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사도행전 12장 20~24
여러분은 과시와 허영이 많은 사람을 만났던 적이 있으십니까?
자기 모습을 과장해서 허세를 부리고 자랑하는 사람들을 만나본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 주변에 그러한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을 것입니다.
주변에 보면 우아한 사람이 있습니다.
말과 행동이 우아하고 옷차림이 우아한 분이 계시지요 그런가 하면 우아한 척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아한 사람과 우아한 척하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또 주변에 보면 지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분야에 아는 것이 많고 박식한 사람이 있지 그런가 하면 지적인 척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적인 사람과 지적인 척하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진짜 우아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렇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누가 보든지 보지 않든지 그렇게 살아갑니다.
진짜 지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기 위해서 자기 지식을 나누지 않습니다.
그 대화의 흐름에서 꼭 필요한 이야기만 할 것입니다.
반면에 우아한 척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렇게 행동합니다.
지적인 척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기 위해서 자기의 지식을 늘어놓습니다.
허세를 부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문화사회학에서 사용하는 용어 중에 스노비즘 (Snobbism)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그 의미는 본질에는 관심이 없으면서 남에게 과시하기 위해서 껍데기만 빌려오는 허용을 뜻합니다.
원래 이 표현은 영어 단어 스나(snob) 에서 유래했습니다.
19세기 영국에서 snob 은 하류층 사람을 뜻했습니다.
그런데 그 의미가 조금 확대되어서 하류층이지만 신사인 척하는 사람, 고상한 척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추가적으로 생기게 되었습니다.
산업혁명 이후에 상류층에 속하고 싶어서 여러 가지 사치와 허영을 부리는 경우가 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어로 와인 스나(wine snob) 하면 와인에 정통한 척하는 사람입니다.
실제로는 와인에 대해서 잘 모르는데 와인을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경우이죠.
또 용어로 intellectual snob 하면 많이 아는 척, 지적인 척하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지성적이지 않은데 아주 지적인 것처럼 연기하는 것이죠.
혹시 여러분은 오페라를 좋아하십니까? 저는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데 오페라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지금까지 아마 오페라를 딱 하나 본 것 같습니다.
오페라의 묘미를 아시는 분은 오페라가 정말로 감동적이고 매력적이라고 하십니다.
19세기 영국에서 오페라를 본다는 것은 상류층에 속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실제로는 오페라를 좋아하지 않는데 상류층에 속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과시하기 위해서 오페라를 보러 갔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오페라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오페라를 보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 집중한다고 합니다.
얼마나 웃긴 모습입니까? 오페라를 보러 갔으면 오페라에 집중해야지 그것을 보고 있는 자신에게 심취한 것입니다.
타인에 대한 우월감, 상류층에 속했다는 우월감이 이렇게 옆에서 보면 우스운 모습입니다.
과시와 허영에 빠진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 본연의 모습대로 살아가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레스토랑에 가서도 아니면 좋은 여행지에 가서도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는 것에 집중하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오페라를 보러 가서 오페라에 집중하지 않고 오페라를 보고 있는 자신에게 심취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 다른 사람의 반응을 두려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렇게 살아갔던 사람들이 어떠한 결말을 맞고 있는지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헤롯 왕이 아주 좋은 예입니다.
사도행전 12장은 헤롯 왕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12장 1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아려 하여
성경에는 여러 명의 헤롯 왕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탄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헤롯이 있습니다.
또한 세례 요한을 처형했던 헤롯도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사도행전 12장에 나오는 헤롯도 있습니다.
이들은 다 다른 사람입니다.
헤롯이 특정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가문의 이름이자 왕가의 이름이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그 사람, 그 헤롯은 헤롯 대왕입니다.
그는 폭군으로 유명했습니다.
자기 왕권을 노린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다 처단했습니다.
정치적인 라이블뿐만 아니라 자기 가족들까지도 처형했습니다.
심지어 자기 아들들까지도 처형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헤롯은 아그립바 1세(Agrippa I)인데 그는 헤롯 대왕의 손자였습니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는데, 아버지를 처형했던 사람이 바로 할아버지였습니다.
상처가 많고 쓴 뿌리가 많은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를 여의고, 그는 로마로 이주해서 로마 황실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곳에서 로마의 왕자들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오랜 친구 글라우디오가 로마 황제로 등극하자 그는 유대 지방과 사마리아 지방을 다스리는 그 통치권을 얻게 되었습니다.
타향살이를 청산하고 이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로마에서 자란 그 사람은 유대 지역에서 정치적 기반이 약했습니다.
백성들이 그의 권위를 인정하고 마음으로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그립바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야만 했습니다.
정치적인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유대인들이 좋아하는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를 핍박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바리새인들을 존경했습니다.
그런데 그 바리새인들이 싫어했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었고, 그의 제자들이 세운 그 교회를 싫어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종교 권력, 예루살렘 성전은 사두개인들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두개인들도 예수님을 싫어했고, 예수님을 종교 재판으로 넘겼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도개인들은 사실 서로 이제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신학적으로 정치적으로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 예수님을 싫어했고, 그분의 교회를 싫어했습니다.
서로 입장이 다른 두 진영이 있는데 공공의 적이 있었습니다.
아그립바 가 이 두 진영으로부터 인기를 얻기 위해서는 이 공공의 적을 공격하면 됐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이 아그립바 는 교회의 리더 중에 한 사람을 잡아서 처형했습니다.
본문 2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예수님께서 아끼셨던 제자가 3명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어디로 가든지 함께 데리고 다녔던 사람이 3명 있었는데, 그들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가실 때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실 때 이 3명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리실 때에도 그 방안으로 이 3명만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십자가를 앞두고 게셀만의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이 3명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과 가장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한 명이었던 야고보가 순교했습니다.
그것도 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육체의 부활을 믿었기 때문에 죄수를 칼로 죽이지 않았습니다.
칼로 베는 것은 로마 방식의 사형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정말로 비참하고 참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야고보에게 어떤 문제가 있어서 영적으로 타락해서 이렇게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끝까지 신실하게 믿음을 지켰습니다.
야고보도 믿음을 지켰고, 베드로도 믿음을 지켰고, 요한도 믿음을 지켰습니다.
예수님은 이 3명을 특별하게 사랑하셔서 어디든지 가든지 함께 데리고 다녀오셨습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한 명은 일찍 순교했고, 한 명은 여러 가지 고초를 당했고, 또 한 명은 오랫동안 살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은 이 3명 모두를 특별하게 사랑하셨는데 왜 한 명은 일찍 순교하고 또 한 명은 여러 가지 고초를 당하고 또 한 명은 오랫동안 살았을까요?
사도행전 12장을 보면 베드로가 이제 감옥에 갇혔을 때 천사의 도움으로 빠져나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 하나님은 베드로는 구해주셨고, 야고보는 구해주시지 않았을까요?
둘 다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는데, 왜 한 명은 도와주시고 한 명은 도와주지 않으셨을까요?
인간은 제한된 관점과 제한된 지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시는지 모두 다 속 시원하게 알 수 없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이유를 설명해 주고 싶어도 우리의 이해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다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저희가 아프리카에서 키우던 고양이를 한국으로 데려올 때 고양이가 느꼈던 것과 비슷할 것입니다.
부룬디에서 한국으로 올 때 비행기로 20시간 정도 걸렸는데, 그 시간이 고양이에게 너무너무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왜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 저희 고양이는 아마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희도 고양이에게 설명해 주고 싶었죠.
우리가 지금 부룬디에서 한국으로 가고 있는데 한국 가면 훨씬 더 살기 좋고 너가 좋아하는 맛있는 사료도 훨씬 더 많이 있다고 설명해 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죠. 저희가 이것을 고양이에게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고양이의 이해에는 제한이 있었기 때문에 도무지 이것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믿음이 좋은 사람에게도 힘든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야고보에게 어떤 문제가 생겨서 이런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정말 슬픈 일이고 부당한 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이것은 단지 비극이 아니고 비교할 수 없는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길입니다.
지난 5월 22일 열흘 전에 영국 의회에서는 아주 특별한 일이 있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영국 의회에서는 품위 유지를 위해서 박수치는 일을 금지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하원 의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치는 일이 있었습니다.
역사와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영국 의회에서 아주 이례적인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모든 의원들의 박수를 받았던 사람은 패혈증으로 두 손과 두 발을 절단했던 크레이그 맥킨레이라는 의원입니다.
https://youtu.be/d5a6CXOYO74
가운데 있는 의원입니다.
작년 9월 패혈증에 걸려서 그는 병원에 입원했고 무려 16일 동안 혼수 상태에 빠졌습니다.
생존 확률이 5%에 불과했지만 그는 굳건한 소망을 가지고 그 시간을 견뎠습니다.
심각한 감염으로 인해서 두 손과 두 발을 절단해야 했지만 그는 건강을 다시 되찾았고 다시 의회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의수와 의족을 하고 나왔지만 맥킨레이의원의 표정은 아주 밝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동료 의원들이 그가 보여준 용기와 인내에 기립박수로 경의를 표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영국 의회의 오랜 금기 사항이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맥캔레이 의원이 왜 패혈증에 걸렸을까요?
그가 무슨 잘못을 해서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병에 걸린 것일까요?
그 이유를 가지고 논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의학적인 의미에서 100% 인과관계가 설명되지 않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맥캔레이 의원이 그의 고난에 어떻게 반응하였는가입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 가운데 좌절한 것이 아니라 그는 인내와 용기를 가지고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에게 도전과 감동을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동일한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소망을 주었어 또한 그들을 위로하는 일을 하고자 준비하고 있습니다.
패혈증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정책을 만들어서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자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시편에 보면 순교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정이 나타난 말씀이 있습니다.
야고보와 같이 신실한 자들이 죽임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느끼시는지 나온 구절이 있습니다.
시편 116편 15절 함께 읽겠습니다.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아멘. 여러분 이 말씀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스스로 완전하신 분이시고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과연 무엇이 필요하실까요?
과연 그분 앞에서 그 어떤 것이 귀중한 것일까요?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하나님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다라고 선포합니다.
예수님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야고보는 일찍 순교했습니다.
반면에 그의 형제 요한은 아주 오랫동안 살면서 맡겨진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러면 요한은 야고보보다 더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던 것일까요?
더 오랫동안 살면서 더 많은 사역을 감당했고, 더 많은 성경도 기록했으니깐 천국에 가면 요한의 상급이 더 많이 있을까요?
꼭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성공과 우리가 생각하는 그 성공의 기준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더 테레사는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신실한 것이다"
(God does not require that we be successful only that we be faithful)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 인간의 눈에는 눈에 보이는 열매를 많이 맺어야지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성공적인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사업에서도 성공하길 원하고, 가정에서도 성공하길 원하고, 교회에서도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공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실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야고보는 아주 귀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에 신실하게 임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형제 요한도 아주 귀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에 신실하게 임했기 때문입니다.
아그립바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그는 사람을 신경 쓰고 사람을 두려워하면서 살아갔습니다.
하지만 야고보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육체를 멸할 수 있는 자를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육체와 영혼 모두 멸할 수 있는 하나님만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아름다운 인생인 줄로 믿습니다.
바라기는 여러분 모두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인생을 살아가서 주님 앞에서 칭찬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그립바는 야고보를 죽이고 또 베드로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황제를 기념하는 축제에 참가하기 위해서 가이사라로 떠났습니다.
가이사라는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100km 떨어진 지역으로 로마의 황제가 유대 지방 전체의 수도로 지정한 도시였습니다.
전통적으로 그 유대의 왕들과 로마의 총독들은 가이사리아에 거주했습니다.
총독 빌라도 역시 가이사라에 거주했습니다. 그곳에 이른 이제 아그리반은 화려하게 꾸며 입고 대극장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도행전 12장 21절, 22절 함께 읽겠습니다.
"헤롯이 나를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니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이 구절만 보면 왜 백성들이 왕을 신격화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1세기 유대 역사가였던 요세푸스는 아주 상세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일반인들은 요세푸스에 대해서 잘 모를 수 있지만 고고학자들은 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을 믿지 않는 고고학자들도 요세푸스의 그 기록은 아주 역사적으로 정확하다고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요세푸스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의 내용을 알지도 못했고, 성경을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세푸스의 글과 신약 성경의 내용이 서로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입니다.
예를 들어서 성경에 보면 세례 요한을 죽여달라고 요청했던 사람이 헤로디아의 딸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성경에는 그녀의 이름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세푸스의 글을 보면 그녀의 이름이 살로메라고 나와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살로메 3세였습니다. 헤롯 왕가에 살로메가 3명 있었기 때문이죠.
고고학자들이 그래서 헤로디아의 딸의 이름이 무엇인지 연구를 했더니 그 이름이 살로메가 맞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요세푸스의 글과 성경에 있었던 그 사건을 함께 읽으면 전체적인 그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성경에는 헤롯이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았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세푸스는 그날의 사건을 아주 상세하게 기록했습니다.
내용이 조금 길지만 이 장면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그 글을 함께 보면 좋겠습니다.
" 아그립바는 공연의 두 번째 날 동이 틀 무렵에 전체를 은으로 만든 예복을 입고 매우 우아하게 몸을 흔들면서 극장으로 들어갔다. 은으로 만들어진 옷에 태양의 첫 번째 광선이 비추자 매우 아름답게 번쩍거리면서 광채가 났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은 그 광채로 인해 일종의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혔다. 아그립바의 아첨꾼들은 그를 신이라고 부르면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아그립바는 그 아첨꾼들을 꾸짖지도 않고 그들의 불경한 아첨의 말을 부인하지도 않았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그립바 왕은 아주 치밀하게 이날의 이벤트를 준비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는 고대 사회에서 만들 수 있는 가장 화려한 예복을 준비했습니다.
옷 전체가 은으로 덮인 왕복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일부러 동이 틀 무렵에 그 옷을 입고 나갔습니다.
아침 해가 떠오르면서 그 햇살이 왕복을 비추자 화려하고 찬란하게 반짝거렸습니다.
백성들이 이 모습을 보고 두려움에 빠질 정도로 황홀한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권력과 영광을 과시하는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봐라. 나는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다라고 과시하면서 사람들을 굴복시키고자 하는 그런 리더의 전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과시하는 사람 중에서 많은 경우가 마음이 불안정하고 자아상이 건강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정말로 우아한 사람은 우아한 척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정말로 지적인 사람은 지적인 척하지 않습니다.
그냥 원래 모습대로 편안하게 살아갑니다.
지식을 자랑하고 화려함을 자랑하는 사람은 오히려 마음이 불안정한 사람입니다.
리더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권력을 자랑하고 자기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은 마음이 불안정한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자꾸 외형적인 화려함을 자랑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리더를 만나본 적이 몇 번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화려한 건물, 예산 조직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신문과 방송에 보도된 내용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저는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궁금했습니다.
그분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행복한지, 분명한 비전과 목표와 동기부여를 가지고 일하고 있는지가 궁금했습니다.
서로 유기적으로 잘 움직이고 있는지, 팀의 화합은 어떤지가 궁금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화려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제로 그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스위스에 있는 루체른 대학의 마틴 구트만(Martin Gutmann) 교수는 사람들이 흔히 가진 리더십에 대한 오해에 대해서 지적했습니다.
그의 책 언신리더(The Unseen Leader)에 보면 이런 주장이 나와 있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나타나서 영웅적인 용기와 카리스마로 공동체를 구하는 것이 훌륭한 리더라고 생각하지만, 진정한 리더는 다가오는 위기를 예측하고 선제적으로 다루어서 혼란스러운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는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 이 말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어떤 훌륭한 리더를 생각할 때 항상 위기의 상황을 떠올립니다.
위기의 상황이 있는데 그때 나타나서 그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좋은 리더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사람도 훌륭한 리더가 맞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훌륭한 리더는 위기를 미리 예측해서 위험한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멀리서 보면 피상적으로 보면 그 사람은 아무런 위기를 겪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정말로 운이 좋아서 아무 위기가 없었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그에게도 수많은 위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위기가 더 커지기 전에 미리 조치를 취했습니다.
선제적으로 그 위기를 다루어서 모두가 혼란스러워하는 그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 그럼 누가 더 훌륭한 리더입니까?
위기의 순간에 나타나서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위기를 극복하는 사람이 훌륭한 리더입니까?
아니면 구성원의 역량을 키우고 팀의 화합을 이끌어서 위기가 오기 전에 선제적으로 그것을 다루는 사람이 훌륭한 리더입니까?
후자가 훨씬 더 훌륭한 리더입니다.
그런 리더를 가리켜서 구트만 교수는 보이지 않는 리더, Unseen Leader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고대 중국의 요순 시대는 태평성대로 유명합니다.
외부와 전쟁이 없었고요. 온 나라가 평안하고 안정되었습니다.
나라가 평안하다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여러분 나라가 평안하면 백성들이 왕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하루는 요임금이 백성들의 생활상을 살피기 위해서 평민으로 꾸미고 시찰을 나갔다고 합니다.
길을 걷다가 한 남자가 그늘에 앉아서 부르는 노래를 들었습니다.
그는 이런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해 뜨면 일하고, 해지면 잠잔다. 우물 파서 마시고 밭 갈아 먹으니 임금의 힘이 내게 무엇 있으리오"라고 노래를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노래가 무슨 의미입니까?
갈등 없이 평안하게 살고 있으니까 임금의 힘이 필요 없다는 뜻이죠.
정말로 훌륭한 임금은 임금이 있는지 없는지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나라를 평안하게 만드는 사람이 훌륭한 임금입니다.
임금이 자신의 권력을 드러내고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정치적인 무능을 불안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정말로 훌륭한 리더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공동체가 평안하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그립바 왕은 훌륭한 리더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마음이 불안정한 사람이었고, 자아상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화려함을 백성들 앞에서 드러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아그립바가 사람들의 칭송을 받고 나서 스스로 그 영광을 취했습니다.
그러자 마침내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기다리시다가 그에게 심판을 행하셨습니다.
본문 2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아멘 주의 사자가 그를 쳐서 벌레에게 먹혀서 죽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벌레에게 먹혀 죽었다'라는 표현은 고대 사회에서 포악한 독재자 죽어 마땅한 사람의 죽음을 묘사하는 관용적인 표현이었습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아그립바의 죽음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아그립바는 창자의 극심한 고통을 느끼기 시작했고, 그 고통은 순식간에 점점 더 심해졌다.
그는 서둘러 왕궁으로 실려 들어갔고, 복통으로 5일간을 계속해서 고통스러워하다가 죽고 말았다.
그때 아그립바의 나이는 54세였고 통치 7년째였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성경의 기록과 유시푸스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아그립바는 복막염 혹은 급성 장폐색에 걸려서 죽은 것 같습니다.
그 병은 아주 빠르게 진행되어서 발병 5일 만에 그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아그립바는 유대 지방의 왕으로 7년을 통치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기세 등등한 모습, 권력과 영광을 자랑하던 그 모습에 비하면 너무나도 허망한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교만한 자를 싫어하시는지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5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아멘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교만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명문대학을 나온 유명한 발라드 가수가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꼭 겸손해야 하나요? 겸손하면 좋지만, 교만한 게 죄는 아니잖아요'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이 말이 교만에 대한 세상의 관점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겸손하면 좋지만, 교만한 게 죄는 아니잖아요가 바로 이 세상의 관점입니다.
이것은 실정법상으로도 맞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나라 형법에서 교만으로 사람을 처벌할 수 없습니다.
돈 자랑한다고, 자식 자랑한다고 벌금을 부과하지 않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도 교만으로 사람을 처벌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교만을 가장 심각한 죄로 여깁니다.
하늘의 천사가 탈락했던 것도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최초의 인간이 탈락한 것도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죄가 하나님과 인간을 멀어지게 하지만 교만은 특별히 인간을 하나님보다 위에 놓으려고 하기 때문에 가장 파괴적인 죄입니다.
그래서 영국의 기독교 사상가 쓰에스 루이스는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교만에 비하면 다른 죄들은 벼룩에 물린 자국과 같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데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교만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다음과 같은 구절로 마무리됩니다.
사도행전 12장 24절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하나님의 말씀이 힘을 얻고 널리 퍼지고 확장되었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말씀을 살아있는 생명체로 표현한 것입니다.
작은 씨앗이 자라나서 많은 열매를 맺은 것처럼 말씀이 성장해서 널리 퍼져갔습니다.
또한 이것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창세기 말씀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복을 주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는데 그때 사용된 단어가 'increased and multiplied'입니다.
동일한 단어가 사도행전 12장에도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면 사람을 생육하고 번성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교회가 흥왕하고 번성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그 하나님의 계획은 누구도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2장 전체를 한 번에 읽으면 아주 흥미로운 대조가 나옵니다.
교회를 박해하는 세상, 권력과 핍박 가운데에서도 힘있게 나아가는 교회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나옵니다.
12장 첫 시작은요. 아그립바 왕이 교회를 핍박하는 모습으로 나옵니다.
야고보를 칼로 처형을 하고 베드로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칼의 권력을 가진 그 세상 앞에서 교회는 너무나도 연약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12장의 마지막으로 가면 아그리바는 심판을 받아 죽었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던 그 왕이 사라졌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세력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그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2천년 기독교 역사가 보여주고 증명하는 사실입니다.
타락한 세상은 한결같이 교회를 박해하고 조롱해 왔습니다.
지금처럼 세상의 교회를 싫어했을 때가 또 있었을까 많이 있었습니다.
그 앞에서 교회는 너무나 연약해 보이고 실패했기 때문에 희망이 없어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그 하나님의 계획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지난 주간에 저는 웹 국제선교회 인터내셔널 카운셀에 참석했습니다.
웹 선교회는 캔브리지 7인 중에 한 명이었던 영국 선교사 시티 스터드가 세운 선교단체입니다.
현재 전 세계에서 1800명의 선교사님들이 귀한 사역을 섬기고 계십니다.
우리 교회 파송 선교사이신 박경남 선교사님께서 외계 국제 대표입니다.
아무도 안 놀라시는데 놀라운 일입니다.
영국에서 시작된 국제 선교단체의 대표를 한국 사람이 하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거든요.
선교사님의 부탁으로 제가 국제 리더십 미팅에 가서 말씀을 전하고 또 한국교회의 선교 운동에 대해서 패널 토의를 했습니다.
사진을 보시면 맥을 이끌어가는 전 세계 국제 리더 35명이 모였습니다.
대부분은 다 서양인들이었습니다.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네덜란드, 스위스 등에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분들과 함께했던 그 시간을 통해서 제가 한 가지 깨달은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이 시대에도 신실한 자들을 통해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여러분도 다 아시는 것처럼 요즘 유럽 교회가 많이 쇠퇴했습니다.
유럽 교회당이 텅텅 비었다. 교회가 레스토랑이나 술집으로 팔려간다는 뉴스를 많이 접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마치 유럽 교회에 무슨 소망이 있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웹 선교회에서 만났던 이 유럽 국제 대표들은 너무나도 신실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는 분들이었습니다.
정말 순수한 열정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하시는 분들이었습니다.
제가 이분들과 함께 예배드리고 찬양 부르는 그 시간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60세가 넘으신 여성 선교사님 두 분께서 나오셔서 찬양 인도를 하셨습니다.
한 분은 기타를 치시고 한 분은 키보드를 치셨는데, 이분들이 음악을 전공한 분들이 아니니까 코드도 틀리고 박자도 틀리고 아주 난리였습니다.
그 자리에 모이신 모든 유럽 선교사님들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뜨겁게 하나님을 찬양했는지 모릅니다.
제가 대학생 시절에 중국 지하 가정교회 갔을 때 그렇게 뜨겁게 예배드리고, 아마 두 번째로 그렇게 뜨겁게 예배드렸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온 땅의 소망이라고 마음으로 고백하는 그 찬양실이 너무나도 감동적이었습니다.
온 마음과 온 정성을 다해서 예수님을 높이는 모습을 보면서 제 안의 큰 감동을 느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저에게 확신을 주셨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하나님은 이 유럽인들의 순전한 믿음을 통해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유럽 교회가 다 쇠퇴했다고 말하는 이 시대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신실한 자들을 통해서 그분의 역사를 이어가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신실한 사람들,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은 야고보와 같이 신실한 마음으로 죽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베드로와 같이 신실한 마음으로 옥에 갇힐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신실한 마음으로 고난 가운데 있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모습으로 섬길지 다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주님 앞에서 신실한 마음으로 살아갈 때 주님은 그러한 우리를 통해서 그분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줄로 믿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8절부터 10절까지 이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쌓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로 트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아멘 세상의 권력이 하나님의 역사를 막을 수 없습니다.
그 어떠한 고난과 박해도 하나님의 역사를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예수의 생명을 가진 신실한 자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줄로 믿습니다.
자기를 과시하는 그 어리석은 길로 행하지 마시고 주님 앞에서 신실한 마음으로 순종하여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데 귀하게 쓰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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