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0주간 우리 교회의 비전인 생명 사역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생명 사역자의 태도와 신앙에 대해서 또 성경으로 사역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교회가 힘쓰고 있는 5대 사역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고,
또 앞으로 더욱더 힘쓰고자 하는 두 가지 사역, 상담 사역과 국내 선교에 대해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분명한 비전이 있는 교회는 일관성이 있고 안정성이 있습니다.
유행 따라서 이거 했다 저거 했다 하지 않고 분명한 목표와 방향을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여러분 안정감은 일관성에서 나옵니다.
사람에게 일관성이 있어야 되죠.
어제 말한 것과 오늘 말한 것이 다르면 안 됩니다.
하버드 교육대학원의 조세피 킴 교수님께서 강조하신 것이 있습니다.

부모가 가져야 하는 태도, 가장 중요한 태도는 일관성이라는 것입니다.
집 안에서 되는 것은 바깥에서도 되는 것이고, 집 안에서 안 되면 바깥에서도 안 됩니다.
부모가 일관성을 가질 때 우리 자녀들이 정서적인 안정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일관성을 유지해야지 성도들이 안정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 목사님이 어디로 갈지 알지 못하면 아마 성도님들은 불안하실 것입니다.
우리 교회 모든 사역은 생명 사역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향해서 나아갑니다.
분명한 목표는 교회 전체의 일관성과 안정감을 줍니다.
우리 교회의 리더십 전환 과정이 안정적이고 은혜로웠던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생명 사역은 복음으로 사람을 살리고 키우고 고치는 사역입니다.
이것은 어느 개인의 사역이 아니고 예수님의 사역입니다.
영적으로 죽었던 사람이 일어나고 살아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생각의 틀이 변화되게 되고 마음 가운데 성령의 불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렇게 놀라운 변화를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기쁨으로 헌신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는 오랫동안 이러한 변화를 경험해 왔고 지금도 이 변화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님들의 기도는 이런 놀라운 역사를 우리 교회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대구 지역과 한국교회 전 세계에서 함께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비전을 위해서 우리가 많은 선교사님들을 파송하고 있고, 또 미래 자립 교회들을 후원하고 있습니다.
꿈나무 꿈 프로젝트를 통해서 협력과 네트워크를 이루어가고 있고, 생명 사역 컨퍼런스를 통해서 목회자와 선교사님들을 훈련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생명 사역을 경험한 목사님들이 대구 여러 교회에서 담임 목사로 사역하고 계십니다.
이번에는 박성훈 목사님이 대구 서현교회 담임 목사로 청빙되셨고,
김대경 목사님이 대구 북일교회 담임 목사로 청빙되셨습니다.
복음으로 사람을 살리고 키우고 고치는 생명 사역이 이 지역의 많은 교회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그 하나님의 부흥이 대구 지역의 많은 교회에서 일어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생명 사역에 대한 그 마지막 설교를 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멈추지 않는 열정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누구나 한 번쯤 마음이 뜨겁게 신앙생활을 해본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교회에 가는 것이 너무나도 기다려지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너무나도 흥분되었던 그런 시간이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마음이 너무나 뜨거워서 내가 뭐든지 주님을 위해 하겠다라는 그런 심정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그러한 흥분과 열정이 사그러질 때가 있습니다.
뜨거웠던 마음이 미지근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마치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던 에베소 교회와 같이 그저 평범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왜 우리의 열정은 지속되지 못할까요?
한때 뜨거웠던 우리의 헌신과 우리의 열정은 어디로 갔을까요?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마음으로 한결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이사야 62장은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사야 60장부터 62장은 이스라엘이 어떻게 회복될 것인지에 대한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히브리 시의 형식을 따라서 세 편의 아름다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시온이라고 불리는 예루살렘에 임할 구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실 메시아를 통해서 시온이 아름답게 회복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62장 1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나는 시온의 의가 빛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 즉
아멘.
시온의 의가 빛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같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잠잠하지 않고 쉬지 않겠다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나오는 횃불이라는 단어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가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가 나타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하나님의 현현 영어로 theophany 라고 합니다.
그때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불이 나타나기도 하고, 연기가 나타나기도 하고, 구름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실 때 하나님의 현현이 나타났습니다.
그때 시내산의 연기가 자욱하고 불 가운데 여호와께서 강림하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을 때에도 횃불이 있었습니다.
이 횃불은 그냥 일반적인 불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임재하신 하나님의 현현이었습니다.
창세기 15장 17절 18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그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내 자손에게 주노니
아멘.
하나님께서 횃불 가운데 특별하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가나안 땅을 그의 자손들에게 주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여기에서 횃불은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를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가 있을 때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같이 나타난다는 말씀은 예루살렘의 구원이 하나님의 임재의 결과이며 약속의 결과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예루살렘이 회복되고 구원받는 것은 그들이 착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봉사를 많이 하고 기도를 많이 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이 회복되고 구원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맺으셨고, 모세와도 언약을 맺으셨고 다윗과도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의 백성을 떠나지 않으시고 지키시고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설령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날지언정 하나님은 그들을 절대로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기억하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서 일하고 계십니다.
그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그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해서 구원의 역사를 행하고 계셨습니다.
예루살렘이 회복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그날까지 하나님은 잠잠하지 않으시고 쉬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약속을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이사야 9장 7절에도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 정사와 평강에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시리라.
아멘.
이사야 9장은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한 아주 중요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낳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시겠다 하신 그 말씀입니다.
장차 오실 메시아를 통해서 다윗의 왕좌를 회복하고 정의와 공의를 회복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시리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열심, 하나님의 열정, 하나님의 헌신이 이것을 이룰 것이다.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냥 가만히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천국 보좌에 가만히 앉아서 그냥 쉬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나 보자.
우리가 마치 TV를 보는 것처럼 그렇게 관찰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열정을 다해서 일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정의를 잃어버린 세상, 소망을 잃어버린 세상이 회복되는 일을 위해서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 17절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심에
아멘.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100% 순종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말씀만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마음대로 임의로 말하지 않았고 임의로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보면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유유자적하게 지내셨습니까?
하루에 일정 하나만 하면서 느긋하게 지내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일하셨습니다.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으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피곤하셨으면 폭풍 가운데 있는 배 안에서도 주무셨습니다.
어부 출신인 제자들이 무서워할 정도로 아주 큰 폭풍이 있었는데 예수님은 그 안에서도 잘 주무셨습니다.
제가 그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얼마나 치열한 삶을 사셨을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열정적으로 일하신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그와 같이 일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백성을 위해서, 정의와 구원의 회복을 위해서 하나님은 쉬지 않고 일하셨습니다.
그 모습 그대로 예수님도 이 땅 안에서 그렇게 열정적으로 살아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생명 사역을 맡은 자들 역시 그와 동일한 자세로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유유자적 한가하게 지내지 않습니다.
하루의 일정 하나만 하면서 느긋하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 아닙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열정적으로 살아갑니다.
녹슬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달아서 없어지겠다는 조지 휫필드의 그 마음으로 우리도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지금도 쉬지 않고 이 세상의 구원과 회복을 위해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요즘 편견들 중에서 우울증과 무기력증으로 이제 고생 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연간 100만 명이 넘는 환자가 우울증으로 치료를 받고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20대 여성이라고 합니다.
한창 좋을 나이인데 어두운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살고 있다고 하니까 마음이 안타깝습니다.
크리스천 심리학자인 조던 피터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표가 없으면 어떤 긍정적인 감정도 없다. 목표가 없으면 오직 혼란만 있을 뿐이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러분 인생을 향한 긍정적인 감정은 분명한 목표에서 입니다.
내 인생을 걸 만한 의미가 있는 목표를 발견한 사람은 하루를 힘차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인생의 목표가 없는 사람은 어떠한 긍정적인 감정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냥 똑같은 일상의 반복일 뿐입니다.
목표가 없는 사람은 혼란만 있을 뿐입니다.
나아갈 방향과 목표가 없으니까 자꾸 다른 사람하고만 비교할 뿐입니다.
내 친구는 이번에 승진했는데, 내 친구는 이번에 아파트를 샀는데 이렇게 비교할 뿐입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시작이 다르고, 강점이 다르고, 목표가 다른데 단순 비교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모차르트의 3대 교향곡이 있습니다.
클래식 음악 좋아하시는 분 아시겠지만 교향곡 39번, 40번, 41번입니다.
교향곡 39번은 경쾌하고 우아한 분위기입니다.
40번은 우수와 비애가 가득합니다.
41번은 위풍당당한 그런 분위기입니다.
그러면 이 3대 교향곡 중에서 최고의 곡은 무엇일까요?
라고 질문하면 아무 의미 없는 질문이지요.
세계 최고의 작곡가가 만들었으니까 모두 다 훌륭한 곡입니다.
각각의 특징이 있고 각각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모차르트가 작곡했으니까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가치는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의 가치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있는 줄로 믿습니다.
모차르트가 작곡했으니까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죠.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으니까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한 목표를 향해서 한 걸음씩 나아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위에서 부르신 그 부름의 상을 위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인생의 모든 순간을 열정적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신 그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살아갑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열정적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세상을 구원하고 회복하는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그분은 오늘도 열정적으로 살아가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도 동일한 마음으로 동일한 열정으로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을 선포하신 이후에 주님은 그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선포하셨습니다.
이전에는 황폐하고 버려졌던 그 시온을 향해서 주님께서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4의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다시는 너를 버림 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아멘.
하나님께서 새롭게 주신 이름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햅시바이고, 또 하나는 쁄라입니다.
햅시바는 나의 기쁨이 너에게 있다라는 의미이고, 쁄라는 결혼한 자라는 뜻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입니까?
하나님께서 시온을 향해서 너는 나와 결혼한 자이고, 나의 기쁨이 너에게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언약적인 관계, 결혼 관계로 표현한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새로운 이름은 언약적인 관계를 의미했습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그 언약을 맺은 이후에 그 징표로 새로운 이름을 주었습니다.
대표적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17장 5절 함께 읽겠습니다.
이제 후로는 내 이름을 아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아멘.
아브라함의 원래 이름은 아브람이었습니다.

그 의미는 높임을 받은 아버지 영어로 하면 exalted father 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언약을 맺으면서 그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었습니다.
그 의미는 많은 나라의 아버지 father of nations 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여러 민족을 이루시겠다는 약속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고대 사회에서 언약을 맺을 때에는 새로운 이름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정체성, 새로운 관계 안에 들어갔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전통을 따라서 지금도 서양에서는 결혼하면 아내가 남편의 성을 따라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황폐한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셨습니다.
햅시바와 쁄라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 하나님과 결혼한 자라고 선포해 주셨습니다.
그들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주신 것입니다.
과거의 상처, 과거의 실패에 매몰되어 있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받은 자로서 살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과거에는 아픔과 상처가 있었지만 이제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정체성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과거의 실패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내가 그때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후회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아무리 후회해도 지나간 과거가 바뀌지 않습니다.
지나간 과거는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과거에 매여 있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과거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하십니다.
과거의 상처, 과거의 실패로부터 우리가 자유케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주십니다.
이스라엘에게 햅시바 쁄라와 같은 새 이름을 주셨던 것처럼 우리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주기 원하십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받은 아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딸로서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제가 여러 차례 말씀드렸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건강한 정체성을 갖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른 것을 나의 정체성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돈이든 명예이든 권력이든 여러분 다른 것을 나의 정체성으로 삼으면 안 됩니다.
심지어 교회에서 하는 봉사와 직분 이런 것으로도 나의 정체성을 삼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나의 정체성을 삼으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중에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을 자랑하고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그 일을 자랑하게 되고 의지하게 됩니다.
그런데 내가 의지하는 그것은 결단코 나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제가 예전에 미국에서 공부할 때 박사 학위에 목을 매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미국에서 PhD 학위를 따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공부에 은사가 있고 열심히 연구해서 학문적인 공헌을 하는 것 이건 좋은 일이죠.
그런데 마치 PhD 학위만 있으면 인생이 달라진다고 믿는 경우가 문제였습니다.
공부의 은도 없고 한데 어떻게든 박사 학위를 따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떤 경우는 10년이나 걸려서 학위를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 이후에는 인생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러분 박사학위를 딴다고 해서 막 인생이 달라지고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학위는 일종의 자격증과 같습니다.
그 자격증을 가지고 실력을 발휘할 곳이 필요하겠죠.
그렇게 일할 곳을 찾는 것도 문제이고 그곳에 가서 성과를 내는 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가 그토록 바라고 원하는 곳 의지하는 것이 나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나의 정체성으로 삼게 되면 우리는 결국 불행해질 것입니다.
미국의 팀 켈러 목사님은 내가 만든 신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22:57
내가 만든 신은 반드시 나를 배신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돈이든 권력이든 명예든 상관없습니다. 내가 하나님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반드시 나를 배신합니다.
팀켈러 목사님은 이렇게 또 말했습니다.

무엇이든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우리의 주인이다. 권력을 구하는 사람은 권력에 지배당하고, 사람에게 받아들여지기 원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에게 지배당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지배하는 게 아니라 자기 삶의 주인에게 지배당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로지 돈만 보면서 사는 사람은 돈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오로지 명예를 추구하며 사는 사람은 명예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저것만 있으면 정말 내가 행복할 텐데라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은 우리를 배신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혼을 만족시키고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나의 정체성이 될 때 그때 우리 마음 가운데 참된 만족이 임하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참된 자유와 참된 만족을 누리는 사람에게는 특징이 있습니다.
무엇이냐면 다른 사람과 경쟁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이겨야 한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나는 충분히 사랑받고 있고 하나님께 완전한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한 은퇴 장로님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교회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장로님 말씀에 우리 교회와 범어교회가 서로 화합하고 협력하는 모습이 너무너무 아름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가까이에 있는 우리 두 교회가 여러 가지 사역을 함께 섬기고 있습니다.
로잔대회를 위한 기도회도 함께 했고요. 꿈너머 꿈 프로젝트도 함께 했습니다.
동성애 반대 운동도 함께하고 있고, 복음과 도시 사역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대신대학교 개강 수련회가 있었습니다.
첫째 날에는 제가 가서 설교하고, 둘째 날에는 범어교회 이지훈 목사님께서 설교해 주셨습니다.
대구를 대표하는 교회가 지역 신학생들을 격려하고 축복하는 일을 함께 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가까이 있는 교회가 서로 복음을 위해서 협력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이런 모습을 보는 것이 쉬운가요? 어려운가요?
쉽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서로 경쟁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경쟁심이 있을까요?
교회 사역을 나의 정체성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사이즈가 곧 나의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정체성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교회 사이즈를 나의 정체성으로 삼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나의 정체성으로 삼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만든 모든 신은 반드시 나를 배신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시고 새로운 정체성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우리가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나의 정체성으로 삼아서 주님만 사랑하고 의지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생에서 목표를 갖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올바른 목표를 갖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수치화된 목표를 설정합니다.
내가 올해 얼마의 돈을 벌겠다.
내가 5년 안에 어디까지 올라가겠다. 이렇게 숫자로 목표를 설정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가치를 담은 목표를 설정합니다.
투명하게 의사소통하는 수평적인 관계를 이루겠다와 같이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둘 다 필요하고 둘 다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수치화된 목표에는 한 가지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 목표는 비인격적인 목표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올바른 관계와 올바른 방법을 다 담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 옆에 유명한 고등학교가 있죠.
지나가면서 보니까 작년에 서울대와 의대에 99명을 합격시켰다고 합니다.
자립형 학교도 아니고 그냥 일반 인문계 학교인데 엄청나게 좋은 입시 결과이죠.
그러면 그 고등학교의 교훈은 무엇일까요?
서울대와 의대에 200명을 합격시키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학교의 교훈은 '스스로를 속이지 말자 남을 사랑하자' 입니다.

아주 멋진 교훈입니다.
명문대 가는 것도 좋지만 그 과정도 중요합니다.
스스로를 속이면서 부정 행위를 하면서 명문대 가봐야 아무 소용없죠.
같은 반 친구를 사랑하지 않고 도와주지 않고 경쟁자로 여기면서 명문대 가봐야 아무 소용없습니다.
여러분 학교의 교훈은 수치화된 목표가 아닙니다.
학생들이 어떤 자세와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그 가치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한 가치를 따라서 제대로 살아갈 때 그때 수치화된 목표가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 생명 사역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생명 사역의 목표가 한국에서 제일 큰 교회를 만드는 것일까요?
한국에서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를 세우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생명 사역의 목표는 복음으로 사람을 살리고 키우고 고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목표가 너무나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이 안에 성경적인 가치들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사람이 무엇인지 우리는 성경적으로 고민해야 합니다.
영혼을 살리고 키우고 고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생명 사역은 어떤 수치를 달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 사역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명의 가치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뉴욕 대학교의 제임스 카스 교수는 유한 게임과 무한 게임이라는 개념을 주창했습니다.

유한 게임은 정해진 시간 안에 정해진 목표를 먼저 달성하는 쪽이 이기는 게임입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축구와 같은 게임이 있겠죠.
정해진 시간 안에 더 많은 골을 넣으면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한 게임에서는 승자와 패자가 분명합니다.
반면에 무한 게임은 시간이 무한대로 주어지고 명확한 종료 지점이 없는 게임입니다.
결승선이 없기 때문에 사실상 이긴다는 개념도 없습니다.
여러분 그러면 우리 인생은 유한 게임일까요? 무한 게임일까요?
두 가지 모두입니다.
유한 게임으로 볼 수도 있고 무한 게임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서 경쟁이 불가피한 순간이 있습니다.
진학, 취업 승진처럼 경쟁해서 승리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합격할 수는 없으니까 승자와 패자가 있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 인생에서는 등수를 매길 수 없는 것들도 아주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결혼, 우정 신앙에는 등수를 매길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누구 신앙이 더 좋은지 우리가 수치화해서 등수를 매길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의 인생을 마감하는 그 마지막 순간에 내 인생은 1등이었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내 인생의 등수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할 기준이 없기 때문이지요.
누구와 경쟁해서 누군가를 이기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수치를 달성하는 것도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목표는 죽음 앞에서도 의미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목표를 위해서 평생 달려왔는데, 딱 죽음 앞에서 큰 의미가 없다면 그것만큼 허망한 순간이 없을 것입니다.
복음으로 사람을 살리고 키우고 고치는 생명 사역은 유한 게임이 아니라 무한 게임입니다.
생명 사역에는 정해진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언제까지 생명 사역하시겠습니까?
앞으로 10년 동안만 할까요? 20년 동안 할까요?
아닙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해야 합니다.
생명 사역에는 결승선이 없습니다.
정해진 시간 안에 정해진 목표를 빨리 달성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이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과 다른 교회와 경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신실한 마음으로 이 사역을 감당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생명 사역은 유한 게임이 아니라 무한 게임입니다.
단기간에 최대한의 성과를 내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수 있는 최장기간 동안 이 일을 꾸준히 할 수 있는 그 마음이 중요합니다.
멈추지 않는 열정, 멈추지 않는 도전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열정은 우리 안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이 열정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열심에서 나오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에게 하신 그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지금도 그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열심에서 나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지금까지 일한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그 하나님의 열심을 깨달은 사람은 그와 동일한 열정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쉬지 않고 일하심으로, 나도 동일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62장 6절, 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주야로 계속 잠잠하지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
아멘.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벽 위에 세우신 파수꾼입니다.
우리는 주야로 잠잠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잠잠하지 않으신 것처럼 우리도 잠잠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교회와 생명 사역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간절한 기도로 인해서 하나님의 역사는 쉬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을 구원하시고 회복하시겠다는 그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그날까지 주님께서도 쉬지 않으실 것입니다.
생명 사역은 유한 게임이 아니라 무한 게임입니다.
정해진 시간 안에 빨리 그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짧은 인생이 끝난 이후에도 계속되는 그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한 번뿐인 우리 인생 너무나도 빨리 지나갑니다.
이렇게 짧은 인생 살아가는데 어영부영 이것저것 다 해볼 시간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을 위해서 온전히 헌신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 사역의 비전이 이루어지는 그날까지 멈추지 않는 열정과 헌신으로 나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x25TYftbm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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