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후서 3:6-12 | 문대원 목사
크리스천의 윤리에 대해서 시리즈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올바른 선택을 내리기 위한 체계적인 기준을 윤리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올바른 선택을 내리기 위해서는 규범과 상황, 실존, 모가 이 모두를 잘 고려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윤리에 대한 구체적인 이슈로 이제 들어가서 성 윤리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지난주에는 동성애와 젠더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말씀드렸는데, 지난주 제 설교 내용에 대한 기사가 3개가 나왔습니다.
두 개의 언론은 제 설교에 찬성하는 논조였고, 또 한 개의 언론은 제 설교를 비판하는 논조였습니다.
얼마든지 제 설교에 찬성할 수도 있고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설교를 끝까지 듣지도 않고 기사를 쓰는 것에 있었습니다.
설교 도입 부분만 듣고 쓴다든지 심지어 설교를 듣지도 않고 주보 칼럼만 보고 기사를 쓰기도 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동성애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성경에 근거해서 제 신앙의 양심을 따라서 설교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동성애는 용서받지 못할 죄가 아닙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주님께 돌이켜 회개하는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진정한 회개를 해야 합니다.
자기 죄를 인정하는 진정한 회개를 위해서는 옳고 그름의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옳고 그름의 기준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은 경제 윤리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현대사회의 경제 윤리에 있어서 이제 가장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일의 가치, 노동의 가치를 절하하는 것입니다.
물질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청년들에게 꿈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하지 않고 돈을 버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일하지 않고 돈을 벌 수가 있을까요?
여러분 혹시 코주부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원래 코주부는 코가 큰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데 요즘 젊은 세대는 이 단어를 다른 의미로 사용합니다.
코주부는 코인과 주식과 부동산의 줄임말입니다.
재테크를 하기 위해서 꼭 해야 하는 것이 코주부입니다.
월급으로 모을 수 있는 돈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투자를 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일하지 않고도 돈을 벌 수 있습니다. 코인과 주식과 부동산을 하면 됩니다.
이것이 현대 사회의 경제 윤리입니다.
제가 이번 주 설교 제목을 조금 색다르게 해볼까 고민도 했었습니다.
크리스천은 코인을 해도 되는가 별로 색다르지 않죠.
그러면 이런 질문은 어떻습니까?
목사는 코인을 해도 되는가 좀 이상하죠.
목사가 설교 준비하다가 코인 차트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은 조금 이상합니다.
여러분의 그 생각이 맞습니다.
신실한 사람은 자기가 맡은 그 일에 충성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받은 일, 사명이 있습니다.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또한 이 사회에 공헌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서 생계를 유지하고 가족을 부양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일과 노동은 신성한 것이고 중요한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일의 가치, 노동의 가치를 절하하는 것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오늘은 성경이 말씀하는 경제 윤리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은 일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을까요?
성경은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시작됩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는 그 모습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가만히 천국 보좌에 앉아 계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선한 계획을 세우시고 그 계획에 따라서 실행하셨습니다.
그렇게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분의 대리인을 또한 만드시고 그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 28절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아멘.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이 창조된 목적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아무 의미 없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이 세상을 관리하고 다스리는 책임을 받았습니다.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중요한 명령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마태복음 28장에서 주신 그 명령을 우리는 대위임령 혹은 선교 명령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창세기 1장에 있는 명령을 우리는 문화 명령 혹은 창조 명령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고백할 때 창조주와 구원자로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되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타락한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구원자가 되십니다.
창조 사역과 구원 사역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실행하시는 사역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위해서 그분의 형상을 가진 우리 인간을 하나님께서 동역자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지키고 관리하는 일을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구원을 온 세계에 전하는 선교 명령을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문화 명령과 선교 명령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주 중요한 사명입니다.
일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일은 타락의 결과가 아닙니다.
원래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편안하게 살고 있었는데 그가 죄를 짓고 타락했기 때문에 그 벌로 일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타락하기 이전에 하나님은 아담에게 일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창세기 2장 15절에 나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세기 2장은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이죠.
타락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동산을 경작하고 지켜라.
영어로 하면 Work and guard 라고 되어 있습니다.
07:18
히브리어로 보면 아바드와 사마라는 동사가 사용되었는데, 이 두 개의 단어가 함께 쓰이면 제사장의 직분을 의미합니다.
성서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아바드하고 사마르 하라고 명령하셨는데, 그것은 그에게 제사장의 직분을 주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에덴 동산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초소였기 때문에 그곳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규례를 지켜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동산을 가꾸는 것은 순전히 육체적인 노동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제사장으로서의 직분을 수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 안에서의 사역만 거룩한 것이 아니라 교회 바깥 세상에서 하는 모든 일이 거룩한 일이고,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직업은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소명입니다.
일은 타락의 결과, 밥벌이 수단이 아닙니다.
일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거룩한 소명입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자 존 칼빈의 소명 의식이었습니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 1920년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자본주의 발전 과정을 연구한 그는 근대 자본주의의 기원을 산업혁명이나 계몽주의가 아니라 칼빈주의 신학에서 찾았습니다.
서구 사회를 살펴보면 자본주의 발달이 빨랐던 나라가 있는가 하면 조금 느리게 진행된 나라도 있습니다.
자본주의 발달이 빨랐던 국가들은 네덜란드, 영국, 미국과 같이 칼빈주의 신학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상대적으로 자본주의 발달이 늦었던 국가들, 이탈리아, 스페인 등은 로마, 카톨릭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났을까요?
종교개혁자 칼빈은 이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직업은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이며, 그리스도인은 근면하고 성실하게 절제하며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목회자만 성스러운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직업은 다 성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면 세상의 모든 직업은 거룩한 소명입니다.
반면에 로마 카톨릭은 사제주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제 신부의 일은 거룩한 일이고, 세상에서의 일은 그보다 조금 덜 거룩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사제만이 성찬과 세례 같은 성례를 거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와 평신도는 서로 다른 소명입니다.
목회자가 평신도보다 더 본질적으로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목회자가 평신도보다 더 성숙해야 합니다.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더 성숙해야 합니다.
제가 이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평신도는 연봉 많이 주는 회사로 옮겨가도 되지만 목사는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평신도는 외제차를 타도 되지만 목사는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말씀대로 사는 본을 보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목회자가 평신도보다 본질적으로 더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이것이 바로 종교개혁자 존 칼빈이 주장했던 만인제사장주의였습니다.
막스 베버는 이 사상이 근대 자본주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베버은 신학자가 아니라 사회학자였습니다.
그런데 사회학자가 보기에도 직업을 밥벌이가 아니라 소명으로 여길 때의 진정한 의미에서 경제 발전이 있었다 하는 것입니다.
베버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근대 자본주의 발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은 비양심적으로 불을 축적한 투기꾼이나 금융업자들이 아니라 시민 계층으로서 엄격한 원칙을 갖춘 가운데 신중하면서도 과감하게 냉정하고 꾸준하며 철저하게 자신에게 맡겨진 소명을 수행한 사람들이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칼빈주의 신학을 따르는 청교도들은 근면하고 성실했습니다.
그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했습니다.
농사를 짓든 장사를 하든, 건축을 하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했습니다.
그리고 탐심을 버리라는 말씀에 순종해서 검소하게 살았습니다.
여러분 열심히 일하고 검소하게 살면 어떻게 될까요?
돈이 모이겠죠.
그렇게 자본이 모임으로써 근대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막스 베버의 주장이었고, 사회학적으로 경제학적으로 입증된 이론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과 함께 일의 가치가 변질되었습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창조 세계를 관리하고 다스리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죄로 타락한 인간은 자신의 탐욕을 위해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을까?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창조 세계를 관리하지 않고 파괴하고 착취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이 환경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자연의 소비자로서 최대한의 이윤을 얻고자 했습니다.
청지기가 아니라 소비자로서 자연을 대하기 시작할 때 자신의 탐욕을 위해서 무차별적으로 환경을 파괴했습니다.
여러분 성경 어디에도 자연을 마음대로 파괴해도 된다는 말씀 없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명령은 자연을 다스리고 지키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자연을 파괴했던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들이 아니라 자기 탐욕을 위해 살아가던 세속주의자들이었습니다.
성경은 탐욕을 심각한 죄악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5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greed)은 우상 숭배니라.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그 생각이 탐심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 재물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아멘.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동시에 섬기면 안 된다가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든지 아니면 재물을 섬기든지 둘 중에 하나만 섬길 수 있습니다.
둘 다 섬기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재물을 섬기는 사람의 특징은 분명합니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자연을 파괴합니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착취합니다.
다른 사람을 볼 때 사랑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지 않고 경제적 이윤을 얻을 수단으로 여길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더 많이 가질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상대방의 것을 빼앗습니다.
여러분 상대방의 것을 빼앗는 데에는 여러 가지 기술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원래 가격보다 더 비싸게 파는 방법도 있고, 마땅히 주어야 하는 그 대가를 주지 않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구약 율법에서 금지된 행동입니다.
레위기 19장 1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너는 내 이웃을 억압하지 말며, 착취하지 말며,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
내가 고용한 그 일꾼의 삯을 다음 날까지 미루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직원에게 정당한 임금을 제때에 주라는 말씀입니다.
하루 벌어서 하루 먹는 사람을 착취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주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약 성경에서 누가 이 죄를 지었을까요?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고 착취했던 대표적인 인물이 구약에서 누가 있을까요?
바로 애굽의 왕 바로입니다.
바로는 교만한 왕이었습니다.
가난한 히브리인들을 착취하는 왕이었습니다.
자기 탐욕과 영광을 위해서 힘이 없는 자들을 학대하는 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해방인 동시에 그렇게 억압하고 착취하던 바로 왕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가난한 자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그 왕을 하나님께서 공의로 심판하셨습니다.
10가지 재앙을 통해서 바로 왕과 그가 섬기는 거짓 우상들을 심판하셨습니다.
우리 교회 공동 기도문 중에 이런 기도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땀 흘려 수고한 만큼 대우받는 정의로운 나라가 되어 온 국민이 행복한 삶을 누리게 해 주시옵소서'라는 기도가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짧은 문장이지만 많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먼저 땀 흘려 일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고백하고 있습니다.
일하지 않고 돈을 버는 것, 일하지 않고 국가의 혜택에 의존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주신 신성한 사명이기 때문에 땀 흘려 일하는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또한 일한 만큼 대우를 받아야 합니다.
열심히 일한 사람이 있고 대충 일한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 똑같이 대우하는 것은 정의가 아닙니다.
열심히 일한 사람이 더 대우를 받는 것이 정의로운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모두 다 똑같은 소득을 가져야 하는 결과적 평등을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있고 부자와 가난한 자가 있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기회를 부여하는 기회의 평등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기회의 평등과 결과적 평등을 헷갈리면 안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사람이 일한 만큼 대우를 받기 위해서는 구조적인 불의가 없어야 합니다.
사회 구조 안에 불의가 있으면 어떤 사람은 적게 일하면서도 많이 받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많이 일하고서도 적게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 또한 하나님의 정의가 아닙니다.
인간의 타락은 일의 가치를 변질시키고 사회 구조를 불리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일의 가치를 하찮게 여기게 되었고, 가능하면 일을 적게 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주 5일 근무제를 넘어서 주 4일 근무제를 하자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런 이 세대를 향해서 성경은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너무나 명확한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일하지 않고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큰 박해를 받다 보니까 그들이 열광주의적인 종말론, 잘못된 종말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금방 주님께서 재림하실 텐데 굳이 열심히 일할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모여서 다 같이 기도하고 찬양하고 영적인 일에 더 힘을 써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분명하게 경고했습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3장 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아멘. 바울은 게으르게 행하는 사람들로부터 떠나라고 권면합니다.
그런 사람들 가까이에서 그들로부터 나쁜 영향을 받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게으른 이 헬라어로 아타토스인데 문자적인 의미로는 '무질서한, 제멋대로의'라는 의미입니다.
영어로 하면 unruly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규범을 따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게으른 것과 하나님의 규범을 따르지 않는 것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게으른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 중에 어떤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문화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문화 명령을 주셨습니다.
이 동산을 경작하고 지켜라, work and guard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의 태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게으른 것입니다.
일하지 않습니다.
일의 가치를 폄하합니다. 그저 편안하게 살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웠다고 주장하면서 그냥 게으르게 나태하게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것은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웠다고 믿으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현대 사회에서는 그 재림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으니까 다르게 질문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의 죽음이 가까워 왔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6개월 정도 시간이 남았다라고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세상에서 즐길 수 있는 거 다 즐기겠습니까?
집 팔아서 세계일주를 다니시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마지막 시간을 가장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앞장에 나와 있습니다.
2장 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아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여러분 죽음이 가까웠다고 해서 갑자기 뭐 새로운 일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마지막 시간을 가장 의미 있게 보내는 것은 나에게 주어진 본연의 일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그 사명을 감당하고 끝까지 그 일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할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는 말이 있죠.
이 말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누가 이 말을 했을까요?
한국에서는 스피노자가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유럽에서는 마틴 루터가 한 말로 알려져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가 스피노자보다 150년 더 일찍 태어났기 때문에 아마도 루터의 말이 맞을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데살로니가후서에 있는 이 말씀을 현대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이르렀다고 해서 우리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주님 오시면 다 끝났다고 생각하며 게으르게 제멋대로 살아서도 안 될 것입니다.
흔들림 없는 마음으로 우리에게 맡겨진 그 일에 충성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세상을 주님의 뜻대로 다스리고 지키라 하신 그 문화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공의로우신 재판장 되신 주님 앞에서 올바른 태도를 가지고 흔들림 없이 맡겨진 사명에 충성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적인 경제 윤리를 논하기 위해서 한 가지 더 살펴볼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wealth)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돈이 많은 것은 축복입니까? 아니면 저주입니까?
성경은 부에 대해서 두 가지 관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첫째로 부는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우리를 축복하기 원하십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좋은 것 주고 싶은 그 마음은 당연한 것이지, 나보다 내 자녀가 더 행복하게 살기 원하는 것이 바로 부모의 마음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고 형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를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씀합니다.
시편 36편 8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살찐 곳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다.
아멘. 의인은 하나님의 집에서 살찐 것을 풍족하게 먹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부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언약적인 축복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에게 건강과 부와 평안을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한국 사회와 미국 사회의 차이가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부자를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미국 사회에서는 기본적으로 부자를 좋게 봅니다.
부자가 세금도 많이 내고 기부도 많이 하고 일자리도 창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부자를 나쁘게 보지 않고 열심히 일해서 자수성가한 부자를 존경합니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는 부자를 나쁘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치 모든 부자는 편법을 써서 돈을 번 것처럼 사회적으로 몰아세울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간에 부자로부터 세금을 더 거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국세청의 통계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나라 소득 상위 1%가 종합소득세 전체의 51%를 납부한다고 합니다.
상위 10%가 근로소득세 전체의 73%, 종합소득세 전체의 87%를 납부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건강보험, 사회보장 제도가 운영되는데 부자들은 많은 세금을 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든 부자를 나쁘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부자는 악하고 가난한 자는 의롭다.
부자는 지배 계급이고, 가난한 자는 피지배 계급이다라는 이 생각은 위험한 생각입니다.
여러분 부자 중에서 선한 사람도 있고 악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난한 사람 중에서도 선한 사람도 있고 악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가 중요한 것이지, 부자인지 가난한 사람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부자가 되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잘 믿으면 모두 다 무조건 부자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자기 손으로 열심히 일해서 생계를 유지하고 또한 재물을 모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28절 함께 읽겠습니다.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아멘. 여러분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었던 경험이 있으십니까?
선한 사업을 위해서 후원하고 헌금을 했던 적이 있으십니까?
아무런 대가 없이 누군가를 도와준다면 정말로 기분이 좋습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할 때 느끼는 그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은 차가운 세상입니다.
현실이 얼마나 냉혹한지 우리 모두가 다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직장생활 냉혹하죠 솔직히 말해서 목회 현장도 똑같이 냉혹합니다.
큰 교회는 큰 교회대로,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대로 목회 현실도 냉정합니다.
이렇게 냉정한 사회에서 아무런 대가 없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도와주고 섬기면 우리 마음이 얼마나 따뜻해지는지 모릅니다.
영상 뉴스에서 보신 것처럼 몇 년 전부터 우리 교회 청년부는 사랑의 연탄 나눔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연탄을 떼는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연말마다 봉사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봉사 활동을 하려면 미리 신청을 해야 합니다.
교육과 훈련 신청받고 단기 선교 신청받는 것처럼 온라인으로 미리 신청한 사람만 봉사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경쟁률이 근데 엄청 세대요.
신청이 금방 마감된다고 합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이 연탄 봉사를 했던 그 청년들이 너무 좋은 피드백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아무 대가 없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섬기고 도와줄 때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 마음이 드는지 그들이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부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부를 축적한 과정이 정당해야 합니다.
내 손으로 열심히 일해서 축적한 것으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도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와 동시에 부는 올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를 축적하다 보면 눈에 보이는 그 부에 집착할 수도 있습니다.
돈으로 사람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보다 돈을 더 의지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부는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는 올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시편 69편 22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들의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그들의 평안히 덫이 되게 하소서.
아멘. 시편 69편은 다윗이 그를 공격하는 그 원수에 대해서 탄원하는 시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이 악한 자를 심판해 달라고 다윗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 중에 그들의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풍성한 식탁, 풍성한 재물을 자랑하는 그들에게 그것이 올무 덫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전에 짐승을 받을 때 덫을 사용했죠.
그 덫에는 그 짐승이 좋아할 만한 음식을 놓았습니다.
그 음식을 먹으려고 할 때 덫에 걸려서 잡히고 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원하는 풍성한 식탁, 풍성한 재물이 덫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부의 양면성을 다 말하고 있습니다.
부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와 동시에 부는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는 올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부유한 자들에게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17절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에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아멘. 부유한 자들을 향한 경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재물이 많다고 교만하지 말라.
둘째, 재물의 소망을 두지 말고 그 재물을 주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재물, 눈에 보이는 성공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닙니다.
여러분 성공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는가에 있지 않고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쳤는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부자라고 해서 반드시 영향력이 큰 것은 아닙니다.
자기의 것을 절대로 나누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는 영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가난하다고 해서 영향력이 작은 것도 아닙니다.
자신을 비우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살아가면 그 사람은 엄청난 영향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영향력이 크셨던 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부자이셨습니까?
예수님에게 어떤 정치 권력이 있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부자도 아니었고, 정치 권력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더 큰 영향력을 가지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자기 자신을 비우셨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며 살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해를 맞이하면서 여러분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 한 권 있습니다.
데이빗 브룩스가 쓴 두 번째 산이라는 책입니다.
이분은 월스트리저널과 뉴욕 타임즈에서 일하면서 이른 나이에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미국의 역대 대선 후보들이 찾아와서 그에게 자문을 구할 정도였습니다.
뉴욕에서 가장 부유한 동네에 살면서 모두가 부러워하는 화려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인생이 하나씩 하나씩 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내와 이혼하게 되었고, 건강에도 문제가 생겼습니다.
작가로서의 커리어도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인생의 깊은 계곡을 지나며 그가 깨달았던 것이 있습니다.
내가 추구했던 성공이라는 산이 전부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생에는 의미라는 두 번째 산이 있고, 거기에 오르기 위해서는 신앙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데이빗 브록스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첫 번째 산이 자아를 세우고 자기를 규정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 산은 자아를 버리고 자기를 내려놓는 것이다.
첫 번째 산이 무언가를 획득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 산은 무언가를 남에게 주는 것이다.
첫 번째 산이 계층 상승의 엘리트적인 것이라면, 두 번째 산은 무언가 부족한 사람들과 손잡고 나란히 걷는 것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첫 번째 산에 올라가고자 애씁니다.
남들보다 빨리 성공하고 더 많은 재물을 얻고자 노력합니다.
그런데 막상 그 첫 번째 산 정상에 올라가면 그 기쁨은 오래 가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두 번째 산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공의 산이 아니라 의미의 산입니다.
두 번째 산에 오르기 위해서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눈에 보이는 재물이 아니라 그 재물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믿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8장 18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내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 같이 하심은 내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아멘. 눈에 보이는 재물을 의지하고 자랑하면 그 재물이 우리에게 올무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재물을 사용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이 시대 가운데 나 자신을 위해서만 재물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일하지 않고 돈을 벌려고 하는 이 시대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소명을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ZL_FfD6r_Lc
'문대원목사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탄축하예배) 평화의 회복_2024.12.25 (2) | 2024.12.30 |
---|---|
[선한목자교회] 금요성령집회 2024년 12월 13일 | 사랑 받은 자, 보냄 받은 자 (1) | 2024.12.17 |
크리스천의 윤리 (6) 동성애와 젠더 이데올로기 (5) | 2024.12.16 |
크리스천의 윤리 (5) 성적 순결의 중요성 (2) | 2024.12.15 |
241201 [선교주일] 신실한 하나님, 신실한 증인 (3) | 2024.1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