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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의 윤리 (8) 죄와 벌 24.12.29

by 마이코 2024. 12. 30.



크리스천의 윤리에 대한 마지막 설교를 하겠습니다.
그동안 규범과 상황, 실존이라는 3중 시각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올바른 선택을 내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 된다고 설명드렸습니다.
구체적인 주제로 들어와서 성적 순결과 동성애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경제 윤리와 일의 의미에 대해서도 말씀드렸습니다.
창조 세계의 돌봄과 생명 존중에 대해서는 제가 작년에 설교를 했었습니다.
더 많은 주제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다음 기회에 이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죄와 벌, 형벌 제도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중대 범죄자를 어떻게 대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살인, 강간 같이 흉악한 죄를 저지른 사람을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성경에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으니까 그런 자를 사랑하고 용서해야 합니까?
아니면 자기가 지은 죄에 합당한 벌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사람을 죽인 사람, 도저히 개선의 여지가 없는 사람에게 사형을 내리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최근 언론 보도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의 75%는 사형을 집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27년째 사형 집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실질적 사형 폐지국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사형 제도에 찬성해야 할까요? 반대해야 할까요? 

죄인을 향한 사랑과 그 죄에 대한 공의로운 처벌은 서로 대립되는 개념일까요?
아니면 이 둘은 서로 통합될 수 있을까요? 

국가의 사법기관은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재판하고 형벌을 내리는 권한을 행사합니다.
형벌에는 여러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로 형벌은 범죄 행위에 대한 정당한 응보입니다.
죄를 지었으면 죗값을 치러야 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원리가 있습니다.
자기가 잘못을 했으면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 공의입니다.

둘째로 형벌에는 범죄를 억제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일벌백계의 교훈을 통해서 죄를 단념하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형벌로 인해서 이미 벌어진 죄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죄의 결과가 얼마나 중대한지 깨달아서 죄를 억제하고 예방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셋째로 형벌을 통해서 범죄인을 격리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시민들이 안전하게 살기 위해서 범죄인이 자유롭게 활보하면 안 됩니다.
죄의 경중에 따라서 일정 기간 동안 범죄인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안전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형벌에는 범죄인을 교화시키는 개선의 목적도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교도소를 교화 시설이라고 부르죠. 

교도소에서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정 선교에 힘쓰시는 분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고 변화될 수 있습니다.

형벌에는 이렇게 다양한 목적이 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을 벌하는 목적도 있고, 그 벌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죄를 짓지 못하도록 예방하는 목적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조건 죄를 다 용서해 주는 것이 능사는 아닙니다.
공의를 회복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은 이후에 그 범죄인이 회복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죄와 벌을 논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개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응보, retribution 이라는 개념입니다.


형벌의 본질은 죄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공의가 회복됩니다. 

우리가 응보주의와 엄벌주의를 헷갈리면 안 됩니다.
엄벌주의는 범죄를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사상입니다.
죄를 엄하게 처벌하면 그 벌이 무서워서 범죄율이 낮아진다는 주장이지요.
그에 비해서 응보주의는 죄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엄하게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경중에 따라서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입니다.

엄벌주의에 대해서는 찬성할 수도 있고 반대할 수도 있습니다.
죄를 엄하게 처벌하면 벌이 무서워서 범죄율이 낮아질 수 있습니다.
일례로 미국에서는 흉악범에게 종신형 징역 몇백 년 형을 내리기도 합니다.
특별히 아동을 대상으로 한 범죄에 대해선 조금의 자비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동 성범죄에 대해서 한국은 기본으로 징역 5년을 받지만 미국은 기본으로 징역 25년을 받습니다.
그런데 엄벌주의를 시행하면 교도소가 이제 포화되게 되고 사회적 비용이 많이 듭니다.
미국에서는 엄벌주의를 시행하다 보니까 교도소가 포화되어서 최근까지도 950달러 이하의 절도를 경범죄로 처리했습니다.
요즘 환율이 많이 올라서 950달러면 140만 원입니다.
그러니까 140만 원 이하의 절도는 경범죄로 징역에 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우르르 쇼핑몰에 몰려가서 무더기로 절도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엄벌주의를 시행하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논의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응보주의 가치를 지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죄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는 것이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공의가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공의는 무엇일까요?
성경은 공의를 하나님의 아주 중요한 성품 중 하나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32장 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시는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아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동시에 그분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에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십니다.
이 말씀처럼 위로가 되는 말씀이 없습니다. 

특별히 요즘처럼 정의를 찾아볼 수 없는 시대에 하나님께서 정의롭고 공평하게 판단하신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가끔 보면 이제 사실 관계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성급하게 판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어떤 이야기를 듣고 나서 바로 당사자를 불러서 질책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 보고가 왜곡된 보고라면 당사자는 억울하겠죠.
정직하게 열심히 일했는데 누군가가 왜곡된 보고를 해서 억울한 판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뭐 이런 일은 직장에서 자주 일어날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얼마든지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죠.
사실관계를 확인하지 않고 성급한 판단을 해서 누군가 억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행위와 그 마음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공평하게 판단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백성들에게 공의롭게 판단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레위기 19장 15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고,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 

 

아멘. 하나님께서 부자의 편도 들지 말고 가난한 자의 편도 들지 말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남성의 편도 아니고 여성의 편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정의롭고 공평하게 판단하십니다. 

그러므로 재판할 때에 너희도 가난한 사람 편들지 말고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재판할 때는 정의롭고 공평하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구원인 동시에 불의한 애굽 왕 바로를 향한 심판이었습니다.
바로 왕은 정의롭지 않았고 진실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악한 자를, 약한 자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악한 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악한 왕을 10가지 재앙으로 심판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 가나안을 세우기 원하는 그 나라는 공의로운 나라, 거룩한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의 마지막 설교에서 하나님의 뜻을 선포했습니다.
신명기 16장 20절 함께 읽겠습니다. 

너는 마땅히 공의만을 따르라.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차지하리라.


아멘. 약속의 땅에 세워질 그 나라는 공의의 나라이기 때문에 공의만을 따르라고 말씀합니다.
공의를 따르면 그들이 강성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러면 공의를 따르는 것은 무엇일까요? 

히브리어로 공의를 제레크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법정에서 사용하는 용어였습니다. 

법을 제정하고 법을 준수하고 법을 집행하는 용어였습니다.
레위기 19장 15절에 보니까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공의로 재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하나님께서 주신 그 율법대로 판단하고 율법대로 집행하라 하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공의는 하나님께서 주신 그 율법을 철저하게 따라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판사가 자기 마음대로 자기 기분대로 판결하지 않습니다.
판사는 헌법과 법률이 정한 대로 그 범위 내에서 판단을 내립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공의를 행할 때 내 마음대로 내 기분대로 행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에 근거해서 공의를 행합니다.
모세 5경에는 여러 가지 율법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들은 대체로 판례법, case law 입니다.
재산 상해, 폭행 등 분쟁이 있는 실제 상황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판례를 제시해서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공의로운 원칙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예를 들어서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21장 35절, 36절 함께 읽겠습니다.
이 사람의 소가 저 사람의 소를 받아 죽이면 살아있는 소를 팔아 그 박수를 또한 죽은 것도 반으로 나누려니와, 그 소가 본래 받는 버릇이 있는 줄을 알고도 그 임자가 단속하지 아니하였으면 그는 소로 소를 갚을 것이오 죽은 것은 그가 차지할지니라.


아멘. 어떤 사람의 소가 다른 사람의 소를 들이받아서 죽였습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살아있는 것을 팔아서 값을 나누고, 죽은 소도 반으로 나누어서 가져가면 됩니다.
그런데 어떤 소가 들이받는 버릇이 있었는데 주인이 이것을 방치했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럴 때는 반반 나눠 갖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살아있는 소로 갚아야 합니다.
자기 소에게 들이받는 버릇이 있는 것을 알고서도 단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의도적인 죄와 우발적인 죄를 구별하고 있습니다.
우발적인 죄는 정상 참작을 해서 벌을 감명해 줍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응보주의입니다. 

율법에는 또 다른 말씀도 있습니다.
출애굽기 22장 2절 3절 함께 읽겠습니다.
도둑이 뚫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를 쳐 죽이면 피 흘린 죄가 없으나, 해 돋은 후에는 피 흘린 죄가 있으리라.

 

아멘. 이것은 정당 방위에 대한 말씀입니다.

한밤중에 도둑이 침입한 것을 보고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서 폭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처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해가 뜬 이후에 한낮에 도둑이 오는 것을 보고 폭력을 행사하면 처벌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낮에는 소리를 친다든지, 사람들을 부른다든지 다른 방법으로도 도둑에게 저항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낮에 하는 정당 방위와 밤에 행하는 정당 방위를 구별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잘못을 해도 각각의 상황을 감안해 주는 삼중 시각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행한 대로 그에게 갚아주는 것입니다.
잘했으면 잘한 대로 갚아주고, 잘못했으면 잘못한 대로 갚아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범죄인을 처벌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것입니다.
행한 대로 갚아줌으로써 공의를 회복하는 것이 바로 응보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책이나 인터넷에 보면 응보주의를 반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범죄 예방, 범죄인 교화와 같은 실용적인 목적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중에는 범죄인의 인권도 강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범죄자에게 너무 가혹하게 굴면 안 되고, 그도 심리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이니까 잘 대해주어서 교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피해자의 인권은 어떻습니까?

범죄로 인해서 고통받는 피해자의 인권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가해자 범죄자의 인권이 중요합니까? 

범죄자의 인권만을 강조하는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은 응보의 원리를 믿지 않고 절대적 규범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그들은 무신론자들이고 또한 인본주의자들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응보의 원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그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응보는 깨어진 공의를 바로잡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가 행한 대로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성경은 살인을 매우 심각한 죄악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공격은 하나님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됩니다.
만일 누군가가 우리의 자녀를 공격했다면 그것은 우리를 공격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원리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을 공격하는 것은 하나님을 공격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살인을 금지하는 최초의 명령은 성경 창세기에 나와 있습니다.
대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 노아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노하는 모든 인류의 대표로서 하나님께 약속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때 받은 말씀 중에 살인을 금지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창세기 9장 6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다른 사람의 피를 흘렸으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리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살인에 대한 처벌을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살인을 행한 자는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

민수기 35장 31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고의로 살인죄를 범한 살인자는 생명의 속전을 받지 말고 반드시 죽일 것이며, 

 

고의로 사람을 살인한 사람은 속전 벌금형을 받지 말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다른 죄는 벌금으로 대체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살인에 대해서는 절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대 근동의 다른 국가에서는 사형에 해당하는 중대한 형벌을 벌금으로 대체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살인에 대한 속전을 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율법과 고대 근동의 율법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영국의 구약학자 크리스퍼 라이트 박사는 모세의 율법과 고대 근동의 법전이 어떻게 다른지 비교 연구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바벨론의 함무라비 법전에는 범죄인을 대신해서 다른 사람이 벌을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대리 처벌을 금지했습니다. 

신명기 24장 16절에 보니까 각 사람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할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죄로 자녀를 벌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각 사람이 행한 대로 받는 것입니다.
또한 메소포타미아의 법에서 귀족에 대한 상해는 평민이나 노예에 대한 상해보다 더 큰 처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자국인이나 외국인, 나그네 등 모든 사람이 법 앞에서 동등하게 심판을 받았습니다.
출애굽기 12장 4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본토인에게나 너희 중에 거류하는 이방인에게 이 법이 동일하니라 

 

범죄에 있어서 자국인과 외국인 나그네는 동일한 심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자의 편도 아니고 가난한 자의 편도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편도 아니고 이방인의 편도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정의롭고 공평하게 판단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재판관들은 하나님의 공의대로 판결을 내려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한 사람의 증거로만 판결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두세 사람의 증거가 있어야지 공의로운 판단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의도적인 살인과 우발적인 살인도 구별하셨습니다.
상대방을 해칠 의도를 가지고 죽인 것과 전혀 의도가 없었는데, 사고로 사람을 죽인 경우를 구별하셨습니다.
민수기 35장 22절, 23절에 나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악의가 없이 우연히 사람을 밀치거나 기회를 엿보이 없이 무엇을 던지거나 보지 못하고 사람을 죽일 만한 돌을 던져서 죽었을 때에 이는 악의도 없고 해하려 한 것도 아닌즉

 

우연히 사람을 밀쳐서 사고로 죽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있는지 모르고 큰 돌을 던졌는데 맞아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악의가 없는 경우에는 사형에 처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피해자의 가족이 복수심을 가질 수도 있겠죠.
아무리 악의가 없다 하더라도 우리 가족을 죽게 하였기 때문에 그 가해자를 복수하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하나님은 도피성을 마련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이제 도피성에 가서 피신하면 제사장이 그를 지켜주었습니다.
지금 읽어도 정말로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법령입니다.

 

그런데 이 율법을 받았다는 것이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입니다.
기원전 1440년경이었는데, 그 당시 우리나라는 어땠는지 찾아보니까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로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용하던 토기, 청동검, 고인돌은 남아 있지만 당시 법령은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천 년이 지나야지 그때 비로소 고조선이 시작되었습니다.
고조선의 법률이 8조문이 있다고 하는데 그중에 3개만 남았습니다.


첫 번째로 다른 사람을 죽이면 죽음으로 배상한다.
두 번째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면 곡물로 배상한다.
세 번째로 남의 물건을 훔친 사람은 노비로 삼는다라는 법이 있습니다.
아주 심플하죠. 

그런데 이때보다 천 년 전에 주어진 모세의 율법은 살인의 동기, 살인죄 성립을 위한 조건, 도피성 제도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살인이 왜 심각한 죄악인지 도덕적으로 신학적으로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스라엘의 조상이 우리나라의 조상보다 더 똑똑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이 한국인보다 더 똑똑해서 천 년 전에 훨씬 더 정교한 법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에게 율법을 개시하셨기 때문에 당시 인간이 생각할 수 없는 수준의 법 체제를 갖출 수 있었습니다.

인간이 법을 만든 것이 아니라 도덕법이 인간보다 먼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도덕적인 하나님께서 인간보다 더 먼저 계셨기 때문입니다.
살인자를 처벌하는 것에 대해서 현실적인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죄인을 용서하십니다. 

자기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죄는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살인자도 진심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회개한 살인자에게 사형을 집행해야 할까요? 집행하지 말아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으니까 살인자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할까요?
저도 예전에 이런 고민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인자를 용서하셨는데 그러면 우리도 용서해야 되는 것 아닌가라고 고민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살인자가 회개해서 하나님께 용서를 받는 것과 자기 죄에 합당한 형사적 처벌을 받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수직적인 용서와 수평적인 용서가 똑같다고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수직적인 용서와 인간 사회에서 받는 수평적인 용서는 똑같이 않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제가 이번 주 신년 기복 때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 용서를 받은 사람이 자기 죄에 대한 형사적 처벌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로 십자가 우편의 강도입니다. 

그는 사형에 해당하는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그는 예수님을 만나서 죄를 회개했습니다.
사형수가 죄를 회개했을 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누가복음 22장 23장 43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아멘,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큰 죄를 짓더라도 진심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그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그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고 사형도 면제받았습니까?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무죄를 선언 받았습니까? 아닙니다.
그에 대한 사형 집행은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죄에 해당하는 형벌을 끝까지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 지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 죄는 영원히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은 우리가 져야 합니다.
그것이 살인이든 강도이든 사기이든 상관없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은 우리가 져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데 그러면 사형 제도에 반대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면서도 사형 제도에 찬송할 수 있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십자가 우편의 강도입니다. 

그의 죄는 하나님께 용서받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천국에 갔습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 지었던 그 죄에 대한 사형 집행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국가는 칼의 권세를 가지고 범죄인을 재판하고 형벌을 내리는 권한을 위임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국가에게 칼의 권세 공권력을 주셨습니다.
국가는 정의롭게 재판에서 흉악한 죄를 지은 사람을 법대로 다스려야 합니다.
로마서 13장에 나와 있습니다. 

그가 공연이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죄는 무서운 결과가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무서운 결과가 있고, 이 땅에서도 무서운 결과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의 결과를 두려워하기를 원하십니다.

신명기 19장 20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리하면 그 남은 자들이 듣고 두려워하여 다시는 그런 악을 너희 중에서 행하지 아니하리라.

 

아멘, 이 땅에서 지은 그 죄에 대한 책임은 우리에게 있음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옳은 길로 행하여 평안하게 지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강력한 법 질서를 통해서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처벌이 너무 가벼워서 법이 제대로 집행되지 못해서 이 사회가 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직 판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실정법만으로 세울 수 없는 정의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사회 규범 중에서 우리나라 법령에 수용되지 못한 것들이 있습니다.
또한 현재 대한민국 법령 중에 정의에 반하거나 시대의 변천으로 인해 폐기되어야 할 것도 있습니다.
제가 어느 부장판사의 책을 읽었는데 실정법의 한계에 대해서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근로자가 회사에서 근무하고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소송을 제기했는데 알고 보니까 제대로 된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았습니다.
또한 회사의 임금을 청구할 수 있는 그 시효가 지났기 때문에 돈 받을 길이 법적으로 없었습니다.
이 사람에게 너무나 억울한 일 아닙니까? 

분명히 회사를 위해서 일을 했는데 근로 계약을 제대로 하지 않거나 혹은 시효가 지났기 때문에 임금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억울하지만 실정법상으로 이 사람을 도와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실정법만으로 우리가 원하는 정의를 세우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경우는 어떻게 해결이 가능할까요?
임금 청구 기간이 지났지만 회사가 자발적으로 그 근로자에게 임금을 지급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모두가 다 행복할 것이고 고뇌하는 판사의 고민도 사라질 것입니다.
이것을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법에는 실정법이 있고 법을 넘는 법이 있습니다.
실정법에는 제정법이 있고 관습법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법을 넘는 법에는 도덕법과 신법 등이 있습니다.
실정법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그때 필요한 것이 법을 넘는 법입니다. 

그것은 바로 양보, 정직, 배려, 용서, 희생과 같은 덕목입니다.
한마디로 하면 사랑입니다.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아무리 실정법으로 강제 이행을 명령해도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사회 질서가 유지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과속 단속을 해도 규정 속도를 안 지키면 교통 질서가 유지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법을 잘 만들어도 그 법망을 피해 가는 방법은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실정법만으로 온전한 정의를 세울 수 없습니다.
온전한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는 개인의 도덕성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양보, 정직, 배려와 같은 덕목을 우리 모두가 다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선진국과 후진국을 구분하는 여러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제가 경험한 것 중에 가장 쉬운 기준이 하나 있습니다.
선진국 사람들은 줄을 잘 섭니다. 

어디서든지 줄을 잘 서고 인내심이 많습니다.
반면에 후진국 가면 사람들이 줄을 잘 안 서고 새치기를 그렇게 많이 합니다.
제가 예전에 아프리카에서 자동차로 국경을 통과할 때가 있었는데 너무너무 힘들었습니다.
출입국 사무소를 통과해야 되는데, 사람들이 새치기를 너무 많이 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같은 자리에 있는 거예요.
그렇게 2시간을 기다렸습니다. 

양보, 정직, 배려 같은 덕목을 갖추어야지 사회 질서가 유지됩니다.
그런데 한두 사람이 아니라 모든 국민이 다 갖추어야 됩니다.
여러분 모든 사람이 줄 서 있는데 한 사람이라도 새치기를 하면 질서가 유지 안 됩니다.
기다리는 사람이 바보가 되기 때문이죠. 

모든 구성원이 이 덕목을 갖추고 규범을 지킬 때 그때 사회 질서가 유지됩니다.
그러므로 사회 정의는 실정법만으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법에는 빈틈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노리는 사람이 있으면 사회 정의는 세워지지 않습니다.
사회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는 실정법을 넘어서는 도덕법, 신법을 지켜야 합니다.
한두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그것을 지켜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회 구성원이 도덕적인 성품을 갖출 때 그때 우리가 꿈꾸는 정의로운 사회를 이룰 수 있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 법조계에서 선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천종호 판사는 선, 정의, 법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의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제도를 잘 정비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용기를 내어 정의를 실천할 수 있는 정의로운 성품이 구성원 개개인에게 함양되어야 한다.
도덕성의 회복은 선의 회복이고, 선의 회복은 정의로운 신의 귀환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실정법으로 사회 정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법 질서를 강화한다고 범죄를 예방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강력한 법을 만들어도 그 법의 틈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범죄를 처벌하는 실정법과 더불어서 사회 구성원들이 정의로운 성품을 갖출 때 사회 정의가 세워질 수 있습니다.
정의로운 성품, 도덕성의 회복을 위해서는 정의로운 하나님, 공의로운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할 줄로 믿습니다.
크리스천의 윤리 시리즈 설교를 마무리하며 결론적으로 나누고 싶은 성경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성경은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가서 6장 8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내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내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내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아멘. 우리가 살아가는 포스트모던 사회는 옳고 그름의 기준을 잃어버린 사회입니다.
무엇이 정의인지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정의로운 성품이 사라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법질서를 강화해도 이 사회에는 불의와 부도덕이 가득합니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시국에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 중에 정의로운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정의롭기 때문에 우리 또한 정의로워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죄의 결과, 죄의 대가는 비참합니다. 

그 누구도 죄의 대가로부터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행복을 원하시는 하나님은 그래서 우리에게 정의로운 길, 거룩한 길로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서 옳은 길로 행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을 상실한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주신 정의로운 성품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여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S9D5DhY_8J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