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대원목사 설교

2026년 5월 17일 대구동신교회(스승의 주일)

마이코 2026. 5. 17. 21:06


오늘은 스승의 주일입니다. 

우리를 사랑으로 지도해 주신 선생님께 감사하는 날입니다.
학교에도 선생님이 계시고 교회에도 선생님이 계십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 인생에서 귀한 멘토 역할을 해 주신 인생의 스승도 계십니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사랑과 지도를 받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혼자 힘으로 인생에 필요한 모든 지식과 지혜를 갖춘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고마운 스승이 있습니다. 

저에게도 고마운 스승이 여러 분 계십니다.
미국에서 저를 지도해 주셨던 교수님들이 계십니다.
석사 과정에서 지도해 주신 교수님, 박사 과정에서 지도해 주신 교수님이 계십니다.
그분들이 안 계셨다면 지금의 저는 없을 것입니다.
또한 한국에서 저를 지도해 주셨던 권성수 목사님도 계십니다.
설교에 대해서, 목회에 대해서, 생명 사역에 대해서 아주 상세하게 지도해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어떤 모습인지 직접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권성수 목사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것입니다.

 

시대가 빠르게 변하면서 스승에 대한 개념도 바뀌고 있습니다.
뭐 요즘 청년들은 굳이 스승이 필요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AI에게 물어보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정보를 다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궁금한 것이 있으면 AI에게 물어보면 됩니다.
말 그대로 무엇이든 물어보세요입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물어볼 수도 있고 현재 국제 정치에 대해서도 물어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여행 계획을 세워달라고 하면 1분 만에 근사한 일정을 짜줍니다.
AI가 모든 것을 다 해주니까 더 이상 선생님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AI 시대에는 어떠한 가르침과 멘토링이 필요할까요?
제가 AI 전문가는 아니지만 국내외 학자들의 책들을 많이 읽었습니다.
미국 대학 교수님들의 강의를 들으면서 AI의 발전 과정과 최신 동향도 공부했습니다.
오늘은 그중에서 멘토링과 관련된 부분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AI 인공지능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미 70년 전부터 인공지능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1956년 미국 다트머스 학술대회에서 인공지능이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되었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계가 언어를 사용하고 추상화와 개념을 형성하며 현재 인간의 몫으로 남겨진 문제를 해결하고 스스로를 개선하도록 만드는 방법을 찾기 위한 시도가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은 문자를 통해서 지식을 전수하고 체계화합니다.
마찬가지로 기계에게 언어를 가르쳐서 인간처럼 스스로 문제를 처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인공지능입니다.

 

학자들은 인공지능을 전기에 비유합니다. 

전기가 개발되고 상용화되면서 우리 생활과 산업 구조에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공지능이 상용화되면 우리의 생활과 산업 구조에 근본적인 변화가 나타날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학자들은 인공지능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전기의 개발로 우리의 삶은 훨씬 더 편리해졌습니다.
세탁기, 냉장고가 생겨서 훨씬 더 편리하게 살아갑니다.
세탁기 냉장고를 처음 보고 뭐 놀랄 수는 있지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공지능을 보고 뭐 놀랄 수는 있지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말합니다.
인공지능으로 우리의 삶은 더 편리해질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러한 시대적 변화 앞에서 우리의 패러다임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인공지능 시대에 중요한 것은 AI 패러다임을 익히는 것입니다.
AI 패러다임이란 AI를 잘 활용하고 AI와 더불어 살아가는 능력을 뜻합니다.
AI가 잘하는 일을 굳이 우리가 이제 할 필요가 없습니다.
비유로 설명하자면 전자 계산기가 나왔는데 굳이 주판을 고집할 이유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AI 패러다임이란 AI가 잘하는 것은 AI에게 맡기고 AI가 못하는 것을 인간이 하면 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AI가 작동하는 원리를 이해해야 하고, AI의 한계를 또한 이해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설교 후반부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미 AI를 잘 사용하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AI 활용에서 중요한 것은 올바른 질문을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AI에게 단순한 질문을 하면 단순한 답이 나옵니다.
AI에게 자세한 질문, 구체적인 질문을 하면 아주 상세한 답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질문할 수 있는 능력이 아주 중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모든 질문에는 의도와 목적, 그 질문하는 사람의 지식 수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초급자는 엉뚱한 질문을 하게 되고 전문가는 통찰력이 있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질문의 수준이 그 사람의 능력을 나타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 나아와서 질문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태복음은 이 청년을 이 사람을 청년이라고 불렀습니다.
누가복음은 이 사람을 관리라고 불렀습니다. 

공통적으로 이 사람은 재물이 많다고 이야기합니다.
종합해서 보면 이 사람은 청년이고 관리이고 부자입니다.
젊고 경건하고 부유한 그는 제자가 되기 위한 최고의 조건을 갖췄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마태복음 19장 16절 함께 읽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요.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까?

 

언뜻 보기에 이 질문은 평범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 질문에는 몇 가지 중요한 전제가 담겨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마태복음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바리새인도 그렇게 불렀고, 서기관도 그렇게 불렀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율법을 가르치는 율법 교사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순히 율법교사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병자를 고치셨고 귀신 들린 자를 고치셨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에게나 영적인 능력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보내신 선지자에게만 영적인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적을 본 사람은 그분을 선지자라고 불렀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과 동행했던 제자들은 예수님이 특별한 분이심을 알았습니다.

선지자 중에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종합해 보면 예수님을 부르는 칭호가 세 가지 있었습니다.
첫째는 선생님, 

둘째는 선지자, 

셋째는 그리스도였습니다.
각각의 칭호는 예수님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그 인식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이적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예수님의 신성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하는 뜻입니다.
단지 율법을 가르치는 율법 교사 정도로만 이해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그는 예수님께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지 영생을 얻습니까? 라고 질문했습니다.
이 질문에도 많은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선한 일을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공로주의 사상이 깔려 있습니다.
많은 현대인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죠.

착하게 살면 천국에 간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면 얼마나 착하게 살아야지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평생 동안 착한 일을 몇 번 해야 합니까?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서 재산의 몇 퍼센트를 기부해야 합니까?
그 기준은 누가 정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착한 일 하는 건 좋은데 나쁜 일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살다 보면 누구나 죄를 짓는데 그 죄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수많은 질문이 따라오게 됩니다.

 

이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내 힘으로 선한 일을 할 수 있다는 전제입니다.
무엇이 선한지 알려만 주면 내 힘으로 그것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죠.
이것은 인간의 본성을 선하게 보는 것입니다. 

인간의 양심과 도덕성이 올바로 작동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도덕성은 올바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주 쉬운데요.

09:26
여러분께서 시내에서 운전을 하고 있는데 사거리에서 노란 불이 켜졌습니다.
여러분은 그때 어떻게 하십니까? 

노란 불에서 멈추십니까? 아니면 그냥 지나가십니까? 

단속 카메라가 있으면 멈춥니다.
카메라가 없으면 지나갑니다. 

우리가 법을 지키는 이유는 도덕적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벌금을 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선한 일을 해야지 영생을 얻습니까? 라는 이 질문은 잘못된 질문입니다.
공로주의에 근거한 질문이고 인간의 도덕성에 근거한 질문입니다.
잘못된 전제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이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지적하셨습니다. 

1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내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부자 청년은 선한 일에 대해서 질문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만이 선하시다라고 답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근거한 대답입니다.

시편 100편 5절에 보니까 '여호와는 선하시니' 라고 말씀합니다.
부자 청년은 선한 일을 말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선한 하나님에 대해서 대답하셨습니다.
인간 스스로 선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선하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의미입니다. 

여러분 인간은 선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AI 시대를 무한 긍정의 시대로 바라봅니다.
AI가 업무를 대체하니까 이제 인간은 일을 적게 하고 인생을 즐기면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AI 로봇이 일을 다 하니까 우리는 기본 소득을 받아서 그냥 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18세기에 유행했던 유토피아 사상과 다르지 않습니다.
18세기에 과학혁명, 산업혁명, 시민 혁명이 있었습니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전환되면서 경제적으로 엄청 풍요로워졌습니다.
수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왕정을 끝내고 드디어 공화정 민주주의를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이성과 도덕성에 대한 믿음이 최고조에 이르렀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이 땅 가운데 유토피아를 세울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면 실제로 유토피아가 세워졌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산업화의 결과, 빈부 격차가 심해졌습니다.

아동 착취, 노동 착취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 결과 마르크스 사회주의 사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유럽 전체가 이념적인 갈등을 겪게 되고 심지어 세계 대전을 겪게 되었습니다.


AI가 발달하면 우리의 삶은 더 편리해질 것입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AI 기술로 인해서 사회적 갈등은 더 커질 수 있습니다.
지금 주식 시장만 봐도 기업 간의 엄청난 빈부 격차를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도덕적이지 않고 이타적이지 않습니다. 

기업이든 개인이든 자기 이익만 추구할 뿐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AI 기술이 발달한 결과 청년들의 일자리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기업에서 신입사원을 뽑지 않고 있습니다.

신입사원 뽑는 대신에 경력 사원에 AI를 붙여주면 됩니다.
그럼 AI가 신입사원보다 일을 훨씬 더 잘하고 비용은 훨씬 더 적게 듭니다.


현재 기성세대는 아무 문제없습니다. 

AI 도움받아서 일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청년의 실업 문제입니다. 

제 가까운 친척도 서울에서 명문대학을 나왔는데 취업을 못하고 있습니다.
취업 시장이 완전히 얼어붙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선하지 않습니다.
사회적인 제도적인 장치가 없으면 각자 자기 이익만 추구할 뿐입니다.
여러분, 지금 청년들에게 일할 기회가 없으면 10년, 20년 뒤에는 경력직을 구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나타날 것입니다.
사람을 키우고 인재를 키우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잘못된 전제를 가지면 잘못된 질문을 하게 됩니다.
잘못된 질문을 하게 되면 엉뚱한 답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의 이 잘못된 질문이 잘못된 전제에서 왔음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또한 현대 사회는 빨리 정답을 원하는 시대입니다.
AI에게 질문을 하고 즉시 답을 얻기 원합니다. 

물론 단순한 지식은 그렇게 해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캐나다의 수도가 어디입니까? 

캐나다의 수도는 토론토도 아니고요 밴쿠버도 아닙니다.

캐나다의 수도는 오타와입니다.
뭐 이렇게 단순한 문제는 AI에게 즉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생에는 단순하지 않은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어떤 직업을 선택할 것인가?

어떤 사람과 결혼할 것인가?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

여러분, 이런 문제는 매우 복잡한 문제입니다.
이런 질문을 AI에게 할 수 없습니다. 

AI에게 내 인생의 방향을 결정해 달라고 부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 청년은 예수님을 AI처럼 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빨리 답을 알려주시면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빨리 정답을 얻기 원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질문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0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켰사온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님 말씀하신 계명은 이미 다 알고 있고 내가 이미 다 지키고 있다고 말합니다.
십계명은 기본적인 수준이니까 그거 말고 더 어렵고 본질적인 것을 알려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보기에 따라서 상당히 거만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1절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온전하고자 할진데 가서 내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내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이 말씀에는 두 가지 명령과 두 가지 약속이 있습니다.
한글 성경에는 명령형과 미래형이 분명하지 않은데, 헬라어로 보면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이것입니다. 

첫째, 내 소유를 팔아 나누어 주라.
둘째, 나를 따르라입니다.
그에 대한 약속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내가 온전하게 될 것이다.
둘째, 하늘의 보화가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구원을 받을 것이다입니다.
이것은 부자 청년의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이었습니다.
그는 영생을 얻기를 원했고, 온전해지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두 가지를 해야 합니다. 

그의 모든 소유를 팔아야 하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성경은 여러분의 모든 재산을 팔아서 나누어주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공산주의, 사회주의 사상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명령이 아니라 이 부자 청년을 향한 특별한 개별적인 명령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이 명령을 하셨을까요? 

이 청년에게 있어서 절대 포기하지 못하는 우상은 재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재물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보다 영원한 생명보다 재물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을 아신 예수님께서 그의 마음의 중심을 찌르셨습니다.
'너가 정말로 영생을 얻기 원하느냐 영생은 선한 일을 한다고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가장 사랑해야지 얻을 수 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두 가지이지만 이것을 하나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가장 갈망하라입니다. 

세상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이렇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영생은 종교적인 행동을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이유는 하나님과 우리의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챗gpt를 만든 오픈 AI의 설립자 샘 올트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교사가 용병을 이긴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missionaries와 mercenaries의 발음이 비슷하죠.
일종의 언어 유희입니다. 

missionaries 하면 선교사이고, mercenaries 하면은 용병입니다.
용병은 돈을 받고 전투에 참여하는 사람입니다.

용병에게 돈을 안 주면 싸우지 않습니다.
용병은 돈을 위해 일하기 때문에 돈을 줘야지 싸웁니다.
반면에 선교사는 돈과 상관없이 일을 합니다. 

돈을 주지 않아도 선교사는 얼마든지 사역을 할 수 있습니다.
선교사는 돈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일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부룬디 선교사로 떠날 때 수중에 천 달러가 있었습니다.
천 달러면 지금 환율로 150만 원입니다. 

수중에 150만 원을 들고 아프리카 부룬디로 떠났습니다.
혼자가 아니라 아내와 5살 된 딸을 데리고 떠났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정말 아주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대책 없어 보이기도 하고 바보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선교사는 돈을 위해 일하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AI 최고 전문가가 말합니다. 

선교사가 용병을 이긴다라고 말을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본질적인 사명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보상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끼친다' 라는 의미입니다.
많은 사람은 이 일을 하면 나에게 무슨 유익이 돌아오는가를 계산합니다.
그런데 AI 시대에 필요한 인재는 계산적인 사람이 아니라, 본질적인 사명에 헌신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왜 그럴까요? 

AI 시대는 초연결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긴밀하게 협력을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다양한 사람과 인간관계를 맺고 다양한 협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사람이 빛을 바라는 시대입니다.


세계적인 경영학자 세스 고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의 시장에서 요구하는 사람은 더 인간적이고 더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고 더 성숙한 사람이다. 열정과 활력이 있는 사람,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사람, 우선순위를 협상할 줄 아는 사람, 불안에 떨지 않고 유용한 판단을 할 줄 아는 사람이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사람이 쓴 책 중에 '린치핀'이라는 책이 있는데요.


너무나도 훌륭한 책입니다. 

과거에는 시키는 일만 잘하면 됐습니다.
출근 시간 잘 지키고 시키는 일 잘하면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AI가 그런 일을 다 할 수 있습니다.
지금 필요한 인재는 창의적이고 예술가적인 사람입니다.
사람들과 관계를 잘 맺고 아이디어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새로운 협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일은 AI가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잘 해낸 사람이 AI 시대에 각광을 받습니다.

 

관계를 연결하고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공동의 비전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단기적인 관점, 단기적인 보상으로는 장기적인 협력을 이끌어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함께 일하는 것이 서로에게 유익하다는 본질적인 사명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선교사가 용병을 이긴다' 라는 말의 뜻입니다.

단기적인 보상으로는 사람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마음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각자 자기의 눈으로 본질적인 사명을 볼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자발적이고 장기적인 헌신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께 빠른 정답을 원했습니다. 

내가 지켜야 하는 계명 알려주면 내가 빨리 해보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빠른 정답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중요합니다.
지금은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한 시대입니다.

AI가 하는 답변이 사실인지 아닌지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AI가 거짓말 잘하는 거 아시죠?

AI 환각이라고 부릅니다.
어떻게 해서 그 답변을 얻게 됐는지 그 과정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함께 고민하고 함께 토론하고 생각할 수 있는 멘토링이 필요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전인격적인 멘토링이 필요한 시대가 바로 AI 시대입니다.
부자 청년과 같이 빠른 답을 원하는 이 시대에 나를 따르라 말씀하신 예수님처럼 인격적인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온전함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뭐 완벽한 사람이 되라는 뜻은 아닙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되어라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온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48절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아멘, 

예수님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적당한 수준이 아니라 우리가 될 수 있는 최고의 모습으로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온전함' 이라는 단어로 표현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온전함' 에 이를 수 있는 것일까요?
산에 가서 수도 생활을 하면 되는 것일까요? 

세상과 모든 관계를 끊고 금욕주의적인 삶을 살아가면 되는 것일까요?

성경은 온전함에 이르는 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13절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아멘,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지식과 감정이 하나가 되는 것을 뜻합니다.
머리로도 예수님을 알고 마음으로도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전인격적으로 예수님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온전함에 이를 수 있습니다.
단지 십계명을 지킨다고 온전함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구절 많이 암송한다고 온전함에 이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영적인 성숙은 지성, 감성, 의지를 포함하는 전인격적인 관계입니다.
예수님과 이런 전인격적인 관계, 지속적인 관계 안에 있을 때 온전함을 이룰 수 있습니다.

며칠 전 우리나라 항공기가 일본에서 위험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활주로에 착륙을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강풍이 불어서 비행기 전체가 휘청거렸습니다.
그대로 착륙했다가 아마 큰 사고가 일어날 뻔했습니다.
그때 경험이 많은 기장이 착륙을 포기하고 다시 올라갔습니다.
그대로 착륙할 것인가 아니면 다시 올라가서 곧 어라운드 할 것인가 판단하기 위해서 시간이 몇 초밖에 없었습니다.
그 몇 초 안에 올바른 선택을 내려서 많은 승객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의 생명과 관련된 결정은 기계가 내릴 수 없습니다.
그에 대한 최종 결정은 인간이 내려야 합니다. 

오랜 경험과 직관을 가진 인간이 최종적인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 정도 수준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오랜 훈련과 전인적인 멘토링이 필요합니다.
온전함에 이르기 위해서는 전 인격적인 성숙이 필요합니다.

 

단지 지식이 많은 것이 아니라 지혜를 갖추어야 합니다.
여러분, 지혜는 인격적이기 때문에 내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전에 인용했던 몽테뉴의 교관이 있죠.

'다른 사람의 지식으로 지식인이 될 수는 있지만 다른 사람의 지혜로 지혜자가 될 수는 없다' 라고 말했습니다.

 

지혜는 인격적이기 때문에 내가 지혜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지식을 지혜를 빌릴 수가 없습니다. 

학원에 가서 지혜를 배울 수가 없습니다.
지혜자가 되려면 지혜자를 만나서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와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며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 전체가 변화될 때 진정한 의미에서 지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지난달에 우리 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님 중에 마다가스카르에서 사역하시는 이재훈 선교사님이라고 계십니다.
아프리카 극빈국에서 20년 넘게 의료 선교를 감당하신 귀한 분이십니다.
마다가스카르 대통령 훈장을 받았고 서울 아산병원에서 주는 아산상도 받으신 분이십니다.
제가 20년 전에 마다가스카르로 단기 선교를 갔습니다.
신혼 때 아내와 함께 마다에 가서 6개월 정도 단기 선교사로 섬겼습니다.
그때 그 선교사님을 처음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년이 지나서 저는 동신교회 담임 목사가 되었고 선교사님을 우리 교회에서 파송하게 되어서 무척 기뻤습니다.
선교사님께는 세 자녀가 있었는데 막내 아들이 이번에 결혼한다고 합니다.
20년 전에는 7살이었는데 이제 커서 결혼을 하죠.
이 청년은 이제 미국 명문대학에서 학부를 나오고 MBA를 한 인재입니다.
실력도 좋고 신앙도 좋고 성품도 좋습니다. 

이번에 결혼을 하고 부모님 선교 사역을 돕기 위해서 마다가스카르로 간다고 합니다.
선교사 파송식 다음 날 결혼하는 자매와 저에게 인사하러 왔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선교에 헌신된 젊은 커플을 보니까 20년 전 제 생각이 났습니다.
저희 부부도 20년 전에 동일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던 기억이 났습니다.
이제 결혼하고 선교를 위해 나아가는 부부에게 사실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너무 많았습니다.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서 선교 훈련에 대해서, 선교 단체와 한국 교회와의 관계에 대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았습니다.
하지만 모두 다 할 수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누가 옆에서 알려준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AI가 정답을 알려주듯이 훌륭한 선교사가 되는 법을 알려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직접 배워야 하는 부분입니다.
아프리카 선교사로 준비되는 과정, 한국 교회, 미국 교회와 신뢰 관계를 맺는 과정, 세계를 품은 글로벌 리더로 세워지는 것은 누가 옆에서 정답을 알려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직접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부르시고 사랑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안전지대를 떠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온전함, 성숙함에 이르는 길은 인격적입니다.

여러분, 빨리 성숙하기 위한 지름길 같은 것 없습니다.
누군가를 진짜 알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AI가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침묵입니다.
AI에게 질문하면 바로 답이 나오잖아요. 

근데 우리가 답을 몰라서 힘든 건 아닙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고 있는데 나의 마음과 현실이 따라오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내 옆에 함께 있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정답을 말할 필요도 없고 위로의 말을 줄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아무 말없이 내 옆에 있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인격적인 존재만 할 수 있습니다. 

AI는 절대 이것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AI 시대에 필요한 멘토링입니다.

부자 청년은 AI를 대하듯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구원을 얻기 위한 정답을 알려주면 내가 한번 해보겠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질문이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힘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안에 들어갈 때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청년을 사랑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병행 구절인 마가복음에 나와 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21절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내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내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내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예수님은 부자 청년을 사랑하셨습니다.
그가 찾고 있는 구원을 주시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가장 갈망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말씀하십니다.

온전함에 이르는 길은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될 때 주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인 성숙을 이루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온전함에 이룰 수 있도록 그들과 함께해 주고 격려해 주는 인격적인 멘토가 되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1vuhqBghQQ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