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은 각자 소신과 원칙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중요한 인생의 원칙은 무엇이 있습니까?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그런 원칙이 있으십니까?
예전에는 자녀의 배우자에 대한 기준을 부모가 정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어떤 집안은 안 된다 어떤 지역은 안 된다 이런 기준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자녀가 같은 지역 출신과 결혼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교회는 대구에 있으니까 자녀가 대구 사람하고 결혼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자녀가 서울로 가서 다른 지역 사람하고 결혼한다고 하면 좋아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부산 출신이십니다.
서울로 대학을 가셨고, 서울에서 저희 어머니를 만나셨습니다.
서울 여자하고 결혼한다고 했을 때 할머니께서 좋아하셨을까요?
싫어하셨을까요? 당연히 싫어하셨습니다.
서울 여자는 깍쟁이라서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졸업하고 부산으로 돌아와야 되는데 서울 여자 만나면 서울에서 살 테니까 싫어하셨습니다.
요즘도 간혹 이런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특정 집안은 안 된다 특정 지역은 안 된다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녀가 나이가 들어서 결혼 정년기가 훨씬 더 지나게 되었습니다.
나이를 먹도록 결혼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특정 지역 특정 집안에 대한 원칙이 어떻게 될까요?
결혼 정년기가 훨씬 더 지났는데도 특정 지역은 안 된다.
특정 집안은 안 된다라고 말하는 부모가 있을까요?
아마 없을 것입니다.
자녀 나이가 많으면 그런 원칙은 이제 필요 없습니다.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까 결혼 좀 제발 해라라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동안 고수해 왔던 그 원칙이 타협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닌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에서 절대로 타협할 수 없는 원칙이 있으십니까?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으십니까?
각자가 자란 교회와 전통에 따라서 조금씩 다를 것입니다.
어떤 분은 사도신경이 그런 원칙일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예배 시간에 반드시 사도신경을 해야 됩니다.
사도신경이 없는 예배는 진짜 예배가 아니라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주일 예배의 옷차림에 대한 원칙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주일 예배 올 때에는 양복을 입고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넥타이를 하지 않고 예배에 오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배운 것을 그 규범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우리는 사회화 과정을 통해서 사회적 가치와 전통을 배웠습니다.
적절하게 말하고 적절하게 행동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 배운 것입니다.
정해진 규범을 따르는 행동과 그러한 행동을 장려하는 신념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행동이 눈에 보이는 어떤 결과라면 신념은 그러한 행동을 하는 이유와 목적입니다.
그러면 행동과 신념 중에서 무엇이 더 중요할까요?
당연히 신념이 더 중요합니다.
왜 이렇게 행동을 하는지 그 이유와 목적을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확고한 신념, 성경적인 신념을 가지고 있으면 그 신념이 허용하는 행동의 경계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아주 중요한 개념이고 초대교회에서도 아주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절대로 타협할 수 없는 가치는 무엇이고, 허용할 수 있는 자유는 무엇인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의 분수령이 되는 순간입니다.
분수령이라 함은 어떤 일이 전개되는 데 있어서 전혀 다른 단계로 넘어가는 전환점을 뜻합니다.
이전 단계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전환점을 지나간 것입니다.
예루살렘 공의회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초대교회가 앞으로 나아가는 방향을 결정하는 데 아주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전반부에서는 복음이 이제 유대 지방과 사마리아 지방에 전해졌습니다.
사도행전 후반부에서는 복음이 아시아와 유럽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복음이 이방 민족에게 전해지면서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사도행전 15장 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자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아멘.
바리새파 중에서 믿는 자들,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주장하기를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들은 바리새인 출신으로서 예수님을 믿게 된 초대교회 성도들입니다.
사도바울과 같은 경우이겠지요.
율법에 정통하고 율법을 잘 알고 있었던 이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들은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그런 안목이 훌륭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동일하신 분이심을 인정했습니다.
오래전에 모세에게 율법을 주셨던 그 하나님께서 이제 마지막 때에 예수님을 보내주셨다 하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율법과 선지서가 예언했던 그 메시아가 바로 이 예수님인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신앙과 거의 똑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이방인들에 대해서도 상당히 열린 마음을 가졌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거의 부정한 동물처럼 여겼지만, 이들은 그들을 형제로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거의 혁명적인 발상이었습니다.
타고난 인종과 신분이 모든 것을 결정하던 그 시대에 인종과 상관없이 다른 사람을 형제로 받아들이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이방인들과 교제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그들과 교제하기 위해서는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기준으로는 매우 타당한 주장이었습니다.
당시에 이방인들이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오려면 할례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제 이방인들이 초대교회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할례는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표지이었기 때문입니다.
할례의 그 기원에 대해서 창세기 17장 10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면서 할례를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뿐만이 아니라 그의 집에 살고 있는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 이방 종들에게도 할례를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할례는 단지 종교 의식이 아니었습니다.
율법보다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할례였습니다.
왜냐하면 모세가 율법을 받기 400년 전부터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열심히 전통을 지키고 있는데 문제가 생긴 것이죠.
이방인들이 복음을 믿고 교회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라 수많은 이방인들이 초대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 로마인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구브로와 구레네에서 온 제자들의 사역을 통해서 안디옥 지방에 살고 있던 수많은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전도 여행을 통해서 많은 이방인들이 복음을 믿고 주님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율법의 전통에 따르면 유대인이 할례받지 않는 이방인과 교류할 수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은 철저하게 금지되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에서는 성찬식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깐 할례받지 않는 이방인과 함께 성찬식을 해도 되는지 이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은 이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행해야 되는지 아니면 할례받지 않아도 그냥 있는 모습 그대로 교회 안으로 들어와도 되는지가 문제였습니다.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사도들과 장로들이 예루살렘 교회에 모였습니다.
초대교회 안에 있는 유대인들은 이미 많은 것을 포기했습니다.
근데 그들이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할례를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할례는 민족적인 정체성과 직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표정이 바로 할례였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행할 것인지 사실 이것은 아주 어려운 문제였죠.
어려운 문제를 우리가 다룰 때에는 가장 확실한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럼 예수님은 할례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할례에 대해서 말씀하신 적이 있었을까요?
제가 찾아보니까 딱 한 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는데 유대인들이 그 안식일을 범했다고 예수님을 비방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안식일에 할례를 행하는데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할례에 대한 예수님의 유일한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너희가 온 세계에 가서 모든 사람에게 할례를 주어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새 언약에서는 세례가 할례를 대체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었던 옛 언약의 표정이 바로 할례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세워진 새 언약의 표징은 세례였습니다.
예수님은 할례를 행하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분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서 옛 언약의 요구를 모두 다 성취하셨습니다.
그래서 현대교회에서는 할례를 강조하지 않고 세례를 강조합니다.
현대 교회에는 두 가지 성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례이고 또 하나는 성찬입니다.
그렇다면 성례(sacrament)란 무엇일까요?
여러분 성례란 신학적으로 말해서 '보이지 않는 은혜에 대한 보이는 표징'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눈에 보이지 않는데 그것을 눈으로 나타내는 사인이 바로 성례입니다.
성례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성례주의(sacramentalism)가 문제입니다.
성례주의란 '성례 자체의 어떤 신성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이것을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좋다'는 생각입니다.
성례주의를 따르는 교회가 있는데 바로 로마 카톨릭 교회입니다.
그래서 성당에 가면 매주 성찬식을 합니다. 왜 그럴까요?
카톨릭 신학에 따르면 성찬은 예수님의 살과 피인데 이것을 많이 먹을수록 더 거룩해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찬식을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더 거룩해지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성찬식이 아닙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요한복음 17장 17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를 거룩하게 합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가 거룩해지는 줄로 믿습니다.
유대인들이 강조했던 그 할례 이것은 성례에 대한 오해 때문이었습니다.
성례 자체가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그 성례가 나타내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도 마음의 할례를 강조했습니다.
할례는 육신에 받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받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신명기 30장 6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마음의 할례를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변화되어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구약 성경이 반복해서 강조하는 진리입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는 할례를 받는 것이 아니라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할례에 대한 수많은 토론이 있은 이후에 베드로가 일어나서 이야기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였고 예루살렘 교회의 리더였습니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였다면, 베드로는 유대인들의 사도였습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예루살렘 교회의 리더로서 베드로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본문 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베드로가 지금 이방인 고넬리에게 복음을 전했던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베드로가 고넬로를 만났던 것이 짧게는 5~6년, 길게는 10년 전 이야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율법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던 그가 이방인을 사실 만나서 교제하는 것은 위법이었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특별한 지시를 받아서 베드로는 고넬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고넬로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신실한 믿음을 가졌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고넬리와의 만남을 통해서 베드로가 확실히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0장 34절, 35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경건한 이방인 고넬로를 통해서 베드로가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외모라 함은 타고난 인종 신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의 할례를 받았는지 모세의 율법을 지키고 있는지까지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방인 고넬료는 할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그에게 복음을 증거할 때 성경께서 그에게 임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깜짝 놀랐죠.
할례받지 않는 이방인에게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10년 전에 있었던 그 사건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8절 말씀에 보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셨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리에게 성령이 임했던 그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유대인들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그와 동일한 방식으로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이 임했습니다.
학자들은 전자를 유대인의 오순절이라고 부르고 후자를 가리켜 이방인의 오순절이라고 부릅니다.
유대인들에게 성령이 임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이 임했습니다.
두 경우 모두 다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들이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직접 목도했던 베드로는 확신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외모를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을 보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육체의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할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사건 직후에 이제 베드로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이방인에게 성령이 임했던 그 사건을 보고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에게 성령을 주신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이방인에게도 성령을 주셨다고 보고했습니다.
사도행전 11장 1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런 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맞겠느냐 하더라.
아멘,
베드로는 아주 정확한 보고를 아주 정직하게 하고 있습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을 수가 있겠느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솔직히 자기도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방인에게 할례받지 않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는지 나도 이해를 못하겠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명백한 하나님의 역사이고 그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이 10년 전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동안 이 사건을 마음 안에 잘 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0년이 지나서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렸을 때에 이 사건을 기반으로 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선포했습니다.
사도행전 15장 11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아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동일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은혜를 받았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동일한 구원을 받았습니다.
자기의 율법의 행함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은 구원에 있어서 동일한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의 사도이고,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였습니다.
두 사람은 출신도 다르고 배경도 다르고 사역의 방향도 달랐습니다.
하지만 구원에 있어서 이 두 사람은 똑같은 진리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
바울도 이야기했습니다.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라고 선포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그 대속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 하나님의 전적인 역사이고 그분께서 주시는 선물인 줄로 믿습니다.
어느 누구도 구원을 위해서 기여할 수 없습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그것을 그저 믿음으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구원은 아무런 대가가 없는 하나님의 용서이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유학할 때 보스턴에서 몇 번 이사를 했습니다.
미국은 이제 인건비가 비싸기 때문에 가난한 유학생들이 이삿짐 센터를 이용하지 못합니다.
트럭을 빌리고 친구들에게 부탁을 해서 이삿짐을 옮기게 됩니다.
저도 트럭을 빌려서 제가 직접 운전해서 이사를 했습니다.
트럭을 운전해서 보스턴 시내를 이제 가고 있는데 그만 길을 잘못 들어서 트럭이 가면 안 되는 도로로 가게 되었습니다.
보스턴은 오래된 도시라서 오래된 다리가 많이 있습니다.
오래된 다리의 특징은 높이가 낮아서 큰 트럭이 이제 지나갈 수가 없습니다.
제가 어떤 다리를 통과하려고 보니까 다리 높이가 2.7m였는데 제가 빌린 트럭의 높이가 3m였습니다.
제가 운전하다가 깜짝 놀라서 일단 다리 앞에서 멈춰 섰습니다.
다리를 지나갈 수도 없고 뒤에 차가 오니까 다시 후진할 수도 없는 아주 난감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아무런 방도가 생각나지 않아서 일단 911에 전화를 걸어서 자초지정을 설명했습니다.
그랬더니 제 전화를 받았던 보스턴 경찰이 엄청나게 저를 나무랬습니다.
왜 트럭을 가지고 그 길로 진입했냐고 말하면서 지금 경찰을 보내줄 텐데 그러면 벌금이 500달러라고 했습니다.
500달러면 한국 돈으로 70만 원 정도 됩니다.
미국은 교통위반 과태료가 엄청 비싸죠.
제가 그 트럭을 빌린 돈이 100달러였는데 그것의 5배를 벌금으로 내야 한다니까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잠시 후에 경찰이 와서 상황을 확인하고 차량을 통제해 주어서 제가 뒤로 후진으로 뺐다가 옆길로 빠져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벌받는 사람의 숙연한 마음으로 과태료 티켓을 받기 위해서 경찰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 경찰이 저에게 오지 않고 그냥 가버렸습니다.
저는 경찰이 차를 돌리러 간 줄 알고, 도망가면 안 되잖아요.
그 자리에 가만히 30분 동안 기다렸는데 오지 않았습니다.
깐깐한 미국 경찰이 저의 벌금 500달러를 용서해 주고 그냥 간 것입니다.
저는 분명히 잘못을 했고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하지만 그 경찰이 자격이 없는 저에게 불쌍한 유학생들에게, 가난한 유학생에게 아무 대가 없이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만약에 제가 용서받을 자격이 있다고 우겼거나 아니면 경찰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뇌물을 줬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저는 잘못을 했고 마땅히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경찰이 용서해 주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날 받은 그 용서의 감격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은혜는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그냥 공짜로 주는 선물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죄를 지었고 그 죄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런데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아무 자격이 없는 우리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동일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종이나 자유인이나 동일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인종과 상관없이, 신분과 상관없이 우리 모두는 동일한 은혜와 구원을 받은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로마서 10장 12절 13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여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아멘.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 은혜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을 줄로 믿습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이 진리의 말씀 위에 굳건히 서 계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도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관습도 나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제도와 관습으로 모든 것을 다 통제하려고 하면 그때 문제가 생깁니다.
특정한 제도가 강조되면 영적인 생명력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특정한 교리를 신봉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특정한 예배의 방식을 고수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강조합니다.
우리가 인격적인 관계를 제도화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규칙과 제도를 가지고 관계를 규정하려고 할 때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부부 관계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존중하는 부부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요즘은 맞벌이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각자가 번 돈은 각자 관리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한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돈 관리를 각자 하든지 함께 하든지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결혼하면서 돈 관리를 어떻게 할 것인지 계약서를 써서 변호사와 공증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결혼하면서 양가, 부모님 어떻게 섬길 것인지, 자녀 교육 어떻게 할 것인지 계약서를 써서 공증하는 경우도 없습니다.
규칙과 제도를 가지고 부부 관계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부부 관계는 인격적인 관계이고 서로 사랑하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부부 사이에 계약서가 있고 명시된 조항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정략 결혼입니다.
정략 결혼의 결말이 어떤 모습인지 최근 뉴스를 보면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정상적인 부부는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은 그분의 백성으로서 구별된 삶을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가난한 이방 족속에게 둘러싸인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율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과거에도 문제가 없었고 지금도 문제가 없습니다.
지금도 율법을 사랑하고 율법을 지키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율법주의(legalism)는 문제입니다.
율법주의가 무엇입니까?
율법에 담긴 목적보다 율법을 지키는 행동 그 자체를 더 강조하는 것이 율법주의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그 이유(why)를 생각하기보다 그 특정한 행동(what)에 더 집중하는 것이 율법주의입니다.
여러분 율법을 행하는 행동이 중요할까요?
아니면 율법을 지키는 이유가 더 중요할까요?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인 사이먼 시넥(Simon Sinek)이 흥미로운 책을 썼습니다.
제목이 Start With Why 라는 책입니다.
무한 경쟁 사회에서 지속 가능한 성장을 경험하려면 단지 다른 회사보다 더 좋은 제품을 만드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흔들리지 않는 가치와 목적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이먼 시넥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인류가 모두 이성적이었다면 아무도 무일푼으로 사업을 시작하거나 탐험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려운 일을 해내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뛰어난 리더도 혁신도 없었을 것이다.
도전을 가능하게 하는 요인은 이 일이 개인의 이익보다 크고 중요하다는 확고부동한 신념이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말은 상당히 도전적인 말입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은 이 말을 받아들일 용기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난 그냥 평범하게 살래요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말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성적인 것도 좋고 합리적인 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만약에 모든 인류가 지금까지 다 이성적이었다면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변화와 혁신은 없었을 것입니다.
변화를 위해서는 도전이 필요한데, 그 도전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확고부동한 신념이 필요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가치와 목적을 가진 사람만이 진정한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이먼 시넥이 사용한 골든 서클 도표가 있습니다.
가장 바깥에는 무엇 What이 있고요.
그 안에는 어떻게 How가 있고, 가장 가운데에는 왜 Why가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 회사에 들어가면 무엇을 하는지 배웁니다.
우리 회사는 어떤 제품을 만들고 이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 어떻게 무슨 일을 하는지 배웁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나만의 독특한 방법 How를 익히게 됩니다.
다른 사람보다 일을 효과적으로 하는 방법, 더 탁월하게 하는 방법을 배우게 됩니다.
중간 관리자, 팀장이 되기 위해서는 방법 이 How 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서 그 회사의 임원이 되거나 대표가 되면 그때 가서 목적 Why에 대해서 고민하게 됩니다.
우리 회사가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가?
우리 회사만의 독특한 목적은 무엇인가? 고민하게 됩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모습인데 사이먼 시넥은 이것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What에서 시작해서 How를 거쳐서 Why로 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Why에서 시작해서 How를 거쳐서 What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내가 이 일을 왜 하는지 그 이유와 목적을 먼저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지 작은 일을 할 때에도 분명한 가치를 담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what, how, why 이 세 가지 중에서 인간이 가장 먼저 추구하는 것은 why입니다.
왜 그럴까요?
What이 눈에 제일 잘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율법을 주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율법이 정한 규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what에 해당합니다.
율법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절차가 있습니다.
이것은 how에 해당합니다.
율법을 왜 지켜야 하는지 목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why에 해당합니다. 그럼 이 세 가지 중에서 무엇이 제일 중요할까요
당연히 Why가 제일 중요합니다. 율법을 왜 지켜야 하는지 그 이유와 목적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와이가 아니라 What에 집중합니다.
와이 눈에 잘 보이기 때문이죠.
율법이 정한 규칙을 지키고 있는지, 안 지키고 있는지 거기에 집중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모든 율법의 문장을, 모든 율법의 계명을 딱 한 문장으로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로마서 13장 10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아멘.
모든 율법의 완성 그것은 사랑입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율법의 핵심입니다.
할례를 행하는 것, 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 사도신경을 하는 것,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계명입니다.
이 목적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우리는 율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율법주의를 따라가게 됩니다.
초대교의 교부 어거스틴(Augustine)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라'(Love God and do whatever you please)고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한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결국 율법과 일치하게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반대로 율법 계명은 열심히 지키고 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바리새인과 같이 메마른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중세의 한 신학자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에는 자유를, 모든 일에 사랑을'
(In essentials unity, in non-essentials liberty, in all things charity)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본질적이지 않은 문제를 가지고 논쟁하는 것, 다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율법의 계명에 집착하는 것보다 그 율법을 주신 이유와 목적을 기억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율법의 완성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을 더욱더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 본질과 비본질 사이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 우리는 분별할 수 있습니다.
율법의 계명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완성인 사랑 안에 거함으로 하나님과 친밀하게 동행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루살렘 공의회를 통해서 초대교회에게 가장 중요한 본질을 붙잡고 나아갔던 것처럼 우리도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뜻, 생명 사역과 세계 선교를 붙잡고 나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약> - 신념과 행동의 중요성 - 성례주의와 은혜의 중요성 - 확고부동한 신념의 중요성 - 초대교회의 이방인에 대한 태도와 인식 연구 - 흔들리지 않는 가치와 목적 확립 방안 모색 -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 준비 -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생활하는 방법 고민 00:00 ~ 01:08 자녀의 배우자 기준 - 모든 사람은 각자 소신과 원칙을 가지고 살아감 - 자녀의 배우자에 대한 기준을 부모가 정하는 경우가 있었음 - 자녀가 나이가 들어서 결혼 정년기가 훨씬 더 지나게 되면 특정 지역 특정 집안에 대한 원칙이 필요 없음 02:17 ~ 03:29 사회화 과정 - 사회화 과정을 통해서 사회적 가치와 전통을 배움 - 행동과 신념 중에서 신념이 더 중요함 - 확고한 신념, 성경적인 신념을 가지고 있으면 허용하는 행동의 경계를 이해할 수 있음 04:40 ~ 05:53 바리새파의 이방인 할례 주장 - 사도행전 15장 5절에서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자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함 - 바리새파 중에서 믿는 자들은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함 -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거의 부정한 동물처럼 여겼지만 이들은 그들을 형제로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음 07:01 ~ 10:29 아브라함의 할례 - 초대교회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었음 - 할례는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표지였기 때문임 - 할례의 기원에 대해서 창세기 17장 10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음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면서 할례를 행하라고 말씀하심 - 모세가 율법을 받기 400년 전부터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했기 때문에 율법보다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할례였음 11:42 ~ 13:46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성례주의 -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성례주의를 따르기 때문에 매주 성찬식을 함 - 성례주의를 따르는 교회가 있는데 바로 로마 카톨릭 교회임 - 성례주의를 따르는 것은 성례 자체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성례가 나타내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임 14:50 ~ 17:05 베드로의 고넬료와의 만남 -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났던 것이 짧게는 5~6년, 길게는 10년 전 이야기라고 함 - 베드로는 그 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음 - 고넬료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신실한 믿음을 가졌는지 깨닫게 되었음 - 베드로가 고넬료와의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것을 알게 되었음 18:07 ~ 22:49 베드로와 바울의 구원의 역사 - 하나님께서 유대인에게 성령을 주신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이방인에게도 성령을 주셨다고 보고함 -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렸을 때 베드로와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선포함 - 모든 사람은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 줄로 믿음 -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음 23:57 ~ 27:38 은혜의 선물 - 은혜는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그냥 공짜로 주는 선물임 -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인 줄로 믿음 -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동일한 은혜를 받음 - 제도와 관습으로 모든 것을 다 통제하려고 하면 문제가 생김 28:53 ~ 32:18 사이먼 시넥의 신념 - 사이먼 시넥은 흔들리지 않는 가치와 목적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함 - 변화를 위해서는 도전이 필요한데, 그 도전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확고부동한 신념이 필요함 33:30 ~ 34:42 율법의 완성 - 율법의 계명에 집착하는 것보다 그 율법을 주신 이유와 목적을 기억하는 것이 더 중요함 - 율법의 완성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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