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1-26 (주일)ㅣ대구동신교회 주일설교ㅣ 다시 생명사역 (3) 여러사람에게 여러모양으로
고린도전서 9:19-23 | 문대원 목사
우리 교회의 사명이자 핵심 가치인 생명 사역에 대해서 시리즈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목표가 확실하고 비전이 확실한 교회는 일관성이 있고 안정감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생명 사역이라는 목표를 향해서 온 교회가 한마음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생명 사역은 어떤 특정한 개인의 사역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입니다.
우리 교회 19개 위원회와 모든 부서는 복음으로 사람을 살리고 키우고 고치는 이 사역을 위해서 나아갑니다.
생명 사역이 무엇이고 어떤 특징이 있는지 지난 2주간 살펴보았습니다.
생명 사역은 생각의 틀을 바꾸는 사역이고, 성령의 불을 체험하는 사역입니다.
진정한 변화는 전 인격적인 변화이기 때문에 머리도 변해야 하고 또 우리의 마음도 변해야 합니다.
우리 신앙에서 성령의 불을 체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
지난 금요 기도회에서는 성령 충만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온 성도가 뜨거운 마음으로 함께 기도할 때에 지금도 살아계신 성령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오늘부터 5주에 걸쳐서 생명 사역의 5대 사역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사용하는 5대 사역 도표가 있습니다.
첫째로 전도와 선교, 둘째로 예배, 셋째로 교재, 넷째로 교육과 훈련, 마지막으로 봉사와 사역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 5가지 사역 중에서 무엇이 제일 중요할까요?
어떤 사역이 잘 되어야지 교회가 부흥할까요? 우리 교회 탐방 오시는 분들께 제가 이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어떤 분은 선교라고 답하시고 또 어떤 분은 예배라고 답하십니다.
정답은 5가지 모두입니다. 교회가 건강하게 부응하기 위해선 5대 사역이 모두 다 견고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전도와 선교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교육과 훈련이 없는 교회가 있다면 그 교회는 건강한 교회가 아닐 것입니다.
반대로 교육과 훈련을 열심히 받고 있는데 예배 가운데 성령의 역사가 없고 은혜가 없으면 그것도 건강한 교회가 아닐 것입니다.
예배에는 큰 은혜와 역사가 나타났는데, 봉사와 사역을 감당하지 않는 교회도 건강한 교회는 아닐 것입니다.
교회가 건강하게 부응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5대 사역이 모두 다 견고해야 합니다.
사실 이 5대 사역은 교회의 기능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 공동체입니다.
또한 교회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선교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지역사회를 섬기는 봉사 공동체입니다.
5대 사역은 교회의 본질을 알기 쉽게 표현한 것입니다.
오늘은 첫 번째로 전도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전도가 많이 어려워졌죠.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커뮤니케이션 방식의 변화입니다.
과거에는 TV와 라디오를 통해서 우리가 일방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였습니다.
TV 채널도 몇 개 없었고, 각 채널에서 보내는 그 방송을 우리가 일방적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유튜브와 같은 OTT 플랫폼이 발달했습니다.
더 이상 일방적으로 TV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프로그램을 선택해서 그것을 봅니다.
제가 이제 미국에서 공부할 때 디렉트 TV라는 스트리밍 서비스가 미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TV에서 그걸 알리는 광고가 나왔는데 그 광고 문구를 제가 지금까지 기억합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동적으로 앉아서 TV를 보지 말고 내가 원하는 대로 TV를 조정하라는 의미입니다.
당시만 해도 제가 이게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정보를 선택해서 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젊은 사람들 중에서 TV 시청 인구는 점점 줄고 있고, OTT를 통해서 내가 원하는 영상을 찾아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의 커뮤니케이션은 전달자와 수용자 사이에 쌍방향 소통이 일어나야 합니다.
분야를 막론하고 일방적인 주장, 일방적인 외침은 공감을 얻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전도 방법이 필요합니다.
나는 그냥 과거에 했던 대로 전도하겠다라고 하는 것은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들이 듣든지 말든지 그냥 나는 내가 할 말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나 중심이 아니라 상대방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들, 우리 명절 때 손주들 오면 어떻게 대하십니까?
어른들의 관점으로 말씀하십니까?
아니면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소통합니까?
당연히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대화하고 소통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나 중심으로 하지 않고 상대방을 중심으로 전해야 합니다.
나에게 편하고 효과적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편하고 효과적인 방식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전도는 의무가 아니라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전도법에 대해서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나의 신분, 나의 권리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비워 많은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19절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삶을 얻고자 함이라
아멘. 바울이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말한 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사도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였습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의 시민권을 가졌습니다.
지금도 미국 시민권이 있으면 여러 가지 혜택이 많이 있습니다.
전 세계 어디를 가든지 미국 대사관이 있기 때문에 미국인들은 자국의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제가 아프리카 부룬디 선교사로 있던 2018년에 그곳에서 내전이 일어났습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부군과 반군 사이에서 무력 충돌이 있었습니다.
밤마다 기관총 소리와 로켓포 소리를 들었습니다.
상황이 위험해서 아내와 딸을 이제 한국으로 보내야 했습니다.
비행기표를 급하게 알아보던 중에 미국 대사관에서 이메일이 왔습니다.
미국 국민과 그 직계 가족을 위한 전세기를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몇 월 며칠에 공항으로 오면 그 전세기를 타고 갈 수 있다고 안내 이메일이 왔습니다.
저희 딸이 미국에서 태어나서 미국 시민권이 있습니다.
저희 딸과 직계 가족인 저희도 원한다면 전세기를 탈 수 있었습니다.
미국이 정말 대단한 나라구나 제가 느꼈던 순간이었습니다.
다행히도 저희는 하루 전에 다른 항공권을 구해서 그 비행기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미국 시민권이 있으면 전 세계 어디를 가도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물며 2천년 전에 로마 시민권은 그보다 더 큰 혜택이 있었습니다.
사실 미국 시민권이야 미국에서 태어나면 다 자동적으로 나오지만 로마 제국에서는 전체 국민의 10%에게만 시민권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로마 시민에게는 여행의 자유가 있었고, 군대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제국 내에서 자유롭게 상업 거래를 할 수 있었고, 병역 면제의 혜택도 있었습니다.
공정하게 재판을 받을 권리도 있었고, 재판 이후에 항소할 권리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로마 황제에게도 항소할 수 있었고, 이 경우에 로마까지 안전하게 호송을 받으며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 바울이 말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보다 더 자유롭지만 내가 스스로 종이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누구보다도 자유롭고 누구보다도 더 많은 권리를 가졌지만 내가 스스로 종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무엇을 위해서 그랬을까요?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그랬습니다.
더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고자 그랬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의 모습으로, 이방인들에게는 이방인의 모습으로 나아갔습니다.
본문 20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오,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오.
아멘. 바울은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었습니다.
최고의 율법사 가말리엘에게 배웠고, 교회를 박해하는 열심과 열정을 가졌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율법에 철저한 사람이었는지 나타내는 구절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 6절에 보면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기준으로는 바울에게 아무런 흠이 없었습니다.
대단한 일이죠.
여러분 율법의 기준이 얼마나 높은데 그 기준을 다 지켰습니다.
여러분이 알고 계신 가장 헌신된 크리스천이 누구입니까?
믿음과 열정과 헌신에서 내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그런 크리스천이 누구입니까?
그 사람이 누구든지 바울은 그보다 한 수 위였습니다.
바울은 율법의 기준으로 가장 완벽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기꺼이 자신의 전통을 내려놓을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하겠습니까?
더 많은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라면 바울은 무엇이든지 다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성숙한 믿음의 모습입니다.
교회에서 어떤 두 사람이 어떤 문제로 논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교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취향의 문제를 가지고 서로 논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뭐 이렇게 해도 되고 저렇게 해도 되는 문제를 가지고 논쟁할 때, 여러분 누가 더 성숙한 사람일까요?
어떻게든 강하게 주장해서 자기가 원하는 바를 이루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상대방을 배려해서 자기 뜻을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일까요?
누가 더 성숙한 사람인지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6절, 27절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아멘.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는 섬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으뜸이 되고자 한다면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주인 되신 예수님께서 겸손과 섬김의 모델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된 그 영광을 취하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자기가 창조했던 그 사람들과 동일한 모습이 되셨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주의 왕이신 예수님은 섬김을 받지 않으시고 도리어 섬기셨습니다.
모든 사람의 종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가장 잘 이해하고 가장 잘 실천했던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자유로웠던 바울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의 모습으로,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의 모습으로 나아갔습니다.
철저하게 자신을 비우고 상대방의 모습으로 다가가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미국의 신학자 딘 플레이밍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복음은 문화적 고향으로부터 분리된 추상적인 개념으로는 들려질 수 없기에, 하나님은 유대인에게는 유대식으로, 헬라인에게는 헬라식으로, 필리핀 사람에게는 필리핀 식으로, X 세대에게는 X세대 식으로 말씀하신다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복음과 문화의 관계를 이해해야 합니다.
복음은 문화적 진공 상태에서 전달되지 않습니다.
복음은 항상 문화의 옷을 입고 전달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 가운데 오실 때 어떤 모습으로 오셨는지 기억하면 알기 쉽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천사와 같은 모습으로 이 땅 가운데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1세기 유대 남성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문화, 특정한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물론 주님께서 선포하신 천국 복음은 영원합니다.
복음의 핵심은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복음이 문화적 진공 상태에서 전달된 것이 아니라 문화의 옷을 입고 전달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할 때 중요한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이 복음의 핵심이고 무엇이 문화의 옷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무엇이 복음이고 무엇이 문화인가 우리가 분별할 수 있어야 됩니다.
복음의 핵심은 절대로 타협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이 핵심은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복음이 전달되는 방식, 문화의 옷은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천 명에게 복음을 전하기 원한다면 과거에는 아마 한 가지 방법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큰 전도 축제를 열어서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사람마다 성향도 다르고 취향도 다르고 좋아하는 것도 다릅니다.
여러분 예를 들어서 예전에는 커피 종류가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요즘 카페에 가면 커피 종류가 엄청나게 많이 있죠.
아메리카노 라떼, 모카, 카푸치노, 콜드부르 등등 엄청나게 많은 종류가 있습니다.
심지어 카페 라테도 똑같이 만들지 않고요, 각 사람에게 맞게 커스터마이즈 합니다.
어떤 사람은 라떼를 주문하면서 샤츠가 하고 저지방 우유에 우유 향 적게, 우유 뜨겁게 해주세요라고 이야기합니다.
제가 그렇게 말합니다.
예전에는 이렇게 말하면 까탈스럽다고 했지만 요즘은 뭐 이런 식으로 각 사람에게 맞게 커스터마이즈 해서 커피를 마십니다.
여러분 카페에서도 이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커피를 주문하는데 어떻게 교회에서 한 가지 방식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얼마든지 다양한 방식을 사용해서 각 사람에게 맞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20~30대 청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방식,
이제 막 결혼해서 아이를 낳은 젊은 부부에게 복음을 전하는 방식,
아이 다 키우고 은퇴하신 분들께 복음을 전하는 방식이 다 달라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중요한 것은 어떤 전략이 아닙니다.
전도를 위한 전략을 세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품었던 마음입니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의 모습으로,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의 모습으로 다가가는 마음입니다.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비우고 상대방의 모습으로 다가가서 복음을 증거하는 마음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누구보다도 자유로웠던 바울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기꺼이 종이 되었습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졌던 최고의 엘리트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마음인 줄로 믿습니다.
겸손과 섬김의 의미를 모르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신 그 섬김의 방법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전도에 있어서 중요한 개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동일화의 원리입니다.
동일화란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 사람의 감정과 필요와 갈망에 공감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꼭 들어야 하는 그 말을 해주는 것입니다.
동일화와 동화는 서로 다른 개념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타락한 이 세상과 동화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동일화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예수님의 별명이 있었습니다.
혹시 여러분 예수님의 별명을 아십니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해서 만든 별명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7장 34절에 나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에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오,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리켜서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불렀습니다.
여러분 유심히 보셔야 됩니다. 예수님에게 죄인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죄인의 친구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어기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죄인들과 동일화되셨습니다.
그들에게 다가가셨고 그들의 감정에 공감하셨고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가장 중요한 전도의 자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 한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상대방이 꼭 들어야 하는 이야기, 상대방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식을 자랑하시지도 않았고요. 부를 과시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때 자기 자랑하려고 기적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대화 중에 끊임없이 자기 자랑하는 경우가 있죠.
막벌 자랑하고 돈 자랑하고 자식 자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모든 대화의 주제를 끌고 와서 자기 자랑으로 끝내는 경우가 있죠.
그런 사람하고 대화하면 별로 유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결코 자기 자랑하지 않았고 상대방에게 집중해서 상대방이 들어야 하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과 4장이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복음을 전하십니다.
또한 요한복음 4장에 가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십니다.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은 완전히 다른 두 사람입니다.
정말 공통점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한 명은 남성이고 한 명은 여성이었습니다.
한 명은 유대인이고, 또 한 명은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한 명은 성경 전문가이고 한 명은 성경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두 사람의 눈높이에 맞춰서 각각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각 사람에게 집중하셔서 그에게 질문하시고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5절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아멘.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예레미야가 선포했던 새 언약의 개념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주실 것인데 그것은 새 마음에 기록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옛 언약은 문자로 기록되었지만 새 언약은 성령을 통해서 마음에 기록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율법사였기 때문에 구약 성경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레미야의 새 언약을 가지고 구원과 거듭남에 대해서 설명할 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는 아주 심오한 신학적인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반면에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너무나도 쉽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 14절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아멘. 여러분 이 말씀은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어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우물가에서 이 말씀을 하셨다면 나의 목마름 나의 갈망을 채워주시겠다는 그 예수님의 구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의 눈높이에 맞춰서 복음을 증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의 감정, 필요, 갈망에 공감하셨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일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들어야 하는 말을 상대방의 입장에서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동일화의 원리입니다.
여러분 전도는 일, 프로젝트가 아니라 인격 퍼슨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종교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전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 인격을 예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전도합니다.
전도가 인격에 관한 것이라면 상대방을 향한 인격적인 관심은 필수적입니다.
상대방을 향한 사랑, 관심, 이해, 존중이 전도에 있어서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상대방의 인격을 향한 관심이 없으면 우리가 전도를 하면 안 되죠.
내 만족을 위해서, 내 종교적 의무를 위해서 전도하는 것은 진정한 전도가 아닙니다.
상대방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나 자신을 비우는 것.
이것이 바로 동일화의 원리입니다.
나의 자유를 내려놓고 상대방의 모습으로 다가가는 것,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으로 다가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 이것이 바로 동일화의 원리입니다.
저는 아프리카 선교사 출신이기도 하고 또 선교 역사를 전공한 선교학자이기도 합니다.
선교사이자 선교학자니까 제가 얼마나 많은 선교사들을 알고 있을까요?
여러분 훌륭한 선교사는 어떤 모습일까요?
공부를 많이 하고 지식이 많고 박사 학위가 있으면 훌륭한 선교사일까요?
열정이 넘치고 헌신적이면 훌륭한 선교사일까요?
아니면 기도 많이 하고 영성이 깊은 사람이 훌륭한 선교사일까요?
진짜 훌륭한 선교사는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진 사람'입니다.
아무리 지식이 많고 아무리 열정이 많아도 자기 주장 강하고 자기 고집이 강하면 선교지에서 제대로 복음을 전할 수가 없습니다.
현지인들을 무시하거나 강압적으로 선교하는 사람은요 선교를 잘할 수가 없습니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의 모습으로,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의 모습으로 나아갈 수 있는 그런 선교사가 훌륭한 선교사입니다.
상대방의 눈높이에 맞춰서 그들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그런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훌륭한 선교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정말로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큰 자는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낮춰 종의 모습을 취할 때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나아간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22절 함께 읽겠습니다.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오,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여러분 진짜로 성숙한 사람은 자신을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내가 살아있고 내 자아가 살아 있는 사람 사실은 아직 성숙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자신을 내려놓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의 감정과 필요와 갈망에 공감하는 이 동일화의 원리를 가지고 복음을 증거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전도에 대해서 중요한 것들이 많이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오해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흔히 전도를 복음을 전해서 예수님을 믿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전도에 대한 오해입니다.
예수님을 믿게 만드는 것. 예수님을 영접시키는 것은 사실 이제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죠.
이것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여러분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내가 믿기로 결정한다. 그렇다고 믿는 게 아니죠.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허락하셔야지 그래야지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전도는 예수님을 믿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내가 경험한 예수님의 사랑과 구원을 있는 그대로 증거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이것은 마치 좋은 맛집을 발견한 사람이 내가 경험한 그 맛집을 설명하는 것과 마찬가지죠.
그곳에 갈지 말지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을지 말지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마음을 열고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나타나는 회심의 역사입니다.
그것까지 우리의 힘으로 다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내가 경험한 그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또한 전도는 단판 승부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전도를 단회적인 이벤트로 생각합니다.
이번에 전도 축제에 와서 예수님을 영접해야지 전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제 교회에 왔는데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영접 기도하는데 일어나라고 옆에서 막 꼬집어도 끝까지 거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다고 해서 전도에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는 않았지만 교회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가지고 교회에 이렇게 오기 시작하는 것도 전도입니다.
사실 교회에 처음 오는 것이 어렵지 한 번 오면 다시 또 방문하는 것은 훨씬 더 쉬워집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교회 가겠다고 약속했는데 당일날 연락이 안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분명히 전날까지 신신당부했는데 당일이 되면 전화를 받지 않는 거죠.
그렇다고 해서 전도에 실패한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교회에 가겠다고 약속을 한 것 자체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모든 약속 다 즉각적으로 다 지키십니까?
살다 보면 약속 당장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약속을 하는 그 순간에는 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결심을 한 겁니다.
지금 당장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지만 그렇게 결심한 것을 우리가 칭찬하고 격려하고 기도하면서 기다려주면 됩니다.
전도는 단판 승부가 아닙니다.
지금 당장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했다고 해서 전도에 실패했다고 우리가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교회를 향해서 한 걸음 가까이 나아갔다면 여러분 그것은 성공한 전도인 줄 믿습니다.
미국 휘튼 대학에서 전도학을 가르치는 루치아드슨 교수님은 포스트 모던 시대의 전도를 5단계로 제시했습니다.
첫째로 우정 관계를 형성하고 기도하는 단계
둘째로 영혼을 깨우는 행사를 주최하는 단계
셋째로 불신자를 공동체로 이끄는 단계
넷째로 불신자를 회심으로 도전하는 단계
다섯째로 새신자가 변화로 나아가도록 돕는 단계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전도를 회심으로 생각한다면 4단계만이 전도입니다.
하지만 전도를 예수님께 나아가는 과정으로 이해한다면 1단계부터 5단계 전체가 다 전도입니다.
불신자와 우정 관계를 형성하고 기도하는 것부터가 여러분 전도입니다.
영혼을 깨우는 행사, 행복 나눔 잔치, 태신자를 위한 음악회를 주최하는 것도 전도입니다.
복음 카페 개최하는 것도 전도입니다.
그 이후에 교회 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도록 다양한 문화 활동, 취미 활동, 봉사 활동에 초청하는 것도 전도입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의 신앙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서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다 보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그때에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심이고 구원을 받는 순간입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죠.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변화되고 성장할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야 합니다.
생각의 틀이 변하고 성령의 불을 경험하는 생명 사역에 동참하도록 인도하는 것까지가 여러분 전도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는 단회적인 이벤트가 아니라 아주 긴 프로세스입니다.
그 시작은 불신자와 관계를 형성하는 것에 있습니다.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해서 결신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그 전도는 어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불신자와 관계를 형성해서 내가 교회로 이끌어오는 것, 공동체로 인도하는 것을 전도의 목표로 생각하면 그렇게 어렵지 않을 수 있습니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전도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결신을 목표로 하기보다 교회 공동체로 초대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예수님을 믿기로 결신을 먼저 하고 그 이후에 교회의 일원이 됩니다.
하지만 이제는 먼저 교회의 일원이 되어서 교회의 다양한 활동에 동참하고 예배와 훈련 가운데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할 수 있다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 교회에서는 다양한 사역을 펼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문화위원회에서는 야구 전도대, 축구 전도대, 자전거 전도대, 사진 전도대, 시니어 합창단 등 여러 가지 모임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일반 성도님들도 오시지만 예수님 믿지 않는 불신자들을 초청해서 함께 운동하고 함께 취미생활하면서 관계를 형성합니다.
그렇게 형성된 관계를 통해서 교회 한번 오세요 하면 자연스럽게 교회에 인도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작년부터는 사회 선교부에서 보육원, 미혼모, 장애인들을 위한 다양한 봉사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요즘 청년들은 봉사 활동에 관심이 많은데 교회에서 좋은 취지의 봉사 활동을 하면 그 일에 참여합니다.
그렇게 관계가 형성되어서 자연스럽게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작년 연말에 제가 개인적으로 우리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5대 사역 전체를 돌아보면서 우리 교회가 지금 하나님 앞에서 어떤 모습인지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여러 가지로 감사할 제목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청년부로 감사하고 교육 부서도 감사하고 세계 선교회도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한 가지 돌아볼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조금은 해이해진 것 같은 우리의 마음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는 사람들이 많이 옵니다.
굳이 전도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많이 옵니다.
주일 2부 3부 예배는 본관에 앉을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굳이 우리가 전도하지 않아도 되니까 전도에 대한 열정이 약해질 수도 있습니다.
물론 전도대에서 열심히 전도하시고 전폭 훈련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그 정도의 열정을 가지고 전도에 임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도의 중요성을 분명하게 세우기를 원하신다고 확신했습니다.
2025년 새해를 시작하며 올해 꼭 복음을 전해야 하는 그 3명을 정해서 기도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내가 경험한 그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의 구원이 꼭 필요한 사람 3명을 정해서 우리가 1년 내내 그 위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 교회로 초청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내가 언제 복음을 전해야 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마음에 품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분별력을 주셔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깨닫게 하십니다.
혹시 어떤 분은 주변에 불신자가 없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일가, 친척들, 친구들, 가족들 다 믿는 사람인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럴 때 전도하기가 어렵죠.
이런 분들은 우리 교회 전도대 사역에 동참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관계를 형성해서 교회로 초청할 수 있도록 전도대 사역이라든지 사회 선교에 동참하시면 됩니다.
얼마 전에 우리 교회 15개 전도대에서 신입사원을 모집한다고 했는데 제가 한 어떤 분께서 기쁨으로 신청하셨습니다.
안 그래도 수성대학교 가서 전도를 좀 하고 싶었는데 내가 혼자서 어떻게 해야 되나 막막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침 전도대가 있으니까 함께 전도할 수 있어서 너무나도 기쁘게 신청을 하셨습니다.
내 주변에 불신자가 없다면 전도자 사역, 사회 선교 사역에 적극적으로 동참해 주십시오.
올해에는 3명의 불신자를 정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한 해가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그 마음을 기억하면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다가가서 우리가 경험한 예수님의 사랑을 증거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상대방의 마음에 공감해서 생명의 복음을 증거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0jnRcq-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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