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21
ㅣ사무엘상 25장 23-31절
ㅣ문대원 목사
여러분은 홧김에 했던 말 때문에 후회했던 적이 있으십니까? 화가 나서 했던 그 행동으로 말미암아서 나중에 아, 그렇게 하지 말걸 후회했던 적이 있으십니까?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상대방에게 말로 상처를 줄 때가 있습니다.
마음속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어서 집안에 물건을 집어던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그때 화가 나서 어쩔 수 없었다라고 변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홧김에 하는 행동은 다 용서가 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화가 나서 했던 그 말과 행동에 대해서 책임져야 하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요즘에는 분노를 억누르는 것이 좋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화가 나면 있는 그대로 화를 표출하라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건강한 방식으로 우리가 감정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방법으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화가 난다고 해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올바른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욕을 느낀다고 해서 누군가를 성추행할 권리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분노를 느낀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있는 권리가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캐롤 타브리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났을 때 화를 표출하면 거의 틀림없이 더 화가 날 뿐이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은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화가 났을 때 어떤 물건을 부순다고 화가 풀리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화가 더 날 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 마음속에 있는 화를 멈출 수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화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화가 났을 때 집 안에서 물건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화가 나도 회사에서 직장에서 물건을 던지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직장에서 징계받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우리는 상황을 봐가면서 화를 냅니다.
흉기를 든 강도를 만났을 때 그 앞에서 저항하거나 화를 내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어떤 결과가 다가올지 알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우리는 상황을 봐가면서 화를 냅니다.
홧김에 하는 말과 행동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로 인해서 상대방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다면 그 상처에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불의에 대한 분노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무언가 잘못된 것을 봤을 때 화가 나는 것이지요.
불의에 대한 분노는 도덕적으로 정당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악인의 죄와 불의에 대해서 분노하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장 18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선량한 사람을 해치는 악인을 볼 때 분노를 느끼는 것은 정상입니다.
진리를 대적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핍박하는 악인을 볼 때 화가 나는 것도 정상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러한 종류의 분노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분의 분노대로 행하지는 않으십니다.
세상의 악한 모습을 보시고 화가 나는 대로 그대로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진노 중에도 긍휼을 잊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박국 3장 2절에 보니깐 붉은 글씨로 진노 중에라도 긍유를 잊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실현 불가능한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진노 중에 심판하시더라도 긍유를 잊지 않으시는 분이신 것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불의에 대한 분노는 정당합니다. 하지만 그 분노에서 나오는 모든 행동이 다 정당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인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행동 역시 그분의 공의와 사랑이 모두 포함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분노에서 나온 행동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는 성경에 많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모세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모세가 누구입니까? 모세는 애굽의 종으로 있던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해서 나온 대단한 지도자입니다.
구약 성경의 근간이 되는 율법과 모세 오경을 쓴 사람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최초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린 사람이 모세입니다.
이렇게 위대한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원망하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분노했습니다. 잘못된 행동, 잘못된 사람들에 대한 분노이기 때문에 이것은 정당한 분노입니다.
하지만 그 분노에서 나온 말이 모두 다 정당하지는 않습니다.
광야에서 물을 달라고 불평하는 사람들에게 모세가 그들을 보고 화가 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반석에게 명령하여서 물을 내라고 말씀하셨는데, 모세는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내라라고 하면서 반석을 지팡이로 내리쳤습니다.
이 행동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책망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민숙이 20장 12절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거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드리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아멘.
모세가 지금 무슨 큰 잘못을 했다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일까요? 지팡이로 반석을 친 것이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물을 내시는 것인데 우리가 물을 내랴라고 말한 그 말이 잘못된 것인지 우리가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 답을 찾기 어려울 때에는 이에 관련된 다른 성경 구절을 우리가 확인해 보면 됩니다.
시편에 보면 므리바 사건에 대한 말씀이 여러 구절이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를 보겠습니다. 시편 106편 32절, 33절 함께 읽겠습니다.
그들이 또 무리바 물에서 여호와를 놓으시게 하였으므로 그들 때문에 재난이 모세에게 이르렀느니 이는 그들이 그의 뜻을 거역함으로 말미암아 모세가 그의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음이로다.
아멘. 여기에 보니까 민숙이에는 없는 추가 설명이 있습니다.
모세가 그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했던 말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내랴 이 말은 망령된 말처럼 들리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민숙이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무언가 하나님을 향한 불신의 말,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저주의 말을 모세가 했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말이겠죠. 너희 같은 자들을 데리고 내가 어떻게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겠느냐 너희 같은 사람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이런 식의 저주의 말, 입술의 범죄를 저질렀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입술을 망령되기 말하였기 때문에 너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 입장에서는 조금 억울하지 않을까요?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 40년 동안이나 고생했는데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모세가 말 한마디 잘못해서 이렇게 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말 실수는 평소에 하던 생각을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 중에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을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실수는 단순히 말로 한 실수가 아니라 평소에 그러한 생각을 가졌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모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을 들으면서 아 이런 사람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리바 사건이 벌어지자 평소에 마음에 품었던 그 생각을 말로써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이 망령된 말이라고 하셨고 그 입술의 범죄로 인해서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입술의 범죄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큰 문제이고 심각한 문제입니다.
모세가 느꼈던 어떤 그런 분노는 정당한 것일 수 있지만 그의 말과 행동은 정당하지 않았습니다.
분노에서 나온 행동은 이렇게 위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분노를 오랫동안 마음에 품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분노를 마음에 오랫동안 품을 때 우리는 파괴적인 말과 행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4장 26절, 27절 함께 읽겠습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아멘. 우리 마음 안에 분노가 가득할 때 마귀에게 틈을 주는 것입니다.
설령 그것이 정당한 분노라 할지라도 오랫동안 그 마음에 분을 품고 있으면 사탄이 우리를 충동해서 우리가 잘못된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처한 상황이었습니다.
사울 왕에게 쫓기던 다윗과 그의 용사들은 유다 지파의 양떼들을 보호해 주고 그에 대한 대가를 받으면서 생활했습니다.
고대 사회에는 이방 민족의 침입이 많이 있었고, 맹수들의 공격도 많이 있었습니다.
목축업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전하게 양떼를 칠 수 있는 그러한 환경이 필요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다윗과 그의 용사들이 유다 지파의 양떼들을 돌봐주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가로 음식을 받으면서 생활했습니다.
한 번은 갈메르에 사는 나발이라는 사람의 양대 수천 마리를 지켜주었습니다.
그리고 양털 깎는 축제의 날이 다가왔습니다.
마을에서 큰 축제가 벌어지니까 다윗이 사람들을 보내서 우리 용사들에게 음식을 좀 나누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랬더니 나발이라는 부자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사무엘상 25장 10절 함께 읽겠습니다.
나발이 다윗의 사람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즘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아멘. 이 말은 다윗을 향한 엄청난 모욕의 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전체에서 다윗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 리 없습니다.
이스라엘 최대의 적인 골리앗을 쓰러뜨린 아주 유명한 장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노래가 있었죠.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이런 노래를 부를 정도로 다윗은 이스라엘 전역에서 알려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발이 지금 다윗은 누구며,
2세의 아들은 누구냐라고 말함으로써 그를 공개적으로 모욕했습니다.
요즘에는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라고 말한 것은 다윗을 주인 사울에게서 도망한 하인쯤으로 여기는 모욕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발에게서 이러한 모욕을 들은 그 다윗은 크게 화가 났습니다.
히브리어로 나발은 어리석은 자, 바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느 부모가 자기 아들의 이름을 바보라고 짓겠습니까? 학자들은 나발이 본명이 아니라 사람들이 부르는 별명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나발이 어떠한 사람인지 나와 있습니다.
사무엘상 25장 17절에 보니깐 그 종이 말하기를 주인은 불량한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불량한 사람이라는 단어는 문자적인 의미로 불량배 건다를 뜻합니다.
사무엘서에 보면 이 단어는 아주 특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2장 12절에 보니깐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쁘다라고 할 때 그때 사용된 히브리어가 블리알인데, 나발을 묘사하는 단어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은 당시 이스라엘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보여주는 단면과 같습니다.
제사장의 아들들, 오늘날로 말하면 목사의 아들들이 하나님께 바쳐진 재물을 자기 마음대로 먹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전 안에서 섬기는 여인들과 성전에서 동침했습니다.
사무엘서에서 엘리의 아들들은 이스라엘의 타락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불량배 건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나발이라는 부자를 소개할 때 그와 동일한 단어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엘리의 아들들과 같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어리석고 악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지금 다윗을 공개적으로 모욕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양대 수천 마리를 지켜준 그 다윗을 향해서 모욕한 것입니다.
요즘 억지로 주인에게서 떠난 종들이 많다고 하면서 다윗을 그러한 배은망덕한 종으로 모욕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다윗이 너무나 화가 났습니다.
양떼들을 지켜준 은혜를 잊어버리고 자신을 모욕한 어리석고 악한 나발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불렀습니다.
사무엘상 25장 13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다윗이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칼을 차라 하니
각기 참에 다윗도 자기 칼을 차고 400명 가량은 데리고 올라가고 200명은 소유물 곁에 있게 하니라.
아멘. 이스라엘 최고의 용사 다윗이 400명을 데리고 무장해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골리앗을 무찌른 그 군인이 화가 났으니까 이제 나발의 목숨은 끝난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조금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다윗이 그전에는 사울 왕의 악한 행동을 잘 참고 용서했는데, 왜 이 나바의 말에는 참지 못하였을까요? 아무 죄가 없는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그 사울 왕은 두 번이나 용서해 줬는데, 왜 이 나바의 조롱과 모욕을 견디지 못했던 것일까요? 우리가 다윗의 심리를 이해하려면 오늘 본문 직전의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사무엘상 25장 1절에 보니까 사무엘이 죽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세상을 떠난 것이지 사무엘이 누구입니까? 그는 다윗을 왕으로 기름부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버리셨고, 이제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음을 선포한 선지자가 사무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선지자가 죽었습니다. 아직 다윗은 왕이 되지 못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서 다윗의 왕으로 택하셨다는 그 하나님의 뜻을 이제 선포해 줄 사람이 없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인 권위를 가지고 다윗이 왕이 될 것이라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니까 이젠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확실하게 말해줄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왕이 될 것이라고 주님께서 약속하셨는데, 그 약속이 정말로 이루어질 것인지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인생에서 가장 깊은 혼란 가운데 빠진 것입니다.
앞으로 내 인생은 어떻게 될 것인가 주님의 약속대로 내가 정말 왕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깊은 안개 속을 헤매이는 그런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어리석고 악한 나발이 다윗을 모욕했습니다.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즘에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난 종들이 많다고 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다윗은 너무나도 화가 났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정말로 걱정하고 두려워하던 부분을 나발이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른 사람과 다툴 때가 있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대로 다른 사람의 인신 공격을 하면 안 됩니다.
특히 그 사람이 부끄럽게 여기는 것, 그 사람의 숨기고 싶은 약점을 건드리면 절대로 안 됩니다.
그것이 출신 배경일 수도 있고
신체적인 약점일 수도 있고 과거의 실수일 수도 있습니다.
상대방이 부끄러워하는 그것을 인신 공격하는 순간 그 사람과의 관계는 완전히 끝나는 것입니다.
철천지 원수가 되어서 평생 동안 미워하는 나의 대적을 만드는 셈입니다.
아무리 기분 나빠도 상대방의 인신 공격을 하면 그 관계는 다 끝나게 됩니다.
자신의 약점을 공격받은 다윗은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무장한 군인들 400명을 이끌고 나바에게 피해 복수를 하기 위해서 떠났습니다.
어느 누구도 다윗의 분노를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다윗 앞에 용기 있게 선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발의 모욕과 조롱으로 인해서 분노한 다윗 앞에 선 사람은 다름 아닌 나발의 아내 아비가엘이었습니다.
성경은 아비가일이 총명하고 지혜로운 여인이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다윗 앞에 나타나서 엎드려 저라면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사무엘상 25장 25절에 보니깐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라고 말을 했습니다.
불량한 사람은 위에서 살펴보았던 히브리어 블레야리
동일한 단어입니다. 불량배, 건달이라는 뜻을 가진 이 단어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아비가일이 말하기를, 그런 불량배에게 신경을 쓰지 마시고, 그런 사람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한 말입니다.
이것은 구약 성경 전체에서 여성이 했던 말 중에 가장 긴 불량의 말이었습니다.
히브리어 단어 153개에 해당하는 긴 말을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했습니다.
아비가일은 나발이 다윗에게 했던 이 행동이 악하고 잘못된 것을 인정했습니다.
수천 마리 양떼를 지켜준 다윗에게 감사를 표하지 않은 것은 나발이 잘못한 것이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그와 더불어서 아비가일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셨던 그 약속이 성취될 것을
선포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선지자와 같은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왕조를 세우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선포했습니다.
사무엘상 25장 28절 함께 읽겠습니다.
주의 여종의 허물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사오시이오.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다.
아멘.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서 든든한 집을 세우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다윗 언약을 뜻합니다. 제가 구약 성경을 관통하는 중요한 언약 세 가지가 있다고 말씀드렸죠 아브라함 언약, 모세 언약, 그리고 다윗 언약입니다.
다윗 언약은 사무엘하 7장에 보면 나옵니다.
다윗이 왕이 된 이후에 하나님을 위해서 성전을 짓고자 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위해서 집을 세우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집은 물리적인 집이 아니라 다윗의 왕조를 뜻합니다.
그런데 아비가일이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 사무엘하 7장이 아니니까요. 아직 하나님께서 이 다윗 언약을 주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훨씬 더 전에 그러한 예언적인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 충만한 사람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선한 뜻을 믿음으로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비가일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셨던 그 약속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25장 30절, 31절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죄에 대하여 하신 말씀대로 모든 선을 내 주에게 행하사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실 때에 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보복하셨다든지 함으로 말미암아 슬퍼하실 것도 없고 내 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시리니 다만 여호와께서 내 주를 후대하실 때에 원하건 내 내 주의 여정을 생각하소서 하니라.
아멘. 아비가일은 과거 사무엘이 다윗을 기름 부어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웠던 그 장면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서 어떠한 일을 하고자 하시는지, 하나님의 선한 계획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비가일의 말은 한마디로 이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택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어리석은 나발에게 직접 복수하려는 이 행동은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지혜로운 여인의 말이 다윗을 멈출 수 있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죽은 이후에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이 정말 이루어질 수 있을까 의심했습니다.
내가 정말 왕이 될 수 있을까 사무엘이 없는데 누가 하나님의 약속을 정말 이룰 수 있을까 두려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의심되고 나도 나를 믿을 수 없는 그 순간에 나발이 그를 모욕했습니다.
다윗은 누구며, 이세의 아들은 누구냐? 이 말을 들은 다윗은 너무나도 화가 나서 나발과 그의 온 집을 다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혜롭고 용기 있는 여인 아비가일이 다윗 앞에 선 것입니다.
그녀는 다윗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켰습니다.
소년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으로 기름 부으셨던 그 사건을 생각나게 한 것입니다.
그 약속을 받은 사람으로서 나발에게 직접 피해 복수를 하려는 이 행동은 옳지 않다는 사실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지혜로운 말이었고 너무나도 용기 있는 말이었습니다.
여러분 성숙한 사람은 유익한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유익한 말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숙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을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비가일은 정말로 성숙한 사람이었고 용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인생에서 고난을 만날 때 나타나는 한 가지 현상이 있습니다.
물론 고난 자체도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시야가 좁아진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의 시야를 좁게 만듭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고난밖에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그동안 내 인생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과거에 기가 막힐 그 웅덩이에서 나를 이끄셨던 그 과거의 은혜가 생각나지 않습니다.
고난을 당하면 지금 당장 내 눈앞에 있는 그 문제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난당한 사람은 너무나도 자기중심적인 그런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쌍하고 내가 제일 힘들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불쌍한 내 인생, 가련한 내 인생 하면서 신세 한탄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변에서 그런 사람 보신 적 있으시죠? 인생의 고난에 갇혀서 자기 신세를 한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만 특별히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고난에 압도 당하면 누구든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불쌍한 내 인생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런 순간에 무엇이 가장 필요할까요? 고난으로 인해서 내 시야가 좁아졌고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될 때 어떠한 도움이 제일 필요할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관점을 말해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의 상황을 영적인 관점으로 초월적인 관점으로,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하나님이 가지신 선한 뜻과 소망을 말해주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아비가일이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이 죽고 하나님의 약속이 의심되는 그때에 어리석은 그 나발이 그를 모욕했습니다.
평소 같으면 그냥 용서하고 넘어갈 수 있을 텐데 다윗의 마음 안에 의심과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이성을 잃고 나발에게 복수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아비가일이 다윗 앞에 섰습니다.
칼을 찬 다윗과 그의 용사 400명 앞에 아무런 무기도 없이 홀로 섰습니다.
남성 중심의 고대사회에서 아비가일은 여성으로서 홀로 섰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다윗에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으로서 나발에게 피의 복수를 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그분의 약속대로 다윗을 왕으로 삼으실 것이라고 믿음으로 선포했습니다.
아비가일은 분노에 휩싸인 다윗의 마음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기억나게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세계적인 영성신학자 유진 피터스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아비가일의 아름다움은 다윗으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접촉하게 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를 다시 깨달았다.
아비가일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셨던 정체성을 회복시켜준 것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나비가엘은 다윗에게 그의 행동이 어떠한 결과를 낳을지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했습니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분노 중에 한 그 악한 행동으로 인해서 정말로 중요한 것을 놓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해 주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지금의 상황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말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내가 아무리 화가 나고 아무리 억울해도 내 행동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다윗과 사울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대비된 인생을 살았습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다윗은 하나님께 질문하는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께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취합한 그 정보를 의지했던 사람이 사울이었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서 알 수 있는 중요한 차이점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다윗은 화가 났을 때 그를 멈출 수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그가 화가 났을 때 자신을 멈출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였을 때 여인들이 다윗을 높이고 찬양했습니다.
그 노래를 듣고 사울이 화가 났습니다.
내가 왕인데 왜 나보다 다윗을 더 높이는가?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때 사울 주변에는 그를 멈출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노베 제사장들이 다윗을 도와주었을 때에도 사울은 그들에게 화가 났습니다.
아니 왕에게 반역한 사람을 도와준 그들을 모두 다 죽여버리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때에도 사울의 주변에는 그를 멈출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달랐습니다. 다윗은 그의 용사 400명과 함께 무장을 하고 나발과 그의 온 집을 공격하기 위해 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아비가일이 다윗 앞에 서서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로서 직접 피해 복수를 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그때 다윗은 아비가일의 말을 듣고 복수를 멈추기로 했습니다.
사울도 화가 났고 다윗도 화가 났습니다.
전쟁에 능한 군인들이 화가 나면 정말로 무서울 것입니다.
화가 난 사울을 멈출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화가 난 다윗을 멈출 수 있는 사람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아무리 화가 나도 누군가 말하는 것을 듣고 그것을 기준으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겸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여러분을 멈출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화가 나서 어떤 행동을 하려고 할 때에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관점을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그 사람이 하나님의 관점을 말해줄 때 여러분은 그것을 듣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겸손이 있으십니까?
우리 인생에는 세 가지 c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첫째는 치어리더이고요 둘째는 코치이고 셋째는 크리틱 비평가입니다.
치어리더는 우리가 잘하고 있다고 응원해주고 격려해주는 사람입니다.
코치는 우리가 나아가야 하는 방향을 알려주고 권면해 주는 사람입니다.
비평가는 우리가 잘못하고 있는 부분을 지적하고 바로잡아주는 사람입니다.
이 중에서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치어리더이겠죠.
내가 잘하고 있다고 나를 응원해주고 격려해 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설교 시간에도 나를 좀 위로해주고 격려해 주는 설교를 아마 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에 꼭 필요한 것이 코치와 비평가입니다.
우리가 나아가는 방향이 올바른 방향인지 확인해 주고 권면해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혹시라도 우리가 잘못하는 부분이 있으면 그것을 지적하고 바로잡아줄 사람도 필요한 것입니다.
코치나 비평가 없이 치어리더만 있다면 분위기는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 진정어린 조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제가 스위스에서 선교 훈련을 받을 때 국제 선교단체를 이끌었던 리더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탁월한 리더는 자기 의견에 반대할 수 있는 사람을 가까이에 두는 사람이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은 정말로 맞는 말이고 동시에 정말로 지키기 어려운 말입니다.
아주 훌륭한 리더십의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탁월한 리더는 자기 의견에 반대할 수 있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고 가까이에 둘 수 있는 사람입니다.
누군가가 내 의견에 반대했을 때 이것이 정말 합당한 말인지, 하나님의 뜻에 맞는 말인지 돌아볼 수 있는 사람이 훌륭한 리더입니다.
자기 주변에 예스맨만 두는 사람은 좋은 리더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분위기는 좋을지 모르겠지만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때 직언해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리더라 하도 인간적인 한계와 제약이 다 있습니다.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다 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될 때 함께 일하는 동역자들이 다양한 관점을 말해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하나님의 관점을 말해주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인생에서 방향을 잃었을 때, 길을 잃었을 때 찾아가서 기도를 부탁하고 자문을 구할 사람이 있으십니까? 우리 모두에게는 아비가일과 같은 사람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내가 화가 났을 때, 내가 방향을 잃었을 때, 하나님의 관점을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내 인생에서 그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돌아봐야 할 줄 믿습니다.
또한 그 사람이 나에게 하나님의 관점을 말해주었을 때 그 말을 들을 수 있는 겸손함이 필요합니다.
화가 나서 잘못된 행동을 하려는 나를 멈출 수 있는 사람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비갈과 같은 사람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을 때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영적인 민감함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잠언 15장 1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아멘. 온유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관점을 말해주는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로서 그 약속에 합당하게 살 수 있도록 서로 서로 권면하고 위로하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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