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대원목사 설교

2026년 4월 19일 대구동신교회

마이코 2026. 4. 19. 19:50



그동안 우리가 사랑한 우상들이라는 제목으로 시리즈 설교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형상화하는 것을 금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순간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기 때문입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을 유한한 피조세계의 일부로 표현한 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성경은 우상숭배자들을 가리켜 목이 곧은 사람들이라고 말했습니다.
고집이 세고 완고해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자기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바로 우상숭배자였습니다.


각론으로 들어와서 전통이라는 우상, 권력이라는 우상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탐심이 우상이 될 수 있고, 성공이 우상이 될 수 있는 것도 살펴보았습니다.
미국의 팀 켈러 목사님은 우상을 식별하는 세 가지 방법을 제안했습니다.
첫째, 습관적으로 생각하면서 혼자 속으로 기쁨을 얻는 대상이 무엇인가 점검해 보면 됩니다.
여러분은 혼자 있을 때 아니면 잠들기 전에 무슨 생각을 많이 하십니까?
그것이 여러분 여러분이 갈망하는 우상일 수 있습니다.

 

둘째, 어떤 일 물건이나 사람에 아낌없이 돈을 사용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내 보물이 있는 곳에 내 마음이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일에 아낌없이 돈을 사용하고 있는지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로 기도가 응답되지 않고 희망이 꺾일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면 됩니다.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우리는 분노를 느낍니다.
인생이 다 끝난 것처럼 절망하기도 합니다. 

그토록 간절하게 바라고 매달리는 것이 우리의 우상일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질문을 통해서 우리가 사랑하는 우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사랑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성공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자녀를 사랑할 수도 있고, 우리의 직장이나 사업을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자녀를 사랑하고 직장을 사랑하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보다 그것을 더 사랑하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그 모든 것을 그다음으로 사랑하면 됩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것에 집착해서 그것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진정한 자유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오늘은 이번 시리즈의 마지막 설교입니다. 

우상숭배가 왜 그토록 치명적인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대구에 있는데 대구분들에게는 더더욱 마음에 다가오는 표현일 것입니다.
우상 숭배는 한마디로 배신입니다. 

가장 사랑하고 가장 믿었던 사람으로부터의 배신입니다.
이 한마디로 우상숭배가 얼마나 뼈 아픈 문제인지 설명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군가에게 배신당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 사람이 나에게 이럴 줄 몰랐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으십니까?
저도 대구에 살면서 신의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배우게 되었습니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신뢰를 쌓았으면 그것을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신뢰를 쌓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그것이 무너지는 것은 또 한순간입니다.

 

한 번 깨어진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선 이전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신의를 너무나 쉽게 져버립니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또 배신합니다. 

잘못했다고 고백하고 그다음에 또 배신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의 모습입니다. 

예레미야 2장은 아주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첫 사랑을 너무나 아름답게 그리고 있습니다.
마치 나이 든 노 부부가 옛날 추억을 떠올리는 것 같은 말씀입니다.
예레미야 2장 2절 함께 읽겠습니다. 

가서 예루살렘의 귀에 외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

 

아멘.

제가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마음에 눈물이 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첫 사랑을 기억하십니다.
청년 때의 언약과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십니다.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하나님과 동행했던 그때를 하나님은 기억하십니다.
이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지십니까? 

힘들었던 시절을 함께 보낸 그 깊은 사랑이 느껴지십니까?
결혼 생활을 오래 하신 분은 이 말씀이 다가오실 것입니다.
인생의 많은 아픔과 고통을 함께 헤쳐 온 배우자를 향한 감정입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모든 순간을 함께해 온 그 사람을 향한 감정의 사랑의 감정입니다.
저는 올해 결혼한 지 20년이 되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어르신들에 비하면 짧은 시간이지만 저에게는 그동안의 결혼 생활이 너무나 소중했습니다.
저는 20년 전 결혼식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얼마나 떨렸는지 기억합니다.
결혼식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순간은 혼인 서약 시간이었습니다.
1분도 안 되는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주례자 목사님께서 읽어주시는 서약문을 들으면서 제 평생을 떠올려 봤습니다.
건강하거나 병들거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게 되는 모든 경우에서 이 사람만을 사랑하고 섬기기로 서약했습니다.
서로 간에 서약할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서약했습니다.
지난 20년간 많은 어려움과 아픔이 있었지만 함께 그 시간을 헤쳐 왔습니다.
서로 붙잡아주고 서로 위로하고 같이 울어주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결혼식 때 했던 혼인 서약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혼인 서약을 했습니다.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고 서로를 향한 사랑과 충성을 다짐했습니다.
신실한 부부가 오래전 혼인 서약을 기억하듯이, 신실하신 하나님은 그 오래전 시내산 언약을 기억하셨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함께했던 그 모든 시간을 하나님은 기억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들을 가리켜 나의 첫 열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 2장 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위한 성물 곧 그의 소산 중 첫 열매이니 그를 삼키는 자면 모두 벌을 받아 재앙이 그들에게 닥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아멘.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위한 성물, 그의 첫 열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성물이란 거룩하게 구별되었다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거룩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셨기 때문에 거룩하게 구별되었습니다.
첫 열매 역시 마찬가지 의미입니다. 

율법에서 첫 열매는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추수 때의 첫 열매. 가축의 첫 번째 새끼는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그들을 향해서 나의 첫 열매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들,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놀라운 점은 우리에게도 동일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첫 열매라는 표현이 구약에만 나온 것이 아니라 신약에도 나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향해서 첫 열매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고보서 1장 18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아멘.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 중에 우리가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과거에 이스라엘을 택하셨듯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신약의 교회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자들, 하나님께 택하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자격과 조건을 따지지 않는 사랑입니다.
세상 모든 공동체는 자격과 조건을 따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자격과 조건을 따지지 않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수성구에 학군이 좋습니다. 

강남구, 서초구 다음으로 학군이 좋다고 하죠.
그러면 수성구의 학교에 아무나 입학할 수 있습니까?
멀리 타 지역에 사는 학생이 수성구에 입학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이 지역에 사는 사람만 입학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똑같은 아파트라 하더라도 학군에 따라서 가격이 달라집니다.
한국만 그런 거 아닙니다.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전에 미국에 살 때 길 하나를 두고 똑같은 아파트가 있었는데요.
렌트비가 천지 차이였습니다. 

공립학교의 학군이 좋으면 당연히 렌트비가 더 비쌌습니다.
이와 같이 세상 모든 공동체는 자격과 조건을 따집니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어떠한 자격과 조건을 따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 배경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착해서, 내가 능력이 많아서 택하심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택하심을 받은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자격과 조건을 따지지 않는 사랑을 받았기에 스스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자랑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착해서도 아니었고, 힘이 강해서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약속의 땅 가난을 받게 되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것은 딱 한 가지밖에 없었습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그 사랑을 기억하는 것이었습니다.
신명기 8장 13절, 14절 함께 읽겠습니다. 

또 내 소와 양이 번성하며 내 은금이 증식되며 내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내 마음이 교만하여 내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아멘.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이 해야 할 일은 한 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잊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잘 되고 모든 것이 풍요로운 상황에서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쉬운 일일까요? 어려운 일일까요?
어려운 일입니다. 

모든 것이 잘 되고 모든 것이 풍요로운 상황에서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배부르고 등 따시면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것이 타락한 인간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다윗도 그랬습니다. 

여러분 다윗이 언제 죄를 지었습니까?
광야에서 고생할 때 그랬습니까? 

치열한 전쟁 중에 죄를 지었습니까?
아닙니다. 

왕이 되어서 왕궁에서 편안하게 있을 때 그때 죄를 지었습니다.
사무엘하 11장 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이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이 구절을 읽으면 한 가지 질문이 떠오릅니다.
다윗은 왜 저녁 때 침상에서 일어났을까요? 

저녁이 되면 침상에 누워야지 왜 침상에서 일어났을까요?
성경에 안 나오지만 아마도 낮에 푹 쉬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낮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푹 자니까 밤에 잠이 안 오는 거죠.
그렇게 왕궁을 거닐다가 목욕을 하고 있는 밧세바를 발견하고 범죄하게 됩니다.

 

정신없이 치열하게 살 때는 여러분 죄를 지을 시간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평안하고 모든 것이 풍족할 때가 문제입니다.
시간이 많아지고 돈이 많아질 때가 문제입니다. 

모든 것이 풍요로워질 때 우리는 죄에 빠질 위험이 큽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성도님들이 있습니다.
누구인지 아십니까? 

아무 일도 없는데 새벽 기도회에 오셔서 기도하는 분들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그런 분들 많이 계십니다.

가정에 특별한 어려움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아픈 것도 아닙니다.
아무 일도 없지만 새벽마다 기도하러 오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분들의 신앙은 정말로 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전에 인용한 적이 있는데, 유대인 작가 아이작 싱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어려움에 처했을 때만 기도합니다. 그런데 저는 항상 어려움 가운데 있기에 항상 기도합니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아주 솔직한 고백이죠. 

평소에는 기도하지 않다가 어려움을 만날 때 기도하는 것이 부끄럽지만 우리의 모습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가 행복하고 형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형통한 가운데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은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가 항상 그분을 기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행복하게 살도록 형통을 주어야 할까요?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고난을 주어야 할까요?
정말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우리 인생에 성공과 실패가 교차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항상 성공만 한다면 아마도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입니다.
굳이 하나님 없이도 내 힘으로 성공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 힘으로 안 되는 일이 있을 때 그때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계획대로 안 되는 일이 있을 때 그때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성공과 실패가 교차하는 이유입니다.

 

가나안 땅에 풍요롭게 사는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섬기는 풍요의 신 바알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가나안을 주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가나안 사람들을 섬기는 우상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은 분노하십니다. 

오늘 본문 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싸우겠다라고 하시는데, 이것은 이제 물리적인 싸움이 아닙니다.
법적인 다툼, 법적인 소송입니다.
이스라엘의 배신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법적인 소송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시내산에서의 언약을 어긴 것에 대해서 책임을 묻겠다 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장 11절 함께 읽겠습니다. 

어느 나라가 그들의 신들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의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

 

아멘.

고대 사회 모든 민족은 자기들만의 신이 있었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라' 라는 태양신을 믿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바알' 이라는 신을 믿었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마로두크' 이라는 신을 믿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자기 신을 신실하게 믿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진짜 신은 아니었지만 고대 민족은 자기 우상에 대한 신의를 지켰습니다.
그런데 진짜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창조주이자 구원자인 여호와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가나안 땅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신데,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가나안의 신 바알을 섬겼습니다.
모든 것이 풍요로운 상황에서 더 큰 풍요를 약속하는 헛된 우상을 따라갔던 것입니다.

 

여러분 풍요와 번영은 매력적인 우상입니다. 

과거에도 매력적인 우상이었고, 지금도 매력적인 우상입니다.
지금도 풍요와 번영을 주겠다고 약속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정치인들은 이념에 따라서 온 국민이 잘 살 수 있게 해주겠다고 말합니다.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풍요롭게 살 수 있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누구의 돈으로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남발하는 것입니다. 

 

어떤 목회자들은 번영 신학에 근거해서 축복을 약속합니다.
하나님 잘 믿고 기도 열심히 하면 건강과 재물의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도 너무나 매력적인 약속입니다. 

세상에서 부자 되기 싫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번영 신학에 따르면 몸이 아픈 것은 영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힘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헌금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문제를 해결하면 놀라운 복이 임한다고 주장합니다.

 

여러분, 건강과 재물의 복을 강조하는 목회자는 조심해야 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번영을 약속하는 선지자는 거짓 선지자일 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면서 축복만을 말하는 사람은 참된 선지자가 아닙니다.
포스트 모던 사회는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잃어버린 사회입니다.
영적인 가치, 도덕적인 가치를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소비주의 사회가 되었습니다.
무언가 유행하면 모든 사람이 다 그것을 사기 원합니다.
우리의 심리를 자극하기 위해서 광고에서 자주 나오는 문구가 있습니다.
'너 빼고 다 샀어' 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샀으니까 너도 빨리 사야 한다고 말 안 합니다.
소비 심리학에서 이것을 가리켜 포모고 하죠. 

fomo는 Fear of Missing Out 의 약자입니다.
나만 흐름에서 뒤처지거나 소외될까 봐 느끼는 두려움입니다.

다른 사람이 사는 대로 빨리 나도 같이 사야 합니다.
그곳이 주식이든 코인이든 아파트든 상관없습니다.
기회를 놓치고 흐름에 뒤처져서는 안 된다는 우리의 두려움을 자극합니다.
과거 모더니즘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포스트 모더니즘은 하지만 

'나는 소비한다, 고로나는 존재한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소비가 미덕이고 소비가 취미이고, 소비가 기쁨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우리는 눈에 보이는 부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어떤 물건을 하나님보다 더 닮아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이 헛된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무엘상 12장 21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돌아서서 유익하게도 못하며 구원하지도 못하는 헛된 것을 따르지 말라. 그들은 헛되니라. 

 

아멘,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을 주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은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은 영원하지 않고 다 사라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잠시 있다 사라질 것 헛된 것을 따라가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헛된 것이 히브리어로 헤벨입니다. 

여러분 혹시 '헤벨' 이라는 단어를 기억하십니까?
성경 어디에서 이 단어가 나왔죠? 

전도서에서 나왔습니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에서 나온 단어가 '헤벨' 이었습니다.
이 단어는 첫째로 입김, 수증기, 바람을 뜻합니다.
두 번째로 공허, 허무, 덧없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생일 케이크에 있는 초를 끄면 연기가 나죠. 

그런데 잠깐 있다가 사라집니다.
불과 몇 초 만에 연기가 사라집니다. 

이것이 바로 헤벨의 의미입니다.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그 연기를 따라가면 어떻게 될까요?
어린아이들이 놀이동산에서 비눗방울을 따라가는 경우가 있죠.
비눗방울을 따라가면 잡을 수 있나요? 

어쩌다가 잡을 수 있지만 금방 사라집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우상이 비눗방울과 같습니다.
생일 케이크의 초에서 나오는 연기와 같습니다. 

그것을 잡으려고 해도 잡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상이 헛되다고 말씀합니다. 

헛된 것을 따라가면 어떻게 될까요?
헛된 것을 섬기면 어떻게 될까요? 

그와 동일한 모습이 됩니다.
헛된 것을 따라가면 헛된 모습을 가지게 됩니다. 

시편 115편에 보니까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게 된다' 고 말씀합니다.
우상을 섬기면 우상과 같은 모습이 됩니다. 

헛된 것을 따라가면 헛된 모습을 가지게 됩니다.
인간성을 잃어버리고 인격을 잃어버리고 비인간화된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 2장 13절 함께 읽겠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아멘.

이스라엘은 두 가지 악을 행하였습니다.

첫째, 생수의 근원 대신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둘째, 스스로 웅덩이를 팠는데 그것은 터진 웅덩이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자기 스스로 살아가고자 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헛된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나 아프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배신을 당하셨습니다. 

애굽에서 고통받던 그들을 구원해서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가나안의 신 바알을 섬겼습니다.
이와 똑같은 일이 신약에서도 나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배신을 당하셨습니다.
3년 동안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사랑했던 그 제자들에게 배신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셨을 때 그분과 함께했던 제자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뿔뿔이 흩어져 다 도망갔습니다. 

우리가 종교를 떠나서 인간적으로도 그렇게 하면 안 되는 배신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약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주님은 기분 좋을 때만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상황이 평안할 때만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에 보니까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끝나지 않는 사랑입니다. 

끝이 없는 사랑, 멈출 수 없는 사랑입니다.
영어 성경은 그 사랑을 언 페어링 러브라고 표현합니다.
지역하면 실패하지 않는 사랑, 다함이 없는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이사야 54장 10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산들이 떠나며 언덕들은 옮겨질지라도 나의 자비(unfailing love) 는 내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나의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아멘, 

한글 성경에는 자비라고 되어 있는데, 영어 성경에 보면 unfailing love 라고 되어 있습니다.
꺼지지 않는 사랑, 다함 없는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산이 흔들리고 언덕이 옮길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끝나지 않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그분은 원래부터 그렇게 사랑하신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지,정,의를 가지신 인격이십니다. 

우리가 인격인 것처럼 하나님도 인격이십니다.
누군가 우리를 배신하면 우리는 아픔을 느낍니다.
정말로 사랑했던 사람이 배신하면 더 큰 아픔을 느낍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 하나님을 배신하면 하나님도 아픔을 느끼십니다.
하나님께서 정말로 사랑했던 사람을 배신하면 그분은 더 큰 아픔을 느끼십니다.

 

앞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뭐라고 부르셨죠? 

나의 첫 열매라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사랑해서 따로 구별해 놓은 첫 번째 열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하면 훨씬 더 큰 상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들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난한 유학생 커플이 서로 사랑했다고 합니다.
눈앞의 현실은 너무나 힘들었지만 서로 사랑해서 결혼을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남자가 다른 한 사람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혼을 약속했던 사람보다 훨씬 더 배경이 좋은 여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여자는 의사였고, 미국의 어마어마한 부잣집 딸이었습니다.
이 남자가 어떻게 했을까요? 

결혼을 약속했던 여자를 버리고 부잣집 딸과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만일 버려진 여인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딸이 그렇게 버려졌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럴 때는 합법적으로 분노를 내도 됩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따지는 것이 정상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웃어 넘기는 것은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주셨지만 그들에게 배신을 당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까지 주셨지만 우리에게 배신을 당하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세상에는 이런 말이 있죠. 

'한 번 속으면 속인 사람이 나쁜 사람이고, 두 번 속으면 속은 사람이 바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다 약삭 른 존재입니다.

한 번 속아도 두 번은 속지 않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죠. 

제가 누군가에게 한 번 당했다면 그다음에는 기회를 주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떠실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몇 번 속으셨을까요?
여러분은 지금까지 하나님을 몇 번 배신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말해놓고 그 말을 어겼던 적이 몇 번 있으십니까?
셀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지난 주 것만 봐도 여러 번 하나님을 배신했습니다.
하나님을 속였습니다.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하면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괜히 또 잘해줬다가 또다시 상처받고 싶지 않습니다.
한 번의 배신으로 인간관계는 끝이 납니다.


하지만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을 배신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했다가 곧바로 돈을 따라갑니다.
하나님께 죄송하다고 말했다가 곧바로 성공을 따라갑니다.
권력을 갈망하고 자존심을 내세우면서 목이 곧은 사람들과 같이 고집스럽게 살아갑니다.
제가 하나님이라면 야 이제 그만하자라고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야, 너도 지치고, 나도 지치니까 우리 이제 관계를 끝내자라고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배신을 당하고 그렇게 상처를 받아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 29장 11절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아멘.

하나님은 우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기 원하십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심판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의 메시지를 주시는 이유는 심판을 받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루빨리 돌이켜서 그 심판을 받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공의를 동시에 기억하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고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공의를 강조합니다.
이 두 가지를 모두 다 기억하고 동시에 표현하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영국의 기독교 사상가 C.S. 루이스가 이 두 가지를 절묘하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공의를 멋지게 표현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 선을 이루실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분의 뜻에 순종했을 때 나타났을 선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 이 문장을 잘 보십시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은 거기에서 선을 이루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못해도, 우리가 아무리 죄를 지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 최악의 상황에서도 선을 이루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의 원래의 뜻에 순종했을 때 나타났을 선과는 같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죄와 우리의 불순종이 관여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래 가지셨던 그 최고로 아름다운 모습과는 같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완전한 사랑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고 죄를 지어도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 선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런데 그 선은 하나님의 원래의 뜻에 순종했을 때 나타났을 선과 똑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인생입니까?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순종하는 인생이 지혜로운 줄로 믿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가장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고 순종하는 인생이 지혜로운 인생입니다.
여러분 모두 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가장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헛된 우상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그 하나님 한 분만을 사랑하고 섬기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gzAdeSUvzy0