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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대원목사 설교

20240630 유럽 최초의 크리스천

by 마이코 2024. 7. 1.

성경: 사도행전 16장 9~15


성경 퀴즈를 하나 내겠습니다.

유럽에 최초로 세워진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구글에 검색하면 바로 나옵니다.

빌립보 교회입니다.
우리가 바울 서신을 연구해 보면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여러 교회들에게 편지를 쓸 때 각 교회가 가진 문제에 대해서 지적하고 책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떤 교회는 이단에 빠지고, 어떤 교회는 율법주의, 은사주의에 빠지기도 합니다.
바울은 아비의 마음으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을 지적하고 책망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서에 보면 그런 장면이 안 나옵니다.
바울이 빌립보교회를 책망하고 지적하는 장면이 안 나옵니다.
오히려 빌립보 성도들을 향한 기쁨과 감사로 가득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빌립보서를 가리켜 기쁨의 서신이라고 부릅니다.
유럽에 처음으로 세워진 빌립보 교회는 바울에게 아주 특별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면 유럽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옵니다.

루디아라는 사람입니다.
루리아는 이방 여성이었습니다.

당시 문화와 관습을 생각한다면 유대인이 이방인 남성에게 다가가는 것도 힘든 일이었습니다.
하물며 이방 여성에게 다가가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울을 인도하셔서 루디아를 만나게 하셨고, 루데아가 마음을 열어서 바울이 전한 복음을 믿게 하셨습니다.
유럽의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가 세워졌던 그 모든 과정은 사람이 계획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생각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그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가 계획했던 길이 막히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도무지 길이 열리지 않아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난감한 상황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유럽으로 건너갔는데 복음을 전할 장소가 없었습니다.
그동안의 선교 경험과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유럽에 최초의 교회를 세우셨던 방식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울의 제2차 전도 여행 중에 일어난 일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보았던 예루살렘 공의회 이후에 바울이 아시아로 가서 그가 세웠던 교회들을 돌아보고자 했습니다.
우리가 바울에 대해서 흔히 가지는 오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항상 새로운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개척자였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바울이 새로운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한 것은 맞지만, 그는 또한 기존에 세워진 교회들을 잘 돌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2차 전도여행을 시작하면서 1차 전도 여행 때 세웠던 교회들을 돌아보기 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계획을 막으셨습니다.

사도행전 16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부르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성령께서 아시아로 가는 길을 막으셨습니다.
바울의 고향 다소가 아시아에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그 지역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선교 사역을 펼치기 원했습니다.


지도를 보시면 빨간색으로 된 것이 바울의 이동 경로입니다.
가운데 보면 소아시아라고 된 지역이 있죠.

에베소, 서머나, 사대 등 우리가 들어본 지역입니다.
바울은 이곳으로 가고 싶었는데 성령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도행전 167절 말씀도 읽어보겠습니다.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에서 비두니아로 가고자 했는데 이번에도 성령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마 바울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내가 잘 아는 곳으로 가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그런 경험을 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뭔가 열심히 준비했는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던 적이 있으십니까?
바울도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바울이라고 해서 항상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알았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의 계획을 막으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든지 우리의 계획 또한 막으실 수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자신이 계획했던 길을 하나님께서 막으셨던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19세기 영국 최고의 선교사이자 탐험가였던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 또한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David Livingstone


그가 21살 때 독일 선교사 칼 귀츨라프의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귀츨라프는 중국과 한국, 태국에서 복음을 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강도사 고시 볼 때도 시험 문제 나왔었는데, 우리나라에 최초로 왔던 개신교 선교사가 누구입니까?
질문이 있으면 정답은 컬 귀츨라프였습니다.

그의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아서 리빙스턴이 나도 중국 선교사가 되어야겠다라고 결단했습니다.
의료선교사가 되어서 중국인들을 섬기기로 결단하고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힘들게 힘들게 의학 공부를 마치고 마침내 1840년에 선교사 파송을 받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해 1840년에 중국에서 큰 일이 일어났습니다.
중국과 영국의 아편 전쟁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현지 상황이 너무 위험해지니까 런던 선교회에서는 중국으로 가는 선교사 파송을 취소하기로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었던 리빙스턴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젊은 날을 바쳐서 열심히 공부해서 중국 선교사가 되고자 준비했는데, 하나님께서 그 길을 막으셨습니다.
중국 땅을 바라보면서 열심히 노력했는데, 중국으로 가는 길이 막혔을 때 리빙스턴의 마음은 얼마나 안타까웠을까요?

 

인생을 살다 보면 이러한 경험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해서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에서 최선을 다해서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길을 막으셨습니다.

도무지 상황이 열리지 않고 도무지 길이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같은 무기력한 상황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혹시 그런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이 계시다면 낙심하지 않기를 부탁드립니다.
여러분만 그런 경험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도 그런 경험을 했고, 데이비드 리빙스턴도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저도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중국으로 가는 길이 막히자 리빙스턴은 대신에 아프리카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1840년이었습니다.

윌리엄 웨버퍼스가 영국에서 노예 제도를 폐지했던 것이 1833년이었습니다.
이제 영국인들은 아프리카에서 노예 무역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아프리카 노예 문제가 다 해결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여전히 아프리카에서 노예 무역을 했습니다.
포르투갈 사람들이 아프리카 노예를 잡아갔고, 아랍 사람들이 또한 아프리카 노예를 잡아갔습니다.


탄자니아에 가면 다르에스살람 앞에 아주 아름다운 항구가 있습니다.
잔지바르라는 항구인데, 그곳이 아랍 사람들이 아프리카 노예들을 다 잡아갔던 아프리카 최대의 무역항이었습니다.

탄자니아 잔지바르


리빙스턴은 이 문제를 보고선 너무너무 안타까워했습니다.
이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아프리카가 스스로 더 발전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리빙스턴은 세 가지 C를 주창했습니다.

첫째는 Christianity, 기독교이고,

둘째는 Civilization 문명이고,

셋째는 Commerce 상업이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문명을 일으키고 상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노예 무역하지 말고 정상적인 상업 거래를 할 수 있도록 아프리카가 발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프리카 사람들 스스로가 자립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유럽 열강이 아프리카를 착취할 때에도 리빙스턴은 철저하게 현지인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인권을 보호했습니다.
그 결과 지금까지도 아프리카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백인이 데이빗 리빙스턴입니다.
리빙스턴이 잠비아에서 세상을 떠났을 때에 그의 심장을 아프리카에 묻었습니다.
그의 심장이 묻힌 곳에는 리빙스턴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사진과 같이 세워졌습니다.


한편, 하나님은 중국을 향한 리빙스턴의 마음 또한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중간에 안식년을 맞이해서 1857년에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그동안 있었던 선교 보고와 선교 강의를 했습니다.
그 리빙스턴의 강의를 듣고 선교사가 되기로 했던 7명의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그 유명한 케임브리지 세븐(Cambridge Seven)이었습니다.

Cambridge Seven


시티스터드를 비롯한 7명의 학생들이 중국 선교사가 되기로 헌신했습니다.
이 사건은 영국 사회 전체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영국 최고의 지성인들이 당시 기준으로는 땅끝이라고 여기는 중국 선교사로 헌신한 것입니다.
이 케임브리지 세븐을 기점으로 해서 영국에서는 학생 선교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일의 시작에는 리빙스턴의 선교 보고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돌이켜보면 리빙스턴은 그의 인생을 통해서 아프리카도 섬겼고 또한 중국도 섬겼습니다.
아프리카에는 자기가 직접 가서 현지인들과 현지 교회를 섬겼습니다.
중국에는 직접 가지 않았지만 당시 최고의 선교사들을 중국으로 보냄으로써 섬겼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계획한 길, 우리가 준비한 길이 막힌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내 힘으로는 도무지 열리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상황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높은 줄로 믿습니다.
지금 당장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막으시는 것 같지만 그것은 더 큰 목적을 위한 하나님의 선한 계획인 줄로 믿습니다.


바울은 아시아로 가는 길이 막았지만 막혀졌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날 밤에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그 유명한 마게도냐 환상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6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마게도냐는 알렉산더 대왕이 세운 헬라 제국이었습니다.
마게도냐 왕국의 전성기는 로마 제국의 전성기 때보다도 그 영토가 훨씬 더 컸습니다.
지도를 보시면 유럽과 중동, 북아프리카, 인도까지 이르는 아주 거대한 왕국을 세웠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유명한 페르시아 왕국을 무너뜨린 것이 바로 마게도냐 왕국이었습니다.
마게도냐는 철저하게 이교도 신앙을 따르고 있었는데 그곳으로 와달라는 환상을 보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본문 10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아멘 이 구절을 보면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는 방법이 나와 있습니다.
맨 마지막에 나오는 단어가 '인정함'이라라고 되어 있는데, 헬라어로 보면 쉼비바즈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bring together, put together 라는 뜻입니다.
모든 것을 다 종합하고 고려해서 결론을 내렸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바울이 환상만을 보고 결정을 내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길을 여시고 어떤 길을 막으시는지 다 분별을 했습니다.
상황을 보면서 분별했고, 또한 기도하는 가운데 분별했습니다.
바울이 혼자서만 분별하지 않았습니다.

10절 말씀을 보면 그 주어가 우리입니다.
여기서 우리란 바울과 동행하는 실라와 디모데와 누가를 포함한 것입니다.
리더가 독단적으로 결정하지 않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분별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다 종합해서 고려해서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팀을 마게도냐로 부르시는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마게도냐로 떠났습니다.


배를 타고 마게도냐로 가는데 그 과정이 매우 순탄했습니다.
드로아에서 네아볼리까지 거리가 약 250km인데 순풍이 불어서 금방 갔습니다.
원래는 한 5일 정도 걸리는 항해였는데 이틀 만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길을 막으실 때도 있지만 또 길을 열기 시작하면 모든 일이 다 일사천리로 될 때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다 경험하는 것이 인생이고 또한 신앙생활입니다.
일이 잘 안 풀리고 막혀질 때도 있지만 하나님의 때가 되면 모든 것이 단번에 풀리는 경우 또한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바울의 선교팀은 마케도니아 지방에 있는 빌립보라는 도시에 도착했습니다.
성경은 빌립보를 가리켜 로마의 식민지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단지 로마의 통치를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로마의 정식 행정구역이라는 뜻입니다.
로마의 법과 제도를 따르는 자치 도시입니다.

빌립보는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였던 빌립 2세에 의해서 건설되었습니다.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그 도시의 이름을 빌립보라고 했습니다.


이곳은 완벽한 계획 도시로서 당시에는 작은 로마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언덕에는 그리스 신전이 있고, 관청과 법정과 아고라, 목욕탕, 도서관 등이 다 있었습니다.
주로 로마의 퇴역 군인들이 이곳에 정착했는데 그들은 로마 시민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일반적인 선교 패턴은 새로운 도시에 들어가서 그곳에 있는 유대 회당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에는 유대 회당이 없었습니다.

율법의 전통에 따르면 회당이 세워지려면 유대인 남성 10명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므로 회당이 없다는 말은 그 도시 안에 유대인 성인 남성 10명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회당이 없는 상황에서 바울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디로 가서 누구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까요?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지만 바울은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전혀 예기치 않았던 장소에서 전혀 예기치 않았던 사람들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61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기도할 곳이라고 되어 있는데 다른 말로 하면 기도처였습니다.
안식일에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회당이 없으니깐 기도처를 찾아갔습니다.
여기저기 알아보니까 성문 밖에 있는 강가에 모여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문 밖에 그 강가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을 찾아갔습니다.
빌립보 외곽에 흐르고 있는 강이 강가이트 강이라는 강입니다.


사진에 보시면 지금도 흐르고 있는 아주 조그마한 강입니다.
이 강가에 몇몇 여인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유대인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방인 여인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비전을 따라서 배를 타고 유럽까지 건너왔습니다.
250km나 되는 거리를 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가봤더니 그 도시에는 유대 회당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유대인 남성이 10명도 없는 곳이었습니다.

기도처가 있다고 해서 한번 가봤더니 이방 여인들만 모여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주변인들 중에 주변인 아웃사이더 중에 아웃사이더들만 모여 있었습니다.
건물도 없고 유대인도 없고 남성도 없는데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러한 상황에서도 바울은 복음을 전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목표는 놀라운 성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순종을 귀하게 사용하셨습니다.
본문 1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강가에 모여 있던 여성 중에 루디아라고 하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색 옷감 장사였습니다.

당시 자주색 옷은 왕과 귀족들만 입을 수 있는 최상류층만 입을 수 있는 옷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부자와 나사로 그 이야기를 보면 부자가 자색 옷을 입고 있었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자주색 옷은 부자와 귀족들만 입을 수 있었습니다.
루디아는 그런 옷감을 만들어서 파는 오늘날로 말하자면 성공적인 비즈니스 우먼이었습니다.
그녀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아주 집중해서 듣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역사를 행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녀의 마음을 여셔서 바울이 전한 복음을 믿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역사가 하나님께 속해 있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람이 복음을 듣고 회개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고 아무리 설득해도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혹시 배우자의 마음 바꿀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자녀의 마음을 바꿀 수 있습니까?
아니 가족의 마음도 못 바꾸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바꿔서 예수님을 믿게 만들 수가 있겠습니까?
성령께서 그 사람의 마음 가운데 감동을 주시고 역사하셔야지, 진정한 변화와 회복을 경험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절대 우리를 강압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감동하십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절대 우리를 강압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마음을 감동하십니다.
여러분은 오늘 주일 예배에 왜 나오셨습니까?

이렇게 비가 오고 날씨가 궂은데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강 앞에서 나오셨습니까?
주일 예배 안 드리고 다른 거 하면 벌 받아서 교회에 나오셨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절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감동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심으로써 역사하는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신 줄로 믿습니다.

루디아가 바로 그 인격적인 그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의 마음을 열어서 바울이 전한 복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유럽에서 최초로 예수님을 믿은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빌립보에 도착한 바울은 전혀 예기치 않은 장소에서 전혀 예기치 않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그것도 남성이 아닌 여성을 만났습니다.
당시 사회적 기준으로는 바울과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신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신실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증거했고, 그렇게 한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빌립보 교회의 시작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회당이 있는 곳에서도 역사하실 수 있고, 회당이 없는 곳에서도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율법을 알고 있는 유대인에게도 역사하실 수 있고, 율법을 하나도 모르는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인생의 모든 순간에 마음을 집중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언제 어떻게 역사하실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제가 동신교회를 처음 만나게 되었던 과정도 그러했습니다.
많은 분들 아시겠지만 제가 동신교회를 처음 알게 된 것이 엘피스 장학금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러면 제가 엘피스 장학금에 대해서는 또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요?
저는 대구에 아무런 연고도 없고 우리 교회에서 엘피스 장학금에 대해서 신문 광고를 내지도 않았습니다.
근데 제가 어떻게 엘피스 장학금에 대해서 알게 되었을까요?
제가 미국에서 박사과정 코 수업을 마치고 아프리카 부룬디 선교사 하러 갔습니다.
부룬디에 도착했을 때 저보다 1년 더 먼저 오셨던 한국 선교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장로교 통합 소속의 선교사님이셨는데 엄청 정보력이 좋은 분이셨습니다.
정말 여기저기 뭔가 모르는 게 없는 진짜로 아는 것이 많은 분이었습니다.
한 번도 그분이 저에게 오셔서 선교사님 혹시 대구동신교회 아세요?라고 질문한 것입니다.
제가 이름은 들어봤는데 잘 모릅니다라고 얘기를 했더니 저에게 이메일을 하나 보내주면서 그 교회에서 해외 박사과정 장학생을 모집한대요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제가 너무 신기해서 아니 선교사님은 이런 거 어떻게 다 하세요?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알고 보니까 그분이 자기 선교 편지를 공유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 많은 단체들과 연락을 주고받았습니다.
그 많은 단체들 중에 하나가 바로 생명사역 훈련원이었습니다.
생명사역 훈련원에서 발송한 그 이메일 중에서 엘피스 장학생 모집이라는 그 이메일을 저에게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제가 에피스 장학생에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장학금을 받고 파송 선교사가 되고 또 지금은 이렇게 담임 목사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방법을 통해서 동신교회를 만나게 하시고 섬기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성문 밖 강가에서 루디아를 만난 것 역시 마찬가지 원리였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장소였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었고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일하실까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방법은 인간의 생각을 넘어설 때가 많은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을 잃지 마시고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고린도후서 5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We live by faith, not by sight.

 

아멘.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영어로 보니까 눈으로 보이는 곳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그 상황을 넘어서서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방식으로도 역사하시는 그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는 믿음을 가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루디아가 세례를 받으면서 유럽 최초의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61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루디아와 그의 온 집이 세례를 받고 바울의 선교팀을 집으로 초청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도 될까요 안 될까요?
원래는 안 됩니다.

율법의 전통에 따르면 유대인이 이방인과 교제하면 안 되고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서도 안 됩니다.
그런데 불과 얼마 전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이러한 금기 사항을 다 허물었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유대인도 이방인의 집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루디아의 집에 바울의 선교팀과 세례 받은 이방인들이 모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빌립보교회의 시작이었습니다.

 

여러분 교회의 정의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건물이 있어야지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조직도 아닙니다.

당회가 있고 재직회가 있어야지 교회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루디아의 집에 모인 그 공동체가 바로 교회였습니다.
바울이 이 빌립보 교회를 엄청 사랑했습니다.

여러분 집에 가셔서 빌립보서를 한번 읽어보면 바울이 이 빌립보 교회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빌립보서 13절부터 5절까지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고 생각할 때마다 기뻤습니다.
지난 4월에 권성수 원로 목사님께서 우리 교회에 오셔서 이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동신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기쁘고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 마음이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향해서 가졌던 마음이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의 선교 사역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동참했습니다.
얼마나 헌신적으로 함께했는지 바울이 그들에게 나와 멍예를 같이 했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빌립보서 4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그러면서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여인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여인들 중에는 분명히 루디아도 있었을 것입니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의 선교 사역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동참했습니다.
빌립보서 415, 16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아멘, 잘 아시는 것처럼 바울의 선교 원칙은 철저한 자비량 선교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세웠던 교회로부터 후원을 받지 않았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로 값없이 받은 그 복음의 은혜를 값없이 나누어주기를 원했습니다.
두 번째로 바울의 적대자들이 그가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선교를 한다는 비판을 하지 못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예외적으로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게는 후원을 받았습니다.
다른 교회는 몰라도 빌립보 교회에서 오는 그 개인적인 후원은 받았습니다.
그 정도로 바울은 이 교회를 사랑했고, 또한 이 교회는 바울의 사역에 헌신적으로 동참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통해서 사랑을 받았고 환대를 받았습니다.
여러분 교회는 사랑과 환대의 공동체입니다.

무엇보다도 교회 안에는 사랑이 가득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님들을 격려하는 그 사랑이 있어야 됩니다.
가난한 사람, 소외된 자들을 위로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동신교회의 어떤 부분을 좋아하십니까?
혹시 다른 교회 다니는 친구들을 만난다면 동신교회의 어떤 면을 자랑하십니까?
교회가 큰 것을 자랑하십니까?

우리 교회 청년들 많다고 자랑하십니까?
저는 우리 교회가 사랑과 환대의 공동체인 것을 이야기합니다.
우리 교회 주보에 보면 매주 선교사님들의 기도 편지가 나갑니다.
어떤 분들은 대충 보실 수도 있겠지만 또 어떤 분들은 아주 자세하게 읽어보십니다.
선교사님들이 어떤 상황 가운데 있는지, 어떤 기도 제목을 가지고 있는지 자세하게 읽으십니다.
그리고 거기에 나와 있는 필요를 위해서 목적 헌금을 하실 때가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사례가 너무 많아서 제가 일일이 다 거론할 수가 없습니다.
몸이 아프신 선교사님, 교통사고가 나신 선교사님 등등 다양한 분들을 정말로 사랑으로 섬기십니다.
제가 굳이 이런 선교사님들을 위해서 저 목적 헌금 해주세요라고 이야기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섬기십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을 때 저는 동신교회를 섬기는 것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얼마 전에는 보육원과 미혼모 센터를 섬기는 프로젝트를 우리가 준비했습니다.
지난 4월에 생명주관 세미나를 하고 이 땅에 태어난 그 생명들을 보호하고 존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우리가 실천하기로 한 것이지, 이것이 예정된 사역이 아니었기 때문에 따로 책정된 재산 예산이 없었습니다.
당회에서 목적 헌금을 해서 진행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제 예상으로는 목적 헌금 하면 이 프로젝트에 필요한 예산의 한 2배쯤 나오지 않을까라고 저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목적 헌금이 얼마나 나오는지 아십니까?

필요한 재정의 4배가 나왔습니다.
담당 교역자와 그 선교팀에서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남은 재정으로 하반기에 한 번 더 이 프로젝트를 섬기기로 했습니다.
한두 사람이 큰 액수를 헌금한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5만 원, 10만 원 이렇게 헌금을 했습니다.
저는 이 모습을 보면서 우리 교회가 사랑과 환대의 공동체인 것에 감사했습니다.

 

세계 기도 정보 책자를 만든 제이스 맨드릭(Jason Mandryk) 선교사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교회의 영향력은 주일에 몇 명의 성도가 모이는지가 아니라, 몇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는지에 달려 있다라고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이 말은 단순하게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회의 진정한 영향력이 무엇인지 우리가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하는 이야기입니다.
많은 성도가 모이는 교회가 영향력 있는 교회인지 아니면 복음을 위해서 더 많은 성도들을 보내고 많은 것들을 나누는 교회가 영향력 있는 교회인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자는 외침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모든 성도가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 우리 교회 청년들이 다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선교사가 되기로 헌신하는 것만큼이나 확실하고 선명한 신앙을 갖기를 기원합니다.
아프리카 선교사가 되기로 결단한 것만큼이나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는 야성적인 신앙을 갖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유럽 최초의 크리스찬인데, 그렇다면 한국 최초의 크리스찬은 누구였을까요?
한국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았던 개신교인은 누구였을까요?
18792명의 조선 청년이 당시 중국 만주에 있던 존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 선교사님을 찾아갔습니다.
중국에서 전해 받은 한문 성경과 소책자를 스스로 공부해서 기독교 신앙에 관심을 가진 청년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김진기, 백홍준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추운 한겨울에 의주에서 만주까지 400km의 눈길을 걸어갔습니다.
매킨타이어 선교사는 이들의 진지한 신앙의 감동을 받아서 함께 성경 공부를 했습니다.
당시 조선은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심했기 때문에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진기와 백홍주는 세례를 받기를 원했습니다.
이렇게 1879년 중국 만주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들이 바로 최초의 한국 크리스찬들이었습니다.


그 이후에 김진기는 매킨타이어 선교사와 함께 한글 성경을 번역했습니다.
백홍주는 그렇게 번역된 한글 성경을 가지고 의주로 가서 비밀리에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한국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한국교회는 선교사가 와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마음을 연 청년들이 스스로 만주에 가서 선교사를 만나서 세례를 받음으로 한국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한국교회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때때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막으실 때가 있습니다.
도무지 상황이 열리지 않고 길이 열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길을 열어주십니다.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우리가 계획하지 않았던 길을 열어주십니다.
그곳에서 필요한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선한 뜻과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은 어떠한 순간에도 마음을 잃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볼 줄 믿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행하지 않고 믿음으로 행하여서 하나님의 신실한 역사를 경험하고 그것을 증거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F5jF-Ci3ew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