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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대원목사 설교

크리스천의 윤리 (6) 동성애와 젠더 이데올로기

by 마이코 2024. 12. 16.

로마서 1:24-32 

 


크리스천의 윤리에 대해서 시리즈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성적 순결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성적 결합은 단순히 육체적인 결합이 아니라 영적인 결합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결혼해서 한몸이 되었고 그 결혼 언약을 기념하는 예식이 성적 결합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육체는 사라질 것이 아니라 마지막 때에 영원히 부활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거룩하게 순결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동성애와 젠더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동성애에 대해서 설교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이렇게 설교하면 됩니다. 

동성애는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여기시는 죄악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것은 동성애 때문이었습니다.
이 세대에도 그런 일이 계속되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돌이키십시오. 오늘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아주 명확하고 심플하죠. 

 

그런데 이 설교가 다루지 않는 문제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왜 최근 20년 사이에 동성애 문제가 심각해졌을까요?
왜 동성애를 지지하는 세력과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세력은 결탁하게 되었을까요?
왜 동성애를 지지하는 세력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지지하는 세력과 가깝게 지내고 있을까요?
혹시 어떤 분은 동성애와 사회주의 이념 사이에 연관성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 정치의 현실을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미국에 보면 민주당이 우세한 주가 있고 그런가 하면 공화당이 우세한 주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느 주에서 적극적으로 동성애를 옹호할까요?
민주당이 우세한 주에서 훨씬 더 적극적으로 동성애를 옹호합니다.
이것이 우연일까요? 

절대 우연이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사상적으로 동성애는 사회주의 이념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동성애에 관해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동성애가 가장 나쁜 죄라는 구절은 없습니다.
동성애가 모든 죄의 뿌리이다 이런 구절 성경에 없습니다.
오히려 돈을 사랑함이 일만하의 뿌리이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면 동성애는 탐욕, 교만 시기 같은 죄 중에 하나일까요?
아니면 동성애에 뭔가 특별한 영적인 의미가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동성애를 특별히 미워하신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것 또한 아주 중요한 주제입니다. 

이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분명하게 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동성애는 용서받지 못할 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이켜보면 용서받을 수 있는 죄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다 죄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로 회개하고 돌아와서 십자가의 은혜로 용서받은 줄로 믿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동성애자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십자가의 은혜로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설교는 동성애자를 정죄하고 그들을 배척하기 위한 목적이 아닙니다.
동성애가 얼마나 심각한 죄이고 그것을 옹호하는 자들이 얼마나 위험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지 경고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동성애는 용서받지 못할 죄는 아닙니다.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고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하게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반동성애 운동에 앞장서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반동성애 운동에 앞장설 것입니다.
대구에서 큐어 축제를 하면 그것을 반대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적극적으로 나설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있어서 조금도 타협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동성애자를 정죄하지 않고 그들을 배척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죄를 깨닫고 돌이켜 회개하기를 기도합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그들이 변화되어서 새로운 존재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주님은 잃어버린 모든 자들이 돌아오시기를 지금도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를 들으시면서 이 마음을 꼭 기억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먼저 동성애에 대해서 알아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동성애가 전혀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동성애는 현대 사회에서 갑자기 나타난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존재했던 인간의 오랜 죄악 중에 한 가지였습니다.
고대 히브리 이집트, 시리아 문명에서는 동성애를 처벌하는 법 조문이 있었습니다.
기원전 1075년에 기록된 고대 시리아 법령에는 이런 조문이 있습니다.


남자가 그의 형제와 동침하면 그를 고자로 만들 것이다라는 조문이 있습니다.
기원전 1400년경에 기록된 레위기에도 동일한 조문이 있습니다.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가증하다라는 단어가 영어로 abhor입니다. 몹시 싫어하다, 증오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동성애를 몹시 싫어하십니다. 

왜냐하면 온 땅을 축복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반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행복하고 거룩하기를 원하시는데, 그분의 뜻에 반하는 것이 바로 동성애입니다.
신구약 성경은 동성애를 철저하게 금지하고 있습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동성애를 허용한 구절은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 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음행, 우상숭배, 간음, 동성애가 함께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언급된 죄들 가운데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다 자극적인 죄, 감각적인 죄라는 사실입니다.
영어로 하면 센슈얼한 죄입니다. 

음행, 간음, 동성애가 자극적인 것은 이해가 가죠.
그런데 고대 사회에서 우상숭배 역시 매우 자극적인 죄였습니다.
신전에 가면 그들의 눈을 자극하는 아주 어마어마한 형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방 신전 창기들은 매우 자극적으로 행동했습니다.
이방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신전에서 성적 행위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상숭배에 참여하는 자들은 자동적으로 온갖 음행을 저질렀습니다.
우상숭배, 가음, 동성애는 모두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상 숭배를 우리가 영어로 idolatry 라고 하고, 

간음을 영어로 adultery 라고 합니다.
발음이 비슷하죠. 

우연이 아닙니다.

우상 숭배와 간음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대 사회의 우상들은 성적인 순결을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감각을 자극해서 성적인 죄를 짓도록 부추겼습니다.
현대 사회의 우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거짓 신들은 성적 순결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왜 우상들은 성적 순결을 가르치지 않을까요? 

저는 이것이야말로 우상이 세상을 창조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세상을 창조하지 않았으니까 창조 질서가 무엇인지도 말할 수 없고, 창조 질서를 지키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성경의 하나님만이 성적 순결을 강조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분께서 천지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뜻과 목적이 있으니까 그대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분은 성경에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또한 피조세계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특별 계시라고 부르고요.
피조세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일반 계시라고 부릅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이 피조세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거부한 사람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로마서 1장 20절 21절에 보면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알려졌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는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다음 구절을 보면 피조세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고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안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음행과 동성애의 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에서 우상숭배와 음행과 동성애가 함께 나타났습니다.
놀랍게도 로마서 1장에서도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과 음행과 동성애가 함께 나타났습니다.
성적 순결은 단순히 윤리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신앙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셨다고 믿으면 그분의 창조 질서를 따르게 됩니다.
반대로 나는 그냥 우연히 생겨났고, 나를 창조한 신이 없다고 믿으면 그냥 내 마음대로 내 정욕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성적 순결은 윤리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창조에 대한 문제입니다.

 

동성애는 전혀 새로운 현상이 아닙니다. 

인류 사회에서 가장 오래된 아주 오래된 문제였습니다.
그렇다면 동성애는 왜 생겨나게 되었을까요? 

선천적으로 동성애 성향을 타고나는 것일까요?
동성애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유전적인 문제인데, 어떻게 동성애를 죄라고 할 수 있느냐라고 주장합니다.
동성애가 유전적인 문제라고 주장했던 최초의 학자는 미국의 딘 헤머였습니다.


그는 40쌍의 동성애자 형제에 대한 유전적 분석을 통해서 xq 28 유전자와 동성애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연구는 1993년 사이언스지에 실렸습니다.
그런데 그의 연구는 너무 적은 샘플을 가지고 있었고, 실험 결과를 선별적으로 선택했다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이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한 사람이 캐나다의 조 라이스라는 과학자입니다.


그는 더 많은 샘플을 가지고 연구해서 xq 28 유전자를 분석했는데 그 결과 그 유전자와 동성애 사이에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라이스의 연구 결과는 1999년 사이언스지에 실렸습니다.
최근에는 더 확실한 연구가 발표되었습니다. 

미국의 하버드 대학과 MIT 대학이 공동 연구를 했는데요.
49만 명의 유전자를 분석했습니다.



동성애 성향을 유발하는 유전자가 존재하는지 연구했는데 동성애를 결정하는 단일 유전자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연구 결과는 2019년 사이언스지에 실렸습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보시려면 구글에 가서 동성애 유전자 하버드로 검색하면 결과가 나옵니다.
뉴욕 타임즈와 BBC에도 보도가 되었고, 한국의 모든 언론에도 보도가 되었습니다.
동성애가 유전적인 문제라는 과학적인 근거는 없습니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의 죄성입니다. 

만약에 동성애가 유전적인 문제라면 동성애를 그만둘 수가 없을 것입니다.
선천적으로 그렇게 타고난 사람이 그 행동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동성애를 하다가 그만둔 사람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네 우리나라는 동성애의 역사가 길지 않아서 그런 자료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역사가 길고 우리보다 케이스가 많아서 다양한 자료가 있습니다.
미국의 유전학자 윌리엄스 마스터즈와 버지니아 존슨이 연구한 결과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동성애 관계에 있다가 그 문제를 깨닫고 내가 변화되기로 결단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동성애 관계에서 빠져나오도록 도왔던 의료기관, 사회기관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성공률이 얼마나 됐을까요? 

동성애 관계에 있다가 아 내가 변화돼야겠다 결단하고 하면 실제로 동성애에서 빠져나오는 비율이 놀라지 마십시오.
66%였습니다. 

만약에 동성애가 유전적인 문제였다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유전자를 그렇게 타고난 사람이 그 유전자에 반대되는 행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 담배를 피우는 것이 유전적인 문제일까요?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담배를 피울 수밖에 없는 유전자를 타고났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담배를 끊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담배가 유전적인 문제였다면 담배를 끊는 것이 불가능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 보면 담배를 피우다가 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담배를 끊는 건 어려운 일이죠. 

하지만 가능한 일입니다.
주변에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동성애를 그만두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가능한 일입니다.
만약에 동성애가 순전히 유전적인 문제였다면 그것을 멈추는 것은 불가능해야 합니다.
하지만 담배처럼 후천적으로 습득한 행동이라면 그것을 그만두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면 동성애는 단지 수많은 죄들 중에 하나일까요?
하나님께서 동성애를 특별히 미워하신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용서받을 수 있는 죄라는 측면에서 동성애는 뭐 다른 죄와 다르지 않습니다.
뭐 술, 도박, 마약, 간음, 교만 모두 다 죄이지만 회개하고 돌이키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동성애자들도 회개하고 돌이키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동성애는 다른 죄와 다른 점이 한 가지가 있습니다.
다른 죄는 그 죄를 저지른 사람이 부끄러워합니다.
예를 들어서 간음한 사람은 그 사실이 드러나면 부끄러워합니다.
거짓말을 하거나 친구를 배신한 사람도 그 사실이 드러나면 부끄러워합니다.

우리에게 최소한의 양심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죄가 부끄러운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성애자는 자신의 죄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말로 자기 행위를 정당화하면서 자기 정욕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따르지 않고 그에 대항해서 자기 마음대로 행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따르지 않는 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규범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죠.
여러분 규범을 어기는 것과 규범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교통 신호를 어긴 것과 교통법규를 부정하는 것은 아주 차원이 다른 문제이지요.
살다 보면 우리가 급한 일로 교통 신호를 어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 잘못을 인정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면 됩니다.
그런데 교통법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주 큰 문제이죠.
도로교통법이 있고 모든 운전자는 그 법을 따라야 하는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운전을 하면 안 됩니다.
신호, 속도, 차선 이 모든 걸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는 사람은 큰 사고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규범을 어기는 것과 규범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이렇게 다른 일입니다.
동성애를 주장하는 것은 단순히 규범을 어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규범 창조 질서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 동성애의 문제를 지적할 때 창조 질서를 가지고 접근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 26절 함께 읽겠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사도 바울이 동성애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순리와 역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순리는 natural relation 이고 역리는 unnatural relation 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스러운 질서대로 살아가는 것이 순리이고, 거기에 대항해서 비자연적으로 비정상적으로 행하는 것이 영리입니다.
동성애는 하나님의 질서와 규범을 부정하는 것이고, 내가 내 마음대로 그 기준을 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고 매우 오만한 태도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옳고 그름의 기준을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내가 결정하겠다. 

당신은 당신 기준대로 살고, 나는 내 기준대로 살겠다.
그러니까 제발 당신의 기준을 저에게 강요하지 마세요.
사람들이 이렇게 다 말합니다. 

오늘날 사회에서 동성애 젠더 이데올로기가 문제가 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내가 결정하겠다 하는 생각이 끝까지 나타나면 내가 남성인지 여성인지 내가 결정하겠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절대로 바꿀 수 없는 것까지 내 마음대로 결정하겠다는 오만한 태도가 나오게 됩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것처럼 젠더는 사회적인 성을 의미합니다.
생물학적 성은 고정되어 있지만 사회적 성은 유동적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성이 육아를 해야 한다는 사회적 관념이 있죠.
그런데 여성이 사회 활동할 수 있고 남성이 육아를 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함께 사회 활동하고 함께 육아할 수도 있습니다.
사회적 성은 유동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회적 성이 유동적이라고 해서 생물학적인 성까지 유동적인 것은 아닙니다.
생물학적 성은 바꿀 수 없습니다. 

남성으로 창조된 사람은 남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여성으로 창조된 사람은 여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질서는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거부하고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것이 젠더 이데올로기입니다.
젠더 이데올로기를 이론화한 사람이 있는데, 유시 버클리 대학의 쥬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라는 교수입니다.

Judith Butler


그녀는 젠더 수행성 이론이라는 개념을 주창했습니다.


그녀에 따르면 타고난 성은 없고 반복적인 수행을 통해서 젠더가 형성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여기서 이제 반복적인 수행은 우리가 사회에서 수행하는 여러 가지 역할과 기능도 있지만 성적인 행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남성으로 태어났는데 여성으로서 성적 행위를 하면 그에게 여성적 젠더가 형성된다는 주장입니다.
쥬디스 버틀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젠더 형성에 섹스는 무의미하다.
젠더가 형성되기 전까지 몸은 의미가 부여되지 않은 물질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제가 이 글을 읽으면서 도대체 어떤 논리로 이런 주장을 하는지 이해하려고 정말 노력했습니다.
중립적인 입장에서 이해해 보려고 했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까 이젠 쥬디스 버틀러는 레즈비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동성애자로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기 위해서 젠더 수행성 이론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가 없는 주장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신체적으로 타고난 성을 바꿀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남성 아니면 여성으로 태어납니다. 

인간의 염색체는 xy와 아니면 xx 둘 중에 하나입니다.
아무리 성전환 수술을 해도 xy 염색체가 xx 염색체로 바뀌지 않습니다.
내가 남성인지 여성인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십니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옳고 그름의 영원한 기준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기준대로 살면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이번 시리즈 첫 번째 설교에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계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율법 안에는 그분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모든 인간은 죄로 타락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다양한 종류의 유혹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여러분 중에서 술, 담배, 도박, 가음, 교만 등 여러 가지 죄의 유혹을 받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유혹에 넘어져서 죄를 짓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중에서 죄 안 짓고 사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죄를 지었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 나와서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면 됩니다.
그러면 주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사실 원래는 우리가 그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치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겸손한 마음으로 애통하는 마음으로 십자가 앞에 나와서 회개하면 됩니다.
그런데 동성애자들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고 자백하지도 않습니다.
규범을 어겼으면 잘못했다고 인정하면 되는데, 규범 자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은 다 옳다고 당당하게 외칩니다.
로마서 1장 32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아멘.

여러분 이것은 오만한 태도이고 위험한 발상입니다.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매우 오만한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그 규범을 부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성애는 그저 단순한 죄가 아닙니다.
동성애와 젠더 이데올로기는 동일한 뿌리에서 나왔습니다.
역사적으로 사상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뿌리는 문화 막시즘입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마르크스, 프로이드, 니체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습니다.
마르크스는 세상을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 사이의 대립으로 규정했습니다.
억압받는 피지배 계급이 계급 투쟁을 통해서 자유를 쟁취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한편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외쳤습니다. 

여러분 신이 죽으면 뭐가 좋을까요?
신이 죽으면 선과 악의 기준이 사라집니다. 

선과 악의 기준이 사라지면 뭐가 좋을까요?
내 마음대로 선악의 기준을 세울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포스트 모더니즘의 기초입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절대적인 규범을 거부합니다.


규범 상황, 실존 이 삼중 시각 말씀드렸죠.

포스트 모더니즘은 이 중에서 규범을 부정합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가치는 상대적이고 유동적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 어떤 것도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내가 주관적으로 느끼는 것이 제일 중요해집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이 사상의 뿌리에는 니체와 마르크스가 있습니다.
그들은 의지적으로 하나님의 규범을 부정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 질서를 거부하고 폐기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정욕을 따라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갔습니다.
그 결과 인류 역사상 최초로 동성애를 합법화한 국가들이 생겨났습니다.
여러분 과거에 아무리 시대가 타락했어도 동성 결혼을 법적으로 허용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인류 역사상 그 어떤 국가도 법적으로 동성 결혼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서 최초로 그런 국가들이 생겨났습니다.

 

동성애 젠더 이데올로기와 함께 또 다른 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페미니즘입니다.
어쩌면 페미니즘은 동성애보다 더 큰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한국 사회에서 동성애에 찬성하는 사람은 아마 5%도 안 될 것입니다.
95% 이상의 평범한 사람들은 동성애가 비정상적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페미니즘은 다릅니다. 

현재 20 30대 청년들 사이에서 페미니즘은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방송국 작가들은 대부분 페미니즘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제작하는 TV 프로그램 안에는 페미니즘 사상이 담겨 있습니다.
페미니즘 역시 문화 막시즘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문화 막시즘은 세상을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대립으로 규정한다고 했죠.
페미니즘에서 지배자는 남성이고 피지배자는 여성입니다.
여성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는 그 남성을 악한 집단으로 규정한 것입니다.
그런 악한 자와 결혼하는 것 불행의 시작입니다. 

임신과 출산도 불행의 시작입니다.
여성으로서 당당하게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 페미니즘이 그리는 이상입니다.


그런 이념을 따라가는 여성들은 아마도 과거에 남성으로부터 억압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폭력적인 아버지, 비인격적인 아버지로부터 큰 상처를 받았을 수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그들의 아픈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아버지가 폭력적이라고 해서 세상의 모든 남성이 폭력적인 것 아닙니다.
그들의 아버지가 악하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남성이 악한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이것은 너무나 지나친 비약이고 너무나 지나친 일반화입니다.
가부장적인 이 문화가 문제라면 그 문화를 고쳐야죠.
하지만 페미니즘은 가정 자체를 없애려고 하고 있습니다.
결혼을 거부하고 임신을 거부함으로써 가정 자체를 폐기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더 큰 문제를 일으킬 뿐입니다. 

오늘 로마서 본문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질서와 규범을 거부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버려 두셨다라는 것입니다.


2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26절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28절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 라고 세 번이나 반복했습니다.
하나님의 규범을 거부한 자를 향한 주님의 심판이 나옵니다.
그 심판은 무시무시한 벌을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심판은 그들을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아무리 불러도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 아무리 기다려도 하나님을 거부하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시편 81편 11절, 12절에 동일한 말씀이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한 대로 버려두어 그의 임의대로 행하게 하였도다.

아멘.

오늘날 사회를 보면서 우리 마음이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가? 도대체 지금 이 시대에 무슨 소망이 있는가? 우리 마음이 애통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고대 이집트, 시리아 문명, 고대 그리스, 로마 문명 이후로 지금까지 그 어떤 국가도 동성 결혼을 합법화했던 적 없습니다.
여러분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동성애가 있었다 엘리트 사회에서 있었다 하죠.
하지만 절대로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역사상 최초로 동성 결혼을 합법화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2001년도 네덜란드가 그 시작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입니다.
주님께서 주님을 거부한 자들을 그냥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 마음의 정욕대로 내버려 두셨습니다.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이렇게 어두운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질서와 규범을 잃어버린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주님께로 돌아가고자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떠나서 내 마음대로 행했던 그 죄악을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께로 돌이킬 때에 주님께서도 우리에게로 돌아오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말라기 3장 7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 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아멘.

이스라엘의 죄악과 우리의 죄악은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규례를 떠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규범을 버린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그 계명을 버렸습니다.
그런 우리를 향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말씀하십니다.
애타게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애타게 우리를 부르시는 그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말씀하십니다.
'약할 때 강함되시네'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이 찬양을 만든 사람은 데니스 저니건이라는 사람인데, 오랫동안 동성애 문제로 괴로워했습니다.


그 죄의 유혹 앞에서 계속해서 무너지는 자신을 보며 깊은 죄책감과 애통함을 느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숨김없이 하나님께 쏟아부었고, 주님의 용서와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그 시간을 통해서 예수님의 보혈이 그를 깨끗하게 하고 공허한 마음을 채우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동성애로부터 그렇게 빠져나온 그는 자신의 신앙의 고백을 담아서 이 찬양을 만들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약할 때 강함 되시네'라는 찬양입니다.
쓰러진 나를 세우고 나의 빈 잔을 채운다는 고백을 담았습니다.
우리가 연약할 그때에 주님께서 우리의 강함 되심을 고백했습니다.

동성애와 젠더 이데올로기는 하나님의 질서와 규범을 부정하는 죄입니다.
규범을 어기는 것과 규범을 부정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규범을 거부하는 그 완악한 마음은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대를 만들어냈습니다.
하지만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기다리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주님께로 돌아갈 때 말라기서에 약속하신 대로 주님 또한 우리에게로 돌아오실 줄로 믿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 죄를 고백함으로 하나님의 용서와 회복을 경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어두운 시대를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이 세대를 버리시지 않도록 간절하게 중보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9Q0vo3QO6d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