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 2:1-9 | 문대원 목사
세상의 실패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학교 시험도 그렇고 사회생활도 그렇고 우리는 실패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실패했을 때 느끼는 그 좌절감, 실망감은 우리를 힘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인생의 목표를 이렇게 정합니다. 성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고 실패하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 리스크가 큰 목표는 아예 처음부터 포기합니다.
가장 안정적인 길을 찾아서 실패할 확률이 적은 일을 하고자 합니다.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얼룩말 비유를 통해서 설명합니다.
여러분 얼룩말 무늬는 왜 있을까요?
몸에 흰 줄과 검정줄이 있으면 어떤 점에서 유리할까요?
어떤 사람은 얼룩말 무늬가 위장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프리카 초원에서 얼룩 무늬는 오히려 눈에 잘 띕니다.
위장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자의 털 색깔입니다.
사자의 털 색깔은 초혼 색깔과 비슷하기 때문에 위장에 도움이 됩니다.
얼룩 무늬는 위장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얼룩말 무늬가 위장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프리카 초원에서 얼룩 무늬는 오히려 눈에 잘 띕니다.
위장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자의 털 색깔입니다.
사자의 털 색깔은 초혼 색깔과 비슷하기 때문에 위장에 도움이 됩니다.
얼룩 무늬는 위장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무늬가 있어서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동일한 무늬가 있기 때문에 무리 안에 숨기 좋다고 합니다.
특히 무리의 그 가운데 쪽에 있으면 안전하게 숨을 수 있습니다.
사자가 사냥할 때 무리 전체를 사냥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다 잡는 것이 아닙니다.
동일한 무늬가 있기 때문에 무리 안에 숨기 좋다고 합니다.
특히 무리의 그 가운데 쪽에 있으면 안전하게 숨을 수 있습니다.
사자가 사냥할 때 무리 전체를 사냥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다 잡는 것이 아닙니다.
사냥할 때에는 사냥할 대상을 특정해야지 잡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모두가 다 동일한 색깔이니까 그 대상을 특정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이것이 바로 얼룩말 이론입니다.
그런데 모두가 다 동일한 색깔이니까 그 대상을 특정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이것이 바로 얼룩말 이론입니다.
어떤 집단의 정중앙에 있을 때 안전하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가장 평범하고 가장 평균적인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서 이것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불행을 피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가장 평범하고 가장 평균적인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서 이것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불행을 피하는 삶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고 싶으십니까?
또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어떻게 살라고 격려하고 싶으십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을 추구하라고 하겠습니까?
아니면 최대한 불행을 피하고 안전하게 살라고 하겠습니까?
많은 사람은 실패를 두려워합니다.
또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어떻게 살라고 격려하고 싶으십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을 추구하라고 하겠습니까?
아니면 최대한 불행을 피하고 안전하게 살라고 하겠습니까?
많은 사람은 실패를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실패하지 않고 인생에서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갓난 아기가 걸음마를 배우기 위해서는 몇 번이나 넘어지는 실패를 해야 합니다.
넘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걸음마를 배울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부모도 걸음마 하다가 넘어지는 아기를 보고 나무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 발짝만 걸어도 너무너무 잘한다고 칭찬해 줍니다.
아마존의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갓난 아기가 걸음마를 배우기 위해서는 몇 번이나 넘어지는 실패를 해야 합니다.
넘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걸음마를 배울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부모도 걸음마 하다가 넘어지는 아기를 보고 나무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 발짝만 걸어도 너무너무 잘한다고 칭찬해 줍니다.
아마존의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혁신과 발견을 하려면 실험을 해야 하는데, 성공할 것임을 미리 안다면 그것은 실험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인생에서 의미 있는 변화와 혁신을 하려면 실험을 해야 합니다.
그 실험은 성공할 수도 있고 또한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100% 성공을 확실한 것을 우리는 실험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변화와 혁신을 위해서 우리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고, 실패를 딛고 일어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옳은 실패'라고 부릅니다.
의미 없는 실패가 아니라 중요한 교훈을 배운 의미 있는 실패입니다.
오늘부터 3주 동안 옳은 실패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로 실패에 대한 새로운 관점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여러분들 잘 아시는 말씀입니다.
주일 학교 때부터 배운 요나 선지자 이야기입니다.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전하라는 그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요나는 큰 풍랑을 만나서 바다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요나는 그곳에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요나서 2장 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오늘부터 3주 동안 옳은 실패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로 실패에 대한 새로운 관점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여러분들 잘 아시는 말씀입니다.
주일 학교 때부터 배운 요나 선지자 이야기입니다.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전하라는 그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요나는 큰 풍랑을 만나서 바다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요나는 그곳에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요나서 2장 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수월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아멘.
아멘.
내가 받는 고난이라고 하는데 여러분 누구 때문에 이 고난이 발생했습니까?
사탄이 요난을 공격해서 이 일이 발생했습니까?
사탄이 요난을 공격해서 이 일이 발생했습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이 모함해서 이러한 고난이 발생했습니까?
아닙니다.
아닙니다.
요나가 잘못해서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서 생기게 된 어려움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고난의 책임은 다른 사람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이 고난의 책임은 전적으로 요나에게 있었습니다.
이것을 기억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 고난의 책임은 다른 사람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이 고난의 책임은 전적으로 요나에게 있었습니다.
이것을 기억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는 실패의 이유를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부모를 잘못 만나서 실패했어.
나는 부모를 잘못 만나서 실패했어.
나는 열심히 했는데, 직장 상사가 방해해서 실패했어.
얼마든지 실패의 이유를 다른 사람에게 돌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내 마음은 편하겠지요.
얼마든지 실패의 이유를 다른 사람에게 돌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내 마음은 편하겠지요.
내가 잘못해서 실패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 때문에 실패한 것이기 때문에 마음은 편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할 때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실패의 이유를 다른 사람에게 돌리면 마음은 편할지 모르겠지만 그로부터 아무것도 배울 수 없습니다.
자기 잘못, 자기 실수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실패에는 아무런 교훈이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가장 무의미한 실패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업의 책임자, 조직의 책임자는 잘 아실 것입니다.
직원들이 실수할 때도 있고 잘못할 때도 있습니다.
누구나 잘못할 수 있으니까 그것 때문에 화가 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언제 화가 나냐면, 잘못한 사람이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때 화가 납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고 왜 잘못한 것인지 인정하지 않으면 그때 화가 납니다.
잘못한 것 자체보다 더 큰 문제는 그 잘못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나는 자기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해서 이러한 고난을 당한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내가 잘못해서 고난을 당하지만 그럼에도 요나에게는 한 가지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고난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믿음이었습니다.
본문 2절을 보면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다 말하고 있고,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잘못해서 고난을 당했지만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할 때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실패의 이유를 다른 사람에게 돌리면 마음은 편할지 모르겠지만 그로부터 아무것도 배울 수 없습니다.
자기 잘못, 자기 실수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실패에는 아무런 교훈이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가장 무의미한 실패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업의 책임자, 조직의 책임자는 잘 아실 것입니다.
직원들이 실수할 때도 있고 잘못할 때도 있습니다.
누구나 잘못할 수 있으니까 그것 때문에 화가 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언제 화가 나냐면, 잘못한 사람이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때 화가 납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고 왜 잘못한 것인지 인정하지 않으면 그때 화가 납니다.
잘못한 것 자체보다 더 큰 문제는 그 잘못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나는 자기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해서 이러한 고난을 당한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내가 잘못해서 고난을 당하지만 그럼에도 요나에게는 한 가지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고난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믿음이었습니다.
본문 2절을 보면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다 말하고 있고,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잘못해서 고난을 당했지만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을 멈추지 않는다는 확신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러한 확신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에게는 이러한 확신이 있으십니까?
내가 잘못해서 고난을 받든 아니면 다른 사람이 잘못해서 고난을 받든 상관없이 고난 가운데 기도하면 주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확신이 있으십니까?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고난 가운데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다윗에게 그러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왕에게 쫓기는 도망자 신세였지만 하나님께 기도하면 그분께서 들으신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시편 18편 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고난 가운데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다윗에게 그러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왕에게 쫓기는 도망자 신세였지만 하나님께 기도하면 그분께서 들으신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시편 18편 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환란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시며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아멘,
환란 가운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간절한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맹인들이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간구하는 그 장면이 나옵니다.
다윗의 자손이요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말하면서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저는 이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간절한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맹인들이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간구하는 그 장면이 나옵니다.
다윗의 자손이요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말하면서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저는 이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맹인들의 믿음이 너무나도 놀라웠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구약 시대에 어느 누구도 맹인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선지자라고 해도 엘리야와 엘리사도 맹인을 고치지는 못했습니다.
맹인을 고친다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보내실 메시아가 행할 수 있는 표적으로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이사야 42장 7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여러분 구약 시대에 어느 누구도 맹인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선지자라고 해도 엘리야와 엘리사도 맹인을 고치지는 못했습니다.
맹인을 고친다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보내실 메시아가 행할 수 있는 표적으로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이사야 42장 7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눈 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아멘.
이사야 42장은 고난받는 종의 노래입니다.
이사야서 전체에 이 종의 노래가 네 번 나오는데 그중에 첫 번째가 42장에 나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말씀인데, 그중에 눈 먼 자들의 눈을 밝힌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맹인을 고치는 것은 오직 메시아만이 행할 수 있는 표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오셔서 맹인을 고치기 전까지 유대인들은 맹인들이 고침을 받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복음에 있는 이 맹인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다윗의 자손이요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나와 간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들은 맹인이 고침 받은 것을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자기를 도와달라고 간절하게 구하고 있습니다.
한 번도 이런 일이 있었던 적 없지만 예수님이라면은 우리를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믿음이 있었다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이사야서 전체에 이 종의 노래가 네 번 나오는데 그중에 첫 번째가 42장에 나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말씀인데, 그중에 눈 먼 자들의 눈을 밝힌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맹인을 고치는 것은 오직 메시아만이 행할 수 있는 표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오셔서 맹인을 고치기 전까지 유대인들은 맹인들이 고침을 받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복음에 있는 이 맹인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다윗의 자손이요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나와 간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들은 맹인이 고침 받은 것을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자기를 도와달라고 간절하게 구하고 있습니다.
한 번도 이런 일이 있었던 적 없지만 예수님이라면은 우리를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믿음이 있었다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9장 2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마태복음 9장 2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아멘.
여러분 이들은 깊은 수렁에 빠진 자들입니다.
누구의 잘못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의 잘못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잘못한 것인지 다른 사람의 잘못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그 수렁 안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구할 수도 있다는 그런 예수님을 향해서 적극적으로 나아갔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분께 나아와서 간구했습니다.
소극적으로 간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그 수렁 안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구할 수도 있다는 그런 예수님을 향해서 적극적으로 나아갔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분께 나아와서 간구했습니다.
소극적으로 간구하지 않았습니다.
적극적으로 따라다니면서 간구했습니다.
지금 같은 모습으로 살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최선을 다해서 구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의 은혜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실패하면 인생이 끝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일종의 과대 망상입니다.
지금 같은 모습으로 살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최선을 다해서 구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의 은혜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실패하면 인생이 끝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일종의 과대 망상입니다.
그러니까 실제보다 과장해서 터무니없게 생각하는 것이죠.
고3 수험생에게는 대학 입시가 전부입니다. 대학 입시에 실패하면 인생이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실제로 그렇습니까?
고3 수험생에게는 대학 입시가 전부입니다. 대학 입시에 실패하면 인생이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실제로 그렇습니까?
여러분 원하는 대학에 대학 가지 못한다고 해서 여러분 인생이 끝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했지만 인생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생각하지도 못했던 길이 열렸습니다.
시간이 지난 후에 돌아보니까 실패라고 생각했던 그것이 가장 선한 길임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20~30대 청년들에게는 연애와 결혼이 중요하겠죠.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했다가 거절당하면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실제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대학교 1학년 때 잠깐 사귀었던 친구와 헤어졌습니다.
제가 차였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생각하지도 못했던 길이 열렸습니다.
시간이 지난 후에 돌아보니까 실패라고 생각했던 그것이 가장 선한 길임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20~30대 청년들에게는 연애와 결혼이 중요하겠죠.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했다가 거절당하면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실제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대학교 1학년 때 잠깐 사귀었던 친구와 헤어졌습니다.
제가 차였습니다.
그때는 인생이 끝난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좋은 아내를 만나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아프리카에서 대구에서 아내가 없었으면 절대 여기까지 올 수 없었습니다.
인생에서 회복할 수 없는 실패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좋은 아내를 만나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아프리카에서 대구에서 아내가 없었으면 절대 여기까지 올 수 없었습니다.
인생에서 회복할 수 없는 실패는 없습니다.
물론 한 가지가 있죠.
인생에서 회복할 수 없는 실패는 죽음입니다.
인생에서 회복할 수 없는 실패는 죽음입니다.
죽으면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없기 때문에 사실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은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회복할 수 없는 실패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면 어떠한 실패가 있어도 회복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실패를 이길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고난을 만나도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다 깊은 곳에 빠진 요나는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고대 사회에서 바다는 어둠의 세력과도 같았습니다.
다니엘의 환상에서 무시무시한 그 짐승이 바다에서 나왔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열뿔 달린 그 짐승이 바다에서 올라왔습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에게 바다는 두려움의 대상, 어둠의 세력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바다를 항해하다가 폭풍이라도 만나면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바다 깊은 곳까지 빠지게 되었습니다.
요나서 2장 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은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회복할 수 없는 실패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면 어떠한 실패가 있어도 회복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실패를 이길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고난을 만나도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다 깊은 곳에 빠진 요나는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고대 사회에서 바다는 어둠의 세력과도 같았습니다.
다니엘의 환상에서 무시무시한 그 짐승이 바다에서 나왔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열뿔 달린 그 짐승이 바다에서 올라왔습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에게 바다는 두려움의 대상, 어둠의 세력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바다를 항해하다가 폭풍이라도 만나면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바다 깊은 곳까지 빠지게 되었습니다.
요나서 2장 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러싸며 기쁨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아멘.
아멘.
영혼을 뜻하는 헬라어 네페쉬는 목숨을 뜻하기도 합니다.
바닷물이 내 목숨을 둘러쌌다는 의미도 되고, 바닷물이 내 영혼을 둘러쌌다는 의미도 됩니다.
뿐만 아니라 바다풀 해초가 내 머리를 감쌌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죽음 직전의 상황을 아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 상황을 바다의 포로 바다에 갇힌 상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주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닷물이 내 목숨을 둘러쌌다는 의미도 되고, 바닷물이 내 영혼을 둘러쌌다는 의미도 됩니다.
뿐만 아니라 바다풀 해초가 내 머리를 감쌌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죽음 직전의 상황을 아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 상황을 바다의 포로 바다에 갇힌 상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주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다에 갇혀 있다니 어떠한 소망도 없을 것입니다.
대학 시절에 프리 다이빙을 했던 분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30m 아래로 다이빙하는 것이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20m만 내려가도 수압 때문에 귀가 아프고 정신이 혼미해집니다.
조금만 잘못하면 정신을 잃고 물에 빠져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동해 바다의 깊이가 얼마나 되는 줄 아십니까?
동해 바다의 깊이가 2985미터라고 합니다. 한라산 높이의 1.5배입니다.
20m 다이빙을 하는 것도 위험한데, 그 아래 3천 미터 깊이에 빠지면 어떤 기분일까요?
정말로 두렵고 절망적일 것입니다.
대학 시절에 프리 다이빙을 했던 분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30m 아래로 다이빙하는 것이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20m만 내려가도 수압 때문에 귀가 아프고 정신이 혼미해집니다.
조금만 잘못하면 정신을 잃고 물에 빠져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동해 바다의 깊이가 얼마나 되는 줄 아십니까?
동해 바다의 깊이가 2985미터라고 합니다. 한라산 높이의 1.5배입니다.
20m 다이빙을 하는 것도 위험한데, 그 아래 3천 미터 깊이에 빠지면 어떤 기분일까요?
정말로 두렵고 절망적일 것입니다.
요나가 바로 그러한 절망을 느꼈습니다.
본문 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본문 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웅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아멘.
요나는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다고 고백합니다.
산의 뿌리, 바다 가장 깊은 곳은 고대 히브리인들이 말하는 스올이었습니다.
여러분 스올은 죽은 자의 땅, 무덤, 죽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산의 뿌리, 바다 가장 깊은 곳은 고대 히브리인들이 말하는 스올이었습니다.
여러분 스올은 죽은 자의 땅, 무덤, 죽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지요.
스올은 생명의 근원 되신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죽음의 땅 스올은 하나님께서 계신 천국과는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그러니 구약에서 하늘은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것이고, 스올은 죽음이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스홀의 문 앞까지 내려간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지신다고 요나가 고백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요나의 믿음이었고, 또한 다윗의 믿음이었습니다.
죽음의 땅 스올은 하나님께서 계신 천국과는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그러니 구약에서 하늘은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것이고, 스올은 죽음이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스홀의 문 앞까지 내려간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지신다고 요나가 고백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요나의 믿음이었고, 또한 다윗의 믿음이었습니다.
시편 16편 10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이니라.
아멘.
아멘.
다윗도 요나처럼 스올의 문 앞까지 내려가는 경험을 했습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것입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곳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않으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와 함께하시고 그를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또한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습니다.
온 땅을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습니다.
다윗은 또 다른 시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편 139편 8절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않으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와 함께하시고 그를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또한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습니다.
온 땅을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습니다.
다윗은 또 다른 시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편 139편 8절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아멘, 저는 이 말씀에 정말로 큰 위로를 얻습니다.
하늘에 올라가더라도 하나님께서 거기에 계시고, 스올에 가까이 가더라도 주님께서 거기에 계신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왕권, 하나님의 다스림을 믿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내 인생이 추락하는 것처럼 느껴져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 인생을 붙잡고 있는 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아멘, 저는 이 말씀에 정말로 큰 위로를 얻습니다.
하늘에 올라가더라도 하나님께서 거기에 계시고, 스올에 가까이 가더라도 주님께서 거기에 계신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왕권, 하나님의 다스림을 믿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내 인생이 추락하는 것처럼 느껴져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 인생을 붙잡고 있는 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믿는 사람이 있고, 또한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믿으십니까?
여러분 무엇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의 능력을 믿으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주권을 믿으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주권을 믿으십니까?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대부분 자신의 능력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한 완벽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완벽주의자에게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한 완벽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완벽주의자에게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로 비현실적인 기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모든 경우에서 성공해야 한다는 그런 강박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모든 경우에서 성공해야 한다는 그런 강박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두 번째로 완벽주의자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완벽한 성공, 아니면 완벽한 실패 이 둘 중에 하나만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여기에 동의하십니까?
완벽한 성공, 아니면 완벽한 실패 이 둘 중에 하나만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여기에 동의하십니까?
세상에 완전한 성공, 아니면 완전한 실패 두 개밖에 없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절반의 성공도 있습니다.
실패하긴 했지만 의미 있는 실패도 있습니다.
실패하긴 했지만 의미 있는 실패도 있습니다.
우리가 흑백 논리에 빠지면 안 됩니다.
성공과 실패 두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합니다.
절반의 성공도 있고 4분의 1 성공도 있습니다.
성공과 실패 두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합니다.
절반의 성공도 있고 4분의 1 성공도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도 의미 있는 성과입니다.
오히려 한 번에 100% 성공해야 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기대입니다.
하지만 완벽주의자는 이러한 비현실적인 기대를 가지고 무조건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해보는 일에서 100% 성공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요.
그러니까 완벽주의자는 실패할 가능성이 있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내가 잘하는 일, 내가 완벽하게 할 수 있는 일만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장에도 한계가 있을 것이고, 도전에도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한 번에 100% 성공해야 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기대입니다.
하지만 완벽주의자는 이러한 비현실적인 기대를 가지고 무조건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해보는 일에서 100% 성공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요.
그러니까 완벽주의자는 실패할 가능성이 있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내가 잘하는 일, 내가 완벽하게 할 수 있는 일만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장에도 한계가 있을 것이고, 도전에도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1998년 미국에서 흥미로운 연구가 있었습니다.
사회 심리학 저널에 발표된 연구입니다.
사회 심리학 저널에 발표된 연구입니다.
미국 초등학교 5학년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습니다.
한 그룹은 똑똑하다고 칭찬을 했고, 또 한 그룹은 열심히 노력한다고 칭찬을 했습니다.
그렇게 하고 이들에게 아주 어려운 시험 문제를 주었습니다.
5학년 학생에게 7학년 수준의 시험을 보게 했습니다.
각각 학생들에게 점수를 알려주고 다른 학생의 답안지를 참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내가 틀린 문제를 다른 학생은 어떻게 풀었는가 참고할 수 있게 기회를 주었습니다.
놀랍게도 똑똑하다고 칭찬받은 그룹은 자기보다 점수가 낮은 학생들의 답안지를 보았습니다.
반면에 열심히 노력한다고 칭찬한 그룹은 자기보다 점수가 높은 친구들의 답안지를 보았습니다.
이 실험이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한 그룹은 똑똑하다고 칭찬을 했고, 또 한 그룹은 열심히 노력한다고 칭찬을 했습니다.
그렇게 하고 이들에게 아주 어려운 시험 문제를 주었습니다.
5학년 학생에게 7학년 수준의 시험을 보게 했습니다.
각각 학생들에게 점수를 알려주고 다른 학생의 답안지를 참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내가 틀린 문제를 다른 학생은 어떻게 풀었는가 참고할 수 있게 기회를 주었습니다.
놀랍게도 똑똑하다고 칭찬받은 그룹은 자기보다 점수가 낮은 학생들의 답안지를 보았습니다.
반면에 열심히 노력한다고 칭찬한 그룹은 자기보다 점수가 높은 친구들의 답안지를 보았습니다.
이 실험이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똑똑하다고 칭찬받은 아이들은 자기보다 시험을 못 본 답안지를 보고 위안을 얻고자 한 것입니다.
이들은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크기 때문에 자기가 실패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보다 시험 못 본 학생들의 답안지를 보면서 위안을 삼았습니다.
반면에 열심히 노력한다고 칭찬받는 그룹은 자기보다 시험을 더 잘 본 학생들의 답안지를 보고 배우고자 했습니다.
나는 이 문제 틀렸는데 내 친구는 이렇게 이렇게 해서 맞았구나라고 배우고자 했습니다.
기꺼이 그래서 자기보다 더 나은 답안지를 보고자 한 것입니다.
여러분, 아주 어려운 시험 앞에서 두 그룹 모두 다 실패했습니다.
그러면 이 둘 중에 누가 성장할까요?
이들은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크기 때문에 자기가 실패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보다 시험 못 본 학생들의 답안지를 보면서 위안을 삼았습니다.
반면에 열심히 노력한다고 칭찬받는 그룹은 자기보다 시험을 더 잘 본 학생들의 답안지를 보고 배우고자 했습니다.
나는 이 문제 틀렸는데 내 친구는 이렇게 이렇게 해서 맞았구나라고 배우고자 했습니다.
기꺼이 그래서 자기보다 더 나은 답안지를 보고자 한 것입니다.
여러분, 아주 어려운 시험 앞에서 두 그룹 모두 다 실패했습니다.
그러면 이 둘 중에 누가 성장할까요?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보면서 위안을 얻는 그룹과 자기보다 잘한 사람을 보면서 배우려고 하는 그룹 중에서 누가 성장할까요?
질문할 필요도 없는 문제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질문할 필요도 없는 문제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실패했을 때 상황을 탓하거나 다른 사람을 탓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한 번의 실패가 우리의 정체성, 우리의 자존감을 망치지 않습니다.
실패했어도 우리는 여전히 소중한 존재이고 여전히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실패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발전의 기회로 삼으면 됩니다.
실패를 통해서 드러나는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솔직하게 인정하면 됩니다.
이것이 올바른 실패를 향해서 나아가는 방안입니다.
인생은 우리의 능력을 증명하는 무대가 아닙니다.
여러분 인생은 하나님의 주권을 경험하는 무대입니다.
우리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것으로 모든 일을 다 해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어야지 우리가 진정한 의미의 성취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인생이 추락하는 것처럼 느껴져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스월의 문 앞에서도 죽음의 문턱에서도 우리를 붙잡아주시는 그 하나님의 선하신 손을 기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모든 고난과 시련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그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경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손을 바라본 요나는 고난 가운데 아주 중요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의 관점이 변화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한 번의 실패가 우리의 정체성, 우리의 자존감을 망치지 않습니다.
실패했어도 우리는 여전히 소중한 존재이고 여전히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실패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발전의 기회로 삼으면 됩니다.
실패를 통해서 드러나는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솔직하게 인정하면 됩니다.
이것이 올바른 실패를 향해서 나아가는 방안입니다.
인생은 우리의 능력을 증명하는 무대가 아닙니다.
여러분 인생은 하나님의 주권을 경험하는 무대입니다.
우리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것으로 모든 일을 다 해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어야지 우리가 진정한 의미의 성취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인생이 추락하는 것처럼 느껴져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스월의 문 앞에서도 죽음의 문턱에서도 우리를 붙잡아주시는 그 하나님의 선하신 손을 기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모든 고난과 시련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그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경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손을 바라본 요나는 고난 가운데 아주 중요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의 관점이 변화되는 것이었습니다.
바다 깊은 곳에 빠진 자기 자신을 보면서 처량하게 신세 한탄하지 않았습니다.
아 내가 왜 이런 잘못을 했나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바다 깊은 곳에서 요나는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오늘 본문 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아 내가 왜 이런 잘못을 했나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바다 깊은 곳에서 요나는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오늘 본문 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바다 깊은 곳에서 그의 영혼이 낙심될 때 요나는 여호와를 생각했습니다.
한글로는 생각했다라고 되어 있는데,
바다 깊은 곳에서 그의 영혼이 낙심될 때 요나는 여호와를 생각했습니다.
한글로는 생각했다라고 되어 있는데,
히브리어는 저컬입니다.
히브리어 저커는 기억했다라는 의미입니다. 요나가 바다 깊은 곳에 빠졌을 때에 그는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을 기억했고,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기억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약속을 기억하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기억할 때 우리는 소망 가운데서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 인물 중에서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누구인지 아십니까?
히브리어 저커는 기억했다라는 의미입니다. 요나가 바다 깊은 곳에 빠졌을 때에 그는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을 기억했고,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기억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약속을 기억하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기억할 때 우리는 소망 가운데서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 인물 중에서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누구인지 아십니까?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입니다.
사가를 영어로 하면 자라이아이거든요. 이 이름이 히브리어 저컬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저컬라이아 하면은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라는 의미입니다.
사가를 영어로 하면 자라이아이거든요. 이 이름이 히브리어 저컬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저컬라이아 하면은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라는 의미입니다.

사가랴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시대를 살아갔습니다.
400년 동안이나 선지자가 없었습니다.
선지자가 없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는 의미였습니다.
이방 민족의 지배를 받는 것도 힘든 일이죠.
이방 민족의 지배를 받는 것도 힘든 일이죠.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은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어떠한 약속도 주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시대를 살았다면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버리셨구나.
하나님께서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어떠한 약속도 주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시대를 살았다면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버리셨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과 하신 약속을 잊으셨구나 아마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어두운 상황에서도 사가랴는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했습니다.
그의 이름의 뜻대로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라는 그 믿음을 가지고 살아갔습니다.
누가복음 1장에 보면 사가랴의 노래가 나옵니다.
1장 7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어두운 상황에서도 사가랴는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했습니다.
그의 이름의 뜻대로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라는 그 믿음을 가지고 살아갔습니다.
누가복음 1장에 보면 사가랴의 노래가 나옵니다.
1장 7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아멘,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시대를 살았지만 사가랴는 소망 가운데 기도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약속의 신실하신 하나님을 기억했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바다 깊은 곳에 빠진 요나는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했기 때문에 소망 가운데 주님께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기도할 때 우리에게 중요한 변화가 생깁니다.
그것은 바로 관점의 변화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약속의 신실하신 하나님을 기억했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바다 깊은 곳에 빠진 요나는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했기 때문에 소망 가운데 주님께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기도할 때 우리에게 중요한 변화가 생깁니다.
그것은 바로 관점의 변화입니다.
고난 가운데 있는 나 자신을 바라보면서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건지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줍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줍니다.
불평, 불만,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신실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 하나님을 바라보게 될 때 우리는 방향 전환을 경험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기도는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주고 새로운 관점은 우리에게 새로운 방향을 향해 나아가도록 합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인생의 전환점 터닝 포인트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그 하나님을 바라보게 될 때 우리는 방향 전환을 경험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기도는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주고 새로운 관점은 우리에게 새로운 방향을 향해 나아가도록 합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인생의 전환점 터닝 포인트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지가 제일 중요합니다.
하늘을 향해 올라가고 있는지 아니면 땅을 향해 내려가고 있는지 그 방향이 제일 중요합니다.
방향이 중요하고 그다음이 속도입니다.
아무리 빨리 가도 방향이 잘못되어 있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요나서 전체를 보면 요나는 끊임없이 끊임없이 추락하고 있었습니다.
요나의 인생은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해서 배를 타고 엉뚱한 방향으로 갔습니다.
배 안에서도 가장 낮은 곳, 가장 깊은 곳에 가서 숨었습니다.
그러다 큰 폭풍을 만나서 모두가 죽게 되었을 때에 요나는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더 깊은 곳으로 추락했습니다.
하늘을 향해 올라가고 있는지 아니면 땅을 향해 내려가고 있는지 그 방향이 제일 중요합니다.
방향이 중요하고 그다음이 속도입니다.
아무리 빨리 가도 방향이 잘못되어 있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요나서 전체를 보면 요나는 끊임없이 끊임없이 추락하고 있었습니다.
요나의 인생은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해서 배를 타고 엉뚱한 방향으로 갔습니다.
배 안에서도 가장 낮은 곳, 가장 깊은 곳에 가서 숨었습니다.
그러다 큰 폭풍을 만나서 모두가 죽게 되었을 때에 요나는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더 깊은 곳으로 추락했습니다.
바다 깊은 곳까지 내려간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을 때까지 그는 추락했습니다.
가장 낮은 곳에 추락했을 때 요나가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을 때까지 그는 추락했습니다.
가장 낮은 곳에 추락했을 때 요나가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의 구원과 약속을 기억했습니다.
부끄럽고 염치없지만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했습니다.
자기 죄를 고백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에서 건지시기를 간구했습니다.
바로 이 순간이 요나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습니다.
여러분 그때 그의 인생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부끄럽고 염치없지만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했습니다.
자기 죄를 고백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에서 건지시기를 간구했습니다.
바로 이 순간이 요나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습니다.
여러분 그때 그의 인생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그전까지는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이제 방향이 바뀌어서 위로 위로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언제 이러한 변화가 나타났습니까?
하지만 그가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이제 방향이 바뀌어서 위로 위로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언제 이러한 변화가 나타났습니까?
그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나아와 기도할 때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우리는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되고, 새로운 관점을 얻을 때 우리는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실패를 통해서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되고 새로운 방향을 찾았다면 여러분 그 실패는 의미 있는 실패입니다.
새로운 방향,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때 우리는 변화되고 성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우리는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되고, 새로운 관점을 얻을 때 우리는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실패를 통해서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되고 새로운 방향을 찾았다면 여러분 그 실패는 의미 있는 실패입니다.
새로운 방향,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때 우리는 변화되고 성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인으로 평가받는 스티브 잡스가 과거에 MIT 대학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애플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은 사람에 대한 장기적인 관점을 갖게 된 것입니다.
지금 당장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을 키우는 것입니다.
사람은 실패를 통해서 성장합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스티브 잡스 같은 기업인도 사람의 성장에 관심을 가집니다.
하물며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성장에 얼마나 관심이 많으실까요?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냥 어느 정도 적당히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형상에 이르기까지 성장하기를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실패는 성장의 기회입니다.
실패를 통해서 나의 문제를 깨닫게 되고 인생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얻었다면 그것은 유익한 실패입니다.
하지만 실패를 통해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실패입니다.
여러분 무의미한 실패는 그야말로 시간 낭비, 인생 낭비입니다.
그런 것들로 여러분의 인생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실패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필요합니다.
실패를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할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실패를 통해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실패입니다.
여러분 무의미한 실패는 그야말로 시간 낭비, 인생 낭비입니다.
그런 것들로 여러분의 인생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실패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필요합니다.
실패를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할 필요 없습니다.
한 번의 실패가 인생을 망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실패를 통해서 새로운 관점을 배우고 새로운 방향을 찾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실패 가운데 하나님께 나아와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과거의 나를 건지셨던 하나님, 지금도 나에게 약속의 신실하신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나와 기도할 때 우리는 이러한 고백을 하게 됩니다.
요나서 2장 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다만 실패를 통해서 새로운 관점을 배우고 새로운 방향을 찾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실패 가운데 하나님께 나아와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과거의 나를 건지셨던 하나님, 지금도 나에게 약속의 신실하신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나와 기도할 때 우리는 이러한 고백을 하게 됩니다.
요나서 2장 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아멘,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줄로 믿습니다.
인생은 우리의 능력을 증명하는 무대가 아닙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는 무대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시고 실패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가지고 주님과 함께 믿음으로 나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할 때 모든 고난과 시련을 이길 힘을 주시는 그 하나님을 경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생은 우리의 능력을 증명하는 무대가 아닙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는 무대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시고 실패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가지고 주님과 함께 믿음으로 나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할 때 모든 고난과 시련을 이길 힘을 주시는 그 하나님을 경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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