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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대원목사 설교

241201 [선교주일] 신실한 하나님, 신실한 증인

by 마이코 2024. 12. 15.

성경: 누가복음 24:44-49
 

오늘은 선교 주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매년 12월 첫째 주일을 선교 주일로 정해서 세계 선교를 위한 헌신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언제부터 선교 주의를 지키기 시작했을까요?
동신 세계 선교회가 창립된 이후입니다. 

그러면 동신 세계 선교회가 언제 창립되었을까요?
1973년도에 창립되었습니다. 

그러니까 51년 전부터 우리 교회는 선교 주의를 지키고 있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저는 보스턴에서 세계 기독교 역사를 전공했습니다.
저와 같이 공부했던 친구와 후배들이 미국과 영국 학계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한 친구가 최근 저에게 아티클을 하나 보내줬습니다.
놀랍게도 거기에는 우리 교회 원로 목사님이 나와 계셨습니다.
1988년도에 김창용 원로 목사님께서 월간 목회라는 저널에 기고하신 글이었습니다.
글 전체를 읽고 싶지만 시간 관계상 첫 페이지만 보여드리겠습니다.
제목이 멋있습니다. 선교하는 교회 하나님이 이렇게 축복하신다.



우리 원로 목사님 젊었을 때 미남이셨죠? 

1988년도이니까는 목사님께서 부임하신 지 15년이 지난 뒤였습니다.
김창래 목사님께서 38세 때 동신교회에 부임하셨다고 합니다.
제가 후임 목사로 선정되었던 것이 40세 때였으니까 저보다 2년 더 빨리 오셨습니다.
1973년도 목사님께서 우리 교회에 부임하셨을 때에 우리에게는 선교에 대한 이해가 전무했습니다.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 전반에 선교라는 개념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창열 목사님께서 우리 교회가 선교를 해야지 살아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목사님의 모든 설교가 기승전 선교로 끝났다고 합니다.
그렇게 15년이 지났고 1988년이 되었을 때에 우리 교회는 다섯 가정의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께서 지금 앉아 계시는 이 본관 예배당을 완공했습니다.
선교하는 교회 하나님이 이렇게 축복하신다라는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사실 놀라운 이야기죠.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 이후에 권성수 목사님께서 부임하셨습니다.
권 목사님께서 선교적 교회라는 이 바탕 위에 생명 사역을 시작하셔서 교회가 폭발적으로 부응했습니다.
권 목사님 계시던 22년 동안 교회가 무려 10배 부흥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선교하는 교회 하나님께서 이렇게 축복하신다라는 말씀이 더 크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선교사이며 선교 학자 출신인 제가 담임 목사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의 제4차 로잔 대회를 준비하는 아주 놀라운 책임을 맡기셨습니다.
로잔 대회에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중요성이 있는지 제가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진행하는 LMTC 선교 훈련이 있습니다.
다른 교회에서는 PSP 훈련, Perspective 훈련이라고도 부르는데 선교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훈련입니다.
이 훈련에 사용하는 교재가 있는데요.

아주 두꺼운 책입니다.
그 교재의 모든 내용들이 이전 로잔 대회 때 발표된 아티클입니다.
미전도 종족 텐플리 윈더우, 하나님의 선교, 선교와 기도 등 그 모든 내용이 로잔 대회에서 발표된 내용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한국 교회에서 사용하는 선교 교재의 모든 내용은 사실 로잔 대회에서 발표되고 공유되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일을 준비하고 섬기는 일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여러분의 기도와 후원으로 지난 4차 로잔 대회가 아주 은혜롭게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 로잔 대회의 의미와 중요성을 보고하는 예배를 이번 주 금요일에 갖겠습니다.
많이 참석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제자들을 만난 장면입니다.
여전히 두려워하고 있는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구약 성경에 예언했던 그 모든 말씀이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이루어졌음을 설명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4장 44절 함께 읽겠습니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율법과 선지서와 시편에 기록된 그 모든 말씀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에서 율법과 선지서와 시편은 구약 성경 전체를 의미합니다.
이 모든 말씀이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주님께서 다 성취하셨습니다. 

예를 들어서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예언의 말씀이 있습니다.
신명기 18장 15절 함께 읽겠습니다.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내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아멘. 모세가 말합니다.
너희 중에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실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예언은 말도 안 되는 예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본 사람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어느 누구도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지 못했습니다.
또한 모세는 하나님께 직접 율법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율법을 받았던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말하기를 너희 중에 나와 같은 선지자를 일으키실 것이다라고 예언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어느 누구도 그 모세가 예언했던 선지자가 바로 나다라고 말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사람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모세보다 더 크신 선지자로 우리에게 오신 줄로 믿습니다.
히브리서 3장 3절에 보니까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분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세보다 더 큰 영광을 가지고 이 땅 가운데 오셨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다면,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서 그 율법의 진짜 의미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가지고 홍해를 갈랐다면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 위를 걸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모세보다 더 큰 영광과 능력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모세가 예언했던 그 율법이 예언했던 것을 예수님께서 성취하셨습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모든 메시아에 대한 약속을 또한 예수님께서 성취하셨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이사야 말씀이 있습니다. 

53장 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오,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아멘.

이사야 선지자는 고난받는 종, 서퍼링 서번트(Suffering Servant) 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 메시아가 우리 죄를 위해서 고난을 받고 징계를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모든 예언을 하나도 빠짐없이 성취하셨습니다.
메시아에 대한 모든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 모진 고난과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선포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셨던 모든 예언과 약속을 성취하는 것이 예수님의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여러분, 회사나 기업에 보면 사명 선언문, 미션 스테이트먼트(Mission Statement) 가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에 사명 선언문이 있으십니까?

예수님의 인생에 사명 선언문이 있다면 어떤 것이었을까요?
저는 요한복음 말씀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6장 38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아멘, 

예수님은 그분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이 땅에서 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셨던 그 모든 예언과 약속을 성취하는 것이 예수님 인생의 목적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약속을 이루시는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무엇을 좋아하셨을까?
예수님은 좋아하는 음식이 있으셨을까? 

예수님은 뭐 할 때 즐거워 하셨을까?라는 질문을 할 때가 있습니다.
지난주에 부부 행복 컨퍼런스가 있었습니다. 

 

저와 아내가 토크 콘서트에 초청돼서 함께 진행을 했는데 여러 가지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 질문 중에 저의 취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가벼운 질문이었는데 그 질문을 받고 제가 한동안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제가 취미 활동을 할 시간이 없습니다. 

물리적으로 시간이 없다 보니까 제가 뭐 하고 싶다 이런 거 취미생활 하고 싶다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제가 야구 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야구장에 가서 야구 보는 걸 좋아합니다. 

하지만 사역하는 동안에는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으니까 못 가고, 지난 여름에 미국에 갔을 때 메이저리그 야구 한 게임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저의 유일한 취미 생활이었습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예수님께 질문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 이 땅에 계실 때 취미가 무엇이였나요? 

예수님은 개인적으로 뭐 할 때 기분이 좋으신가요라고 질문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주님께서 어떤 답을 주실지 잘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본인이 하고 싶은 일 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서 100% 집중하셨기 때문입니다.
자기 백성을 잊지 않으시고 돌아보신다는 그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은 그분의 모든 것을 다 드린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3년 동안 동고동락했던 제자들이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율법과 선지서의 모든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그 예수님의 삶을 바로 옆에서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예수님의 사역이 하나가 되는 모습을 지켜본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그토록 강조하는 Integrity가 무엇인지 예수님께서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영국의 복음주의 작가 레오나르드 레이븐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어로 보면은 Word Play이거든요.

'I have no faith in my faith. My faith is in the faithful God' 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나의 믿음을 믿는 게 아닙니다. 

주님을 향한 나의 믿음은 절대 흔들리지 않을 거야 뭐 이런 식으로 우리가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 언제나 동일하신 하나님, 절대로 그 마음을 변하지 않으시는 그 하나님을 우리가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약속을 저버릴지언정, 하나님은 결코 우리와의 약속을 저버리지 않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그 모든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삶과 사역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이 된 우리에게 신실하게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 동일한 신실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주신 선교적 사명입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대위임령, Great Commission은 마태복음 2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뿐만 아니라 누가 복음과 요한복음에도 대위임령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선교적인 사명을 주셨습니다.
모든 족속에게 가서 주님께서 완성하신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47절 48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을 증인이라 

 

아멘.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를 모든 족속에게 전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를 증인으로 부르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선교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가 선교지에 가서 선포해야 하는 그 메시지는 죄의 용서를 받게 하는 회개의 메시지입니다.
여러분 회개가 무엇일까요? 회개는 죄의 길에서 돌이켜서 하나님께로 향해 나오는 것입니다.

웨스트 미스터 신앙 고백은 회개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교의 핵심은 모든 죄에서 돌이켜서 하나님으로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해야 하는 그 메시지는 회개의 메시지이고 그 핵심은 방향 전환에 있는 것입니다.

 

선교의 목표는 현지인들이 인간답게 살도록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선교의 목표는 소망 없는 죄인이 하나님의 긍휼을 깨달아 주님께로 돌이키는 것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죄 용서를 받게 하는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총체적 선교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분들이 간과하기 쉬운 것이 바로 이 회개의 메시지입니다.
여러분 총체적 선교가 무엇입니까? 

영혼 구원만이 아니라 현실적인 문제, 사회적인 문제도 함께 다루는 것입니다.
가난, 질병, 교육, 인권을 포함한 전인적인 회복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좋은 일입니다. 우리 모두는 총체적인 변화와 회복을 필요로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도할 때 영적인 문제만 가지고 기도하지 않고 현실적인 문제를 가지고 기도합니다.
마찬가지로 총체적인 변화, 총체적인 선교는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회적인 문제, 현실적인 문제를 강조하다 보면 회개의 메시지가 약화될 수도 있습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가난, 질병, 인권 문제에 집중하다 보면 죄의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오는 것 그 회개의 메시지가 약화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영적인 변화를 위해서는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선교지에서 식량을 나누어 주고 질병을 고쳐주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모두가 다 좋아하는 일입니다. 정말로 어려운 것은 죄인이 자기 죄를 깨닫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 영적인 변화가 진정한 변화인데 이를 위해서는 엄청난 기도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1974년에 발표된 로잔 언약이 총체적 선교를 강조했다고 흔히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절반만 맞는 말입니다.

로잔 언약이 총체적 선교를 말하는 것은 맞지만 그 이전에 복음주의 신학을 확립했습니다.

 

여러분, 복음주의 신학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로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강조하는 것이고,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강조하는 것이고, 

셋째로 가장 중요하게 회개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주의 신학의 반대가 자유주의 신학인데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회개를 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사회 정의를 말하고 해방 신학을 말하고 페미니스트 신학을 말하는 사람들, 자유주의자들은 회개에 대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복음주의 신학을 나타내는 로잔 언약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로 전하는 것은 죄인들이 사는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는 것이며, 마음을 다한 회개와 신앙의 인격적인 결단으로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로 영접하도록 모든 사람을 초청하는 것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선교는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는 것이고 마음을 다한 회개를 하도록 초청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누가 복음이 강조하는 예수님의 대위임령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이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도록 제자들을 보내셨습니다.
본문 48절에 보니까 너희는 이 모든 일에 증인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증인을 뜻하는 영어 단어가 witness입니다.
여러분 witness 를 영어 사전에서 찾아보면 '증인'도 되고 '증언'도 됩니다.
어떤 사건을 목격한 사람 증인을 뜻하기도 하고요.
그와 동시에 그 사람이 진술한 내용 증언을 뜻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흔히 이런 말 하죠. 

메시지와 메신저를 나눌 수 없다라는 말을 합니다.
거짓말을 한 전력이 있으면 우리가 그가 말하는 증언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평생 동안 불법을 행했던 사람이 여러분 어느 날 갑자기 공익 제보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 행동 역시 자기의 이익을 위한 정치적인 행동일 것입니다.
우리가 메신저와 메시지를 구분할 수 없습니다. 

그 개념이 witness 라는 단어 안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할 때에 신뢰할 만한 사람, 신실한 사람으로서 증거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복음을 전하다가 산헤드린 공회에 잡혀갔습니다.
다시는 예수의 이름을 전하지 말라고 협박을 당했을 때 베드로와 요한이 이렇게 답했습니다.
사도행전 4장 20절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예수님을 부인했던 그 베드로가 놀랍게 변화된 것입니다.
내가 보고 들은 바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증인으로서 신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고, 내가 목격한 것을 신실하게 증언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맡겨진 선교적 사명입니다.
우리가 경험한 그 예수님의 생명을 있는 그대로 세상에 나아가서 증거하는 것입니다.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는 신실하게 증인의 사명을 감당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16세기 세계 최강국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주 큰 범선을 만드는 기술을 가졌기 때문에 전 세계를 다니며 식민지를 개척했습니다.
스페인은 서쪽으로 가서 아메리카 대륙을 개척했고, 포르투갈은 동쪽으로 가서 아프리카와 아시아 지역을 개척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으로 갔던 그 스페인 군인들은 사실 엄청난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16세기에는 인권에 대한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현지 인디언들을 자신과 동등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소와 돼지를 잡으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당시 스페인 군인들은 인디언들을 죽이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시기에 스페인의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바톨로메 데라스 카사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성공에 대한 야망이 있는 사람인데 신 대륙으로 가서 돈을 벌고자 했습니다.
당시 스페인에는 앵코미엔다(Encomienda) 라는 시스템이 있었는데 신대륙에 정착하는 사람에게 원주민 노예들을 합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습니다.
라스카사스는 그 제도를 활용해서 무역을 해서 큰 돈을 벌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1511년 8월 15일 그는 어떤 한 선교사의 설교를 통해서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됩니다.
안토니오라는 선교사가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학대하고 노예로 삼는 것은 죄라고 설교했습니다.
그 설교를 통해서 성령께서 라스카사스의 마음 가운데 역사하셨습니다.
자신의 죄를 깨달은 그는 그 죄의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향해 나아왔습니다.
내가 인디언들을 짐승처럼 학대했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며 살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인디언들을 위한 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이 사람이 아주 똑똑한 사람이었거든요. 

스페인 국왕을 찾아가서 신대륙에서 자행되는 끔찍한 만행을 보고했습니다.
또한 교황청으로 찾아가서 교황에게도 이러한 보고를 했습니다.
인디언들의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신학적으로 정치학적으로 쓰는 변증하는 논문을 작성했습니다.
그 결과 1537년 교황 파울로 3세는 아메리카 인디언들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이성적인 존재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542년 스페인 국왕이 신법을 반포하게 되었습니다.
이 법을 통해서 원주민 노예를 합법화했던 그 앵코미엔다 시스템을 철폐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오늘날 국제법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국제 관계에서 한 나라가 다른 나라의 주권을 침탈하면 안 된다라는 개념이죠.
지금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16세기에는 어느 누구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역사상 최초로 국제법 개념을 제안했던 사람이 바로 라스카사스라는 선교사였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까지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그를 가리켜 '인디언들의 눈물을 닦아준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라스카사스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했던 신실하게 증거했던 선교사였습니다.
지금도 그와 동일한 마음으로 세계 곳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계신 선교사님들이 계십니다.
우리 교회는 그런 선교사님들을 파송하고 기도하고 후원하는 선교적인 교회입니다.
여러분의 기도와 후원을 통해서 우리 교회 생명 선교가 가능한 것을 기억하면서 다가오는 새해에도 하나님께서 맡기신 선교적 사명에 기쁨으로 동참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실한이라는 뜻을 가진 영어 단어 faithful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한결같다, 동일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신실한 사람은 한결같은 사람, 언제나 동일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혹시 한결같은 사람을 알고 계십니까? 

상황과 상관없이 시간과 상관없이 변하지 않고 한결같은 사람을 보면 신뢰가 갑니다.
그런 사람 보면 마음에 안정감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불안정한 사람이 있죠. Up and Down이 아주 심한 경우가 있습니다.
좋을 때는 끝없이 좋지만 한 번 다운되면 깊이 추락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신실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야구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야구에서 타율이 3할면 아주 훌륭한 타자입니다.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그렇게 어려워 보이지 않습니다.
3타수 1안타를 치면 사말이 되거든요. 

세 번 중에 한 번만 안타를 치면 됩니다.
한 경기에 나와서 3타수 1안타 치는 것은 어려워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쩌다가 운이 좋으면 3타수 2안타도 치고 4타수 2안타를 칠 수도 있습니다.
정말로 어려운 것은 1년 내내 3타수 1안타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한두 경기가 아니라 144경기 내내 3타수 1안타를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은 자신의 커리어 내내 10년 이상, 3타수 1안타를 유지하는 일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야구 격언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운 좋은 날은 있어도 운 좋은 커리어는 없다'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럭키 데이'는 있어도 '럭키 커리어'라는 것은 없습니다.
한결같이 꾸준히 잘하는 것 아주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쩌다 한 번 운동하는 것은 어렵지 않죠?
하지만 꾸준하게 운동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어쩌다가 한 번 기도하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꾸준하게 기도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성공적인 사람은 남들이 어쩌다가 한 번 하는 그 일을 꾸준하게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 일을 해낸 사람이 성공적인 사람이고 바로 그는 신실한 사람입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가장 한결같은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히브리서 13장 8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아멘.

우리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줄로 믿습니다.

이 말씀처럼 우리 마음 가운데 소망이 되는 말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영원히 변함없기 때문입니다.
언제는 또 우리를 사랑하다가 또 갑자기 그 사랑이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은 변덕이 심합니다.
어떨 때는 사랑이 많다가 또 어떨 때는 난폭하게 변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신의 모습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을 투영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결같이 못할 때가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에게는 감정의 기복이 있습니다.
열정의 기복도 있고 헌신의 기복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신실함을 유지하는 것이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 마음이 뜨거우면은 신실하게 살아갈 수 있는데, 또 우리 마음이 식으면 맡겨진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본문 49절 함께 읽겠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아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보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여러분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보혜사 성령님이십니다.
우리가 진리 안에 거할 수 있도록 성령님을 보내주십니다.
환란 가운데서도 소망을 잃지 않도록 성령님을 보내주십니다.
우리가 신실한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님을 보내주십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그 성령의 능력을 입을 때에 우리에게 그 맡겨진 사명을 끝까지 신실하게 감당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의 능력이 없다면 한두 번 할지 몰라도 우리가 평생 동안 순종할 수 없습니다.
내 힘과 내 의지로 이번에는 신실할지 몰라도 앞으로도 계속 신실할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한결같이 꾸준한 것이 신실한 증인의 모습인데 이것은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성령의 능력을 입을 때 가능한 줄로 믿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저는 아프리카 부룬디에서 6년 동안 선교사로 사역했습니다.
우리가 뭐 열흘 2주 단기 선교 하는 것과 선교지에서 사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선교지에서 현지인들과 관계를 맺고 복음을 전하고 그들과 함께 사역하기 위해서는 정말 엄청난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간혹 가다 선교지에서 성령의 능력 없이 사역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선교사로 헌신했는데 성령의 능력 없이 사역하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요?
내 계획대로 사역이 진행되지 않을 때 불같이 화를 내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했던 결과가 나타나지 않을 때 현지인들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모습으로 사역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일까요?
주님은 우리를 신실한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는데 과연 이것이 신실한 모습일까요?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오히려 선교의 방해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아시기 때문에 위로부터 내려오는 성령의 능력을 입으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선교적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우리가 선교 헌금 작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세계 선교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더욱더 중요한 줄로 믿습니다.
전 세계에서 사역하시는 우리 선교사님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신실한 복음의 증거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까지 신실하게 살아간 자들에게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21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내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음에 내가 많은 것을 내게 맡기리니 내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아멘,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인데 여기서 충성된이라는 단어가 영어로 'faithful' 입니다.
'신실하다'라는 의미이죠.

그러니까 착하고 충성된 종은 다른 것이 아니라 착하고 신실한 종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선교 사명에 신실한 사람, 끝까지 신실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그에게 큰 칭찬과 상급을 주십니다.

마더 테레사가 말했던 것처럼 '주님은 우리에게 명령하시길 성공해라라고 명령하지 않으셨고 신실하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스위스의 한 신학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은 타오름에 의해 존재하고, 교회는 선교에 의해 존재한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교회는 선교에 의해서 선교를 위해서 존재합니다.
우리 원로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선교하는 교회는 놀라운 축복을 받습니다.
우리 교회의 지난 역사가 이것을 생생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선교를 말하지 않을 때 앞장서서 선교에 헌신했던 우리 교회를 하나님께서 귀하게 사용하신 줄로 믿습니다.
선교에 임할 때 가장 중요한 자세가 신실함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 신실하신 것처럼 우리도 신실해야 합니다.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 언제나 동일하신 하나님의 모습처럼 우리도 신실한 증인으로 이 세상 가운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성령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이 선교적 사명을 감당할 수 없음을 고백하며, 성령 충만을 받아서 끝까지 신실하게 순종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선교가 완성되는 그 책임을 위해서 귀하게 쓰임 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대구동신교회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교회가 되어서 마지막까지 신실하게 생명 사역과 세계 선교를 위해 헌신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1wdpjo5Xj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