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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대원목사 설교

기다림의 노래-1 마리아의 노래

by 마이코 2023. 12. 15.

2023-12-10 (주일)ㅣ대구동신교회 주일설교

ㅣ누가복음 1장 46-56절

ㅣ문대원 목사

오늘부터 3주간 기다림의 노래라는 시리즈 제목으로 설교를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무언가를 간절하게 기다려본 적이 있으십니까? 3 수험생은 대학에 합격하는 날을 간절히 기다릴 것입니다.
군대에서 복무 중인 군인은 제대하는 날을 간절히 기다릴 것입니다.
또한 임신 중인 여인은 아이가 태어나는 날을 간절히 기다릴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유학 중일 때 아내가 임신을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대부분 아이의 성별을 미리 아는데 미국에서는 일부러 출산 때까지 성별을 알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같이 공부하는 미국 학생에게 왜 그렇게 하는지 제가 질문했더니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미국에서는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가족들끼리 서로 선물을 준비하는데 뭐가 필요한지 미리 물어보고 준비하는 것보다 상대방에게 무엇이 필요할까 곰곰히 생각해서 선물을 준비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당일에 선물을 탁 풀렀는데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이 선물이라면 그것만큼 행복한 일이 없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자녀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장 큰 선물이니까 마지막까지 성별을 모르고 기다리다가 크리스마스 당일날 아침에 선물을 풀듯이 그렇게 아이를 환영한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제가 그 설명을 듣고 설득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저희도 아이를 낳을 때 마지막까지 성별을 알지 않기로 했습니다.
보통 아들이면 파란색, 딸이면 핑크색 이렇게 아기용품을 준비하는데 저희는 성별을 모르니까 노란색, 연두색으로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임신 기간 내내 성별이 너무너무 궁금했습니다.
아들일까 딸일까 너무 궁금했습니다.

저희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함께 궁금해했습니다.
한인교회 권사님들은 아내의 배 모양을 보시더니 이건 아들 배야라고 하셨습니다.
아들 배 모양이 있고 딸 배 모양이 있다 하는 거죠. 이름을 정하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아들일 경우와 딸일 경우를 대비해서 각각 이름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하도 주변에서 아들 배라고 하니까 저희 부모님께서는 아들 이름을 몇 개 준비하셨고 제안하셨고, 그런데 딸 이름은 특별한 의견이 없어서 제 아내가 딸 이름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출산일이 다가와서 병원에 갔습니다.
저도 분만실에 같이 들어가서 아이가 태어나는 모든 과정을 함께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아들 배라고 말씀하셨던 권사님들의 의견과 달리 딸이 태어났습니다.
제가 그날 이후로 아들배, 딸배 이런 거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희에게는 딸의 탄생이 큰 서프라이즈이자 큰 기쁨이었습니다.
임신 기간에 정말 궁금했던 그 아이를 실제로 만나는 것 너무나 큰 행복이었습니다.
기다림의 시간이 길었던 만큼 실제로 아이를 만날 때 얼마나 기쁘고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기다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동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기다림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상황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로 하는 능동적인 행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호와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다고 선포합니다.

누가복음 1장과 2장에 보면 약속된 메시아를 기다리는 경건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때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시간이었는데, 그때를 지나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신실하게 기다린 사람들이었습니다.
마리아 사가랴, 엘리사벳 시미온 안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신실한 성도들의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3주에 걸쳐서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사람들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들의 노래와 이들의 기도에 담긴 신앙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고백했던 신앙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마리아의 찬가,

영어로 하면 'The Magnificat'(매그니피카)이라고 불리는 유명한 노래입니다.
오페라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The Magnificat'라는 제목의 오페라 곡이 여러 개 있을 정도로 아주 유명한 노래입니다.
누가복음 146절부터 48절 함께 읽겠습니다.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아멘 한글 성경에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라고 되어 있는데, 영어 성경에 보면 'my soul magnifies the Lord'라고 되어 있습니다.
나의 영혼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마리아의 찬가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인정하는 그 고백으로 시작됩니다.
이 고백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경험했을 때 나오는 고백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마리아에게 어떤 말씀을 주셨을까요? 그 앞부분에 보시면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서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31절에 보라 내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마리아는 이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고 남자를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아이를 가진단 말입니까?

그러자 천사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누가복음 136, 37절 함께 읽겠습니다.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아멘 천사는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 징표로 엘리사벳을 들었습니다.
엘리사벳이 나이가 많아서 임신할 수 없었는데, 그녀가 아들을 임신한 것이 하나님의 징표라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이 말씀을 받은 마리아가 한 걸음에 엘리사벳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보자마자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누가복음 14244절에 보니깐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아서 엘리사벳에 말하는 것이죠. 당신의 태 중에 있는 아이가 복이 있습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가 내게로 나오고 있습니다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마리아는 엘리사벳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천사가 와서 어떤 말씀을 주었는지 어떤 것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늙은 엘리사벳이 임신한 것이 하나님의 징표라는 것만 알고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를 보자마자 엘리사벳은 내 주님의 어머니가 내게로 오십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지금 내 복중에 있는 내 아이도 기쁨으로 뛰놀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남자이기 때문에 이 기분을 알 수가 없습니다.
뱃속에 생명을 가진 것이 어떤 기분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뱃속에 있는 아이가 움직이고 뛰노는 것을 느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저는 잘 모릅니다.
이것은 어머니만 느낄 수 있는 특권이지요. 그런데 엘리사벳이 그 특별한 기쁨을 가지고 마리아를 축복하고 마리아가 구주를 잉태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마리아에게 큰 확신이 되었습니다. 나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엘리사벳에게도 동일한 말씀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기적적으로 아이를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엘리사벳에게도 기적적으로 아이를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도무지 설명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전능하심 앞에 마리아가 서게 되었습니다.
혹시 여러분 그런 경험이 있으십니까? 나의 이성으로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일하심을 체험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바로 그 순간에 우리가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요? 마리아가 한 것처럼 하나님은 위대하십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나의 이성과 나의 경험으로는 제한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외부 집회나 미팅에 가면 자주 받는 질문이 있습니다.
작년까지 많이 받았던 질문은 목사님은 대구동신교회를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서울 사람이고 대구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데 어떻게 동신교회를 알아서 부임하게 되셨나요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또 에피스 장학금부터 시작해서 부룬디 선교사 이야기 쭉 해야 됩니다.


그 이야기를 쭉 한번 들으시는 분 한결같이 이거는 정말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가 없는 길이네요라고 이제 고백을 하십니다.
그런데 올해는 제가 조금 다른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그 질문은 이것이죠. 목사님은 어떻게 해서 로잔대회 준비위원회 총무를 맡게 되셨나요라는 질문을 하십니다.
사실 질문은 한 문장인데 이거 답하려면 아주 긴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세계 기독교 역사를 공부했던 것, 아프리카에서 선교사로 사역했던 것, 한국에 와서 온누리 교회 이재훈 목사님을 만났던 것 등등 쭉 이야기를 해야지 제가 어떻게 로잔데의 총무를 맡게 되었는지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습니다.
제가 로잔대회 총무를 맡게 된 결정적 계기가 3차 로잔 대회에 참석했기 때문입니다.
2010년에 남아공 케이타운에서 3차 로잔대회가 열렸었는데 제가 그때 학생 대표로 참석하게 됐는데 그것이 제 인생의 커리어를 많이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러면 저는 어떻게 3차 로잔 대회에 참석할 수 있었을까요?

당시 국제 로잔의 총재가 제가 공부했던 고든코넬 신학교의 교수님이셨습니다.
그분은 차세대 리더들을 키우고자 하는 취지로 학생 대표 6명을 선발해서 로잔 대회에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알게 돼서 나중에 지원을 했더니 이미 6명이 다 선발되었다라고 통보를 받았습니다.
아쉬운 마음에 낙담하고 있었는데 그때 저를 강력 추천해 주셨던 교수님이 한 분 계십니다.
이 미국 교수님께서 저를 데리고 국제 로잔 총재에게 가서 이 학생을 반드시 로잔 대회에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셨습니다.
이미 다 선발 끝났다고 하니까 한 명만 제발 더 특별히 선발해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이 교수님께서 하도 간곡하게 부탁하시니깐 허락해 주셔서 제가 3차 로잔 대회에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럼 여기서 질문이 한 가지 있죠

이 미국 교수님은 도대체 저에 대해서 얼마나 아신다고 저를 이렇게까지 추천해 주셨을까요?


미국 사회에서는 추천이 엄청 중요하기 때문에 함부로 사람을 추천하지 않습니다.
한국에서는 추천서 부탁을 드리면 교수님이 학생을 잘 몰라도 잘 추천서를 써줍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잘 모르는 학생에 대해서는 내가 잘 모르는 학생이라고 있는 그대로 다 써줍니다.
그런데 저와 이 교수님이 같은 미국 교회를 섬기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 잘 아는 사이였습니다.
제가 어떤 소명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마음으로 공부하고 있는지, 심지어 제 모든 성적까지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면 저와 이 교수님은 어떻게 같은 교회에 다니게 되었을까요?

제가 그 미국 교회에서 피아노 반주자로 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 시간을 뒤로 돌려서 제가 7살 때 처음 피아노를 배웠는데, 제가 7살 때 피아노를 처음 배울 때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을까요?


제가 어렸을 때 피아노를 배워서 나중에 미국 가서 피아노 반주를 하고 그 교회에서 이 교수님을 만나서 3차 로잔 대회에 가게 되고, 그 이후에 내년에 열릴 4차 로잔대회 총무로 섬길 것을 하나님은 처음부터 다 알고 계셨을까요?

이 생각을 하면 저는 하나님은 위대하십니다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마주하면 우리는 하나님은 위대하십니다.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리아의 심정이었습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인정합니다라는 고백이 바로 이 의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인정하게 되면 깨닫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내가 얼마나 작고 연약한 자인지 또한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서 내가 얼마나 작고 비천한 자인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오늘 본문에서 주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말은마리아가 천한 신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녀의 집안이 볼품 없고 가진 것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서 내가 얼마나 작고 연약한 자인지 겸손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믿음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나에게 힘이 있고 나에게 능력이 있어서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서 내가 얼마나 작고 초라한 자인지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크심과 나의 작음을 인정하는 진정한 믿음을 가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어서 마리아는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비천한 자를 높이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5152절 함께 읽겠습니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비천한 자를 높이신다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말씀은 성경에 많이 등장하지,
예를 들어서 고린도전서에 보아도 하나님께서 미련한 자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약한 자들을 택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강한 자들을 미워하셔서 그렇게 하셨을까요?

세상에서 잘나고 똑똑하고 돈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은 미워하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부자라고 해서 미워하지 않고 가난한 자라고 해서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십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사람을 편애하지 않으십니다.


로마서 211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아멘 편애를 영어로 Favoritism (페이브티즘)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God show no favoritism' 하면 '하나님은 편애하지 않으신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부자라고 더 사랑하지도 않고 가난하다고 해서 더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고 그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해방신학이라고 들어보셨죠?

1970년대에 남미에서 등장한 신학입니다.
당시 난민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문제가 아주 심각했습니다.
극소수의 상류층만 풍족하고 대다수의 국민들은 가난과 억압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미 카톨릭 교회를 중심으로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하면서 교회가 개혁 운동을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교회가 개혁 운동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인가요? 나쁜 일인가요? 좋은 일이죠.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 도와주고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하는 거 좋은 일입니다.
해방신학은 좋은 의도를 가지고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좋은 의도를 가진 그 운동이 변질된 시점이 있습니다.
해방 신학의 문제점을 우리가 한 문구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영어로 보면 “Preferential option for the poor“ 라는 표현입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우선적인 선택이라는 의미입니다.
해방 신학자들에 따르면 성경을 보니까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를 사랑하시고 연약한 자들 특별히 아끼셨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도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라는 주장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주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무 생각 없이 들으면 좋은 말처럼 들립니다.
그래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 편이 되어야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주장 안에는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편해하신다는 사상이 깔려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부자는 미워하시고 가난한 자를 더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도 부자를 미워하고 가난한 자를 더 사랑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데올로기입니다.
해방신학의 가장 큰 문제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따라가서 사회의 기득권층 부자를 향한 증오와 미움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에는요. 어마어마한 힘이 있습니다.
안 그래도 내가 삶이 힘들고 내 인생 빡빡한 사람들에게 부자들 때문에 여러분들이 힘든 겁니다라고 말하면 거기에는 파괴적인 힘이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대중을 선동하는 것 정말로 올바른 정치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하나님은 모든 부자를 다 미워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부자였습니다.
어마어마한 부자였습니다. 그의 아들들 다 부자였고요.
애굽의 총리 요셉도 당대 최고의 부자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하셨고 요셉도 축복하셨습니다.
신약 시대로 넘어와서 수많은 부자들이 하나님께 사용받았습니다.
아리마대 요셉도 부자였고, 바나바도 큰 땅 부자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땅을 팔아서 초대교회에 바친 것이죠.
사도 바울의 동역자였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부자였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귀하게 사용하신 부자들이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헌신을 통해서 놀라운 선교 사역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부자라고 해서 미워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가난하다고 해서 더 사랑하지도 않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편해하지 않으시고 사람을 외모로 취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부자와 가난한 자 모두를 사랑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부자와 가난한 자를 나누고 부자를 미워하는 것 올바른 신앙 아닙니다.
하나님은 부자를 미워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미워하십니다.
아무래도 확률적으로 볼 때 부자가 교만하게 될 확률이 조금 더 크겠죠.
그러므로 부자들은 절대 자신의 소유를 자랑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자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을 조심하시면 됩니다. 고린도전서 129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자기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나의 소유를 자랑하고 나의 지식을 자랑하고, 나의 외모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 받은 선물인데,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그것을 자랑하는 것,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일이십니다.
이 점을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절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자를 대적하시고 가난한 자를 편애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하나님은 자기를 자랑하는 자를 낮추십니다.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자기를 자랑하는 자를 낮추십니다.


이것이 바로 마리아가 고백했던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입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신약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노래이고, 구약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노래가 하나 있습니다.
이것도 여인의 노래인데 바로 한나의 노래입니다.
노래의 형식과 내용을 바라보면 마리아의 노래와 한나의 노래가 상당히 유사합니다.


여러분 구약 성경에 한나 기억하시죠?

오랫동안 아이를 가지지 못했던 한나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아들 사무엘을 낳게 되었습니다.
주님께 선언한 대로 그 아들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 이후에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장면이 사무엘상 278절에 나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아시고 부하게도 아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공한 자를 걸음 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도다.


아멘. 한나의 노래는 마리아의 노래와 상당히 유사합니다.
가난한 자들을 일으키시고 빈공한 자를 높이신다는 고백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 말은 한나가 천한 신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녀의 집안이 볼품 없고 가진 것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한나는 레위인의 자손인 엘가나와 결혼했습니다.
그러니까 나름 뼈대 있는 집안에 시집을 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아들 사무엘을 낳게 되자 이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 것이 모두 다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 아름다운 찬양입니다.


최근에 한 성도님께서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은 큰 교회를 담임하시는데 부담감을 느끼지 않으시나요라는 질문하셨습니다.
여러 가지 책임과 부담이 많을 텐데 그래도 목사님 표정을 보면 평온해 보이시는데 비결이 무엇입니까? 질문하셨습니다.
제가 그 질문을 듣고 이렇게 답변을 드렸습니다.

저는 제가 해야 하는 부분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고 모든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드립니다.
사역의 결과를 제가 다 만들어낼 수도 없고 책임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사실 저는 젊은 시절에 많은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그냥 실패한 정도가 아니라 정말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이상한 방법으로 실패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 것처럼 실패를 했습니다.


링컨이 낙방에 낙방을 계속 경험했던 것처럼 저도 낙방의 낙방을 계속해서 경험했습니다.
그렇게 처절한 실패의 순간에 여전히 저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무조건적인 사랑 안에 저의 정체성을 두게 되었습니다.
제가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해도 여전히 저를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제 마음에 깊은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인정을 추구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입니다.
이미 여러 번 실패와 실망을 끼쳤기 때문에 사람의 인정이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제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자유로운 마음으로 미국에 가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놀랍게 저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인간적으로 실패라고 생각했던 그 모든 것을 선하게 사용하셔서 가장 최선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까지 너무나 신실하게 인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높아지고 낮아지는 것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높아지고 싶다고 해도요.

하나님께서 높이지 않으시면 아무 소용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간적인 방법으로 잠시 높아질 수 있습니다.
권모술수 사용하고 힘 있는 사람에게 줄을 잘 서서 높아질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높아지는 것은 너무나 잠시뿐입니다.
조금만 시간이 흐르면 다시 바로 내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권불 10년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대단한 권세도 10년을 가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예전에 대단했던 권력자들이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우리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방법으로 높아지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높이실 때까지 신실하게 인내하는 것이 훨씬 더 지혜로운 줄로 믿습니다.
베드로전서 56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아멘. 마리아는 이것을 경험했습니다.
한나도 이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이 두 믿음의 여인은 동일한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낮은 자를 높여 주셨고, 주의 은혜로 존귀를 얻게 하셨다 고백하고 있습니다.
높아지는 것이 우리의 손에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달린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도 동일한 믿음으로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만을 인정하시고 자랑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마리아는 약속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누가복음 15455절 함께 읽겠습니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아멘,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면서 마리아는 개인적인 관점에서 이제 역사적인 관점으로 시야를 넓히고 있습니다.


마리아 개인의 삶에서도 하나님께서 신실하셨지만,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주님께서 얼마나 신실하셨는지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뜻과 계획을 한 개인의 삶 안에 모두 다 담아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모든 사안을 나 중심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항상 올바른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중심에 내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자동차를 운전할 때 내 앞에서 딱 신호가 바뀌면 화를 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사실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관점입니다.
교통신호 체계는 원래 체계대로 움직여야지 내 마음대로 움직이면 안 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나 중심적으로 신호를 보면서 왜 내 앞에서 신호가 바뀌는 거야라고 화를 낼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의 중심에 내가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중심에는 하나님께서 계시고, 그분은 그분의 선한 뜻과 계획대로 세상을 운영하십니다.
그러므로 개인의 관점이 아니라 역사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관망할 때 성경이 강조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기억하셨다 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2425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아멘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고통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었던 언약을 기억하셨습니다.
내가 너의 자손들에게 복을 주겠다 하신 그 약속을 기억하셨습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고통받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마리아의 노래에 보면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라고 고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강한 팔로 힘을 보이셨다라는 표현은 출애굽 당시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과 이사를 뜻하는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시편 13612절에 보니깐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셨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실 때 그러한 전능의 역사를 행하셨다는 뜻인데, 왜냐하면 그분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인자하심이 히브리어로 헤세드입니다.

이것은 언약에 근거한 사랑, 영원히 변하지 않는 헌신적인 사랑을 뜻합니다.
마치 결혼식에서 신랑이 신부에게 영원히 변하지 않는 헌신적인 사랑을 맹세하는 것처럼, 신랑 되신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러한 헌신적인 사랑을 맹세하셨고 지금도 행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지키셨다면 지금도 그 약속을 지키실 줄 믿습니다.


선거철이 되면 정치인들은 온갖 공약을 남발합니다.
순진한 유권자들은 정치인의 말을 듣고 표를 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진지한 유권자들은 정치인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그의 과거의 삶을 살펴봅니다.
그 사람의 과거를 보면 지금의 모습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면 그분의 과거를 보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그 약속을 지키셨는지, 지키시지 않았는지 살펴보면 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그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셨습니다.
그 약속을 그의 자손을 축복해서 하늘의 별과 같이 만들어주겠다 하는 그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다윗에게 주셨던 그 약속도 신실하게 지키셨습니다.
다윗의 왕조를 굳건하게 세우고, 다윗의 자손으로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온 세상을 위한 구원의 길을 완성하시겠다 하는 그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약속을 지키셨기 때문에 지금도 그 약속을 지키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겠다는 그 약속, 지키실 것입니다.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는 그 약속을 지키실 줄로 믿습니다.
의의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겠다 하신 그 약속도 지키실 줄로 믿습니다.

 

남미 에콰도르에서 사역했던 선교사 짐 엘리엇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29의 나이에 폭력적인 아우카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엘리엇이 자기 남편을 죽인 그 부족의 마을로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루 이틀 있는 것이 아니라 5년 동안 그 마을에 함께 살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부족이 예수님께로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아주 감동적이고 아주 영적인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사실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남편의 죽음을 놓고 오랫동안 고민하고 갈등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은 불확실성을 기꺼이 견디는 것이다.
답이 없는 질문이 내 생각을 파고들 때마다 그 마음을 하나님께로 올려드리는 것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은 낭만적인 일이 아닙니다.
수많은 불확실성을 견디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답이 없는 질문이 찾아올 때마다 그 마음을 하나님께로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은 약속을 기억하시는 그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의 약속을 지키셨다면 지금도 그 약속을 지키실 것이라는 그 신뢰하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주님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313절에 보면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이 나타나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


아멘, 하나님께서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약속합니다.
그러면서 또 한 번 인자하심 헤세드라는 히브리어가 한 번 더 나옵니다.
언약에 근거한 사랑, 영원히 변하지 않는 헌신적인 사랑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릴 수 있는 이유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마리아를 성모라고 추항합니다.
마치 마리아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는 특별한 권세가 있는 것처럼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를 합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 아니라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체험한 마리아는 자신의 비천함을 인정하며 기쁨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우리도 동일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크심을 자랑하며 소망의 노래를 불러야 할 줄로 믿습니다.
작고 연약한 우리를 통해서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자랑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축복하시는 그 하나님만 기다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약>

3 수험생은 대학에 합격하는 날을 간절히 기다릴 것입니다.
군대에서 복무 중인 군인은 제대하는 날을 간절히 기다릴 것입니다.
또한 임신 중인 여인은 아이가 태어나는 날을 간절히 기다릴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고백했던 신앙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마리아의 찬가,

영어로 하면 'The Magnificat'(매그니피카)이라고 불리는 유명한 노래입니다.
오페라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The Magnificat'라는 제목의 오페라 곡이 여러 개 있을 정도로 아주 유명한 노래입니다.

누가복음 1장과 2장에 보면 약속된 메시아를 기다리는 경건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때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시간이었는데, 그때를 지나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신실하게 기다린 사람들이었습니다.
마리아 사가랴, 엘리사벳 시미온 안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신실한 성도들의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3주에 걸쳐서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사람들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들의 노래와 이들의 기도에 담긴 신앙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마리아의 찬가,

영어로 하면 'The Magnificat'(매그니피카)이라고 불리는 유명한 노래입니다.
오페라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The Magnificat'라는 제목의 오페라 곡이 여러 개 있을 정도로 아주 유명한 노래입니다.

엘리사벳이 나이가 많아서 임신할 수 없었는데, 그녀가 아들을 임신한 것이 하나님의 징표라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이 말씀을 받은 마리아가 한 걸음에 엘리사벳을 만나러 갔습니다.

작년까지 많이 받았던 질문은 목사님은 대구동신교회를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서울 사람이고 대구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데 어떻게 동신교회를 알아서 부임하게 되셨나요? 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또 에피스 장학금부터 시작해서 부룬디 선교사 이야기 쭉 해야 됩니다.

그런데 올해는 제가 조금 다른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그 질문은 이것이죠.

목사님은 어떻게 해서 로잔대회 준비위원회 총무를 맡게 되셨나요라는 질문을 하십니다.
사실 질문은 한 문장인데 이거 답하려면 아주 긴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세계 기독교 역사를 공부했던 것, 아프리카에서 선교사로 사역했던 것, 한국에 와서 온누리 교회 이재훈 목사님을 만났던 것 등등 쭉 이야기를 해야지 제가 어떻게 로잔데의 총무를 맡게 되었는지 설명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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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저는 어떻게 3차 로잔 대회에 참석할 수 있었을까요?

당시 국제 로잔의 총재가 제가 공부했던 고든코넬 신학교의 교수님이셨습니다.
그분은 차세대 리더들을 키우고자 하는 취지로 학생 대표 6명을 선발해서 로잔 대회에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알게 돼서 나중에 지원을 했더니 이미 6명이 다 선발되었다라고 통보를 받았습니다.
아쉬운 마음에 낙담하고 있었는데 그때 저를 강력 추천해 주셨던 교수님이 한 분 계십니다.
이 미국 교수님께서 저를 데리고 국제 로잔 총재에게 가서 이 학생을 반드시 로잔 대회에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셨습니다.
이미 다 선발 끝났다고 하니까 한 명만 제발 더 특별히 선발해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이 교수님께서 하도 간곡하게 부탁하시니깐 허락해 주셔서 제가 3차 로잔 대회에 갈 수 있었습니다.

저와 이 교수님이 같은 미국 교회를 섬기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 잘 아는 사이였습니다.
제가 어떤 소명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마음으로 공부하고 있는지, 심지어 제 모든 성적까지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면 저와 이 교수님은 어떻게 같은 교회에 다니게 되었을까요? 제가 그 미국 교회에서 피아노 반주자로 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 시간을 뒤로 돌려서 제가 7살 때 처음 피아노를 배웠는데, 제가 7살 때 피아노를 처음 배울 때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을까요?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서 내가 얼마나 작고 비천한 자인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오늘 본문에서 주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말은 마리아가 천한 신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녀의 집안이 볼품 없고 가진 것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서 내가 얼마나 작고 연약한 자인지 겸손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믿음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나에게 힘이 있고 나에게 능력이 있어서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서 내가 얼마나 작고 초라한 자인지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부자라고 해서 미워하지 않고 가난한 자라고 해서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십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사람을 편애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모든 부자를 다 미워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부자였습니다.
어마어마한 부자였습니다. 그의 아들들 다 부자였고요.
애굽의 총리 요셉도 당대 최고의 부자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하셨고 요셉도 축복하셨습니다.

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자기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나의 소유를 자랑하고 나의 지식을 자랑하고, 나의 외모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 받은 선물인데,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그것을 자랑하는 것,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일이십니다.

마리아는 이것을 경험했습니다. 한나도 이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이 두 믿음의 여인은 동일한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낮은 자를 높여 주셨고, 주의 은혜로 존귀를 얻게 하셨다 고백하고 있습니다.
높아지는 것이 우리의 손에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달린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면서 마리아는 개인적인 관점에서 이제 역사적인 관점으로 시야를 넓히고 있습니다.

마리아 개인의 삶에서도 하나님께서 신실하셨지만,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주님께서 얼마나 신실하셨는지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뜻과 계획을 한 개인의 삶 안에 모두 다 담아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모든 사안을 나 중심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항상 올바른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중심에 내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은 낭만적인 일이 아닙니다.

수많은 불확실성을 견디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답이 없는 질문이 찾아올 때마다 그 마음을 하나님께로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은 약속을 기억하시는 그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의 약속을 지키셨다면 지금도 그 약속을 지키실 것이라는 그 신뢰하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주님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약속합니다.

그러면서 또 한 번 인자하심 헤스헤드라는 히브리어가 한 번 더 나옵니다.
언약에 근거한 사랑, 영원히 변하지 않는 헌신적인 사랑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릴 수 있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