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사도행전 13장 44~52
여러분은 인생이 계획대로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계획성이 좋은 사람은 1년, 5년, 10년 계획까지 세우기도 합니다.
계획과 목표를 세우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인생이 우리의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MBTI 성격 유형 검사를 보면 J와 P가 있거든요.
J는 계획적인 성격, P는 조금 즉흥적인 성격을 뜻합니다.
저는 상당히 J에 가깝습니다.
계획성이 좋은 편인데 제가 아내를 만나서 처음 교제했던 것이 대학생 시절이었습니다.
대학 후배였던 아내와 교제를 하면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앞으로 4년 3개월 이후에 우리는 결혼할꺼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계획대로 됐을까요? 안 됐을까요?
4년 3개월 정확히 그 이후에 결혼했습니다.
우리가 언제 결혼할지 계획을 세우고 지키는 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언제 아이를 낳을지 계획하고 지키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저희가 결혼하고 첫 2년 동안은 선교 훈련을 받고 또 아프리카에서 단기 선교사로 섬겼습니다.
그렇게 2년 반이 지나고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정착했을 때 아이를 가지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갖는 것은 저희의 계획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생명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이제 1년 넘게 아이를 기다렸고 결혼한 지 4년이 돼서야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깨달았습니다.
인생에는 내 계획대로 할 수 없는 일도 많이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언제 결혼할 것인지는 계획할 수 있지만 언제 아이를 가질 것은 계획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계획해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할 수 없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룬디 선교사가 되는 것은 저의 계획에 있던 일이었습니다.
저는 이 일을 계획했고 최선을 다해서 그 계획을 실행하고자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동신교회 담임 목사가 되는 것은 저의 계획에 없던 일이었습니다.
제가 대구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 계획했던 적이 없습니다.
로잔 대회를 준비하는 것도 저의 계획에 없던 일이었습니다.
로잔 대회의 중요성은 잘 알고 있었지만 제가 이렇게 깊이 이 일에 관여하게 될지는 몰랐습니다.
인생은 우리의 계획대로 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인정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아무리 철두철미하게 계획을 세워도 그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전혀 계획에 없던 일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인도하심을 따라서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생각이 인간의 계획과 다를 때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5장 8절 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아멘. 여러분 이 말씀을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어차피 하나님의 뜻은 내 계획과 다르니깐 아무것도 계획할 필요가 없구나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이 말씀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계획할 수 있는 부분에서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계획을 세우는 것이 절대 나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높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향해서 열려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숙한 사람의 마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했습니다.
사도행전을 크게 두 부분으로 우리가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부는 1장부터 12장까지로 그 중심에 베드로가 있습니다.
복음이 어떻게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로 전해졌는지 기술하고 있습니다.
후반부는 13장부터 28장까지로 그 중심에 바울이 있습니다.
복음이 아시아와 유럽으로 전해진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행전 후반부의 시작입니다.
사도행전 13장에서 안디옥 교회가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하는 장면으로 후반부가 시작됩니다.
사도행전 13장 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아멘, 주를 섬기다라는 말은 주님을 예배하다라는 뜻입니다.
온 교회가 함께 주님을 예배하고 금식할 때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맡기시는 사명을 위해서 바나바와 바울을 세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디옥교회는 기쁜 마음으로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를 안수하여 보냈습니다.
그렇게 보냄을 받은 두 사람은 이방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바울의 1차 전도 여행이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 전도 여행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핵심이 되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았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그브로에 가서"
바울과 바나바가 전도 여행을 떠나면서 그들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았다 하는 것을 기억했습니다.
이것은 선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고 동시에 가장 기본적인 개념입니다.
선교를 라틴어로 미시오라고 하는데, 그 문자적인 의미는 보내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선교사는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최고의 선교사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보냄 받은 자였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지칭하실 때 항상 사용했던 표현이 나를 보내신 이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보냄 받은 자로서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셨을까요?
모든 선교사들의 모델이 되시는 예수님의 태도는 요한복음에 잘 나와 있습니다.
6장 38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아멘, 예수님은 자신의 뜻을 행하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을 보내신 이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보냄 받은 자가 가져야 하는 태도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보냄 받은 자입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분의 제자들을 세상 가운데로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20장 21절에 보니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보냄 받은 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않습니다.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본을 보여주셨던 모습이었습니다.
제가 선교사 시절에 자주 하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제가 잠시 잊고 있었는데 지난 주간에 만났던 한 목사님께서 이것을 기억나게 하셨습니다.
제가 선교사 시절에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선교사로서 미숙한 경우가 있고 성숙한 경우가 있습니다.
미숙한 선교사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현지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현지의 필요를 생각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성숙한 선교사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현지에서 필요로 하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계획과 자기의 생각, 자기의 어젠다를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 말씀하시는 그 사역에 순종하는 사람이 성숙한 선교사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의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계획을 내려놓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가라고 하시는 곳에 가서 성령께서 만나게 하시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듣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들은 진심으로 기뻐했습니다.
반면에 복음을 거절하고 그들을 핍박하는 사람들을 만나도 그들은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목표는 눈에 보이는 열매를 거두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일의 결과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당장 열매를 거둘 수도 있고, 아니면 오랜 후에 열매를 거둘 수도 있습니다.
내가 열매를 거둘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사람이 열매를 거둘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성령께 순종하여서 성령께서 하라고 하시는 그 일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냄 받은 자의 합당한 태도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께서 지금 이 자리에서 예배드리시는 것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대구동신교회로 보내주셨습니다.
대구에 많은 교회가 있지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동신교회로 보내셨습니다.
그러면 보냄 받은 자로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여러분이 보내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동신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복음으로 사람을 살리고 키우고 고치는 생명 사역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동신교회로 보내셨으니 이 생명 사역에 동참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인 줄로 믿습니다.
예배와 기도 가운데 생명 사역에 동참하고 교육과 훈련으로 동참해야 합니다.
전도와 선교를 통해서 생명 사역에 동참하고 또한 구제와 봉사를 통해서 동참해야 합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동신교회 성도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주일 예배 드리기 위해서 수성대학교에 주차하고 내려오는 것만 해도 어려운 일이지요.
예배 30분 전에는 교회에 도착해야지 주차하고 내려와서 본당에 앉을 수 있습니다.
정시에 도착하면요. 주차도 못하고 본당에 들어올 수도 없습니다.
일반적인 경우에는 성수기가 있으면 비수기가 있죠.
이리 바쁜 시즌이 있으면 조금 한가한 시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는 '성수기'가 있고 '극성수기'가 있습니다.
한창 바쁜 시즌이 있으면 이제 그다음에 더 바쁜 시즌이 오고 있죠.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가 절대로 일 중독자가 아닙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일 벌이는 것을 싫어합니다.
저는 딱 우리에게 주어진 그 일을 탁월하게 잘하기를 원하지 이것저것 일 벌이는 거 좋아하지 않습니다.
제가 정기적으로 담임 목사로서 하는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교회가 하고 있는 일을 쭉 돌아보면서 이 중에서 우리가 꼭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 무엇이 있는가 생각하는 것이 제가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꼭 안 해도 되는 일에 에너지와 재정을 쓰고 있다면 이것은 일종의 낭비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일 중에서 소모적인 일은 거의 없습니다.
생명사역 5대 분야에서 꼭 필요한 일들을 우리가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목회자 중심으로 중직자 중심으로 할 수 없습니다.
수많은 성도들의 참여와 헌신이 필요합니다.
감사하게도 많은 성도님들께서 자발적으로 열정적으로 생명 사역에 동참하고 계십니다.
예를 들어서 이번 주 토요일부터 앞으로 4주 동안 자녀와 소통하는 부모 세미나가 열립니다.
감사하게도 참가자는 오래전에 마감되었습니다.
어제 토요일부터는 3주 동안 기도하는 엄마들 MIP 세미나가 열리고 있습니다.
왜 엄마들만 기도하냐고, 아빠들도 기도하면 안 되냐고 해서 아빠들도 신청을 받았는데 참가자는 이미 오래전에 마감되었습니다.
6월 말에는 다음 세대 생명존중 캠페인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대구 지역에 있는 보육원과 미혼모 센터를 섬기는 귀한 사역입니다.
이번에 처음 시작하는 사역이니까 얼마나 참여하실까 생각이 있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자원봉사자는 이미 다 마감되었습니다.
동신교회 성도하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께서 영적으로 성장하시는 일이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교와 봉사에 힘쓰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동신교회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이곳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할 줄 믿습니다.
생명 사역에 헌신하는 것, 세계 선교를 위해서 헌신하는 것, 이것이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 보냄 받은 자로서 보내신 이의 뜻을 기쁨으로 행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비시디아 안디옥에 도착한 바울과 바나바는 안식일이 오자 유대인 회당에 가서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1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들은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아멘 바울과 바나바가 길거리에서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 도시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위해서 유대인 회당에 찾아가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이방 지역에 흩어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구약 성경에 예언했던 그 메시아가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했습니다.
오늘 본문 33절에 보니까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고 증거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그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모세의 율법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다 받을 수 없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모든 사람이 다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되는 그 길이 열린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분명하게 깨달았습니다.
이 복음 안에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신 하나님의 능력이 담겨 있는데 먼저는 유대인에게 그다음에 헬라인에게로다라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던 유대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먼저 복음을 들었던 그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절한 것이었습니다.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마음을 완악하게 해서 복음을 거절했습니다.
오히려 그 도시에 살고 있던 이방인들이 복음에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사도행전 13장 44절, 45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그 성에 살고 있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자 모인 것을 보고 시기하여서 바울을 비방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사역 가운데 큰 열매가 있는 것을 보고 유대인들이 시기해서 그를 비방했습니다.
그냥 비방한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 성에 살고 있는 유력자들을 선동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했습니다.
바울이 잘 되는 것을 보지 못해서 못 살게 하려고 온갖 훼방을 놓은 것입니다.
여러분 뭐 이런 말 들어보셨죠? 선배가 후보에게 하는 말입니다.
'내가 너를 잘 되게는 못해도 못 되게는 할 수 있다'라는 말 하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절대로 어디 가서 이런 말 하지 않기를 부탁드립니다.
누군가를 시기하고 미워하는 것에는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힘은 긍정적인 힘이 아니라 파괴적인 힘입니다.
나의 힘과 열정을 다해서 누군가를 못되게 하려고 하는 것 너무너무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것은 절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성경은 아이 악인을 죽일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그 악인을 응징하고 막 파괴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방법으로 악인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바울이 그를 훼방하고 비방하는 박해하는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담대한 마음으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본문 4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채로 자초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아멘. 복음을 거절하고 바울을 비방하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바울과 바나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이 복음을 버렸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간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바울이 처음부터 이방인의 사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길 원했습니다.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는 자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그 복음을 거절했습니다.
바울이 최선을 다해서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계획대로 되지 않은 것입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실패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계획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런 상황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듣고 주님께로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나의 계획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를 수 있겠구나라고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 복음을 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이방인을 향해 가야 하는구나라고 말했습니다.
2천년 기독교 역사를 보면 이와 비슷한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16세기 독일에서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원래 카톨릭 신부였습니다.
그는 카톨릭 교회를 사랑했고 카톨릭 교회가 개혁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수도원 운동에 동참해서 교회를 개혁하고자 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종교개혁의 시작을 1517년이라고 말합니다.
1517년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썼습니다.
근데 루터가 이 글을 쓴 것이 새로운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쓴 것이 아닙니다.
95개조 방법론을 읽어보면 카톨릭 교회에 대한 도전, 면죄부에 대한 도전이 아니었습니다.
루터는 면죄부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돈을 받고 면죄부를 판매하는 그 행위에 대해서 지적을 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루터는 철저하게 카톨릭 신학을 따르고 있던 카톨릭 신부였습니다.
그런데 교황 레오 10세가 이것을 아주 심각한 도전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1521년에 루터를 파문시켰습니다.
루터가 스스로 카톨릭 교회를 나온 것이 아니라 교황으로부터 파문당해서 어쩔 수 없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 바로 개신교회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200년 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18세기 영국에서 복음주의 부흥 운동을 이끌었던 사람이 존 웨슬리(John Wesley)였습니다.
이는 성공회 교회의 사제였고, 이 부흥운동을 통해서 영국 성공의 교회를 개혁하기 원했습니다.
웨슬리는 절대로 성공의 교회를 떠날 계획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성공의 교회 주교들이 웨슬리를 열광주의자라고 비판하면서 그의 교구를 박탈했습니다.
자기 교회, 자기 교구를 잃어버린 웨슬리는 '전 세계가 나의 교구이다'라고 말하면서 순회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들으면은 '전 세계가 나의 교구이다'라는 말이 멋있어 보이지만 이것은 세계 선교를 향한 어떤 비전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교구를 잃어버린 웨슬리가 낙심하지 않기 위해서 했던 말이었습니다.
웨슬리는 그래서 교회당이 아니라 야외에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 교구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산업혁명으로 많은 노동자들이 있었는데 웨슬리는 그들을 찾아가서 그 공장에서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 감리교회였습니다.
사도바울 역시 스스로 계획해서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구속의 그 계획에 따라서 유대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절하고 그를 비방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방인에게 가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계획대로 사역하지 않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사역을 섬겼습니다.
바울의 목표는 자기가 계획한 것을 다 이루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목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이 처음부터 다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주님의 뜻에 인도하심에 순종하다 보면 나중에 가서야 그분의 뜻과 섭리를 깨달으게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봐도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 처음 고향을 떠날 때에 어디로 가야 할지 다 알고 떠났던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내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아멘. 보여준 땅이 아니라 미래형 보여줄 땅입니다.
그러니까 처음에 아브라함이 떠날 때 어디로 갈지 하나님께서 다 알려주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고향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계획보다 더 완벽한 하나님의 뜻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우리의 계획대로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이 지금 이렇게 될 줄 알고 처음부터 계획해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인생을 돌아보면 예상하지 못했던 어려움도 많이 있었고, 고난도 많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그 고난의 터널을 지나가고 계신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인생에 고난이 많이 있지만 선하신 하나님께서 그 모든 고난을 감당할 수 있는 힘과 은혜를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내 계획보다 더 완벽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담대한 용기'입니다.
본문 46절에 보니까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였다'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을 대적하는 비판하는 유대인들을 보면서 담대함을 가졌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이 담대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비판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우리를 비난하고 비판한다고 해서 무슨 큰 일이 벌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일을 하는 동안에 받는 비판은 우리가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눈에 띄는 사람을 비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앞장서서 일하는 사람을 보면 격려하기보다 비판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제가 로잔대회를 섬기게 되었을 때에 이러한 염려가 있었습니다.
젊은 목사가 이렇게 큰 책임을 맡으면 분명히 비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을 제가 알았습니다.
담임목회 초기에 자기 교회나 잘 돌볼 것이지 뭐 한다고 로잔대회까지 하느냐라는 말 분명히 할 거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제가 비판받는 건 괜찮은데 혹시나 우리 교회까지 비판을 받을까 염려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일을 꼭 해야 하는지를 놓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제 마음 가운데 주신 질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너의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비판받지 않는 것이 너의 목표이냐? 아니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이 너의 목표인가?
주님께서 물어보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 질문 앞에서 제가 제 마음을 결정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비판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 일에 순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지금도 보면 가끔 로잔대회를 비판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로잔의 신학이 우리 교단과 다르다, 로잔의 리더들에게 문제가 있다 등등의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난달에 한국 로잔위원회와 한국교회총연합회가 정식으로 MOU를 맺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 교단 총회장 목사님께서 직접 오셔서 서명을 하셨습니다.
종신대학교 총장님은 저에게 연락하셔서 로잔대회를 위해서 애써줘서 고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종신대학교 이사장님 교회에서는 저를 초청해서 로잔대회에 대한 강의를 부탁하셨습니다.
우리 교단 총회장, 총신대학교 총장, 이사장 모두가 로잔대회를 지지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잔에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은 어떻게든 문제를 만들어서 주목을 끌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이자 미국의 상원 의원이었던 로버트 케네디(Robert F. Kennedy)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20%는 모든 일에 항상 반대한다' 라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나를 반대하고 비판하는 사람을 보면서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의 20%는 모든 일에 항상 반대하기 때문입니다.
비판받지 않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을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길을 가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분의 선한 뜻을 이루어 갈 줄로 믿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인들의 비난과 반대,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담대한 용기를 가지고 그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원래의 자기 계획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그렇게 할 때 이방인 선교라는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갈 수 있었습니다.
나의 계획보다 훨씬 더 완벽한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면서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주님께 순종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마무리되게 됩니다.
본문 52절 함께 읽겠습니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바울과 바나바의 사역에는 성공과 실패가 함께 있었습니다.
그들이 전했던 복음에 반응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들의 메시지를 거부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선교의 현실이고 목회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선교와 목회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성공과 실패가 혼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인해서 변화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변화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에 그 사역은 성공일까요? 실패일까요?
변화된 사람이 있으니까 성공일까요? 아니면 여전히 변화되지 않은 사람이 있으니까 실패일까요?
여기에서 이제 관점의 차이가 발생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목사님께서 은퇴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지난 나의 목회를 돌아보니까 저는 실패한 목회자인 것 같습니다. 과연 내 목회로 변화된 성도가 몇 명이나 있을까 생각하니까 그렇습니다'라고 말씀했다고 합니다.
제가 이야기를 직접 들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이 겸손의 말씀인지 아니면 후회의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감히 제가 한 말씀 올리자면 그 목사님의 목회로 변화되지 않은 성도도 있지만 분명히 변화된 성도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역이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누가 말할 수 있을까요?
당사자가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그 교회의 중직들이 말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결과를 가지고 성공을 말하곤 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어떤 성장과 부흥을 보면서 성공했다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쁨은 진정한 기쁨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기쁨은 결과와 상관없이 눈에 보이는 상황과 상관없이 느끼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눈에 보이는 상황과 상관없이 느끼는 기쁨을 경험했던 적이 계십니까?
결과가 좋든지 나쁘든지 내 계획대로 되었던지 안 되었던지 상관없이 느끼는 그 기쁨을 경험했던 적이 계십니까?
이러한 기쁨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나를 보내신 그 하나님의 뜻을 행할 때 이 기쁨을 누릴 줄 믿습니다.
이 기쁨은 너무나 크기 때문에 도저히 숨길 수가 없습니다.
이 기쁨은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빼앗아갈 수가 없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쫓겨나면서도 이 기쁨을 느꼈습니다.
그냥 기쁨을 느낀 정도가 아닙니다.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복음을 전하다가 박해를 받아서 쫓겨나고 있는데 어떻게 기쁨으로 충만할 수가 있을까요?
그들의 목표는 눈에 보이는 결과를 만드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목표는 빨리 복음화해서 빨리 큰 교회 세우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목표는 아주 단순했습니다.
자신들의 계획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령께서 보내시는 곳으로 가서 성령께서 주시는 그 메시지를 증거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습니다.
만약에 그곳에서 전도의 열매가 있다면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만약에 그곳에서 박해를 받아서 쫓겨난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목표는 자기의 계획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요한복음 8장 29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함으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아멘, 예수님의 목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목표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들, 우리를 비판하는 사람들,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길을 택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진정한 기쁨은 나의 계획을 이루는 것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에 있습니다.
누구도 알 수 없고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이 진정한 기쁨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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