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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 6일 대구동신교회

마이코 2025. 4. 9. 13:03
옳은 실패 (2) 성장을 위한 실패
마태복음 14:22-33 | 문대원 목사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실패를 경험합니다. 

일기 예보에 비가 온다고 예보가 되었는데 깜빡 잊고 우산을 가지고 나가지 않는 경우가 누구나 다 있을 것입니다.
자동차 엔진 오일을 갈아야 되는데 제때 확인하지 않아서 차에 이상이 생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누구나 여러 가지 실수 실패를 하면서 살아갑니다.

 

2021년 6월에 뉴욕 시내에서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시내버스가 다른 차량과 충돌하고 또 그 오피스 건물 1층으로 돌진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이 사고로 인해서 승객과 시민 16명이 크게 다쳤습니다.
13년의 경력을 가졌던 시내버스 버스 기사는 브레이크와 엑셀 사이에 발이 끼었다고 진술을 했습니다.
그런데 영상 자료를 확인해 보니까 그는 발 사이에 쇼핑백을 두었습니다.
버스 기사가 사실 발 근처에 물건을 두는 것은 안전 수칙에 어긋납니다.
조사 결과 버스 자체에는 기계적인 문제가 전혀 없었습니다.
버스 기사가 안전 수칙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큰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이와 같은 실패는 사실 충분히 예방될 수 있는 실패입니다.
여러분 모든 실패가 다 똑같지 않습니다.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실패도 있는가 하면, 변화와 성장을 위해서 반드시 경험해야 하는 그런 실패도 있습니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에이미 에드먼슨 교수는 세 가지 종류의 실패가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첫째로 기본적 실패는 부주의, 방치, 실수와 같은 단순한 요인으로 발생합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교통사고가 이와 비슷합니다. 

버스 기사가 브레이크 페달 근처에 물건을 두는 것은 안전 수칙 위반입니다.
두 번째로 복합적 실패는 통제 불가능한 상황, 외부적 요인과 경고를 무시한 내부적 요인이 결합해서 발생했습니다.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지난 12월에 있었던 무안 공항 사고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비행기 양쪽 엔진이 망가진 상황에서 기장은 최선을 다해서 비상 착륙을 했지만 콘크리트 둔덕에 부딪히면서 안타까운 참사가 있었습니다.
불가능한 통제 불가능한 외부의 문제와 경고를 무시했던 내부의 문제가 결합해서 큰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세 번째로 교훈적 실패는 새로운 영역에서 새로운 지식을 얻고자 시도하는 과정에서 발생합니다.
과학자, 발명가, 기업의 혁신, 부서 담당자 등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서 시도하다가 실패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가는 뭐 아시는 것처럼 토마스 에디슨입니다.
그는 1093개의 특허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저작권 10개만 있어도 좋을 텐데 천개가 넘는 저작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백열 전구 축음기 축전지를 개발했습니다. 

에디슨에 대한 유명한 일례가 있죠.
새로운 축전지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계속해서 이제 실패를 했다고 합니다.
그와 함께 연구하는 직원이 반복되는 실패로 인해서 힘들지 않냐고 에디슨에게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그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에게는 수천 개의 결과가 있습니다.

그 결과 하나하나가 효과가 없음을 증명하는 귀중한 발견이었습니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실패라고 부르는 것을 에디슨은 발견이라고 불렀습니다.
둘 다 맞는 말이죠. 

보는 관점에 따라서 실패라고 볼 수도 있고 또한 발견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에디슨은 새로운 발견과 성장을 위해서 기꺼이 실패를 마주하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성장을 원하십니까? 

지금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변화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하고 그 과정에는 반드시 실패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실패는 기본적인 실패, 복합적 실패가 아니라 교훈적 실패입니다.
부주의나 방치에 의한 실패가 아니라 새로운 도전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그런 경험입니다.
모든 실패가 똑같지 않습니다. 

의미 있는 실패는 성장을 위한 실패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경험했던 실패였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오병이어 기적 이후의 말씀입니다.
보리떡 5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예수님께서 5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아주 중요한 기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복음서 모두에 기록된 유일한 예수님의 기적이었습니다.
이 기적이 왜 중요한지는 잠시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마태복음 14장 22절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에 예수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셨습니다.
여기서 재촉하다라는 단어는 강요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 제자들은 그렇게 원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빨리 배를 타고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제자들이 빨리 떠나기를 원하셨을까요?
마태복음에는 그 이유가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보면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 15절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그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사람들이 이 기적에 열광적으로 반응한 것입니다.
아니 우리 생각에는 병자를 고치고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더 놀라운 기적이죠.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 오병이어의 기적에 열광적으로 반응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광야에서 예수님께서 음식을 나누어 주신 것은 주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모세가 만나를 내려준 것과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세가 어떤 일을 했습니까? 모세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모세가 했던 일과 똑같은 일을 하고 계십니다.
광야에서 백성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기적이 아닙니다.
모세가 예언했던 대로 하나님께서 보내실 그 마지막 선지자의 역할입니다.
과거에 모세가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을 해방했던 것처럼 이제 마지막 선지자가 로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것이라는 기대가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이루어 줄 메시아로 착각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의 의도를 아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빨리 보내셨습니다.
제자들이 정치적 야망에 물들지 않도록 서둘러서 그들을 보냈습니다.
빨리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로 가라 반대편으로 가라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교훈을 한 가지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칭송을 따라가지 않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의 제자들 역시 세상의 칭송을 따르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여러분 타락한 세상은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하고자 했습니다.

이 세상은 단 한 번도 예수님을 진정한 왕으로 인정한 적이 없습니다.
단지 예수님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정치적 뜻을 이루고자 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 권력과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권력에 이용당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목소리를 두려워하지 않고 굴복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로마 군대와 싸우지 않으셨습니다. 

하늘의 천사를 불러서 로마 군대를 무찌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칼과 군대로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공의로 확장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타락한 세상, 악한 세상은 한 번도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한 적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세상과 타협할 이유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신 대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길로 행하면 되는 줄로 믿습니다.
권력을 잡은 사람들은 자기 세상에 왔다고 좋아하겠지만, 여러분 어떤 권력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5년만 지나면, 10년만 지나면 다 사라집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만이 영원한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시고 어떤 상황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지난 3월 말에 있었던 경북 지역 산불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당했습니다.
뭐 의성, 안동, 영덕 등 여러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산불을 피해서 대피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우리 교회 많은 성도님들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우리 교회 당회에서도 기도하던 중에 긴급 구호 사역을 시작하자라고 결의했습니다.
사실 뭐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사역이었지만 재난 가운데 고통받는 이웃을 섬기기 원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긴급 구호를 제일 잘하는 교회가 서울에 있는 서울 광염 교회입니다.
그 교회에 연락해서 어떻게 이 사역을 시작해야 하는지 조언을 듣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서울 광염교회에서도 경북 지역 산불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아 긴급 구호 팀을 보내고 싶었는데 현지에서 함께 동역해 줄 교회가 없었다고 합니다.
마침 저희가 연락하니까 그러면 곧바로 팀을 보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서울 광염교회와 대구동신교회가 팀을 이루어서 긴급 구호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우리 이웃 교회인 범어교회, 성명 교회, 성서중부교회 등 여러 교회가 함께 협력해서 교육자분들과 봉사자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영덕 체육관에 마련된 대피소에는 1300명의 이재민들이 모였습니다.
산불이 얼마나 빠르게 번졌는지 신발도 없이 맨발로 오시는 어르신들도 계셨습니다.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신 분들에게 음식과 속옷과 양말, 생필품을 드리며 저희가 기도해 드렸습니다.
특정 교회의 이름으로 이 사역을 섬긴 것이 아니라 한국 기독교 연합봉사단이라는 이름으로 섬겼습니다.
영덕군청 공무원의 부탁을 받아서 교회 트럭과 화물용 승합차를 이용해서 관내 여러 읍 면사무소로 구호 물품을 운송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한국 교회의 이름으로 재난 가운데 고통받는 분들을 섬겼습니다.
여러분 교회가 환란 중에 있는 이웃을 섬겨야 하는 이유는 이 세상에서 칭찬을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번 구호 현장에도 여러 방송사에서 와서 저희가 섬기는 구호 활동을 다 촬영을 했습니다.
그런데 봉사 활동하는 장면은 다 찍고 한국 기독교 연합봉사단이라는 이름은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다른 부스에 있는 다른 단체의 이름은 다 보여주면서 한국 교회의 이름은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여기에 의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잘못하는 것은 크게 보도하고 그럼 교회가 잘하는 부분도 보도해야 할 것인데 잘 보도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구호 활동의 목적이 세상에 칭찬을 받는 것이었다면 서운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연약한 자를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닮아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구제와 봉사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칭송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세상의 권력도 따라가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델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칭송을 따라가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세상은 한 번도 예수님을 인정한 적도 없고, 교회를 인정한 적도 없습니다.
여러분, 그로 인해서 낙심하지 마시고 예수님의 본을 따라서 그 사랑과 공의의 길로 행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 반대편으로 이제 떠나갔습니다.
이 배를 타고 한 5킬로미터쯤 지났을 때 큰 풍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갈릴리 호수가 엄청 큰 호수거든요. 길이가 21km, 너비가 13km입니다.
5킬로미터쯤 갔을 때니까 호수 중간쯤에 있어서 돌아올 수도 없었습니다.
큰 풍랑을 만난 제자들은 정말 새벽같이 새벽까지 폭풍 속에서 고생을 했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순종해서 배를 타고 떠났는데 폭풍을 만난 거죠.
여기에서도 우리가 한 가지 배울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음에도 폭풍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생에서 폭풍을 만나게 되면 많은 경우에 자신을 탓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뭘 잘못해서 이러한 고난을 만났을까라고 자책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잘못해서 그런 고난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음에도 불구하고 폭풍을 만날 수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말씀하셔서 순종했는데 어떤 어려움과 고난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고난의 그 이유를 우리가 속 시원하게 설명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잘못해서 고난을 당한 것이든 아니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고난을 당한 것이든 상관없이 우리가 만나는 폭풍 가운데 주님께서 함께 계시다 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 하신 그 약속을 기억하시고 폭풍 가운데서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이지 폭풍 속에서 고생하는 제자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다가오셨습니다.
마태복음 14장 26절 함께 읽겠습니다. 

제자들이 그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제자들이 너무 놀랐습니다.
분명히 모습은 예수님의 모습인데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시고 유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너무 무서워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니 뭐 7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다 큰 성인이 얼마나 무서웠으면 소리를 질렀을까요?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아멘.

제자들에게 안심하라라고 하시면서 예수님께서 나다 라고 하십니다.
한글로 하면 나다 별로 와닿지 않는데, 헬라어로 하면 에고 에이미입니다.
여러분 에고 에이미 하면은 생각나는 것이 있으십니까?
제가 3년 전에 예수님의 I am 선포라는 시리즈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전시에 보면 예수님께서 7번에 걸쳐서 나는 무엇무엇이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 이런 말씀하셨죠.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스스로 선언하셨습니다.
I am을 헬라어로 하면 에고 에이미입니다.

유대인들이 에고 에이미라는 말을 딱 들으면 생각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출애굽기 3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3장 1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아멘.

하나님께서 그분의 이름을 모세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있거든요. 여호와입니다. 

여호와라는 그 이름의 뜻은 스스로 있는 자이고 영어로 하면 I AM WHO I AM 이것을 헬라어로 하면 에고 에이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에고 에이미라고 말씀하신 것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신 것을 넘어서서 그 여호와 하나님과 나를 동일하게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에고 에이미 할 때마다 바리새인들이 마음속으로 분개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폭풍 속에서 바다 위를 걸어오신 그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을 향해서 나다 에고 에이미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모습이야말로 예수님과 하나님이 동등한 영광을 가지고 계심을 선포하는 장면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고대인들에게 바다는 두려움과 혼돈의 대상이었습니다.
다니엘의 환상, 요한계시록의 환상을 보면 무시무시한 짐승이 바다에서 올라왔습니다.
고대인들에게 바다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바다 위를 걸어오십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길 에고 에이미라고 하십니다.
저는 이 장면보다 더욱더 선명하게 예수님의 영광을 보여주는 장면은 없다고 믿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그 예수님이 동일한 분이심을 나타내는 장면인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바다 위를 걸으신다고 이미 구약에서 선포했습니다.
욥기 9장 8절 10절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셀 수 없는 귀한 일을 행하시느니라.

 

아멘.

하나님께서 책량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을, 귀한 일을 행하시는데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다 물결을 밟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혼돈의 대상인 그 바다 위를 걸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바다를 보기만 해도 무서운데 어떻게 바다 위를 걸을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바다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동등한 영광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이 욥기 말씀을 성취하셨습니다.
폭풍 가운데 두려워 떠는 제자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서 오셨습니다.
이 말은 바다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님께도 동일하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물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마태복음 전체에서 안심하라라는 동사가 딱 세 번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한 번 나오고 마태복음 9장에서 두 번 나옵니다.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시기 전에 이 말씀하셨습니다.
중풍병자를 향해서 안심하라 말씀하시고요. 혈루증 앓는 여인을 향해서 안심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놀라운 기적을 행하기 이전에 항상 하셨던 말씀이 안심하라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실패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실패를 극복하는 데 중요한 것이 심리적인 안정감이라고 말합니다.


실패했을 때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안전하다.
내가 실패를 했지만 그래도 나는 안전하고 용납받고 있고, 다 끝난 것이 아니라 한 번 더 기회가 있다는 그 안전한 느낌이 있어야지 다시 실패를 딛고 도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 에모리 대학의 제니퍼 힘스트라 교수가 있는데요.
DNA와 RNA 분자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학자입니다.
단백질 합성에 관여하는 RNA를 분리하는 연구를 해왔는데 실패의 실패를 거듭했다고 합니다.
그녀가 하는 모든 실험의 95%가 실패였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하는 일에 95%가 실패라면 낙담되지 않을까요?
반복되는 실패 앞에서 어떻게 우리의 마음을 지킬 수 있을까요?
그 실험실의 리더로서 힘스트라 교수는 팀원들이 포기하지 않게 하는 그런 책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 실험을 시작할 때마다 그녀는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실패만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실패를 정상화하는 과정입니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실험실의 리더가 팀원들에게 심리적인 안정감을 준 거죠.
실패해도 괜찮다.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끈기가 가장 중요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새로운 발견과 성장을 위해서 실패는 당연한 과정이라고 안정감을 준 것입니다.


여러분 리더가 이렇게 말할 때 팀원들은 심리적인 안정감을 느낍니다.
실패를 부끄러워하거나 실패를 숨기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 실패를 디딤돌로 삼아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침내 그녀의 연구팀은 글리옥살이라는 시약을 사용해서 RNA 분리에 성공했습니다.
RNA에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연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실수하지 않고 실패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은 시도하지 않는 사람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너무나도 멋진 말이죠. 

여러분 과학뿐만 아니라 스포츠에도 이 원리가 그대로 적용됩니다.
스포츠에서 최고 수준에 이르기 위해서는 엄청난 실패를 반복해야 합니다.
여러분 프로야구에서 최고의 타자도 10번 나가면 7번 아웃됩니다.
10번 나가서 세 번만 안타를 쳐도 잘하는 선수라고 칭찬을 받습니다.
미국 여자축구 팀의 리더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던 에비 웜백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실패했다는 것은 당신이 경기에 참여했다는 뜻이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맞는 말이죠. 경기에 임했다면 반드시 실패를 경험합니다.
실패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경기에 참여하지 않는 것입니다.
경기에 참여하지 않으면 실패하지도 않겠지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

폭풍 속에서 고생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다가가셨습니다.
물 위를 걸으시며 에고 에이미 말씀하시고 또한 제자들에게 안심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폭풍 가운데 함께 계시는 그 예수님과 함께할 때에 우리는 심리적인 안정감을 누리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그 안정감 안에서 있을 때 우리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베드로가 한 가지 요청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가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베드로가 왜 이런 요청을 했는지 우리는 잘 이해를 못하겠지만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다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를 때 주여라고 불렀습니다.
이 단어가 헬라어로 큐리어스인데요. 

70인경을 보면 큐리어스가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라는 의미가 큐리어스라고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에고 에이미라고 하심으로써 자신과 여호와 하나님을 동일시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베드로가 주여 큐리어스라고 부름으로써 하나님과 예수님을 동일시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신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요청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본문 29절 함께 읽겠습니다.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예수님께서 물 위에서 오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진짜 배에서 내려서 걸어갔습니다.
물 위를 걸어서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우리는 베드로를 얕잡아 보는 경향이 있죠.
베드로가 하도 실수를 많이 하다 보니까 그를 만만하게 나와 비슷한 사람 아닌가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베드로는 모든 인류 중에서 유일하게 물 위를 걸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니까 빼고 예수님 빼고 순수한 인간 중에 물 위에 한 발짝이라도 걸어본 사람은 베드로밖에 없습니다.

미국 인구 문제연구소의 통계에 따르면 지금까지 존재했던 인류가 약 1170억 명이라고 합니다.
인류 역사상 존재했던 1170억 명 중에서 유일하게 물 위를 걸었던 사람은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을 창조주 하나님으로 믿는 그 믿음 가운데 주님을 바라보면서 나아갔을 때 베드로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그다음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죠. 30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님을 바라보며 갈 때는 잘 걸어가다가 거센 바람과 파도를 보니까 무서웠죠.
그거 보고 두려워서 시선이 나뉘어질 때 베드로가 물에 빠졌습니다.
물에 빠진 그는 다급하게 외쳤습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사실 베드로의 이 모습은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보았던 요나와 아주 대비를 이룹니다.

요나는 하나님께 불순종해서 계속해서 추락해 내려갔습니다.
배에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갔다가 바다 깊은 곳에 빠졌습니다.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깊은 곳에 빠져서 가장 깊은 곳에서 그는 회개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베드로는 물에 빠지자마자 예수님께 외쳤습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여러분 어떤 것이 더 현명한 일일까요?
베드로는 요나처럼 고집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추락해서 바다 깊은 곳까지 내려갈 때까지 기다리거나 오기를 부리지 않았습니다.
물에 빠지는 즉시 예수님께 외쳤습니다. 

주님 좀 구원해 주세요라고 외쳤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신앙생활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다운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과 멀어지고 있구나라는 것을 느낄 때가 있거든요.
내가 지금 가라앉고 있구나 느낄 때 그런 느낌이 올 때 요나처럼 고집을 부리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 나아오지 않고 고집을 부리면 더 깊이 추락할 뿐입니다.
바다 깊은 곳까지 이를 때까지 고집을 부리면 자기만 손해입니다.
베드로처럼 물에 빠지자마자 예수님께 외쳐야 합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더 깊이 빠질 때까지 죽기 직전까지 기다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물에 빠지는 즉시 문제가 생기는 즉시 주님께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베드로가 간절하게 외칠 때 주님께서 어떻게 하셨나요?
31절에 나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요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예수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붙잡아 주셨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베드로가 물에 빠지는 즉시 예수님께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소리를 듣는 즉시 붙잡아 주셨습니다.
문제가 발생하는 즉시 다루어야 하는 거죠. 

가만히 기다린다고 해서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다루지 않는 문제는 그대로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를 즉시 붙잡아 주시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작은 자요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를 꾸짖는 말씀은 아닙니다. 

여러분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보다 훨씬 더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거든요.
폭풍 가운데 예수님을 향해서 나올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예수님은 베드로의 믿음이 더 성장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의심하다란 단어가 헬라어로 디스타즈입니다.
이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나뉘어진 마음을 가지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그 마음을 딱 하나로 정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거죠.
둘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민하는 것, 그 시선이 나뉘어진 상황을 가리켜 의심하다라고 말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믿음이 있는 걸 아셨죠? 

다만 그의 믿음이 초점을 잡은 것이 아니라 나뉘어져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나뉘어진 마음으로 있으면 안 된다라고 그를 격려하고 교훈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마태복음 전체를 보면 베드로의 믿음이 성장하는 과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베드로 장모의 열병이 낫는 것을 보고 그의 믿음이 성장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해석해 주시는 것을 듣고 베드로의 믿음이 성장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물 위를 걸으시는 그 예수님을 향해서 나아가는 경험을 통해서 베드로의 믿음은 더욱더 성장했습니다.
폭풍 속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면 기적이 나타나지만 바람을 보고 두려워하면 실패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성장은 그냥 쭉 일직선이 아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는 크고 작은 실패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포기하지 않고 나아갔고 예수님께서도 그를 격려해 주시고 지도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실패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습니다. 

그 원인을 스펙트럼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왼쪽 끝이 기본적인 실패이고 오른쪽 끝은 이제 교훈적 실패입니다.
왼쪽으로 갈수록 비난을 받아야 하고 오른쪽으로 갈수록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딱 그 가운데 부분에 보면은 역량 부족이라고 있죠.
능력이 부족한 것은 사실 뭐 비난받을 것도 아니지만 칭찬받을 것도 아닙니다.
자기 능력을 객관적으로 살피고 그 역량을 키우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다음에 있는 도전부터는 칭찬받을 일입니다. 

이전에 해보지 않았던 그 일에 도전하는 것, 그 과정에서 만약에 실패를 했더라도 그것은 칭찬받을 만한 실패입니다.
더 나아가서 불확실성을 마주하는 것, 아니면 각고의 노력을 들여서 어떤 실험을 하는 것 이건 정말로 칭찬을 받아야 하는 실패입니다.
이 칭찬받을 만한 실패의 시작은 도전에 있습니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해보지 않은 일을 시도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매일 똑같이 살면서 우리가 변화되고 성장하기를 바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변화와 성장을 위해서는 안전지대 밖으로 나아가는 도전이 필요합니다.

안전지대 밖으로 나아가면 불확실성이 있겠죠

그 불확실성을 견딜 수 있어야지 우리가 성장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익숙하고 편안한 그 안전지대 안에만 머물러 있으면 절대로 변화와 성장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한 번도 새벽 기도에 나와보지 않은 사람은 특세에 한번 도전해 보셔야 합니다.
제가 특새에 매일 나오라고 전출하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딱 하루만 와도 좋습니다. 

도대체 특새에 어떤 은혜가 있길래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모이는지 여러분이 직접 경험해 보셔야 합니다.
아직까지 한 번도 목적 헌금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목적 헌금을 한번 해보십시오.
경북 지역 산불 피해를 입은 이웃을 위해서 한번 헌금해보는 겁니다.
사정이 어려우면 적은 금액만 해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뜻을 위해서 나의 재정을 드릴 때 얼마나 큰 기쁨과 감사가 임하는지 여러분이 경험해 보셔야 합니다.
베드로는 끊임없이 도전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안전지대 밖으로 나아가서 부딪혀서 직접 도전해 보는 그 믿음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실패도 경험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알고 있는 실패만 이렇게 많은데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베드로의 실패는 얼마나 더 많겠습니까?
하지만 베드로의 실패는 기본적인 실패가 아니라 교훈적 실패였습니다.
베드로의 실패는 성장을 위한 실패였습니다. 

끊임없이 도전했기 때문에 그의 믿음은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베드로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위대한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 함께 읽겠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아멘.

여러분 이 고백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완벽한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고백을 들으시고 너무너무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믿음의 고백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하루아침에 이런 믿음을 갖게 된 것이 아닙니다.
아주 오랜 기간 동안 많은 실패를 통해서 성장했기 때문에 이러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서도 동일한 역사가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10년 20년 똑같은 믿음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고 도전하는 과정을 통해서 믿음의 성장을 경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UiBTI1YfAz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