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대원목사 설교

2026년 6월 28일 대구동신교회(주종훈목사)

마이코 2026. 7. 13. 13:08


우리의 믿음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지식은 신앙에 있어서 아주 중요하죠..

하지만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확신입니다.
확신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과정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할 때 많은 사람들이 지식과 확신에 집중합니다.
하지만 지식과 확신과 더불어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방식입니다.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방식으로 나타날 때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과 확신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삶의 방식으로서의 신앙을 우리가 구현한다는 것은 관계의 방식을 구축한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신앙을 가리켜 믿음의 대상이신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구축하는 과정과 방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아주 중요한 핵심 실천입니다.
이 하나님과의 관계의 구축으로서의 예배는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나 자신 세상, 이웃과의 관계도 모두 결정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방식으로서의 이 예배가 우리의 삶에서 나타날 때는 구체적인 모습으로 주어지는데,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부르시는 분으로 계시고 우리는 그 부르심 앞에 반응하는 존재로 있습니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실 때에 부를 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는 그 부르심 앞에 반응하는 존재로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반응으로서의 예배는 우리의 신앙의 중요한 주제와 연결되어져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특히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창조 다른 하나는 구원입니다.
창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고 그 형상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3장 18절에는 화면에 나오지 않으니 제 음성을 들으시면 됩니다.
고린도후서 3장 18절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마치 거울을 보는 것과 같이 주의 영광을 봄에 그와 같은 형상 곧 주의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른다고 이야기합니다.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영광을 경험하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은 소리 쳐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그 영광스러운 모습을 우리의 모습에서 참여하는 반응으로 찬양도 이어졌습니다.
바로 바로 이 영광, 이 영광이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어떻게 확증하냐면 우리의 모습이 주의 형상으로 변화할 때 그 영광이 확증됩니다.
따라서 우리의 창조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는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예배는 아주 중요한 실천이죠.
하지만 예배는 구원과도 연결되어져 있습니다. 구원은 영생이라고 하는데 영생과 구원에 대한 성경적인 정의는 요한복음 17장 3절에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영생 곧 구원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시니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알아가는 것인데 예배 때마다 예배를 통해서 예배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알아가는 경험 과정을 직접 참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창조 구원을 위해 예배는 아주 중요한데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서 6장 1절부터 13절에 나와 있는 내용은 성경적 방식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반응으로서 이 예배를 어떻게 실천할 수 있으며, 그 가운데서 주어지는 유익과 우리의 삶의 소명이 무엇인지까지도 선명하게 제시해 주는 본문입니다.
이 본문의 처음 출발이 이렇습니다. 1절에 이렇게 출발을 하죠.
우시아 왕이 죽던 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시야 왕이 죽던 해에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를 새롭게 비추어 주시고 이사야는 그 예배에 참여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런 질문이 주어집니다. 왜 우시야 왕이 죽던 해인가요?


우시아 왕이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았을까요? 제가 이제 질문을 좀 할 텐데 그 질문에 저와 눈동자가 마주치시더라도 회피하지 마십시오.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답을 구하지는 않거든요.
질문만 들어주시면 됩니다. 우시아는 하나님을 예배했는가 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질문인데 예배를 하나님이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신데요.
우시아는 하나님을 예배했다고 생각하시는 분 그냥 생각만 하십시오.
우시야는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시야가 죽을 때에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정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를 비추어 주신 것이다.
이게 질문입니다. 생각은 하셨죠? 답은 제가 말씀드립니다.
우시아는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예배했는데 왜 굳이 우시아가 죽을 때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를 보여주셨냐면 예배는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예배는 하느냐 하지 않으느냐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방식으로 예배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예배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요?
내가 예배했다 그 말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우시야는 자기 멋대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예배했습니다.
그래서 우시야가 죽을 때에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의 예배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장 28절에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기쁘시게 섬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국말로는 기쁘시게라는 말이 어려운 말은 아니지만 정확한 번역으로서는 조금 부족합니다.


이 깊으시게라는 말의 원문을 영어로 옮기면 영어로 옮기는 이유가 있습니다.
원문보다 영어가 우리에게는 친숙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영어를 좀 써도 괜찮겠죠 네 이 여기에서 말하는 기쁘시게의 영어의 표현은 억셉터블리라는 뜻입니다.
받아들이라는 단어의 부사인데 받으실 만하게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받으실 만한 서브 섬김 예배가 있고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참여하는 예배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참여하는 예배는 어떤 예배인가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주 중요한 원칙, 원칙을 바로 성경에 두고 따라가는 예배입니다.
성경에 따른 하나님의 예배의 중요성을 구약 성경, 사무엘 하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우사라는 사람이 죽게 되었는데요. 다윗이 난공불락의 요새인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블레셋에 있는 언약궤를 옮기는 내용이 나옵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거든요. 이때 무려 3만 명이 올라가서 언약궤를 옮깁니다.
진짜 꿈쩍도 하지 않으시는데 3만 명이라고요? 대구 동신교회 성도님들이 몇 명 정도 되시나요?
저는 알 수 없는데 3만 명 정도 되시기 때문에 반응이 없으신 건지 아니면 3만 명이라는 숫자가 너무 멀어서 그런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다윗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겠다. 하나님을 예배하겠다.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겠다라는 겁니다.
그런데 새 수레에 싣고 오다가 낙원의 타정 마당에서 소가 뛸 때 수레가 흔들렸습니다.
그때 우사라는 사람이 서 있었는데 그 사람이 거기에서 어떻게 했냐면 손을 뻗어서 언약궤를 잡았습니다.
그때 우사가 어떻게 됐죠? 죽었어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 자리에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것도 답을 구하지 않으니까 그냥 보시면 됩니다.
만약에 형제님이나 자매님이 그 자리에 계시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잡지 저는 어떻게 하냐면 제 몸을 날립니다.


그 언약궤가 떨어지면 안 되잖아요. 저도 죽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 열정, 나의 열심이 더 중요한 게 아니고 하나님의 방식대로 다가가는 겁니다.
처음부터 언약궤는 어깨에 메고 옮겨야 되는데 수레에 옮긴 것이 잘못이고 내가 열정을 다해 하나님께 다가가면 하나님도 움직일 수 있다라는 이 교만한 생각을 내려놓으라는 겁니다.
나의 열정 나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한 방식으로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출발이라는 것이 우시아 왕이 죽던 해라는 표현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대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어떻게 참여해야 할까요?
가장 중요한 출발은 내가 어떤 예배자인지 먼저 확인해 보는 겁니다.
내가 어떤 예배자로 있는지에 대한 확인이 없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이 본문에 담겨져 있습니다.
이 본문에 보면 우리가 어떤 예배자인지에 대한 확인의 요청이 9절과 10절에 담겨져 있습니다.


9절과 1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주 독특한 표현 그리고 독특한 요청을 하시는데 굉장히 당혹스럽습니다.
그래서 그 당혹스러움을 완화하기 위해 제가 읽고 눈으로 보면 따라오시면 됩니다.
9절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오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들어도 못 깨닫고 보아도 알 수 없다라고 이야기하고 10절에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주목해 보십시오.
10절입니다.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라. 그들의 귀가 막히게 하라.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데,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좀 이상하지 않나요? 이게 하나님의 명령이에요.
뭐라고 얘기했냐면 마음을 둔하게 해라. 귀가 막히게 하라.
눈이 감기게 하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이런 명령을 하실 하나님인가요?
이건 정말 중요한 질문입니다.


주님 앞에서 반응하기 위해 주님을 예배자로, 주님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우리가 들어야 할 질문입니다.
어떻게 봐도 못 보고 들어도 못 깨닫고 마음을 둔하게 하라고 하실까요?
이걸 어느 때까지 해야 되냐면 그 이어지는 본문 속에서 황폐할 때까지 황폐할 때까지 황폐할 때까지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내는 표현이 세 번 나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너희가 나를 예배할 때 너희가 먼저 어떤 예배자인지 먼저 확인하라.
그런데 너희가 내가 원하지 않는 예배자의 모습 가운데 있다는 걸 먼저 확인하라.
이 모습은 어떤 모습이냐면 영적 무감각의 모습입니다.
눈을 떴는데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거예요. 귀가 있는데 주의 음성이 들려지지 않는 거예요.
입이 있는데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말할 수 없는 상태예요.
우리가 혹시 그런 상태에 있다면 그 모습이 너희가 나를 향해 다가오는 데 아주 중요한 위험성 속에 있다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사실 이러한 영적 무감각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냐면 우상의 모습입니다.


시편 115편에 우상에 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상에 관한 표현인데요. 입이 있으되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으되 볼 수 없고, 귀가 있으되 듣지 못하고, 코가 있으되 냄새를 맡지 못하며, 손이 있으되 만지지 못하고 발이 있으되 걷지 못한다.
그리고 시편 115편 8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상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들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이 된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우상을 만들지 않는데, 우상을 의지한다면 우상처럼 됩니다.
우상의 특징은 형태는 있지만 기능이 없는 거예요.
눈은 있는데 볼 수 없어요. 귀가 있는데 들을 수 없어요.
입이 있는데 말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이 자리에 있는데 눈을 뜨고 있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이 보여지지 않아요.
왜 그럴까요? 나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겁니다. 귀가 있는데 왜 주의 음성이 들려지지 않을까요?


입이 있는데 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정직하게 고백할 수 있는 언어가 우리에게 담겨지지 않을까요?
이거는 우상을 만들지는 않았지만 우상을 오랫동안 의지해 왔던 결과라는 겁니다.
우리의 우상은 무엇인가요? 내가 언제 우상을 의지했습니까라고 할 수 있지만 우리에게 우상은 근접하게 다가와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우상은 두 가지인데, 첫 번째는 애굽의 우상입니다.
형상의 우상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내 인생에서 내가 얻어야 할 것, 성취해야 할 것, 이루어야 할 것을 먼저 정해놓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예배를 이용하는 것, 하나님과 예배를 수단화하는 것 이게 우상입니다.
하나님은 즐거움의 대상이지 이용의 대상은 아니에요.
하나님은 즐거움의 대상이지 수단의 대상은 아니에요.


그런데 혹시 이 자리에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면서 내 인생의 목적과 성취를 위해 예배를 수단화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아예 예배하지 않는 것보다 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영적 무감각에 이르게 하는 위험이라는 겁니다.
여기 계신 분들의 눈빛에서는 목사님 저는 하나님을 이용하거나 수단하지 않는다라는 눈빛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런 경우에 주어지는 또 하나의 우상 곧 위험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면 바알과 아세라의 우상입니다.
인격적 대상이신 하나님을 지극히 한 영역, 지극히 아주 작은 영역에서의 만족과 쾌락의 대상으로만 경험하고자 하는 노력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영적 페티시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페티시 페티시즘이라는 말은 무슨 말이냐면 지극히 작은 하나의 영역에서만 감각적 자극과 만족과 쾌락을 이끌어내는 기울어진 일종의 변태적 성향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신데 내가 원하는 경험에만 집중해서 그 경험이 있으면 은혜가 있고, 그 경험이 없으면 은혜가 없고 이렇게 하나님을 제한해서 경험하려고 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따라서 내가 원하는 음악이 있었다. 내가 듣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었다.
내게 은혜가 되는 기도가 있었다. 그것이 없으면 예배의 은혜가 없다라고 하는 것이 바알과 아세라의 현대화된 우상입니다.
내가 혹시 영적인 무감각이 있다면 그 뿌리에는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내 삶에서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아주 깊은 마음속에서 정말 우리를 향한 탄식의 마음으로 너희가 혹시 하나님이 원치 않는 예배의 모습 가운데 있는 것 신 아니냐 주의 하라고 이야기하면서 성경에서 요구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의 모습을 드러내기를 원하시고 그 예배를 이사야에게 보여주고 비추어 주고 계십니다.

오늘 이 본문에 담겨져 있는 우리가 우상의 예배가 아닌 하나님 안에서 영적 감각을 회복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에 들어가기 위해 이사야가 경험했던 그 예배가 우리의 예배가 되고, 이 여름 사역뿐만 아니라 후반기에 좀 더 충실하게 하나님을 기쁨으로 섬기고 반응하는 예배자가 되기 위한 성경의 교훈을 함께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본문에 따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받으실 만한 예배의 가장 중요한 출발이 1절에 있습니다.
1절 이렇게 이야기하죠. 우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곧 이사야가 본 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 꼬입니다.
예배의 출발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반응을 할 때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계신 하나님의 초청을 받아 우리가 들어가는 겁니다.


예배의 첫 번째 반응입니다. 하나님은 예배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예배의 주체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죠. 하지만 그보다 먼저 우리의 예배를 가능하게 하십니다.
이게 우리의 예배의 첫 번째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도와 하나님께 가게 하신다라는 것을 인정하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는 분으로 계시다라는 것을 확증하라는 겁니다.
중요한 건 부르시되 모두를 부르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고 계시다라는 것에 대한 신앙의 첫 번째 반응은 모두를 부르시는 것에 대한 인정입니다.
이름이 있는 자 없는 자, 사회적으로 계층이 분명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 높은 위치에 있는 자, 그렇지 않은 자 모두를 부르십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도 부르시지만 사마리아 여인과 같이 이름이 없는 자도 주님은 부르십니다.
이게 우리에게 중요한 중요한 교훈을 제시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참여할 때 내 옆에 있는 모든 자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이게 더 어려운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우리 모두를 부르신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반응의 출발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나와 같은 사람에게 익숙해요. 이걸 영어로 피프 라이크 미라고 이야기합니다.
나와 같은 사람에게만 익숙하니까 나와 같지 않은 사람, 낫 라이크미, 나와 같지 않은 사람을 받는 게 굉장히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어요. 니가 나의 부르심을 받아서 왔다면 니 옆에 있는 주변 분들 보지 마십시오.
일단 옆에 있는 모두가 내 부름을 받아서 왔다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을 향한 반응에 우리의 과제입니다. 굉장히 어렵죠.

왜냐하면 시선을 조금 돌이켜 돌아서 옆을 보면 저런 사람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고 어떻게 저 사람이 이 자리에 앉아 있지, 어떻게 저런 사람이 이 자리에 있을까 하나님이 이야기합니다.
너는 너는 그 사람이 너를 어떻게 볼 거라고 생각하니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라는 것을 개인주의적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라는 겁니다.
이게 우리에게 가장 큰 어려움이에요. 교회는 공동체인데 서클이나 클럽 동호회가 아닙니다.
초대교회부터 교회의 가장 강력한 공동체성이 어디에서 주어지냐면 모두 서로 다른 계층이 있는 자들이 함께 있는 것을 드러낼 때에 강력한 힘이 됐습니다.
이 사회를 향한 일종의 게임 체인저 역할을 하는 것인데 이 사회는 모두 계층화된 모임만 있습니다.
구분된 모임만 있는데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있을 때 가장 건강하다라는 겁니다.
대구 동신교회의 예배가 가장 강력한 하나님을 향한 반응이 되려면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많을 뿐만 아니라 가능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중요하죠. 저도 이게 얼마나 힘든지 제 인생에서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유학 시절 존경하는 한 교수님께서 저희 가정을 집으로 초청했습니다.
사실 이게 학생의 입장에서 어마어마한 기쁨입니다.
존경하는 교수님이 교실이 아니라 본인의 가정에서 학생을 초청해서 식사를 대접한다.
얼마나 경험이 없으세요? 저는 이거 너무 그때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니 이 교수님이 나를 어떻게 우리 집 식구들을 이렇게 부르실까 딱 갔어요.
갔는데 놀랐습니다. 우리만 부른 게 아니라 다른 몇몇 가정을 불렀다는 겁니다.
근데 다른 몇몇 가정이 그냥 불편한 게 아니라 밖에서 그 가정에 그 다른 가정 그 동료들이라고는 하기 어려운데요.
그분들과 한 분도 말을 할 수가 없었고 말하기도 어려운 대상이었습니다.
한 분은 아주 유명한 목회자의 자녀분이었고 한 분은 한국에서 아주 유명한 정치인의 자녀분이었습니다.


저는 가정이 정말로 우리 아버지가 그런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늘 항상 그것과 관련해서 조금 나름대로 의기소침이 있었죠.
밖에서는 그분들이 저를 단 한 번도 쳐다보거나 교제하기 어려운 대상이었습니다.
근데 그 교수님 때문에 그 자리에 들어가서 함께 있었던 자리는 사실상 불편했습니다.
이게 우리의 예배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라는 이 개인주의적인 고백 반응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부르셨다라는 것에 대한 인정을 갖는 것 이게 가장 강력한 생명 공동체의 특징이라는 겁니다.
굉장히 어렵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라는 것은 사실 우리에게 있어서는 축복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향한 존중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다라는 말은 우리를 기준으로 부르시지 않는다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반응할 때의 가장 큰 걸림돌이 무엇이냐면 내 스스로를 기준으로 삼는 겁니다.
우리 호산나 찬양대죠.

이름이 이제 익숙하게 익숙해졌네요. 호산나 3부 예배 호산나 찬양대원들 여러분들 보십시오.
한번 보십시오. 얼마나 한 주간을 멋지게 살았으면 이 밝은 모습으로 이곳에 와서 예배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계시겠습니까?
근데 사실 그렇지 않은 분들도 이 자리에 계세요. 인생에서 지난주처럼 망가졌던 삶을 산 적이 없을 정도로 추락하고 아픔을 경험하고 상처를 힘입고 정말로 무너진 경험 속에 있었던 분들도 계실 겁니다.
그래서 그런 분들은 예배하고 싶지가 않아요. 주일날 예배당으로 오는 게 너무 부담스럽습니다.
근데 내가 좀 괜찮게 살았다고 해서 하나님께 달려갈 수 있다라는 자격을 스스로 위증하거나 내가 좀 망가졌다고 해서 하나님께 갈 수 없다라고 생각하는 거나 둘 다 문제예요.
왜 문제죠? 자기를 기준으로 삼는 거잖아요. 내가 조금 괜찮으면 하나님이 너 잘왔다 이게 하나님이 아니에요.


내가 좀 망가졌다고 해서 내가 너 그럴 줄 알았어 어디 와서 무슨 예배를 이게 하나님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우리를 기준으로 받으신 적이 없어요.
하나님을 기준으로 하나님이 은혜의 기준으로 우리를 부르신 거예요.
어떤 경우에도 흔들림 없이 이 담대함을 놓치지 않고 반응하는 겁니다.
따라서 신앙은 감정, 느낌, 나의 삶을 기준으로 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그 기준으로 삼아 용기 있게 달려가는 반응이에요.
이렇게 하나님을 향해 달려갈 때 가장 먼저 하는 경험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모습을 보고 인정하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모습에 대한 분명한 우리의 반응이죠.
그래서 3절에 이런 표현이 주어집니다. 일관되게 일단은 제가 읽겠습니다.
그냥 들으시면 됩니다. 3절에 이사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직면한 첫 번째 반응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3절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고 거룩을 선포합니다.


이게 무슨 뜻이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어떤 일을 하셨는지에 대한 분명한 신앙 고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반응의 가장 첫 번째, 우리의 신앙의 구체적인 모습은 무엇이냐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무슨 일을 하셨으며 무슨 일을 하고 계시고 무슨 일을 하실지에 대한 반응을 드러내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고 감사하고 하나님이 하고 계시는 일을 확신하고 하나님이 하실 일에 대해 기대하는 것.
그래서 예배의 가장 중요한 반응은 감사, 확신, 기대입니다.
이 감사와 확신과 기대의 이 반응이 나에게 주어질 수 있도록 인정하는 거죠.
이게 어디에서 드러나냐면 신앙 고백과 찬양에서 주어집니다.
우리가 함께 모일 때마다 신앙 고백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어떻게 일해오셨으며 지금도 어떻게 우리 가운데 함께하시고 장차 어떤 일을 하실지에 대한 고백이죠.
따라서 신앙 고백은 하나님을 향한 반응이고 내가 어디에 속해 있다라는 우리의 표현입니다.
지적 동의는 아니에요.


더 중요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성품과 일하심을 반응으로 드러내는 게 찬양입니다.
예배 안에서의 찬양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고백으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일하심을 드러내는 것이 예배의 찬양으로서 가장 적합한데 중요한 건 조건이 아니라 반응이라는 겁니다.
예배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특별히 우리 호산나 찬양대처럼 하나님을 향해 기쁜 마음으로 또 찬양도 하죠.
이 모든 찬양의 중요한 특징이 있는데 조건이 아니라 반응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찬양을 들으시고 더 큰 은혜를 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찬양하는 것은 이방종교의 신앙을 따라가는 겁니다.
주의 깊게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감동하기 위해서 하는 찬양은 이방종교의 신앙입니다.
이방 신앙은 어떤 음악의 사용법이 있냐면요. 신이 항상 화가 나 있어요.
그래서 찬양을 통해 올려드리면 화가 누그러져서 페이버 호의를 베푼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찬양을 합니다.


그래서 특별히 정성을 다해서 찬양을 하면 들으시는 신이 좋아할 거다라는 생각을 가져요.
하지만 기독교의 신앙의 하나님은 다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미 처음부터 은혜를 베풀어 주신 분입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고 우리의 찬양은 그 은혜에 대한 반응일 뿐입니다.
따라서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을 감동시켜서 움직이겠다.
이게 가장 위험한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어마어마한 은혜로 우리를 감동하기 위해 다가오셨고 우리는 그거에 대한 반응입니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우리의 찬양은 하나님을 향한 반응이어야 된다라는 이 태도를 갖는 것이 예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경험이죠.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의 모습을 인정하고 나면 정직하게 그 모습에 비춰진 자기 자신의 모습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이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경험은 하나님께 비춘 자기 자신의 모습을 고백하고 드러내는 겁니다.
그 표현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데 5절입니다.


이 5절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직면했을 때에 우리가 드러내야 할 가장 중요한 우리의 반응이기 때문에 같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5절인데요. 같이 주의해서 읽겠습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오.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하나님을 정직하게 직면하면 하나님과 다른 나 자신의 모습이 비추어집니다.
근데 우리는 이게 굉장히 힘든 경험입니다. 예배를 하면서도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비추지 않는 이 모습이 오랫동안 이루어지면 예배가 겉돌게 되어 있습니다.
예배의 가장 중요한 경험은 나 자신에게 비추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통해 내 스스로의 모습을 드러내는 겁니다.
이때 내 모습이 하나님과 같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상처를 받아요.
이 상처를 받는다라는 말을 문화적으로 바꿔서 표현하면 우리의 영혼이 긁힙니다.

24:26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긁히는 게 아주 싫습니다.
그래서 이 긁힘을 막기 위해 스스로 외면하죠. 근데 스스로를 인정해야 됩니다.
우리의 자녀들도 마찬가지예요. 긁힌다라는 표현은 문화적인 표현이거든요.
자녀들이 보통 엄마 아빠에게 가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엄마 나 긁혔어 아빠 나 긁혔어. 건드리지 마 이 말이에요.
친구들끼리 나 그 이런 말을 합니다. 딱 한마디예요.
그 무슨 말이냐면 긁혔다는 거예요. 건드리지 말라는 거예요.
나 상처받았다 나 삐쳤다라는 뜻이에요. 이게 우리가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이 하나님 앞에 하나님 나 그 언어는 안 쓰지만 우리의 모습이 드러내고 있어요.
그게 무슨 말이냐면 연약함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께 반응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이 나 자신에게 있다라는 것을 인정하라라는 겁니다.


내 스스로의 연약함을 인정하지 않을 때에 사탄이 우리의 마음을 낚아채서 교묘하게 이끌어갑니다.
모든 문제는 너에게 있는 게 아니야. 봐라. 니 밖에 있어.
니가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하는 것. 예배하기 어려운 건 니 옆에 있는 사람이잖아.
시설이잖아 장비이잖아 그렇지 않아 너 때문에 그런 건 아니야.
사단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아주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그 방식이 뭔지 아세요?
모든 문제는 니 밖에서 찾아라라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비평하고 판단하고 항상 모든 것들을 보면서 부정적으로 보게 만들 뿐만 아니라 그 불가능이 내 밖에서 있기 때문에 나는 괜찮다고 보게 합니다.
만약에 이 경험이 오래 익숙해져 있다면 내 스스로를 보는 게 굉장히 어렵죠.
그래서 하나님을 예배할 때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예배가 중요한데, 이 예배의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예배의 핵심이 뭐냐 하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연약하면 신뢰가 커져요.


보십시오. 어린아이들이 연약한데 부모에 대한 신뢰가 크잖아요.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예배의 반응을 보인 성경의 대표적인 인물이 누구냐 하면 아벨이라는 사람입니다.
가인과 아벨 잘 아시죠? 하나님께서 가인과 가인의 예물은 받지 않으셨어요?
아벨과 아벨의 예물은 받으셨어요? 그러면 가인과 아벨의 신뢰 즉 믿음의 차이가 있잖아요.
가인에게는 장자권이 있었습니다. 이 장자권은 감사의 영역이고 신뢰의 대상은 아닌데 오랫동안 가인은 장자권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죠. 하지만 아벨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어떤 것도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함을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연약함은 하나님 편에서는 어마어마한 어마어마한 우리를 받으실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겁니다.
이 신뢰는 우리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기 위한 아주 중요한 신앙의 과제라는 겁니다.
중요한 게 있어요. 순서예요.


가인과 가인의 예물, 아벨과 아벨의 예물 이 실레와 연결되어져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물을 통해서 사람이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을 받을 때 그 사람이 낸 예물도 받으신다는 겁니다.
내가 힘드니까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나를 받으시겠지 아니에요.
나를 받으실 때 내가 내어드리는 예물도 헌신도 섬김도 받으시는 거예요.
그걸 치환하시면 안 됩니다. 순서가 중요해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신뢰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때 그 이후에 내가 내어드리는 모든 것도 받으신다라는 겁니다.
이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의 가장 결정적인 그 구체적인 과정 모습이 어디로 나타나야 되냐면 언어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오늘 읽었던 이 5절 우리가 이 5절에 뭐라고 얘기하냐면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오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연약함을 드러내는 사람, 즉 하나님을 향한 반응에 온전한 모습을 훈련하기 위해 집중하는 사람은 입술의 언어를 주목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는데 하나님 나라의 언어가 없는 자신을 인정하라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에 있는데 하나님 나라에 언어가 없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놀라는 겁니다. 당신도 교회 다녔어.
당신도 신앙생활에 놀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언어가 그 사람이 무엇인가를 말해줬는데 마치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처럼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렇죠.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는데 왜 하나님 나라의 언어가 없을까요?
예배 때마다 하나님 나라의 그 기쁨에 참여하고 있는데 우리가 그 언어에 주목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 나라에서 살려면 언어는 중요해요. 아시듯이 이제는 저랑 좀 친해졌으니까 제가 누군지 아시잖아요.

저 대한민국에서 커서 미국에서 공부했으며 케냐에서 지냈고 우크라이나에서 지내다가 다시 대한민국으로 들어왔습니다.
4개의 나라를 살면서 제가 경험한 중요한 경험이 하나 있습니다.
언어의 중요성이에요. 미국에 있을 때 영어를 하지 못하면 살아갈 수가 없어요.
케네에서는 영어뿐만 아니라 스와힐리어를 하지 못하면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실상 그 나라의 삶을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우크라이나 키프에서는요. 우크라이나 언어나 러시아 언어를 하지 못하면 그 나라의 세계를 바라볼 수가 없어요.
하나님 나라에 있는데 하나님 나라에 어떤 언어를 가지고 계십니까?
이사야는 입술이 부정한 이 자신의 모습을 통해 성경 전체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 언어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익혀야 할 하나님 나라의 언어 몇 마디 안 돼요?
근데 굉장히 중요한 언어입니다. 그 언어는 4개의 언어로 압축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하나님 저 힘듭니다.

그리고 하나님 저 도와주세요라는 언어예요. 이게 하나님과의 관계 구축에서 가장 중요한 4개의 언어입니다.
첫 번째 언어 감사합니다. 아주 중요하거든요. 뭘 해줘서 감사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감사할 수 있는 훈련을 하라는 겁니다.
따라서 예배 처음 시작할 때 목사님의 예배의 선언과 그리고 기도에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근데 무의식적으로 우리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뭐가 감사하다는 거지 뭘 해주셨는데 그게 아니라 하나님이 뭘 해줘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시기 때문에 감사하는 훈련을 하는 겁니다.
이게 언어에서 가장 중요하고 하나님 나라 언어의 핵심이에요.
제가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데 아시죠? 이제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어요.
신학대학원에서 이제 사역자분들을 가르치는데요.
가르치다 보면 학생 상담을 하거든요. 학생 상담을 하는데 간혹 이런 학생들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목사님이시고 섬마을 어촌이나 농촌에서 한 20년 30년 목회하시는 분들의 자녀분들이 가끔 와요.

성도들 15명이 20명 정도 되고요. 많아야 25명 정도입니다.
저는 이거를 뭐 적다라고 폄하하는 건 아니에요. 그 작은 성도님들을 위해서 십수년 20년 30년을 목회하시는 분들의 자녀가 신학을 공부하겠다고 옵니다.
그럼 제가 궁금해서 물어봐요. 누구를 존경하냐고 그러면 예외 없이 100% 답이 우리의 아버지를 존경한다고 이야기해요.
놀라죠. 그럼 그다음 질문은 뭘까요? 왜 왜 도대체 왜 당신의 아버지 그 목사님을 존경하냐는 거예요.
저의 기대는 그 자리에서 어떻게 헌신하는 모습을 봤기 때문에 존경할까 였어요.
근데 일관된 답이 이겁니다. 교수님 우리 아버지가 뭘 해줘서 존경하는 게 아니라 우리 아버지이기 때문에 저는 존경합니다예요.
이게 제 가슴속에서 정말로 이 울림이 떠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이 뭘 해줘서 감사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진짜 감사해 보신 적 있으세요?


진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감사하는 언어를 익혀야 되니까 예배 때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우리의 가슴 깊이 주어질 수 있도록 고백하는 거예요.
연약합니다. 왜 우리가 연약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이걸 왜 고백하죠? 내가 뭘 잘못했나요? 우리가 애써서 순전하게 신앙을 갖고 있는데 뭘 잘못했죠?
가만히 있으면 기울어져서 하나님께 다가갈 수 없는 그렇게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이야기하라는 거죠.
그리고 힘들면 힘들다라고 해야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니까 그 깊은 관계 속에서 힘들다라는 언어도 하고 간구는 잘하니까요.
이 언어의 고백들이 이루어지면 우리 가운데 주어지는 은혜가 있는데 그게 무엇이냐면 회복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에 보면 이 정직하게 연약함을 고백한 다음에 주어지는 결과가 회복인데 이 본문을 한번 보십시오.
6절에서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제가 읽습니다.

그때 그 서랍 중에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재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절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내 입에 닿았으니 내 악이 제하여졌고 내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이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를 향해 다가오셔서 거룩하심을 비추시고 우리의 내면의 모습을 정직하게 인정한 다음에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이게 예배의 가장 중요한 경험인데 회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회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고 우리 밖에서 주어집니다.
우리 스스로 회복의 가능성이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회복을 이끌어낼 수 있는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회복의 은혜를 주시겠다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마음이에요. 반드시 회복하시겠다라는 겁니다.
왜 아무리 망가져도 내가 고치겠다라는 거예요. 왜 고치고 왜 회복하실까요?
이유는 하나예요. 나는 하나님 편에서 대체 불가의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은혜예요.


내가 봐도 내가 망가져 있는데 나를 회복하시겠다고 내가 예배하는 것조차 힘든데 주님 여기 진짜 힘들게 왔는데요.
이게 무엇입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예요.
니가 아무리 망가져도 그 망가진 것보다 더 큰 게 내 회복의 은혜인데 왜 니가 너 스스로를 포기하냐 왜 니가 너 스스로를 단정하냐 왜 내가 니 스스로를 제한시키냐 나도 너를 포기하지 않았는데 이 마음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따라서 예배 때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이 회복의 은혜가 가슴 깊이 주어질 수 있는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과제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이런 회복의 은혜가 필요할까요?
그 중요한 과제가 8절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이사야서 6장을 읽을 때마다 평생에 이 8절에만 주목해 왔죠.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그렇죠 이게 어떤 맥락이냐면 예배에서의 경험을 삶에서 이끌어가야 된다라는 굉장히 중요한 소명과 연결되어져 있는데 우리가 함께 읽었지만 다시 한 번 보 보고 주목해서 한번 읽겠습니다.
대신에 제가 읽습니다. 너무나도 중요한 본문이기 때문에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시면 되고요.
제가 읽을 테니까 주의 깊게 들어보십시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고하시니 그때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이야기합니다. 나를 보내소서 무슨 말일까요?
내가 이곳에서 하나님 안에서 회복의 은혜를 경험했으니 이제 세상에서도 그 회복의 은혜를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겠다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향한 반응은 모임 안에서의 반응뿐만 아니라 삶에서의 반응이 일관되어져야 된다라는 하나님의 소명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이 예배의 시간에 이렇게 진지하게 반응하신다면 삶의 자리에서도 흔들림 없이 반응해야 된다라는 하나님의 강력한 요청입니다.
이게 없으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무시할 뿐만 아니라 외면하십니다.
그걸 아모스가 이야기했는데 그 굉장히 중요한 구절입니다.
화면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제가 설명해 드리죠. 아모세서 5장에 보면 예배와 관련된 충격적인 내용이 나옵니다.
5장 21절에 너희가 절기를 따라 성회로 모이는 것을 내가 기뻐하지 않는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주일날 이렇게 아름다운 공동체로 모여도 기뻐하지 않으신대요.
저는 괜찮아요. 하나님이 두 번째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아무리 예물을 나에게 드려도 내가 안 받겠다.
나의 땡큐지 이거예요. 내가 십일조 안 하고 감사한 거 안 해도 된다는 건가 아니잖아요.


그다음 정말로 죄송한데 우리 호산나 찬양대 너무 죄송합니다.
5장 23절에 이런 표현이 나와요. 너희가 아무리 정교한 악기로 정말로 화려한 연주를 하며 나를 찬양해도 내가 안 듣겠다.
지휘자 우리 집사님 조금 당혹스러워하시는데 어쩔 수 없어요.
하나님 말씀이에요. 왜 그런지 아세요? 딱 하나의 이유가 니가 이 모임의 자리에서 나에게 보이는 모습이 왜 삶에서 없느냐 24절 공의와 정의를 물처럼 강처럼 흐르게 할지어다예요.
이게 하나님의 당혹스러움입니다. 야 모인 자리에서는 나를 하나님으로 인정하는데, 왜 삶의 자리에서는 똑같은 얼굴빛을 비추는 나를 외면하니 뭐가 진짜냐 진짜의 모습이 뭐냐 너무 헷갈려서 니 진짜의 모습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니가 모여 사는 것도 받지 않겠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어둡지 않게 조금 괜찮은 모습으로 앉아 있다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돌아가면 자유다 이런 생각을 갖지 말라는 겁니다.


삶의 자리에서도 동일한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여전히 똑같은 모습으로 반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려면 모임의 중요성을 스스로 회피하시면 안 됩니다.
모이기를 피하는 어떤 이들의 습관을 주의하시면서 이 모임을 집중하시고 동일하게 삶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향해 신실하게 반응하며 정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기쁘시게 하는 아름다운 예배자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https://youtu.be/xNMPeEImtf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