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창세기 5장 24절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1.2. Intro.
2023년을 시작하는 첫 주일, 우리는 어김없이 ‘예배’를 생각하며 나아갑니다. 그동안도 늘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어떤 일을 해도 예배하지 않고 하는 일이라면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의 일이라면, 어떤 행위도 잘못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예배를 드린다면, 그 예배로 인해 우리는 늘 하나님과 동행하게 될 테니 말입니다.
2023년은 [새로운 습관]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7주 동안 시리즈로 말씀을 나누게 됩니다.
첫 주는 A. W. 토저의 『이것이 예배이다』라는 책과 아브라함 헤셀의 『안식』이라는 책을 통해 예배에 대한 올바른 자세에 대하여 나누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6주 동안은 『주님은 나의 최고봉』을 기초로 크리스천들이 가져야할 5가지 습관에 대하여 배우게 됩니다.
이번 시리즈에서도 변함없이 묵상팀에서 설교 원고를 읽고 나누어준 글들이 있습니다. 권순보 권사가 나눠준 이야기를 조금 소개합니다.
예전에 한 연예인을 만났던 기억이 있다. 건강검진을 하러 갔는데 바로 앞 번호에 연예인이 검진을 받고 있었다. 검진을 받다 보니 머리도 떠 있었고 꾸민 모습이 아니었다. 연예인은 꾸민 모습이 익숙하지 부스스한 모습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을 테니, 말을 걸면 도리어 민망할까봐
배려 차원에서 알은 척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엘리베이터를 같이 탔을 때 도리어 그 연예인이 말을 걸어주기를 바라는 것 같은 제스처를 취했다.
집에 돌아가 아내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한 마디 했다. “연예인한테는 어떤 상황에서도 알은 척해주는 게 예의야~”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하나님 아시죠?’라고 속으로 삭히는 것보다 예배의 4요소처럼 하나님 앞에서 감탄, 매혹, 찬탄 등 보다 적극적인 표현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어떤 상황에서도 연예인에게는 아는 척을 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다양하고 적극적인 반응을 해야 하는 것 같다. 하나님은 연예인과 비교할 수 없는 분인데, 그런 하나님께서 함께 계신 것만으로도 큰 기쁨인데 이제까지 그 기쁨을 써 억누르고 당연하게 받지 않았나?
저에게는 그런 이미지로 이 글이 다가왔습니다.
‘알은 척’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알아채지 못하거나, 알은 척하지 않는다면 동행하는 것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난 10여 년 동안 매년 한해를 시작하는 주일이면 예배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무엇보다 만나교회 성도들이라면 예배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성공적인 예배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배에 대한 본질적인 정의를 내림과 동시에, 예배자로서 살아가는 삶이 무엇인지에 대하여는 수차례 로마서 12장 1-2절의 말씀을 가지고 나누었습니다.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1.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말씀을 기초로, 예배는 단지 공간적으로 ‘교회’에서 그리고 시간적으로 ‘주일’에 드리는 것을 넘어 ‘삶’을 예배로 드리는 것이라는 것을 계속 강조해 왔습니다.
또한 예배자가 된다는 것은 이 세상과는 구별된 삶을 사는 ‘거룩한 사람’ 즉, 세대를 본받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구별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것도 이야기 해 왔습니다.
또 하나의 본문인 요한복음 4장 23-24절 말씀 역시 여러 차례 나누었던 말씀입니다.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예배’란 어떤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께 우리들이 신령과 진정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표현하는 방식이 달라도, 거기에 신령과 진정이 있다면 우리의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꺼이 받아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은 창세기 5장 24절 말씀을 본문으로 ‘하나님과 동행’이라는 관점으로 예배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왜 굳이 성경은 에녹에 대하여 이 한 구절을 기록하고 있을까요? 그것도 하나님께서 에녹의 평생에 함께 하셨다 하지 않고,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 기록했을까?
공평하신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에녹이 살던 시대에도 각자의 삶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은 드물었나 봅니다.
하나님은 모두에게 함께 하시시만,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모두가 동행하지는 않는가 봅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예배구나!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과 동일한 생각을 하며 사는 것이 ‘동행’이 아닐까요? ‘동행’이라는 말을 NIV 성경에서는 ‘walk with God’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걷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앞서가면서 걸을 수도 있고, 뒤에서 쫓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방법이 ‘동행’이 아닐까요?
마음도 맞추고, 보폭도 맞추고, 컨디션도 맞추고 말입니다.
오래전 최효석 목사님이 쓴 ‘시속 3마일의 하나님’이라는 글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미국에서 목회하시던 분이라 ‘마일’이라는 단위를 썼을 것입니다. 출애굽 하는 이스라엘 백성과 광야에서 하나님은 시속 3마일 (4.8km)로 인간들의 발걸음에 맞추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끌어내신 이유는 그들과 함께 하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요즘 자전거를 탑니다. 부목사님들과 함께 줄을 지어 타다보면 앞에 있는 사람이 손을 내밀어 방향을 지시하든지, 물웅⑨이가 있거나, 요철이나 장애물이 있을 때 소리를 내서 알려줍니다. 혹시 앞에 장애물이 있으면 ‘서행’이라고 말을 하고, 추월을 할 때면 ‘왼쪽으로 추월합니다.’라는 소리를 냅니다. 그 소리에 맞춰 함께 자전거를 탑니다. ‘동행’이라는 단어가 생각이 납니다.
누군가 앞서고, 누군가 뒤에서 달리지만 동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함께 마지막 종착지에 이르게 될 테니 말입니다. 그렇게 동행을 하다 중간에 다 함께 쉬며 음료수를 먹기도 하고, 운동을 마치고 다 함께 식사를 하기도 합니다.
저에게는 그런 모습이 상상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을 하다가,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는 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부름 받았구나!
동행하기 위해 내가 내어 드려야 하는 것
‘동행’을 묵상하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맞춰주셔야 할까요?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 가시는 길과 인도하시는 길에 순종해야 할까요?
우리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기준을 맞춘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우리의 능력으로 하나님께 올라가 보조를 맞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에 우리가 기꺼이 서겠다는 믿음의 고백이 아닐까요?
불가능이 아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일까요?
『주님은 나의 최고봉』 1월 6일 묵상에 보면 예배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배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좋은 것을 다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 문장을 가만히 묵상해 보세요.
우리가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을 드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무엇인지를 묵상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도 복된 일인데, 우리의 삶을 묵상하며 하나님께 드려진 것을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면 정말 굉장한 일이 아닐까요?
그러고 보니,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대충’ 할 수도 있고 ‘최고’의 예배를 드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최선의 것은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하여, 만일 우리가 무언가를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을 만족시키려 한다면 커다란 착각입니다. 우리가 채울 수 있는 하나님의 부족함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상의 것은 ‘순종’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존 비비어 『무엇이 선인가?』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존 비비어가 댈러스에서 목회를 하던 시절, 댈러스 카우보이스(Dallas Cowboys)는 미국프로미식축구리그(NFL)에서 최고의 팀 중에 하나였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미국사람들이 주일에 경기를 마치고 나면 월요일 마다 자신이 응원하는 팀에 대하여 커피를 마시며 열정적으로 이야기 합니다.
별로 미식축구에는 관심이 없던 존은 어느 날 호기심에서 댈러스 카우보이스의 경기를 보게 되었고, 흥미진진한 경기에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목사가 미식축구 경기를 본다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너무 진지하게 열정적인 팬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그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보겠습니다.
미식축구 시즌이 끝나가고 플레이오프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날도 중요한 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카우보이스와 필라델피아 이글스의 경기였는데, 그 경기에서 이기는 팀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고 패한 팀은 탈락하게 되어 있었다. 나는 소파에 앉지도 않고 선 채로 텔레비전 앞에 딱 붙어 있었다. 진짜 막상막하의 경기라 앉아서 볼 수가 없었다. 후반전에다가, 경기 시간이 8분밖에 남지 않았다. 카우보이스가 4점 뒤지고 있었는데, 카우보이스의 쿼터백이 공격을 주도하고 있었다. 나는 경기를 보면서 초조하게 거실을 왔다 갔다 했고, 실수라도 했을 때는 절망감에 소리를 지르고 잘할 때는 열광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긴장감이 넘치는 짜릿한 순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무 예고도 없이 성령이 내게 기도를 시키셨다. ‘기도해라, 기도해라, 기도해라!’ 하는 충동이 갑자기 나를 압도했다. 그것은 무거운 짐처럼 내 마음 깊은 곳을 강하고 무겁게 짓눌렀다. 나는 성령님이 우리가 물러나 기도하기를 원하실 때 이런 충동이 생긴다는 것을 알았다. 마침 아내도 가까이 있지 않았기에, 나는 큰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주님, 이 경기가 8분밖에 안 남았어요. 끝나면 기도할게요.” 그런데 그 충동은 계속되었다. 도무지 누그러질 기미가 안 보였다. 몇 분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마음을 가라앉히려 쓰며 이렇게 소리쳤다. “주님, 이 경기만 끝나면 6시간 동안 기도할게요. 이제 6분밖에 안 남았어요!”
마침 우리 팀이 공격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이 중요한 경기에서 이길 거라는 걸 직감했다.
하지만 기도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은 여전히 나를 떠나지 않았다. 사실은 더 강해졌다. 나는 절망했다. 경기 도중에 자리를 뜨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큰소리로 말했다. “주님, 오늘 남은 시간 동안 기도하겠습니다. 주님이 원하신다면 밤새 기도할게요!”
나는 나머지 경기를 다 보았다. 카우보이스가 승리했고, 경기장은 흥분과 열광으로 가득했다. 나도 그들과 함께 기뻐했다. 그러나 하나님께 한 약속이 있었다. 곧바로 텔레비전을 끄고 계단을 올라가 내 서재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카펫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를 시작했다. 그러나 기도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사라졌다. 더 이상 마음의 짐이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이지 조금도 그런 느낌이 없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그 느낌을 되살려내려고 노력했다. 기도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내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진부하고 생기가 없었다. 오래지 않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았다. 나는 하나님의 요청보다 댈러스 카우보이스의 경기를 선택한 것이다. 카펫에 얼굴을 묻고 탄식했다. “하나님, 누가 저에게 네 인생에서 누가 더 중요하냐, 하나님이냐 댈러스 카우보이스냐?라고 묻는다면 저는 주저함 없이 ‘당연히 하나님입니다!’라고 대답할 겁니다. 그런데 저는 방금 제 행동으로 누가 더 중요한지를 드러냈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필요로 하셨으나, 제가 하나님보다 축구 경기를 선택했습니다. 제발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 즉시 내 마음속에서 이런 음성이 들렸다. ‘아들아, 나는 네가 5시간 기도를 제물로 바치는 걸
원치 않는다. 내가 바라는 것은 순종이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우리가 기꺼이 포기하고 내어드려야 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참다운 의미!
조금 전에 우리는 오스왈드 챔버스가 예배에 대해 정의했던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받은 것 중에 최고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예배라고 말입니다.
토저에 의하면, ‘예배는 하나님에게로부터 왔다가 우리를 거울삼아 반사되어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A. W. 토저가 말하는 예배와 아브라함 조슈아 헤셀이 이야기 하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드리는 예배의 진정한 의미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토저에게 있어서 예배는 먼저 예배하는 대상에 대한 분명한 이해에서 출발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함’이라는 것이죠. p.3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기 위해 인간을 지으셨다는 진리는 성경 한두 구절의 교훈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교훈이다. 그렇다! 인간의 최고 목적은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존재이다. 우주에서 하나님께 가장 소중한 존재는 바로 인간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을 고백하면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다는 고백은, 우리를 지으신 이의
‘목적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이 존재와 창조의 목적이 ‘예배를 받으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그러니, 하나님의 기쁨은 창조의 목적이 올바로 작동할 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된다는 것이죠.
p.42-43 “하나님은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하나님 자신의 모습을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인간이라는 거울을 보고 그 거울 안에서 자신을 보신다. . . 당신은 누구인가? 본래 당신은 전능자의 거울이
되도록 지음 받은 존재이다. 당신은 어떤 존재인가? 당신은 전능자의 거울이다. 당신이 창조된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거울이 되기 위해서다.”
부모가 “내 눈을 닮았네!”라고 하며 자녀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즐겁게 발견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모습을 기뻐하십니다. 우리의 창조 목적은 “전능자의 거울”이 되는 것이다! 참 멋진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 때문에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은 우리 삶의 목적을 잃은 것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을 때 우리는 일과 쾌락, 돈, 사람 등에 삶의 목적을 내어줍니다. 이처럼 엉뚱한 것에 삶의 목적을 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어떤 피조물보다 더욱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을 가장 닮지 않은 피조물로 전락”해버린 것입니다.(p.48)
그렇다면 이런 우리에게 방법이 없을까요? 토저 목사님은 기쁘게 외치고 있습니다.
p.50 “형제들이여! 구속이 무엇인가? 구속은 우리를 하나님께 다시 되돌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영광을 비추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모인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교회의 존재 목적도 예배입니다.
p.56 우리의 교회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이 땅에 존재한다. 예배는 교회의 이차적 목적이 아니며 교회의 액세서리도 아니다.
예배가 교회의 일차적 목적이고 그 외의 모든 것들은 이차, 삼차 또는 사차 목적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 반역하였던 우리를 ‘예배자’로 바꾸어 놓으셨다는 말입니다.
이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를 구속하셔서 한 공동체로 부르신 우리는 교회에서 어떤 존재인가?
어느 순간부터 우리를 부르신 교회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주인’이 되어 있지 않은가요?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말입니다.
나 아니면 교회에 일꾼이 없고, 나 아니면 교회가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나요? 내가 없으면 하나님의 일이 진행되지 않으리라는 착각 속에 있지는 않나요?
창조 목적을 생각할 때, 우리는 먼저 예배자가 된 다음 하나님을 위한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토저 목사님의 말처럼, 예배하는 사람이 하는 일은 영원한 가치를 지니지만, 예배하지 않는 사람이 하는 일은 그렇지 못합니다. 예배자가 아닌 일꾼이 하는 일은 단지 지푸라기를 쌓아올리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토저 목사님은 그것이 심판 때에 타서 없어질 것이라 말합니다.
p. 75 그러나 형제들이여!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다. . .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살아서 펄펄 뛰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다.
삶의 목적대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 바로 살아서 펄펄 뛰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 우리는 메마른 그리스도인입니까, 살아서 펄펄 뛰는 그리스도인입니까?
한 번 진지하게 이런 생각을 해 보셨나요?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라는 것 말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예배를 드리는 대상인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에, 예배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성령님을 ‘진리의 영’이라고 말씀합니다.
예배를 드린다는 것,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을까요?
예배가 하나님께 구별된 시간이요,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이라면, 예배를 드리지 않는 우리 삶의 시간들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요?
로마서 12장에서 언급된 ‘너희 삶을 산 제물’로 드리라는 것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형식과 삶 사이에서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과 일상의 삶을 철저하게 분리해서 살아가면서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할까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일상이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연관이 될 수 있는 지를 풀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이유가 영광과 존귀를 받기 위해서라면, 우리의 삶이 그 창조의 목적에 맞게 대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아브라함 조슈아 헤셀의 [안식]은 매주 중요한 통찰을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조슈아 헤셸의 [안식] 중에서 안식일이 의미하는 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은 노동의 존엄성을 신성하게 고양시킨다.
“너희는 일곱째 날에 노동을 삼가라!”는 명령은 “너희는 엿새 동안 모든 일을 힘써 하라!”는 명령의 속편이다. “너희는 엿새 동안 모든 일을 힘써 하여라. 그러나 일곱째 날은 주 너희 하나님의 안식일이다.”
우리는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을 뿐 아니라 일하라는 명령도 받았다. 이렛날에 일을 삼갈 의무가 그러하듯이, 엿새 동안 일할 의무도 하나님이 인간과 맺으신 언약의 일부다.
앞서 이야기했듯, 안식일은 우리의 생명을 위한 날입니다.
율법이 중요한 유대교에서조차 “사람의 목숨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조금이라도 생명이 위태로울 때는 모든 금지 계명을 무시해도 된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우리 생명은 중요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마음과 영혼과 모든 감각을 다하여”, 시간을 집중해서, 그날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우리를 만드신 분, 그리고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는 유일한 분에게서 오기 때문이죠. 그러니 우리는 자연스럽게 안식일에 찬양을 하게 됩니다. 기쁨과 감사를 표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안식일’을 찬양 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을 ‘만드신 분’을 찬양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이 범하는 오류들이 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면서 정작 안식일을
만드신 분의 마음을 모르고 산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해야 하는 일과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러한 일의 기준은 우리들이 정해놓은 규칙이 아니라, 안식일을 만드신 분의 마음을 기쁘게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어야 합니다.
만약에 안식일에 기쁘게 찬양하는 우리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없다면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의 지적이 늘 그랬습니다.
이스라엘이 드리는 번제와 화목제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불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구부러뜨리는 자들의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무리 합니다.
우리가 안식일에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우리가 찬양하지 말아야 할 것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 조슈아 헤셀의 [안식]이라는 책에서 두 가지 만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① 안식일은 세계 최고의 우상인 돈으로부터 독립하겠다고 맹세하는 날이다.
-> “일곱 째 날은 생존을 위해 벌이던 잔혹한 싸움을 일시적으로 그치고, 개인적 갈등이든 사회적 갈등이든 모든 갈등 행위를 멈추는 날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 그리고 사람과 자연 사이에 평화를 이루고 사람의 내면에 평화를 이루는 날이다. 긴장으로부터 탈출하는 날, 사람이 진창 같은 삶에서 해방되는 날이다.”
안식일에 돈을 쓰지 않고, 돈으로부터 독립해야한다고 이야기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단지 안식일에 돈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답이 될까요?
안식일에는 생존을 위해 벌이던 잔혹한 싸움과 갈등을 멈추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사실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하는 노동은 생존을 위한 싸움과 갈등인 것이죠. 그리고 그것에 깊이 연관되어 있는 것이 돈이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여섯 날 동안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살던 삶, 경쟁, 다툼, 싸움이 안식일까지 이어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② 안식일에는 논⑨의 불을 지펴서도 안 되고, 화를 내어서도 안 된다.
-> “우리는 안식일의 모든 시간을 매혹, 은총, 평화, 사랑 속에서 보내야 한다. 왜냐하면 안식일에는 지옥에 있는 악인조차 평화를 얻기 때문이다. 안식일에 화를 내는 것은 죄를 갑절로 짓는 것이다.”
우리는 여섯 날 동안 매일같이 고군분투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크고 작게
얼마나 화가 나고 억울한 일들이 많습니까? 작게는 내 삶에서, 크게는 주위 사람들에게, 더 크게는 언론과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사람들의 삶에 얼마나 많은 논쟁거리와 화가 있습니까? 우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 분노하고, 화를 냅니다. 그러나 안식일은 이런 것들로부터 자유를 누리는 날입니다. 안식일에는 지옥에 있는 악인조차 평화를 얻습니다.
내 삶을, 이 세상을 불안정하게 흔드는 것들을 제쳐두고 평화와 사랑을 누릴 수 있는 날입니다. 주일에 교회에서는 이데올로기 논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주장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억누르지 않도록 하라는 말입니다.
* 안식일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우리는 돈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습니다. 돈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니, 우리가 돈의 노예가 될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니, 돈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용’해야 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 안식일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우리는 쓸데없는 논쟁이나 화를 내지 않습니다. 존귀하신 하나님 앞에서면 ‘순종’이 생각나지, 우리의 주장을 가지고 논쟁할 필요가 없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제가 목회 초창기에 힘들고 어려운 논쟁을 해야 할 때면 늘 하던 일이 있었습니다.
강단에 올라가 기도하는 것, 그리고 함께 회의하며 의견을 모아야 하는 사람들과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어떤 안건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든지, 그 이야기가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면 우리의 태도가 달라지니 말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나님을 안중에 두지 않고 논쟁하거나 화를 내면서 너무나 태연하게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말하지 않나요?
* 안식일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우리는 굳이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기보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그 분을 찬양합니다. 가장 고귀한 분과 함께 하면 그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어떨까요?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있다. 없는 것은 오직 예배뿐이다.”라는 토저 목사님의 말이 아프게 다가옵니다. 우리가 예배나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보다 그저 ‘교회를 경영하는 일’에 더 관심을 쏟고 있지 않느냐는 물음입니다.
교회의 다양한 사안에 관해 기도하지 않고 예배하지 않는 직분자들이 모여 하는 결정이 얼마나 두려운 것일까요?
우리는 ‘경영’보다 ‘예배’에 힘써야 합니다. 누군가는 가만히 앉아서 예배만 드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느냐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토저 목사님은 단호히
“예배만 드리고 다른 것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예배를 드린 사람은 매우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이것이 예배의 묘미이다.”(p.152)라고 말합니다.
예배자로 바로 선 사람은 어떤 일이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자 행합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회를 경영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토저 목사님의 글 가운데 꼭 새겨야 할 것이 있습니다.
p.15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신 기이한 일들에 대해 침묵하는 죄를 범해서는 안 된다. ‘교회를 따분한 곳으로 만드는 사람’이 되거나 ‘교회를 귀찮게 하는 사람’이 되는 것 중에서
양자택일해야 한다면, 나는 기꺼이 후자가 되겠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찬양하지 않고 침묵에 빠진 권태로운 교회보다는 사람들을 귀찮게 할지라도 계속 찬양하는 교회가 낫다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모여 거룩한 예배를 드리며 ‘참된 하나 됨’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께 매혹되어 찬양하고, 그분의 존재에 대하여 감탄하고, 기쁨을 함께 올려드리는 예배 공동체를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오늘도 예배를 계속 드려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토저 목사님의 말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p.170 우리는 예배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
제대로 예배한다면 우리가 교회를 떠나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교회의 모임이 끝난 다음 교회 문을 잠그고 자동차를 몰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고 해서 교회를 떠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성전이기 때문이다. 예배는 언제나 계속 되어야 한다.
'Special Lecture > Serm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상동 목사) 선한 목자 (0) | 2023.11.07 |
---|---|
(임상동 목사) 야곱 이야기 (0) | 2023.11.07 |
(김병삼 목사)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습관 만들기! (2) | 2023.10.18 |
(임상동 목사) 이삭 이야기 (1) | 2023.10.04 |
(임상동 목사) 방주를 만들라 (0) | 2023.09.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