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는 정보와 사회입니다.
누구나 인터넷을 통해서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수많은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21세기에 생산된 그 데이터의 양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가 통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생산된 데이터가 그 이전 5천 년 동안 생산된 데이터의 몇 배일까요?
두 배일까요? 20배일까요?
2500배라고 합니다.
잘 실감이 나지 않죠.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데이터가 생산되고 공유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인터네셔널 데이터 코퍼레이션이라는 단체에서는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데이터의 양을 측정하고 있습니다.
언론 출판과 같은 전통적인 데이터도 있고요.
유튜브나 페이스북 같은 미디어 데이터도 관찰합니다.
또한 신용카드 거래 내역이라든지 CCTV 녹화 파일 같은 데이터도 다 측정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산된 데이터가 얼마나 많은지 그래프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다음에 그래프를 보시면 매년 생산되는 데이터가 얼마나 빠르게 증가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50년 사이의 변화도 아니고 100년 전 이야기도 아닙니다.
불과 15년 사이의 변화입니다.
2010년부터 2025년 사이에 전 세계에서 생산된 데이터가 이렇게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양의 데이터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정보가 있으니깐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는 훨씬 더 좋아졌을까요?
예전에는 몰랐던 정보들을 많이 가지고 있으니깐 우리 사회는 훨씬 더 발전했을까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정보 중에는 잘못된 거짓 정보도 많습니다.
사람들을 선동해서 잘못된 곳으로 인도하고자 하는 그런 정보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잘못된 정보는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우리 사회를 어지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혹세무민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죠.
세상을 어지럽게 하고 백성을 미혹하게 하여 속인다라는 뜻입니다.
대중들을 선동하고 현혹하기 위해서 사실을 왜곡하거나 과장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물론 예전에도 음모론 같은 것이 있었지만 지금처럼 음모론이 큰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습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신뢰하는 언론기관이 있었고 사회 전체를 지탱하는 시스템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나도 많은 가짜 뉴스와 음모론이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가짜 뉴스가 너무나 쉽게 퍼지고 사람들이 쉽게 거기에 동조하게 됩니다.
이것이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최근에 미국에서 만났던 현지 교수님들, 목사님들께서 걱정이 많았습니다.
미국 대선을 앞두고 서로를 비방하고 모함하는 가짜 뉴스가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과학기술은 엄청나게 발달했는데 건전한 토론, 생산적인 토론은 훨씬 더 어려워졌습니다.
여러분 이것이야말로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정보화 시대에 정보는 엄청나게 많은데 정말로 유익한 정보, 사람을 살리는 정보는 많지 않습니다.
여러분 홍수가 나면 사방에 물이 가득하지 온통 물로 가득하지만 정작 마실 물은 없습니다.
지금은 정보의 홍수 시대입니다.
이제 매일매일 수많은 정보가 쏟아지는데 정작 유익한 정보는 많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살리고 우리 나라를 살리는 정말로 좋은 정보는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실을 왜곡해서 상대방을 향한 증오와 분노를 일으키는 일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럼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왜곡과 선동이 많은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야 할까요?
오늘은 이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3차 전도여행을 마친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어떤 핍박과 환란이 기다리고 있는지 다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감당해야 하는 사명이 있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 리더들을 만났을 때 자신에 대한 한 가지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모세의 율법을 배척하고 할례를 금지한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1장 21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여러분 이 소문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모세의 율법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율법이 선하다고 거룩하다고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로마서 7장 12절에 보면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롭다 선하다' 라고 분명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또한 바울이 할례를 금지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아들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직접 할례를 행했습니다.
사도행전 16장 3절에 보면
'디모데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부정하지 않았고 할례를 금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율법과 할례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어느 누구도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율법의 완성이신 그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게 된다고 선포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6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여러분,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그 언약적 표징입니다.
표징 그 자체에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능력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 안에만 구원에 이르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선포했던 복음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바울의 말을 왜곡해서 마치 그가 율법을 부정하고 할례를 금지한 것처럼 거짓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이것은 매우 악의적인 거짓말이죠.
사실을 왜곡한 이 가짜 뉴스는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한 악한 의도를 가진 죄입니다.
사실 사도바울의 선교 사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칙이 하나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사도행전에서 살펴본 대로 바울이 유대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했고,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라고 불렸지만, 바울이 유대인들에게도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떤 도시에 들어갈 때마다 가장 먼저 그 도시 안에 있는 유대교 회당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대했던 바울의 선교 전략.
가장 중요한 원칙은 고린도전서 9장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 9장 20~22절 조금 길지만 함께 읽겠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아멘. 바울의 이제 선교 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이 이것이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과 같은 모습으로 나아갑니다.
이방인들에게는 이방인과 같은 모습으로 나아갑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들이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이것을 현대식으로 표현해 보겠습니다.
사회 엘리트에게는 엘리트와 같은 모습으로 나아갔습니다.
사회의 취약층에게는 취약층과 같은 모습으로 나아갔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중에 몇 명이라도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이 모습이야말로 가장 성숙한 믿음의 사람의 모습이라고 믿습니다.
바울은 상대방이 어떤 모습이든, 내가 어떻게 비춰지든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든지 나의 취향, 나의 고집을 내려놓고 상대방과 똑같은 모습이 될 수 있었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제가 지난 주일에 세상에서 공존할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믿음이 좋은 것과 고집이 센 것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좋은 것은 열심히 많고 봉사를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믿음이 좋은 것은 자기를 비우고 예수님의 겸손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 기준으로 볼 때 바울은 가장 성숙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의 모습이 되어서 나아갔고, 이방인들에게는 이방인의 모습이 되어서 나아갔습니다.
자신을 철저하게 비운 것이고, 예수님의 겸손을 따라간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사람을 만나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자기를 다 비우고 오직 예수님의 겸손의 마음으로 나아가는 사람을 실제로 만나본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그런 사람을 만나본 적이 있습니다.
2010년도 제3차 로잔 대회를 주관했던 '덕 브로셀'이라는 당시 국제 로잔 총재였습니다.
이분은 미국 분인데 오랫동안 일본 선교사로 사역을 하다가 정말로 탁월한 리더십과 겸손한 성품을 인정받아서 국제 로잔 총재가 되었습니다.
사실 이제 2차 로잔 대회 이후에 그 로잔 운동 자체가 많이 침체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21년 만에 전 세계 복음주의자들을 다시 연합하는 것은 너무너무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연합 운동을 하다 보면 다양한 사람을 만납니다.
정말 앞에 나서기를 원하는 사람도 있고, 비협조적으로 나오면서 뒤에서 비판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일일이 만나서 설득하고 세계 선교를 위한 협력을 이끌어내는 것은 너무너무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3차 로잔 대회를 마치고 제가 이분에게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로잔 대회를 준비하면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어떠한 어려움들이 있었는지 개인적으로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정말 전 세계에 수많은 목사님들을 찾아가서 고개를 숙이고 세계 선교를 위해서 함께 힘을 모으자고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세계 선교를 위해서라면 자기 자존심이고 뭐고 다 필요 없었습니다.
복음주의 선교를 위해서 무엇이든지 다 내려놓을 수 있었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너무너무 큰 도전과 감동을 받았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자신을 완전히 비우는 것이 실제로 가능하구나 사도 바울도 이런 모습이었겠구나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한국 사회에 이렇게 겸손한 마음을 가진 리더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한국 사회는 너무나 분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역과 이념으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세대별로 성별로 너무나 분열되어 있습니다.
큰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 사회를 만약에 단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저는 '초갈등사회'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갈등을 중재하고 조율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요?
예수님과 같이 자기를 비우고 겸손한 마음을 가진 리더일 것입니다.
그런 종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나타날 때 그런 사람들이 사회 각 분야에 나타날 때 그때 우리나라가 변화될 줄로 믿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겸손한 마음을 가진 리더였습니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될 수 있었고,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의 모습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든 복음을 전해서 몇 명이라도 구원하게 하기 위해서 기꺼이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의 스타일이 있겠죠.
각자의 선호가 있고 또한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전통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전통의 가치를 존중합니다.
하지만 그 어떤 전통도 복음을 증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그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 복음 전도와 선교에 소홀하다면 그러한 교회에는 미래가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교회는 교회 건물이 전통일 수 있습니다.
아주 웅장하고 고통스러운 그 예배당을 자랑스러워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 세대와 청년들이 어떤 사역을 위해서 예배당에 조금 변화를 주자고 할 때 어떤 일이 있어도 예배당은 못 건드린다라고 하는 교회가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다음 세대보다 예배당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그 교회는 어떻게 될까요?
그런 교회에 과연 다음 세대 아이들이 올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교회는 예배당 자체는 고수할 수 있을지 몰라도 다음 세대는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든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몇 명이라도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을 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정말로 성숙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자신을 비워서 그리스도의 겸손을 갖춘 사람입니다.
여러분 모두 그러한 믿음으로 많은 사람들을 섬기고 유익하게 하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모세의 율법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할례를 금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바울을 향한 비방과 모함을 이어갔습니다.
특별히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무리를 선동해서 바울을 공격했습니다.
본문 2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그 일례가 거의 참에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은 아마도 에베소에서 왔을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있을 때 큰 핍박을 받았는데, 그 핍박을 했던 사람들이 예루살렘까지 따라와서 바울을 공격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모든 곳에 다니면서 율법과 성전을 비방했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본문 28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바울이 모든 곳을 다니면서 율법과 성전을 비방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일방적인 주장입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지 율법 자체는 선하다고 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서 주님께서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셨다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은 바울의 주장을 왜곡해서 그가 율법을 비방했다고 선동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의 거룩한 곳에 들어갔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는 이방인들이 들어갈 수 있는 그 공간의 제약이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이방인의 뜰 안에만 머무를 수 있었습니다.
그림에 보면 빨간색으로 표시된 것이 이방인의 뜰입니다.
이방인들은 여기에만 있을 수 있었고요.
11번이 이 미문이고, 그 문 안으로 들어가면 9번이 여인의 뜰입니다.
여인의 뜰에는 예루살렘 이스라엘 여인들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이 뜰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문 앞에 어떤 표지가 적혀 있었는데, 그 안으로 들어가면 사형을 당할 수도 있다는 헬라어와 라틴어 표지가 적혀 있었습니다.
1871년에 발견된 그 표지판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습니다.
바울은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 율법의 전문가였기 때문에 이것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바울이 이방인을 데리고 성전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시내에서 바울과 이방인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유대인들이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본문 29절에 보면 바울이 에베소 사람과 함께 시내에 있는 것을 보고 그를 데리고 성전에 들어갔다는 그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에 대해서 아무런 근거가 없는 이야기를 지어냈습니다.
그런데도 그 선동은 먹혀들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선동은 문장 한 줄로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나치 정권의 선동 전략 중에서 이런 것이 있습니다.
선동은 정말 무서운 거죠.
아무런 근거 없는 문장 한 줄로도 사람들을 선동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반박하기 위해서 수십 장의 증거와 문서를 제시해도 그때 이미 사람들은 처음 주장을 받아들이고 난 이후입니다.
한 번 받아들인 그 생각을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죠.
그러면 선동하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 할까요? 왜 사실을 왜곡해서 말할까요?
자기가 원하는 정치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불의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사람들을 이용하는 거죠.
근거 없는 이야기 만들어낸 이야기로 대중을 흥분시키고 분노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분노에는 힘이 있습니다.
매우 파괴적인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치인 중에서 이 분노의 힘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사람들 정말로 위험한 사람들입니다.
독일 나치 정권의 선전부 장관을 역임했던 유세프 베스트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대중을 선동하는 데 분노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이 전쟁의 정당성을 알려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폴란드가 독일계 소수 민족을 잔혹하게 탄압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사실을 왜곡하고 과장해서 이 가짜 뉴스를 가지고 대중의 분노를 이끌어냈습니다.
괴벨스가 했던 유명한 말이 있죠. 분노와 증오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선전의 가장 큰 적은 지식인주의이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분노를 일으키고 증오를 일으키는 것은 대중을 열광시키는 데 가장 효과적입니다.
비난한 대상을 찾고 희생양을 찾는 것은 대중을 열광시키는 일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거죠.
우리가 지금 불행한 건 다 너 때문이야.
너만 없어지면 우리는 다시 행복해질 거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비난할 대상을 찾으면 대중은 열광적으로 반응하게 됩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이 바울을 비방하고 모함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너 같은 변절자 때문에 우리가 지금까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거야.
우리 이스라엘이 불행한 것은 다 너 때문이야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선동당했던 무리가 이렇게 외쳤죠.
본문 3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
무리가 말하기를 그를 없이 하자, 그를 없애버리자라고 외쳤습니다.
정말 놀랍게도 무리가 이와 똑같이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누구를 향해서 이렇게 말했을까요?
예수님을 향해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18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
우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 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주소서 하니 예수님을 신분했던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아무런 혐의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풀어주길 원했죠.
하지만 무리가 일제히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이 사람을 없애 하자 이 사람을 없애버리자라고 외쳤습니다.
이렇게 외친 무리는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향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쳤던 똑같은 무리입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을 향해서 이제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쳤던 무리가 이제는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정치적인 목적을 들어주지 않자 이 사람을 없애버리자라고 외친 것입니다.
저는 이 모습을 보면서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고 악한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따라가게 되면 우리 역시 이 무리처럼 선동당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선동당하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이용당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악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 우리를 이용하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럴듯한 사상과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오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정치적 유익을 위해서 우리를 이용하는 것이지, 이러한 세상에서 올바로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신중해야 합니다.
자극적인 기사, 자극적인 선동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성급하게 결론 내리지 말고 잠시 결론을 유보해도 됩니다.
정말 무엇이 사실인지 팩트 체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의도적으로 두 그룹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전반부에 등장하는 그 무리는 너무나 쉽게 선동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 사실을 왜곡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쉽게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앞뒤를 따지지 않고 사실관계를 확인하지 않고 쉽게 흥분하고 쉽게 선정되었습니다.
그에 비해서 후반부에 등장하는 로마의 천부장은 선동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지 않고 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자 했습니다.
아니 바울에게 어떤 잘못이 있는지, 유대인들의 주장이 과연 사실인지 확인하고자 했습니다.
여러분 이 두 가지 모습은 매우 선명한 대비를 보이고 있습니다.
근거 없는 모함 이 비방에 동조할 것인지 아니면 그 주장이 정말 사실인지 살펴볼 것인지 우리는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가짜 뉴스로 우리를 선동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유대인들의 선동에 넘어간 무리가 바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무차별로 폭행한 것뿐만 아니라 실제로 바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로마 부대의 천부장이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본문 31절 3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당시 이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식민 정책은 상당한 자유를 이제 주었지만 동시에 질서와 안정을 유지하기 원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는 언제든지 그런 소요와 폭행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로마 수비대가 상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림에 보시는 것처럼 성전 우측 상단에는 안토니아 요새가 있었습니다.
이곳에 로마 수비대가 성전 전체를 감시하면서 폭력과 소요가 일어나는 것을 방지했습니다.
로마 부대의 천부장이 이곳에 있었죠.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바울이 무리에 둘러싸여서 무차별 폭행을 당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사람이 성전 안에서 죽게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천부장이 재빨리 군인들을 데리고 내려갔습니다.
내려가서 무리의 폭행을 멈추게 하고 어떻게 된 것인지 질문했습니다.
34절에 그 답이 나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 치거늘 천부장이 소동으로 말미암아 진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저렇게 말했습니다.
정신없이 번잡한 상황이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 무리들 사이 안에서도 주장이 일치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을 공격하면서도 왜 바울이 나쁜 사람인지 일관적인 주장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천부장이 이 바울을 영내로 데려가라고 명령했습니다.
사건의 진상을 파악할 때까지 바울을 보호하고자 했던 것이지요.
이것은 천부장이 얼마나 신중한 사람이었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1장부터 23장에 이르기까지 이 천부장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23장 26절에 보니까 천부장의 이름도 나옵니다.
'글라우디어 루시아'라는 사람입니다.
이 천부장은 바울과 연관된 이 사건이 어떤 모습인지 그 진상을 알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스스로를 변호할 수 있는 기회도 여러 번 주었습니다.
그 무리 앞에서도 스스로를 변호하라고 하고 뿐만 아니라 공회 앞에서도 변호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바울은 그 모든 기회를 활용해서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은혜를 선포했습니다.
사도행전 전체의 구조를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전반부를 보면 1장부터 12장까지는 베드로가 이제 주도권을 가지고 유대인 선교를 펼쳐 나갑니다.
사도행전 후반부 13장부터 28장까지는 이제 바울이 주도적인 역할을 해서 이방인 선교를 펼쳐 나갑니다.
근데 이 후반부만 놓고 보면 바울의 선교 이야기 중에서 절반은 바울의 선교 여행 이야기이고요.
나머지 절반은 바울의 재판 이야기입니다.
바울의 세 차례 선교 여행이 매우 광범위하고 다채로웠습니다.
아주 많은 지역에서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선교 여행을 다룬 분량과 똑같은 분량만큼이나 바울의 재판을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 21장부터 마지막 28장까지 바울은 총 5차례의 재판을 받게 됩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그 모든 재판 과정을 아주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러분 우리 같으면 사울 바울의 선교 여행이 더 흥미로울 텐데 왜 사도행전의 저자는 이 바울의 재판 과정을 아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이 책을 읽고 있는 독자들에게 도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선동을 당한 그 무리처럼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바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하게 살펴본 이 로마의 천부장과 같이 살아갈 것인지 잘 선택하라고 우리에게 도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방식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유대인들에게 선동당했던 무리처럼 바울 나쁜 사람이네라고 쉽게 결론 내리겠습니까?
아니면 바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살펴보았던 자세하게 사건의 진상을 알고자 노력했던 그 사람처럼 행동하시겠습니까?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가장 편리한 대응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문제를 일으킨 대상 비난할 대상을 찾는 것입니다.
'야, 너 때문에 이 문제가 일어났어. 니가 모든 책임을 다 져야 돼'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지구 온난화의 문제로 온 세계가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 올여름 너무 더우셨죠?
하지만 앞으로의 여름은 더 더울 것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화가 납니까?
도대체 누구 때문에 이 일이 일어났는지 그 비난할 대상을 찾고 싶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중국과 인도에 공장이 많으니까 그 사람들 때문에 지구온난화가 발생했다고 비난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더 깊이 살펴보면 이야기가 조금 다릅니다.
현재 대기에 축적된 이산화탄소의 대부분은 서구 국가들이 지난 100년간 배출했던 것입니다.
산업혁명 이후에 서구 국가들은 엄청난 양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해 왔습니다.
그것을 기반으로 자국 경제를 발전시키고 이제 와서 탄소 배출권을 제약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구온난화의 주범으로 중국과 인도를 지목하고 있습니다.
제가 중국과 인도를 특별히 사랑하지 않습니다.
제가 서구 국가를 특별히 미워하지도 않습니다.
중립적인 입장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계산할 때에 국가별 총 배출량으로 해야 할까요? 아니면 국민 1인당 배출량으로 해야 할까요?
둘 다 중요하겠죠. 국가별 총 배출량도 중요하고 국민 1인당 배출량도 중요합니다.
두 가지 데이터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국가별 배출량으로 계산하면 당연히 중국과 인도가 캐나다 같은 나라보다 훨씬 더 많이 배출합니다.
하지만 국민 1인당 배출량으로 계산하면 캐나다는 중국의 2배, 인도의 8배를 배출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선진국은 어마어마한 양의 탄소를 배출하고 있습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어떤 문제가 있을 때 비난할 대상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해결책은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감정적으로는 속 시원할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기 원한다면 비난할 대상을 찾을 것이 아니라 문제의 원인을 면밀하게 검토해야 합니다.
그리고 장기적인 해결 시스템을 구축해야 합니다.
어떤 사건이 터졌을 때 우리나라는 주로 희생양을 먼저 찾습니다.
누구 때문에 이 사건이 터졌는지 비난할 대상을 찾습니다.
반면에 미국에서는 어떤 사건이 터졌을 때 주로 영웅을 찾습니다.
이런 문제가 있었는데 그 한 사람의 영웅 때문에 문제가 커지지 않고 잘 해결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모두 다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희생양을 찾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고 영웅을 찾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영웅을 찾는 것은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찾고 논의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영웅을 추켜세우느라고 정신이 없어서 장기적인 시스템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 자극적인 뉴스가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쉽게 누군가를 비난하고 공격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정말로 필요한 태도, 정말로 중요한 태도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신중함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교회에서 중직자를 세울 때 교회 리더를 세울 때 신중한 사람을 세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3장 2절에 봐도 신중한 사람을 택하라
디도서 1장 8절에 봐도 신중한 사람을 택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신중하다라는 말과 절제한다라는 말이 함께 나오고 있습니다.
신중한 것은 '말과 행동에 있어서 절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섣부르게 판단하지 말고 서둘러서 성급하게 행동하지 말고 시간을 두고 잘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혹시 내가 선동되는 것은 아닐까? 내가 들은 이 사실관계가 맞는지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판단력을 잘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해야 합니다.
잠언에 보면 어떻게 판단력을 유지할 수 있는지 잘 나와 있습니다.
잠언 5장 1절 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내 아들아 내 지혜에 주의하며 내 명철에 네 귀를 기울여서
근신을 지키며 네 입술로 지식을 지키도록 하라
아멘, 근신을 지켜라.
근신이라는 말이 잘 마음에 안 닿는 안 와닿는데, 이것이 영어로 하면 'discretion'이라는 단어입니다.
'판단력'이라는 단어이거든요.
우리가 매 순간 판단력을 잘 지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지혜와 명철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매일 매 순간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사건을 제대로 분별할 수 있는 판단력을 지킬 줄로 믿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신문을 먼저 보기 이전에 말씀을 먼저 보셔야 합니다.
신문을 먼저 보고 기분 나쁜 마음으로 말씀을 보면 안 되겠죠.
말씀을 먼저 보고 좋은 기분으로 신문을 보시면 되겠습니다.
어떤 문제가 있을 때에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하는 지혜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함으로 신중함과 판단력을 지키시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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