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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대원목사 설교

말의 힘을 아는 인생 (3) 하지 말아야 할 말

by 마이코 2023. 10. 4.

2023.09.01

ㅣ사무엘하 6장 16-23절

ㅣ문대원 목사

 


하나님은 우리에게 입술에 권세를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행하겠다 말씀하셨습니다.
똑같은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자기 믿음에 따라서 다르게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말한 그 결과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의 말에는 창조적인 힘도 있고 파괴적인 힘도 있습니다.
이 말의 힘을 깨닫는 사람은 절대로 함부로 말하지 않습니다.


나의 말로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체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건강검진을 받고 나면 의사 선생님이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십니다.
술 담배를 끊으십시오.


간식과 야식을 줄이십시오 설탕이 많이 들어가 있는 디저트도 줄이십시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거 저런 거 다 끊고 그걸 무슨 낙으로 살란 말입니까라고 말하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거 다 해도 건강하게 지금까지 다 잘 살아왔습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내 건강에 이상이 오면 그때부터는 의사의 말을 잘 듣습니다.


우리 몸이 저절로 건강한 것이 아니라 의식적인 노력을 해야지 건강해지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건강한 관계를 위해서도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관계는 저절로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인 노력을 해야지 좋아지기 때문입니다.


얘나 지금이나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는 어려운 관계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그 룻과 나오미의 관계를 보면서 나도 며느리와 저런 좋은 관계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막상 쉽지 않습니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감정이 상할 수도 있는 그런 복잡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주변에서 관계가 좋은 시어머니와 며느리를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며느리가 친딸 같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예뻐해 주시고 아껴주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며느리도 마음을 다해서 어머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서로 간에 말조심을 한다는 것입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함부로 말하지 않습니다.
며느리도 절대 어머님께 함부로 말하지 않습니다.
말 한마디로 감정이 상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복잡한 관계에서는 한 번 상한 감정을 돌이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로 말 조심을 해야 하는 대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가족들입니다. 왜 그럴까요? 가족끼리는 너무 잘 알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약점과 허물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우리의 말로 더 큰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잘 모르는 사람이 나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해도 큰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에게 중요한 사람 나와 가까운 사람이 나에게 무슨 악의적인 말을 하면 큰 상처를 받습니다.
그래서 가까운 사이일수록 우리가 더욱더 말조심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많은 약점과 허물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가족끼리라도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습니다.


건강한 관계 친밀한 관계를 우리가 유지하기 위해서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이 주제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다윗과 미가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다윗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위대한 왕입니다.
그리고 미갈은 다윗의 첫 번째 아내였습니다.


그러면 미갈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미갈은 사울 왕의 막내딸이었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동시에 다윗을 미워했던 왕이었습니다.
자기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서 골리앗을 죽인 이 영웅 다윗을 제거해야만 했습니다.


다윗을 제거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노력하던 중에 마침 자신의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상 1820절에 나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함에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알린지라 사울이 그 일을 좋게 여겨 아니 자신의 딸이 다윗을 사랑하는데 사울은 왜 이것을 좋게 여겼을까요?


로비어와 줄리엣처럼 원수들 간에 서로 사랑하는 사이인데 왜 이것을 좋게 생각했을까요? 바로 미가를 이용해서 다윗을 제거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에 자녀를 가지신 분들께 제가 질문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누군가를 진정 사랑한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께서 그 자녀의 사랑을 이용해서 여러분이 원하는 바를 이루고자 하시겠습니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 자녀를 조금이라도 아끼는 마음이 있다면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을 향한 미움이 가득해서 정상적인 생각, 정상적인 감정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미움과 증오가 가진 힘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에는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미움에서 나오는 그 쓴 마음에는 엄청난 힘이 있어서 상대방도 파괴하지만 자기 자신도 파괴하게 됩니다.


사울의 그 증오는 자신만 파괴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딸 미갈의 인생까지도 파괴하게 되었습니다.
미갈은 그 아버지 사울로 인해서 아주 기구한 인생을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간략하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사울은 다윗에게 미갈하고 결혼하려면 블레셋 군사 100명을 죽여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블레셋 군사들의 손에 다윗이 죽기를 바랐지만 다윗은 오히려 블레셋 군사 200명을 죽이고 당당하게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사울의 딸과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사울은 계속해서 다윗을 제거하려고 했고 미갈은 자신의 남편인 다윗이 도망가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사무엘상 1912절에 보니까 미갈이 다윗의 창에서 달아내려서 도망가게 도와주었습니다.
미갈이 다윗을 도망가도록 하자 사울은 자기 딸에게 불같이 화를 냅니다.


그리고 미가를 다른 남자에게 다시 시집 보냅니다.
사무엘상 2544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사울이 그의 딸, 다윗의 아내 미가를 갈림에 있는 라이의 아들 발디에게 주었더라.
아멘. 여러분이 미갈이라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 남자를 제거하는데 나를 믿기로 이용했습니다.
나의 남편을 살리기 위해서 도와주었는데 오히려 아버지는 나에게 불같이 화를 냅니다.
그리고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보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아버지에게 이용당하고 이제는 버림을 당했습니다.
여러분이 미갈이라면 어떻게 정상적인 삶을 살 수가 있었을까요?


미갈은 누구보다도 마음속에 깊은 상처가 있었습니다.
깊은 상처와 쓴뿌리를 가진 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고 어느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시간이 오래 흘렀습니다. 다윗이 사울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사울은 이미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사망했고 다윗은 유다 지파의 왕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사울의 집을 따르는 사람도 있었지만 다윗의 승리는 시간 문제였습니다.
바로 그때 사울의 집에 속했던 한 사람 아브넬이라는 사람이 다윗에게 투항했습니다.
그러자 다윗이 그에게 한 가지 조건을 요구했습니다.
사무엘하 313절에 나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다윗이 이르되 좋다 내가 나와 맥거리와 내가 내게 한 가지 일을 요구하더니 나를 보러 올 때에 우선 사울의 딸 미가를 데리고 오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고 자신에게 투항한 사람에게 다윗이 원했던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아내였던 미가를 자기에게 데리고 오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미갈을 지칭할 때 나의 아내 미갈이라고 하지 않고 사울의 딸 미갈이라고 부르는 점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여인이 결혼을 하면요 더 이상 누구의 딸로 불리지 않고 누구의 아내라고 불립니다.
미갈도 다윗과 결혼한 직후에는 한동안 다윗의 아내라고 성경에 나옵니다.
그런데 다윗은 지금 미갈을 가리켜서 사울의 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 표현을 근거로 해서 다윗이 미가를 원했던 이유가 개인적인 사랑이 아니라 정치적인 목적이 컸을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12지파 이스라엘 12지파 중에서 유다 지파만 다윗을 왕으로 따르고 있었고 다른 지파는 여전히 다윗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을 왕으로 기름 부었던 사무엘 선지자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정당성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사울의 딸인 미가를 다시 데려오면, 아내로 맞으면 자신은 왕의 사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될 수 있는 정당성을 얻게 됩니다.
다윗이 미가를 얼마나 개인적으로 사랑했는지는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울의 딸인 이 미가를 자기에게 다시 아내로 맞음으로써 그는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될 수 있는 정당성을 얻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미갈은 무언가 다른 의도를 위해서 이용당하는 것 같습니다.


미갈은 아버지에게도 이용을 당했고, 남편에게도 이용을 당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녀 마음 안에는 깊은 상처와 아픔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본문의 배경입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 안에는 상처가 있습니다.
상처의 크기는 다 다를 것이고 상처를 받았던 시기도 다를 것입니다.
평소에는 그 상처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특정한 상황이 되면 그 상처가 드러날 때가 있습니다.
내 마음 안에 있었던 그 상처와 쓴뿌리가 드러나게 되는데, 대체로 악한 말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미갈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고


언약교회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그 기쁜 날에 미갈의 마음 안에 있던 상처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무엘하 616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교회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없신 여기니라.
아멘. 이 구절에서도 미가를 가리켜서 사울의 딸이라고 부릅니다.
사울은 이미 죽었고,


다윗의 첫 번째 아내인 미갈은 이스라엘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갈을 사울의 딸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마도 그 사울의 몰락한 집안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권력자라는 의미가 클 것입니다.
언약교회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날, 다윗 왕은 기뻐서 춤을 췄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미갈이 마음속으로 남편을 업신 여겼습니다.


왕으로서의 그 체통을 다 무시하고 어린아이처럼 춤을 추는 모습이 보기 싫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모든 이스라엘이 다 기뻐하는 그날에 이러한 마음을 가진 것은 조금 이상하게 보입니다.
모두가 기뻐하는 그날, 그 기쁨에 동참하지 않는 것도 이상한데 마음속으로 남편을 없신 여긴 것은 더 이상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미가는 마음속에 있던 그 생각을 말로 표현했습니다.
사무엘하 620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에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하니.


다윗이 자기의 가족을 축복하기 위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방탕한 자가 부끄러운 줄 모르고 자기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왕께서 신하들의 아내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습니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은 축제 분위기에 그야말로 찬물을 끼얹는 말이었습니다.
다윗의 인생에서 가장 기쁘고 가장 영광스러운 날이었는데, 그 분위기를 최악으로 만들어버린 말이었습니다.


혹시 여러분 주변에서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너무나도 기쁘고 즐거운 잔칫날에 찬물을 끼얹은 말을 하는 사람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도대체 그 신보는 무엇일까요? 무슨 심정으로 이렇게 기쁜 날 나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일까요? 마음 안에 상처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기쁨에 동참하지 못하는 사람은요 마음 안에 깊은 상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이 뭔가 화가 나는 말을 할 때 화를 내기보다는 불쌍하게 혹은 긍휼하게 여겨야 합니다.
얼마나 마음속 상처가 크면 이렇게 기쁜 날 기뻐하지 못할까 우리가 치근하게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미갈에게는 그러한 상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아버지에게 이용당하고 버림을 당했습니다.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또 다른 남자와 재혼하게 되었고 또다시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다윗에게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시간 관계상 읽지 않았는데 미갈이 다시 다윗에게로 돌아올 때 재혼했던 그 남편이 울면서 따라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두 번째 남편하고 마음 잘 먹고 살고 있었는데 다윗의 명령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이렇게 기구한 인생을 살았으니 미갈의 마음에는 얼마나 큰 상처가 있었을까요? 마음 안에 상처가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기쁨에도 동참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슬픔에도 동참하지 못하게 됩니다.
상처가 있는 사람은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불쌍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돌아볼 마음의 여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렇게 마음에 상처가 많은 분들을 만나본 적이 있습니다.
험한 인생, 너무나 힘든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제가 그분을 위로하기 위해서 노력을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위해서 어떠한 노력을 하는지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내가 불쌍하고 내가 얼마나 딱한지 자기 한탄만 하면서 살아갈 뿐입니다.
마음 안에 상처가 있는 사람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엄청나게 자기중심적입니다.


언제나 자기 생각만 합니다. 내가 얼마나 고생했고 내가 얼마나 불쌍한지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다른 사람의 기쁨에도 동참할 수 없고 다른 사람의 슬픔에도 동참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갑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헤아릴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미갈의 모습이었습니다.


물론 이 모든 상처의 책임이 미가에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진 일이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말과 행동이 모두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에게 상처가 있든지 없든지 상관없이 내 말과 내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기쁘고 영광스러운 날 다윗은 아내로부터 큰 모멸감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기쁨으로 춤을 추었는데 아내가 그것을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방탕한 자가 부끄러운 줄 모르고 자기 몸을 드러내는 것 같다고 질책했습니다.
그 순간 그 말을 듣고 다윗이 너무나 화가 났습니다.
내 인생에서 가장 기쁘고 영광스러운 날을 망쳐버린 아내에게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하는 말을 했습니다.
사무엘하 621절에 나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내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다윗이 말하기를 내가 이렇게 춤을 춘 것은 하나님께서 너의 아버지를 버리시고 나를 택하셔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기 위해서 춤을 춘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미갈에게 절대로 하지 말았어야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너의 아버지를 버리셨고 나를 택하셨다는 말은 절대로 하면 안 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아버지께 상처를 받았어도 아버지는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아버지와 남편이 싸웠는데 남편이 승리했습니다.
그러면 기뻐해야 할까요 슬퍼해야 할까요? 남편이 이겼으니까 기뻐해야 할까요 아니면 아버지가 패배했으니깐 슬퍼해야 할까요? 너무나 어려운 상황입니다.
기뻐할 수도 없고 슬퍼할 수도 없는 그러한 상황입니다.
다윗이 그 마음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너무나도 화가 난 나머지 미갈에게 가장 잔인한 말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감추고 싶은 상처와 약점이 있습니다.
인간의 굴레라는 소설에 보면 그 주인공 필립은 한쪽 발이 불편했습니다.


발이 안쪽으로 굽은 기형이라서 어떻게든 티를 내지 않으려고 숨기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친구들은 그의 발을 조롱하면서 놀렸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감추고 싶은 약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나의 출신이든 나의 가족이든 학벌이든 성격이든 무엇이든지 간에 숨기고 싶은 그것이 있습니다.
미갈에게는


자기 아버지가 그런 존재였습니다. 자기 아버지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그 사실이 너무나도 큰 고통이었습니다.
우리가 말다툼을 할 때 다른 사람의 약점을 건드리면 안 됩니다.
우리가 논쟁하고 있는 그 사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지 이전에 있었던 일을 가지고 공격하면 안 됩니다.
더구나 상대방이 고통스럽게 여기는 그 약점을 공격하는 것은 정말로 치사하고 비열한 행동입니다.


지금 그 일을 다윗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뻐 춤추고 있는 자신을 조롱한 그 아내에게 그녀가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그 약점을 가지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너의 아버지를 버리시고 나를 택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은 미갈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었고 두 사람의 부부 관계는 그날로 끝이 났습니다.
사무엘하 62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그에게 자식이 없으니라.
이 말은 미갈이 불임이 되었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미갈이 죽는 그날까지 자식이 없었다는 것은 미갈과 다윗의 부부 관계가 완전히 끝났다는 것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가장 기쁘고 행복한 날에 두 사람은 절대로 하지 말았어야 하는 그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성경에 등장하는 그 어떠한 부부보다 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고대 히브리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증오에 사로잡히면 직선도 삐뚤어 보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화가 나면 우리의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분노에 휩싸이면 우리는 제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제대로 생각할 수 없고 제대로 판단할 수 없을 때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화가 난 상태에서 나오는 말은 너무나 치명적인 상처를 상대방에게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가족 간에는 더더욱 말조심을 해야 합니다.
서로의 약점과 허물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화가 나도 배우자에게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습니다.
당신하고 결혼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이런 말 절대 하면 안 되죠 아무 의미가 없는 말입니다.
아무리 배우자가 미워도,


내가 배우자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어도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말입니다.
이 말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 때문입니다.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악한 말은 칼이 아니라 화살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상대방을 공격하려고 칼을 뽑았다가 마음이 좀 누그러지면 다시 그 칼을 넣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 쏜 화살은 절대로 돌이킬 수 없습니다.


아무리 화가 났어도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하는 순간에 두 사람의 관계는 절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화가 났다고 해서 나의 말이 정당하지 않습니다.
상처를 받았다고 해서 나의 말이 정당하지 않습니다.
내가 한 말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한 말로 인해서 관계가 다 깨어졌다면 그것 역시 나의 책임입니다.
나의 말로 인해서 얼마나 큰 책임이 발생할 수 있는지 깨닫고 입술로 범죄하지 않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파괴적인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절대 하지 말아야 하는 그 말을 하게 되면 상대방의 말에 씻을 수 없는, 잊을 수 없는 상처를 주게 됩니다.


미국 최고의 과학 수술가로 인정받는 아이작 아슈머프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보스턴 대학교의 의과대학 교수로 재직하는 동시에 미국 최고의 과학 소설가에게 주어지는 휴고상을 받았습니다.
한 가지 분야에서 성공하는 것도 힘든 일인데 이 사람은 두 가지 분야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 것입니다.
의대 교수인 동시에


과학 소설가로서 그는 500권이 넘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유달리 자존심이 강했던 그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나는 좋은 삶을 살았고,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이루었고,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성공을 거둔 아슈머프였지만 그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상처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고등학생 때 그의 장문 선생님에게 받았던 말이었습니다.
맥스라는 이 교사는 아슈마프의 글이 쓰레기 같은 글이라고 혹평하면서 공개적으로 그에게 모멸감을 주었습니다.
그 말이 얼마나 깊은 상처가 되었는지 아슈머프는 죽는 그날까지 그 선생님을 잊어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에 남긴 회고록에 이런 고백이 있습니다.
나에게 타임머신이 있었으면 싶었다. 그러면 내가 쓴 책 몇 권과 나에 대한 기사들을 가지고 1934년으로 돌아가 그 선생에게 말하고 싶다.
이 글들은 어떻소


쓰레기 같은 인간 당신은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 중에 어떤 인재가 있는지 알아보지 못했소라고 말하고 싶다고 고백했습니다.
아무리 놀라운 성공을 거두어도 마음 깊은 곳에 남은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이렇게 어렵습니다.
혹시 여러분에게는 그러한 상처가 없으십니까?


시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그 마음의 상처가 없었습니까? 파괴적인 말이 남긴 그 상처는 칼에 찔린 상처보다 훨씬 더 깊고 훨씬 더 오래 갑니다.
많은 경우에 그러한 상처는 가까운 사람에게서 받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에게 중요한 사람이 했던 말이 나에게 그렇게 상처가 되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커뮤니케이션의 대가 조셉 텔루슈키는 강연할 때마다 이런 질문을 한다고 합니다.


가족이나 친척 중에서 여러분이 말을 하지 않고 지내는 사람이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한다고 합니다.
이 질문을 하면 청중의 약 40% 정도가 손을 든다고 합니다.
아마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서 40%는 말을 하지 않고 관계를 끊고 지내는 가족이나 친척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 원인은 무엇입니까?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는데 연락을 끊고 살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대부분의 이유는 말로 인한 상처 때문입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서로의 치명적인 약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언쟁을 하던 중에 상대방의 약점을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말 한마디로 관계가 완전히 끝날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나와 가까운 사람에게 더더욱 말조심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 입에서 이 독한 말을 멈출 수가 있을까요? 독한 말을 화살같이 쏘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우리의 마음을 지킬 수가 있을까요? 말로 상처를 받은 사람은 말로 상처를 주기 쉽습니다.
내가 당한 대로 갚아주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미갈의 말에 상처를 받은 다윗이 더 잔인한 말을 해서 미갈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잠언 121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가 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으니라.
아베


함부로 말하는 것은 칼로 찌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반면에 지혜로운 자의 말은 양약과 같은 치유를 가져옵니다.
금방이라도 싸움을 하려고 했던 사람들이 이 사랑과 지혜가 담긴 말로 화를 누그러뜨리기도 합니다.
그러면 독한 말을 주고받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이 사랑과 지혜의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지난 설교에서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말만 바꿀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술로 말하기 때문에 말만 바꿀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말이 바뀌려면 우리의 마음이 바뀌어야 합니다.
치유된 말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먼저 치유를 받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로 인해서 상처를 받았던 우리의 마음이 먼저 치유되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치유의 말을 할 수 있게 되고 사랑과 지혜의 말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어떻게 치유받을 수 있을까요?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치유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치유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 마음에 상처가 있는 이유는 우리가 사탄의 거짓말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가족을 통해서 친구를 통해서 세상을 통해서 수많은 거짓말을 우리에게 쏟아냅니다.
이것을 무시하면 괜찮은데 이것을 사실이라고 받아들이면 그때 우리 마음 안에 상처가 생기는 것입니다.


사탄이 우리에게 보내는 거짓말에는 이런 것이 있습니다.
너는 좋은 학교에 못 갔으니까 실패한 인생이야.
너는 외모가 예쁘지 않으니깐 사랑받지 못할 거야.
너는 과거에 이런 잘못을 했으니까 결코 용서받지 못할 거야.
이런 모든 말은 사탄의 거짓말입니다.


이 중에 하나라도 우리가 사실로 믿고 받아들이면 그때 우리 마음 안에 상처가 생기는 것입니다.
상처가 마음에 생긴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는 말을 잘 합니다.
여러분 주변에 상처 주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은 마음 안에 누구보다도 큰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 안에 가득한 것을 말로 표현하기 때문에 마음에 상처가 있는 사람은 상처 주는 말을 잘합니다.
반면에 마음 안에 기쁨과 평안이 있는 사람은 평안을 주고 위로를 주는 말을 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치유되어야지 우리의 말도 치유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치유되기 위해서는 사탄의 거짓말을 하나님의 진리로 대체해야 합니다.
사탄이 다른 사람을 통해서 보내는 그 거짓 메시지를 우리가 분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너는 실패한 인생이야 너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어.
누군가가 우리에게 이렇게 말을 한다면 그것을 우리가 그 사람의 말로 받아들일 것이 아닙니다.


사탄이 이 사람을 통해서 나에게 거짓 메시지를 보내고 있구나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을 한 사람을 미워하고 대적하기보다는 그 말을 하게 만든 사탄을 대적해야 합니다.
사탄의 거짓말을 하나님의 진리로 대체하기 위해서 우리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듣고 더 중요하게 들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실패한 인생이라고 말한다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고 선포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하면 내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라고 선포해야 합니다.
이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안에 다 있습니다.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중요하게 듣는 사람은


사탄의 거짓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 안에 거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진리 안에 거하면 어떻게 될까요? 요한복음 832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아멘. 우리가 진리 안에 거할 때 자유케 되는 줄로 믿습니다.
무엇으로부터 자유케 될까요?


사탄의 거짓말로부터 자유케 됩니다. 사람들의 상처 주는 그 말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뭐라고 해도 거기에 상처받지 않고 내 마음의 평안을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말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가장 잘 아시고 나를 가장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가치를 말씀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그 과정이 바로 성화의 과정입니다.
성화는 절대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화를 위해서는 매우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주님 앞에 나와서 예배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사랑하는 그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노력과 시간이 쌓이고 쌓일 때에 우리는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다윗이 미갈에게 화가 나서 잔인한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 다윗이 성화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시간이 흐른 이후에


그의 아들 압살롬이 이제 반역했을 때 다윗이 쫓겨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시의이라는 사람이 다윗에게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당신이 사악한 자이기 때문에 사울 족속의 모든 피를 주님이 너에게 돌리셨다고 저주합니다.
다윗의 예전 성격이었으면 단카레 시의를 죽였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변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로 그 마음이 치유된 다윗은 이전처럼 독한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저 사람을 통해서 나에게 말씀하실 수도 있으니까 내가 잠잠하겠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자기 감정대로 말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진리 안에 거한 다윗은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자기를 저주하는 사람 앞에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러한 자유를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편 1413절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아멘. 우리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야 할 줄로 믿습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내 기분이 나쁘다고, 내가 화가 났다고 함부로 말하거나 저주하면 안 됩니다.
말의 힘, 입술의 권세를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선한 말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악한 말을 하지 마시고 우리 입에 파수꾼을 세워서 아름다운 입술의 열매를 거두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