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8:1-11
1.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2.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3.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4.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5.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6.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7.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은 회당 옆이라
8.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11.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여러분은 평범한 일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매일 반복적인 그 하루를 여러분은 지루하게 느끼십니까?
아니면 오늘 이 하루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계십니까?
사실 평범한 일상에 감사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있는 것 중에서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가족이 절대 당연하지 않습니다.
또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교회가 절대 당연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건강도 당연하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 교회 성도님 중에 한 분께서 다치셨습니다.
전도대 사역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미끄러져서 다치셨는데 발목뼈에 문제가 생겨서 수술을 받고 병원에 입원하셨습니다.
여러분 입원 생활이 생각보다 힘듭니다.
환자 본인도 힘들고 또 간호하는 그 가족도 힘듭니다.
그래서 병원 생활 일주일만 하면 소원이 있죠.
빨리 집에 가는 게 소원입니다.
여러분 하루 일과를 마치고 퇴근하고 집에 가면서 감사한 사람 많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일주일만 그렇게 하지 못하면 너무너무 집으로 가고 싶습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그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제서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는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도 오늘 하루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 면에서 인생은 공평합니다.
우리 모두는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는 오늘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익숙한 장소를 떠나서 새로운 곳으로 가기 위해서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익숙한 곳에서 또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서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떠나기 위해서도 용기가 필요하고 또한 머물기 위해서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사역하는 모습입니다.
아테네를 떠난 바울이 80km를 이동해서 고린도에 도착했습니다.
고린도는 오랫동안 아테네와 라이벌 관계에 있던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BC 146년에 로마에 대항해서 폭동을 일으켰다가 로마 군대에 의해서 철저하게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100년이 지난 이후에 로마의 황제 줄리아스 시저에 의해서 다시 고린도가 재건되었습니다.
그렇게 로마의 행정구역에 편입되어서 고린도는 아가야 지방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지도를 보면 고린도를 중심으로 양쪽에 항구가 있습니다.
한쪽은 지중해를 향해 있고 또 한쪽은 에게해를 향해 있습니다.
그 중심에 위치한 고린도는 교통과 상업의 요충지였습니다.
과거에는 항구 도시가 도덕적으로 문란했습니다.
그래서 고대 헬라어 관용어 중에서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헬라어로 코린피아저마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문자적으로는 고린도인처럼 행동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의 진짜 의미는 성적으로 문란하다, 매춘을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고린도가 얼마나 방탕한 도시였다면 고린도인처럼 행동하는 것이 곧 매춘을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도시에 복음을 전하러 왔습니다.
신도시로 잘 개발된 곳이었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아주 타락한 곳에 복음을 전하러 왔습니다.
오늘 복음은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한 부부를 고린도에서 만났다라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고린도에서의 사역을 말하기 이전에 그곳에서 만난 사람에 대해서 먼저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8장 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이탈리아에서 이주해 온 유대인 부부가 있었습니다.
남편은 아굴라였고, 아내는 브리스길라였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원해서 이주해 온 것이 아니라 황제의 명령으로 어쩔 수 없이 이주해 왔습니다.
로마의 황제가 유대인 추방 명령을 내렸습니다.
고대 역사가에 따르면 로마 시내 안에서 유대인들 사이에서 여러 가지 소동이 있었다고 합니다.
크리스투스 때문에 그 소동이 일어났다고 기록되었는데, 아마도 크리스찬, 예수님을 따르는 크리스찬과 그들을 박해하는 유대인들 사이에 소동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이 소란스럽게 하니까 로마 황제가 모든 유대인들은 로마를 다 떠나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래서 하루아침에 집을 떠나서 다른 도시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로마를 떠나서 고린도로 왔는데 거기에서 바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바울의 직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천막을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스스로 일을 해서 선교에 필요한 재정을 충당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또한 천막을 만드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본문 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울도 천막 만드는 일을 하고 아굴라도 천막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같은 업종에서 일하는 사람들끼리 친구가 되는 것이 쉬운 일일까요?
어려운 일일까요?
언뜻 생각하면 쉬울 것 같습니다.
건축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같은 일 하는 사람 만나면 좋겠죠.
학교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같은 일 하는 사람 만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같은 업종에 종사하게 되면 상대방과 경쟁을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사업하시는 분께 제가 질문하겠습니다.
여러분의 가게 500미터 거리 안에 같은 업종의 새로운 가게가 생기면 경쟁심을 느낄까요? 안 느낄까요?
당연히 느낄 것입니다.
내가 안 느낀다고 해도 아마 주변에서 경쟁을 부추길 것입니다.
그것이 식당이라면 음식 맛을 가지고 비교할 것이고, 물건을 파는 가게라면 물건의 퀄리티를 가지고 비교할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는 두 가지 방식의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는 경쟁적인 관계이고 또 하나는 협력적인 관계입니다.
여러분 옆자리에 앉으신 분 한번 보실래요?
여러분 옆자리에 계신 분과 경쟁적 관계입니까? 협력적 관계입니까?
더 쉽게 질문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에 가까이에 있는 다른 교회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교회와 그 교회가 경쟁적 관계입니까? 협력적 관계입니까?
협력적 관계이지요.
영국의 기독교 사상가 C.S 루이스는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옥의 철학은 하나의 사물은 다른 사물과 별개라는 원칙,
하나의 자아는 다른 자아와 별개라는 원칙을 인식하는 데 있다.
그들에게 있어 존재한다는 것은 곧 경쟁한다는 뜻이다"
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옥의 철학은 철저하게 경쟁적 관계에 기반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이 글을 처음 읽고 약간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저는 경쟁을 약간 좋은 거로 생각했죠.
경쟁을 통해서 자극을 받고 도전을 받고 우리가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C.S. 루이스의 글을 통해서 제가 경쟁이 무엇일까 그 본질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왜 경쟁을 할까요?
자원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전체 파이는 제한되어 있으니까 상대방이 더 가져가면 나는 빼앗기게 됩니다.
우리가 이것을 가리켜 제로섬 게임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와 옆에 있는 다른 교회는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싸우고 있습니까?
한 교회가 부흥하면 다른 교회는 쇠퇴하게 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두 교회가 함께 부흥할 수 있습니까?
당연히 함께 부흥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나라는 제로섬 게임(zero-sum game) 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정해진 파이를 가지고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점점 더 커지고 확장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천국 비유의 핵심이 무엇일까요?
겨자씨 비유, 누룩 비유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점점 더 커지고 확장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교회는 서로 경쟁적인 관계를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한 교회가 부흥한다고 다른 교회가 쇠퇴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다 잘될 수 있습니다.
함께 부흥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계속해서 확장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협력의 가치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협력하는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바울과 아굴라는 같은 업종에 종사했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경쟁 상대가 될 수도 있었겠지요.
상대방이 잘 되면 나는 잘 못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 협력했습니다.
평생을 함께하는 평생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놀랍게 확장되는 그 하나님의 나라를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나도 이기고 상대방도 이기는 윈윈의 관계가 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로잔의 정신'입니다.
'로잔 운동'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세계 선교를 위해서 복음주의 신앙을 가진 교회와 단체가 연합하는 것입니다.
'로잔은 세계 선교를 위한 글로벌 플랫폼(platform)'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플랫폼이 뭔지 아시죠?
유튜브, 페이스북, 아마존 이런 거 다 플랫폼입니다.
플랫폼에는 주인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와서 거기에서 자기의 아이디어를 공유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으면 그것이 곧 영향력이 됩니다.
로잔는 세계 선교를 위한 플랫폼입니다.
누구든지 와서 세계 선교에 대한 다양한 아이디어를 공유할 수 있습니다.
로잔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딱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로잔 언약'에 동의한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로잔 언약'은 20세기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문서입니다.
복음주의 신학을 정말로 탁월하게 기술했습니다.
성경의 절대적 권위,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전도의 의미, 교회의 본질, 사회적 책임 등에 대해서 너무나 잘 정리했습니다.
인터넷에 가면 다 있으니까 집에 가셔서 꼭 읽어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로잔 언약'
https://lausanne.org/ko/statement/lausanne-covenant-ko
고린도에서 만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바울의 평생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의 선교 사역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고 함께 협력하고 함께 헌신했습니다.
얼마나 헌신했냐면 바울을 위해서 생명의 위협을 당할 정도로 헌신했습니다.
로마서 16장 3절 4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기와 아굴라에게 무난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아멘. 여러분은 여러분을 위해서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는 동역자가 있으십니까?
그런 동역자를 만나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입니다.
바울이 영적으로 타락한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시작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큰 선물을 주셨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함께 헌신할 수 있는 아주 귀한 동역자를 허락하셨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 교회에 오셨던 홍정길 목사님께서 금요 기회 전에 티타임 시간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목사님의 인생을 쭉 돌아보니까 너무나 귀한 만남의 축복을 많이 받았다라고 고백하셨습니다.
목사님 주변에는 온통 좋은 사람들밖에 없었다라고 고백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비결을 알려주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지 그 비결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알려드릴까요?
홍정길 목사님 말씀에 따르면, '평생 돈 안 되는 일을 위해서 살아서 그랬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에 돈 되는 일을 위해 살았으면, 그 이권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것입니다.
그러면 좋은 사람도 있겠지만 나쁜 사람도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돈 안 되는 일을 위해 살면 절대 나쁜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와봤자 거기 돈이 없으니까 나쁜 사람들은 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권을 위해 살지 마시고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사시면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좋은 성도들이 많이 모인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마음이 순전한 사람들이 많이 모인 교회가 순전한 교회입니다.
성경 안에서 생명 사역을 위해서 우리가 하나 될 때에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혼자서 신앙생활 잘할 수 없습니다.
각자 도생하는 것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혼자서는 큰 일을 할 수도 없고 고난과 시련을 이겨낼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그 믿음 가운데 바울과 아굴라가 좋은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생명사역과 세계 선교를 위해서 함께 헌신하는 좋은 동역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좋은 동역자를 만난 바울은 그들과 함께 고린도에서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길거리에서 외친 것만이 아니라 회당에 들어가서 말씀을 강론하고 유대인들을 설득했습니다.
사도행전 18장 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느라(trying to persuade)
회당에서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했다라고 말씀하는데,
여기서 권면했다가 영어로 보면 trying to persuade 입니다.
설득하고자 노력했다라는 의미이죠.
전도는 선포임 동시에 설득입니다.
우리가 이 두 가지를 다 기억해야 합니다.
말씀을 선포하고 또한 말씀으로 설득해야 합니다.
특별히 현대사회에서는 복음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변증하는 것이 아주 중요해졌습니다.
그냥 덮어놓고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성찰하고 생각하면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3차 로잔대회의 공식 문서였던 케이타운 서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다원주의 사회에서 기독교 변증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이 신앙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논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이를 위해서는 신학도 알아야 하고 철학도 알아야 하고 역사도 알아야 합니다.
그냥 대충 아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 교회에서는 다양한 교육과 훈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새 가족들을 위한 새 가족 훈련도 있고 그 이후에는 제자 양육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특별히 이 제자 양육원에는 다른 교회엔 없는 우리 교회만 있는 훈련 사역입니다.
새 가족 훈련을 받고 제자 훈련받기 이전에 그 중간에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배우는 시간입니다.
교회에 오래 다녔더라도 제대로 훈련을 받지 않으면 신앙의 깊이가 얕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최근에 2~3년간 등록하신 분들 중에서 아직 제자 양육원을 이수하지 않은 분이 계시다면 이 과정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체계적으로 배우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 실라와 디모데가 마케도니아에서 왔습니다.
그동안 헤어져 있던 바울의 선교팀이 이제 다시 모이게 되었습니다.
실라와 디모데가 올 때에 마게도냐 교회에서 선교 헌금을 보내왔습니다.
그래서 이제 바울이 다른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지 않고 오직 복음을 전하는 그 일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본문 5절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When Silas and Timothy came from Macedonia, Paul devoted himself exclusively to preaching, testifying to the Jews that Jesus was the Messiah")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혔다라고 하는데, 영어 성경에 보니까
'Paul devoted himself to preaching'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온전히 헌신했다'라는 뜻입니다.
텐트 메이커로 직업을 가지고 사역을 하다가 이제는 다른 직업 가지지 않고 오직 말씀에만 전념하는 풀타임 사역자가 되었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 시대에 전문인 사역자, 텐트 메이커(tent maker)가 더 필요할까요? 아니면 풀타임 사역자가 더 필요할까요?
둘 다 필요합니다.
저는 이런 논쟁이야말로 아무 쓸데없는 논쟁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문인 사역자가 중요하다, 풀타임 사역자가 중요하다. 논쟁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둘 다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전문인 사역자는 자기가 하는 실제적인 직업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풀타임 사역자는 오직 말씀에 전념해서 하나님 나라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이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감당할 수는 없죠.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의 기여를 인정해야 합니다.
바울이 온전히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는 썩 좋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의 말을 잘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그를 대적하고 비방했습니다.
바울은 그전보다 더 열심히 전도하고 있는데 결과가 좋아진 것이 아니라 더 나빠졌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힘이 빠질 수도 있겠죠.
예전에는 천막을 만들면서 그 남은 시간에 복음을 전하다가 이제는 오로지 복음만 전하고 있는데 눈에 보이는 결과는 더 나빠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눈에 보이는 결과에 의해서 좌지우지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신실하게 자신의 본분을 다했고 일의 결과는 하나님의 손에 막혔습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본문 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은 회당 옆이라
유대인들이 바울을 대적해서 회당에서 내쫓아냈더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이방인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디도 유스도라는 이방인이 예수님을 믿고 자기 집을 예배 공간으로 오픈했습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유스도는 로마의 황제 시저가 고린도를 재건할 때 정착했던 로마의 귀족이었다고 합니다.
고린도의 명문 귀족이 예수님을 믿고 자기 집을 오픈했습니다.
놀랍게도 그의 집은 회당 바로 옆에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대적해서 회당에서 쫓겨냈더니 회당 바로 옆에 있는 그 집에서 복음을 받아들여서 예배 장소를 제공한 것입니다.
정말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회당장 그리스버가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8절 말씀에 보니까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말이 되는 이야기일까요?
회당에 다니고 있는 수많은 유대인들은 바울을 대적하고 있는데 그 회당의 대표인 회당장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회당에 있는 유대인들이 이 장면을 보면서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요?
우리는 실컷 바울을 비방하고 반대했는데 어떻게 회당의 장이 복음을 믿고 크리스천이 된 것입니다.
전도와 선교를 하다 보면 이런 경우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내가 예상했던 사람, 내가 예상했던 방법을 통해서 일이 진행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훨씬 더 많은 경우는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사역이 진행됩니다.
해외 선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국내 선교 교회 개척 또한 그렇습니다.
미국의 팀 켈러 목사님이 하시는 사역 중에 citty to city라는 교회 개척 운동이 있었습니다.
그 운동이 이제 한국에 들어와서는 '복음과 도시'라는 이름으로 사역을 하고 있는데 우리 교회도 동참하고 있습니다.
'복음과 도시'라는 그 모임에 가면 정말 한국을 대표하는 목사님들도 계시지만 교회 개척한 지 5년 10년 되신 목사님들도 계십니다.
그러면 교회의 규모와 상관없이 함께 너무나 귀한 교재를 나누고 함께 공부하는 학습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 모임에서 교회 개척하신 분들의 목사님들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교회가 개척되고 놀랍게 성장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로 도전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개척하신 분들이 공통적으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개척 멤버를 모집할 때 그렇게 친하고 우호적이었던 분들은 함께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평소에 친하게 지내고 같이 기도도 참 많이 했는데 정작 교회 개척을 할 때에는 함께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분들이 함께 와서 너무나도 귀하게 사역을 감당했다는 간증을 하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저도 선교사 때 똑같은 경험을 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친하게 지내고 함께 교제했던 사람들은 정작 선교사로 나가면 후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연락을 와서 너무나 귀한 후원을 보내주셨습니다.
만약에 이것이 한두 번이었다면 우연인가 보다 할 텐데 너무나도 많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개척하는 사람이나 선교사로 나가는 사람이나 인정하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사역의 주도권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믿고 사람을 바라보면서 사역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을 책임지시고 우리 사역을 성취하시는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고린도에서 이것을 경험했던 바울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6절 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 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아멘. 우리는 각자의 역할을 감당할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심는 역할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물을 주는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오직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이것을 기억한다면 전도에는 결코 실패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복음의 씨앗을 뿌립니다.
또 어떤 사람은 물을 주는 역할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나중에 그 전도의 열매를 거두는 역할을 합니다.
이 모든 과정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이것을 기억하면 우리가 전도를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도에는 결코 실패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뿌린 그 복음의 씨앗이 언제 어떻게 자랄지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는 단지 때를 얻든지 얻지 못하든지 복음을 전할 뿐입니다.
우리가 뿌린 복음의 씨앗, 우리가 드렸던 그 사랑과 관심과 기도를 하나님께서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바울은 전도에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또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전도의 결과는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바울의 선교 패턴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동안 바울은 아시아와 유럽의 여러 지역을 방문하고 순회하는 사역을 섬겼습니다.
버가,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트라, 빌립보, 아테네 등 수많은 도시를 방문했습니다.
대부분의 도시에 짧게 머물면서 복음을 증거하고 그다음에 다른 도시로 이동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선교 패턴에 예외가 딱 두 번 있었습니다.
한 번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고린도이고, 또 한 번은 에베소였습니다.
고린도에서는 1년 6개월을 머물렀고, 에베소에서는 2년 3개월을 머물렀습니다.
여러분 여러 지역을 방문하면서 사역하는 것이 어려울까요?
아니면 한 곳에서 오랫동안 사역하는 것이 어려울까요?
제가 드리는 질문에 대부분의 답은 둘 다입니다.
둘 다 어렵습니다.
여러 지역 다니는 것 어려운 일이지요.
예전에 부흥사 목사님들 막 순회하는 걸 가까이에서 보면 여행하는 것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모릅니다.
순회 사역이 절대로 쉬운 것이 아니라 그냥 내 교회에 있는 것이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반대로 한 곳에서 오랫동안 사역하기 위해서는 엄청 부지런해야 합니다.
매번 새로운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선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주일 예배 설교 한 편을 준비하기 위해서 최소한 20시간 이상이 걸립니다.
그러면 지난주처럼 외부 일정이 많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야근을 해야 합니다.
직장에만 야근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도 야근이 있습니다.
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사역하기 위해서는 부지런해야 하고 또한 동역자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아신 하나님께서 바울이 고린도에서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동역자를 예비하셨습니다.
아굴라, 브리스길라와 함께 강력한 공동체를 이루어서 유대인들의 박해를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환상 가운데에서 나타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8장 9절 10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음에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으니라 하시더라.
아멘. 여러분 이전에 바울이 환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언제였죠?
아시아로 가는 길이 막혔을 때 마게도니아 사람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전혀 새로운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반대였습니다.
새로운 장소로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있는 곳에 더 머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성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이 많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이곳에서 복음을 증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새로운 장소로 떠나는 것만이 용기가 아닙니다.
지금 있는 곳에서 계속해서 머무는 것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오늘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용기가 필요합니다.
아주 성공적인 커리어를 가진 어떤 여성분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자기 분야에서 아주 오랫동안 성공적으로 활동했던 유능한 여성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50세가 되도록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인터뷰하시는 분이 질문했습니다.
혹시 비혼주의자이십니까?
그랬더니 답하기를 '아닙니다. 저는 비혼주의자 아닙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러면 왜 결혼을 안 하셨습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그에 대해서 그녀가 솔직하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결혼을 생각하면 두려움이 생깁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남편에게 잘 해줄 수 있을까? 시부모님을 잘 섬길 수 있을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커리어를 잘하면서 동시에 가정을 잘 꾸릴 수 있을까? 두려움이 생깁니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아주 솔직한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들 다 하는 결혼이지만 내가 이 결혼 생활 잘할 수 있을까 두려운 마음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해본 적이 없으니깐요.
해본 적이 없는 일에 대해서, 살아본 적이 없는 그 나라에 대해서 누구나 다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주변에서 이야기를 많이 듣고 책을 많이 읽어보아도 그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새로운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있는 이곳에서 계속해서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 또한 두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 모두 다 내가 해본 적이 없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환상적인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9절 10절에 보니까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고,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이 받은 이 약속은 사실 구약 성경에서 엄청나게 많이 반복되었던 약속이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라는 약속은 모세도 이 약속을 받았고요.
여호수아도 하나님께 이 약속을 받았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에게도 주님께서 그렇게 약속하셨고, 예레미야 선지자에게도 주님께서 동일하게 약속하셨습니다.
예레미야 1장 8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언가 명령하실 때 반드시 약속도 함께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무슨 군대 상관처럼 무조건 복종하라고 말씀하시는 엄한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 말씀에 순종할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약속을 또한 주십니다.
모든 환란과 어려움을 감당할 수 있도록 우리와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pp 약속이라고 불렀습니다.
Presence, Protection. 임재와 보호의 약속입니다.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지키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받은 바울은 말씀에 순종해서 고린도에 머물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귀한 순종의 삶을 살아갔던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앎은 순종으로부터 나온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머리로 성경 지식 많이 알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고난 가운데 그 믿음으로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말씀에 순종하게 될 때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앎을 인격적으로 얻게 됩니다.
우리가 멀리 있는 선교지에 가기 위해서만 용기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곳에서 신실하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 용기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겠다는 하나님의 pp 약속,
Presence, Protection 약속을 붙잡는 것에서 나오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지키시겠다 약속하신 그 하나님을 바라보시며 주님의 말씀에 항상 순종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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