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나눔 잔치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어떤 분은 예전에 교회에 다니시다가 정말 오랜만에 교회에 오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분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교회에 오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사실 어느 장소에 처음 가면 모든 것이 어색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제가 드리는 말씀을 들으시면 되겠습니다.
어려운 이야기, 심각한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찾고 있는 행복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모든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오늘보다 더 행복한 내일을 꿈꾸며 살아갑니다.
지금은 힘들어도 앞으로 더 나아질 것이라는 소망이 있으면 우리가 견딜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행복을 추구한다는 사실이 말해주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 모두가 행복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찾습니다.
예를 들어서 하늘을 나는 호랑이를 찾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찾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행복을 추구한다는 사실은 행복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도 있지만 또 한 가지는 우리가 현재의 삶에서 행복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의 삶에서 뭔가 부족함을 느낍니다.
공허함도 느낍니다.
그래서 돈이든 성공이든 관계이든 무언가가 우리의 마음을 채워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무언가를 더 얻어서 우리가 더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17세기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려 하지만 정욕으로 인해 비참함에 빠지게 되었고, 비참함이 결국 제2의 본성이 되었다"
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이 정욕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정욕이란 즉각적인 쾌락을 탐하는 잘못된 욕구를 뜻합니다.
우리가 즉각적인 쾌락을 찾아갈수록 행복과는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여러분 즉각적인 쾌락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알콜, 마약, 도박, 성적인 문란 등이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마약을 왜 할까요?
마약을 하면 뇌에서 엄청난 양의 도파민이 나와서 쾌락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정상적인 쾌락, 긍정적인 쾌락이 아니라 파괴적인 쾌락입니다.
도박도 마찬가지이고, 성적인 문란도 마찬가지입니다.
즉각적인 쾌락을 추구하게 되면 행복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게 되고 우리의 삶은 파괴되게 됩니다.
성경은 이것을 가리켜 '죄'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그 죄가 우리를 망치고 우리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 정욕, 잘못된 욕구는 무엇이 진짜 행복인지 우리의 시야를 가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짜 행복과 가짜 행복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행복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만약에 행복이 소유에 달려 있다면 요즘처럼 풍족한 시대를 살아가는 어린이들은 과거보다 훨씬 더 행복해야 할 것입니다.
요즘은 먹을 것도 너무나 풍족하고 학습 환경도 훨씬 더 좋습니다.
그러면 요즘 아이들은 과거의 아이들보다 훨씬 더 행복할까요?
아이들한테 물어보면 아마 아니라고 답할 것입니다.
통계로도 나와 있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에서 발표한 어린이 청소년 행복지수에 따르면 2021년 기준으로 대한민국은 OECD 22개국 중에서 22위 꼴찌에 해당합니다.
아마 어르신들은 잘 이해가 안 될 거예요.
예전에 비하면 이렇게 세상에 살기 좋아졌는데 왜 요즘 아이들은 행복하지 않을까요?
예전에는 우리가 학비 내지 못하면은 교무실로 불려가기도 했는데, 요즘은 다 공짜라서 학비 걱정도 없는데 왜 요즘 아이들은 행복하지 않을까요?
성경은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을 줍니다.
우리의 행복이 소유에 달려 있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전도서 5장 10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아멘.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은을 사랑하는데 은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풍요를 사랑하는데 소득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에 동의하십니까?
이번 달에 월급이 오르면 기분이 좋습니다.
그러면 그 좋은 기분이 얼마나 갈까요? 딱 한 달 갈 것입니다.
새로운 자동차를 사면 기분이 좋죠?
여러분 그 좋은 기분이 얼마나 갈까요?
3개월 길어야 6개월 갈 것입니다.
새 차를 산 지 1년이 지났는데 지금도 운전할 때마다 가슴이 설레는 경우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가졌을 때 기쁨이 있는데 그 기쁨이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나니아 연대기라는 소설을 쓴 영국의 유명한 작가 C.S 루이스가 있습니다.
옥스퍼드 대학의 영문학 교수이기도 했던 그는 원래 무신론자였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행복의 의미가 무엇인지 오랫동안 고민하고 성찰하다가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C.S 루이스 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이 고백은 아주 솔직한 고백입니다.
우리 안에 행복해지고 싶은 갈망이 있죠?
그 갈망을 위해서 돈을 추구하고 명예를 추구하고 사랑을 추구합니다.
그렇게 노력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가졌습니다.
그러면 영원히 행복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평생 동안 목표로 세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면 영원히 행복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골프 선수 박세리 선수는 만 21세의 나이에 us 오픈 대회에서 우승했습니다.
그러니까 평생의 목표를 20대 초반에 이루었습니다.
그럼 인생의 목표를 이루었으니깐 행복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허탈감으로 인해서 오랜 기간 슬럼프를 겪기도 했습니다.
우리 안에 어떤 갈망이 있는데 그 갈망은 이 세상의 것들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 이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것으로 우리의 갈망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만족하는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무언가를 끊임없이 원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 맞게 창조된 것이 아니라 다른 세상에 맞게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 그 다른 세상, 영원한 세상에서의 행복을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지금 현실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지 다른 세상이 주는 만족과 기쁨을 느낄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33장 29절 함께 읽겠습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아멘. 성경이 말하는 행복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구원을 다른 말로 설명하면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그 사랑을 받을 때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제가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으로 답을 하시면 되겠습니다.
여러분을 가장 사랑해 주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 세상에서 여러분을 가장 위해주고 여러분을 가장 생각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
대부분 우리의 가족일 것입니다.
부모님이 그런 분이시고 어떤 배우자가 그런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세상에서 여러분이 가장 아끼고 가장 지켜주고 싶은 가장 사랑하는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
우리의 목숨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
대부분 우리의 자녀들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주고 또 주고, 또 주어도 아깝지 않은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을 때 행복을 느낍니다.
혼자서 호의호식하면 좋을 것 같지만 생각처럼 행복하지 않습니다.
제가 예전에 아프리카 선교회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벨기에를 혼자서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벨기에가 한국에서는 그렇게 유명하지 않지만 유럽연합 EU의 본부가 벨기에 있습니다.
벨기에 초콜릿이 유명하고 벨기에 와플도 유명합니다.
정말로 근사하고 멋진 도시를 제가 혼자서 돌아보는데 하나도 즐겁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곳을 떠나면서 한 가지 결심했습니다.
다음에는 가족하고 같이 와야겠다라고 다짐을 했습니다.
혼자서 여행하는 것이 그렇게 즐겁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기쁨을 나누기 원하고 사랑을 나누기 원하고 또한 사랑을 받기 원합니다.
요즘 청년들이 결혼을 안 하는 것이 사회적인 문제라고 하지요.
여기에는 아주 복잡한 이유들이 많기 때문에 우리가 청년들에게만 뭐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청년들이 결혼을 안 한다고 해도 연애하기 싫은 청년은 없을 것입니다.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하는 것 모든 청년들이 다 로망이겠죠.
우리는 사랑을 받기 원하고 사랑을 하기 원합니다.
위에서 읽었던 신명기 말씀을 다시 한 번 보면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그는 하나님은 너를 돕는 방패이시다.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지키는 방패라는 뜻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방패는 전쟁과 재난 가운데 우리를 지켜주는 보호자를 뜻합니다.
어떤 위기와 고난이 다가와도 끝까지 우리와 함께하면서 우리를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한 보호자가 되겠다.
방패가 되겠다 말씀하십니다.
사실 이 말씀은 아주 오래전에 하나님께서 주셨던 약속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민족의 조상이 있는데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이러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15장 1절 함께 읽겠습니다.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라함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내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너의 상급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위기와 고난이 다가와도 함께하면서 끝까지 지켜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430년 전에 주셨습니다.
내가 방패와 같이 너를 지키겠다고 약속하시고 하나님께서 430년 동안 이 약속을 기억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해방하시면서 그 약속을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왜냐하면 너의 하나님께서 그 오래전 약속을 기억하시고 너를 영원히 사랑하시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어려서부터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은 건강한 자존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이 건강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을 배려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사랑을 할 수 있다.
사랑을 줄 수 있다는 이 말은 정말로 사실입니다.
하물며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사랑을 받은 줄로 믿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 마음의 중심이 견고합니다.
웬만한 고난과 시련 앞에서 넘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붙잡아주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믿기 때문입니다.
시편 121편 7절 8절에 이런 약속이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란을 면하게 하시며, 또 내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혼까지 지키시리로다.
아멘.
우리의 발걸음을 지키시되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는 그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 안에 거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행복은 무언가를 많이 얻는 것이 아닙니다.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행복은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소심하고 나약했던 사람이 변화해서 건강한 자존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나만 알던 이기적인 사람이 변화해서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포기했던 사람이 변화해서 미래에 대한 소망과 비전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는 것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행복입니다.
미국의 리더십 전문가 더그파이어 보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이 말 아주 중요한 말이죠.
분야를 막론하고 최고 수준의 성취를 이룬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되는 것,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자기 정체성에 따라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변화에 대한 두 가지 접근이 있습니다.
첫째는 결과 중심의 접근이고, 둘째는 정체성 중심의 변화입니다.
결과 중심의 변화는 내가 얻고 싶은 구체적인 결과를 중심으로 계획하고 실천합니다.
예를 들어서 날씬해지고 싶다라는 결과를 세워놓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매일 식단을 하고 운동을 하는 그 과정을 이제 실천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 행동을 변화시킵니다.
그에 반해서 정체성 중심의 변화는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됩니다.
궁극적으로 내가 되고 싶은 그 모습을 분명하게 그려놓고 그 정체성을 강화할 수 있는 작은 단계들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하루에 내가 30분 독서하겠다라는 것은 결과 중심의 변화이고, 내가 책을 좋아하는 독서가가 되겠다라는 것은 정체성 중심의 변화입니다.
다음에 노표를 보시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과 중심의 변화와 정체성 중심의 변화가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많은 사람들은 결과 중심적으로 생각합니다.
매일매일 확인하고 체크할 수 있는 결과를 생각하는 것도 좋지만 더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정체성입니다.
왜냐하면 정체성이 바뀌지 않으면 지속적인 변화, 장기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자기 정체성에 맞게끔 행동합니다.
내가 누구이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그 인식이 나의 말과 나의 행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줍니다.
여러분 왕자와 거지 이야기 아시죠?
외모가 거의 비슷한 왕자와 거지가 서로 옷을 바꿔 입고 다른 역할을 하며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허름한 옷을 입어도 왕자는 왕자처럼 행동하고, 아무리 화려한 옷을 입어도 거지는 거지처럼 행동합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의 옷이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정체성이 행동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왕자처럼 행동하면 왕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왕자이기 때문에 왕자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정체성이 이 정도로 중요한데 성경은 이 사실을 강력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런 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리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아멘,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라고 선포합니다.
과거의 모습과 상관없이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얻었기 때문에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새해가 될 때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님들께 이렇게 질문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의 모습에 100% 만족하십니까라고 질문합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새해가 되었다고 새로운 결심 다짐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여러분의 모습에 100% 만족하지 못한다면 변화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받은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변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변화를 원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내가 이런 식으로 살면 안 되는데 분명히 이것보다는 더 나은 삶이 있을 텐데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안타깝게도 새로운 시작을 할 용기가 줬고 그러하여 내면의 힘도 적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 가운데로 오셨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나 스스로의 힘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그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행복은 무언가를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행복은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정체성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얻을 줄로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받게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영원한 그 사랑이 우리 마음 가운데 굳건한 소망을 줄 줄로 믿습니다.
이 소망을 가진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것은 일시적인 행복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입니다.
이 땅에서의 행복만이 아니라 천국까지 이어지는 행복입니다.
행복의 시작이자 완성되신 그 예수님을 만나서 지금부터 영원까지 참된 평안과 기쁨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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