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대원목사 설교

말의 힘을 아는 인생(6) 정당하지 않은 비판

by 마이코 2023. 10. 4.

2023.10.06

ㅣ마태복음 9장 9-13절

ㅣ문대원 목사

 

 

여러분은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십니까? 이번 명절 때 가족들이 모였을 때에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하셨습니까? 요즘은 명절 때 조카나 손주들에게 함부로 질문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 물어보려면 미리 돈을 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습니다.


취업은 했니? 물어보려면 10만 원 내야 하고요 결혼은 언제 할 거니 물어보려면 20만원 내야 하고, 애는 언제 낳을 거니 질문하려면 30만 원을 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데 기왕이면 좋은 이야기, 격려가 되는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에 대해서 험담을 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그 자리에 없는 사람에 대해서 험담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고 험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누군가를 험담한다고 해서 우리에게 돌아오는 경제적인 이익이 없습니다.


다른사람 험담을 잘한다고 누가 우리에게 돈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다른 사람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할까요? 그 이유는 다른 사람의 평판이 추락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데서 오는 만족감 때문인 것 같습니다.
험담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마음 안에 시기와 질투가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나는 충분히 행복하지 않은데 나보다 훨씬 더 행복한 사람을 보면서 배가 아픈 것이지요.
하지만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한 가지 있는데 다른 사람을 그렇게 많이 신경 쓰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 신경 쓰는 데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고 내가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내 일 열심히 해서 내 분야에서 탁월하기를 원합니다.


혹시 다른 사람이 잘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진심으로 축하를 해주면 됩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다른 사람의 험담을 즐기는 분이 계십니까? 자리에 없는 사람에 대해서 여러분은 좋은 이야기를 하십니까 아니면 나쁜 이야기를 하십니까?

 


혹시 험담을 즐기시는 분이 계시다면 마음속에 시기와 질투가 가득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험담에는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열심히 험담하는 목표는 상대방의 평판이 추락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내가 시기하고 질투하는 그 사람의 추락을 기뻐하는 것이 험담하는 사람의 심리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마태를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마테의 직업은 세리였습니다.
당시에 세리는 로마 제국의 앞잡이였습니다.
로마로부터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아서 동족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인두세, 소득세, 토지세 등 다양한 세금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마차의 바퀴 개수에 대한 세금도 거두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유대인들은 세리를 매국노와 도둑으로 취급했습니다.
세례는 당시 사회에서 가장 대표적인 죄인이었고 이방인과 같은 취급을 받았습니다.
이방인들은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는데 마찬가지로 세리들도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리는 유대인의 법정에서 증인으로 설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러한 세례를 자신의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세리의 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드셨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판했습니다.
마태복음 911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아멘.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에 그 갈등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왜 그렇게 예수님을 싫어했을까요? 자기 인생 살기에도 바쁠 텐데 그들은 왜 예수님께 그토록 신경을 많이 썼을까요?

 


당시 바리새인들은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에서 바리새인과 함께 등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사도개인입니다.
사도 개인들은 현실과 타협해서 로마의 통치 아래 제사장 직분을 독점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현실 정치에 타협해서 종교 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이 사도개인들입니다.
그에 비해서 바리새인들은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조선시대로 따지면 정치에 이제 물들지 않고 재야의 선비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에 정통할 뿐만 아니라 그 누구보다도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비유하면 은혜롭게 설교를 할 뿐만 아니라 자기가 설교한 대로 살아가는 목회자와 같습니다.
정치인들 가까이 하지 않고 순전하게 영적인 목적만 추구하는 그러한 목회자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는 종교 권력을 장악한 사도계인보다 바리새인들을 훨씬 더 많이 존경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바리새인들은 현실적인 이익을 다 포기했습니다.
그들이 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백성들의 신뢰와 존경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이 나타났습니다.
출신이 비천한 이 사람은 산상수훈을 통해서 놀라운 진리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외워서 가르쳤는데

 


예수님은 그 율법의 깊은 의미, 진정한 의미를 풀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가르침에는 놀라운 권위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마태복음 8장부터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나병 환자를 고치고,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고, 베드로의 장모를 고쳤습니다.
귀신 들린 자도 고치고 중풍병자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본 사람들은 깜짝 놀라서 그를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불렀습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 400년 동안 선지자가 없었는데, 400년 만에 하나님의 선지자가 나타난 것입니다.
갈릴리 지역에서 예수님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시기하고 질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는 현실적인 이익을 다 포기하고 오직 영적인 목적을 위해 살아왔는데, 갑자기 어느 날 누가 예수님이 나타나서

 


자기보다 훨씬 더 큰 주목과 존경을 받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시기하고 질투했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누군가를 시기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누군가를 시기하는 사람을 옆에서 지켜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모든 사람에게는 좋은 모습과 나쁜 모습이 다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비록 우리가 죄인이지만 좋은 모습도 있고 나쁜 모습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의 나쁜 모습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를 시기하고 질투할 때입니다.
다른 사람을 시기할 때 그에 대한 험담을 하게 되고요 어떻게든 그를 끌어내리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으면 얼마나 부끄럽고 추한 모습인지 모릅니다.
시기와 질투에 빠진 사람이 얼마나 추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예가 성경에 있습니다.
바로 사울 왕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습니다.
그는 키가 크고 용모가 준수했습니다.
온 백성이 그를 열렬히 따랐습니다. 이렇게 많은 것을 누렸으면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알고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울은 누구보다도 시기가 많고 질투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혹시 누가 나보다 더 인정받을까 노심초사했던 왕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자 사람들이 다윗을 칭송했습니다.
그 순간 사울은 다윗을 향한 시기와 질투 때문에 그를 죽이고자 했습니다.
사실 사울은 이렇게 말하죠. 내가 내 아들 요나단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서 다윗을 죽여야 한다고.
말은 하지만 아마도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아들을 위하는 마음보다 다윗을 시기하는 마음이 훨씬 더 컸을 것입니다.

 


나보다 더 인기 있고 나보다 더 인정받는 사람을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기와 질투는 이렇게 사람을 추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판했던 가장 큰 이유는 시기와 질투 때문이었습니다.


원래는 내가 백성들의 존경을 다 받아야 하는데 갑자기 예수님이 나타나서 나의 존경과 신망을 다 빼앗아갔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은 라비라고 불렸는데 예수님은 그보다 더 높은 선지자라고 불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시기한 바리새인은 그분에 대한 비판거리를 찾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더러운 세리들은 가까이 하면 안 되는데 왜 그들과 식사하고 교제해야 하냐고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바리새인들의 비판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비판은 시기와 질투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시기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문제점을 찾아내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추락하는 것을 보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여러분 시기는 다른 사람의 행복을 슬퍼하고 다른 사람의 불행을 기뻐하는 마음입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기뻐하는 마음은 정말로 부끄럽고 추한 것입니다.
이런 마음에서 나온 비판은 절대로 정당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로 바리새인의 비판은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세리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정당하지 않은 비판의 전형입니다.
문제를 우리가 제기하고 문제를 지적했으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그 대안도 함께 말해야 합니다.
로마 제국의 앞잡이인 세리를 싫어할 수 있습니다.
100번 양보해서 세리를 이방인과 같이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도요 하나님께 나올 수 있고 이방인도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집에 있던 이방 하인들에게 할례를 행했습니다.
이 말은요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출애굽할 때 유대인들만 나온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 믹스트 피플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들도 함께 출애굽 했습니다.
예전에 제가 미국에서 전도사 사역을 할 때 초등학생 아이들에게 유월절에 대해서 설명을 했습니다.
애굽의 10가지 재앙이 내렸는데 그 마지막 재앙은 모든 장자가 죽는 재앙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너희들 중에서 첫째 아이들 손 들어봐라 하면 첫째 딸, 첫째 아들이 손을 들었습니다.
그럼 너희들 다 죽는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럼 아이들이 막 무서워하죠.

참석자 1
11:20
그런데 유월절에 어린 양을 잡아서 그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면 하나님께서 그 집을 벌하지 않고 넘어가신다고 설명했습니다.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집은 넘어가기 때문에 넘어가는 것이 영어로 패스오버거든요.
유월절을 그래서 영어로 패스 오버라고 한다고 하면 아이들이 잘 기억했습니다.
그때 어떤 아이가 손을 들고 질문했습니다.
전도사님, 근데 만약에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애굽 사람이 옆에서 보고 있다가 자기도 어린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바르면 어떻게 될까요라고 질문했습니다.

참석자 1
11:52
이건 아주 훌륭한 질문이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우리가 질문할 수 있는 기회를 주면 아이들이 이렇게 훌륭한 질문도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그 부분이 나와 있지 않지만, 성경 전체에 기록된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가 기억할 때 이방인도 어린 양의 피를 만약에 발랐다면 하나님께서 그 집을 넘어가셨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이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어린 양의 피를 발랐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1237, 38절에 보니까 이것을 뒷받침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레암셉을 떠나서 수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60만 가량이오 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이 많은 가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애굽에서 나올 때 이스라엘 자손만 나온 것이 아니라 수많은 잡족이 함께 나왔다고 합니다.

 


잡족이라고 하니까 억압이 조금 이상한데, 영어로 보면 믹스 멀티튜드입니다.
이방인들도 있고, 아니면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도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혈통적으로 유대인이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사람은 모두 다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어떤 학자들은 이방인이라도 하나님을 믿으면 그분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길이 처음부터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고 나도 그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로 결단할 때 행하는 의식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바로 세례였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세례가 언제 처음 시작됐을까요? 세례 요한이 처음 세례를 준 사람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세례 요한 이전에도 유대 역사에서 세례를 행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누가 세례를 받았을까요? 주로 이방인들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방인들 중에서 나도 이스라엘의 그 하나님을 믿고 나도 그분의 백성이 되기로 결단한 사람들을 위해서 행하는 의식이 바로 세례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구약 시대에도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나올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배척당하고 무조건 정죄당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이것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 세리들 혹은 이 이방인들이 어떻게 주님께 나올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세리들과 함께 식사한 이 예수님만 비판하기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지 않고 비판만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왜 이런 비판을 했는지 마태복음 후반부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 193절 함께 읽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바리새인들이 이런 비판하는 이유는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을 곤란하게 만들어서 그분의 명성을 꺾고 그분의 인기를 꺾기 위해서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했던 모든 질문과 비판은 건설적인 목적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오로지 예수님을 시험하고 그분을 곤란하게 만들기 위한 비판이었습니다.
이것은 정당한 비판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 비판, 문제 해결을 위한 방법을 제시하지 않는 비판 이러한 비판에는 아무런 유익이 없고 의미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상대방을 시험하고 곤란하게 만들기 위한 그런 비판은 정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세 번째로 바리새인들의 비판은 비판 자체를 즐거워하는 비판이었습니다.
비판 자체를 즐거워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아마 설명하지 않아도 여러분 다 아실 것입니다.
잠언 18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제 별식을 영어로 스위트 모솔이라고 합니다.
다른 영어 성경에 보면은 캔디라고 되어 있습니다.
달달한 사탕과 같다는 것이죠. 누구나 달달한 사탕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너무 많이 먹으면 어떻게 될까요? 이가 썩고 비만과 당뇨에 걸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절제해야 하는 것입니다.

 


남의 말하는 것은 달달한 사탕과 같습니다.
말하는 순간에도 좋지만 그것이 내 속으로 들어가서 나의 영혼의 건강을 해치게 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말을 하는 것이 좋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이 상대방에게 상처가 되기도 하지만 나에게도 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혹시 누군가를 실컷 욕하고 나면 기분이 막 좋아지십니까? 막 기분이 좋고 행복해지십니까? 물론 억울한 일 당했을 때에는요.
가해자를 우리가 비판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걸로 비난하고 미워하는 것으로 내가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미워한다고 해서 내 마음에 막 기쁨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가끔 보면 그렇게 부추기는 사람이 간혹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도록 다른 사람을 미워하도록 부추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절대 동조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누군가를 비판하고 누군가를 미워해서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비판해서 우리가 행복해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비판하고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45절 함께 읽겠습니다.

 


보라 내 눈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내 눈속에 있는 피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내 눈속에 있는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 아멘.
다른 사람 눈에 있는 티를 비판하지 말고 내 눈에 있는 들보를 먼저 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외식하는 자여라고 부르십니다.

 


외식하는 자를 이제 헬라어로 휘퍼크리테스트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연극 배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성경에서 외식하는 자라는 단어를 보시면 연극 배우를 떠올리면 되시겠습니다.
여러분 연극 배우는 무슨 일을 할까요? 그들은 준비된 연기를 합니다.
실제 자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대본에 따라서 미리 준비한 행동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바리새인은 아주 전문적인 배우와도 같았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거룩한 척 고상한 척하지만 실제 모습은 그와 달랐던 것입니다.
그들이 하는 모든 행동은 철저하게 꾸며지고 계산된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위선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마음속으로는 상대방을 미워하고 비난합니다.
어떤 특별한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상대를 비판하는 그 행위에서 즐거움을 느낍니다.
하지만 겉으로는 고상한 척 거룩한 척하는 거죠.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이런 위선을 너무나 싫어하셨습니다.
그들의 기도와 종교 행위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당하지 않은 비판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시기와 질투에서 나오는 비판이고 둘째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 비판이고 셋째로 비판 자체를 즐거워하는 비판입니다.


이러한 비판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고 목적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험담은 달달한 사탕과도 같아서 먹기에는 좋지만 우리의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할 것입니다.
부정적인 험담을 많이 하게 되면요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부정적으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정당하지 않은 비판 아무런 유익이 없는 비판을 멀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비판은 모두 다 나쁜 것일까요?


잘못된 것을 보아도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잘못된 것에 대해서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절대로 비판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 좋은 일이 아닙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하고 넘어가는 것이 올바른 것이 아닌 것이죠.
우리는 잘못된 것에 대해서 정당하게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정당한 비판이란 무엇일까요? 첫째로 정당한 비판은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비판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유익을 구하는 그 사랑의 비판을 받아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나에게 무언가 비판의 말을 하는데 사실은 그것이 나에게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부모가 자녀에게 하는 말이 다 이런 종류의 말일 것입니다.
밤에 일찍 자라 밥을 잘 챙겨 먹어라.
잔소리처럼 들리는 이 모든 말은 사실 자녀의 유익을 위한 말입니다.
그런데 자녀가 이런 말을 감사하게 듣는 경우가 사실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 자녀를 보면서 마음이 야속할 때도 있겠죠.


하지만 돌아보면 우리도 어렸을 때 부모님의 말씀을 잔소리처럼 여겼을 때가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나중에 커서 애 낳고 키워봐야지 그때 부모님의 마음을 조금 이해할 것입니다.
저도 학생 시절 때까지는 이런 말을 잔소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훈련소에 갔는데 아무도 저에게 밥을 잘 먹었는지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밤에 잘 잤는지 아픈 데는 없는지 아무도 저에게 물어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때 제가 깨달았습니다. 어머니의 잔소리가 잔소리가 아니라 사랑과 관심의 말씀이었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의 유익을 생각하는 부모님의 말씀이 너무나도 귀하고 소중하구나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철이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유쾌한 말이 아니지만 그 말이 나의 유익을 위한 말이라면 감사한 마음으로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철이 든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듣기 어려운 말인데 사실은 그것이 나의 유익을 위한 말이었을 때 그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는 것 정말로 어려운 말입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은 우리의 유익을 위한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야지 가장 행복할 수 있는지 우리에게 성경을 통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말씀은 우리를 불편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말씀은 그 말씀대로 살아가기 너무나 어려운 말씀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말씀은 우리의 영적인 유익과 현실적인 유익을 위한 것인 줄로 믿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비판은 시기와 질투에서 나온 비판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책망은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책망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912절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아멘.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지만 아픈 사람은 의사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가장 완벽한 의사 되신 예수님께서 오셨는데 그분께 치료받기 위해서는 딱 한 가지만 하면 됩니다.
그것은 내가 문제가 있고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바리새인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이 말은요 바리새인들도 얼마든지 예수님께 와서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나에게 문제가 있고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는 멀쩡하니까 나는 의사가 필요 없다고 하면요 그런 사람은 주님의 치료를 받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사랑에는 제한이 없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향해서도 예수님은 그들의 유익을 구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만약에 저라면 저를 해코지하는 사람에 대해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것으로 꼬투리를 잡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저의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이 낭비라고 생각해 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까지도 그들의 유익을 바라는 마음으로 그들의 유익을 위해서 훈계하셨습니다.
아무리 바리새인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주님께로 돌아온다면 얼마든지 받아주셨습니다.
그러면 바리새인 중에서 예수님께 돌아온 사람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머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진리를 찾던 그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 구원의 비밀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유명한 요한복음 316절 말씀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인 니고데모에게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도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율법상 흠이 없는 철저한 바리새인이었는데 예수님께서 다메섹 도상에서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마음 깊이 회개하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어서 초대교회를 세워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그런 사랑에서 나왔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정당한 비판은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비판입니다.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한다는 말은 실제로 변화가 가능한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말한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게 말하는 것이죠. 지금 문제는 이것인데 이 문제가 당신에게 유익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행동하면 이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요 정당하고 유익한 비판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이 사람이 지금 나의 유익을 위해서 이런 비판을 하는구나라고 알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비판을 하는데 구체적인 대안이 없는 비판을 할 때가 있습니다.
실제로 어떻게 해야 되는지,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 말하지 않으면요 그것은 비판을 위한 비판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변화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 유익도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당신 키가 조금만 더 컸다면 당신을 사랑할 수 있을 거예요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부분을 지적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비판은 언제나 구체적인 대안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913절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오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아멘. 이 말씀은 호세아 선지자의 글을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것입니다.
호세아 66절에 보면 나는 인내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죄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정통한 바리새인들은 호세아 선지자의 이 말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달달 외울 정도로 잘 알고 있었지만 이것의 진정한 의미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가서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그 뜻을 배우라는 말씀을 영어로 디스라고 하는데, 이것은 당시 라삐 문헌에서 아주 전형적인 표현이었습니다.


대단한 라피 선생들은 그 제자들에게 율법을 달달 외우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그 율법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가서 깊이 생각하고 기도하라고 말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면서 그들을 교훈하고 훈계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무언가 비판을 할 때에도 반드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현실 가능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까지가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구체적인 대안을 찾지 못했다면 그 문제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면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판하는 것은 아주 쉽지만 대안을 찾는 것은 정말 어렵기 때문입니다.
좋은 리더는 비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좋은 리더는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 좋은 리더인 것입니다.
세 번째로 정당한 비판은 사랑과 진리에 근거한 책망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문제가 있을 때 두 가지가 필요하죠.
첫째로 그 문제를 정확하게 깨달을 수 있도록 진실을 말해주어야 합니다.


그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면 변할 수 없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너무 진실만 이야기하면요 그것을 외면하고 도망갈 우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용납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온전한 사랑과 용납이 있을 때 그때 우리는 변화되고자 하는 용기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415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아멘. 이 구절을 영어 성경으로 보면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라 스피킹 트러브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불량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 위해서는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로는 진리를 말하는 용기가 필요하고


두 번째는 그 말하는 것을 사랑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고 해도요 그것을 들을 준비가 안 된 사람에게 함부로 말하는 것은 지혜롭지 않습니다.
의사가 수술할 때 정말 정확하게 필요한 부분만 칼로 도려내고 그 이후에는 상처를 잘 치료해 줍니다.


여기저기 함부로 칼을 대면요 아픈 곳을 고치기도 전에 그 환자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정확하게 필요한 부위만 도려내고 그 이후에는 상처를 잘 감싸고 치료해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말하는 것, 사실을 말하는 것은 칼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이죠.
정의감에 불타서 여기저기 칼로 찌르면 그 사람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내가 할 말은 한다 이것이 위험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정의가 없는 사랑도 문제이지만 사랑이 없는 정의도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상대의 유익을 위해서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그런 책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이 모든 것을 사랑 안에서 해야 할 더 큰 책임이 또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31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가리가 되고 아무리 수려한 말을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천사의 말을 하고 아무리 신령한 방언을 해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걸이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를 선포하되 상대방을 향한 깊은 사랑 가운데 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변화와 성장을 위해서는 정확한 자기 분석이 필요합니다.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
그런데 이것이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입니다.
나를 잘 아는 누군가가 진심 어린 충언을 해주어야지.
가능한 일입니다. 내 장점과 단점을 정직하게 말해줄 수 있는 그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랑과 진리에 근거한 책망은 마치 양약과도 같아서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건강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자문안 276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직으로 말미암는 것이니라.
원수에게 잦은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아멘.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충언


사랑과 진리에 근거한 책망을 할 수 있는 진정한 동역자가 되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진심어린 충언을 할 때 겸손한 마음으로 그것을 들어서 오늘보다 내일 더 나은 사람으로 변화되고 성숙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