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살다 보면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순간이 있습니다.
한 번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서 인생이 몰락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훨씬 더 많은 경우에는 쇠퇴와 몰락이 서서히 시작됩니다.
그것이 개인의 건강이든 공동체의 안정성이든 상관없습니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순간에 몰락은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문제가 상당히 심각해질 즈음에 그때서야 우리는 그 사실을 인지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건강에 이상이 생겼을 때 우리 몸은 신호를 보냅니다.
소화기관에 문제가 생기거나 두통 혹은 마비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몸무게가 갑자기 많이 빠지면 좋아할 것이 아니라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으셔야 합니다.
정신적인 어떤 이상이 생길 때에도 우리의 마음은 신호를 보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어떤 무기력증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최근 신문에 보니까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의 96%는 사망 전에 신호를 보냈다고 합니다.
'죽고 싶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든지 갑자기 주변 정리를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문제가 폭발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문제는 오래전에 시작되어서 해결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 위험의 경고를 무시하고 현실을 부정한다면 더 큰 아픔과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당신에게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라는 진단 앞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 문제를 인정하고 변화를 위해서 살을 깎는 노력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체적인 문제이든 영적인 문제이든 잘못된 부분을 인정하고 내가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그 문제를 부정하고 그 진단을 내린 사람이 틀렸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지요.
의사의 진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저항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영적인 리더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저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렇게 현실을 부정하게 되면 그 책임과 결과는 나에게로 돌아옵니다.
다른 사람이 그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책임을 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현실을 인정할 것인지 아니면 부정할 것인지는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딱 한 번의 기회만을 주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충분한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여서 주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그런 기회를 많이 주십니다.
어쩌면 우리 눈에는 그 많은 기회들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리셨는지, 참으셨는지 안 보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마지막에 드러난 하나님의 심판과 판결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세하게 살펴보면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을 인정하고 돌아올 수 있는 수많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정하신 때에 그 마지막 판결을 내리실 것입니다.
그분의 공의와 정의에 입각해서 최후의 판결을 내리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반드시 잡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회개의 기회를 주셨을 때 지체하지 말고 주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충분한 기회를 잡지 않고 눈앞에 보이는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 주님께 돌아오지 않았던 한 인물이 나옵니다.
그의 이름은 총독 벨릭스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벨릭스 앞에서 재판을 받는 바울의 모습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보았던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바울을 처벌하고자 총독에게 재판을 요청했습니다.
당시 유대 지역을 관할하던 총독은 가이사랴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를 대표하는 이 아나니아는 전문 변호사를 고용해서 바울의 죄를 지적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재판 과정이 복잡하고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전문 변호사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는데, 변호사가 양심에 따라서 일할 때도 있지만 자기를 고용한 사람을 위해서 일할 때도 있습니다.
아나니아가 고용했던 변호사 더둘로는 바울의 죄를 두 가지로 지적했습니다.
사도행전 24장 5절 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함으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변호사가 지적하는 바울의 첫 번째 죄는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소요하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죄는 성전을 더럽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죄를 지적하면서 변호사는 바울에게 인격적인 모독을 합니다.
바울을 가리켜 '전염병 같은 자' 라고 부르고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고 불렀습니다.
바울의 입장에서는 어처구니가 없는 주장이었습니다.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는 생명의 복음을 전한 것뿐인데 자신을 전염병 같은 자라고 불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천대하던 나사렛 지역을 언급하면서 나사렛 이단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무 잘못이 없는 바울의 입장에서는 화가 날 수 있는 상황이었죠.
하지만 바울은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상대방의 도발에 넘어가서 화를 내는 순간 내가 불리해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양심에 떳떳할수록 화를 내면 안 됩니다.
원래 떳떳하지 못한 사람이 모욕을 하고 모독을 합니다.
정상적으로 논쟁을 하면 지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온갖 음모론을 제기하고 선동을 합니다.
그럴 때 절대로 화를 내시면 안 됩니다.
제가 이번에 로잔 대회를 준비하면서 이 지혜를 배웠습니다.
여러 차례 말씀드린 것처럼 로잔대회는 WCC에 반대해서 시작되었습니다.
로잔대회는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강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음모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WCC, WEA, 로잔이 종교 통합을 할 것이라고 음모론을 제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논리적으로도 말이 안 되고 현실적으로도 말이 안 되는 주장입니다.
이런 주장과 음모론을 들으면 기분이 상하고 화가 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로잔대회를 준비하시는 유기성 목사님, 이재훈 목사님은 절대로 화를 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양심이 떳떳한데 그러한 음모론을 듣고서 화를 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로잔대회 준비하면서 현실적으로 얻는 이득이 아무것도 없는데 어떠한 공격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원래 떳떳하지 못한 사람이 모욕을 하고 음모론을 제기합니다.
그런 공격 앞에서 화내지 마시고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음모인지 시간이 지나면 금방 다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는 그러한 인내와 절제가 있었습니다.
변호사의 도발에 넘어가서 막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하나씩 하나씩 그의 주장을 반박했습니다.
첫째로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소요하게 했다는 주장은 유대 지방 총독과는 아무 연관이 없는 주장입니다.
이것이 사실 여부를 떠나서 총독 벨릭스는 유대 지방만 관할하기 때문에 그 바깥 지방에 대해서는 아무런 권한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첫 번째 지적은 아예 재판 사항이 되지 않습니다.
둘째로 성전을 더럽게 했다는 주장도 잘못되었습니다.
바울이 성전을 더럽히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온 것이 아니라 유대 정결법에 따라서 자신을 정결하게 하기 위해서 성전에 왔기 때문입니다.
본문 본문 17절 18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재물을 가지고 와서
드리는 중에 내가 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그들이 보았나이다.
여기서 결례를 행하였다는 것은 잘못됐다는 뜻이 아니라 정결법에 따라서 정결 의식을 행하였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이 선교 여행을 위해서 이방 지역에 오랫동안 머물렀습니다.
이방 지역에서 이방인들과 오랫동안 접촉하다 보면 유대 정결법에 따라서 부정해질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 모든 율법을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것을 알았기 때문에 더 이상 유대의 정결법을 지킬 필요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 리더들의 권면에 따라서 자신을 정결하게 하기 위해서 성전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 성전에서 정결 예식을 치렀는데, 그 마지막 날에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그를 발견하고 붙잡았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성전을 더럽히게 하고자 하는 의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유대 정결법에 따라서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자 한 것밖에 없었습니다.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이 바울은 당당하게 재판에 임했습니다.
이 재판을 관할하는 벨릭스는 유대 지방을 다스리는 로마 총독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플레임은 안토니오스 벨릭스입니다.
그는 원래 로마 황실에서 일하던 노예였는데, 그 황제의 어머니 안토니아가 그를 많이 아껴서 자유인의 신분을 하사했습니다.
자신에게 자유인의 신분을 주신 황제의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안토니오 벨릭스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노예였던 사람이 자유인이 되었으니까 얼마나 기뻤을까요?
하지만 그는 야망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유인으로 만족한 것이 아니라 귀족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황제 가족과의 친분을 활용해서 마침내 저 멀리 있지만 유대 지방을 통치하는 총독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총독이 된 벨릭스는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 아주 중요했습니다.
타고난 배경이 있는 것도 아니요, 훌륭한 학식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총독 자리를 지키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유대인들의 반응을 살피면서 때로는 그들을 위협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들의 눈치를 보기도 했습니다.
바울의 재판 과정에서도 벨릭스는 자기 자리를 지키기 원했습니다.
무엇이 진실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정의로운지 이런 거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그가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유익이었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였습니다.
그래서 벨렉스는 바울에 대한 최종 판결을 연기했습니다.
사도행전 24장 22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연기하여 이르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하고
벨릭스는 바울이 믿고 있는 신앙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기독교 신앙을 가리켜 도, (The Way)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길 대신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가리켜 도, The Way 라고 불렀습니다.
벨릭스는 이 예수님을 믿는 그 신앙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로마 사람이 이걸 잘 알 수 있었을까요? 잠시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벨릭스는 이 문제가 정치적인 문제가 아닌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신앙적인 문제였습니다.
바울이 믿고 있던 그 도가 유대인의 신앙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바울을 나사렛 이단이라고 불렀지만,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분리되어 나온 이단이 아닙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유대교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유대교의 핵심인 율법과 선지서를 우리도 동일하게 믿고 있습니다.
다만 율법과 선지서가 스스로 완성하지 못한 그 하나님의 의를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주장이었습니다.
본문 14절에 보니까 율법과 선지자의 기록된 글을 나도 다 믿는다라고 바울이 이야기했습니다.
기독교는 유대교와 분리된 이단이 아닙니다.
율법서와 선지서 우리도 다 믿고 있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그 모든 말씀을 성취하신 것을 믿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주장을 했고, 벨릭스도 이 내용을 다 이해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릭스는 바울에 대한 판결을 연기했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나중에 천부장 루시아가 오면 그 사람이 이 사건을 처결할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사실 이것은 매우 구차한 변명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난번에 살펴보았던 이 천부장이 이미 벨릭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루시아는 바울의 재판권을 벨릭스에게 보고하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사도행전 23장 29절 함께 읽겠습니다.
고발하는 것이 그들의 율법 문제에 관한 것뿐이요 한 가지도 죽이거나 결박할 사유가 없음을 발견하였나이다
아멘. 바울에 대한 고발을 면밀하게 살펴본 이 천부장 루시아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것은 율법에 대한 문제구나, 신앙에 대한 문제구나 알았습니다.
바울을 가두거나 처벌할 어떠한 이유가 없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있는 그대로 총독에게 보고했습니다.
그러니까 천부장도 알고 있고 총독도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에게는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바울을 풀어주지는 않았습니다.
죄 없는 사람을 가두어 두는 것은 분명히 잘못인데 왜 어느 누구도 바울을 풀어주지 않았을까요?
본문 27절에 나와 있습니다.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했다라고 합니다.
총독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했기 때문에 바울을 풀어주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서 이러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자신의 유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자기가 마땅히 내려야 하는 그 결정을 뒤로 미룬 것입니다.
이것은 리더로서 매우 무책임한 모습입니다.
여러분 리더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리더의 역할은 결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결정을 내리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리더의 역할입니다.
작은 일에 대해서 결정 내리는 것은 쉽겠지 오늘 어디로 회식을 갈까?
이번에 명절 선물은 무엇으로 할까? 이런 결정 내리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어렵습니다.
내년에 우리가 우리 회사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결정하는 건 어려운 일이지요.
직원 배치를 어떻게 해야 할지, 누구를 승진시키고 누구를 퇴직시켜야 하는지 결정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리더는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후폭풍이 두려워서 결정을 내리지 않는 것은 리더로서 직무유기를 하는 것입니다.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 다 알지 못하더라도 책임을 감수하고 결정을 내리는 것이 리더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리더에게 필요한 덕목이 있는데 바로 용기입니다.
여러분 용기는 막 목소리가 크고 호기로운 것이 용기가 아닙니다.
진정한 용기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올바른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결단력이 바로 용기입니다.
결단력이 없는 리더는 좋은 리더가 아닙니다.
미국의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언가를 결단할 때에는 위험과 비용이 따른다. 하지만 그것은 장기적으로 안락한 정체에 빠지는 위험과 비용보다는 훨씬 적은 것이다' 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일반인들은 아마 이렇게 생각할것입니다.
가장 안전한 길은 아무 결단도 내리지 않고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제일 안전할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탁월한 리더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가장 위험한 길은 아무 결단도 내리지 않고 안락함에 빠지는 것이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총독 벨릭스는 결정을 미루는 리더였습니다.
그는 어떠한 위험도 감수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자기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은 무책임한 리더의 모습입니다.
벨릭스는 야망은 컸지만 용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억울할 수 있겠죠.
나는 죄가 없는데 무려 2년 동안이나 갇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이자 은혜였습니다.
왜냐하면 불과 며칠 전에 바울을 죽이기로 맹세했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3장 12절 13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이같이 동맹한 자가 사십여 명이더라
바울을 죽이기로 맹세했던 자가 몇 명이었습니까?
40여 명이었습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내가 바울을 죽이기 전까지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목숨이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었죠.
바로 그때 하나님은 총독 벨릭스를 통해서 그분의 뜻을 행하셨습니다.
가이사랴에 있는 헤롯성 안에 가장 안전한 곳에 바울을 두셨습니다.
그곳에서 2년 동안이나 보호해 주셨습니다. 벨릭슨은 자신의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서 이 일을 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위해서 이렇게 한 것 아니고요.
그가 사도 바울을 위해서 이렇게 한 것 아닙니다.
벨릭슨은 순전히 이기적인 동기로 이 행동을 했지만 하나님은 그의 이기적인 행동을 통해서도 주님의 뜻을 이루신 줄로 믿습니다.
바울을 죽이기로 했던 그 맹세한 자들로부터 바울을 안전하게 지키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40명의 사람들이 바울을 죽이기 전까지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말했습니다.
이 말은 속전속결로 최대한 빨리 바울을 찾아서 죽이겠다는 의지이죠.
내가 음식을 먹는 것보다 바울을 찾아서 죽이는 것이 더 우선이라는 뜻입니다.
며칠 동안 이렇게 할 수 있겠죠.
일주일, 2주일 동안 이렇게 할 수 있지만, 여러분 2년 동안 음식을 먹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확실한 사실 한 가지는 바울이 헤롯 성 안에 머무는 그 기간 동안 그들은 그 맹세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바울을 죽이기 전까지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는 그 맹세를 지키지 못했으니까 부끄럽겠죠.
그러니까 아마 바울을 죽이고자 하는 동기도 많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지난 금요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은 홍해 바다 한가운데에도 길을 내실 뿐만 아니라 길이 있는 것을 미리 보십니다.
인간의 눈은 바다밖에 안 보이죠. 하지만 하나님은 바다 한가운데 길이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으십니다.
우리의 생각을 초월해서 역사하시는 그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행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총독 벨릭스는 정치적인 야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죠.
그 야망을 위해서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고자 바울을 풀어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또한 육체적인 정욕이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유대 총독으로 부임했을 때 그는 매우 아름다운 여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헤롯 아그리파 1세의 딸이었던 '드루실라'라는 여자였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드루실라는 당대의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그녀에게 반한 벨릭스는 어떻게든 그녀를 얻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벨릭스에게는 이미 아내가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드루실라도 이미 결혼을 한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릭스는 그녀를 얻기 위해서 구브로의 유명한 마술사를 고용했습니다.
21:28
드루실라 와 그녀의 남편을 떼어내기 위해서 마술사까지 동원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자신이 원했던 그녀를 얻게 되었습니다.
드루실라는 벨릭스의 세 번째 아내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그 아내 드루실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총독의 아내 드루실라가 바울이 전한 복음에 관심을 보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2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바울은 가이사랴에 있는 헤롯 성 안에 구금되어 있었습니다.
그곳이 감옥은 아니었고요. 어느 정도의 자유가 허용된 공간이었습니다.
바울의 친구들이 방문하고 음식을 가져오는 것을 총독이 허락했습니다.
아마 요즘으로 따지면 가택 연금과 비슷한 상황일 것입니다.
그런데 총독 벨릭스와 그 아내 드루실라가 바울을 찾아왔습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바울의 메시지를 듣기 원하니까는 총독도 함께해 왔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본문 25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바울은 의와 절제와 심판에 대해서 강론했습니다.
의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기준입니다.
둘째는 그 뜻대로 살기 위해서 정욕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심판은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주시는 것입니다.
의와 절제와 심판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중요한 주제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께서 오실 것을 약속하시며 성령께서 오시면 의와 죄와 심판에 대해서 증거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6장 8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아멘. 성령의 역사는 한마디로 우리 마음속의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죄를 깨달아야지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이 옆에서 아무리 지적하고 아무리 정죄해도 효력이 없습니다.
여러분 혹시 가족이나 어떤 친구의 잘못이 보일 때가 있죠?
옆에 있는 사람에게는 분명히 보이는 잘못인데 정작 본인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럴 때 옆에서 그것을 지적해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젊었을 때에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적을 합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점점 지적을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지적해봐야 본인이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지 그럼 서로 기분만 나쁘고 관계만 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옆에 사람이 뭐 잘못해도 잘 지적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지적, 사람의 정죄에는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오셔서 죄를 깨닫게 하셔야지, 그때 진정한 변화와 회개가 시작되는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6장에서 약속하셨던 그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는 바울은 신실한 마음으로 벨릭스와 드루실라에게 의와 절제와 심판에 대해서 강론했습니다.
다가오는 심판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의로운 삶과 절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진정한 변화와 회개를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고 따라야 한다고 선포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벨릭스는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25절에 보니까 벨릭스가 두려워했습니다.
바울의 설교를 통해서 마음이 이제 찔린 거죠.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는구나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하고 내가 제대로 돌아와야 되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마음에 찔렸으면 돌이켜 회개해야 합니다.
하지만 벨릭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라고 이야기합니다.
내가 틈이 있으면이라는 그 구절을 영어로 보니까 (When I find it convenient)고 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나중에 편할 때, 나중에 기회가 있을 때 그때 너를 다시 부르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복음에 대한 가장 안타까운 반응입니다.
차라리 복음을 거부하거나 나는 죄가 없다고 말하면 안타깝지 않을 것입니다.
제일 안타까운 것은 복음을 듣고 마음이 찔렸는데 나중에 편할 때 그때 다시 한 번 하죠라고 말하는 것 이것이 가장 안타깝습니다.
왜냐하면 그 나중이 올 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 다시 교회로 올 수 있을지, 또 언제 다시 회개의 기회가 있을지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언제든지 기회가 있을 것 같지만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벨릭스는 나중에 편할 때 나중에 시간이 있을 때 다시 오겠다고 말했습니다.
나중에 바울 다시 만나서 그때 예수님을 믿을지 말지 결정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나중이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없었습니다.
유대 역사에 따르면 얼마 후 가이사랴에서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에 큰 소요가 있었습니다.
그 갈등과 소요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로마 출신인 벨릭스는 이방인들 편을 들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분노한 유대 귀족들이 로마 황제에게 상소문을 보냈습니다.
이 벨릭스의 무능한 리더십으로 인해서 온 유대 지방이 소란스럽다고 상소를 올렸습니다.
그 상소를 받은 황제가 벨릭스를 유대 총독에서 해임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총독 베스도를 임명했습니다.
지금도 큰 문제가 생기면 장관 해임하는 것처럼 과거에도 큰 사건이 생기면 총독을 해임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벨릭스는 일순간에 모든 지위를 다 잃고 귀항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예수님을 믿고 진정한 변화와 회개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매우 인본주의적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완악한지 모릅니다.
복음을 듣고 내 마음에 찔렸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로 돌아오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21세기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무신론자는 옥스퍼드 대학의 생물학 교수인 '리처드 도킨스'라는 사람입니다.
그가 쓴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은 전 세계 무신론자들에게 성경과도 같습니다.
도킨스는 생물학과 유전학을 통해서 하나님 없이도 인간이 어떻게 진화해 왔는지 설명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주장합니다.
인간 안에 있는 이기적인 유전자와 적자, 생존의 자연 법칙이 상호작용을 해서 인간은 가장 우수한 종으로 진화했다는 주장입니다.
2012년도에 옥스퍼드 대학에서 리차드 도킨스와 영국 성공회 대주교인 로완 윌리엄스가 공개 토론회를 했습니다.
이 토론회의 주제는 하나님의 존재와 인간의 기원이었습니다.
여러분 유튜브에 가면 다 이 토론회가 나와 있습니다.
이 토론회에서 무신론을 대표하는 리차드 도킨스가 여러 차례 당황했습니다.
그는 생물학자로서 인간의 생물학적인 진화만을 설명했는데, 로완 윌리암스가 인간의 자아의식과 언어 능력에 대해서 질문하니까 제대로 답변을 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은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보다 더 큰 존재 절대자, 혹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세상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 우리 모두는 사후 세계에 대해서,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건 너무너무 흥미로운 일이죠.
어느 누구도 죽어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인간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일까요?
이것은 생물학적인 진화론으로는 절대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옥스포드 토론회가 2012년 2월 23일에 있었습니다.
그다음 날 영국 일간지에서 리차드 도킨스가 자기 입장을 바꾸었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도킨스가 무신론에서 불가지론으로 자기 입장을 변경했다는 것입니다.
무신론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고, 불가지론은 하나님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우리가 알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니까 학자로서 최소한의 양심을 가졌던 도킨스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입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올해 2024년 4월달에 또 다른 기사가 나왔습니다.
리차드 도킨스가 스스로를 '문화적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했다는 기사입니다.
여러분 문화적 그리스도인, Cultural Christian 이란 무슨 뜻일까요?
성경에 기록된 기적 예수님의 부활 이런 거 믿지 않지만 나는 찬송가를 너무 좋아해, 나는 성가대의 찬양 너무 좋아해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어떤 이런 분위기가 아주 편안하게 느낀다는 것입니다.
도킨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문화적으로 기독교 국가에 살고 싶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을 믿고 싶긴 한데,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말은 너무너무 교만하고 비겁한 태도입니다.
내 기준 내 생각과 맞는 것만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문화적 그리스도인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가 믿고 싶은 하나님을 믿겠다는 것입니다.
리차드 도킨스는 여전히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의 책 '만들어진 신'처럼 자기가 만들어 자기가 생각해낸 그 하나님을 그려놓고 그 하나님만 믿겠다는 거죠.
이것은 진정한 신앙이 아닙니다.
도킨스의 나이가 얼마인가 살펴봤더니 올해 83세인데 시간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거 신앙이 아니죠.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믿는 것이 진정한 신앙인 줄로 믿습니다.
성경은 온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독생자 예수님이 보내주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구원자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이 바로 이거였죠.
의와 절제와 심판에 대해서 증거였습니다.
다가올 심판을 믿는다면 마땅한 반응은 내 죄를 인정하고 회개해서 주님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 없이 진정한 돌이힘 없이는 어떠한 변화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제한된 인생을 살아갑니다.
우리 인생 긴 것 같지만 또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짧은 시간입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너무나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충분한 기회를 주십니다.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벨릭스에게 충분한 기회를 주셨습니다.
바울의 재판에서 공의를 행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서 재판을 연기했습니다.
리더로서 책임을 회피하고 결정을 미룬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벨릭스에게 충분히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통해서 그가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벨릭스는 마음에 찔림을 느꼈지만 나중에 나중에 편할 때 다시 오겠다고 말했습니다.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결정을 미룬 것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미루다가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내려야 하는 중요한 결단은 무엇입니까?
주님 앞에서 회개하고 돌이켜야 할 문제가 있습니까?
누군가를 찾아가서 용서를 구하고 해결해야 될 문제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을 미루지 마십시오.
언제 또 기회가 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셨을 때 그 문제를 즉시하고 결단을 내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충분한 기회를 주시지만 그 기회는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기회가 있을 때에 믿음으로 결단을 내려서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길로 행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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