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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대원목사 설교

말의 힘을 아는 인생(4) 질문할 수 있는 겸손

by 마이코 2023. 10. 4.

2023.09.10

ㅣ사무엘상 23장 1-14절

ㅣ문대원 목사

 

우리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말 한마디로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말의 힘을 아는 사람은 절대 함부로 말하지 않습니다.
파괴적인 말이 남긴 상처는 칼로 찌른 상처보다 훨씬 더 깊고 오래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루 평균에 약 14천 개의 단어를 말한다고 합니다.
여성분들은 한 2만 단어를 말씀하시고 남성분들은 한 7천 단어를 말씀한다고 합니다.


남성분들이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으니까 분발을 해야지 여성분들의 단어 수를 따라갈 수 있습니다.
하루 평균 말한 14천 개의 단어를 기록하면 그 분량이 얼마나 될까요? 50페이지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루 동안 하는 말을 기록하면 50페이지 정도 되는 책 한 권이 나오는 것입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우리가 했던 말을 기록하면 약 350페이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중에서 정말로 의미가 있었던 말은 얼마나 될까요? 내 일기장에 기록해 놓고 두고두고 기억해 주고 싶은 그런 말은 얼마나 될까요?


반대로 정말로 후회가 되는 말은 또 얼마나 되겠습니까? 아 내 말의 기록에서 삭제하고 싶은 그런 말은 얼마나 될까요?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말은 대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저도 주일에는 설교를 하지만 평일에는 훨씬 더 많은 시간 대화를 합니다.
가족과 대화하고 교육자들과 대화하고 장로님들과 대화합니다.


대부분의 말은 대화 중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말을 잘하는 것은 결국 대화를 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화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를 위해서는 대화가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국어사전에서 대화를 찾아보면 마주 대하여 이야기를 주고받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두 사람이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 대화입니다.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말하는 것은 대화가 아닙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잔소리는 대화가 아닙니다.
숙제했니 공부했니라고 말하는 것 대화 아닙니다.
일방적인 훈계도 대화가 아닙니다. 성공하려면 이렇게 해야 돼 좋은 사람하고 결혼하려면 이렇게 해야 돼라고 말하는 것은 대화가 아닙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내가 하고 싶은 말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 대화인데 일방적으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이지


내 생각이 왜 옳은지 증명하고 싶어 합니다.
상대방이 왜 틀렸는지 지적하고 싶습니다.
이 모든 것은 대화가 아닙니다. 대화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방에게 질문하는 일입니다.
상대방에게 질문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대화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대화의 시작은 질문에 있습니다.


대화를 잘하는 사람은 결국 질문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하고 대화할 때 기분이 좋으십니까?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과 대화하면 기분이 좋습니다.
그러면 내 이야기를 잘 듣고 있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내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와 연관된 질문을 하고 있으며 내 이야기를 잘 듣고 있는 것입니다.


내 말에 공감해 주고 그와 연관된 질문을 하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내 마음속 깊은 이야기도 편안하게 할 수 있습니다.
말을 잘하는 사람은 대화를 잘하는 사람입니다.
대화를 잘하는 사람은 질문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말을 잘하려면 질문을 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질문하는 것도 중요하고 다른 사람에게 질문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질문하는 것은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신뢰한다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관계를 위해서는 건강한 대화가 필요하고 건강한 대화는 좋은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다닐 때의 이야기입니다.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왕에게 쫓기는 상황인데 그일라라는 지역이 블레셋으로부터 공격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일라는 농사짓기에 아주 좋은 비옥한 땅인데 블레셋과의 경계 지역에 있었습니다.
그 땅은 유다 지파에 속한 땅이었고 다윗은 유다 지파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나의 동족이 공격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이 기도했습니다.
사무엘상 23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잡아 이르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들을 지리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 이 구절은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인생에서 여호와께 물었다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한 구절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전에도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살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골리앗과 싸울 때에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고 순종했습니다.
사울에게 공격을 받을 때에도 기름 부받은 자를 대적하면 안 된다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를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명시적으로 다윗이 여호와께 물었다라는 표현이 처음 나온 것은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다윗의 인생에서 중요한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어떤 결정을 내리기 이전에 하나님께 질문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지금 내가 움직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질문했습니다.
자기 동족인 유다 지파가 공격을 당했을 때 그들을 돕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충분한 이유와 타당성이 있는 일입니다.
너무 당연하니까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그냥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소식을 듣고 결정을 내리기 전에 하나님께 기도하며 질문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옳은 일을 할 때에도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방 민족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동족을 돕는 것이 옳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이 결정을 내리기 전에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나 물었습니다.
처음 응답을 받고 싸우러 가려고 했는데 다윗의 군사들이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한 번 더 하나님께 질문했습니다.
사무엘상 234절 함께 읽겠습니다.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데 여호와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일어나 그 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내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
아멘. 똑같은 사안에 대해서 두 번 질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두 번 모두 분명한 답을 주셨습니다.
내가 블레셋 사람의 사람들을 너의 손에 넘기겠다라고 답해 주셨습니다.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기도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나의 지혜, 나의 판단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한 일입니다.
결정을 내리기 전에 질문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공경하고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그 마음 신앙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모든 결정을 다 내려놓고선 나중에 하나님께 도와달라는 기도만 할 때가 있습니다.
어느 직장에 갈지


누구와 결혼할지 내가 알아서 다 결정을 스스로 내립니다.
결과가 좋으면 기도하지 않고 결과가 나쁘면 그때 가서 기도하면서 하나님한테 도와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조금 억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되는 결정을 자기가 내려놓고 마음대로 살다가 결과가 안 좋으니까 그때 가서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옳지 않은 일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그 기도를 들어주시고 그곳에서 피할 길을 내주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사실 성숙한 신앙은 아닙니다.
내 마음대로 결정하고 문제가 생기면 그때 가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성숙하지 않은 모습입니다.
결정을 내리기 이전에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며 주님의 뜻을 물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이제 중요한 질문은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질문으로 시리즈 설교를 할 정도로 아주 크고 중요한 질문입니다.


오늘은 간략하게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규범, 상황, 실존이라는 세 가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첫째로 규범은 성경에 게시된 하나님의 일반적인 뜻입니다.
둘째로 상황은 우리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21세기 현대 사회입니다.
셋째로 실존은 이 문제를 지금 당면하고 있는 사람


나 자신입니다. 하나님의 일반적인 뜻이 나의 특수한 이 상황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을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일반적인 뜻이 나의 특수한 이 상황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여기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일반적인 뜻을 알아야겠죠 다시 말해서 규범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반적인 뜻은 성경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정직한 자, 겸손한 자를 높여주시고 교만한 자를 낮추십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영혼이 주님께로 돌아와서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반적인 뜻이 내 안에 확고하게 세워져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교회에서는 새 가족 훈련, 제자 훈련, 사역 훈련 등 다양한 교육과 훈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예배드리면 됐지 또 무슨 교육과 훈련까지 받아야 되나요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지 우리가 하나님의 이 일반적인 뜻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우리의 상황을 바라보고 우리의 실존을 염두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분별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할 것은 교육과 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이제 기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내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그 하나님의 뜻이 나의 상황과 실존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딱 한 가지 정답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각기 다른 인격을 가지고 있고 다른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이 있죠 육아에는 왕도가 없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아이를 이렇게 키워야 한다는 그 사실 한 가지 사실을 어느 누구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이마다 성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 아이에게는 잘 맞는 방법이 다른 아이에게는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건강한 자존감을 갖게 한다는 육아의 원칙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 원칙이 모든 아이에게 적용될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마다 성격이 다르고 처한 상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 가운데 적용되는 방식은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나의 상황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일반적인 뜻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 우리가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는 기도를 할 때 우리가 사실은 염려하거나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녀가 어릴 때 우리는 자녀의 눈높이에 맞춰서 설명해 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말씀해 주십니다.
묵상을 통해서, 성경 통독을 통해서, 설교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또한 개인 기도와 찬양 시간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 가운데 말씀해 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그분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겸손한 마음에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응답을 받은 다윗은 그일라로 내려가서 블레셋과 싸워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자기 동족인 유다 지파를 구원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식을 들은 사울이 다윗을 잡기 위해서 그 일라로 오고 있었습니다.
사울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 일라 사람들은 두려워서 떨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 직전에 보면은 사울이 노베에 있는 그 제사장들을 학살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놉이라는 그 지역에 피신했을 때 제사장들이 다윗을 도와주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화가 난 사울이 내려가서 제사장 85명을 죽이고 그들의 마을을 다 진멸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그일라 사람들은 사울이 오고 있다는 말에 두려워 떨었습니다.
사울이 노을 진멸했던 것처럼 우리 그 일라 땅도 진멸하는 것이 아닌가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윗을 붙잡아다가


사울에게 바치기로 했습니다. 이것은 정말로 배은망덕한 행동이었습니다.
블레셋으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한 그 다윗을 배반한 것이죠.
위기에 처한 다윗은 다시 한 번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질문했습니다.
사무엘상 2310, 11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다윗이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사울이 나 때문에 이 성업을 멸하려고 그 일라로 내려오기를 꾀한다 함을 주의 종이 분명히 들었나이다.


그 엘라 사람들이 나를 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주의 종이 들은 대로 사울이 내려오겠나이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데 주의 종에게 알려주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가 내려오리라 하신지라.
아멘. 다윗이 하나님께 질문했습니다.
그일라 사람들이 저를 사울의 손에 넘기겠습니까?


사울이 정말 여길로 내려오겠습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답을 주셨습니다. 사울이 내려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 입장에서는 정말 억울하고 낙담이 될 만한 상황일 것입니다.
동족인 유다 지파를 구하기 위해서 힘들게 전투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결과는 동족의 배신이었습니다.
자기 목숨을 위해서 다윗을 붙잡아서 사울에게 바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윗은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절망하고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해야 될까요?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태도는 중요한 결정을 내린 이후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결정하기 이전에도 기도해야 하지만 결정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내비게이션으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내비게이션이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방향을 알려주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방향을 알려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방향이 정해지면 그다음부터는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나아가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성숙한 신앙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올바른 방향을 결정한 이후에도 수많은 시련과 고난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살면 살수록 깨닫게 되는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인생이 결코 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청년들을 만날 때마다 이 사실을 강조합니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빨리 깨달아야 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인생이 결코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하는 사실입니다.
인생은 수학 공부와 다릅니다. 수학 공부를 1년 한 사람이 있고 10년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럼 이 둘 중에 누가 더 문제를 쉽게 풀까요?


당연히 수학 공부를 10년 한 사람이 문제를 쉽게 풀 것입니다.
그러면 인생을 20년 산 사람이 있고 60년 산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둘 중에 누가 더 인생을 쉽게 살아갈까요? 인생을 더 오래 살았으니까 더 쉽게 살아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생을 오래 살면 살수록 그만큼 걱정도 많고 고민도 많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결코 내 생각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예기치 않은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큰 문제를 하나 넘기면 그 다음 문제가 찾아옵니다.
하나님 믿는다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잘 믿어도 예기치 않은 문제가 다가올 때가 많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하나님은 우리 인생 가운데 예기치 않은 그 어려움을 허락하시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어떤 한 가지 답만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그 깊은 뜻을 우리가 다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사실 한 가지는 있습니다.


내 인생을 내가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우리 내 스스로의 인생을 스스로 컨트롤하고 통제하려고 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어려움을 당할 때 그때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구나 알게 됩니다.
예레미야 1023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아멘 내 걸음을 내가 지도할 수 없습니다.
내 인생을 내가 통제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이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우리 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달린 줄로 믿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군 선교 헌신예배가 우리 교회에서 있었습니다.
2작전사령부 사령관 장로님께서 오셔서 귀한 간증을 해 주셨습니다.
이 장로님께서는 우리나라에 7명밖에 없는 육군 대장 포스타이십니다.
육군 대장은 장관급 예우를 받습니다.
장로님의 간증 중에서 아주 인상 깊었던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예전에 소령 진급 심사를 할 때에 승진을 약속했던 분이 계시다고 합니다.


내가 힘을 썼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진급 발표가 났는데 그만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승진을 약속한 사람을 믿고 안심했는데 실패한 것입니다.
얼마나 낙심이 되었을까요? 아마 여러분들도 이런 종류의 실패를 다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에 있습니다. 내년에 또 이제 진급 심사가 있을 것인데 어떻게 할 것인가가 문제였습니다.


두 가지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더 확실하게 나를 승진시켜줄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이전 사람은 확실한 도움이 안 됐으니깐 더 확실하게 나를 도와줄 사람을 찾아서 그 사람에게 줄을 서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줄을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길을 여시도록 기도하며 그분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그 일반적인 뜻에 마음을 다해서 충성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 장로님께서 두 번째 길을 택하셨습니다.
더 확실한 사람을 찾아서 사람의 도움을 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기로 결단했습니다.
한 번뿐인 인생인데 내가 정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살아보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을 경험해 보길 원한다고 결단하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다음에는 어떻게 됐을까요? 네 소령으로 진급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더욱더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로 행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중령, 대령으로 바로바로 진급했다고 합니다.
전국 어느 부대에 발령을 받더니


든지 상관없이 그곳에 있는 군 부대를 열심히 섬기셨습니다.
사병들을 사랑으로 돌보셨고 정직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군 생활을 하셨습니다.
장교들도 열심히 전도해서 처음에는 그 한 부대에서 장교 1명만이 크리스찬이었는데 나중에는 35명이 크리스찬이 되었다고 합니다.
군대에서 이제 장군이 되는 것, 스타가 되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육군사관학교 출신도 십오 퍼센트 정도만 장군이 될 수 있는데 이 장로님은 육사 출신도 아니었습니다.


특히 이제 중장에서 대장으로 넘어가는 과정 맨 마지막 과정이겠죠 쓰리스타에서 포스타로 넘어가는 과정은 말 그대로 이제 하늘의 별따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장로님께서는 중장에서 대장으로 넘어가는 데 6개월 걸렸다고 합니다.
주변에서도 이해할 수가 없고 본인도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체험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일을 경험하셨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그 마태복음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셨을 때 이러한 체험을 했다고 간증하셨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들으면서 생각났던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잠언 35, 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내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서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내 길을 지도하시리라.


아멘. 인간의 지혜와 명철을 의지하지 말고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주관하시고 지도하시는 것을 직접 경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도 기도하시고 결정을 내린 이후에도 기도해야 합니다.
예기치 않은 어려움을 당했을 때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는 줄로 믿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질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생각,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노력했습니다.
여러분도 그와 같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의 인생과 대비되는 인생이 사울의 인생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묻는 사람이었다면 사울은 하나님께 묻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없으니까 최대한의 정보를 확보하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사울은 이스라엘 전역에 자기 첩보원을 심어놓았다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무엘상 237절 함께 읽겠습니다.
다윗이 그릴라에 온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알리에 사울이 이르되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넘기셨도다.
그가 문과 문, 빗장이 있는 성읍에 들어갔으니 갇혔도다.
아멘.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알렸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그냥 아무 사람이 아니라 사울에게 정기적으로 보고를 하는 첩보원을 뜻합니다.


사무엘상 15장에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이후에 사울은 하나님의 뜻을 더 이상 알 수가 없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도 이제 더 이상 사울을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사울 주변에는 경건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노에 있는 제사장 85명을 죽였기 때문에 제사장들도 사울을 피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으니깐 사울은 스스로 정보를 취합했습니다.


이스라엘 전역으로 첩보원들을 보내서 최대한의 정보력을 가지고자 노력했던 것입니다.
사실에 근거한 정보에 근거한 판단이 모두 다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객관적으로 상황을 보는 것,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정보력이 하나님의 지혜보다 뛰어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정보가 많아도 지혜로운 판단을 할 수가 없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과 멀어진 사람은 자기 욕심에 눈이 가리웠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둑이나 장기를 둘 때 직접 두는 사람보다 제3자가 더 잘 볼 때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당사자는 자기 눈앞에 몇 수밖에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3자는 조금 더 넓은 관점에서, 거시적인 관점에서 큰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인간의 판단보다 뛰어난 이유는 하나님께서 영원한 관점에서 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당장 눈앞에 있는 한 수밖에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초월적인 관점에서 영원한 관점에서 보시기 때문에 우리의 판단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지혜롭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묻는 사람은 하나님께 질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묻지 않는 사람은 첩보원이 주는 정보를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겠습니까 아니면 첩보원이 주는 그 정보를 의지하겠습니까? 질문할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정보력과 판단에 의지하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기 때문에 더 많은 힘과 정보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마음 가운데 불안과 염려가 가득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는 사울은 두 번째로 자기 확신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잘못된 자기 확신이죠. 하나님께 묻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게 됩니다.
그래서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는 사람에게는 내적인 확신이 없습니다.
내 마음대로 결정했지만 이 방향이 옳은지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든 이 사람은 그런 불안감을 숨기려고 노력합니다.


내가 불안해한다는 사실을 노출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죠.
마음속에는 확신이 없는데 겉으로는 아주 태어난 척, 확신이 있는 척 살아가게 됩니다.
다윗이 그 일라에 있다는 것을 듣자 사울이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사무엘상 237절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다윗이 그 일라에 온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알리에 사울이 이르되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넘기셨도다.
그가 문과 문, 빗장이 있는 성읍에 들어갔으니 갇혔도다.


아멘. 사울은 무슨 근거로 하나님께서 다윗을 자기 손에 넘기셨다고 말하고 있을까요? 하나님께 묻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는 이 사울은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이것은 잘못된 자기 확신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는데, 그냥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믿으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빅데이터 기술이 발전해서 유튜브 같은 곳에서 개인의 취향을 아주 정확하게 분석합니다.
내가 클릭했던 영상을 기준으로 최적화된 알고리즘이 작동해서 당신이 좋아할 만한 영상이 추천되어서 나옵니다.
내가 이런 것을 좋아하는지 어떻게 알았을까 깜짝 놀랄 정도로 맞춤형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문가들은 말하기를 이러한 맞춤형 정보 서비스가 사람들로 하여금 잘못된 확증 편향에 빠지게 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확증 편향은 무엇인가요?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며 계속해서 그것만을 확인하려고 하는 경향성입니다.
나의 견해와 옳은 정보는 같은 정보는 취하고, 그와 다른 정보는 아예 차단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유튜브 알고리즘에 갇히게 되면 잘못된 확증 편향에 빠질 수 있습니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되고, 내가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모두 잘못된 자기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또한 저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가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에게 다윗을 내 손에 넘기자 넘겼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는데 사울은 그렇게 믿었습니다.


하나님께 질문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사울은 그냥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자신의 믿음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사무엘상 2314절 함께 읽겠습니다.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
아멘. 하나님은 다윗을 사울의 손에 넘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다윗이 사울을 피해서 도망갈 수 있도록 도우셨습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고 듣지 않았던 사울은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자신의 믿음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모든 관계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방식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방식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질문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질문하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여러분은 혹시 질문하지 않는 사람과 대화해 보신 적 있습니까? 일방적으로 자기 이야기만 하고 일방적으로 훈계만 하는 사람과 대화를 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런 사람과 대화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올바른 질문에는 중요한 가치가 있습니다.
첫째로 질문은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겸손의 표현입니다.


진짜 겸손한 사람은 다 아는 척하지 않습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이야기하고 그에 대해서 질문할 수 있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여러분 세상에서 제일 용감한 사람이 누구이죠? 책 한 권 읽은 사람입니다.
절대 그 사람하고 토론하면 안 됩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읽은 책이 전부이기 때문에, 자기만 옳다고


강조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토론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사람은 내가 모든 문제의 정답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항상 옳고 내 말대로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말로 위험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상대방에게 질문하지 않습니다.


둘째로 상대방에게 관심이 없고 상대방의 생각과 경험으로부터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성향을 가진 사람은 사실은 상당히 위험할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2주일 전에 저는 총신대학교 개강수련회에서 설교를 하고 총장님, 부총장님, 이사장님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가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교단 신학교 총장님 이사장님과 식사를 하면 그 자리가 쉬운 자리일까요 어려운 자리일까요? 당연히 어려운 자리일 것 같은데 저에겐 너무나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들께서 저에게 질문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미국 신학교와 총신이 어떻게 다른지, 외국에서 사역하다가 지금 한국에서 목회하면서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 4차 로잔대회를 준비하면서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그분들께서 저에게 질문해 주셨습니다.


그분들은 너무나 겸손한 분들이었습니다.
훨씬 더 사역 경험이 적은 후배에게도 질문할 수 있는 겸손한 분들이었습니다.
대화 중에 우리가 질문할 수 있다는 것은 겸손하다는 그 마음의 표현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질문은 상대방의 의견을 내가 중요하게 여긴다는 신뢰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중요한 문제를 결정할 때 혼자서 결정하는 경우도 있고 함께 의논하면서 결정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내가 질문할 수 있다는 것은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신뢰한다는 표현입니다.
담임 목사와 당회는 서로 질문하는 관계입니다.
서로 신뢰하고 서로 존중하면서 함께 교회를 섬기는 그런 협력적인 관계입니다.


교회에서 어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절대 한 사람의 의견으로 결정하지 않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당회가 함께 토론하고 함께 기도하면서 결정해 나갑니다.
한 번의 회의로 결정하지 못하면 그다음 달로 넘겨서 계속해서 기도하면서 고민합니다.
우리 교회 장로님들은 교회의 모든 부서에서 오랫동안 봉사하셨던 분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하고 있는 모든 봉사를 장로님들께서 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장로님들께서 당회에서 발언하실 때 절대 개인 자격으로 발언하지 않으십니다.
성도들을 대표하는 입장에서 발언하시고 투표하십니다.
저 역시 절대 개인적인 의견을 일방적으로 당회에 통보하지 않습니다.


선교 한국이나 총신대학교에서 강사 초청이 왔을 때 저 혼자서 결정하지 않습니다.
장로님들께 말씀드리고 당회에서 동의해 주시면 그때 제가 설교하러 가기로 결정합니다.
우리 교회 장로님들은 정말로 성숙하신 분들이고 헌신된 분들이십니다.
누구보다 교회를 사랑하시고 성도님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우리 당의회는 서로 질문하고 서로 토론하고 함께 기도하는 아주 건강한 조직입니다.


당회에서 심사숙고해서 내리는 결정에 대해서 여러분께서 이해해 주시고 받아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지 않고 사람의 조언도 듣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질문하지 않는 것은 내가 모든 것을 다 안다고 말하는 자만과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을 잘하는 것은 대화를 잘하는 것이고, 대화를 잘하는 것은 질문을 잘하는 것입니다.


대화 중에서 적절한 질문을 하기 위해서는 겸손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신뢰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잠언 1310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아멘. 자기 주장만 내세우는 교만이 아니라 상대에게 질문하고 들을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올바른 질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과 건강한 관계를 세워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