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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대원목사 설교

20241013 끝나지 않은 이야기

by 마이코 2024. 10. 15.



오늘은 사도행전 설교의 마지막 날입니다. \4차 로잔대회를 준비하면서 한국교회는 두 가지 운동을 벌였습니다.
첫째는 세계 선교를 위해 기도하는 중보 기도 운동이었고, 또 둘째는 사도행전을 함께 공동으로 설교하는 사도행전 공동설교 운동이었습니다.
지역과 교단을 초월해서 많은 교회들이 사도행전 공동설교에 동참했습니다.
가까이에 있는 우리의 이웃 교회인 범어교회에도 동참했고, 부산에 있는 수영로교회도 동참했습니다.
멀리 있는 서울에 있는 온누리교회, 인천의 주안장로교회 등 많은 교회들이 동참했습니다.
한국교회 역사에서 이렇게 많은 교회가 동일한 본문으로 설교를 했던 적이 있었을까요?
아마 제가 알기로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 공동 설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지역은 다르지만 우리 모두가 예수님께 속한 교회라는 인식을 심어주었습니다.
여러분에게 교회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아마 많은 사람들에게 교회는 내가 다니는 교회, 우리 교회를 뜻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지교회 개교회입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가시적 교회이죠.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수많은 성도들이 있습니다.
유럽에도 있고, 아프리카에도 있고, 남미에도 있습니다.
현재에도 있고, 과거에도 있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전 세계에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교회가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이것을 비가시적 교회, invisible church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몸된 교회는 우리 눈에 보이는 지교회 개교회보다 훨씬 더 큽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눈에 보이는 우리 교회에만 신경을 쓸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 평안하고 우리 교회는 부흥하니까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은혜 가운데 우리 대구동신교회는 코로나 이후에 매년 예산을 늘려갔습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전도, 선교 구제 사역이 많기 때문에 매년 예산을 늘려갔습니다.
정말 감사하게도 예산을 늘렸음에도 불구하고 매년 초과 달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동신교회에 주신 복과 은혜가 너무나 큽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는 잘 되니깐 평안하니깐 그냥 좋아하면 되는 것일까요?
코로나 이후에 어려움을 당하는 교회가 많이 있는데 우리 교회 사정 아니니까 괜찮다고 말하면 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변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교회도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동신교회만 예수님의 교회가 아니라 지역과 교단을 넘어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교회가 주님의 몸된 교회입니다.
이러한 의식, 공교회 의식이 있어야지 주님께서 맡기신 생명 사역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안타까운 현실은 개교회 주의에 빠져 있다라는 것입니다.
다른 교회가 어떻게 되든 말든 우리 교회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태도는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끊임없이 공교의 의식을 가지고 대구 지역 전체를 위해서 또 세계 선교 전체를 위해서 어떻게 힘쓸까 기도하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대구 지역 퀴어 반대 집회가 있었죠.
거기에 제일 열심히 동참했던 교회가 우리 교회입니다.
청년들만 1천 명 가까이 참여했습니다. 

작년들과 어린이까지 합치면 엄청난 숫자가 퀴어 반대 집회에 참여했습니다.
10월 27일 서울에서 열리는 연합예배를 위해서도 기쁨으로 동참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뿐만 아니라 대구 지역의 다른 교회 성도님들에게도 오가는 차량편을 제공하고자 결의했습니다.
10월 28일 월요일에는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님을 모시고 꿈너무 꿈 프로젝트에 선정된 미래 자립교회 목회자들을 섬기는 세미나도 개최합니다.

대구, 경북 지역, 부산, 경남 지역에서 귀하게 사역하시는 분들을 초청해서 그분들을 격려하고 후원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우리 교회만 생각하는 개교회주의를 넘어설 때에 주님께서 맡기신 선교적 사명을 감당할 줄로 믿습니다.
이런 면에서 이번 사도행전 공동 설교는 공교회 의식을 세우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사도행전의 29번째 설교이자 마지막 설교입니다.
사실 저도 특정한 본문으로 이렇게 오랫동안 설교한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쉽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 안에 이렇게 다채로운 주제가 있고 중요한 교훈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로마에 도착한 모습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바울이 로마로 가는 그 여정이 결코 순적하지 않았습니다.
지중해에서 유라굴로 광풍을 만났고, 몰타섬에서는 독사에게 물리기도 했습니다.
수많은 위험과 환란을 지나서 마침내 바울은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로마 교회의 이방인 성도들의 환대를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28장 15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 곳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아멘.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그곳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로마 교회 출신입니다.
그들은 로마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글라우디어 황제 때 황제의 명령으로 로마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고린도에 도착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거기서 바울을 만나서 함께 복음을 위해서 동역했습니다.
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그곳에서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을 만나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목회자에게 가장 큰 위로는 신실한 믿음의 성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혼자서 사역을 감당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신실한 성도들과 함께 교제하고 함께 협력하고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제가 얼마 전 금요기도회에서 남극에 사는 황제의 펭귄에 대해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영하 50도까지 내려가는 남극에서 강풍이 불면요 어른 펭귄들이 이렇게 삥 둘러서서 바람을 막아줍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아기 펭귄들을 두어서요. 매서운 추위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간혹 그 집단에서 이탈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렇게 혼자 남겨진 펭기는 영하 50도의 추위를 혼자 힘으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머지않아서 그 펭귀는 죽고 말게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건강하게 신앙생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공동체에 소속되어서 서로 기도하고 서로 교제하는 그런 것이 필요합니다.
사랑방 모임을 통해서 우리가 그런 교재를 나눌 수도 있고, 또한 남녀 전도회를 통해서도 그런 귀한 교재를 나눌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모여서 함께 예배드리고 말씀 듣는 것은 신앙생활의 절반입니다.
나머지 절반은 소그룹에 소속되어서 나의 삶을 나누고 나의 기도 제목을 나누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런 교재와 기도를 통해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우리 생각 같으면 바울 같은 사람이 무슨 위로가 필요할까 싶지만 혼자서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교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그곳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원했습니다.
우리가 살펴보았던 바울의 선교 패턴이죠. 

어느 곳에 가든지 그 도시에 있는 유대교 회당에 가서 먼저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로마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기록을 보니까 로마에 최소한 11개의 유대교 회당이 있었다고 합니다.
바울은 그 회당에 가서 복음을 증거했고, 또 그가 전한 말씀에 관심을 보인 사람들을 초청해서 하루 종일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본문 23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아멘, 잘 아시는 것처럼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길 원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메시아에 대한 약속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받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서는 메시아에 대해서 예언을 했고, 그 예언의 성취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바울은 유대인 선교에 있어서 포기하지 않는 끈기와 인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100번 거절한다면 101번 내가 전하겠다라는 마음으로 끝까지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전도가 쉬울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복음을 전하면 세상에서 조롱과 박해를 당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가끔 보면 전도가 가장 쉬웠어요라고 말하는 분이 계십니다.
이것은 마치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공부가 쉬웠나요? 어려웠나요? 

네 공부가 쉬웠으면 우리가 다 서울대 갔겠죠.
다 박사학위 받았겠죠. 

하지만 현실적으로 공부는 절대 쉽지 않습니다.
대학 입시도 어렵고 박사하기도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전도도 어렵습니다.
세상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전도의 열매 역시 오랜 인내와 기도가 필요합니다.
특별히 가족을 전도하는 것은 정말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이를 위해서 너무나 많은 기도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가족에게 한 번 전도해서 바로 교회로 올 것이라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내가 10번 전도해도 거절하면 11번 또 전도하겠다라는 단호한 결심이 필요합니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서 불신자와 결혼한 경우가 있습니다.
배우자가 성격도 좋고 외모도 좋고 학벌도 좋고 직장도 좋았습니다.
모든 것이 다 완벽했는데 교회에 다니지 않았습니다.
결혼하면 교회에 가겠다는 약속을 받고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한 이후에 남편이 교회에 갔을까요? 안 갔을까요?
어쩌다 한 번씩만 갔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가서도 말씀에 집중해서 듣지 않고 그러니까 신앙이 잘하는 것이 생각보다 정말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 시간이 오래 이어지니까 이 아내가 낙심이 되었습니다.
나는 함께 신앙생활하고 싶고 함께 말씀대로 우리 자녀들을 양육하고 싶은데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남편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15년 넘게 기도했는데도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들에게 이제 아들이 하나 있는데 아들이 수영을 배우러 수영장에 갔다가 거기서 친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수영장에서 만난 친구랑 베스트 프랜드가 됐는데, 이 친구가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친구였습니다.
그래서 친구 초청 주일에 그 아들을 교회로 초대했습니다.
베스트 프렌드를 따라서 교회에 갔는데 이 아들이 교회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찬양하는 것도 즐겁고 야외 활동하는 것도 즐거워했습니다.
그래서 아빠에게 교회에 같이 가자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남편이 엄청 가정적인 사람이라서 아들이 뭐 하자고 하면 무조건 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서라면 내가 뭐든지 할 수 있는데 교회에 가자고 하니까 당연히 교회에 갔습니다.
그렇게 해서 매주 교회에 다니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일이 우연히 일어났을까요?
이 아들이 수영장에 가서 그 친구를 만나고 그 친구를 통해서 교회에 가게 된 것이 우연이었을까요?
절대 우연이 아닙니다. 아내의 오랜 기도를 듣고 응답하신 하나님의 역사인 줄로 믿습니다.
15년 동안 남편을 위해서 기다리고 인내했던 그 아내의 전도의 열매인 것입니다.

여러분 전도는 절대 쉽지 않습니다. 

한 번 전화해서 상대방이 거절했다고 포기하면 안 됩니다.
10번 거절하면 11번 전할 각오를 가지면 됩니다.
15년 동안 거절했으면 내가 20년 동안 기다리겠다 하는 각오를 가지면 됩니다.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면 하나님의 때에 전도의 열매를 거둘 줄로 믿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름에 거두리라.


아멘.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믿든지 믿지 않든지 포기하지 않고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그들이 주님께로 돌아오게 될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전도하는 중에 포기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어떻게 역사하실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작정하신 때가 되면 그 사람의 마음을 돌이켜서 주님의 진리와 구원으로 인도하실 줄로 믿습니다.
다음 주일 행복 나눔 잔치를 준비하면서 우리가 마음에 품은 태신자를 위해서 기도하고 복음을 증거하되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증거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은 황제에게 상소를 해서 로마로 압송되어 왔습니다.
그러니까 황제에게 불려가서 재판을 받기까지 이제 기다려야 했습니다.
바울에게 아직 확정적인 죄가 없기 때문에 그에게는 어느 정도의 자유는 허락되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가택 연금 상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외부에서 오는 손님을 맞이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렇게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에 바울은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본문 30절 31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아멘, 바울은 자기에게 오는 모든 사람을 다 영접했다 환영했다고 말합니다.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상관없었습니다.
자기에게 오는 모든 사람을 환영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인종, 성별, 문화에 상관없이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을 줄로 믿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언제나 열린 마음을 가졌습니다.
로마서 10장 12절 13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아멘,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습니다.
유대인이든지, 헬라인이든지 차별이 없습니다.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상관없습니다.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주님께로 돌아오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열린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잃어버린 사람들, 지금도 죽어가는 그 영혼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이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복음을 증거하길 원합니다.
나와 배경이 다르고 출신이 다르고 성향이 다른 사람 교회에 와도 아무 상관없습니다.

 

초진자 때문에 예배 시간이 좀 힘들고 불편해도 아무 상관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기뻐하고 만족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비우고 복음을 내세우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성숙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누구든지 올 수 있는 곳입니다. 중산층 이상만, 대학 교육받은 사람 이상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은 누구든지 교회로 올 수 있습니다.
교회에는 주인이 없습니다. 담임 목사가 주인도 아니고 장로님들이 주인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교회의 주인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세상에서 지치고 힘든 사람들을 그 예수님께서 부르십니다.
마음의 힘이 없고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 주님께서 부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이 예수님의 심정으로 로마에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 다 환영하고 환대했습니다.
얼마 동안 그랬을까요? 

2년 동안이나 그렇게 했습니다.
황제의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바울은 절대 시간을 허투루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로마로 오기 전에 바울이 또 가이사리아에서 2년 동안 갇혀 있었습니다.
헤롯의 성 안에 죄수로 갇혀 있었는데 그때에도 바울은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자신을 찾아왔던 로마의 총독 벨렉스와 그의 아내에게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바울은 때를 얻든지 못얻던지 항상 복음을 전했습니다.
로마에 갇혔을 때에도 복음을 전했고, 가이사랴에 갇혔을 때에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지중해에서 유라굴로 광풍을 만났을 때에도 그때에도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바울은 자유를 박탈당한 죄수의 모습이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이 메이지 않고 전파되는 것으로 인해서 기뻐했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9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아멘. 바울의 고백입니다.
나는 죄인과 같이 매여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매어 있지 않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의 말씀이 증거되는 것으로 인해서 내가 기뻐하고 즐거워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갇혀 있을 때 썼던 편지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옥중 서신이죠. 

그 옥중 서신 중에 빌립보서가 있습니다.
여러분 나중에 집에 가셔서 빌립보서를 한번 읽어보십시오.
아주 짧은 서신서이기 때문에 금방 읽을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안에 담긴 바울의 심장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쁨입니다.
바울은 넘치는 기쁨과 감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빌립보서를 기쁨의 서신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로마에서 갇혀 있는 사람이 무엇이 기쁠까요?
2년 동안 아무것도 못하고 이동의 자유도 박탈당했는데 도대체 무엇이 기뻤을까요?
빌립보서 1장 18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아멘. 바울은 예수님이 전파되는 것으로 인해서 기뻐했습니다.
내가 갇혀 있든지, 내가 자유롭던지 상관없었습니다.
내가 성공하든지 실패하든지 상관없었습니다. 

내가 로마에 있든지 가이사랴에 있든지 상관없었습니다.
내 인생을 통해서 예수님이 전파되는 것으로 인해서 기뻐했습니다.
내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것으로 나는 기뻐하고 또 기뻐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백인 줄로 믿습니다.
바울의 인생의 목표는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온 세상에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2001년도에 미국에서 911 테러가 났을 때에 무역센터 건물과 충돌했던 첫 번째 비행기가 있었습니다.


그 비행기를 조종했던 기장이 타 맥케니스라는 사람인데, 그의 아내 셰릴 맥기니스는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듣고 큰 충격과 고통에 빠졌습니다.
사고 당시 남편의 나이는 42살이었고, 그에게는 10대의 아들과 딸이 있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혼란, 테러리스트를 향한 분노, 하나님을 향한 원망, 쉐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1년이 지나서 처음으로 뉴욕에 있는 무역센터가 무너졌던 그 그라운드 제로에 가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장소이고, 테러로 폭발된 현장에서 쉐릴은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때 그녀의 눈에 철골 잔해로 만든 십자가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녀의 마음속에 깨닫게 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악한 자들의 공격과 테러로 돌아가셨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녀가 느끼고 있는 고통과 슬픔을 하나님도 동일하게 당하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악한 자들을 용서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쉐럴에게는 두 가지 옵션이 있었습니다. 

악한 자들을 향한 증오와 원망에 사로잡혀서 평생을 증오하면서 살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용서와 회복을 선택할 것인지 그녀에게는 두 가지 옵션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그녀는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기로 결정했습니다.
지금은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주님께서 허락하실 그 용서와 회복의 은혜를 구하기로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그렇게 큰 고통을 이겨냈는지 책으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녀가 쓴 책 Beauty Beyond The Ashes라는 책, '잿더미 너머에 있는 아름다움'이라는 이 책은 미국에서 베스셀러가 되었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서 큰 용기와 위로를 얻게 되었습니다.
고통 가운데서 십자가를 바라보았던 그녀의 믿음이 예수님의 치유의 은혜를 전달하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그 이후로 그녀는 미국 전역을 다니면서 그녀와 비슷한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회복하는 사역을 섬기는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전파하기 위해서 우리가 꼭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 가운데 있지만 우리가 끝까지 신실한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볼 때 주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주님의 놀라운 사랑이 나타나는 줄로 믿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증거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행전의 결말은 매우 독특합니다.
초대교회의 역사가 어떻게 완성되었는지 어떤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이 로마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영화의 열린 결말과도 같습니다. 

그 이야기를 딱 종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인 것입니다.
본문 30절 31절 말씀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새 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옳은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아멘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가르친다는 이 말씀으로 사도행전이 끝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전파하다와 가르치다라는 그 단어가 헬라어 원어로 보면 현재 분사로 되어 있습니다.
영어로 하면 ing 형태이죠. 

지금도 이 일이 진행 중이다라는 뉘앙스를 주면서 사도행전이 끝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그 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단지 과거의 역사를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그 선교의 의미에 대해서 선포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경건주의 신학자 요한 벵겔은 사도행전의 결말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도행전은 교회의 원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
교회라면 이런 사역을 해야 한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이 증거하는 교회의 원형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선교적 사명이 바로 교회의 원형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선교를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선교적 교회 이런 캠페인과 어떤 이런 브랜드화하는 것을 비판하기도 합니다.
선교는 교회의 가장 중요한 본질인데 선교적 교회라는 것을 브랜드화하는 것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선교적 교회라는 표현은 마치 인간적 인간이라는 표현과 비슷하다고 주장합니다.
여러분 인간적 인간이라는 표현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요즘 세상에 워낙 비인간적인 사람이 많다 보니까 인간성이 있는 사람을 가리켜 인간적 인간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 말 자체가 약간 어폐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선교적 교회를 어떤 브랜드화, 어떤 프로그램화 할 수가 없다는 거죠.
선교는 교회의 원형이고 가장 중요한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선교를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은 열린 결말로 끝납니다.
로마에서 붙잡힌 상태에 있지만 여전히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 바울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끝을 맺습니다.
이것은 어떤 거대한 서사의 결론이 아닙니다.

아주 감동적인 이야기였어라고 말하기 힘든 결론입니다.


사도행전의 결말은 관객을 무대로 초청하는 이야기입니다.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썼는데 이 모든 이야기를 다 지금까지 지켜본 관객을 역사의 무대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완성되었는지, 그 복음이 어떻게 예루살렘과 안디옥과 로마까지 전해졌는지 지켜본 관객들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이 복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전히 소극적인 방관자로 남아 있겠습니까?
아니면 적극적인 참여자가 되어서 이 이야기에 동참하겠습니까?라고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놀라운 변화는 언제 일어날까요? 

역사를 바꾸었던 히스토리 메이커들은 언제 그런 결단을 내렸을까요?
어떤 사건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로 다가올 때입니다.
나는 그것과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까 이것이 나의 이야기였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그때 진정한 변화가 시작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행복하고 모두가 평안한 상태에서 복음이 한국으로 전해진 것이 아닙니다.
선교사님들께서 우리나라에 오기까지 수많은 고난과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자기 목숨을 걸고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 나라 조선을 향해서 왔습니다.
제가 대학생 때 정말로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이 있습니다.
닥터홀의 조선 회상이라는 책입니다. 

미국의 젊은 선교사 커플이 미국에서 약혼을 하고 실제 결혼은 선교지에 가서 하기로 했습니다.
그 선교지가 바로 조선이었습니다. 

1885년 여자 선교사였던 로제타홀 여사가 먼저 조선에 와서 당시 사회에서 소외받던 여성들을 진료하는 의료 사역을 섬겼습니다.
그러다가 1892년 남편 윌리엄홀이 와서 조선에서 결혼을 하고 그다음 해에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들의 아들 샤우드홀은 조선 땅에서 태어났던 최초의 서양인이었습니다.
이렇게 세 사람이 새 가족이 평안하게 행복하게 의료 선교를 감당하고 있었는데, 그만 1년 뒤에 남편이 말라리아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큰 슬픔을 당한 로제타 홀과 그의 아들은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남편이 묻혀 있는 그 조선을 잊지 못하고 얼마 뒤에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로제타홀은 남편을 기념하는 그 병원을 평양에 세우고 시각장애인을 위한 최초의 맹아학교를 설립했습니다.
그렇게 일평생 조선 사람들을 섬기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제가 대학생 시절 이 책을 읽으면서 너무너무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정말로 대단한 선교사님이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마치 저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인 것처럼 제가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서울 양화진에 가면 외국인 선교사 묘지가 있는데 거기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가니까 윌리엄 홀 선교사님의 묘비가 있었습니다.


닥터홀의 조선 회상에 나오는 바로 그 선교사님이었습니다.
사진에 보는 것처럼 양화진에 가면 윌리엄 홀과 그의 가족을 기념하는 묘비가 있습니다.
이 묘비 앞에 서는 순간 책에서 읽었던 그 이야기가 저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이야기고 바로 저의 이야기였습니다.
이분들이 목숨을 바쳐 전한 복음으로 인해서 우리나라가 살아나고 우리 조상이 살아나고 또한 제가 살아났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저는 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시작된 선교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인 것을 깨닫는 순간 저는 선교사로 살기로 헌신했습니다.


복음에 빚진 자로서 제가 할 수 있는 부분에서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 다짐을 지키기 위해서 미국에서 7년을 공부하고, 아프리카 부룬디에서 6년 동안 선교사로 사역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짐을 이어가기 위해서 대구 동신교회로 왔습니다.
대구에 아무런 연고가 없는 제가 동신교회에 온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 선교적 교회를 섬기기 위해서였습니다.
복음으로 사람을 살리고 키우고 지는 이 생명 사역을 통해서 대구 지역과 세계 열방에 잃어버린 영혼이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양화진에 있는 윌리엄 홀 선교사님의 묘비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라는 뜻입니다.
로마서 14장 8절 말씀이죠. 

이 말씀은 고 이정훈 선교사님의 장례식에서 제가 읽었던 말씀이었습니다.
선교사로 헌신하는 사람은 내가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며 살아갑니다.
선교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 이정훈 선교사님 역시 그러한 마음으로 선교사로 헌신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주님을 바라보며 신실하게 믿음을 지키셨습니다.
그 모습으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를 목도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어둠을 밝히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내려놓는 그 희생이 필요합니다.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으면서 어둠을 밝힐 수는 없습니다.
제임스 켈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초가 타들어가고 있어도 어둠을 밝히고 있으면 결코 초를 잃는 것이 아니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러분은 사도행전에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 모든 이야기를 다 들으셨습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단어는 헬라어로 아코르토스인데 그 뜻은 거침없이, 방해없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매이지 않고 거침없이 방해 없이 전파되어 왔습니다.
이 사도행전의 열린 결말은 여러분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소극적인 방관자로 살아가겠습니까? 

아니면 적극적인 참여자가 되어서 이 복음의 이야기에 동참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영광스러운 역사의 무대로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나라와 뜻이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는 데 귀하게 쓰임 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한 번뿐인 인생,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기억되는 하나님의 선한 뜻과 계획을 위해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G0Oor5UfKC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