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대원목사 설교

2026년 6월14일 대구동신교회

마이코 2026. 6. 21. 17:06


여러분은 얼마나 자주 걱정하고 염려하십니까? 

우리가 하는 걱정 중에서 정말 의미가 있는 걱정은 얼마나 될까요?
사람마다 걱정하는 부분이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비행기 타는 것을 무서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비행기 사고 뉴스를 보면 더더욱 그럴 것입니다. 

제가 부룬디 선교사로 있을 때 외국으로 출장을 가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혼자서 가는 출장이었는데 출국하기 직전 날 에티오피아 항공기 사고가 있었습니다.
에티오피아에서 케냐로 가는 비행기가 이륙 직후에 추락했습니다.
탑승자 157명 전원이 사망했습니다. 

제가 다음 날 타고 가는 비행기가 똑같은 항공사의 똑같은 기종이었습니다.
사고 소식을 들은 저희 딸이 절대로 그 비행기 타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사고 난 비행기와 똑같은 그 기종을 타면 어떻게 하냐고 걱정했습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니까 괜찮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말로는 그렇게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조금 떨렸습니다.
다음 날 저는 같은 항공사에 같은 기종을 타고 안전하게 여행했습니다.
2025년에 전 세계에서 운항된 항공기가 약 4800만 대라고 합니다.
그중에 99.99%의 비행기는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합니다.
이 중에서 치명적인 사고를 당한 경우는 10여 대입니다.
언론에 보도되는 것은 당연히 이 10여 대의 경우입니다.
산술적으로 계산해서 비행기 사고가 날 확률은 400만 분의 1입니다.
흔히 이제 번개에 맞을 확률이 100만 분의 1이라고 하거든요.
자연 분만으로 내 쌍둥이를 출산할 확률도 100만 분의 1입니다.
이제 거의 불가능한 일인데, 이것보다 더 희박한 확률이 이제 비행기 사고가 날 확률입니다.
우리가 걱정하는 것 중에서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 걱정을 많이 하며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34절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오.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

 

아멘.

이 말씀을 유의해서 보십시오.

내일 일을 계획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내 시험이 있는데 아무 준비도 하지 말라는 뜻 아닙니다.
미래를 대비하고 계획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미래를 위해서 저축하는 것도 전혀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은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컨트롤 할 수 없는 미래, 어떻게 될지 모르는 미래에 대해서 지금부터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하루의 수고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여러 가지 염려와 걱정을 할 때가 있습니다.
불안이 엄습해 올 때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고별 담화입니다.

요한복음 13장부터 17장까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떠나신다는 소식을 듣고 제자들은 당혹스러워했습니다.
그들은 한 명씩 돌아가면서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6절 함께 읽겠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내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아멘.

베드로가 제자를 대표해서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어디로 가십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지만 나중에 따라올 것이라고 답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도마가 질문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5절에 보니까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라고 말을 했습니다.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모르는데 그 길을 어떻게 알겠냐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얼마나 당황하고 있는지 우리가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빌립은 한 술 더 떠서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요청했습니다.
8절에 보니까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시옵소서'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답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내 아버지를 보았다' 라고 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신다는 소식을 듣고 제자들은 무척 슬퍼하고 당황했습니다.
예수님 없이 잘 살 수 있을지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예수님이 옆에 계시면 마음이 든든했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있으면 마음이 든든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있고 예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공격해도 예수님께서 멋지게 방어하시기 때문에 든든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떠나신다는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근심에 빠졌습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없이 잘 살아갈 수 있을지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인생에서 불안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할 때 우리는 불안을 경험하게 됩니다.
군대에 입대하는 청년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마음이 불안합니다.
힘든 훈련을 잘 받을 수 있는지, 혹시 사고가 나지 않을지 염려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대학원생들은 학위를 잘 마칠 수 있을지 불안해 합니다.
미국 대학에서는 박사 과정의 종합 시험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2년간 콜 수업을 마치고 논문 단계로 넘어가기 전에 큰 시험을 세 번 정도 봅니다.
저도 그 시험을 보면서 얼마나 떨렸는지 모릅니다.
제가 있던 학교에서 실제로 종합 시험에서 떨어져서 쫓겨난 학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뉴욕이나 뉴저지 다른 학교에 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중요한 시험이나 승진을 앞두고 얼마나 우리가 떨리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사실 여기에 계신 분들 내일 아침에 우리가 건강하게 일어날 수 있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예배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모든 사람에게 인생은 처음입니다. 

우리는 처음 결혼해 보고 처음 아이를 낳아봅니다.
처음 아이를 키워보고 그 아이를 결혼시켜봅니다.
처음으로 수술을 받게 되고, 처음으로 회복실에 들어가게 됩니다.
모든 사람에게 인생은 처음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불안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불안은 자연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불안의 정도가 심각해질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일상생활하는 것이 힘들 정도로 불안이 심각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불안 장애' 라고 부릅니다. 

학자들은 불안 장애의 이유를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인지적 왜곡이 있습니다. 

실제로 닥치지 않은 그 위험을 크게 과장하고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과도한 통제 욕구가 있습니다.

불확실한 상황이나 타인의 행동을 내 마음대로 통제하려는 욕구가 있습니다.

 

셋째로 과거의 부정적 경험이 있습니다. 

과거의 실패나 상처가 무의식 중에 남아서 비슷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트라우마를 일으킵니다.

 

네 번째로 완벽주의와 수치심이 있습니다. 

완벽한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데 완벽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수치심으로 인해서 심리적인 압박을 느끼게 됩니다.

 

불안의 정도가 심각해지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불안과 염려는 우리 마음의 힘을 빼앗아가기 때문입니다.
나치 포로수용소에 오랫동안 고난을 받았던 코리텐붐 여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걱정은 내일의 슬픔을 덜어주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힘을 빼앗아 간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정말 맞는 말입니다. 

걱정한다고 해서 내일의 슬픔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걱정하는 가운데 오늘을 살아갈 힘을 잃어버리게 될 뿐입니다.
성경의 인물들도 불안과 염려를 경험했을 때가 있습니다.

 

다윗은 오랜 도피 생활 가운데 고통과 탄식을 경험했습니다.
엘리아는 변화되지 않는 상황 가운데 좌절과 번아웃을 경험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사라지지 않는 육체의 가시를 안고 오랫동안 고뇌했습니다.
대단한 믿음의 위인들도 불안과 염려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동일한 경험을 하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염려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염려는 여러 가지 죄와 잘못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하는 것입니다.
염려 자체도 문제이지만 염려로 인해 파생되는 많은 결과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물질에 대한 염려가 있으면 탐욕과 부정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더 많은 돈을 얻기 위해서 부정을 저지릅니다.
성공에 대한 염려가 있으면 다른 사람을 견제하고 비방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과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와 경쟁 관계에 있다고 보고 그를 밟고 올라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관계에 대한 염려가 있으면 집착과 과잉 보호를 하게 됩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마음대로 컨트롤하고 속박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염려는 여러 가지 죄와 잘못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불안과 염려를 다루기 원하십니다.
예수님과의 헤어짐을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불안과 근심에 빠진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 함께 읽겠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아멘, 

예수님께서 평안을 우리에게 주시는데 누구의 평안을 주십니까?
나의 평안 즉 예수님의 평안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평안과 세상의 평안을 대비하고 계십니다.
세상의 평안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평화는 모든 상황이 만족스러울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돈이 많고 건강하고 자녀가 다 잘 됐습니다.

인간관계에 문제가 없고 부부 관계도 화목합니다.
일가 친척 다 형통하고, 교회도 평안하고 국가도 평안합니다.

 

여러분, 인생에서 모든 것이 평안한 때가 과연 얼마나 있었습니까?
모든 것이 완벽해서 아무 걱정 없었던 때가 얼마나 있었습니까?
인생에서 그런 시간은 거의 없습니다. 

세상에는 우리의 평안을 깨뜨리는 것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건강하게 지낼 때에는 돈이 좀 부족하죠. 

돈이 많을 때에는 자녀들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자녀들 좀 결혼시키고 좀 이제 살 만하니까 그때는 또 건강에 문제가 생깁니다.
인생에서 모든 것이 완벽한 시간은 매우 짧거나 아니면 없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이 없었던 때가 거의 없었습니다.
미국의 사회학자 엘빈 토플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1945년부터 1990년까지 2340주 동안 지구촌에 전쟁이 없었던 시기는 단 3주일 뿐이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세상의 평화는 너무나 깨어지기 쉽습니다.

인생에서 아무 문제없고 모든 것이 완벽한 시간은 매우 짧습니다.
외부의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평화는 진정한 평안이 아닙니다.
진정한 평안은 모든 상황을 초월합니다. 

눈앞의 상황이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습니다.
인간관계에서 화평할 수도 있고 갈등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마음 가운데 흔들리지 않는 안정감이 있습니다.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기 때문에 갖게 되는 확신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평안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평안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그분을 왕으로 삼으려고 해도 그분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그분을 저주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도 예수님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평안을 빼앗아 갈 수 없었습니다.
어떤 상황도 예수님의 평안을 흔들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평안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해서 이러한 평안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요한복음 1장에 보면 그 비밀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평안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8절 함께 읽겠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아멘, 

예수님은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자이십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이보다 더 아름답게 표현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완벽한 평안을 누리셨던 이유는 언제나 아버지의 품속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그분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상관없습니다.
먹을 것이 풍족하든 풍족하지 않든 상관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품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평안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평안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누리시고 주님께서 가지셨던 이 완벽한 평안을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지 우리가 예수님의 평안을 받을 수 있을까요?
바로 앞 절에 나와 있습니다. 

2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아멘.

아버지께서 보내실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성령께서 오실 때 누구의 이름으로 오십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십니다.
고대 사회에서 이름은 대표성을 갖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 어떤 문서에 누군가의 서명이 있으면 그 사람의 대표성을 가집니다.
성령께서 오시는데 그냥 오시지 않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십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대표해서 성령께서 오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그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하신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성령께서 오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분의 평안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을 보내시겠다 약속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의 평안을 주신다 하는 뜻입니다.

 

평안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평안은 어떤 수련의 결과가 아닙니다.
산에 가서 도를 닦는다고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일에 초연해진다고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성령의 역사이고 성령의 열매인 줄로 믿습니다.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에서 화평이 있죠.
화평이 바로 평안입니다. 

평안한 사람은 바로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로마서 14장 17절에 보니까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성령 안에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의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입니다.
죄로 인해 깨어졌던 그 관계가 십자가의 은혜로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회복되면 나타나는 결과가 있습니다.
바로 평강과 희락입니다. 

다른 말로 평안과 기쁨입니다.

우리 마음이 평안하고 우리 마음이 기쁜 것은 외부의 환경 때문이 아닙니다.
외부의 환경은 끊임없이 변화되기 때문이죠. 

여러분, 상황이 좋을 때도 있고 상황이 안 좋을 때도 있습니다.
언제든지 뜻하지 않는 문제가 우리에게 찾아올 수 있습니다.
인생에 문제가 없다고 해서 마음이 평안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 안에 거하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평안한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의 평안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고별 담화에서 평안을 약속하셨습니다.
죽임을 당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3일 뒤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두려워서 문을 닫고 숨어 있는 그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셨던 첫 번째 말씀이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요한복음 20장 19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멘, 

십자가를 지기 전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부활하신 이후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놀랍지 않습니까?
십자가를 지시기 이전에 부활하신 이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은 동일했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후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2절 보니까 '성령을 받으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도 놀라운 말씀이죠. 오늘 본문과 똑같습니다.
평강을 받으라 하고 또한 성령을 받으라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의 역사 없이 우리는 평강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외부의 환경에 있지 않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오직 성령 안에서 누리는 줄로 믿습니다.

아버지의 품 안에서 진정한 평안을 누리셨던 주님께서 바로 그 평안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깨어지기 쉬운 이 세상의 평안이 아니라 영원히 변하지 않는 예수님의 평안을 받아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어떤 날은 우리 믿음이 충만하다가도 또 어떤 날은 두려움과 불안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가 두려워서 믿음의 결단을 내리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믿음의 사람 다윗도 그럴 때가 있었습니다.
사울 왕에게 쫓길 때 다윗의 마음 가운데 두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블레셋으로 도망가서 블레셋 사람에게 의지해야 했습니다.
얼마나 상황이 급했으면 적군에게 가서 피한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다윗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시편 56편 3절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아멘.

여러분, 이 말씀을 유의해서 보셔야 합니다.

다윗이 '나는 주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두렵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두려울 때 나는 주님을 의지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믿음의 사람 다윗도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두려움과 불안, 그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두려움을 느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중요합니다.
다윗은 두려움을 느낄 때 주님을 의지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려움이 찾아올 때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두려움과 불안이 나를 지배하도록 방치하면 안 됩니다.
불안이 찾아올 때 선포하십시오. 

나는 주님을 의지합니다라고 선포하십시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도 동일한 고백을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7절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아멘, 

우리의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이 말은 우리에게 염려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염려가 없는데 주께 맡기라고 할 수가 없잖아요.
성경은 우리에게 염려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염려는 암세포와 같습니다.
여러분, 건강한 사람의 몸에도 매일 5천 개에서 1만 개의 암세포가 생겨난다고 하죠.
인간의 육체가 탈락했기 때문에 유전자 변이로 매일 수많은 암 세포가 생겨납니다.
하지만 우리 몸에는 면역 세포도 있습니다. 

내추럴 킬러라고 불리는 NK 세포와 t 세포가 암세포를 공격합니다.
그래서 암 세포가 확산되지 못하도록 면역 작용을 한다고 합니다.
우리 몸에 매일 암세포가 생겨나는 것처럼 우리 마음에도 매일 염려가 생겨납니다.
어제는 어제의 염려가 있고 오늘은 오늘의 염려가 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 중에서 염려가 없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면역 세포가 암세포를 없애는 것처럼 염려를 없애는 방법이 있습니다.
매일매일 생기는 새로운 그 염려를 공격해서 없애는 방법이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아멘.

우리의 염려를 없애는 것은 기도입니다.

이런 염려, 저런 염려가 생길 때 그것을 없애는 방법이 있는데 바로 기도입니다.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아뢰 때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기도는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는 방법입니다.
베드로가 너희 염려를 주께 맡기라고 했죠?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함으로 나의 염려를 주께 맡기는 것입니다.
기도는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는 시간입니다. 

사람들이 왜 금요 기폭이 옵니까?
금요일 저녁에 피곤한데 왜 기도회에 옵니까?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기 위해서입니다.

새벽 기도에 와서 기도하면 뭐가 좋습니까?

나의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기 때문에 좋습니다.
인생의 모든 짐을 내가 지는 것이 아니라 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나면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기도는 이벤트가 아닙니다.
어제 714 기도회 했으니까 이제 다음 기도회까지 쉬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매일의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는 훈련이고 몸부림입니다.
내 마음의 건강을 위해서, 내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 구별된 시간이 바로 기도의 시간입니다.

 

새벽 기도를 마치고 제가 사는 아파트에 오면 꼭 거기서 운동하시는 어르신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이제 80대 어르신께서 정말 하루도 안 빼놓고 걷기 운동을 하십니다.
이분은 왜 운동을 하실까요?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몸부림 치는 것입니다.
이렇게라도 운동하지 않으면 몸이 더 아프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영혼의 건강을 위한 몸부림입니다.
육체의 건강을 위해서 운동하는 것처럼,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 우리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이벤트가 아닙니다. 

1년에 한두 번 특별 집회, 수련회 가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매일매일 찾아오는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시간이 바로 기도의 시간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신학자 오스왈드 챔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의 돌보심에 대한 신뢰의 결핍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분에 대한 일종의 무의식적인 모욕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상당히 강한 어조이지요. 염려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학원비 걱정을 하는 자녀와 비슷할 것입니다.
저희 딸이 이제 고등학생이니까 학원에 다닙니다.
제가 부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저희 딸 학원비는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희 딸이 매달 25일이 되면 학원비 걱정을 한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이번 달 학원비는 어떻게 내나 걱정하고 있으면 아버지인 제가 기분이 나쁠 것입니다.
멀쩡히 아빠가 살아 있는데 왜 아빠가 없는 사람처럼 학원비 걱정을 하냐고 제가 뭐라고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멀쩡히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데 왜 우리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시는데, 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곁에 없는 것처럼 염려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눈앞에 보이는 문제가 그만큼 커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내 앞에 보이는 그 문제는 선명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그분의 평안으로 우리의 생각을 지켜야 합니다.
상황이 바뀌도록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생각을 지키도록 기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지금 당장 상황이 바뀌지 않을 수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때에 그분의 방법으로 가장 신실하게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 상황이 바뀌지 않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어려움과 문제에 압도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평안이 우리의 생각을 지키도록 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4장 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하나님의 평안은 모든 지각, 모든 언더스탠딩을 뛰어넘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이해를 넘어서는 진정한 평안, 온전한 평안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걱정은 내일의 슬픔을 덜어주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힘을 빼앗아 갑니다.
걱정하는 가운데 오늘을 살아갈 힘을 잃어버릴 뿐입니다.
이것을 아신 하나님께서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염려를 주님께 맡기는 시간입니다.
오늘 염려가 생기면 오늘 기도하시고, 내일 염려가 생기면 또 내일 기도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할 때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 줄로 믿습니다.
보이사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진정한 평안을 주신 예수님께 감사하며 날마다 성령 안에서 온전한 평강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3JCZRx-kf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