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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대원목사 설교

20240707 새로운 질문, 새로운 성찰

by 마이코 2024. 7. 7.

 

성경: 사도행전 17장 16~31

 

한국의 교육 시스템과 미국의 교육 시스템은 어떤 면에서 다를까요?
저는 양쪽 모두를 다 경험해 보았습니다.

학부는 한국 대학에서 공부를 했고, 박사는 미국 대학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한국과 미국의 교육 시스템이 다르겠지만 가장 다른 점이 있다면 아마 강의실 분위기인 것 같습니다.
한국대학에서는 아마 주로 일방적으로 강의를 진행합니다.
교수님께서 강의를 하시고 학생들은 열심히 필기를 합니다.
평가 방법은 간단합니다.

강의 내용을 잘 외워서 그대로 적으면 됩니다.
반면에 미국 대학은 일방적이지 않고 수업시간에 질문을 많이 하고 토론을 많이 합니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제일 어려웠던 점이 토론하는 것이었습니다.
한국 학생들은 토론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책의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에 대한 나의 생각, 나의 주장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왜 한국 학생들은 토론을 어려워할까요?


우리 생각에는 질문에 정답이 있고 그 정답을 말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입니다.
틀린 답을 말하면 친구들에게도 창피하고 교수님께도 창피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정답이 있는 질문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성경은 몇 권으로 되어 있는가 같은 질문에는 정답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딱 하나의 정답이 없는 질문도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고 고민하게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런 질문을 가리켜 'Open Question'이라고 부릅니다.


사실 고등 교육으로 올라갈수록 Open Question 을 잘 해야 합니다.
좋은 질문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닫게 하고 무엇이 정말 진리인지 성찰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Open Question을 많이 하셨습니다.
대표적으로 베드로에게 질문하셨죠?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질문하셨습니다.
이 질문은 교회에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렇게 후덥지근한 여름날에 여러분은 왜 교회에 오셨습니까?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질문은 총 295개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질문하고 또 질문하고 또 질문하셨습니다.
그 질문을 받은 제자들은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질문하지 않으면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습관대로 살아갈 뿐입니다.
질문을 받을 때 그때 우리는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새로운 질문'은 '새로운 성찰'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아테네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모습입니다.
그리스 철학의 중심지에서 바울이 생명의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유대 전통과 헬라 전통 모두의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파에 속한 유대인으로서 바울은 당대 최고의 율법사 가말리엘(Gamaliel)에게 배웠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는 그리스 철학과 문학에도 능통했습니다.

바울의 고향이 다소(Tarsus)인데요.

그곳은 길리기아 지역의 수도로서 헬라 교육의 중심지였습니다.
고대 역사가들에 따르면 다소는 당시에 유명한 대학 도시였고, 아주 저명한 스토아 철학자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바울은 그러니깐 유대 율법과 그리스 철학 모두에 능통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을 연결점으로 해서 복음을 전했고, 헬라인들에게는 그리스 철학을 연결점으로 해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사도행전 171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들은 구약 성경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과 선지서가 예언했던 그 메시아가 예수님인 것을 논증했습니다.
또한 장터에서 만나는 사람들과도 변론했다고 합니다.

아고라(장터)


장터(아고라, agora)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핼라인들이었겠죠.
이들은 구약 성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다른 방식으로 복음을 전해야만 했습니다.
한글 성경에는 '변론하니'라고 되어 있는데, 영어 성경에는 'reason'라고 되어 있습니다.


영어 단어 reason이 명사로는 '이유, 근거'라는 뜻이지만, 동사로는 '논하다, 설득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차근차근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설득하는 과정을 reason이라고 합니다.


어렸을 때 교회에 와본 적이 있는 사람, 성경 지식이 있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래도 할 수 있습니다.
정말로 어려운 것은 성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증거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이 전제가 되어야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설명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도바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성경 지식이 전혀 없는 이방인들, 아테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알고 있는 그리스 철학을 연결점으로 삼아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바울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낀 사람들이 그를 아레오바고로 데려갔습니다.
본문 1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아레오바고는 고대 아테네의 최고 법정이었습니다.
유명한 시장 아고라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있었습니다.


사진에 보시는 것처럼 지금도 아테네에 가면 아레오바고 언덕이 있습니다.
가장 높은 언덕에는 아크로폴리스 신전이 있고, 그 아래에 보면 아레오바고 언덕이 있습니다.
고대 아테네의 최고 법정에서 바울은 그가 믿는 신앙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곳에서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바울의 '아테네 설교'였습니다.
바울의 아테네 설교는 그 이전의 설교와 상당히 달랐습니다.
예를 들어서 비시디아 안디옥에 회당에서 설교할 때에는 바울이 율법과 선지서를 인용했습니다.

스라엘 역사 전체를 관망하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그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된 것을 설명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합당한 전도 방법이었습니다.

율법과 선지서를 잘 알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졌는지 논증하는 것은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었습니다.
하지만 아테네에 살고 있는 헬라인들은 율법과 선지서를 전혀 몰랐습니다.
성경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는 이방인들에게 유대인들에게 전도하듯이 하면 안 되겠죠.
전도는 선포인 동시에 설득이기 때문에 상대방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유능한 국가대표팀 축구팀 감독은 상대팀에 따라서 맞춤 전략을 준비합니다.
유럽 대표팀을 상대할 때의 전략과 남미 대표팀을 상대할 때의 전략이 같을 수 없습니다.
상대팀을 연구하지 않고 똑같은 전략으로 나가는 감독이 있다면 그 사람은 무능한 감독일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어떠한 상황에 있는지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이 있는지, 창조주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있는지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지 상대방의 눈높이에 맞는 복음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만족을 위해서 전도하지 않습니다.

내가 전도했다는 사실, 그것을 자랑하기 위해서 전도하지 않습니다.
전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을 향한 사랑과 관심입니다.
진정으로 상대방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 우리가 생각하고 또한 접근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전도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가가실 때 신학적인 논쟁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바리새인, 율법사들과는 논쟁을 하셨지만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물을 달라고 이야기하시면서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바울도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할 때와 헬라인에게 복음을 전할 때 전혀 다르게 접근했습니다.

성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아테네 사람들에게 바울은 이렇게 말을 시작했습니다.
사도행전 1722, 23절 함께 읽겠습니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아멘. 바울이 아테네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너희가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 말은 긍정적인 말일까요? 부정적인 말일까요?
두 가지 모두 다 가능합니다.

종교심이 아주 깊다는 그런 말로도 해석이 가능하고 열심히 있지만 진리와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으로도 해석이 가능합니다.
아마도 바울은 의도적으로 이런 중의적인 표현을 한 것 같습니다.
상대방을 칭찬하는 것도 아니고 비판하는 것도 아니고 애매모호한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다만 그들의 그 종교성을 연결점으로 해서 대화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설교에서 연결점 컨택 포인트는 아주 중요합니다.
제가 매주 설교를 준비할 때 그 연결점을 찾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강의와 설교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학교에서 하는 그 강의와 교회에서 하는 그 설교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강의는 열심히 들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시험을 보니까요.
하지만 설교는 열심히 안 들어도 됩니다.

왜 그럴까요? 시험을 보지 않으니까요.

만약에 제가 지난주 설교 내용을 가지고 시험을 보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큰 시험을 당할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설교를 들을 때는 다소 수동적일 때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 교회는 예외죠.

우리 교회처럼 이렇게 열심히 필기하면서 핸드폰으로 사진 찍으면서 설교를 듣는 교회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그 연결점 컨택 포인트를 만들고자 예화를 사용합니다.
흥미로운 이야기도 하고 다양한 예화와 인용을 사용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 이 설교를 들어야 하는지, 이 설교가 여러분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설득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와 같은 방법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일방적으로 선포하고 외친 것뿐만이 아니라 상대방이 흥미를 느낄 만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바울의 아테네 설교를 구조화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A 시작은 이교도 신앙의 무지이고요.

그 다음으로 진정한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정 가운데에는 인류와 창조주의 참된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B' 로 진정한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 그리고 A' 로 우상숭배의 무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전체 아테네 설교의 구조는 역 교차 구조.

가운데를 중심으로 양쪽이 평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의 무지에서 시작해서 무지로 마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핵심 부분에는 인류와 창조주의 참된 관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이 영적으로 무지한 이유가 바로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테네가 어떤 곳입니까?

고대 그리스 철학의 중심지입니다.
지금도 철학 수업을 하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시작을 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 청년이 서울의 명문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있는데 그 학생의 꿈이 아테네로 유학을 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근데 바울이 그 철학의 도시, 교육의 도시에서 외치고 있습니다.
너희가 종교심이 많지만 영적으로는 무지하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 담대한 선포였습니다.

철학의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너희가 무지하다라고 외치기 위해서는 큰 용기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무지가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시작하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언가 부족한 분이 아니시지요.

우리가 무언가를 가져다 드려야 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본문 25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아멘. 우리 하나님 스스로 완전하시고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의 생명과 호흡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줄로 믿습니다.
이 창조주 하나님을 제대로 인식해야지 그분이 만드신 세상을 제대로 알 수 있고, 또는 그분의 형상을 가진 인간을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철학이 있고 학식이 있어도 창조주 하나님을 제대로 인식하지 않을 때 그 모든 지식은 잘못된 전제 위에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대구동신교회 성도라면 '생각의 틀'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권성수 원로 목사님 때부터 우리 안에 있는 그 생각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해 왔습니다.
생각은 행동으로 이어지죠.

행동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우리의 인격이 됩니다.
인격이 곧 인생을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다름 아닌 '생각의 틀'입니다.
사탄도 이것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의 '생각의 틀'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2천년 전에 아테네 사람들의 생각 가운데 거짓과 무지를 넣었던 것처럼, 지금 이 시대에도 우리의 생각 안에 거짓과 무지를 불어넣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28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아멘. 사탄이 우리를 사로잡는 방법은 헛된 철학과 속임수입니다.
사탄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 뿔 달린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광명한 천사의 모습으로 너무나 매력적인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우리를 죄로 유혹하기 위해서 사탄은 우리의 생각의 틀 가운데 거짓과 속임수를 넣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거짓과 속임수를 받아들이는 순간 사탄은 우리의 생각을 사로잡아서 우리를 포로처럼 다스릴 것입니다.
사도바울 시대에 유행했던 철학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에피쿠로스 철학과 스토아 철학이었습니다.
본문 18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아멘.

에피쿠로스 철학은 물질주의 철학이었습니다.
이 세상은 분자와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하면서 철저하게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죽음 이후에 사후 세계를 믿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현실 세계에서의 쾌락을 추구했습니다.
반면에 스토아 철학은 합리주의 철학이었습니다.
그들은 절대자가 세운 영적인 어떤 원리, 내재적인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성을 활용해서 그 원리를 깨닫고 각자에게 주어진 의무를 다하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은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학파 이 모두를 다 이해했습니다.
왜 그런 주장을 하고 있는지, 그러한 주장의 한계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에피쿠로스 학파에게는 물질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 영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부활하심으로써 영적인 세계가 어떤 모습인지 확증하셨다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스토어 학파에게는 세상을 주관하는 것이 내재적인 원리가 아니라 인격적인 하나님이심을 주장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님을 심판자로 지정하셨기 때문에 비인격적인 원리를 따라가지 말고 인격적인 예수님을 향해서 돌이켜 회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은 당대 철학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정확하게 파악했습니다.
헛된 철학과 속임수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생각의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잘 증거하기 위해서는 깊이 생각하고 성찰하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영국의 기독교 사상가 CS 루이스는 그의 책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사탄이 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아무튼 논증이라는 행위는 잠자고 있는 환자의 이성을 흔들어 깨우는 거나 다름없는 짓이야.
그때그때 드는 생각들이야.

어떻게든 그 흐름을 비틀어서 우리에게 유리하게 끌어올 수 있지만, 내 환자 즉 그리스도인은 그런 사고의 과정을 통해 찰나적인 감각적 경험의 흐름에서 눈을 돌려 보편적인 주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치명적인 버릇을 들이게 될 게다.
그러니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의 시선을 감각적 경험의 흐름에 붙들어 두어야 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 이 말은 고참 마귀가 신참 마귀에게 하는 조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유혹해서 지옥으로 끌고 가기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마귀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는 의미입니다.


보편적인 주제, 궁극적인 주제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온통 우리의 관심을 감각적인 경험에 두게 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마귀는 우리가 성찰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정말 그런가? 무엇이 진리인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마귀는 너무너무 싫어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의 시선을 감각적 경험에 두게 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죠.

이번 여름에 어디로 휴가를 갈까? 오늘 저녁으로 뭘 먹을까?
혹시 여러분 지금도 설교 들으시면서 오늘 점심으로 뭘 먹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사탄이 가져오는 전략입니다.
많으신가 보네요.

 

현대사회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생각하는 힘을 잃어버렸다 하는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신문을 읽지 않습니다.

유튜브에서 뉴스를 봅니다.
그러면 신문과 유튜브 뉴스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여러분 신문에는 사설이 있습니다.

사설에는 사건이 나오고 그 사건에 대한 해석과 비평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해석과 비평을 읽으면서 우리가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이 해석은 타당한가 이 비판은 맞는 말인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동의할 수 있고 또 어떤 경우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유튜브로 뉴스를 보면서 생각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갑니다.

이런 사건이 있었구나 인지하고 넘어갑니다.
그런데 그 사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해석과 비판입니다.
해석과 비판을 제대로 하려면 사서를 읽어야 합니다.
사탄은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주의를 분산시키고 있습니다.
사탄이 또 싫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책을 읽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우리가 이 일을 못하도록 온갖 방해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루에 성경 3장 읽는 것이 쉬운 일일까요? 어려운 일일까요?


쉽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매일 성경을 안 읽어보신 분이십니다.
실제로 성경을 매일 읽어본 사람은 이것이 결코 쉽지 않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딱 성경 읽으려고 하면 꼭 다른 일이 생각나기 때문이죠.
우리 교회에서 하는 훈련 프로그램 중에 '예수 생명 리딩 바이블'이 있습니다.
이것은 1년 동안 함께 성경을 쭉 읽어가는 훈련 프로그램입니다.
혼자서 읽으려고 하면 중간에 그만두기 쉬운데 조를 편성해서 매일매일 함께 읽어가기 때문에 우리가 함께 성경을 계속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리딩지저스라는 교재를 통해서 성경 각 권에 대한 개론도 배울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정말로 그러한가?

깊이 생각하는 것은 사탄이 싫어하는 일입니다.
사탄이 싫어하는 일은 당연히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일입니다.
사도행전 1711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정말로 사실인가?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영어 성경으로 보면 examine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아주 자세하게 살펴보고 조사하고 검토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그런가 이것이 정말로 진리인가 고민하고 성찰해야 합니다.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진리를 발견할 수 있고 또한 자기 자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진리를 알 수도 없고, 또한 자기 자신을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흔히 하는 말이 있지요.

'무식하면 용감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이 학문적으로 증명되었습니다.

인지심리학에는 더닝-크루거효과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미국 코넬대학교 교수인 '데이빗 더닝'과 '저스틴 크루거'가 주창한 개념입니다.
코넬대학교 학생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했는데 하위 25%에 해당하는 학생들이 자신의 실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학문적으로 입증했습니다.
오히려 상위권에 있는 학생들은 실제 실력보다 자신을 낮춰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할까요?

왜 실력이 안 좋은 학생들은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정작 실력이 좋은 학생들은 자신을 낮춰볼까요?
어줍잖은 지식이 교만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무지했던 사람은 아주 작은 지식을 얻게 되면 마치 전문가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대한 책을 몇 권 읽으면 마치 구약학 교수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이전에도 말씀드렸는데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누구이지요?
책 한 권 읽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그 사람하고 절대로 토론하면 안 됩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그 하나가 전부이기 때문에 엄청난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지와 확신이 만나면 얼마나 무서운 결과가 나오는지 모릅니다.

오히려 제대로 공부를 한 사람은 함부로 말하지 않습니다.
몇 년 동안 연구해서 논문 한 편을 써본 사람은 제대로 된 논쟁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함부로 말하지 않습니다.

함부로 말하는 것 잘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는 것은 마치 자신의 무지를 자랑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말고 깊이 생각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생각하는 훈련, 성찰하는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오한 진리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깊이 생각하기 위해서는 질문을 해야 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런가 무엇이 진리인가?라고 질문하고 성찰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을 가까이하여서 여러분의 생각의 틀이 변화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질문을 제기합니다.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현실 세계에 대해서 새로운 질문을 제기합니다.
뭐 예를 들면 이런 질문이 있겠습니다.
인공지능 AI 시대의 인간됨의 의미는 무엇인가?
신유물론 시대에 존재의 가치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디지털 시대에 교회 공동체, 가족 공동체의 의미와 중요성은 무엇인가?

 

어려운 질문이죠.

이런 질문은 어느 한 사람이 답할 수 없습니다.
어느 한 교회가 답할 수도 없습니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 학자들, 사역자들이 모여서 함께 고민하고 함께 성찰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로잔대회가 열리는 목적입니다.

오는 9월 한국에서 열리는 제4차 로잔대회는 일회적인 이벤트가 아닙니다.
20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그런 국제 이벤트가 아닙니다.
각각의 로잔대회 사이에는 100회가 넘는 다양한 국제포럼과 컨설테이션(consultation)이 열렸습니다.
선교회의 각 주제별로 또한 전 세계 각 권역별로 다양한 국제 미팅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금요기도회에서 제가 로잔 대회에 대해서 몇 차례 강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금요기도회에 오시지 않는 분들도 계시니까 주일날에도 한번 했으면 좋겠다라고 부탁을 받았습니다.


1차 로잔대회는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열렸습니다.
로잔은 스위스에 있는 도시 이름입니다.

그 도시에서 열렸던 선교대회에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 이후로도 로잔 대회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예가 있는데, 다보스 포럼입니다.

여러분 다보스 역시 스위스에 있는 도시 이름입니다.
그곳에서 세계 경제포럼이 열렸는데 그 포럼에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다보스 포럼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로잔 대회를 한마디로 소개하자면 세계 복음주의 선교운동입니다.


로잔대회는 세계 선교를 위한 연합운동이고 복음주의 신학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복음주의 신학이 무엇인지 설명하려면 또 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제가 생략하겠습니다.
복음주의 신학 반대에는 자유주의 신학이 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을 표방하는 단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WCC 세계교회협의회입니다.
1968년 제4WCC 총회는 '선교의 목표를 인간화'라고 규정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을, '사회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으로 축소시킨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 사회적 억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기 위해서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돌아가셨습니다'
WCC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미국의 빌리그레엄 목사님, 영국의 존 스터트 목사님이 로잔 대회를 시작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로잔대회는 WCC에 반대해서 시작된 선교운동입니다.
그러니까 논리적으로 볼 때 WCC와 로잔을 동시에 비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는 자유주의, 하나는 복음주의를 따르고 있기 때문에 둘 중에 하나를 비판하면 다른 하나는 지지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간혹 인터넷에 보면 무기명으로 WCC와 로잔을 동시에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지, 논리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주장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우리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한국 로잔위원회는 한교총, 우리 교단이 포함되어 있는 한교총과 한국의 모든 선교단체들이 포함되어 있는 KWMA와 공식적으로 MOU를 맺고 협력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단에서도 사랑의 교회, 수영로교회, 남서울교회 등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학적으로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로잔대회를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가 있는데 바로 운동(movement) 입니다.
국제 로자는 본부가 없습니다.

각자 자기 교회 사무실, 자기 단체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WCC는 본부가 있습니다.

스위스 제네바에 가면 WCC 본부가 있습니다.
WCC는 전 세계 352개 교단의 협의체 연합체입니다.
반면에 로잔는 세계 선교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운'동입니다.
자발적인 운동이기 때문에 아주 역동적이고 또한 창의적입니다.
누군가 중앙에서 지휘하고 통제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시도와 새로운 전략이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세 번의 로잔 대회가 있었는데 각각의 대회를 통해서 놀라운 선교적 혁신이 있었습니다.


1차 대회에서는 '미전도 종족'이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소개되었습니다.
그동안은 선교를 국가 단위로 생각했는데 처음으로 종족 단위로 선교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전 세계 국가가 200여 개 있지만 종족으로 따지면 17천 개가 넘는 종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200여 개의 국가를 바라볼 것이 아니라 17천 개가 넘는 종족을 바라보며 우리가 선교에 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차 로잔대회에서는 10/40 윈도우라는 개념이 주창되었습니다.
미전도 종족이 밀집되어 있는 지역을 살펴보니까, 북위 10도에서 북위 40도 사이라는 거죠.
북아프리카, 중동, 인도, 무슬림, 힌두권, 공산권, 중국 다 포함된 지역, 이 지역으로 더 많은 선교사를 파송해야 한다는 개념입니다.
3차 로잔대회에서는 Business as Mission, 디아스포라 미션이 강조되었습니다.

지금이야 비즈니스 미션이 아주 당연한 개념이지만 15년 전만 해도 매우 생소한 개념이었습니다.
여러분, 지금이야 우리가 이주민 선교 열심히 하고 있지만 15년 전만 해도 이주민 선교를 위한 네트워크가 거의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로잔대회는 변화하는 시대에 맞는 새로운 선교 전략을 논의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니까 일반인들이 모이는 자리가 아니라 선교 단체의 대표들이 모이는 자리이고, 이미 2년 전에 참가자들이 다 선정되어서 초청장에 나갔습니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질문을 제기합니다.

새로운 질문은 새로운 성찰을 요구합니다.
4차 로잔대회는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던지는 그 질문에 대한 선교적인 성찰을 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국제 로잔는 지난 2년간 글로벌 공청회를 하고 또 그 이후에 2년간 연구를 통해서 현대 선교회에서 중요한 10개의 핵심 질문을 파악했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각각의 질문에는 서너 개의 소주제가 있습니다.
40개의 핵심 이슈를 통해서 세계 선교회의 현실을 우리가 고찰하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위임령 현황 보고서'입니다.

400페이지에 달하는 이 보고서가 지난 4월에 출간되었고, 로잔 대회 참가자들은 이 보고서를 읽고 연구한 이후에 각각의 핵심 이슈에 대해서 토론할 예정입니다.
제가 지난 3차 로잔대회에 참석했는데 그때에는 이런 보고서가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로잔 운동이 아주 쇠약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사전 작업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이번에는 2년간의 공청회와 2년간의 사전 연구를 통해서 현대 선교의 중요한 이슈를 충분히 숙지하고 모이는 대회입니다.


여러분 선교는 이렇게 총체적이고 우리의 삶 모든 영역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믿고 교회에 가는 것이 선교의 완성이 아닙니다.
생각의 틀이 변화되어서 성경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사회의 모든 영역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전 세계에서 모인 5천 명의 선교 리더들이 이것을 논하는 자리가 바로 로잔대회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 때문에 우리 교회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의 길이 남을 이 대회를 위해서 함께 기도해 주시고 후원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우리 시대가 던지는 새로운 질문을 가지고 함께 고민하고 함께 기도할 때에 모든 지혜의 근본 되신 하나님께서 지혜와 통찰력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질문을 제기합니다.

새로운 질문은 새로운 성찰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성찰하고 새로운 선교의 전략을 성찰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04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오,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아멘. 우리의 무기는 육신의 힘이 아니라 생각의 힘입니다.
진정한 생각의 힘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나오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이론을 무너뜨려서 우리의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지혜의 근본 되신 하나님 안에 거함으로써 진정한 생각의 힘을 가진 참된 예수님의 제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6yAcIhLIjB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