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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대원목사 설교

크리스천의 윤리 (2)_규칙 없는 게임_24.11.03

by 마이코 2024. 11. 6.




크리스천의 윤리라는 주제로 시리지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올바른 선택을 하기 위한 체계적인 기준을 가리켜서 윤리라고 부릅니다.
윤리는 고리타분한 주제가 아니라 현실 사회에서 지혜로운 선택, 올바른 선택을 내리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기준입니다.
분명한 기준이 있어야지 우리가 일관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일관된 인생이란 방향이 분명하고 목적이 분명한 인생입니다.
일관된 기준이 없으면 우리는 혼란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되고, 또 다른 사람 눈치를 살피면서 다른 사람 많이 가는 길로 따라가게 됩니다.
동신교회 성도라면 다 알고 있는 도표가 있습니다.


바로 삼중 시각 도표입니다. 

규범, 상황, 실존이라는 3중 시각을 가지고 있어야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권성수 원로 목사님께서도 이 도표를 가지고 여러 차례 강조하셨습니다.
이 중에 하나라도 없으면 우리는 한쪽으로 치우친 관점을 갖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규범만 강조하는 사람은 바싹 마른 율법주의자가 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이해와 공감 없이 규칙만 강조하는 사람은 꽉 막힌 원칙주의자 같습니다.


반대로 상황만 강조하는 사람은 '좋은 게 좋은 거지'라고 말을 할 것입니다.
'누구나 다 잘못할 수 있잖아'라고 하면서 그냥 아무 기준 없이 무조건 이해하고 용서하라고 말합니다.
낙태도 괜찮고 동성애도 괜찮으니까 그냥 다 사랑하고 용서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언뜻 들으면 좋을 것 같지만 분명한 기준이 없으면 이 사회는 제대로 작동할 수 없습니다.
특별히 다음 세대 아이들에게는 아주 큰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삼중 시각이 필요합니다. 

규범도 갖추어야 하고, 상황도 살펴야 하고, 실존도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3중 시각을 골고루 갖출 때에 우리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온전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오늘부터 3주 동안 규범, 상황, 실존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규범에 대해서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께 한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시작하겠습니다.
여러분 어떤 게임을 하는데 규칙이 없으면 어떨까요?
규칙이 없으면 게임이 더 재미있어질까요? 아니면 그 반대일까요?
예를 들어서 축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축구를 하다 말고 손으로 그 공을 들고 막 뛰어가면 어떻게 될까요?
골프를 치는데 티샷 잘못됐으니까 무효로 하고 다시 친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모든 스포츠에는 규칙이 있습니다. 

그 규칙을 지키면서 게임을 해야 합니다.
아무리 게임에서 이기고 싶어도 규칙을 어기면 소용이 없습니다.
어린아이들, 유치원 아이들 같은 경우는 공놀이를 할 때 규칙이 없습니다.
공을 던져주면 공을 잡기 위해서 다 같이 뛰어갑니다.
그렇게 하면서도 그들은 너무너무 즐거워합니다.
왜냐하면 아직 어리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들면 그런 식으로 게임하면 재미없다는 것을 알게 되죠.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어도 게임의 규칙이 없으면 재미가 없습니다.
정해진 규칙이 있어야지 더 높은 차원의 즐거움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규칙이 있어서 답답한 것이 아니라 규칙이 있어서 더 유익하고 즐겁습니다.
스포츠에 규칙이 있는 것처럼 우리 사회에도 규칙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규범'이라고 부릅니다. 

규범은 우리를 구속하고 우리를 답답하기 위해서 하게 만들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규범은 우리를 지켜주고 더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여러분 규범이 없는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요? 

규범이 없는 사회를 알기 원하는 분이 계시다면 동물의 왕국을 보면 됩니다.
아프리카 초원에 사는 동물들에게 규범이 없습니다.
말 그대로 약육 방식입니다. 

그런 세상은 행복한 세상일까요?
최상위 포식자인 사자나 호랑이에게는 행복한 세상일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동물들은 하루 종일 공포에 떨면서 살아야 합니다.
동물의 왕국은 절대로 행복한 세상이 아닙니다. 

규범이 있는 인간 사회가 훨씬 더 안전하고 행복한 세상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인간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서 규범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최고의 규범은 그분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 율법을 지키는 자에게 큰 복이 있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시편 119편 1절 2절 함께 읽겠습니다.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으며,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아멘.

성경에서 복이 있다라고 하면 여러분 어떤 구절이 생각나십니까?
아마 많은 사람들은 시편 1편을 떠올릴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한다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이 있다는 것은 돈이 많은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자녀가 잘 된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이 있는 사람은 악인의 생각을 따르지 않고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그 율법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면 다른 모든 복은 다 그것을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고 그 율법대로 행하면 복을 받을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그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오늘 본문 6절 7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에는 정직한 마음으로 주께 감사하리이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면 먼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의 공의로운 판단을 배우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빨리 성공하고 빨리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빨리 성공할 수 있는 길을 찾아갑니다.
그 과정에서 올바르지 않은 길, 악한 길로 행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성공한 사람은 마음이 어떨까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한 길로 가서 성공했는데 마음이 평안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언젠가 그 사실이 드러나게 되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고 수치를 당하기 때문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에서 장관 추천을 해도 고사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고 합니다.
능력이 없어서 스펙이 부족해서 고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사청문회에 올라가면 망신당할 일이 너무나 많아서 고사하는 것입니다.
빨리 성공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한 길로 행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보고 배워야 합니다. 

지금까지 있었던 수많은 사례를 보고 우리가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올바르지 않은 방법으로 성공하면 반드시 언젠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고 수치를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배워야 합니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지난 특새부터 제가 자꾸 인간과 동물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에 동물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입니다.
동물은 자기가 직접 경험해 봐야지 배우게 됩니다.

불에 가까이 가면 화상을 입는다는 것을 직접 당해봐야지 배웁니다.
하지만 인간은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도 배울 수 있습니다.
역사를 통해서도 배울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사례를 통해서도 배울 수 있습니다.
나쁜 일을 직접 당해봐야지 배운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다운 것이 아닙니다.
직접 당하지 않고 이것이 나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올바르지 않은 방법으로 성공하면 반드시 부끄러움을 당하고 수치를 당합니다.
인류 역사가 이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또한 주님의 말씀을 따를 때에 우리는 의로운 판단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인생을 살면 살수록 판단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회사에서도 판단력이 중요하고 대인 관계에서도 판단력이 중요합니다.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어떠한 결과가 나올지 미리 예측하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좋은 판단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판단력을 가르쳐주는 무슨 학원 같은 게 있을까요?

주님의 말씀을 따를 때에 좋은 판단력을 배우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시편 111편 10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

 

아멘.

주님의 계명을 지킬 때에 훌륭한 지각, Good Understanding을 가지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주변에 보면 이해력이 빠른 사람이 있습니다. 

상황 판단이 빠르고 이해력이 빨라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금방 배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회사에 이런 사람 한 사람 있으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우리 교회에도 이렇게 이해력이 빠른 교역자분들이 계십니다.
그런 분들이 계시니까 우리 교회가 이렇게 많은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렇게 훌륭한 이해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할 때 얻게 됩니다. 

이러한 이해력은 책에서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 생활, 현실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규범을 지켜 행할 때 배울 수 있습니다.


예전에 제가 팀 켈러 목사님의 강연을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절대적인 규범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한데, 우리 인생에서 순종을 배우는 가장 첫 번째 단계가 부모님께 순종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에베소서 6장 2절 3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내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아멘. 여러분 부모님께 순종하는 것과 이 땅에서 잘 되는 것 사이엔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부모님께 순종하면 유산을 많이 받으니까 이 땅에서 잘 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님께 순종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권위 어서러티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는 권위가 있고 질서가 있고 법률이 있습니다.
사회에서 정한 질서와 법률을 지키지 않으면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자동차를 운전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교통법규를 잘 지켜야 합니다.
신호도 지켜야 하고, 차선도 지켜야 하고, 일방 통행도 잘 지켜야 합니다.
모든 차가 법규를 지키고 있는데 딱 한 대가 지키지 않으면 금방 사고가 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아프리카 부룬디에 있을 때 화가 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사실 제가 웬만해서 잘 화를 내지 않는 성격인데 도저히 화를 참을 수 없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브룬디는 너무 가난해서 그 나라에 신호등이 없습니다.
제가 있던 그 마지막 해에 이제 막 신호등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나라 전체의 신호등이 한 10개도 안 됐습니다.
여러분 사거리에 신호등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작은 사거리가 아니라 큰 사거리인데 신호등이 없으면 서로 먼저 가겠다고 차가 뒤엉키게 됩니다.
그러면 수십 대의 차량이 사거리에 이제 엉키면 오도가도 못하고 정말 수십 분 동안 갇혀 있게 됩니다.
사람들은 막 크랙션을 울리고 시끄럽고 정말로 답답한 상황입니다.

 

사회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질서와 법률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사람이 어디에서 그 질서와 권위에 순종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요?
부모님께 순종함으로써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님께 순종하면 이 땅에서 잘 된다는 그 약속의 의미는 권위에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지 우리가 이 땅에서 잘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순종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이 사회의 정상적인 일원이 될 수도 없고, 이 땅에서 잘 되기도 힘들 것입니다.
제가 미국 보스턴에 있을 때에 MIT 연구원으로 오시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하버드 MIT 연구원으로 오시는 분들은 정말 한국 최고의 엘리트들입니다.
이분에게는 어린 자녀가 있었는데 너무너무 똑똑했습니다.
아주 어린 나이였는데 한글도 잘하고 영어도 잘하고 수학까지 잘했습니다.
누가 봐도 천재 아니면 영재 같다고 이야기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모가 그 아이를 너무너무 사랑해서 훈육을 하지 않았습니다.
부모의 말에 순종하는 법을 가르치지 못한 것입니다.


그 아이가 4살, 5살쯤 됐는데 머리는 너무너무 좋은데 행동은 자기 마음대로 했습니다.
한 번도 유치원에 갔는데 미국 친구 머리에다가 요거트를 뿌렸다고 합니다.
선생님이 아무리 말을 해도 통제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아이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미국 유치원에서 쫓겨났습니다.
유치원 선생님이 도저히 통제가 안 되니까 도저히 받아줄 수가 없다고 그 아이를 내보냈습니다.
여러분 머리가 아무리 똑똑하면 무엇할까요? 

권위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는데 그 아이가 제대로 학교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아이가 선생님에게 순종하고 이 사회의 질서와 규칙을 따를 수 있을까요?

이 땅에서 잘 되기 위해서는 권위에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질서와 규칙을 잘 지켜야지 이 땅에서 잘 되고 형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할 때에 우리는 탁월한 판단력을 얻게 되고, 또한 귀한 지혜를 얻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두 가지 종류의 규범을 주셨습니다.
첫째는 우리 마음에 새겨진 규범, 일반 계시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새겨진 규범, 특별 개시입니다.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 안에 규범을 새겨놓으셨습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도덕적인 판단 능력, 도덕법이 있습니다.
누구에게 배운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선험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2장 14절 15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아멘. 율법을 전혀 모르는 이방인도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본성으로 성경의 가르침을 행할 수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해라, 이웃을 돌보라는 명령을 들어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본성적으로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든 사람의 마음 안에는 도덕법이 있습니다.
이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지요. 

바로 우리가 누군가와 논쟁을 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논쟁이 무엇입니까? 논쟁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다툼입니다.

내가 옳고 너는 틀렸다라는 것을 가리는 게 논쟁인데 이것을 위해서는 공통의 기준이 필요합니다.
양쪽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도덕적인 기준이 없으면 우리가 논쟁을 할 수 없습니다.
비유를 들자면 두 팀이 경기를 하기 위해선 규칙이 똑같아야 합니다.
한 팀은 야구 규칙을 따르고 한 팀은 축구 규칙을 따르면 이 두 팀이 경기를 할 수가 없겠지요.
마찬가지로 두 사람이 논쟁하기 위해서는 서로 공유하는 규칙이 있어야 합니다.
그 규칙은 우리 마음에 새겨진 도덕법입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 가운데 도덕법이 있기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 중에서도 도덕적인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지 않지만 너무너무 착하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경우가 있습니다.
어떻게 신앙이 없는데도 이렇게 도덕적일까라고 놀라실 필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 마음 안에 양심이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인간과 동물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진화론자들은 인간의 이기심에 집중합니다.
자기 유익을 구하는 이기심이야말로 진화 과정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이기심에 집중하면 인간과 동물 사이에 큰 차이가 없습니다.
인간도 자기 유익을 구하고, 동물도 자기 유익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인간과 동물의 가장 큰 공통점이 바로 이기심입니다.
그래서 영국 진화론자 리차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DNA 또는 유전자에 의해 창조된 생존 기계이며, 자기의 유전자를 후세에 남기려는 이기적인 행동을 수행하는 존재이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책을 쓸 당시에 킨스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무신론자였습니다.
무신론자가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면서 인간의 존재를 설명하려면 진화론밖에 없겠죠.
진화의 과정은 더 좋은 유전자가 후대에 전해지게 하기 위해서 그 유전자가 이기적인 방법으로 살아남기 위한 선택을 했다는 주장을 하게 됩니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입니다.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많이 있는데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이기적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안에 이기심이 어느 정도는 있습니다. 

생존을 위해서 이기적인 선택을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100% 이기적인 존재는 또 아닙니다.
그렇죠 우리 안에 이타적인 사랑도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 안에 선한 양심도 있고, 또 힘든 사람을 보면 도와주고 싶은 그런 이타심도 있습니다.
그런데 더킨스에 따르면 원래 이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는 인간을 유전자에 의해 창조된 생존 기계라고 보았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이타적인 사랑, 양심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을 지적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프랜시스 콜린스라는 과학자입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시도된 게놈 프로젝트를 지휘했던 그는 인간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31억 개의 유전자 서열을 밝혀냈습니다.

그는 원래 무신론자였는데 인간의 복잡성을 연구하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믿게 됐습니다.
콜린스 가 신의 언어라는 책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도킨스는 이기적인 유전자를 가지고 인간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했습니다.
이기적인 유전자를 놓고 보면 인간이나 동물이나 큰 차이가 없습니다.
인간도 동물 중에 하나입니다. 

하지만 콜린스는 인간에게 있는 양심의 목소리에 집중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든 사람에게는 양심이 있습니다. 

누구에게 배운 적이 없어도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선엄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양심을 놓고 보면 인간과 동물은 완전히 다른 존재입니다.
인간은 동물 중에 하나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마음에 양심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 새겨진 그 도덕법이야말로 하나님의 창조를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또 다른 규범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새겨진 규범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율법과 계명, 그리고 율법의 완성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주신 그 규범을 가리켜 특별 계시라고 부릅니다.
타락 이전의 인간은 원래 일반 계시만으로도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담의 범죄로 인해서 인간은 타락하게 되었고, 일반 계시를 왜곡해서 거짓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인간이 범죄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에 우상을 숭배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숭배하는 최고의 우상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사탄이 하와를 유혹할 때 했던 말이 있습니다. 창세기 3장 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기에 우상숭배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우상숭배는 어떤 형상을 만들어서 거기에 절하고 숭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과 같이 되어서 내 마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든 그 형상은 내 뜻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진하지 않습니다.
우상숭배의 핵심은 내가 하나님과 같이 되어서 내 마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21세기 포스트모던 사회에는 절대적인 기준을 잃어버린 사회입니다.
절대적인 기준, 절대적인 진리가 없으니까 그냥 내 마음대로 기준을 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현대인들이 주장하는 것이죠. 

당신은 당신 기준대로 살고 나는 내 기준대로 살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당신의 기준을 저에게 강요하지 마세요라고 이야기합니다.
내 기준을 내 마음대로 정하겠다는 그 생각이 끝까지 가면 어떻게 되는 줄 아십니까?
내가 남성인지 내가 여성인지 내가 결정하겠다고 말하게 됩니다.

 

불과 며칠 전에 독일 정부는 성별 자기결정법을 발표했습니다.
법원의 허가 없이 자기 성별을 스스로 바꾸어서 등록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 가운데 도덕법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타락한 인간이 그 도덕법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계속될 때 인간의 양심은 점점 무대어져서 나중에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개인의 도덕법이 무너지면 어떻게 되는지 우리가 범죄자들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사회의 도덕법이 무너지면 어떻게 되는지 우리가 피스주의에 빠진 유럽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지난 파리올림픽 개막식을 보셨나요? 

수많은 사람들이 그 개막식을 보면서 기괴하다고 느꼈습니다.
멋지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이상하고 기괴하다고 느꼈습니다.
국제올림픽위원회에서도 그러한 비판을 받아들여서 개막식 영상을 홈페이지에서 내렸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일반 개시만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아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을 통해서 더 완벽한 가장 완벽한 규범을 주셨습니다.
무지와 어둠 가운데 있는 우리를 안내할 진리의 빛을 주셨습니다.
시편 119편 15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오 내 길에 빛이니이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 됩니다. 

내 발의 등이라는 것은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보여준다는 뜻입니다.
내가 지금 안전한 곳에 서 있는지 아니면 위험한 곳에 서 있는지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내가 지금 죄를 짓고 있는 것을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설 때에 우리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말씀을 거울 삼아서 나 자신을 바라볼 때 내가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지 아니면 잘못 살고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지금의 내 모습을 객관적으로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말씀은 내 길에 빛이 됩니다.
이 말은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 방향을 분명하게 보여준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인생에서 속도보다 중요한 것이 방향입니다.
아무리 빨리 가도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으면 헛수고입니다.
그러면 내가 가는 방향에 대해서 누가 확인해 줄 수 있을까요?
우리 교회가 가고 있는 그 방향이 올바른지 아닌지 누가 확인할 수 있을까요?
우리나라가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지 누가 말해줄 수 있을까요?
오직 주님의 말씀만이 그것을 확실하게 말해줄 수 있습니다.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이 옳은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향인지 말해주는 유일한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에는 하나님의 뜻과 성품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십계명 중에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을까요?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하면 더 빨리 돈을 벌고 더 빨리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기계가 아닙니다.

기계도 쉬지 않고 돌리면 망가지게 되죠. 하물며 사람이 쉬지 않고 일하면 반드시 문제가 생깁니다.
수면이 부족하게 되면 뇌의 인지 능력이 저하되고 치매의 위험이 늘어나게 됩니다.
잠 안 자고 밤새 동안 일하면 우리의 몸과 우리의 마음이 상하게 됩니다.
이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식, 참된 안식을 주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하루는 일을 멈추고 온전한 쉼을 가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일을 멈출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책임지고 인도하시고 공급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은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노력을 멈추는 날이고, 하나님이 하나님 되게 하시는 날입니다.
세계적인 영성신학자 마르바 던은 '안식'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대인들은 온전한 쉼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끊임없이 일하면서도 끊임없이 염려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진정한 자유를 얻을 때에만 우리는 온전한 쉼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유익과 행복을 위해서 안식일을 지켜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타락한 인간은 일반 계시만으로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특별 계시가 필요합니다.
그 특별 계시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우리의 유익과 행복을 위해 주신 그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지켜 행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규범에 대해서 생각할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아주 중요한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 규범은 인격적이다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규범은 딱딱한 문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말씀 인격적인 말씀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 6절부터 8절까지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오,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아멘.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으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그 새 언약은 딱딱한 율법 조문 레터, 텍스트가 아닙니다.
새 언약은 성령께서 주시는 살아있는 말씀, 인격적인 말씀입니다.
여러분 기독교 규범은 인격적입니다. 

기독교 규범이 인격적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규범을 주신 하나님께서 인격적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딱딱한 율법 규정을 신봉하지 않습니다. 

613개의 계명을 받들었던 바리새인들처럼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 하나님은 인격적이신 분이십니다.
성경을 절대적인 규범, 절대적인 진리로 믿고 따르는 것 중요한 일이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고 성도가 마땅히 해야 하는 도리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율법 규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믿는 이유는 성경을 통해서 그 인격적이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말씀을 사랑한다 하는 것은요. 성경 책, 그 텍스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딱딱한 율법 규정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유익과 행복을 위해 그 규범을 주신 인격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JYP가 성경을 가르치는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다고 합니다.
물론 누구든지 성경을 읽을 수 있고 성경을 연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JYP의 성경 해석은 우리가 상당히 조심해야 합니다.
그가 예전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기 때문이지요. 

'나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믿는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종교로서의 기독교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는 성경책을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성경 책이 너무나 확실한 진리이고 그 성경책에 담긴 비밀을 내가 깨달았기 때문에 그것을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발언입니다.

여러분 성경 책 자체에 신성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책 자체에 어떤 비밀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성경책이 게시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그런데 JYP는 정반대로 인격적인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비인격적인 성경책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그 성경 책에 담긴 비밀을 깨달았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2천년 전에 초대교회에 있었던 영재주의 이단의 주장과 매우 비슷합니다.
그들은 성경에서 영적인 비밀을 깨달았다고 주장하면서 그 영적인 지식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지금도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죠. 바로 구원파 이단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담긴 어떤 신비로운 비밀은 없습니다.
내가 성경에서 비밀을 발견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위험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그분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동일하시기 때문에 성경에 담긴 진리 역시 동일한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담긴 최고의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오랫동안 감추어 주었던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이 마침내 말세에 드러났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율법 조문으로 온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을 통해서 왔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규범은 인격적입니다. 

그 규범을 주신 하나님께서 인격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책을 읽다가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진짜 살아계신 인격체가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말씀 읽다가 눈물을 흘리게 되죠.
저는 설교 준비하다가 눈물을 흘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얼마 전 사도행전 마지막 설교를 준비하면서도 제가 펑펑 울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우리는 주님의 소유라는 그 로마서 말씀 앞에서 제가 너무너무 많이 울었습니다.

 

여러분 AI가 작성한 글을 보면서 눈물을 흘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비인격체가 작성한 글에는 아무런 감동이 없습니다.
하지만 인격적인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읽으면 감동이 있습니다.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규범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 규범을 주셨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규범을 주셨습니다.
그 규범은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규범은 우리를 지켜주고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 1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아멘. 우리를 온전하게 하고 성숙하게 하는 그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선한 열매, 아름다운 열매를 많이 맺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H7qGYF0MG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