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회의 사명과 비전인 생명 사역에 대해서 시리즈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비전을 가진 교회는 일관성이 있고 안정성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 모든 부서의 사역은 분명한 목적, 생명 사역을 위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분당 우리 교회에서 영원한 목적에 대해서 제가 설교를 했습니다.
영원한 목적을 가진 사람이 가지는 기쁨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세상에 알 수도 없고 세상에 빼앗을 수도 없는 기쁨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이 영원한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사용받는 기쁨인 줄로 믿습니다.
인생에 목적이 있는 것처럼 교회에도 목적이 있습니다.
교회는 선교 공동체이고 예배 공동체이고 봉사 공동체입니다.
지난번에는 전도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고 오늘은 예배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주일에 어떤 마음으로 교회에 나오십니까?
오늘 이렇게 추운 날 교회로 오시면서 하나님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오셨습니까?
아니면 교회에 가지 않으면 배우자와 갈등이 생기니까,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교회에 오셨습니까?
인간은 무언가를 갈망하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마음은 정적이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향해서 움직입니다.
17세기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는 '인간을 합리적인 존재'로 설명했습니다.
유명한 말이 있죠.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주장은 근대 합리주의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20세기 독일 철학자 에드몬트 후설은 인간은 지향적인 존재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의식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향해서 지향한다 나아간다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는 생각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죠? 우리는 바라고 갈망하는 무언가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생각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무엇에 대해서 생각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것, 우리가 바라는 것 그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갈망하는데, 우리가 갈망하는 그것이 바로 '예배의 대상'이 됩니다.
미국의 신학자 제임스 스미스는 인간을 예배하는 존재로 설명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곧 사랑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며,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규정한다.
우리의 궁극적인 사랑은 우리가 예배하는 대상이다.
나의 열정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내가 욕망하는 대상, 사랑하는 대상이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갈망하고 사랑하는 대상이 있습니다.
그것이 인격적인 존재일 수도 있고 아니면 비인격적인 목표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가 갈망하고 사랑하는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예배하는 대상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은 예배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배를 하느냐 마느냐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예배를 하고 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무엇을 예배하느냐, 누구를 예배하느냐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목적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출애굽의 사명을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장 12절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내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worship), 이것이 내가 나를 보낸 증거니라.
아멘.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긴다라고 말씀하는데, 여기에 사용된 단어가 영어로 'worship' 입니다.
이 산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구원받은 이유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구원받은 이유도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입니다.
예배는 인간이 존재하는 목적이고 또한 우리가 구원받은 목적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무더운 정오에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예수님과 그 여인이 만났습니다.
생각해 보면 정말로 어색한 만남이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은 남성이고 한 사람은 여성입니다.
한 명은 유대인이고 또 한 명은 사마리아인입니다.
일반적으로 중동에서 무더운 정오에는 밖으로 잘 나가지 않는데 이 여인은 정오에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서 일부러 그때 우물에 나왔는데 거기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대화를 나누던 중에 예수님께서 그녀의 남편에 대해서 질문하셨습니다.
그녀가 남편이 없다고 하니까는 그 말이 맞다고 하셨습니다.
남편이 5명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사람은 남편이 아니니까 네 말이 맞다고 하셨습니다.
이 여인이 얼마나 놀랐을까요?
처음 만난 사람이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깜짝 놀란 그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한복음 4장 19절 함께 읽겠습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서이다.
아멘.
이 말은 사실 우리에게 평범하게 보이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는 아주 특별한 표현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구약 성경을 다 믿는 것이 아니라 모세, 오경만 믿었습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었습니다.
그중에 신명기에 보면 모세가 약속한 선지자가 나옵니다.
신명기 18장 15절에 보니까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실 것이다'라고 모세가 예언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하나님께 보내서 보내실 것이라는 약속이죠.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은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선지자를 '타헤브'라고 부르는데, 그러한 선지자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이 바로 그 선지자 '타헤브'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주여, 내가 보니까 당신은 그 선지자가 맞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사마리아 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경의를 표한 것입니다.
바로 이어서 그녀가 이렇게 질문합니다.
20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이 여인이 어디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옳은지 질문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어느 교단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옳습니까?라고 질문하는 것과 아마 비슷할 것입니다.
장로교회에서 예배하는 게 옳은지, 감리교회에서 예배하는 것이 옳은지 질문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아시는 것처럼 솔로몬의 성전은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멸망한 이후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기원전 388년경에 그리심산에 또 다른 성전을 세웠습니다.
그리심산에는 두 가지 역사적인 의미가 있었습니다.
첫째로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제일 처음으로 제사 드렸던 곳이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세 개의 재단을 쌓고 거기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바로 그 세겜땅이 그리심 산에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모세가 율법의 축복과 저주의 말을 할 때에 그리심산에서 축복을 선포하라고 했습니다.
신명기 11장에 보면 그리심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고 했습니다.
여기 나오는 그르심산이 사마리아인들이 예배를 드리던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원래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그 스룹바벨이 재건한 성전도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사이에 어떤 것이 진짜 성전인지 치열한 논쟁이 있었는데 이 여인이 그에 대해서 질문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마리아 여인은 왜 하고 많은 질문 중에 이 질문을 예수님께 했을까요?
이 여인은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질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배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아주 특별하게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에게 신적인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했던 질문이 바로 예배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기 전에는 물을 달라고 했습니다.
내가 매일 번거롭게 사람 눈을 피해서 우물가에 오지 않게 물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바로 그 선지자 메시아인 것을 깨닫자 물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예배에 대해서 질문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갈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인간은 맛있는 음식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좋은 옷, 좋은 집, 좋은 자동차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는 이보다 훨씬 더 근원적인 갈망이 있습니다.
인간이 맛있는 음식을 위해 존재하지 않다는 사실을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배웠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이제 해외를 갔던 것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는데, 그 당시 아버지 회사에서 싱가포르로 가족 여행을 보내주었습니다.
싱가포르에 가면 센토사 섬이라고 아주 유명한 관광지가 있습니다.
그 섬에 있는 제일 좋은 호텔에서 일주일간 묵었습니다.
세계적인 특급 호텔이었는데 매 끼 식사가 뷔페였습니다.
아침도 호텔 뷔페, 점심도 뷔페, 저녁도 뷔페 얼마나 좋았을까요?
대구에서 제일 좋은 호텔 뷔페 이름 말하고 싶지만 거기보다 종류가 음식 종류가 2배는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당시 고등학생이었으니까 얼마나 먹성이 좋을 때였을까요?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매 끼 먹을 수 있으니까 너무 좋았습니다.
제 동생이랑 함께 정신없이 먹었습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3일이 지났습니다.
3일째 호텔 뷔페를 먹으면서 기분이 어땠을까요?
100가지가 넘는 음식을 보면서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 진짜 먹을 거 없다' 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때 제가 깨달았습니다.
사람이 최고급 호텔 뷔페를 봐도 만족할 수가 없구나.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그것이 나를 만족시킬 수 없구나라는 것을 제가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맛있는 음식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좋은 옷, 좋은 자동차를 위해서 인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는 그것보다 훨씬 더 근원적인 갈망이 있습니다.
미국의 신학자 aw 터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말은 정말로 심오한 진리입니다.
인간은 무언가에 감탄하도록 지어졌습니다.
우리 어린아이들 보면 이렇게 감탄하는 게 그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거예요.
우리가 광활한 대자연을 볼 때 와 하고 감탄하는 모습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그런데 죄로 타락한 이후에 인간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에 감탄하고, 또 어떤 사람은 아무 것에도 감탄하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잘못된 것에 감탄하며 살아갑니다.
우리 모두가 무언가를 갈망하는데 잘못된 것에 열광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고 감탄하고 나를 보고 열광하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감탄해야 할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감탄하십니까?
무엇에 열광하십니까?
삼성 라이온즈에 열광하십니까?
아파트 가격에 열광하십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열광하고 감탄해야 할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그 갈망을 만족시킬 수 있는 분도 하나님 한 분밖에 없는 줄로 믿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배에 대해서 질문했을 때 예수님의 답변은 놀라웠습니다.
그녀는 예배 장소에 대해서 질문을 했는데 예수님은 예배의 본질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 2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아멘.
요한복음에서 '이때라'는 헬라어 '허라'라는 단어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 기억나시죠?
예수님은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때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의미합니다.
'내 때가 이르지 아니하다'는 말은 '아직 십자가를 지실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이르렀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가 왔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이 새로운 시대에는 더 이상 예배의 장소와 스타일이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는지 사마리아에서 예배하는지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시대의 예배에서 중요한 것은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예전 성경에서는 이것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고 말씀했습니다.
기억나시죠?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라고 하면 왠지 마음을 다해서 정성을 다해서 예배하는 것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건성건성 대충 예배드리지 말고 마음을 다해서 진심으로 예배하라는 뜻입니다.
물론 그렇게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영이 예배자의 영혼을 뜻하는지 아니면 성령의 그 영을 뜻하는 것인지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릅니다.
그럴 때에는 요한복음 전체에서 이 영이라는 헬라어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영이 헬라어로 프뉴마인데, 요한복음에서 이 단어는 예수님의 영 아니면 성령을 의미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영을 뜻하는 프뉴마와 진리를 뜻하는 알렉세이아가 함께 사용된 그 구절들을 살펴보면 더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그는 진리의 영이다'라고 말씀하고 있고요.
15장에 보니까 '아버지께로 부터 나오는 진리의 성령'이라고 말씀하고,
16장에 보면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영과 진리가 함께 사용되면 그것은 언제나 성령을 의미했습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오시면 그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신다라고 예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라는 것은 성령과 말씀으로 예배를 드려라 하는 의미입니다.
모든 예배는 성령 안에서 말씀 안에서 들려져야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는 사람은 찬양을 불러도 이해할 수 없고, 설교를 들어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그냥 몸만 와서 앉아 있다가 가는 것이죠. 이것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예배가 아닙니다.
말씀 안에 거하지 않으면 잘못된 동기와 욕망으로 예배를 드릴 수도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그냥 내 마음대로 내 방식대로 예배할 수 있습니다.
이것 또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예배가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이렇게 잘못된 예배의 전형이 나옵니다.
바로 사울 왕이 블레셋과의 전투를 앞두고 드렸던 예배였습니다.
이스라엘 군대의 사기가 계속 떨어지고 있으니까 왕이 하나님께 딱 제사를 드리고 힘차게 나아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 사무엘이 늦게 오고 있었습니다. 몇 날 며칠을 기다려도 사무엘이 오지 않으니까 사울 왕이 자기가 직접 제사를 드렸습니다.
원래 이제 구약 시대 때 제사는 제사장만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이 아닌 왕이 직접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렇게 제사를 마치자마자 사무엘이 도착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됐는데 그걸 못 기다려서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도착한 사무엘은 사울 왕이 제사를 지낸 것을 보고 이렇게 책망했습니다.
사무엘상 13장 13절 함께 읽겠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사무엘이 책망하면서 말을 합니다.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다라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울이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사울이 사람을 죽였습니까?
우상숭배를 했습니까?
아닙니다.
사울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왜 망령되이 행하였다고 했을까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말씀에 순종해서 드려야 하는데, 내 욕망을 위해서 내가 하고 싶은 방식대로 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마음을 다해서 열정적으로 예배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어떤 일을 앞두고 간절한 마음으로 예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과 말씀 안에서 예배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예배하지 않습니다.
성령 안에서 성령을 의지하여서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는 하고 싶은 대로 예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성령과 말씀으로 예배를 드리지 않을 때 하나님은 그 예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조금 무서운 이야기죠.
우리가 아무리 좋은 재물과 아무리 좋은 찬양을 드려도 성령으로 드리지 않을 때 하나님은 그 예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이사야 1장 12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숭배에 빠진 그들의 죄를 지적하는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게 된 그 결정적인 시작은 형식적인 예배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모스서에 봐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형식적인 제사 예배를 얼마나 미워하시는지 나와 있습니다.
아모스 5장 21절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여러분 절기와 제사를 누가 정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그걸 정하셨는데, 왜 하나님께서 본인이 정하신 제사와 절기를 싫어한다고 하셨을까요?
이스라엘이 너무나도 형식적으로 육체로 제사와 절기를 지냈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형식적으로 제사와 절기를 지켰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도 이중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중적인 사람을 만나본 적 있으십니까?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사람을 만나본 적 있으신가요?
겉으로는 착한 척, 신사적인 척하지만, 마음 안에는 증오와 비방이 가득한 사람을 본 적 있으십니까?
그런 사람하고는 가까이 지내고 싶지 않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 좋아하는 경우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그런 모습일 때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경건하게 예배드리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찬양합니다.
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오직 내 정욕과 내 욕심대로만 행할 뿐입니다.
이렇게 이중적인 사람이 드리는 예배는 형식적인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형식적인 예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기 때문에 성령 안에서 말씀 안에서 드리는 참된 예배를 찾고 계십니다.
참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그 모든 시간을 너무나도 소중하게 여깁니다.
우리가 대통령을 만나러 가는데 늦게 가는 경우 없습니다.
대구 시장을 만나러 가는 데에도 늦게 가는 경우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데 늦게 갈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하면 식상하시지요.
그래서 제가 다르게 생각해 봤습니다.
세계적인 오케스트라가 대구에 와서 공연을 합니다.
그 공연을 보러 갔는데 내가 정말 어렵게 티켓을 구했는데 그만 차가 막혀서 2분 늦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내가 2분 늦었는데 미안하다고 하면 들여보내줄까요?
아닙니다.
못 들어갑니다.
다른 관객에게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1부 공연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1부 마치고 2부 시작하기 전에 인터미션 시간에 들어가야 합니다.
클래식 공연 시간에도 늦게 가면 못 들어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러 왔는데 늦으면 어떻게 될까요?
원래는 못 들어가야 하는데 우리 하나님께서 너무너무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받아주십니다.
성령과 말씀 안에서 예배드리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과 위험을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주를 통치하시는 그 하나님 앞에서 나와 예배드리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을 사모하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일찍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할 때마다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나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최고의 예배는 어떤 모습일까요?
하나님께서 화려한 예배당을 기뻐하실까요?
최고의 오케스트라, 최고의 음악을 주님께서 원하실까요?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예배가 어떤 모습인지 호세야서에 나와 있습니다.
호세야 6장 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노라.
아멘,
하나님은 인애를 원하십니다.
여기에서 인애 히브리어로 헤세드입니다.
많이 들어보셨죠?
헤세드는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랑,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헤세드의 사랑으로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동일한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번제보다 제사보다, 음악보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을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호세아 6장 6절 말씀을 인용하신 적이 있습니다.
세리였던 마태를 제자로 부르실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식사하는 모습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비판했습니다.
어떻게 랍비가 돼 가지고 죄인들과 식사할 수 있는가?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호세아 6장 6절을 인용하셨습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라는 이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배워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누구보다도 율법에 열심히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제사와 절기를 잘 지켰습니다.
헌금 생활도 철저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없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그 헤세드의 사랑이 그들의 마음 가운데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평가는 딱 한마디였습니다.
요한복음 5장 42절 함께 읽겠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아멘.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경건한 행동, 거룩한 행동, 눈에 보이는 행동을 보신 것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 가운데 사랑이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의 중심에는 어떤 생각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 그것이 여러분이 가장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예배 마치고 어디 가서 점심 먹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분은 쇼핑 계획, 여행 계획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이번 주에 해야 하는 중요한 회사 프로젝트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제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제일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최고의 예배는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미국의 찰스 테니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부족한 게 없으시죠?
하나님은 아무것도 필요한 게 없으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딱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사랑을 담아 드리는 예배입니다.
우리가 뭐라고 우리의 사랑이 왜 하나님께 중요할까요?
온 우주를 창조하고 소유하신 그 하나님께서 왜 우리 같은 사람의 사랑을 원하실까요?
그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 할아버지에게는 손녀가 딱 한 명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손자도 많고 손녀도 많은데 그분에게는 딱 한 명의 손녀가 전부였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손녀였습니다.
그런데 그 손녀가 외국에 살았기 때문에 몇 번 만날 수 없었습니다.
아장아장 걷는 모습도 보지 못하고 그냥 멀리서 영상 통화만 했습니다.
그 손녀가 가끔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영어로도 쓰고 한글로도 썼습니다.
별다른 내용 없습니다.
할아버지 사랑해요 할머니 사랑해요 이런 편지였습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에게는 그 편지가 너무나도 소중했습니다.
시간이 오래 지나도 그 모든 편지와 쪽지들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습니다.
단 하나뿐인 손녀의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 할아버지가 바로 저희 아버지이십니다.
저희 아버지는 저희 딸이 보낸 모든 편지와 쪽지를 다 보관하고 계십니다.
식당에서 음식 기다리면서 그림 그리잖아요. 그런 그림까지도 다 보관하고 계십니다.
왜 그러실까요?
그 그림에 무슨 예술적인 가치가 있어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그 정도로 손녀 딸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가 뭐가 그렇게 대단할까요?
우리가 드리는 찬양에 무슨 예술적인 가치가 얼마나 있을까요?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왜 우리의 예배를 이렇게 귀하게 여기실까요?
그 할아버지가 손녀를 사랑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너무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부르는 이 작은 찬양에도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제사와 절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화려한 음악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장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예배의 본질이라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예배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억지로 순종하는 것 아닙니다.
벌 받을까 봐 무서워서 순종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너무나도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러한 순종을 너무나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순종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잘 보여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성전이 어디에 세워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역대야 3장 1절에 보면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을 건축했다 라고 나옵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있는 모리아 산에 성전을 세웠습니다.
여러분 모리아 산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성경 전체에서 모리아 산이 딱 두 번 나옵니다.
한 번은 역대야 3장에 있고, 또 한 번은 창세기 22장입니다.
22장 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 아들 내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내게 일러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모리아산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쳤던 곳입니다.
바로 그곳에 솔로몬의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연이었을까요?
절대 우연이 아닙니다.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입니다.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예배는 자발적인 순종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종이 두 번 나옵니다.
한 번은 구약에 나오고 한 번은 신약이 나옵니다.
구약에서는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의 순종이 나옵니다.
신약에서는 스스로 재물이 되신 예수님의 순종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순종과 예수님의 순종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예배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교회 안에서도 주님을 예배할 수 있고, 교회 바깥에서도 주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그 모든 것이 주님을 향한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추운 날 주차 봉사를 하는 것 주님을 향한 예배입니다.
어르신 분들, 몸이 불편하신 분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것도 주님을 향한 예배입니다.
사업하면서 최대한 정직하게 편법을 사용하지 않는 것도 주님을 향한 예배입니다.
복음을 위해 헌신하시는 선교사님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것 또한 주님을 향한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그 모든 것이 주님을 향한 예배인 줄로 믿습니다.
이러한 순종, 주님께서 너무나도 기뻐하시는데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고 성령 안에 거할 때 말씀 안에 거할 때 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서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할 때 우리의 갈망이 하나님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더욱더 하나님을 사모하고 사랑할 때, 그때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최고로 영광 받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사랑을 원하시는 그 하나님 앞에서 영과 진리로 예배드려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날마다 깊어지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기쁨으로 순종하여서 주님께서 찾으시는 거룩한 예배를 드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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