 이득을 취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은 맞는 말인데 한 가지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어설프게 아는 것은 힘이 아니다'라는 사실입니다.
알긴 아는데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라 어설프게 아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한 지식은 결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영어 속담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약간의 지식은 위험한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낫지, 조금 알고 있는 것이 위험할 수도 있다 하는 것이죠.
마치 내가 잘 안다고 착각하면서 전문가의 의견을 듣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요즘은 유튜브에 의학 전문 채널이 많이 있습니다.
건강에 관심이 많은 분들은 그러한 채널을 많이 보실 것입니다.
어떤 분이 하루에 3시간씩 의학 전문 채널을 본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러면 아무래도 일반인보다는 더 많은 의학 지식을 갖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의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의사가 되기 위한 훈련은 그와 비교할 수 없이 길고 더 어렵습니다.
유튜브에서 본 것을 가지고 진짜 의사하고 논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비상적으로 아는 것 이것이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번에 미국을 다녀와서 한국의 위상이 한 단계 더 높아진 것을 느꼈습니다.
이제는 미국의 어떤 슈퍼마켓에 가도 한국 라면을 판매합니다.
LA나 뉴욕처럼 한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만이 아니라 주로 백인들이 사는 외곽 지역에 가도 한국 라면을 판매합니다.
미국 넷플릭스 사이트에 가도 한국 드라마가 정말로 인기가 있습니다.
k 드라마 섹션을 넷플릭스 전면에 내세우고 있습니다.
한국 문화가 아주 근사하고 힙한 것으로 소개되고 있는 것이죠.
그러면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한국 라면을 먹고 한국 드라마를 보면 한국을 잘 아는 것일까요?
한국 드라마에 묘사된 그 모습이 한국 사회 전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드라마는 어디까지나 드라마일 뿐입니다.
진짜 한국 사회를 알고 싶으면 한국에 와서 한국 사람들을 만나고 부대끼면서 살아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한국 음식 먹고 한국 드라마를 본다고 한국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무언가를 어설프게 아는 것이 진정한 이해에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현실생활에도 해당되고 신앙생활에도 해당됩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데 피상적으로 알고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신앙을 갖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은 피상적인 지식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가서 복음을 증거하는 모습입니다.
아시아와 유럽의 여러 도시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던 바울이 한 도시에 오랫동안 머물렀던 적이 딱 두 번 있었습니다.
한 번은 고린도였고 또 한 번은 에베소였습니다. 

고린도에서는 1년 6개월 동안 머물렀고 에베소에서는 2년 3개월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래서 이 두 도시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오랜 기간 동안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9장 1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바울이 에베소에 도착해서 어떤 제자들을 만났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언뜻 생각하면 제자 하면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도행전에서 제자 하면 예수님의 제자, 그리스도인을 지칭하는 말이 맞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냥 제자라고 하지 않았고 어떤 제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헬라어 원어를 아주 정확하게 번역한 것입니다.
헬라어로 제자를 마테테스라고 하는데, 그 앞에 정관사가 있으면 예수님의 제자를 뜻합니다.
영어로 the disciple 하면 예수님의 제자를 뜻합니다.
근데 오늘 말씀에 나온 그 제자 앞에는 정관사가 없습니다.
정관사가 없다는 말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 어느 누군가 다른 사람의 제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한글 성경은 어떤 제자라고 번역했는데 이것은 아주 정확한 번역입니다.

 

신약시대에 예수님께만 제자들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에게도 제자가 있었고, 바리새인에게도 제자가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5장 33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아멘. 여기 보니까 요한의 제자도 나오고, 바리새인의 제자 예수님의 제자도 나옵니다.
모두 동일한 단어, 마테테스라는 단어로 표현되어 있는데, 그 단어 앞에 정관사가 있으면 예수님의 제자이고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제자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제자 앞에는 정관사가 없었으니깐 이들은 다른 누군가의 제자입니다.
그들과 대화하던 바울은 무언가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들에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2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이 성령을 받았습니까? 질문하니까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는 성령이 계심을 듣지도 못했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음 바울이 한 번 더 질문했습니다.
3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드디어 이 사람들의 정체가 드러났습니다.
이들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요한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유다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나는 메시아가 오실 길을 예비하는 광야에 외치는 소리이다'라고 선포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자기가 메시아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시는 그 메시아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요한의 세례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그 예수님의 세례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은 요한이 선포한 그 메시아를 믿는 것이 아니라 세례 요한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나는 요한이 주는 세례를 받았다라고 답했습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그러니까 이들은 아직 그리스도인들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제가 첫 번째 대지의 제목을 자주 오해되는 본문이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9장 말씀은 성령 세례를 강조하는 오순절 교단에서 특별하게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오순절 교단은 성령의 역사를 강조합니다.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능력 있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성령의 역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령에 대해서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오순절 교단에서는 오늘 본문을 근거로 해서 물 세례와 구별되는 성령 세례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에베소에 있던 제자들은 요한의 세례 물세례를 받았지만 아직 성경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바울이 와서 안수해 주니까 성령 세례를 받았다. 그러므로 여러분 중에 예수님 믿지만 아직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바울과 같이 영적으로 능력 있는 사람이 안수해야지 그때 성령 세례를 받습니다' 라고 가르칩니다.


여러분 혹시 이런 식의 설교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청년 시절에 이런 식의 설교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신학 공부를 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그런가 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한 이후에 이것이 잘못된 해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에 있던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세례요한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그 메시지의 핵심인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그들은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으니까 성령을 받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근거로 해서 물 세례와 성령 세례를 구분하는 것은 잘못되었습니다.

제가 오순절 교단 신학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들 역시 주님을 사랑하고 전도에 힘쓰고 기도에 힘쓰는 좋은 분들입니다.
다만 오늘 본문 사도행전 19장을 근거로 해서 물세례와 성경 세례를 구분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이것은 저의 개인적인 견해가 아닙니다. 

제가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사도행전에 대해서 가장 권위가 있는 미국과 영국의 주석 10권을 다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10권 모두가 말하기를 사도행전 19장을 근거로 해서 물세례와 성경 세례를 구분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왜냐하면 에베소에 있던 그 제자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요한의 세례, 즉 회개의 세례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아직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계심을 듣지도 못했다라고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이 말은 아주 무지한 말입니다. 

구약 성경만 제대로 읽었어도 성령에 대한 말씀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를 들어서 이사야 61장 1절에 보면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임하셨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엘 2장 28절에 보면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겠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그 말세의 메시아께서 오시면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요엘이 예언했던 이 말씀 곧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서 이것은 성취되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에 있던 이 요한의 제자들은 성령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아직 진정한 신앙을 가지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그 작은 지식 안에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이 사실을 캐치했습니다.
요한이 주었던 회개의 세례는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은혜는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그 예수님을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본문 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바울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따르는 요한은 자신을 메시아라고 한 적이 없다.
내 뒤에 오시는 그 메시아를 믿으라고 했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다라고 선포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례 요한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우리 인간들 중에서 예수님에 대한 가장 온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요한이었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메시아가 아님을 겸손하게 인정했던 사람이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 대해서 말하기를 여자가 낳은 이 중에서 이보다 더 큰 자가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 이 정도의 칭찬을 받은 사람은 요한밖에 없습니다.
그가 전했던 그 메시지의 핵심은 마태복음 3장 11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아멘, 세례요한의 사역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전심으로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생각했습니다.
혹시 이 사람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가 아닐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생각에 대한 반응이 바로 마태복음 3장 11절 말씀입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내 뒤에 오실 분은 나보다 능력이 더 많으시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께서 세례 요한을 따르는 제자였다면 어떻게 반응해야 했을까요?
요한이 주는 그 세례에 만족하고 요한을 믿고 따라가야 했을까요?
아니면 요한이 예언했던 그가 증거했던 진짜 메시아를 기다려야 했을까요?
당연히 요한이 증거했던 그 메시아를 기다렸어야 합니다.
진정한 요한의 제자라면 요한을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요한이 증거했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찾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에베소에 있던 요한의 제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요한이 증거했던 그리스도를 믿은 것이 아니라 요한을 믿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분명히 요한은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성령에 대해서 들어본 적도 없다라고 답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들은 제대로 된 요한의 제자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요한이 성령을 얼마나 강조했는데 자칭 요한의 제자라고 하면서 성령에 대해서 들어본 적도 없다고 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믿음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얄팍한 것인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견지망월(見指忘月)이라는 사자성어를 아시지요? 

어느 날 밤에 달이 환하게 떴습니다.
달이 너무너무 아름다워서 옆에 있는 사람에게 달을 좀 보라고 손가락으로 가리켰습니다.
근데 옆사람이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고 있습니다.
답답해진 사람이 손가락 보지 말고 달을 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진짜 중요한 본질을 놓치고 비본질을 바라보는 것 답답한 일입니다.

 

여러분 세례 요한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입니다.
진짜 달은 요한이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손가락을 보아야 합니까? 달을 보아야 합니까? 당연히 달을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에베소에 있던 그 제자들은 달을 보지 않고 달을 가리키는 그 손가락만 보았습니다.
그들은 요한의 제자인 것을 스스로 자랑스러워했지만, 정작 요한이 가리켰던 그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오시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겠다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그들은 성령에 대해서 들어본 적도 없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과연 에베소에 있던 그 제자들만의 문제였을까요?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러한 문제가 없을까요? 

 

미국 브라운 대학의 교수 스티브 슬로먼는 '지식의 착각'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우리가 얼마나 무지한지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진짜 문제는 우리의 무지가 아니라 우리가 무지하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언가 친숙한 그 느낌을 진짜 지식으로 착각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많은 사람들은 차량 내비게이션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것이 어떠한 원리로 작동하는지 잘 모릅니다.
여러분 혹시 내비게이션의 원리를 수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으십니까?
내비게이션이 작동하기 위해서 몇 개의 위성이 필요한지 알고 계십니까?
작동 원리 잘 모르지만 우리는 매일 내비게이션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친숙하게 느끼죠.

마치 그러한 친숙한 느낌, 직관적인 느낌을 진짜 지식으로 착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잘 모르면서 내가 친숙하니까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입니다.
솔로몬 교수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복잡한지, 인생이 얼마나 복잡한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것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우리는 멀쩡하게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왜 우리는 이 세상의 복잡성에 압도당하지 않을까요?
사실은 잘 모르면서 다 아는 것처럼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복잡성을 무시하고 거짓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작은 지식 안에 갇혀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에베소에 있던 제자들의 문제였습니다.
또한 이것은 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무한하신 하나님, 그 광대하신 하나님을 내가 경험해서 알고 있는 그 작은 틀 안에 가두려고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통치하신 하나님은 그 어떤 틀 안에 가둘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스데반 집사의 설교의 핵심이었습니다.
또한 사도바울의 아테네 설교의 핵심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24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우주와 만물을 지으신 그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그 어떤 것으로도 가둘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만든 건물, 우리가 만든 전통, 우리가 만든 교단 안에 하나님을 가둘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겸손하게 그분의 뜻에 순종할 뿐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던 그 사람들에 의해서 복음은 힘있게 증거되어 왔습니다.

 

이번에 미국을 방문했을 때 죠지 휘필드의 무덤이 있는 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권성숙 원로 목사님께서도 예전에 휘필드에 대한 말씀을 여러 차례 하셨습니다.
조지 휘필드는 조나단 에드워즈, 존 웨슬리와 함께 사역했던 18세기 최고의 부흥사였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와 존 웨슬리는 같은 해 1703년도에 태어났습니다.
한 사람은 미국에서, 또 한 사람은 영국에서 복음주의 부흥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복음주의 신앙이 제대로 확립될 수 있었습니다.
복음주의는 한마디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강조하는 신앙입니다.
그 이전에는 종교개혁자들이 올바른 교리를 강조했습니다.
물론 올바른 교리가 아주 중요합니다. 

중세 카톨릭 교회가 잘못된 이유는 구원에 대한 잘못된 교리를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올바른 교리만으로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올바른 교리에 지적으로 동의한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인격적인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서 부활하신 그 예수님의 은혜를 받음으로 구원을 얻는 줄로 믿습니다.
이것을 강조한 것이 복음주의 신앙이고, 근대 복음주의의 시작은 조나단 에드워즈와 존 웨슬리였습니다.
에드워즈와 웨슬레는 서로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만났던 적은 없었습니다.
지금이야 미국과 영국이 가까운 거리이지만 18세기에는 아주 먼 거리였습니다.
그런데 조지 휘필드는 영국 사람이었는데 영국에서 존 웨슬리와도 동역을 하고, 미국으로 와서 조나단 에드워즈와도 함께 동역을 했습니다.
그는 미국과 영국을 오가며 수많은 부흥집회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참석자 1 22:17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역사상 최초로 국제적인 사역을 했던 부흥사가 바로 조지 휘필드였습니다.
휘필드의 뒤를 이었던 사람이 19세기 디엘 무디이고, 디엘 무디의 뒤를 이은 사람이 20세기의 빌리 그레함 목사님이었습니다.
사진을 보시면 조지 필드의 무덤이 있는 뉴베리포트에 있는 올드사우스 장로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다음 사진을 보시면 필드의 무덤에 있는 기념비입니다.


그 기념비에 보면 그의 일생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22살에 사역을 시작했던 그는 대서양을 13번 횡단했습니다.
18세기에 배를 타고 대서양을 횡단하는 데 한 달 반, 약 45일이 걸렸다고 합니다.
제가 이번에 보스턴에서 서울로 오는 비행기가 15시간이었습니다.
15시간 비행기 타는 거 너무너무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휘필드는 15시간이 아니라 45일이 걸리는 여행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고된 여행을 13번이나 하면서 미국과 영국을 오가며 부흥운동을 이끌었습니다.
그가 34년 동안 사역하면서 총 1만 8천 번의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계산해 보면 1년에 530번 설교를 한 것입니다.


별로 놀라지 않으시네요. 

1년에 530번 설교하면 하루에 한 번 보다 더 많이 한 것이잖아요.
예일대학교의 해리 스타트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지 필리야말로 미국의 첫 번째 문화적 영웅이었다라고 평가했습니다.
왜냐하면 18세기 당시에 미국인들 전체 중에서 80%가 그의 설교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전심을 다해서 외쳤던 것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휘필드는 세례요한과도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결코 자신을 증거하거나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오직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했습니다.
그분의 영원한 사랑, 그분이 주시는 영원한 소망을 선포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그러한 방식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공하든 아니면 실패하든, 사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든 우리는 살아계신 예수님만 증거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러한 마음으로 에베소에 있는 그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그제서야 요한의 제자들은 제대로 된 복음을 듣게 되었고 그 복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오늘 본문 5절 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함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심으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에베소의 제자들이 복음을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더니 성령께서 임하셨습니다.
성령께서 계시다는 것을 들어본 적도 없었던 사람들이 성령 충만을 받게 되었습니다.
언제 이 일이 일어났습니까?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 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과 성령 충만을 받는 것은 두 개로 나누어진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곧 예수의 영이기 때문에 주 예수 안에 거할 때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바라기는 여러분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 깊이 거함으로 날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베소에 있는 제자들을 훈련한 이후에 바울은 회당으로 가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회당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것은 바울의 일반적인 선교 패턴이었습니다.
구약의 율법과 선지서를 연결점으로 해서 약속의 성취로 오신 그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본문 8절 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바울이 에베소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유대인들은 복음을 반대하고 비방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회당을 떠나서 두란노 서원으로 가서 거기서 날마다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바울이 두란도 서원으로 갈 때에 제자들을 따로 세웠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말씀으로 훈련된 제자들과 함께 동역했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혼자서 사역하지 않았고, 자기가 훈련한 제자들과 함께 사역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한 가지 배우게 됩니다.
바울이 제자 훈련도 했고, 복음 전도도 했다는 사실입니다.
가끔 보면 목회자들 사이에서 논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자 훈련이 중요한가? 복음 전도가 중요한가?를 가지고 논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자 훈련을 강조하는 분들은 마태복음 28장을 강조합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이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가 하면 전도와 선교를 강조하는 그룹은 사도행전 1장을 강조합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라고 하신 이 말씀이 승천 직전에 하셨으니까 

이게 진짜 마지막 명령이라고 강조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진짜 마지막 명령은 무엇이었을까요?
제자 훈련이 중요할까요? 전도와 선교가 중요할까요?
둘 다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제자 훈련도 하셨고 전도도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제자 훈련도 했고, 전도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교회는 제자 훈련도 해야 하고, 복음 전도도 해야 합니다.
어느 한 가지에만 집중하고 어느 한 가지만 강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모든 사역들이 역동적으로 잘 되어야 합니다.
예배에도 힘을 써야 하고, 교육과 훈련에도 힘을 써야 합니다.
전도와 구제에도 최선을 다해야 하고, 교제와 봉사에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여러분 어떤 교회가 있는데 예배는 너무너무 은혜로운데 봉사가 약하다.
이 교회가 건강한 교회일까요?

교육과 훈련은 너무나 탁월한데, 전도와 선교가 약한 교회가 있다면 이것이 건강한 교회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5대 사역 전체가 균형 있게 역동적으로 일어나야지 그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가 어느 한 가지 사역에만 집중할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 청년부는 전국적으로 유명합니다. 

아포슬 청년부 하면 전국에서 다 압니다.
그렇다고 우리 교회가 청년부 사역에만 집중할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 세계선교회는 교단 최초로 법인화된 선교회입니다.
아무리 우리 선교회가 유명하다고 우리가 선교회 사역에만 집중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광대하기 때문에 어느 것 한 가지만을 강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광대하고 크고 복잡하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이해한다면 교회의 비전이나 목표를 어느 한 문장 안에 다 담을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인생 역시 너무나도 복잡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 좋은 가장의 조건은 무엇입니까?
누가 좋은 가장입니까? 돈을 잘 벌면 좋은 가장입니까?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면 좋은 가장입니까?
아니면 신앙적으로 성숙해서 가정을 영적으로 잘 인도해야지 좋은 가정입니까?
이 모든 것을 다 잘해야지 좋은 가장입니다. 

좋은 가장이 되는 것은 엄청나게 복잡하고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 자체가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인간, 우리 인생의 복잡성을 무시하는 것은 용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무지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우리가 모르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앙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모르는 것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교회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내가 모르는 것이 많이 있고 하나님의 나라는 크고 광대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변화와 성장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뭔가 알고 있다는 그 착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로 자기 자신을 잘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영어로 self examination 이라고 하죠.
내가 진짜 이것을 알고 있는지, 내가 진짜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실제로 그 일을 해보아야 합니다.
전도는 이런 의미에서 아주 좋은 기회입니다. 

여러분 실제로 전도를 해보면 내가 신앙적으로 얼마나 성숙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 복음에 관심이 없고 예수님이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하지라고 고민할 때 그때 진짜 나의 신앙 상태를 점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번 주일과 다음 주일에 행복 나눔 잔치 태신자를 작정합니다.
이것은 불신 가족과 친구들을 위한 가장 귀한 사랑이고 선물입니다.
동시에 태신자 작정을 통해서 나의 신앙 상태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전도가 귀찮거나 부담이 된다면 나의 신앙이 정말로 건강한지 우리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 성령 충만한 사람이 전도를 귀찮게 여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끊임없이 배우고자 하는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영어로 Lifelong Learning 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평생 동안 배워야 하는 것이죠. 

배우지 않고 그냥 가만히 있는 사람은 정체됩니다.
아니 사실 정체되는 것이 아니라 뒤로 퇴보하는 것이지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내가 가만히 있으면 뒤로 퇴보하는 것입니다.
저도 이번에 미국에 가서 예전 교수님들을 만나서 많은 것들을 배웠습니다.
지금 미국 사회의 모습, 정치 현실의 모습, 미국 교회의 현실에 대해서 많이 배웠습니다.
코로나가 한국 사회에도 큰 영향을 끼쳤지만 미국 사회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코로나가 가져온 그 변화를 무시하고 대처하지 않았던 많은 교회들, 백화점들, 상점들이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외부 환경이 빠르게 변화될수록 중요한 것은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비본질인지 판단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본질은 확고하게 세워야 하고, 그렇지 않은 비본질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미국에서 선교적 교회의 모델을 이끌어가는 학자들이 강조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4차 로잔대회를 앞두고 대위임령 현황 보고서가 출간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통계와 자료를 가지고 현대 선교를 분석하고 있는데 흥미로운 주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지상 대명 대위임령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하는 것과 그 대위임령을 얼마나 자주 설교하고 있는가에 대한 통계였습니다.
다음의 통계를 보시면 좌측에 대위임령에 대한 지식에 대한 통계는 유럽 교회가 가장 높았습니다.


그런데 우측에 보시면 그 대위임령에 대한 설교는 유럽 교회가 가장 낮았습니다.
그에 비해서 아프리카와 아시아 교회는 대위임령에 대한 지식이 상대적으로 적었습니다.
그런데 대위임령에 대한 설교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교회가 가장 높았습니다.
여러분 이 통계가 보여주는 것이 무엇일까요? 

유럽 교회는 전도와 선교에 대해서 지식적으로는 잘 알고 있지만 사역 현장에서는 강조하지 않는다라는 사실입니다.
반대로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교회는 전도와 선교에 대해서 지식적으로는 잘 모르지만 사역 현장에서는 많이 강조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어떤 교회가 영적으로 살아있는 교회입니까?
전도와 선교에 대해서 지식적으로 많이 알고 있는 교회가 살아있습니까?
아니면 실제 현장에서 그것을 강조하는 교회가 살아있는 교회입니까?
당연히 후자이겠죠. 

머리에 있는 지식만으로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진정한 변화는 실제로 해보는 것 실천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언가 많이 알고 있다는 그 생각을 내려놓고 실제로 주님의 길로 행하는 것이 중요한 줄로 믿습니다.

크고 광대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시며 우리가 할 수 있는 부분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순종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부서가 역동적으로 사역함으로써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그 생명 사역을 귀하게 감당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naMwF9II-h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