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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대원목사 설교

20240616 상처(scar), 별(star)이 되다

by 마이코 2024. 6. 17.

상처(scar), 별(star)이 되다

 

성경: 사도행전 14:19~26

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20.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2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24.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25.  말씀을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26.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 곳은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모든 사람은 다양한 종류의 어려움과 고난을 경험합니다.
여러분은 인생에서 어떤 고난을 경험하셨습니까?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내가 잘못해서 당하는 고난입니다.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하고 내가 죄를 지어서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내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당하는 고난도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길로 살아왔는데, 이 세상이 악하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 의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에게 왜 이러한 고난을 허락하실까요?

 

영국의 기독교 사상가 C.S. 루이스(C.S. Lewis)

C.S. Lewis

 

'우리가 이 세상에서 충분한 행복을 느낄 때 이곳을 영원한 집으로 삼으려 한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루이스가 말하기를

“우리가 갈구하는 안전은 우리 마음을 세상에 안주시킴으로써 하나님께 돌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여행길에 기분 좋은 여관에 들러 원기를 회복하게 해주시지만, 그 여관을 우리 집으로 착각하게 만드시지는 않습니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이 땅 가운데서 고난을 당할 때 한 가지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이 우리의 영원한 집이 아니다는 사실입니다.
평소에는 이것을 잘 깨닫지 못합니다.

모든 것이 좋고 모든 것이 완벽할 때에는 굳이 천국을 찾지 않습니다.
하지만 고난당할 때에 이 땅이 완벽하지 않고 이곳이 우리가 영원히 살 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세계적인 호텔체인 힐튼 가문의 손녀인 패리스 힐튼은 인생이 너무나 행복하기 때문에 아무 걱정이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셀럽(Celeb) 이라는 그 단어를 사용하게 된 것이 그녀 때문인데, 패리스 힐튼에게는 아무런 걱정이 없고 딱 한 가지 걱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라고 합니다.

2020년에 한 인터뷰에서 그녀는 이 세상이 너무 좋으니까 이곳에서 영원히 살고 싶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고대 중국의 진시왕이 영원히 살기 위해서 불노초를 구해오라고 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들은 천국이 필요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까지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통해서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닌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이 세상이 결코 완벽하지 않고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이 아니라는 사실이지요.
이와 같이 고난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동시에 우리에게 소망을 줍니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회개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고 또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그분의 선한 뜻과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고난을 통해서 상처가 남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그 상처는 어둠을 비추는 별이 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당한 고난이 바로 그러한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루스드라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루스드라는 부르기아 지방에 속했고, 더 넓게 보면 갈라디아 지역에 속했습니다.


로마 제국이 갈라디아 제국 지역을 식민지로 삼을 때에 루스드라를 군사 요충지로 삼았습니다.
그곳에는 산과 언덕이 많았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방어하기에 아주 유리했습니다.
루스드라는 유대인의 회당이 없는 도시였습니다.
당시에 소아시아 많은 지역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루스드라에는 회당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곳은 100% 이방 문화와 이방 종교를 따르고 있던 지역이었습니다.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하던 바울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그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사도행전 1410절 함께 읽겠습니다.
”큰 소리로 이르되 내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걷지 못하는 사람에게 일어나라고 외쳤더니 그가 일어나서 걷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행했던 기적과 똑같은 기적이었습니다.
두 경우 모두 태어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이었고, 사도들에 의해서 즉각적인 치유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와 바울에게 동일한 권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과도 같습니다.
베드로가 사도행전 전반부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면, 이제 사도행전 후반부에서는 바울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병자를 고칠 권세가 있었던 것처럼 바울에게도 동일한 권세가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베드로는 그 기적을 예루살렘에서 행했고,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행했습니다.
루스드라는 유대인의 회당이 없고 100% 이방 문화와 종교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 기적을 지켜본 루스드라 사람들은 바나바를 제우스라고 부르고, 바울을 헤르메스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소를 가져와서 그들에게 제사를 드리고자 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옷을 찢으면서 우리는 너와 똑같은 사람인데 왜 우리에게 제사를 지내느냐?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리고 천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에 대한 그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잘 알려진 이야기이고,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직후의 이야기입니다.


본문 1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거리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내치니라“

 

아멘. 유대인과 이고니언에서 온 유대인들이 루스트라 사람들 충동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기 위해서 160km를 걸어왔습니다.
대구에서 160km 떨어진 데가 어디인가 찾아봤더니 경남 통영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누군가를 박해하기 위해서 통영까지 걸어갈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를 시기하고 미워하는 그 힘이 얼마나 파괴적인지 볼 수 있습니다.
안디옥과 이고디어에 있던 유대인들이 이 정도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싫어했습니다.
100번 양보해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박해하는 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방금 전까지 바울에게 소를 바치려고 했던 루스트라 사람들은 왜 바울을 돌로 쳤을까요?
바울을 향한 태도가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변화될 수가 있었을까요?
저는 이 부분이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방금 전까지 바울을 신으로 여기면서 제사드리려고 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 지역에서 유대인들의 말을 듣고 갑자기 마음을 바꿀 수가 있었을까요?
루스트라가 속했던 그 부르기아 지방에는 전설이 있었다고 합니다.


로마 시대의 시인 오비드(Ovid) 라는 사람이 쓴 책에 실제로 나온 이야기입니다.


고대 프리기아(Phrygia) 국가에서 있었던 일인데요.

로마 최고의 신 주피터와 머큐리가 인간의 몸을 입고 한 마을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그들의 정체를 알지 못했던 그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환대하지 않았는데, 유일하게 나이 든 노 부부가 그들을 환대했습니다.
그래서 화가 나, 주피터와 머키루이가 이 노 부부만 보호를 하고 마을 전체에는 홍수를 내렸다라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그 전설이 부르기아 지방 전체에 알려졌습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언제 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올지 모르니까 그런 사람 나타나면 잘 대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사람을 치유하자 그 사람들이 바울을 신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를 신으로 대접하면서 소를 가져와서 제사를 지내고자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 마을에 심판이 임하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루스트라 사람들이 바울을 진심으로 존경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전했던 그 복음에 관심을 가졌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바울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했던 이유는 아주 단순했습니다.
자기에게 화가 미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신이 아닙니다. 나는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안디옥과 이고니옷에 온 유대인들이 바울에 대해서 비방했습니다.

그랬더니 이제 안심한 루스트라 사람들이 바울을 돌로 쳤습니다.
바울을 향한 사람들의 마음이 왜 이렇게 갑자기 바뀌었을까요?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 절대자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생각했던 것은 오직 자기 자신의 이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울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했던 그 이유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이 바울을 돌로 치려고 했던 이유도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였습니다.
이 두 가지가 너무나 극단적인 모습이어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데 딱 한 가지 기준으로 이해가 됩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이기적인 유전자 이기적인 DNA가 있기 때문이죠.
나의 안전과 나의 행복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이 세상은 하나님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또 하나님을 거절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유익하면 얼마든지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을 통해서 복을 받고 필요한 것을 얻으면 얼마든지 하나님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다가도 하나님이 나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면 언제든지 또한 배척합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복음에 우호적이었던 사람들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서 주님을 반대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데, 자기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일관성이 없습니다.
과거에는 교회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근대화 과정에서 좋은 학교, 좋은 병원은 모두 다 선교사님들이 세운 것이었습니다.

4차 로잔대회 기간에 비상의료지원을 이화의료원에서 섬겨주기로 했습니다.
전 세계 200개국에서 오는 손님들을 위한 아주 귀한 섬김이지요.
한국로잔위원회와 이화의료원의 MOU를 맺기 위해서 서울 마곡에 새로 세워진 이대병원에 간 적이 있습니다.

원장님께서 직접 환영해 주시고, 이화의료원의 역사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조선시대에 남녀 구별이 심해서 남성이 진료하는 병원에 여성 환자들이 올 수 없었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오신 남자 의료 선교사님이 계셨지만 당시에 조선 여성들은 남자 의사 선생님에게 진료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을 안타깝게 여긴 선교사님이 미국 본부에 요청해서 여성 의료 선교사님을 보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렇게 오시게 된 분이 메타 하워드(Meta Howard) 박사님이신데 이분이 여성 진료를 시작했습니다.

Meta Howard 박사와 이화의료원


그 이후에 오신 로제타 홀(Rosetta Hall) 박사님이 이화학당에서 학생 5명에게 기초 의료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화의료원의 시작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를 통해서 무언가 얻을 것이 있을 때에는 사람들이 교회에 많이 옵니다.
그러다가 사회가 점차 발전해서 교회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게 되었습니다.
굳이 교회에 오지 않아도 내가 원하는 것을 세상에서 얻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교회에 오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다 못하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은 돈을 사랑하고 정욕을 사랑하고, 명예를 사랑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이와 같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정욕과 쾌락에 이끌리기 때문에 일관성이 없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삼는 사람에게는 인생의 일관성이 없습니다.

정치인만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확고한 국가관, 확고한 신념이 있는 정치인은 일관성 있게 말을 합니다.
일관성 있는 정책, 일관성 있는 비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정치인에게는 일관성이 없습니다.
어제는 이렇게 말했는데, 오늘은 또 다르게 말을 합니다.
어제는 이런 원칙을 말했는데, 오늘은 또 다른 원칙을 이야기합니다.
일관성 있는 비전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세상은 자신의 유익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우리를 미워합니다.
우리가 무슨 잘못을 하지 않아도 기본적으로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합니다.

요한복음 1518, 19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며, 세상이 자신의 곁을 사랑할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오.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예수님은 세상이 우리를 미워할 것이라고 미리 다 말씀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예수님께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속한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난을 당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고난을 가리켜 의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의를 위하여 고난당하는 자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10절 함께 읽겠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니라.“


아멘, 주님의 뜻을 따르다가 고난을 받으면 그것은 복된 일입니다.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친히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당하는 자를 절대로 잊지 않으십니다.
천국에서 우리의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고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진 신앙이자 소망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위해서 살아가지 않습니다.
원칙도 없이, 소신도 없이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살아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을 위하여 살아갑니다.
주님께서 이러한 믿음에 기뻐하시고 우리의 순종을 통해서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가실 줄로 믿습니다.
당장 보이는 눈앞의 이익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루스트라에서 돌에 맞은 바울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아무 잘못이 없는 자신을 향해서 돌을 던지는 사람들에게 바울은 어떻게 했을까요?

본문 2021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르스트라와 이거니언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사람들은 이제 바울이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버렸습니다.
제자들이 그를 둘러싸자 바울이 일어나서 다시 그 섬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 어떠한 고난도 바울의 열정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겠다는 그의 결심을 꺾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바울은 그의 고난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주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디모데후서 312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면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 세상은 사탄의 영향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자기 영역에 빼앗기는 것을 그냥 가만히 보고 있지 않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동원해서 그리스도를 반대하고 복음을 반대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면 반드시 고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한국과 같이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는 박해를 받지는 않습니다.
대신에 이런 경우에는 비방과 조롱을 받게 됩니다.
세상은 교회를 비방하고 그리스도인들을 조롱합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도 교회에 다닐 사람들이 있냐? 라고 말을 합니다.
이러한 비방과 조롱은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이 우리를 미워할 것이라고 미리 다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우리보다 앞서서 예수님을 먼저 미워해서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을 미워하고 핍박해도 그것으로 인해서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고난 앞에서 바울의 진짜 모습이 나타난 것입니다.

리더십 분야의 세계적인 대가 존 맥스웰(John Maxwell)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John Maxwell


"모든 문제는 우리 자신을 보여준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말은 맞는 말입니다.

모든 문제는 우리 자신을 보여줍니다.
평소에는 알 수 없었던 나의 진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발생한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 문제를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난 모습이 진짜 문제입니다.

 

저는 코로나가 한국교회를 망쳐놓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국교회가 아주 멀쩡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다 망가졌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코로나는 한국교회의 실체를 보여주었습니다.

한국교회가 실제로 어떤 모습인지 그 거품을 다 빼고 있는 그대로 다 보여주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자랑해 왔던 것들이 있습니다.

예배를 열심히 드린다고, 기도 열심히 한다고 자랑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 실상이 어떤지 평소에는 알 수 없습니다.
평안한 나라는 알 수 없습니다.

코로나와 같이 큰 문제가 닥쳤을 때 진짜 모습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고난 앞에서 우리의 진짜 모습이 드러납니다. 평소에는 잘 모릅니다.
어떤 사람의 믿음이 좋은지 안 좋은지 평소에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고난이 닥칠 때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그때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진짜 모습, 진짜 신앙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 아니면 겉으로만 믿는 척하고 있는지 고난 앞에서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반석 위에 세운 집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두 사람이 집을 짓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반석 위에 짓고 있었고, 또 한 사람은 모래 위에 짓고 있었습니다.
평안한 날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그 집이 반석 위에 있는지 모래 위에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비가 오고 바람이 불면 그때 알게 됩니다.
모래 위에 세운 집은 너무나 쉽게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기초가 약하기 때문에 뿌리가 없기 때문에 환란 앞에서 바로 무너집니다.
하지만 반석 위에 세운 집은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도 튼튼합니다.
뿌리가 견고한 신앙은 고난 앞에서 그 빛을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진짜 모습은 십자가 앞에서 드러났습니다.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334절 함께 읽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놔둬 제비 뽑을세.“

 

자신을 박해하고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주님께서 기도하셨습니다.
무지함 가운데 범죄하고 있는 자들을 주님은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야말로 진짜 예수님의 모습이고, 그분의 진정한 사랑입니다.
스데반 역시 그의 진짜 모습이 고난 가운데 드러났습니다.
자신을 향해서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향해서 스데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스데반의 이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과 거의 비슷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가지셨던 그 마음과 동일한 마음을 품었다 하는 뜻입니다.
스데반이 얼마나 성숙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고난 앞에서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는데 아무 잘못 없는 그 고난 앞에서 스데반은 예수님과 동일한 마음을 품었습니다.
우리가 고난에 대해서 한 가지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고난을 통과하면 자동적으로 인격이 성숙한다는 생각입니다.
여러분 고난을 받으면 자동적으로 인격이 성숙할까요?
인격의 성숙이 고난의 양에 비례합니까? 꼭 그렇지 않습니다.
인생에서 고난을 많이 당했는데 전혀 성숙하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고난이 성숙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욥의 경우를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욥과 그의 아내는 동일한 고난을 받았습니다.

모든 재산을 다 잃어버렸고, 사랑하는 자녀들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을 정도로 큰 고난을 겪었습니다.
이렇게 큰 고난을 당했으니깐 두 사람 모두 다 성숙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욥은 고난을 통해서 성숙했지만, 그의 아내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욥의 아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욥기 2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고난당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성숙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에서 많은 고난을 당했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경우를 제가 본 적이 있습니다.
성숙은커녕 고난 당한 상처만 가득한 경우도 보았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성숙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그 고난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두 가지로 나누어서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는 구출의 은혜(delivering grace)이고 또 하나는 지탱의 은혜(sustaning grace)입니다.
구출의 은혜, delivering grace는 즉각적이고 극적인 은혜입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애굽에 내린 10가지 재앙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분명하게 즉각적으로 나타났습니다.
막혔던 문제가 한 번에 해결되고 우리를 공격했던 원수가 다 무너졌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이러한 종류의 은혜를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지탱의 은혜. sustaning grace가 있습니다.
이것은 점진적이고 일상적인 은혜입니다.

대표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40년 광야 생활을 할 때 받았던 은혜입니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지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 광야에서는 무언가 극적이고 놀라운 역사가 있지 않습니다.
똑같은 날의 반복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상을 반복하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매일 아침마다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들을 다 공급해 주셨고, 원수로부터 지켜주셨습니다.
놀랍고 극적인 방법은 아니었습니다.
일상적이고 점진적인 방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지탱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의 시간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구출의 은혜가 필요하십니까?

아니면 지탱의 은혜가 필요하십니까?
둘 다 필요합니다.

즉각적이고 극적인 은혜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점진적이고 일상적인 은혜가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특별히 고난의 때에 필요한 것은 지탱의 은혜입니다.
오늘 하루를 견딜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시는 그 은혜가 필요합니다.

지금 당장 극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뭔가 기적적으로 길이 열리거나 모든 문제가 한 번에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하루를 견디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지탱하고 우리의 마음을 붙잡아주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이 은혜를 얻기 위해서 우리가 기도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41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아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담력을 얻은 줄로 믿습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 우리를 지탱하시는 그 은혜를 받아서 모든 고난과 어려움을 넉넉히 감당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복음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면 상처가 남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육체의 상처일 수 있고, 마음의 상처일 수도 있고, 아니면 관계의 상처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상처는 단지 고난의 흔적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에 동참하는 영광의 흔적이 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영광의 흔적을 자랑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이후에 이제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방인들이 주님께로 돌아왔다는 그 소식을 전하면서 그 유명한 예루살렘 공의회가 오늘 본문 다음 장 사도행전 15장에서 열리게 됩니다.

예루살렘 공의회 직전에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교회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트라 등이 갈라디아 지역이었습니다.
이 지역에 있는 성도들에게 자신이 전한 그 복음 안에 거하라고 바울은 권면했습니다.
그 책이 바로 그 편지가 갈라디아서입니다.

갈라디아서 마지막 부분에 보면 바울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61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아멘. 바울은 그의 몸에 있는 예수님의 흔적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그 흔적은 루스트라에서 돌에 맞아 생긴 상처라고 합니다.
바울의 몸에는 상처가 생겼지만 그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영광의 흔적으로 그것을 여겼습니다.
골로소서 124절에 보니깐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워간다”

 

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비유합니다.
일평생 한 사람만 사랑하기로 약속한 언약적인 관계이기 때문이죠.
배우자를 놓고 기도하는 청년들에게 이렇게 조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행복할 때 함께하고 싶은 사람도 좋지만 힘들 때 함께 있고 싶은 사람하고 결혼하세요라고 조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부부 관계는 행복한 순간, 기쁜 순간에도 중요하지만 고난의 순간, 힘든 순간에 더 큰 힘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했던 추신수 선수가 있습니다.
그는 오랜 기간 동안 마이너리그 생활을 하면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10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경계를 했다고 합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며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든 시절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사랑하는 아내가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메이저리그에 처음 올라온 추신수 선수는 경기 이후에 제공되는 그 음식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정말로 호화로운 맛있는 해산물 요리가 있었는데 집에 있는 제 아내가 생각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선수들이 집에 다 돌아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남은 음식을 다 싸갔다고 합니다.
어린 아들과 함께 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내는 왜 남편이 오늘따라 늦게 오는지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12시가 넘어서 남편이 도착했는데 양손에 해산물 요리를 가득 들고 왔다고 합니다.
그것을 함께 먹으면서 너무너무 행복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힘들 때 함께 있는 것이 진정한 부부입니다.

힘든 시간을 함께 보낼 때 서로를 향한 사랑과 헌신이 더 깊어집니다.
고난의 시간을 함께 보낸 부부야말로 진정한 행복을 알 수 있고 누릴 수 있고 또한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힘든 시간을 하나님과 함께 보내는 것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모든 것이 좋고 모든 것이 다 평안할 때에는 누구든지 신앙생활 잘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신앙은 고난의 시간을 하나님과 함께 보내는 것입니다.

바울이 루스트라에서 돌에 맞을 때에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청년이 있었습니다.
루스트라에서 태어난 그 청년의 이름은 디모데였습니다.
경건한 청년 디모데는 복음을 위해서 바울이 당했던 모든 고난과 환란을 직접 보았습니다.
디모데후서 311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박해를 받음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내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아멘. 고난 앞에서 진짜 그 사람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진짜 모습은 십자가에서 나타났고, 스데반의 진짜 모습은 순교할 때 나타났습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의 진짜 모습은 루스드라에서 돌을 맞을 때 나타났습니다.
그 모습을 직접 본 디모데는 큰 도전과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2차 전도 여행 때부터 바울과 함께 동역하며 선교 사역을 감당하게 됩니다.

바울의 몸에는 상처가 났지만, 그 상처는 주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별이 되어서 바울의 선교를 이어갈 영적인 아들을 얻게 했던 것입니다.
내 잘못으로 인한 상처는 상처일 뿐이지만 그리스도를 위한 상처는 우리에게 영광이 됩니다.
그것을 통해서 디모데와 같은 사람이 주님의 은혜를 깨닫고 주님께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의 상처는 주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별이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1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여러분 고난 자체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고난당했는데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을 두려워하십시오.
고난 당했는데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십시오.
변화와 성숙이 없는 고난은 헛된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십자가의 흔적이 생길 때마다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될 때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줄로 믿습니다.
영어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No Cross, No Crown”(십자가가 없으면 면류관도 없다) 는 뜻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원리이기도 하고 현실적인 원리이기도 합니다.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고, 십자가가 없으면 면류관도 없습니다.
우리의 진짜 모습은 면류관을 받을 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진짜 모습은 고난 앞에서 나타납니다.

여러분의 진짜 모습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고난 앞에서 하나님을 원망하십니까?

아니면 지탱의 은혜를 구하며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십니까?
고난의 터널을 지날 때에도 우리를 지탱하시는 그 은혜를 구하기 위해서 날마다 주님께 나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안에 십자가의 흔적을 새김으로 주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별이 되어서 많은 사람을 옳은 길로 인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LyWCbH0kbC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