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대원목사 설교

2026년 6월 7일 대구동신교회

마이코 2026. 6. 10. 16:18


모든 일에는 결과가 있습니다. 

결과를 뜻하는 영어 단어가 두 개 있습니다.
result 가 있고 consequence 가 있습니다.

result는 중립적인 의미에서 결과입니다.
시험 결과, 경기 결과를 말할 때 사용합니다.

이제 컨시퀀스는 무슨 책임을 져야 하는 의미에서의 결과입니다.
이제 주로 부정적인 의미에서 사용됩니다. 

모든 죄에는 결과 컨시퀀스가 있고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육체적인 죄에는 육체적인 결과가 따라오고 관계적인 죄에는 관계적인 결과가 따라옵니다.
개인적인 죄에는 개인적인 결과가 따라오고 국가적인 죄에는 국가적인 결과가 따라옵니다.
이 시대가 어둡고 암울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난 죄의 결과입니다.
오랫동안 지속된 죄의 결과입니다. 

 

어떤 사람은 과거에 했던 잘못을 그냥 덮으려고 합니다.
그냥 잊어버리고 덮으면 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부터 새롭게 시작하면 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새롭게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과거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법적인 책임이 있으면 져야 하고 관계적인 책임이 있으면 져야 합니다.
그렇게 책임을 지고 나서야 새로운 시작을 말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시대적 사명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특별한 은혜를 주셨다면 거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역사를 주관하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거기에 순종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은 실제적인 의미에서 시대적인 책임입니다.

 

오늘은 이 시대를 위해서 기도하는 사명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지금 이 시대가 어두운 데에는 이유가 있고 그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을 찢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의미에서의 시대적인 책임입니다.
시대적인 책임은 단지 열심히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 선교를 위해서 사회 정의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것만으로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시대적 책임에는 영적인 책임도 있습니다. 

그것은 이 시대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죄악에 대해서 전심으로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길에서 돌이켜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진정한 의미의 변화와 회복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세계 선교를 논할 때 복음 전도와 사회 참여가 대립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대립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함께 가야 하는 개념입니다.

 

시대적인 책임을 논할 때에도 사회 개혁과 회계 운동이 대립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도 대립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함께 가야 하는 개념입니다.
우리 사회가 변화될 수 있도록 개혁 운동을 해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이 시대의 죄를 회개하는 기도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둘 중에 하나만 강조해서는 안 됩니다. 

이 두 가지는 반드시 함께 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지난주 본문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에스라 1장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하셔서 바벨론 포로에 있던 유대인들이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고레스를 통해서 성전 재건에 필요한 모든 물품을 제공하셨습니다.
성전 건축을 지휘한 사람은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였습니다.
그 이후에 에스라가 돌아와서 영적인 각성과 부흥을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가 돌아와서 훼파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성벽 재건을 모두 다 마친 이후의 모습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완성되었고 성벽도 완공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예루살렘의 회복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감사와 기쁨으로 초막절을 지켰습니다.
수문 앞 광장에서 에스라가 모세의 율법을 낭독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은 죄를 자복하며 회개했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수문 앞 광장의 부흥이었습니다.
이것이 느헤미야 8장의 내용이었고요. 

 

오늘 본문 느헤미야 9장에서는 회개 기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의 역사를 돌아보며 자복하고 회개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 9장 16절, 17절 함께 읽겠습니다.
그들과 우리 조상들이 교만하고 목을 굳게 하여 주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거역하며 주께서 그들 가운데에서 행하신 기사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며 패역하여 스스로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종되었던 땅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나이다.

 

아멘.

여러분은 이 구절에서 어떤 부분이 다가오십니까?
얼마 전 우리가 사랑한 우상들 시리즈 설교에서 강조했던 부분이 보이십니까?
제가 빨간색으로 표현했죠. 

'목을 굳게 했다' 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상숭배를 나타내는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목이 곧은 것은 단지 거만하고 뭐 고집이 센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목이 곧은 것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성령을 거스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상숭배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그래서 우상숭배를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불순종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기보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가짜 신을 만들어서 내가 통제하겠다는 것입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순종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목을 곧게 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17절에 보니까 '주께서 그들 가운데서 행하신 기사를 기억하지 않았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목을 곧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불순종하고 패역했습니다.
그 결과 이방인의 종이 되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은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에서 반복해서 나오는 명령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역사를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을 잊지 말고 그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역사는 출애굽 사건이었습니다.
애굽에서 노예로 억압받던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날이 바로 유월절이었죠. 

하나님께서 유월절을 기념하여서 영원히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2장 14절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킬지니라 

 

아멘, 

하나님은 유월절을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고 영원히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신약에 나오는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십자가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은혜를 기념하여 영원히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예수님은 십자가의 은혜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보혈로 세운 새 언약을 기억하고 영원히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역사를 기념하고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기억할 때 우리는 올바른 태도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모든 것이 잘 되고 평안할 때에는 더더욱 그랬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쉽게 교만해지는지 모릅니다.
우리 속담에 이런 말이 있죠. 잘하면 제 탓, 못 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뭐라도 하나 잘 되면 내가 잘해서 그랬다고 생각합니다.
잘 안 된 일이 있으면 다른 사람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이기적인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셨습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나병 환자 10명이 소리를 지르면서 따라왔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말하며 따라왔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칭호가 3개 있다고 했죠. 

선생님, 선지자, 메시아가 있었습니다.
이 중에서 가장 인식이 낮은 것이 선생님이었습니다.
나병 환자들은 예수님을 선생님 정도로 보았습니다.
뭐라도 좋으니까 제발 좀 도와달라고 큰 소리로 외치며 따라왔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신 주님께서 그들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고침을 받은 나병 환자들은 다 사라졌습니다.
자기가 아플 때는 제발 도와달라고 소리를 지르더니 병 고침을 받으니까 다 사라졌습니다.
그중에 한 명만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예수님께 돌아왔다는 것은 예수님을 기억했다는 뜻입니다.
내가 고침을 받은 것이 우연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의 능력이었다는 것을 기억했습니다.

그는 주님께 돌아와서 주님께 경배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7장 19절 함께 읽겠습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내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아멘.

나병 환자에게는 병이 낫는 것이 제일 중요했습니다.
아 제발 이것만 해결되면 좋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9명은 병의 문제가 해결되자 다 떠나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보다 더 큰 것을 주시길 원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원한 생명 구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을 선물로 주시길 원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였습니다. 여러분 눈앞에 보이는 문제는 있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합니다.
뭐 건강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어느 부위가 아파서 치료를 받았더니 이제는 또 다른 부위가 아플 수 있죠.
재정 문제도 그렇고 자녀 문제도 그렇습니다. 

문제가 해결된 것 같으면 또 다른 문제가 찾아옵니다.

우리 인생에서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문제를 통해서 주님 앞에 나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나병 환자가 질병의 문제로 예수님을 만났듯이 우리도 여러 가지 문제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의 문제를 해결하셨듯이 또한 우리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그런데 정말로 중요한 것은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병 환자들이 돌아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에게서 고맙다는 말 듣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제가 부른 뒤 선교사로 있을 때 임산부들에게 염소를 나눠줬잖아요.
그분들에게 고맙다는 말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향한 사랑, 그들의 영혼을 향한 관심으로 그 일을 했습니다.
저에게 고맙다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서 구원받기를 바랬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나병 환자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기 원하셨습니다.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서 그들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10명 중에서 한 명만이 예수님을 기억하고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원리를 한 가지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기억하면 예수님께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면 주님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게 되고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기억하지 않으면 주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주님과 관계를 맺을 수 없게 되고 심판에 이르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님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그들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으면 그분을 떠나가게 되고 그러면 결국에는 심판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명기 8장 18절 함께 읽겠습니다. 

내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그가 내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 같이 하심은 내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아멘,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기억하면서 항상 하나님을 기억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역사를 돌아보며 하나님께 회개했습니다.
그들의 실패는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았던 죄의 결과라는 것을 고백했습니다.
그렇게 전심으로 회개하는 중에 그들은 놀라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크신 긍휼이었습니다. 

느헤미야 9장에서 반복되는 구절이 있습니다.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셨다' 라는 구절입니다.
19절, 27절, 31절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우리 31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아멘, 

이스라엘의 반역과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 거역하고 거역하고 또 거역해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향한 사랑과 자비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영원한 약속을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
평안할 때에는 하나님의 긍휼이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반역과 불순종의 때에 하나님의 긍휼이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가 얼마나 놀라운지 증거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자기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의 죄가 얼마나 악한지 깨닫고 진심으로 회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가 하면 막 다른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용서를 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 길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용서를 구합니다.
이런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진심으로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용서를 구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경우가 나옵니다.

선지자 요나의 경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앗수르 사람들을 미워했기 때문에 정반대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하나님은 지중해 가운데 큰 폭풍을 보내셨고, 배가 위험에 처하자 요나는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했습니다.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켰고,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회개를 했습니다.
이 회개는 조금 구차한 회개입니다. 

멀쩡할 때 하지 못하고 사방이 막혀서 어쩔 수 없이 한 회개였습니다.
제가 하나님이라면 이러한 회개는 받지 않을 것입니다.
돌아가서 멀쩡한 상황에서 제정신으로 있을 때 그때 회개하라고 말할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살기 위해서 한 회개는 받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너무나도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요나의 회개를 받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셨습니다.

영국의 기독교 사상가 CS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배가 이미 가라앉고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께 백기을 드는 것은 궁색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분이라면 그런 조건에서는 우리를 받아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교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낮춤으로써 정복하시는 분으로서 이제는 더 이상 붙들 것이 없기 때문에 그분께 나아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궁색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하는 회개도 하나님은 받아주십니다.
우리 같으면 진정성을 의심할 것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용서를 해 주십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의 긍휼은 크고 놀랍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회개할 수 있는 근거를 명확하게 말씀합니다.
그것은 뭐 우리의 눈물, 우리의 깨어진 마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회개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입니다.
로마서 2장 4절 함께 읽겠습니다.
혹 내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리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아멘,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회개로 인도합니다.
아버지의 집을 나온 탕자가 다시 돌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아버지의 인자하심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받아주시는 아버지의 인자하심을 믿었기 때문에 탕자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졌을 때 어떤 근거로 돌아올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을 때 어떠한 근거로 회개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변하지 않음을 믿기 때문에 돌아올 수 있습니다.
더럽고 추한 우리를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믿기 때문에 우리가 회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회개로 인도합니다.

미국의 작가 맥스 루케이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관계가 성공하는 것은 죄 있는 쪽이 벌을 받아서가 아니라 죄 없는 쪽에서 긍휼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라고 말을 했습니다.
모든 죄는 관계의 분리를 가져옵니다.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가 분리되었고, 사람과 사람 사이도 분리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고 갈등이 있는 이 이유도 죄와 이기심 때문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벌을 내릴 수가 있고 아니면 긍휼을 베풀 수가 있습니다.
죄에 대한 벌을 내리는 것은 쉬운 일이고 공의로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는 관계가 회복되지 않습니다.
잘못한 사람에게 벌을 내리면 속은 시원하겠지만 관계가 회복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벌을 내리기보다 긍휼을 베푸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의 지속적인 관계, 영원한 관계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회개하다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가 '슈브'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우리 함께 말해볼까요? 

슈브, 이 단어는 단지 뉘우치다 후회하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슈브는 내적인 감정보다 외적인 행동을 뜻합니다.
이전에 행하던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서 올바른 길로 돌아오는 것을 뜻합니다.
회개는 단지 나의 잘못을 후회하고 슬퍼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 내가 왜 그랬을까? 후회하는 것이 회개가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는 잘못된 길에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죄의 길로 가던 사람이 방향을 돌이켜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슈브의 의미입니다. 

 

말라기 3장 7절 함께 읽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 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아멘.

이 말씀은 놀라운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로 돌아오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은 돌아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그 자리에 가만히 계시면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돌아갈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돌아오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말씀은 탕자를 향해서 달려오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생각나게 합니다.
아버지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죠. 

아버지를 떠난 탕자가 잘못했습니다.
아버지는 그냥 그 자리에 가만히 계시면 됩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멀리서 돌아오는 그 탕자를 보시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겼다라고 말씀합니다.
영어로 보면 'feel with compassion'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의 마음 가운데 긍휼이 가득 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을 향해서 달려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향해 돌아오자 아버지도 아들을 향해서 돌아왔습니다.
이 아버지가 우리 하나님 아버지이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회개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의 크신 긍휼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언제든지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느헤미야 9장을 읽어보면 이 두 가지가 대비되어 있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과 신실하지 못한 이스라엘이 대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결같은 사랑으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지키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그 언약을 저버렸고 우상을 섬기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한쪽은 언약을 지켰고 한쪽은 언약을 버렸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신랑 신부가 결혼했는데 한쪽은 혼인 서약을 지켰고 한쪽은 혼인 서약을 어겼습니다.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언약을 어긴 쪽에 귀책 사유가 있습니다.
언약을 어긴 쪽이 잘못했으니까 책임을 지고 벌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언약을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신실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끝까지 신실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며 기도할 때 이스라엘 백성이 이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자신의 신실하지 못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33절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당한 모든 일에 주는 공의로우시오니 우리는 악을 행하였사오나 주께서는 진실하게 행하셨음이니이다.

 

아멘.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깨달을 때 우리에게 중요한 동기부여가 생깁니다.
그것은 기도를 향한 동기부여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신실하지 못했음을 회개하는 기도가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영국의 신학자 사무엘 체드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는 평범한 사람을 능력의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기도는 능력을 가져옵니다. 기도는 불을 가져옵니다. 기도는 생명을 가져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움직입니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평범한 사람이죠.

우리 중에서 역사를 바꿀 만한 힘과 능력과 지혜가 있는 사람 없습니다.
그런데 평범한 사람이 능력의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을까요? 

전심으로 기도할 때 그렇게 변화될 수 있습니다.
기도는 능력을 가져오고 불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생명을 가져오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4차 로잔대회를 준비하는 가운데 한국교회가 한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실무적으로 아무리 완벽하게 준비해도, 영적으로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선교대회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으시는 유기성 목사님께서 한국 교회의 회복과 영적인 각성을 위해서 기도회를 하자고 제안하셨습니다.
그래서 2023년 714 기도대성회가 시작되었습니다.
714라는 명칭은 역대야 7장 14절에서 왔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아멘.

이 말씀은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할 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서 번제물을 태웠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안에 가득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내 백성이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치겠다라고 주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솔로몬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은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이 말씀을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국가적인 위기 앞에서 이 말씀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앗수르의 공격 앞에서, 바벨론의 침입 앞에서 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이스라엘 국가가 다 사라져도 그들은 이 말씀을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서 종으로 고생하면서도 이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역대하 7장 14절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본문 느헤미야 9장에서 이 약속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재건되었고 예루살렘 성벽이 완성되었습니다.
말씀 앞에서 회개하는 회복과 부흥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로잔 대회를 앞두고 한국 교회가 이와 동일한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우리의 교만과 높아진 마음을 자백하며 기도했습니다.
우리의 분열과 반목을 회개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2024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로잔 대회를 잘 마쳤습니다.
서구 교회와 비서구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어서 선교에 헌신하는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로잔 대회 이후에 리더십이 모여서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714 기도회를 계속할 것인가? 그만 할 것인가? 함께 논의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각자 교회 사역도 많고 할 일도 엄청 많습니다.

저도 사역이 얼마나 많은데 새로운 일을 시작할 여력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가 지역과 교단을 넘어서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이 시간이 너무나 소중하다는 것에 모두가 동의했습니다.
그래서 2025년, 2026년에도 계속해서 7월에 함께 모여서 714 기도회를 하기로 했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들 중에서 작년에 있었던 714 기도회에 오셨던 분들이 계십니다.
주말에 대구에서 서울을 오가는 것이 엄청 힘든 일입니다.
그럼에도 기도회 현장에서 느꼈던 그 기쁨과 감격은 너무나도 특별했습니다.
그곳에 모인 성도들은 교회도 다르고 교단도 다르고 지역도 달랐습니다.
아무런 공통점이 없지만 딱 한 가지 중요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는 점이었습니다.


714 기도회에는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내빈 소개, 축사 권면 뭐 이런 건 없습니다.
어느 지역 대표가 왔다, 어느 교단 대표가 왔다고 소개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말씀과 기도, 말씀과 기도밖에 없습니다. 

누가 설교하는지, 누가 기도해 인도하는지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어느 모임에 가면 기독교 연합 모임에서 대표가 주목을 받고 대표가 앞장을 섭니다.
그런데 7.14 기도회는 대표가 누구인지도 잘 모릅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죠. 

이 운동을 이끄는 분들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누가 큰 교회인지, 누가 후원을 많이 하는지 내세우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뜻을 구할 뿐입니다.
한국 교회가 회복되고 새롭게 되기를 간구할 뿐입니다.
지금까지는 서울에서만 714 기도회가 있었습니다.
이 기도 운동이 전국으로 퍼져 나가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어느 지역도 선뜻 나서지 못했습니다.
아무도 나서지 않을 때 우리 대구 지역이 헌신하기로 했습니다.
대구에는 꿈나무 꿈 프로젝트를 함께 했던 교회들이 있잖아요.
동신교회, 범어교회, 성명 교회, 서현교회, 성서 중부교회가 있습니다.
이번에는 통합측 교단도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삼덕교회, 남산교회, 평강교회도 함께 합니다.
구미에 있는 구미 강동교회도 함께 합니다. 

이 기도회가 이번 주 토요일 오후 3시에 있습니다.
유기성 목사님께서 말씀을 전하시고 5명의 목사님께서 기도회를 인도합니다.
장소를 우리 교회로 했기 때문에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연합을 위해서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겸손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토요일에 있을 대구 경북 칠일사 기도회에 많이 참석하셔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한국 교회와 세계 선교를 위해서 뜨겁게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대를 위한 사명도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누가 이 시대를 위해서 기도하겠는가 하나님께서 찾으실 때 주님, 우리 교회가 이 시대를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라고 답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는 것이 모든 문제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으면 교만하게 되고 불순종과 반역을 행하게 됩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회개하고 돌아와서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원하십니다.
이 일을 위해서 깨어진 마음으로 기도할 중보 기도자를 찾고 계십니다.
우리 교회가 이 시대를 위해서 기도하는 교회가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데 귀하게 쓰임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zBGClhI06H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